1. 새마을운동

  광복 이후 우리 지역의 건설은 광복과 6.25한국전쟁 등에 따른 사회적, 경제적인 혼란으로 건설다운 건설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들어와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추진과 새마을운동에 따라 지역의 건설이 하나 둘씩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 일기 시작한 새마을운동은 수천년 동안 변화없이 이어져 내려오던 우리 지역의 전부분을 변모시킬 정도로 우리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일대 물질적, 정신적 충격이었다.
  새마을운동이란 궁극적으로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한 조국근대화 운동이며, 잘 살기 운동이라 할 수 있으며, 국민적 자각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태동되었으며, 그 연원의 하나는 박정희를 중심으로 하여 일으킨 5·16에까지 미친다. 즉 광복 이후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가난한 국민경제를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5.16 주도세력들의 의식이 새마을운동 한 단초가 된 것으로, 마침내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에 의하여 일대 국민운동으로 점화된 것이다.
  이 운동은 농촌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으로 이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농촌부흥운동의 변천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일제 36년, 광복과 남북분단, 6·25한국전쟁 등 계속되는 역사적 시련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각자들에 의해서 농촌부흥운동은 부단하게 제창되었으며, 이들이 주창하는 일부는 부분적으로는 실행도 되었지만, 국민적 운동으로 발전시킬만한 여건이 성숙되지 못하여 그대로 무산을 거듭해 왔었다. 1950년도에 들어와서 근대적 의미의 농촌부흥운동 내지 농촌근대화 운동이 태동되었는데, 1950년에 실시한 지역사회 개발운동이 그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촌개발에 역점을 두었던 사업의 개발에 선행되어야 할 산업적 바탕이 없었음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61년 5·16 후, 우리나라는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였고, 1, 2차경제개발5개년 계획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되어 농촌의 잠재인력이 점차 도시의 산업현장으로 유출되게 됨에 따라 도시는 근대화의 초석이 되는 산업화가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촌에도 근대화를 진행시킬 수 있는 여력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비약적인 경제성장에 의하여 국민소득이 높아져 1960년도에 95달러이던 국민소득이 1970년에는 무려 252달러로 3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대외수출 또한, 무려 53배나 늘어나 세계에서 으뜸가는 수출성장율을 과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은 경제의 성장은 농촌근대화와 부흥화를 할 수 있도록 집중적인 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질 수 있게 해줌으로써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제발전 과정에서 국민들은 “하면 된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 이러한 사고 정신혁명으로 까지 승화되어 새마을운동의 만개를 위한 촉진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새마을운동이 우리 군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은 1960년대 초반에 당시 군수로 부임한 박준무 군수에 의해서 시행된 단위지역 근대화사업이 그 효시라 할 수 있는데, 그 때 당시에 사업이 이루어진 영덕읍 구미리, 천전리, 창수면 가산리 등은 그 때 완전히 면모을 일신하게 되었다.

2. 새마을운동의 전개

1) 새마을운동의 전개과정

  1970년 4월 22일 고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창·출범되어 거의 한 세대의 기간에 걸쳐 중단없이 지속되어온 새마을운동은 그 동안 많은 변화와 굴곡을 경험하면서 발전되어 왔다.
  성공과 영광만으로 충만된 것이 아니고 때로는 시행착오와 실수도 있었다. 그러나 시작에서 오늘에 이르는 전체적 맥락에서 볼 때에 이 운동은 성공적이었으며, 그 효과가 컸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매우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새마을운동을 이해하려고 하면, 우선 새마을운동의 역사가 이루어진 한 세대간의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러면 왜 새마을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우리 근대화의 정신적 뿌리가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이 운동 자체를 이해 하는데도 큰 도움이 된다.
  새마을운동의 역사를 살펴보고, 이 운동의 효과를 평가하는데 있어서는 몇가지 기준점을 두고 살펴보아야 한다. 이 때 가장 중요시되는 기준은 다음의 다섯가지이다. 첫째가 이념, 철학 및 목표, 둘째가 주체, 기능 및 역할, 셋째가 조직, 기구 및 인력, 넷째가 활동, 사업 및 재정, 다섯째가 전략, 방법 및 효과 등이다.
  물론 이들 기준의 요소들은 그 내용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어 왔으며, 그 변화의 정도와 내용에 따라 새마을운동의 전개과정도 몇 개의 단계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그 기반을 마련하던 1970∼1973년간의 기반조성단계이고, 둘째는 조직과 사업을 점차 확대하던 1974∼1976년간의 사업확산단계이며, 셋째는 새마을운동의 효과를 깊이 있게 뿌리내리던 1977∼1979년간의 효과심화단계이다. 넷째는 체제와 활동 등을 민간 주도로 재정비하였던 1980∼1989년간의 체제정비단계이고, 다섯째는 자립과 자율기반을 강화한 1990년 이후의 자율확대단계이다.
  다음의 표 <5-78>은 요소변화 기준으로 본 새마을운동의 단계화를 살펴본 것이다.

2) 새마을운동의 단계별 전개실적

(1) 기반조성단계 (1970 ∼ 1973)

  1970년 4월 22일 새마을운동이 정부 주도 아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제일 먼저 시작된 사업이 전국적인 ‘마을 가꾸기’ 사업이었다. 정부는 초기의 실험적 기간에 ‘10대 가꾸기 사업’ 실시지침을 정하고, 이를 전국 시·군에 시달하고, 전국 3만 5천여개의 마을을 대상으로 마을마다 335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지원하여 마을별로 필요한 사업을 추진하도록 함으로써 먼저 생활환경개선을 통한 ‘마을 가꾸기’ 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때 마을별로 남녀 새마을지도자 각 1명씩을 선출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주민들과 함께 사업을 계획하고 추진토록 하였다.
  초기 4년 동안에 가장 큰 역점을 둔 부문은 환경개선사업과 소득증대사업, 그리고 의식

개혁사업이었는데, 환경개선사업은 마을 및 주택의 생활시설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사업으로서 마을 안길의 확장과 포장, 공동빨래터 설치, 지붕, 담장, 부엌, 변소개량 등에 그 역점을 두었다. 소득증대사업은 주로 농업소득의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사업으로서 농로확장, 농지개량, 종자개량, 품앗이 장려 등이 주가 되었으며, 의식개혁사업은 국민의 불건전한 의식과 생활방식을 개선하기 위한 것으로서 퇴폐풍조 일소, 근검절약생활 실천, 협동분위기 조성 등에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다.
  이 시기의 영덕군의 새마을사업은 새마을운동의 본격적인 출발을 위한 기반조성기라고 할 수 있으며, 1974년 이후를 자조발전기로 볼 수 있다. 1971년 새마을 가꾸기 사업에 있어서는 리동 개발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마을 숙원사업을 주민들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추진되도록 했으며 다음 10가지 사업 중에서 마을 실정에 맞도록 선정하도록 하였다.

① 마을 산 푸르게.
② 마을에 들어오는 길 넓히기.
③ 마을 앞 소하천 뚝 보수와 바로잡기.
④ 퇴비장 만들기.
⑤ 소류지 모래 파내기.
⑥ 관정을 관리하며 보수하기.
⑦ 마을 청소와 하수구 파내기.
⑧ 공동우물 및 빨래터 만들기.
⑨ 마을문고 설치 및 어린이 놀이터 만들기.
⑩ 쥐 없는 마을 만들기.

  이러한 사업추진은 환경개선, 정신계발, 생산소득 증대운동으로 단계적인 발전과 성취가 되도록 지도 전개하도록 했으며, 이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의 기반이 다져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런 과정에서 새마을운동은 더욱 내실화, 토착화를 가져 왔으며, 나아가 영속화를 시킬 수 있는 힘을 주게 되었으며, 범군민적 참여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 예로 1972년도에는 각 리동에 시맨트 50포대와 철근 7톤 식을 배정하여 마을 환경을 정비하도록 조치를 하였다.

(2) 사업확산단계 (1974 ∼ 1976)

  1974년부터 1976년까지의 3년간은 새마을운동이 우리나라의 국민운동에 있어서 그 위치를 확립하는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는 새마을운동의 이념과 활동이 농촌에서 도시로, 그리고 사무실과 생산현장인 공장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그 사업의 영역과 대상도 점차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와 지역 및 직장 단위의 새마을운동 조직과 인력이 확장되고 증가하였으며 정부의 재정적 보조와 융자지원도 늘어났던 것이다.
  또한 새마을운동에 대한 교육적 기능을 크게 강화하여 새마을지도자들의 자질과 능력을 함양하는 한편 공직자와 사회지도층 및 일반 국민에게까지 교육기회를 확대하여 새마을운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하고 국민들의 의식과 행동의 건전화를 도모하였다. 따라서 사회질서와 기강을 바로잡고 국민생활을 합리화 내지 근대화시키는데 있어서 새마을운동이 끼친 영향은 지대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있어서 새마을지도자대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를 통해 새마을지도자를 격려하고 새마을운동을 확산하는데 동기를 부여, 조장하였다.
  이 시기에 가장 큰 역점을 둔 부문은 소득증대사업과 국민의식개혁이며, 그리고 환경개선사업에 중점을 두었다. 소득증대사업은 논두렁 바로잡기, 소하천 정비, 복합영농 실시, 공동작업장 운영, 농외 소득원의 발굴 등을 통하여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도모하였는데, 이러한 사업의 결과 1973년에 375달러이던 국민1인당 평균 국민총생산이 1976년에 와서 765달러로 2배 이상 증가했던 것이다.
  1974년을 기점으로 하여 새마을운동은 기반조성기를 지나 본격적인 자조발전기로 돌입했으며 새로운 차원에서 문제점을 도출하고, 이를 바탕으로 명확하고 발전적 전환점을 구획하는 깊이 있는 실천 과제를 모색해 나가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설정된 1974년도 첫해의 기본과제가 다음과 같았다.

① 새마을 소득증대.
② 새마을 교육 및 훈련.
③ 마을 환경개선.
④ 새마을정신 계발.
⑤ 마을 협동 사업추진.

  이와 같은 기본과제에 입각하여 새마을운동이 보다 영속화되고 생활화될 수 있도록 하는 사업에 역점을 두는 한편, 모든 사업이 생산과 소득에 직결되도록 실천되게 함으로서 잘 살기 운동으로서의 내실을 갖추어 가도록 하였다. 또한 국민들에게 새마을운동을 교육의 중심 이념으로 하여 새마을 인간상을 정립하는 한편, 대대적인 농어촌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범국민적인 새마을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선도적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주민에 대한 종합적인 시범교육화 하도록 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든 것이 오직 마을 사람들의 총의에 의하여 자발적이고 자조능력에 맞도록 지도하였다.

(3) 효과심화단계 (1977∼1979)

  세번째 단계인 1977년부터 1979년까지의 3년간은 새마을운동의 효과를 한층 더 제고하고, 그 뿌리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던 시기였다. 마을 단위로 소규모 사업만을 추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인식하고 지역과 사업의 규모를 확대하여 사업의 경제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도시와 농촌을 연계시킴으로써 새마을운동의 광역화를 도모하고 도농간의 일체화를 기하고자 하였다.
  지역특성을 고려한 새마을운동의 역점사업은 농촌의 경우 소득증대와 문화·복지시설 확충이었고, 도시의 경우는 물자절약과 생산성 향상 및 노사관계 건전화하였다.
  농촌지역에서는 축산과 특용작물재배를 장려하고 농공단지 조성과 새마을공장 건설로 농외 소득을 높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취락 구조를 개선하고 문화 주택을 건립하여 농촌의 생활환경을 향상시켰다. 특히 정부의 규격자재 공급으로 주택개량을 촉진하는데 힘썼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 군의 새마을운동은 자립확대사업에 주안점을 둔 자립완성단계의 진입이라 범군민적 참여로 민족적 중흥의 기반확립 및 3대 운동, 5대 시책의 중점추진을 통하여 우리 군은 증산운동 및 근검운동, 이웃간 협동운동을 실행함에 전력을 다하여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1979년도는 새마을운동 목표를 운동의 활력화 및 경제성장에 부응하는 정신적 열성의 도모, 인정과 의리가 넘치는 풍요로운 사회건설을 이룩할 것을 중심으로 하여, 소비절약을 제2새마을운동으로 추진, 우리 경제가 다시 안정기조를 되찾고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 해에 공장새마을운동이 정착되어 본 군의 조일산업(주)이 공장새마을 우수업체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4) 체제정비단계 (1980∼1989)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말미암은 정치·사회적 혼란을 거쳐 제5공화국과 제6공화국에 이르는 80년대에 있어서의 새마을운동은 가장 어려웠던 변혁과 침체의 역경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정부 주도로 추진해 오던 70년대의 새마을운동이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간 주도체제로 전환한 시기였다.
  1980년 12월 1일 사단법인 새마을운동중앙본부가 창립되었으며 1980년 12월 13일 법률 제3269호로 공포·시행된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은 국민의 자발적 운동에 의하여 조직된 새마을운동조직을 지원·육성함으로써 새마을운동의 지속적인 추진과 향상을 도모하고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함을 그 목적으로 하여 제정되었고, 새마을운동 민간조직을 전국적 체계로 구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새마을운동은 지속되어 진입로 포장, 복합영농, 작목개선, 유통개선, 새마을금고사업, 국토공원화사업 등이 꾸준히 전개되었으며, 특히 88서울올림픽대회 시에는 질서·친절·청결이란 3대 과제로 올림픽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여 성공적 개최에 크게 기여했으며, 1인당 국민총생산도 1979년의 1,394달러에서 1989년의 4,934달러로 향상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80년대에 이루어진 제4단계의 새마을운동은 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추진체제의 전환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정부와 민간부문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으며, 다소간의 부작용과 침체현상에 직면했지만 이를 극복하여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경주했다는 사실을 대표적 특색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리하여 새로운 각오와 자세로 90년대로 들어서는 전환을 맞이했던 것이다.

(5) 자율확대단계 (1990∼현재)

  새마을운동은 90년대에 들어와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국제적인 개방화와 국내적인 지방화의 물결에 부응하는 한편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한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무질서와 비윤리적 풍조로 흐르는 사회기강을 바로 잡아야 할 시대적 과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WTO체제로의 진입, 지방자치제의 출범, 1997년부터의 외환위기 도래와 IMF체제의 시작 등은 우리에게 많은 시련과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새마을운동은 이러한 국가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활동을 적극 전개하였던 것이다.
  새마을 조직 자체로는 자율과 자립의 기반을 다지고 그 능력을 제고하는데 힘썼고 이를 위해 조직의 개편과 인력의 감축을 꾸준히 단행해 왔다. 중앙보다는 일선현장을 중시하는 사업과 활동을 지역 특성에 맞도록 선정·추진함으로써 보다 실질적 효과를 거두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