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곡면은 조선시대 영해부의 북면으로 1895년 5월 26일 영해부가 영해군 으로 고쳐질 때 북초면(北初面)과 북이면(北二面)으로 되었다가 일제 강점 기인 1914년 3월 1일에 다시 병곡면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북면의 구성을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를 통하여 살펴보면 사천리, 항일, 이천리, 원황리, 연관리(連貫里), 하천리(霞川里), 송천상리(松川上里), 송천하리(松川下里), 연평리,휘리, 보곡리(保谷里), 거무역리, 아곡리 영동리, 병곡육리, 병곡진백석육리(柄谷津白石陸里), 백석진리, 망곡리, 지경리의 20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1899년에 발간된 「경상북도영해군읍지」에 의하면 휘리(揮里), 역리(驛里), 연평(蓮坪), 송천(松川: 송하, 송상), 하천(霞川), 사천(沙川), 용암(龍巖), 항리(項里), 각리(角里), 연관(連貫), 이천(伊川), 원황(遠黃), 아곡(牙谷), 거무역(居無役, ?溪), 보곡(保谷), 영동(榮洞: 영상,영하), 백석(白石: 백육, 백진), 망곡(網谷), 병곡(柄谷: 병육, 병진), 대포(大浦), 언곡(彦谷),월의(月宜), 범흥(梵興), 종지방(鐘芝坊), 삼읍(三邑), 명곡(椧谷), 유금(有金), 지경 (地境), 옹지곡(甕只谷), 금곡(金谷), 신답곡(新畓谷)의 31개의 리가 되었다.

북면은 다시 북초면과 북이면으로 나누어 지는데 북초면의 이천, 각리, 월의, 언곡, 항리, 사천, 용암, 신평, 원황, 대포, 송상, 송하, 휘리, 신기, 역리, 연평의 16개의 리로 되었으며, 북이면은 삼읍, 금곡, 유금, 지경, 백육, 백진, 병육(柄陸), 병진(柄津), 영상, 영하, 보곡, 거무역, 신답곡, 아곡, 옹지곡, 명곡, 범흥 등의 17개의 리로 되었다.

이후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부군면 통폐합 때에 이 두면을 합치면서 북초면의 연평과 역리, 그리고 신기르 영해면으로 이속 시키고, 북이면의 옹지곡은 평해로 이속시킨후 14개 동으로 개편하여 병곡면이라 면명을 고쳤다.

이때 새로이 생긴 동명은 송천동(송상, 송하), 거무역동(거무역, 묵계), 병곡동(병육,병진), 원황동(원황, 대포), 사천동(항리, 사천, 용암), 이천동(이천), 삼읍동(삼읍, 명곡), 아곡동(신답곡, 아곡), 금곡동(금곡, 유금, 망곡, 종지방, 지경), 신평동(신평, 하천), 백석동(백육, 백진), 휘리동(휘리), 각리동(각리, 월의, 언곡), 영동(영동, 보곡, 범흥)이다.

1988년 5월 1일에 군조례 제972호에 의거 동을 리로 개칭하였으며, 1990년 1월 3일에는 군조례 제1146호에 의해 종전의 휘리를 덕천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