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의 구성
    • 현재의 면의 구성은 강구1, 2, 3, 4리, 오포1, 2, 3리, 화전1, 2리, 상직1, 2, 3리, 원직1, 2리, 금호1, 2, 3리, 금진1, 2리, 삼사리, 소월리, 하저리로 나누어 22개 행정리와 10개의 법정리, 29개의 자연부락과 115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 사무소 주소는 동해대로 4526이다. 2018년 8월 현재 면의 세대수는 3,484 세대이고, 인구는 6,607명 중 남자 3,158명, 여자 3,449명이며, 면의 면적은 36.7km²이다.
  • 인문 , 자연환경
    • 지세는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관계로 서쪽은 높고 동쪽은 경사진 지세를 가지며, 군의 젖줄인 오십천이 금호와 원직리 일대에 넓은 들을 만들면서 동해로 유입되고 있다. 또한 이 강의 하구에는 천연의 어항인 강구항이 있어 동해안 일대의 주요한 어업기지의 하나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지계는 남쪽으로 남정면과 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덕읍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달산면과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다.

      읍내를 지나는 주요 하천으로는 달산, 지품을 지나오는 오십천이 읍을 서에서 남으로 흘러 강구항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고 있으며, 덕곡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덕곡천이 삼각주 공원 앞에서 오십천 본류와 합류하여 강구항으로 흐르고 있다.

      교통으로는 면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7번 국도와 달산과 강구를 연결해주는 군도 6호가있으며, 강구와 축산, 영해를 연결하여 주는 지방도 918번인 강축도로가 강구에서 시작하고 있다. 현재 이 도로를 따라서 강구와 축산, 영해에 이르는 해안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으며, 면내의 금진과 금호리를 이어주는 농어촌 도로가 해안과 내륙을 이어주고 있어서 면내의 교통은 편리하다. 면내를 통과하는 하천으로는 약 40㎞의 길이와 유역면적이 약 30㎢인 오십천이 있다. 특히 하구에 위치한 강구항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천연항으로 오래 전부터 동해안에 있어서 어항과 군사적 요충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강구항이 현재의 형태로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1901년부터이다. 이때는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로 이에 편승한 일본인 어부들이 강구 앞바다의 풍부한 어자원을 약탈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몰려올 때이다. 이들은 강구항을 이용하기 위하여 오십천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토사들이 항내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것을 여러 차례 준설한 후 임시정박지로서 강구항을 이용하며 그들의 어업기지로 삼았으며, 이후 일제는 자국민들의 어업기지화를 위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축항을 축조하기 위한 공사를 강구항에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19년부터이다. 1919년은 3.1만세의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이 지역에도 영해를 비릇하여 전군에서 만세의거가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와중에 이해 8월에 대홍수와 태풍이 몰려와서 오십천 하류지역인 강구에서는 불어난 강물과 밀려드는 파도에 의하여 300호의 민가가 침수되어 이중에 60호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가 50여명이나 발생하는 등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대참사가 발생한 후 지역유지 및 일제의 관리들 사이에서 축항의 설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져 마침내 1927년 2월에 도사업(道事業)으로 공사비가 20만원을 투입하여 공사를 시작하여서 1930년 5월에 1차 공사를 마무리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7월에 태풍으로 1차 공사에 의하여 축조되었던 축항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다시 1931년 7월에 공사비 18만9천여원을 투입하여 제2차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3월에 2차 공사를 마무리하고는 이어 1934년 4월에는 공사비 13만원을 들여 물량장 및 계류장시설, 여타 시설들을 보완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936년 2월에 3차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강구항의 규모는 도수제인 남쪽 방파제의 길이가 255m, 북쪽 방파제 길이가 340m, 물량장 및 호안축대가 500m로 어엿한 항구의 형태를 가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여러번 증, 개축이 되어 오늘과 같은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보다 앞서 강구항은 국가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는데, 조선시대 전기(前期)인 중종(재위 1506~1544)때에 순변사 고형산이 둘레 1,490척, 높이 9척의 돌로 오포성을 쌓고는 만호진(萬戶鎭)의 본영으로 삼아 해상으로 침입하는 왜적들을 방비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시대 후기인 고종8년(1871)에는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하여 연안 일대에 척화비를 세울 때 강구항에도 이 비가 세워질 정도로 중요한 항구였다. 오늘날에도 강구항은 연안과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연간 수천톤의 수산물이 거래되고 있다. 또한 강구항을 중심으로 홍게, 고동, 명태 등을 이용한 수산물 가공공장이 여러 곳에서 가동되고 있어 지역경제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면내의 농경지로써는 비옥한 토질 덕분에 양질의 쌀 생산지로유명한 오십천 유역의 금호평(錦湖坪)과 직천평(直川坪)에서 논농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륙 산간 및 해안을 따라서 일부 밭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면내의 대체적인 경제적 기반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형태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강구면의 해안선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전복, 미역, 김 등의 해산물이 풍부하며, 육지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급격하게 깊어지는 수심으로 연안 어장이 발달하여 대소의 삼각망, 정치망 등이 연안 바다에 펼쳐져 있어 성어기에는 많은 물량의 고기를 잡아서 높은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 1987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삼사해상공원은 강구항의 아름다운 전경과 동해가 한눈에 펼쳐지는 관광명소로 이름이 높으며, 1997년 12월에 준공된 경북대종은 그 소리와 모양이 웅장하고 아름답기가 그지없어 이를 구경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파가 연중 끊이지 않고 있으며, 매년 1월 1일의 해맞이행사 때에는 수만명이 동시에 몰려 일대장관을 이룬다. 또한 1999년 11월에 개장된 삼사해상 야외공연장은 3,000여석 규모의 야외공연장으로 문화공간이 부족한 이 지역의 문화 창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