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는 고대 우시군국(于尸郡國)의 근거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해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그 역사가 오래된 고장이다. 사서(史書: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우시군국이 유린(有隣)으로 바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 부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23년(940)에 유린군을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현종 9년(1018)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고종46년(1259)에는 위사공신 박송비의 고향으로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충선왕 2년(1310)에는 영해부사영(寧海府使營)을 두었다. 또한 성종 때부터 영해는 단양(丹陽)이라 불렀으며, 오늘날도 단양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6년(1397)에 첨절제사를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 다시 도호부사를 두었으며, 이후 고종 32년(1895)에 이르러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영해부는 영해군으로 되었다. 한편 영해부에 소속이던 영양은 숙종 9년(1683)에 영양현으로 분리되어 갔으나 석보면은 계속 영해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1906년에 영양군으로 이속되어 갔다. 그리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호에 의하여 영해군이 영덕군에 합병되면서 영해면이 새로이 신설되었다.

영해면은 본래 영해부 시절의 읍내면(邑內面)과 영해군 때의 묘곡면, 그리고 북초면(北初面)의 일부가 합쳐져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읍내면의 구성은 마흘, 사진, 건달리, 대진리, 공수진, 어대, 괴시, 교동, 원동, 시문, 성내, 로하, 허문, 로상, 지동, 벌영의 17개 동이었는데, 1899년에는 마흘(을)진(磨屹(乙)津), 사진(?津), 건달(乾達), 대진(大津), 원동(元洞), 시문(柴門), 성내(城內), 로상(路上), 로하(路下), 공수진(公須津), 어대(魚臺), 괴시(槐市), 교동(校洞), 허문(墟門), 벌영(閥榮), 용산(龍山), 지동(池洞), 송계(松溪), 건리진(件里津), 갈마물(葛麻勿), 운당(??), 북천(北川), 서문(西門), 사미(思美), 제언(堤堰)의 20개의 동이 되었다.

묘곡면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23부제(府制)가 실시될때 영해부가 영해군으로 개칭되면서 생긴 면이다. 1899년의 「경상북도영해군읍지」에 의하면 묘곡면은 칠성(七星), 조항산, 원구, 묘곡, 백일(白日), 오금(梧琴), 대동(大洞)의 7개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초면도 이 당시에 신설된 면으로 「영영승람」에 의하면 이천, 각리, 월의(月宜), 항리, 사천, 신평, 용암, 대포, 송상, 송하, 휘리, 신기의 12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해면은 위의 읍내면과 묘곡면, 그리고 북초면의 일부가 합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에 새로이 생긴 면으로 괴시동(괴시, 교동, 운당, 북천, 어대), 성내동(지동, 로상, 서문, 시문, 송계, 성내, 사미, 로하, 제언, 허문), 원구동(원구, 오금), 벌영동(벌영, 갈마물), 묘곡동(묘곡, 백일), 대동(대동), 연평동(연평, 역리, 신기), 사진동(사진, 마을(흘)진, 건달), 대진동(대진, 건리진, 공수진)으로 9개 동이 되었다. 그리고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