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읍은 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청을 비릇한 군내의 행정· 교육· 사법· 체신 등의 공공기관들이 밀접하여 있어 자치행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영덕읍의 발족은 일제 강압기인 1914년에 조선시대의 영덕현의 읍내면(邑內面)과 중남면, 그리고 동면의 화수리가 합쳐서 새로이 생긴 읍(邑)이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영덕현의 읍내면은 우곡리, 덕천리, 곡내리(谷內里), 장기리, 남문리, 동상리, 삼구리(三丘里), 천전리, 구마리(仇麻里)의 9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읍내면의 동리는 거의 백여년 뒤에 편찬된 1899년의 「경상북도 영덕군읍지(盈德郡邑誌)」에 의하면 우곡(右谷), 덕천(德川), 내곡(內谷), 외곡(外谷), 비석(碑石), 남부(南部), 상장기(上場基), 하장기(下場基), 상남문(上南門), 하남문(下南門), 동상리(東上里) , 서상리(西上里), 삼근리(三近里), 수정(藪亭), 구마(九麻), 천전(川前)의 17개 동리가 되며 무려 8개의 동리가 늘어난다. 이러한 것은 인구의 증가에 의한 것인지 단순히 행정적 편의에 의한 것인지는 오늘날에 와서 확인할바가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 이후의 인구증가 추세로 보아 인구증가에 의한 동리의 증가로 볼수 있다. 일제시대 영덕면의 일부가 된 조선시대의 중남면의 구성을 위의 「호구총수」에 의하여 살펴보면 죽산리, 거산리, 소월천리, 지곡리, 이동리, 상·하·외직천리(上·下·外直川里), 장전동리, 눌우미리, 오포리, 구강구육· 해리(舊江口陸· 海里), 삼사랑육· 해리(三思浪陸· 海里), 피전리(皮田里)의 18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도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죽산리(竹山里), 둔리(屯里), 지곡(枝谷), 소월천(素月川), 금리(今里), 직천리(直川里), 이산리(梨山里), 장전리(長田里), 눌우미리(訥于味里), 오포리(烏浦里), 강구리(江口里), 삼시랑리(三侍郞里), 피전리(皮田里)의 13개리로 오히려 5개의 동리 명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호구총수 작성시에는 육리와 해리를 구분하여 기록한 것을 「경상북도영덕군읍지」작성시에 이들의 구분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갑오경장 이후 반상의 구분이 철페되어 육리와 해리를 구분해야 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의 동면(오보면)은 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주등리, 삼거리, 성황당리, 기곡리, 매령리, 양장리(羊腸里), 돌면리, 예진육·해리(芮津陸·海里), 노물내동·내육·해리(老勿內洞·內陸·海里), 오보육·해리(烏保陸·海里), 대탄리, 창포육·해리(菖蒲陸·海里), 당사동리(堂詞洞里), 대부육·해리(大夫陸·海里), 하저육·해리(下渚陸·海里), 임리(林里), 도라리(悼羅里), 금진육·해리(金津陸·海里), 소하육·해리(小下陸·海里)의 28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주등역, 삼거리, 성황당, 양전리, 기곡, 매령리, 돌면리, 예진리, 노물, 창포리, 대탄리, 대부리, 하저리,금진리, 오보리, 소하리, 임리, 노내동의 18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어 10개의 동리 명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육리와 해리의 구분이 없어지고 하나의지명으로 나온 것이 동리가 감소된 주요한 원인이다.

이와 같이 영덕현을 구성하고 있던 각 면들의 동리들은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다시 변경되어 읍내면은 구미(九美 : 구마), 화개(華開 : 동상리, 삼근리, 서상리), 남석(南石 : 남부,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 비석, 상장기, 하장기), 덕곡(德谷: 덕천, 내곡, 외곡), 천전(川前), 우곡(右谷 : 수정)의 6개 동으로 변경되었으며, 중남면은 남산(南山: 죽산리, 둔리, 지곡), 소월(素月 : 소월천, 금리), 상직(上直: 이산리), 하직(下直), 오포(烏浦), 화전(花田: 장전리, 눌우미리), 삼사(三思: 삼시랑리, 피전), 강구(江口), 금호(錦湖: 상검(上劍))의 9개 동으로 바뀌었다.

한편 동면은 주등, 미동, 삼거, 성황당, 기곡, 양장, 매령, 돌면, 예진, 노물, 오보, 대탄, 창포, 대부, 하저, 금진, 소하의 17개 리가 되었다.

현재 영덕읍 구성의 골격이 갖추어진 것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원할히 하고자 1914년 3월 1일에 전국의 부군면을 통폐합하여 새로이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이때 우리 지역에서도 이의 영향으로 조선조 후기까지 부(府)로 존속하던 영해가 1895년에 영해군으로 개칭되어 북부 7개 면을 통합하던 영해군과 조선시대의 영덕현으로 존속하며 남부 6개 면을 통할하다가 1895년에 영덕군으로 개칭된 영덕군에 합쳐져 새로이 영덕면,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 축산면,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의 9개 면으로 축소 통합되어 통합된 영덕군이 구성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이 구성된 통합영덕군의 1면으로써 영덕면의 구성을 살펴보면 1914년 3월 1일 통합전 영덕군 읍내면의 6개 동과 중남면의 9개 동, 동면의 화수리(華水里: 주등, 미동)가 새로이 추가되어 16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면명을 영덕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34년 4월 1일에 이르러 다시 군의 행정구역 변경으로 중남면의 소월, 상직, 하직, 오포, 화전, 삼사, 강구, 금호의 8개 동이 강구면으로 이속(移屬)되어 가고, 대신 동면(東面)인 오보면(烏保面)의 창포(菖浦), 대부(大夫), 대탄(大灘), 노물(老勿), 오보(烏保), 매정(梅亭: 매령, 성황당, 기곡, 양장), 석동(石洞: 돌면, 예진), 삼계(三溪: 삼거)등의 8개의 동을 영덕면으로 이관시켜 영덕면을 새로이 구성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영덕면의 행정구역은 크게 변경된 것이 없었으나, 1979년 8월 1일에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하여 영덕면이 영덕읍으로 지위가 승격되어 명실공히 영덕을 대표할수 있는 군 행정의 중심지로써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6월 29일에는 군조례 제1293호에 의하여 축산면 화천리를 영덕읍 화천리로 이속(移屬) 개편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95년 12월 29일에는 군조례 제1375호에 의해 덕곡리가 덕곡1·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