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 악(山嶽)

  조선시대 영조때의 학자인 신경준은 그의 「산경표(山經表)」에서 한반도를 이루고 있는 산맥을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러한 산맥중에 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1대간인 백두대간이라 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를 지탱하는 척추로 동해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달리며, 금강산·설악산·오대산 등의 명산을 만든 후, 태백산맥에서 그 방향을 틀어 문경새재, 추풍령을 넘어 지리산에 이르러 그 장엄한 뿌리를 놓는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祖宗)이다.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와 경상도 동부·서북부 지역을 품으며, 남으로 달리는 산맥을 낙동정맥이라 하는데, 이러한 낙동정맥은 한반도 남단에까지 이르러 한반도 남단을 가로 지르며 지나는 낙남정맥(洛南正脈)과 만나서 지리산에 이른다. 지리산에 이른 낙동정맥은 여기서 백두대간과 만나 한반도를 지탱하는 뼈대를 세우는데 그 역할을 보탠다.
  이러한 낙동정맥은 태백산에서 갈리어 나와 동해를 따라 내려오다 울진 평해에서 백암산을 높이 만들어 영덕군과 울진군의 경계를 만든 후, 군내에 들어와서는 등운산·칠보산·맹동산·국사봉·화림산·대둔산·팔각산·동대산·봉황산·해월봉 등의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영덕 일대에 펼쳐 놓으며 남으로 달려 한반도 남단까지 종주한다.
  따라서 낙동정맥이 지나가는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 군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지세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서고동저의 지형에는 긴 강이 발달하기 어려운데, 우리 군에는 동해안에서 보기 드문 40여㎞에 이르는 긴 강인 오십천이 지품면·달산면·영덕읍·강구면의 중앙부를 통과하여 흐르고 있으며, 또한 읍령과 등운산에서 발원하는 송천은 창수면과 영해면을 가로 지르며, 상대산을 감돌아 동해로 들어가고 있다.
  따라서 오십천이 만들어 주는 약 30㎢에 이르는 충적지와 군 북쪽의 울령·등운산으로부터 발원하여 동해안에서 제일 넓은 평야인 영해들(坪)을 지나 대진의 상대산 귀퉁이를 돌아 동해로 유입하는 송천이 만들어 주는 넓은 영해지역의 충적지는 군내의 질좋은 미곡생산지로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전하여 왔으며, 과거 이 지역 문화발전을 지탱하여 온 경제력의 원천이었다.
  한편 낙동정맥의 주맥(主脈)이 지나가는 창수·지품·달산 등의 산지에는 고추·담배·고랭지 채소 등의 밭농사가 크게 성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십천과 송천 주변의 사질토를 이용하여 복숭아·포도·배·사과 등의 과수농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어 군민들의 새로운 경제적 기반이 되고 있다.

1) 무둔산(蕪芚山)

  일월산의 일지맥(一支脈)이 동으로 달려 나와 등운산이 되고, 등운산의 주맥(主脈)이 동남의 두 지맥으로 나뉠 때, 남쪽의 지맥은 독경산·울령·맹동산이 되었으며, 이 지맥이 국사봉·화림산·무둔산을 타고 내려와 영덕군의 터전을 만들고는 다시 고불봉을 높이 세워, 영덕군의 군치(郡治)로 불어오는 바다 바람을 막아 주며 그 뿌리를 동해에 담근다.
  무둔산은 옛부터 영덕현을 보호하여 온 진산(鎭山)이다. 높이는 208m로 일명 미덤골, 미더미골이라 한다. 이 산은 고대로부터 영덕 현민(縣民)들의 사후세계(死後世界)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지명이 유래된 것은 풍수적으로 명산이기 때문에 이곳에다 무덤을 쓰면 후손들이 발복(發福)한다고 하여 여기에 많은 장례(葬禮)를 치르고 무덤을 썼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아마도 미덤골, 미더미골은 “무덤골”이 바뀌어 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에도 이 지역에서는 신라시대의 골호(骨壺)가 발견되고 있는 등 삼국시대 이래로부터 다수의 고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산의 중턱에는 충혼탑이 세워져 있어 6.25 한국전쟁과 그 이후에 나라를 위하여 순국하신 지역출신 향토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으며, 산자락에는 영덕군 보건소와 영덕세무서가 자리잡고 있다. 세무서 앞을 지나는 34번 국도를 건너서는 영덕군청과 대구지방검찰청 영덕지청·대구지방법원 영덕지원이 읍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또한 구한말(舊韓末)의 의병대장 신운석(申運錫) 공의 “순국추모비”도 이 산 밑의 보건소 옆에 세워져 있어 그 분의 위국충절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이 산의 서쪽 골에는 서남사가 있어 지역의 신심(信心) 깊은 불자들이 많이 찾는다. 산 아래로는 경주에서 강릉을 이어주는 7번 국도와 영덕과 안동을 이어주는 34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어 군민들에게 교통의 편리를 제공하여 준다.

2) 화림산(華林山)

  화림산은 일명 삼봉(三峰), 또는 기우제산(祈雨祭山)이라 부른다. 영덕읍 화수리와 축산면 화천리 사이에 있으며, 무둔산의 뒤편에 우뚝 서 있다.
  읍령으로부터 그 지맥이 뻗어 내려와서 이루어진 산이며 높이는 374m이다. 조선시대에 현내(縣內)의 가뭄이 심하면 영덕현에서 이 산에다 기우단(祈雨壇)을 세우고 비를 빌었다. 현에서 주관하여 비를 빌면 문득 검은 구름이 몰려와 단비를 내리게 하는 영험있는 산으로 군민들 사이에는 오늘도 신성시되고 있는 산이다.
  영덕읍쪽의 산 지맥을 따라 지품면과 접하는 영덕읍 구미리 뒷쪽으로는 드문드문 수정광석(水晶鑛石)이 나오므로 산 아래 마을을 수정동이라 하며, 산자락에는 옛날에 옥천사(玉泉寺)란 사찰이 있어 많은 신도들이 찾아들었다고 한다. 현재는 폐찰(廢刹)이 되어 사찰이 있던 자리에 기와조각과 대형 맷돌만이 남아 있다.
  산자락 밑의 구미들에는 「영덕군농업기술센터」가 1999년에 설립되어 지역 농업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영덕군 상수도 수원지가 이 산 아래의 화개리 함벽대 위에 설치되어 있어 군민들이 매일 마시는 식수의 공급원이 되고 있다.
  산 아래 곳곳에는 복숭아를 재배하는 과수원이 있어 이곳 농민들의 주요한 소득원이 되고 있으며, 영덕과 안동을 이어주는 34번 국도가 이 산의 밑으로 지나가고 있어 이 지역 일대 주민들에게 교통의 편리함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

3) 임물현(林勿峴)

  임물현은 일명 임울현(林鬱峴), 또는 황장재산(黃腸材山)이라 한다. 높이는 405m로 읍령으로부터 그 지맥이 뻗어 내린다. 본군과 영양·청송간의 경계 지역을 이루며, 군의 서북쪽에 높이 솟아 서북쪽으로부터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황장재라는 이름은 황장봉산(黃腸封山)에서 왔으며, 봉산이란 특정 산에 있는 수목의 벌채를 관수(官需) 및 궁궐의 수요를 위하여 민간에서 함부로 벌채하지 못하도록 국가에서 민간인들의 입산을 금지하는 산이다.
  황장봉산은 황장재의 생산을 목적으로 산에 사사로이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입산통제가 된 것을 말한다. 황장이란 소나무가 오래 되어 줄기의 속이 성숙해서 붉은 색을 띠게 되어 재질(材質)이 크게 향상된 것을 말한다. 『속대전좭에 의하면 영조 22년(1746)에 황장봉산이 경상도에 7개소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영덕과 안동을 이어주는 34번 국도가 이 고갯마루를 지나고 있으며, 영덕과 청송을 경계지어 주는 곳에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어 오고가는 길손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4) 무릉산(武陵山)

  무릉산은 일명 적벽봉(赤壁峰), 또는 마고산(麻姑山)이라 한다. 해월봉(海月峰)의 지맥이 내려오며 형성된 것으로 오십천의 맑은 물에 깍기운 듯한 천길 낭떠러지를 갖고 있는 산이다. 높이는 208m이다. 산 정상에는 “마고할미”가 놀았다는 명경대(明鏡臺)가 있다.
  읍을 바라보고 있는 쪽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가을이면 절벽 아래로 쭉쭉 늘어진 만초(蔓草)가 붉게 물들고, 그 아래에 흐르는 오십천의 맑은 물에 만초의 붉은 단풍이 흘러 내려가면 그 아름답기가 뛰어나다. 옛부터 「적벽추풍(赤壁秋楓)」이라 하여 영덕팔경(盈德八景) 중의 첫째로 꼽히고 있으며, 인조 16년(1638)에 영덕으로 유배(流配) 온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적벽가(赤壁歌)”가 전해지고 있다.

                          赤 壁 歌

野城逸人申夫子 宿昔一見欣相遇 爲我縣西有赤壁 其下澄江如練布
蘇仙仙去已千年 今世何人肯相顧 江上秋光方准備 江神應要俱眼睹
墺友李侯此時來 豈非天敎巾偶 烟森列爭相迎 萬隊紅裙踏筵舞
李侯性癖耽佳句 不揖無詩寧飮醋 造物不許支大厦 赤壁之遊已分付
天仙遊戱浮間 幾時乘上銀浦 晩來萬谷笙鐘 淡生活休爲我苦
門墻有徒不 媚學隨步武 擧匏相屬與子同 歸時不覺霑霜露
扶沙際相後先 仰見河漢明如素 烟火依微水西村 指點老夫家獨樹
君不見蘇仙只携洞簫客 當年不及今日趣 君不見渺渺余懷望美人
今日宛踏當年步 此地誰爲後來者 後視今如今時古

야성의 숨은 군자 신부자(申夫子)와는
지난 한 번 만남에 마음 즐거이 통했네
고을 서쪽에 적벽이 있어 그 아랜 맑은 강물이
흰 명주 풀어 놓은 듯 하다고 하네.
적벽부 읊은 시선(詩仙) 소동파 선화(仙化)한 지 이미 천년,
이제 다시 이를 돌아보게 하는 이 그 누구인가?
강 위엔 가을 빛 스며 일고, 강신(江神)은 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하는데
때맞추어 친한 벗 계하(季夏)가 동파건(東坡巾) 쓰고 오는구나.
어찌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리오
푸르게 늘어선 산들은 다투어 맞이하는 것 같고
붉게 물든 단풍은 수많은 무희들이 일어나 춤을 추는 것 같구나.
이공(李公) 계하는 아름다운 싯귀를 좋아하지만
공손한 대접이 없으면 시를 짓지 않는 법
차라리 말없이 술이나 마시세.
조물주는 우리에게 큰일을 맡기기 위해

여기 적벽 아래서 놀도록 하였지만
신선같이 놀며 보내는 덧없는 세월에
뗏목배 타고 은포(銀浦)에 오를 날 다시 오려나.
어스름 찾아 온 골짜기엔 생황(生篁)소리, 종소리 들리는데
모든 고뇌 털어버린 담담한 이 생활에 온갖 고통 벗어 던진다.
줄을 지은 제자들은 문 앞에 이어져 있고, 착한 학동들은
춤을 추며 나를 따른다.
잔 들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지만 취한 몸 돌아갈 땐
내린 이슬에 옷 젖는 줄 모르리
지팡이 부여잡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모래톱을 헤매다
문득 쳐다본 하늘, 은하수는 하얗게 부서져 내리네.
수서촌(水西村)은 연기 속, 불빛에 아른 거리는데
내 쉴 집은 저 건너 홀로이 외롭게 서있구나
그댄 소동파는 어데 두고 어찌 퉁소객만 데리고 왔나.
소동파가 적벽부 읊던 그 때, 그 흥취도 오늘 여기
이 자리 보단 못하리.
그대는 모르리라. 아득히 먼 여기서 님그리는 이 마음을…
여기 이곳, 다음에 올 이 그 누구일까, 그 분도 내가 옛날을
오늘에 보듯이 오늘을 그렇게 보아줄련지…

5) 망월봉(望月峰)

  망월봉은 일명 고불봉(高佛峰, 高不峰)이라 한다. 영덕읍 덕곡리와 우곡리, 강구면 하저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화림산의 일맥이 천천히 달려 내려와 무둔산 산자락에서 숨을 고르며 영덕군의 군치(郡治)를 닦은 후, 동으로 다시 달려 우뚝 솟은 봉우리를 만드니 이것이 곧 고불봉이다. 동해에서 떠오른 보름달이 두둥실 봉우리에 걸리면 봉우리도 둥글고, 달도 둥글다 하여 망월봉이라 하였다 한다. 높이는 207m이다.
  옛날에는 고불봉 동쪽 기슭에 망월암(望月庵)이란 암자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흔적만 남아 있다. 산 아래에는 선조 40년(1607)에 창건되었다가 광해 13년(1621)에 군의 북쪽 엄곡산 아래로 옮겨갔다가 다시 우곡리 남강에 이건되었던 남강서원이 있었다. 남강서원은 군내에서도 제일 먼저 설립된 서원으로 수백년간 학문의 보급 및 유학의 진흥에 공헌한 바가 많았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지금은 그 터전만 남아 있다.
  이 산의 서쪽 아래에는 명삼사와 숭덕사가 있으며, 영덕여고와 영덕여중도 이 산 아래에 있어 지역 여성교육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산 아래로는 경주와 강릉을 잇는 7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으며, 이 산의 북쪽 기슭에는 영덕과 하저를 이어주는 군도가 개설되어 있다.
  또한 고불봉은 경치가 아름다워 「불봉조운(佛峰朝雲)」이라 하여 영덕팔경의 하나에 들어가며, 영덕에 유배와서 고불봉 밑에 유배소를 정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해지고 있다.

峰名高不人皆怪 峰在諸峰最特然
何用孤高比雲月 用時猶得獨擎天

봉우리 이름이 고불이라
사람마다 이상하다고 하지만
봉우리는 여러 봉 중에 최고 특별나구나
어디에 쓰일려고 구름, 달 사이로 높이 솟았나
한 번 쓰일 때면, 저 홀로이 하늘을 떠받드는
기둥이 되리
(고산 윤선도의 “고불봉(高不峯)”)

6) 대궐령(大闕嶺)

  대궐령은 대둔산의 일 지맥으로부터 뻗어 나오며, 그 높이는 740m이다. 옛날 중국의 주왕인 주도(周鍍)가 이곳으로 피신하여 성을 쌓은 후, 대궐을 짓고 머물다 청송 주왕산으로 넘어 갔다 하여 대궐령이라 부른다고 한다. 주왕이 물물교환 하였던 곳을 “시루장맥”이라 하여 아직도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
  산 아래 골짜기에는 청련사(靑蓮寺)라는 신라 고찰이 있었는데, 1936년 7월 11일 갑작스런 홍수로 산사태가 일어나 절의 대부분은 흔적조차 없어졌다. 현재의 절은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에 새로이 건립한 절로 대웅전 정면에서 남으로 서면 팔각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임을 알 수 있다.
  고개 위로는 영덕과 청송을 이어주는 도로가 개설되어 있으며, 산줄기를 따라 삼국시대에 축조한 달로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7) 엄곡산(嚴谷山)

  엄(암)곡산은 화림산의 옆 지맥이 뻗어 나가 이루어진 산으로 광해 13년(1621)에 오늘의 우곡리에 세워 졌던 남강서원이 이곳에 옮겨왔던 곳이다. 남강서원은 뒷날 고불봉 밑의 우곡리로 다시 옮겨갔다.
  이 산에는 송이가 많이 나고 있으며, 드문드문 수정석이 채취되기도 하여 산 옆의 마을을 수정동이라고 한다.

8) 명동산(明童山)

  높이는 812m이다. 영양군의 석보면과 본군의 창수면·지품면에까지 그 지맥이 펼쳐져 있는 산으로 영양·영덕 지역에서 해안과 내륙을 구분하여 주는 큰 산이다. 본줄기는 읍령으로부터 뻗어 나온다.
  지품쪽으로는 옛부터 닥나무를 이용한 한지생산이 성행하였으며, 속곡 계곡을 통하여서는 고랭지 채소의 재배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죽염공장 및 생식촌(生食村)이 생겨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지기(地氣)가 조선팔도에서 최고라 하기도 하며, 이 계곡에서 나는 약초는 약효가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현재 수십 ㎞에 이르는 계곡이 잘 보존되어 있어 자연생태계의 보고가 되고 있다.

9) 대둔산(大遯山)

  대둔산은 일명 대연산(大延山), 또는 느지맥이재라고 불리며, 높이는 905m이다. 임물현에서 그 지맥이 내려오며, 이 산의 한줄기가 청송으로 뻗어가서 주왕산의 큰 줄기가 되고 있다.
  옛날에 이 산의 우거진 소나무에서 나오는 솔괭이로 먹을 만들어 상품은 나라에 납품하고 하품은 민가에서 사용하였다. 현재에도 먹을 만들던 곳이라 하여 먹방, 혹은 묵방(墨坊)이라 부르고 있다. 산등성이에는 높이 30m의 촛대바위와 커다란 동굴이 있어 임진란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하여 목숨을 구하였다고 한다.

10) 형제봉(兄弟峰)

  형제봉은 지품면 눌곡리의 앞산으로 높이는 243m이다. 동으로는 시루봉(甑峰)을 바라보고 있으며, 서로는 마고산, 남으로는 퉁소암을 벗하고 있다. 북으로는 신안리까지 그 지맥이 뻗치며, 산 아래에 조족평(鳥足坪)·신원평(新院坪)의 넓은 들이 있어 질좋은 미곡이 생산된다.

11) 모대산(帽帶山)

  모대산은 임물현에서 내려오는 지맥(枝脈)으로 일명 포도산(葡萄山)이라고 한다. 산의 형세가 사모(紗帽)와 각대(角帶)를 두르고 공손히 절을 하는 것과 같아서 모대산이라 하였다 한다. 산 아래로는 34번 국도가 지나간다.

12) 심승산(尋勝山)
  심승산은 일명 실어봉(失魚峰), 혹은 황장재라 한다.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청송·영양·영덕이 한눈에 들어오며, 그 경치가 아름다워 영덕장을 보고 청송으로 가던 장꾼들이 이 봉우리에서 휴식을 취한 후, 떠날 때는 고기 보따리를 두고 그냥 간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실어봉이라 이름을 붙였다 한다.
  34번 국도가 이 산 밑으로 지나며, 황장에서 영양 화매를 잇는 도로가 산등성이을 지나간다.

13) 문지봉(問智峰)

  문지봉은 심승산과 연결되는 산이며, 원갈래는 임물현에서 나오며, 높이는 362m이다. 지품리와 황장리를 산 아래에 두고 있다.

14) 수청산(水靑山) 

수청산은 임물현의 지맥이 내려 와 이루어진 곳으로 영덕에서 30리 거리에 있다.

15) 옥녀봉(玉女峰)

  옥녀봉은 읍령의 지맥이 내려 와 지품면 신안리 뒤로 병풍처럼 둘러친 산이며, 높이는 373m이다. 산 아래에는 지품면 소재지가 있는 신안리가 있으며, 34번 국도 및 지품과 도계를 지나 축산 대곡으로 빠져 나오는 길이 있어 조선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다.

16) 송명대(松明臺)

  송명대는 일명 솔명대라 하며, 기사리와 송천2리에 걸쳐 있다. 대둔산의 지맥에서 내려온다. 암석이 뾰족하게 늘어선 것이 우뚝 솟은 대(臺)와 같다 하여 이름이 붙었다.

17) 운장대(雲藏臺)

  운장대는 대둔산으로부터 그 지맥이 내려오며, 일명 굴바위라 부른다. 높이는 463m이다. 산의 전부가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산 정상에는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다. 바위에는 드문드문 굴이 파여 있는데,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 산 아래는 명당이 많다 하여 전국의 풍수가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름이 높은 술사(術士)가 와서 운장대를 찾고자 하였으나, 구름 속에 갇혀 있어서 찾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운장대라고 한다고 하였다.

18) 성암산(星巖山)

  성암산은 일명 별바위재 산이라고 하며, 높이는 466m이다. 대둔산에서 그 지맥이 내려오며, 영덕과 청송을 연결해주는 도로가 개통되기 전인 옛날에는 영덕과 청송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통로로 영덕의 해산물과 청송의 농산물이 이 산 고갯길을 통하여 물물교환 되었다고 한다. 산 중턱에는 그 때 당시에 개설되던 장터가 오늘까지 남아있다.  
  이 산의 줄기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달로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고대에 고구려의 세력이 청하 이남까지 진출할 때, 달로산성에 군사창고를 지어놓고 이를 저지하려는 신라와 이 산의 동남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면서 세력 다툼을 벌였다 한다.
  산 아래는 1968년에 준공한 봉산저수지가 있어 소곡(小谷)의 농업용수 공급원이 되고 있으며, 산 주위를 따라 권장수(權將帥)와 용마(龍馬)의 전설이 깃들어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19) 달노산(達老山)

  달노산은 성암산의 주맥이 뻗어 이루어진 산으로 산 주위에는 고구려 시대에 축성한 산성이 있으며, 높이는 745m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당시 흥해와 청하에 군사창고를 두었다고 하며, 둘레가 510보(步)라고 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둘레가 8,356척(尺)이라 한다. 현재에도 일부 석축이 남아 있어 그 때의 규모를 나타내어 주고 있다.

20) 팔각산(八角山)

  팔각산은 달노산의 남쪽 지맥이 뻗어 내려 이루어진 산으로 산 정상을 따라 8개의 바위 봉우리가 구름싸인 하늘을 향하여 첩첩이 솟아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었다 한다. 높이는 625m이다.
  최고 봉우리로 가는 도중의 큰 바위 밑에 돌감실(石龕)이 있는데, 그 형태가 물동이를 엎어놓은 것 같으며, 물이 여기에 고인다. 물은 돌감실을 따라 위에서부터 떨어지며, 가득찬 후에 물방울이 떨어져도 넘치는 일은 없다. 등산객들이 물을 마시면 줄어들었다가 곧 가득 찬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마고할미가 쌀 씻은 물이라고 한다.
  현재는 이 산 줄기를 따라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어 사시사철 등산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달 밝은 날에 팔각산 정상에 오르면 그림자가 동해 바다에 어른거린다고 한다.

21) 운흥산(雲興山)

  운흥산은 일명 허봉산(許鳳山)이라 하며, 지품리 남쪽에 있는 산으로 심히 높아 항상 구름이 수증기같이 산을 덮고 있으며, 산 아래에 혹 비가 내리더라도 산 위에는 비가 내리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옛날에 이 산의 산중에 오래도록 새나 참새떼가 살지 않아 사람들이 영묘(靈妙)하다 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이 산을 신성시 하였다 한다. 산록에는 안적암(安寂庵)이란 암자가 있었으나 현재는 폐찰이 되고 없다.

22) 별학산(別鶴山)

  별학산이라 함은 예전에 아름다운 푸른 소나무가 이 산 전체에 서 있어 청학이 이곳에 깃들어 살았다 하여 이름을 별학산이라 하였다 한다. 동리에서는 일명 벼락더미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산 자체가 청석(靑石)으로 이루어져 있어 돌무더기가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눌곡1리의 앞산으로 지품면 신안리와 오천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173m이다. 시루봉(甑峰)의 서쪽 지맥이 내려오는 것으로 오십천의 원류가 이 산 앞을 가로질러 흐른다. 영덕과 안동간의 34번 국도가 이 산 아래를 지나가며, 34번 국도의 확포장시 이 산의 상당부분이 깎이어 나갔으며, 외천당(畏天堂) 김종윤(金宗潤)의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다.

23) 마고산(麻姑山)

  마고산은 일명 비봉산(飛鳳山)이라 하며, 대둔산의 지맥이 내려오면서 이루어진 산이다. 높이는 397m이다. 현재의 지품면 눌곡리의 뒷산이다. 산록을 따라 산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24) 해월봉(海月峰)

  해월봉은 일명 바데산·바달기산·바들기산이라 하며, 높이는 646m이다. 북동대(北東垈)에서 그 지맥이 내려온다. 이 산에서 보면 바다에서 달이 뜬 것이 보인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전하여 오는 이야기로 동학교의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 선생이 1871년 영해 동학난을 지도하기 위하여 영양과 영해에 들릴 때 이곳에 머물렀다는데서 이런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달산면 옥산 3리에 속하며, 산 정상에는 해당화가 많이 서식한다고 한다. 옛날 이 산에 호랑이가 많아 호랑이를 잡을 틀을 놓았다는 범틀골과 옛날에 은어를 잡아 나라에 바쳤다는 직경소가 이 산 계곡에 있다.

25) 봉황산(鳳凰山)

  봉황산은 그 지맥이 해월봉에서 오며, 남정면 도천리와 구계리에 걸쳐 있으며, 높이는 271m이다. 산 이름은 옛날에 홍수가 났을 때 봉황이 산 정상에 날아 와 앉았다 하여 봉황산이라 한다고 한다. 산 아래는 구계골과 도천들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산 정상에 오르면 장사 앞바다와 장사들(長沙坪)이 한눈에 들어온다.

26) 입래산(入來山)

  입래산은 일명 들온산이라 하며, 높이는 151m이다. 오랜 옛적에 아낙네들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을 때 산이 걸어오므로 “산이 걸어온다”고 외치니 걸어오던 산이 현재의 위치에 멈추어 섰다고 하여 들온산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들온산의 의미는 이 산줄기가 오십천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 왔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보인다. 현재는 동해안 준고속화도로가 개통되면서 산허리가 잘려 나갔다. 산 정상에는 1973년에 건립한 정우정(靜友亭)이 있다.
  산 정상에서 보면 영덕팔경의 하나인 「둔호백구(屯湖白鷗)」의 아름다운 경치가 보였다 하나 현재는 호수 대신에 논이 들어 서 있어 이런 경치는 볼 수 없다.

27) 정산(鼎山)

  정산은 달산면 용평리에 있으며, 높이는 313m이다. 산 위에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으며, 가뭄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곧 반응이 있어 비가 내린다고 한다.

28) 괘방산(掛榜山)

  괘방산은 일명 나비산, 혹은 개방산이라고 한다. 전해 오기를 고려 태조 왕건이 남쪽을 정벌할 때에 이 산에 이르러 방(榜)을 내걸고 휴식을 취하였다고 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산 아래에는 강구파출소·강구초등학교·5일시장이 있으며, 7번 국도가 남북으로 지나가며, 강구와 달산간의 강산(江山)도로가 이 산 밑을 지나간다.

29) 용두산(龍頭山)

  용두산은 창수면 미곡리 서쪽에 있는 산으로 형제봉의 지맥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좭에 의하면 정상에 우물이 있는데, 홍수나 가뭄에도 물의 변동이 없다고 한다.
  민간에 전해 오기를 산 정상에 한줄기 갈대가 자라 그 길이가 하늘에 닿아 있었는데, 후에 그 갈대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우물을 들여다 보면 우물의 색이 흙탕물로 변한다고 하였다.
  조선조 초에는 우장사란 천태종의 대찰(大刹)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찰되고 없다. 우장사에 모셔져 있던 「건칠좌불상(乾漆坐佛像)」이 장육사에 모셔져 있다.

30) 형제봉(兄弟峰)

  형제봉은 신리, 신기리와 영해면 대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가 703m이다. 높고 낮은 2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형제와 같이 서 있다 하여 이름이 붙었으며, 1871년 영해동학난이 이 산 밑의 위정리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동학군이 영해부를 습격하기 전에 이 산에서 천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31) 읍령(泣嶺)

  읍령은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창수면을 경계지어 주는 고개로 높이가 527m이다. 일명 서읍령, 울티재, 울치라고 하며 독경산의 지맥에서 뻗어 나온다.
  옛날부터 영해에서 안동·서울을 이어주는 교통로였으나, 삼림이 울창하여 수십리를 지
나도 인가가 없어 옛부터 흉한 일들이 자주 발생하던 곳이었다 한다.
  산밑에는 창수원(蒼水院)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안노생(安魯生)의 “서읍령”, 손순효(孫舜孝)의 “효유문”, 권오복(權五福)의 시가 전해 오고 있다.

澗道過淸淺 峰巒向翠微 三行紅粉幷鞍歸 白日動光輝
水急征急 山從祖帳圍 離歌未已西暉 揮淚更霑衣

개울물, 맑게 흐르는 골짜기를 지나
푸른 산봉우리, 산마루 길을 따라
연지곤지 분 단장한 고운 님, 말탄 낭군님 삼행(三行) 길을 가네
산봉우리의 밝은 해는 햇살 뿌리며 서녘으로 달리는데,
산골 물은 저 멀리 떠나가는 마차 뒤를 급급히 쫓아 달리네
늘어선 산들은 떠나는 이를 위해 장막처럼 둘러 서 있고,
이별의 슬픈 노래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해는 벌써 석양이라,
다시 만날 날 아득하니, 두 볼의 눈물은 또다시 소매깃을 적시네.
                                                             (안로생의 “서읍령”)

32) 독경산(讀經山)

  독경산은 일명 독경산(獨經山)이라고 하며, 높이는 564m이다. 창수면 수리와 보림리, 백청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옛날 집희암의 성왕사(成王寺)와 보림의 오현사(烏峴寺)의 중들의 경전을 읽는 독경소리가 이 산 전체에 낭낭히 울렸다고 하여 독경산이라 하였다 한다.

33) 삼승령(三僧嶺)

  삼승령은 영양군과 창수면 경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이가 514m이다. 보림·집희암·자무기 등에 있던 절에서 스님들이 이 고개를 넘어 영양과 서울을 왕래할 때 반드시 3명의 승려가 동행하여 넘었다 하여 삼승령이라 하였다 한다.

34) 운서산(雲棲山)

  운서산은 일명 가을면산(可乙面山)이라 하며, 창수면 미곡리, 갈천리, 신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높이는 519m로 독경산의 줄기가 내려와서 이루어진 산이다. 산중에는 창건 연대 미상인 장육사가 있다. 혹 고려 말 나옹선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증거할 만한 기록은 없다. 장육사에는 “건칠좌불상”이 있다.

35) 등운산(騰雲山)

  등운산은 높이가 786m로 백암산 지맥이 뻗어내려 와 이루어진 산이다. 산세가 웅장하며, 산 곳곳에는 아름다운 절경이 있다. 조선시대 이래로 영해부를 진호(鎭護)하는 진산(鎭山)이다. 높이 810m인 칠보산을 이웃한다.
  산중에는 유금사가 있는데 신라 때에 창건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가뭄이 심하면 비를 비는 기우제단이 산 서쪽 정상에 있다.
  경상도 안렴사를 역임한 안노생이 태종 9년(1409) 6월에 영해로 귀양와서 읊은 “등운산”이란 시가 있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地軸從天北 山根揷海中 浮雲積翠幾千重 雲氣自沖瀜
古木蒼藤老 深崖白日 會當登覽(臨)最高峰 隨意倚淸風

산줄기는 하늘 북쪽에서 내려오고
산뿌리는 바다 가운데에 박혔어라
푸른 기운 머금은 뜬구름 겹겹이 쌓여
부드러운 구름 기운 저절로 흘러나오는구나
등 넝쿨 휘감은 고목은 절로 늙어가고
골짜기는 깊어, 한 낮의 햇빛도 어두운데
때 맞춰 최고봉에 올라보니
마음은 불어오는 바람따라 흘러가누나
                                    (안노생의 “등운산”)

36) 인량대산(仁良大山)

  인량대산은 일명 잉량대산(仍良大山)이라 한다. 등운산의 지맥이 내려와서 이루진 산이다. 창수면 인량리에 있다. 학이 양쪽 날개를 펼쳐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으며, 산 아래 마을을 익동(翼洞), 즉 나래골이라 하는데 곧 인량이다.
  인량은 예로부터 5대성(大姓) 8종가(宗家)가 터를 잡고 세세토록 거주한 곳으로 많은 인재들이 배출된 곳이다.}

37) 중구봉(重九峰)

  중구봉은 원구리에 있으며, 형제봉의 지맥이 내려 와서 이루어진 산이다. 9월 중양절이면 군내의 선비들이 이 산에 올라 시회(詩會)도 하고 술도 마시며 즐기던 곳이다.

38) 관어대(觀魚臺)

  관어대는 일명 상대산(上臺山)이라 하며, 망일봉에서 그 지맥이 뻗어 나온다. 괴시2리에 있다. 서쪽은 등운산을 바라보고, 남쪽은 장기곶을 바라보고 있다. 동쪽은 일망무제의 동해가 있어 이곳에 올라 서 보면 사방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경치가 뛰어나다.
  목은 이색의 “관어대부”와 점필제 김종직의 “관어대부”, 그리고 안노생의 “관어대”, 원천석의 “관어대” 시가 있으며, 그 외 허다한 시인묵객들의 시와 부가 있다.
  현재 북부 유교문화권 개발의 하나로 관어대의 정비가 계획되고 있어 이것이 완성되면 인근의 대진해수욕장과 더불어 지역의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深淵得所樂洋洋 尾莘莘短復長
我自知魚子知我 莫將同異更商量

깊은 웅덩이를 얻어 즐거워
꼬리 부딪치며 노는 고기들
작고, 큰 것이 많기도 한데
내가 고기들의 즐거움을 알고 있다거나

고기들이 내 마음을 안다거나 하는 것은
똑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이치니
다시 헤아려 생각지는 말아야겠지
                                                  (운곡 원천석의 “관어대”)

 

고기들이 내 마음을 안다거나 하는 것은
똑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는 이치니
다시 헤아려 생각지는 말아야겠지
                                                  (운곡 원천석의 “관어대”)

39) 망일봉(望日峰)

  망일봉은 일명 일봉(日峰), 매일봉이라고도 한다. 대소산에서 그 지맥이 뻗어 나오며 , 현재의 괴시리와 사진리에 걸쳐있는 산으로 높이가 152m이다.
  영해부사 고용후(高用厚)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그리고 안노생의 시가 있다.

碧海無涯鏡面澄 紫雲如輦日方昇
乾坤宣朗群陰伏 從此明輝萬國承

푸른 바다는 맑은 거울 같이 끝없이 펼쳐고야
붉은 기운속에 수레바퀴 같은 해 이제 막 떠오른다.
하늘 땅 맑아지니 모든 그림자 엎드리고
이를 따라 온 세상은 밝게 비추어지누나.
                                      (영해부사 고용후의 “망일봉”)

故國蕭蕭落葉紛 危峰一上看朝暾
日華金動連天表 潮響兵轟割地根
相國胸寬呑海嶽 書生眼大小乾坤
若使兩腋生風 汗漫飛騰萬丈雲

고향엔 쓸쓸히 낙엽이 날리겠지만
높은 봉에 한 번 올라 해돋이를 보니
금빛 햇무린 하늘가와 이어져 있고
밀려오는 물결 소린,
수레바퀴 구르는 소리처럼

땅뿌리를 쪼개누나
상국의 큰 도량은 산과 바다를 삼킬 듯 넓지만
서생은 크게 뜬눈으로 천지가 작다고 한다.
만약 겨드랑이에 날개 생겨 날 수 있다면
아득히 먼 만장 구름위로 한번 날아 보련만
                                                          (신재 주세붕의 “망일봉”)

40) 대소산(大所山)

  대소산은 축산면 축산리와 영해면 사진리와 괴시리 뒤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78m이다. 산정에는 조선시대 통신수단의 하나인 봉수대가 세워져 있었던 곳으로 남쪽으로는 영덕의 별반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광산 봉수대, 북쪽으로는 후포의 후리산 봉수대와 연결하여 비상급보를 전달하였다. 현재에는 그 유적만이 남아있다.

41) 경산(鯨山)

  경산은 축산면 상원리와 고곡리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일명 고래산이라 하며, 높이는 301m이다. 국사봉의 지맥이 뻗어 이루어진 산이다. 산정에는 집동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 올라서 보면 영해들과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한말의 의병대장 신돌석 의병장이 이 바위를 오르내리며 훈련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42) 면현(眠峴)

  면현은 일명 자부티고개라 한다. 영덕읍 화천리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로 쳐들어가는 도중, 이 고개를 넘을 때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여 말안장 위에서 졸며 넘었다고 한다. 이 때 마침 이곳에 사는 황씨라는 벼슬아치가 시원한 농주(農酒)를 한그릇 대접하자 그것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 강구의 괘방산에서 진을 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초에 이곳으로 귀양 온 안노생의 “면현”이란 시가 이런 전설이 사실임을 알려주고 있다.

東國奧龍日 三韓虎鬪時 只緣歷數在軍師 大業豈前期
和睡登南峴 輸肝獻一 風飛電掃定安危 端拱示無爲

동쪽 나라 구석진 곳에서 용이 되고자 할 땐
삼한이 범처럼 싸울 때였네
운명의 인연은 태조의 군사들에게 있었지만
전날 기약한 대업은 어쩌자고
남쪽 고개를 태평스레 졸며 넘었는가…
아마, 한잔 술 따르는 이의 충심처럼 민심이 돌아와
부는 바람이 쓸어주 듯, 번개가 청소해 주듯
평안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일세
뒷짐지고 가만히 있어도 스스로 다스려지는
왕건 태조의 교화를 여기서도 볼 수 있음이여.
                                           ( 안노생의 “면현”)

43) 송현(松峴)

  송현은 축산면 도곡 2리와 영해면 벌영리, 성내리에 걸쳐 있는 고개로 소나무가 무성했음으로 솔팃재, 망재, 또는 송현이라고 했다. 전하는 이야기로 영해부사가 부임할 때, 영해부의 사령이 기를 가지고 이 재에 올라가서 기를 꽂아 놓고, 부사의 행차가 어디쯤 온다는 것을 부에 알렸다고 하며, 부사가 이 재를 지나면 기를 눕혀 본부로 돌아왔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7년(1445) 4월 12일 조에 의하면 1436년부터 1442년에 이르는 7년 동안 송현에서 땅이 불탔다는 기록이 있다. 또 성종 14년(1483) 5월 10일 조에도 영해 남쪽 5리 되는 송현에서 땅불이 났다는 기록과 현종 15년(1674) 1월 4일 조에도 땅이 불탔다는 기록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여기서 토탄(土炭)을 채취하여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간간이 토탄이 채취되고 있다.

44) 국사봉(國祠峰)

  국사봉은 영덕읍 화천리와 지품면 옥류리, 삼화리, 축산면 대곡리, 조항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11m이다. 신라시대에 나라에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던 곳이라 한다. 사당이 있었다 하나 현재는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축산면 도곡에서 영덕읍 화수리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다.
  산중에는 권상재(權尙在)가 절벽 바위 위에 새긴 시가 있다.

中心憂愛欲能成 草疏當年惹名
聖上天聰無我達 大臣忠節有誰明
屛居田里東臨海 乃陟岡巒北拱京
父祖先阡瞻仰地 難忘魏闕祝河淸

근심과 걱정스런 마음으로
바라는 바를 이루고자
젊은 날엔 헛된 이름에 쫓아 다녔지만
임금의 사랑 나에게까지
미치지 않았네
대신들의 충절은 누군들 밝지 않으랴
동으로 바다에 접한 산골에 숨어 살아도
산 넘어 들 넘어 서울을 그린다
선조가 묻힌 땅을 보고, 또 볼 나이지만
구중궁궐의 밝은 정치 바라기 어렵네
                                  (권상재의 “국사봉”)

45) 옥산현(玉山峴)

  옥산현은 창수면 신기리에 있다. 영해부사 유한인(兪漢人)의 타루비(墮淚碑)가 세워져 있었으나, 현재는 반송정 입구에 옮겨 세워져 있다.

46) 동대산(東大(垈)山)

  동대산은 포항시 죽장면과 접하고 있는 산으로 높이는 791m이다. 산 아래는 남정면 쟁암리가 있으며, 산정에는 6.25한국전쟁 때 돌로 쌓은 진보(鎭堡)가 있다. 쟁암리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정상에 올라서면 드넓게 펼쳐져 있는 동해와 장사들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온다. 발 아래는 낙동정맥의 연봉들이 겹겹이 펼쳐져 남으로 달려가고 있어 일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주말이면 많은 등산객들이 찾아오며, 한말(韓末) 영천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父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주요 근거지로 많은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2. 해 안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의 해안은 서울을 기점으로 동해안·남해안·서해안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육지가 가라앉아 이루어진 남해안과 서해안은 침강해안(沈降海岸)으로 해안선은 수천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복잡다단하며, 갑만(岬灣)이 발달하여 대소의 어항이 즐비하다. 이에 반해 동해안은 해저가 상승하여 이루어진 융기해안(隆起海岸)으로 영일만·울산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굴곡이 없는 비교적 단조로운 해안선을 가진다.
  이러한 동해안은 남해안과 서해안과는 달리 수심이 깊고, 섬들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그렇게 많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서는 낙동정맥이 펼쳐놓은 산지들이 바로 바다 가까이 까지 내려오며, 이러한 산지들도 긴 세월 동안의 침식으로 흙보다 바위가 많아 해안선은 주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해안선은 크게 보아 단조로운 편이지만 자세히 보면 작고 완만한 굴곡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특히 해안 곳곳마다 모래사장이 발달하여 경치 좋은 해수욕장을 만들고 있어 여름에는 많은 피서객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낙동정맥의 서고동저한 지형에 따라 동해안 쪽은 급경사를 이룸으로 강과 하천의 발달은 미미한 편이다. 그리고 드물게 발달한 대·소하천도 급한 경사로 인하여 유속이 빨라 우수기에는 많은 토양을 하류로 운반하여 하류에는 대·소 규모의 충적저지(沖積低地)를 만들어 주는데, 오십천 하류의 구미·금호들과 송천 하류의 영해·병곡들은 곡창지대로 이름이 높다.
  군내의 해안의 범위는 남정면 부경리에서 병곡면 금곡리에 이르는 53㎞에 달하는 것으로 이들 해안선은 발달한 산지(山地)가 해안선까지 임박하여 있고 해안 쪽에는 해식애(海蝕崖)가 형성되어 깍아지른 낭떠러지를 만들고 있다.
  대체로 남정 부경리에서 영덕읍 창포리까지의 해안은 산의 저지로 이루어져 있어 평탄한 해안선을 가지며, 창포리를 지나 영해읍 대진리에 이르는 해안선은 가파른 해식애가 발달하여 곳곳에 바위 절벽을 이루고 있어 동해안에서도 드물게 볼 수 있는 해안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해안선을 따라 이루어진 어촌 마을로는 남정면에는 부경1·2리·장사리·부흥1·2·3리·원척리·구계리·남호리가 있으며, 강구면에는 삼사리·오포 3리·강구 4리·금진·하저리가 있으며, 영덕읍에는 대부·창포·대탄·오보·노물·석리가 있다. 축산면은 경정 1·2·3리·축산 3리가 있으며, 영해면은 사진 1·2·3리·대진 1·2·3리가 있으며, 병곡면은 덕천리·원황 2리·거무역리·영 4리·병곡 1·2리·백석 1·2리·금곡 1·2리가 있다.
  또한 이들 53㎞에 이르는 해안선 곳곳에는 크고 작은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는데, 이름있는 해수욕장으로는 장사해수욕장·남호해수욕장·오포해수욕장·대진해수욕장·고래불해수욕장 등이 있으며, 그 외의 해안지역도 간이 해수욕장으로 명성이 높다.

 
 

3. 하 천

1) 지경천(地境川)

  지경천은 동대산에서 발원하여 회 1·2·3리를 거처 포항시와의 경계인 어사터를 지나 부경 2리 앞에서 동해로 유입하는 지방2급 하천이다. 일명 골곡포(骨谷浦), 또는 회리천(晦里川)이라 한다.
  원류에는 동대산 지맥이 만들어 주는 아름다운 절경이 있다. 현재는 동대산 아래의 회동 저수지 상류에 남정 면민들의 수원지가 될 저수지 축조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 이것이 완성되면 남부지역의 물 부족은 완전히 해결될 것으로 기대된다.
  하류지역에는 온천수가 솟아나 현재 부경지역 온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인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어 조만간 좋은 결실을 가져 올 것으로 보인다.

2) 장사천(長沙川)  장사천은 동대산에서 발원하여 쪽지골을 지나 장사들을 적시고 다시 부흥앞에 이르러 해월봉에서 발원하여 사암 1.2리, 도천, 봉전을 지나 내려오는 도천과 만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하천을 중심으로 장사·봉전·도천들(道川坪)이 펼쳐져 있으며, 특히 봉전들에는 특용작물로 부추 재배가 성행하고 있으며, 도천의 상류에는 도천저수지가 축조되어 있어 이들 하류지역 농수의 공급은 원활하다.

3) 구계천(龜溪川)

  구계천은 봉황산과 우곡리 뒷산에서 발원하여, 하부골을 지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하구에는 국가 어항인 구계항이 있어 연근해 어선들 수십척이 어로 작업을 하고 있으며, 태풍과 폭풍이 내습할 경우, 평상시 인근 항·포구에 정박해 있는 소형선박들의 피항지 구실을 하고 있다.

4) 남호천(南湖川)

  남호천은 해월봉에서 발원하며, 일명 남역포(南驛浦)라 한다. 상류인 중화에는 정(경)수사(淨(慶)水寺)란 큰 절이 있었으나 현재는 폐찰되고 없다. 중화·남정리를 지나 남호리에서 동해로 유입한다. 남호천의 상류지역인 남정리 상류에는 1963년도에 축조된 남정저수지가 있어 이들 하류지역에 농업용수를 적절히 공급해 주고 있다.

5) 오십천(五十川)

  오십천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와 청송군 부동면 내룡리에서 발원하는 대서천과 봉산 성암에서 발원하는 소서천이 달산면 대지리 앞에서 합쳐져 이루어지는 한줄기의 강물과 황장재 동남에서 발원하여 율곡천, 도계천을 받아들여 지품면을 가로질러 내려오는 또 한줄기의 물이 신양동 앞에서 만나 흐르다 삼각주 공원 앞에서 덕곡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들어가는 하천으로 길이가 약 40㎞, 유역면적이 30㎢인 지방1급 하천이다.
  하류지역은 일명 포내천(浦內川)이라 부르며, 하구의 오포에는 임진왜란까지 수군 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어 동해안을 방어하는 최일선의 항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여 왔으며,

지금은 동해안 굴지의 어항인 강구항이 있다.
  현재 오십천 개발계획이 수립 중에 있어 이것이 완료되면 오십천은 동해안 제일의 관광 휴양지가 될 것이다.

6) 축산천(丑山川)

  축산천은 일명 도곡천·도계·번포라고 한다. 화림산과 조항산에서 발원하며, 화천·대곡천·칠성천 등을 받아들여 축산항을 통하여 바다에 들어간다.

7) 송 천(松川)

  송천은 창수면의 백청·삼계리를 지나는 서천과 묘곡·원구리를 지나는 남천을 받아 들여 영해들을 가로 지르며 상대산 모퉁이에서 동해로 들어가는 지방2급 하천이다.
  이 하천 유역을 따라 영해들과 병곡들이 있다. 이 들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에 의한 농업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해부(寧海府)의 세련된 문화가 발달하였다. 이 강 유역을 따라서 삼국시대로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동해의 웅부(雄府)였던 영해부가 있어 동해안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으나, 현재는 영덕군에 흡수되었다.

8) 유금천(有金川)

  유금천은 일명 망곡천(網谷川)이라 하며, 칠보산에서 발원한다.
  하천이 맑고 물의 맛이 좋아 전하는 말로 옛적에 중국인 두사충(杜思沖)이란 풍수가가 이곳의 물맛을 보고 충주(忠州)의 달천(達川)과 그 맛이 똑같다고 하면서 앞으로 큰 인물이 날 것이라 하였다고 한다.

9) 기타 소하천

  이 외에 군내에 흐르고 있는 소하천은 지품면 삼화리를 흐르는 관동천, 지품면 송천리에서 용덕리를 흐르는 용덕천, 황장재 밑을 흐르는 창하천 등이 있으며, 창수면 수리와 삼계를 흐르는 석문천, 창수리를 흐르는 가천, 병곡면 백록에서 병곡으로 흐르는 백록천, 아곡리에서 거무역으로 흐르는 아곡천, 각리를 지나 동해로 들어가는 각리천이 있으며, 축산면 조항에서 기암을 지나는 조항천, 기암을 지나 흐르는 동로천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이들 소하천은 군내 곳곳을 거미줄같이 연결하며, 군내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주고 있으며, 또한 군민들의 식수공급의 원천으로 이용되고 있다.

4. 저수지

  우리나라의 농업, 특히 벼농사가 시작된 이래로 치수·수리(治水·水理)에 대한 사업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중요시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있어서도 농업용수와 공업용수, 그리고 생활용수의 확보라는 면에서 그 중요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대·소하천이 많이 흐르고 있는 이 지역에도 저수지나 둑을 막아서 홍수의 피해를 막는 한편, 농업용수와 식수로 이용하기 위하여 물을 가두는 저수시설을 하였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산미증산(産米增産) 운동에 따라 곳곳에 저수지를 설치하였으며, 농수로의 정비에도 많은 심혈을 기울었다. 이는 일본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민족에게는 또 하나의 시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내의 저수지 중 최초에 축조된 저수지는 어느 것이며, 언제 누구에 의하여 축조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문헌이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옛 「군·읍지」에 못과 제방으로 보이는 기록이 단편적으로 나오고 있어 참고할 만은 하다. 1945년 이전에 축조된 저수지와 둑(堤)을 옛 「 군·읍지」 등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미개곡제(彌介谷堤)

  현의 동쪽 4리에 있다. 둘레가 395척, 넓이가 140척이고, 수심이 4척이다. 외제(外堤)는 둘레가 287척이고, 수심이 5척이다.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없다.

2) 하거음제(下巨音堤)

  일명 하금음외제(下今音外堤)라 한다.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둘레가 233척이고, 넓이가 97척이다. 지금은 없다.

3) 입 곡 제(入谷堤)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 둘레가 139척이고 수심이 4척이다. 지금의 위치를 알 수 없다.

4) 읍선상제(揖仙上堤)

  영해부의 남쪽 5리에 있다. 길이가 136척, 폭이 28척, 둘레가 2,562척이다.

5) 읍선하제(邑仙下堤)

  영해부의 남쪽 4리에 있다. 길이가 143척, 폭이 30척, 둘레가 567척이다.

6) 교 동 제(校洞堤)

  영해부의 동쪽 3리에 있다. 길이가 100척, 폭이 20척, 둘레가 562척이다. 양답(量畓)이 2석(石) 13두락(斗落)에 이른다.

7) 정 신 제(貞信堤)

  영해부의 남쪽 복평리에 있다. 길이가 207척, 폭이 15척, 둘레가 370척이다.

8) 미응곡제(未應谷堤)

  영해부의 남쪽 8리에 있다. 길이가 240척, 폭이 10척, 둘레가 841척이다.

9) 항 지 제(項只堤)

  영해부의 서쪽 7리에 있다. 길이가 133척, 폭이 20척, 둘레가 1,825척이다.

10) 애 곡 제(愛谷堤)

  영해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길이가 497척, 폭이 485척, 둘레가 1,825척이다.

11) 송 현 제(松峴堤)

  영해부의 남쪽 7리에 있다.

12) 경 제(鯨堤)

  영해부의 남쪽 7리에 있다.

  1945년 해방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 손에 의한 농어촌 개발계획이 수립되어 전국 각처에 저수지와 보들이 설치되어 농업용수를 확보하여 식량 자급자족을 이룩하고 상수도용의 식수를 확보하는데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현재 농사에 이용되고 있는 군내의 저수지는 영덕군과 농업기반공사영덕지부가 나누어 관리하고 있다. 다음 표〈1­4〉는 영덕군에서 관리하는 저수지의 명단이고, 표〈1­4­1〉은 농업기반공사영덕지부가 관리하는 저수지 명단이다.

5. 평 야

  평야는 그 형성 원인에 따라 분류하여 구조평야(構造平野)·충적평야(沖積平野)·침식평야(浸蝕平野)로 크게 나누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소평야(大小平野)는 대개 충적평야와 침식평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야들도 전국에 걸쳐 발달해 있는 것이 아니고 낙동강·금강·영산강·한강 등의 대하천의 하류지역에만 평야라 할 만한 것이 넓게 펼쳐져 있을 뿐, 그 외 지역에는 평야다운 평야가 크게 발달한 곳이 없다.
  특히 백두대간 및 낙동정맥 동사면(東斜面)이 바로 동해와 접하고 있는 경북 동해안 지역은 평야다운 평야를 찾아보기가 더욱 힘들다.
  영덕군의 지형은 낙동정맥이 동해안을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리고 있으며, 서고동저의 산이 많은 지형으로 평지의 대부분은 구릉지·산간 분지로 이루어진 곳이 많다. 또한 오십천과 송천을 제외하고는 길게 흐르는 대하천이 없는 관계로 대하천에 의한 토사의 운반으로 생긴 충적평야는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군내에서도 대평야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소규모의 평야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데, 크게 오십천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달산의 대지평야·영덕의 구미·천전평야·강구의 금호·원직평야와 송천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영해의 인량·원구평야· 영해평야·병곡의 병곡평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외 남정면에서는 장사천과 석교천을 따라 발달한 장사들과 도천들이 있으며, 남호천을 따라서는 남정들과 남호들이 있다. 그리고 강구 화전에는 화전들이 소규모로 펼쳐져 있다. 축산면은 화천·대곡천·칠성천 등의 주변지역에 소규모로 펼쳐져 있는 들과 도곡천이 흘러내리는 도곡들과 축산들이 있으며, 창수면에는 석문천·가천 주변에 소규모의 들이 발달하여 있어 지역민들에게 질 좋은 미곡(米穀)을 제공해 주고 있다.
  군의 전체 면적 중에 경지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은 11.3%인데, 이 중의 논은 55.2%이고 밭은 41.4%이다. 산이 많은 경북 북부 및 동해안 지역은 대개 밭이 논보다 많은 경작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나, 우리 군은 밭보다 논의 경작면적이 많다. 이는 오십천과 송천이 우리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동해안에서도 비교적 규모가 큰, 이들 강이 상류의 토사를 운반하여 하구 근처 및 주변지역에 이를 충적시켜서 상당한 규모의 평야를 형성하여 주고 있다.
  우리 지역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해안지역에 있어서의 농경지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우리 지역의 해안은 육지가 가라앉았다 다시 솟아오른 지형으로 해면에서 해저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는 지세이고, 해안으로는 낙동정맥의 산세가 해안까지 뻗어내려 와서 해면과 급경사를 이루어 해안절벽이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하천(小河川)이 흐르는 주변지역을 제외하고는 해안지역에는 경작지가 드물며 있어도 아주 협소하다.
  해안에 있는 경작지의 대부분도 해안을 따라 개간되어진 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나마 조금 있는 논도 해안에서 떨어진 계곡 주변의 소하천을 따라 흩어져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논의 형태도 산곡(山谷)의 분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 경우에도 대부분은 계단식 형태의 논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