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 관(槪觀)

  산신(山神)이란 산을 지키고 담당하는 신을 말하며 그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산신제라 한다.
  산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檀君)과 신라(新羅)의 산신에 관한 기록이 많다. 단군신화(檀君神話)에 의하면 환웅(桓雄)은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정상 신단수(神檀樹) 밑에 하강(下降)하였다.
  산정은 하늘과 가까운 곳이고 따라서 신이 내리는 곳이고 머물러 있는 곳이 되므로 환웅이 이 산정에 내린 것은 신의 거처에 내린 것이다.
  산신(山神)의 거처인 산신당(山神堂)은 산정 또는 산중턱이므로 태백산은 성산(聖山)으로 그 정상에 신단수가 있는 즉 산신의 거처이며 산신을 제사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단군(檀君)은 죽은 뒤 아사달(阿斯達)의 산신이 되었는데 이것은 신의 아들이 죽어서 신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산신은 자연신(自然神)이며 기능면에서는 수호신(守護神)으로 영웅이 산신화(山神化)한 것이다.
  신라 헌강왕(憲康王) 때에는 왕이 포석정에 행행(行幸)했을 때, 남산(南山)의 산신이 어전(御前)에 나타나 춤을 추었다고 하며, 경덕왕(景德王) 때에는 삼산오악신(三山五岳神)이 나타났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덕적(德積), 백악(白岳), 송악(松岳), 목멱(木覓:서울南山) 등 4악에 무녀(巫女)를 보내 춘추로 대제(大祭)를 올리게 하였다. 이 제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이어졌으며 지방 관원과 민간인에 의해 제사케 하였다.
  산신(山神)에도 남성신(男性神)이 있고 여성신(女性神)이 있다. 아사달 즉 구월산(九月山) 산신이 된 단군이나 대관령 산신이 된 단군이나 대관령 산신이 된 김유신(金庾信), 개성 덕물산(德物山) 산신이 된 최영(崔塋) 같은 분은 모두 남성산신이다.
  덕물산과 나주(羅州) 금성산(錦城山) 산신제에는 처녀를 공헌(供獻)하는 유습이 있었다 한다.
  반면 서울 신촌의 노고산(老姑山)은 글자 그대로 할미산으로 여성신이며 지리산에도 여고단(女姑壇)이 있어 여신산(女神山) 임을 암시하는 등 전국에 산재해 있다.

 
 

2. 산신(山神)의 거처(居處)와 제당(祭堂)의 종류

1) 산신의 위치

  산신이 있는 곳은 산정형(山頂型), 중복형(中腹型), 산하형(山下型)이 있다.
  산정형이란 산 정상에 제단(祭壇)이나 제당(祭堂)이 있어 산신이 그곳에 거처하도록 하고 제사를 지낸다. 산 정상은 하늘과 가까울 뿐 아니라 산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지배자가 군림하기에 알맞은 장소이다.
  중복형이란 산 중턱에 단(壇)이나 당(堂)을 짓고 거처하도록 하였다.
  높은 산인 경우 올라가기 힘들기 때문에 중턱에 선정한 듯 하다. 또 산에 가서 호환(虎患)을 만나거나 부상을 입거나 또는 산에서의 작업장도 산 중턱이 되는 경우가 많으며 정상에 오를 때도 중턱을 통과해야 하므로 이곳에 제당을 짓고 산의 재앙을 면하고자 한 데도 목적이 있는 것 같다.
  산하형이란 마을에서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나 산밑 아늑한 곳에 당(堂)을 짓고 산신을 받드는 경우이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그 중간지점에 있는 것은 그 기능에 있어서 산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접근해서 풍흉도 담당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풍작은 물론 질병과 기자(祈子) 등 주민의 소원까지도 맡게 되었다.
  제당(祭堂)의 종류는 토단(土壇), 석단(石壇), 거수(巨樹), 당우(堂宇) 등이 있다.
토단형은 오래된 것으로 둥근형과 4각형의 두 가지형이 있으며 높이 1척 정도로 약 1평쯤 된다.
  석단형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든 것으로 자연석으로 쌓여진 것은 오래된 것이며 인공적으로 쌓여진 것은 후대의 것으로 믿어진다.
  석축형은 집단이 참여해서 만든 것으로 산 속에 있는 것은 자연적석단(自然的石壇)이 많고 마을에 가까울 수록 인공석단이 많다.
  거수형은 오래된 큰 나무가 있고 그 밑에 단(壇)이 있어 산신을 모시는 형이다. 이것은 고대의 수목신앙(樹木)과도 관계가 있다.
  당우형(堂宇型)은 대개 한 평쯤되는 단칸집으로 그 안에는 산신상이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산신상은 백발에 긴 수염이 있는 신선이 그려져 있고 그 옆에는 산신의 사자(使者)라고 전하는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산신은 속세(俗世)를 떠나서 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선인상으로 나타나 신선사상(神仙思想)과 관계가 있다.
  당 정면에는 산신당(山神堂), 산신각(山神閣), 산령각(山靈閣) 등 각각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제당 안 한 구석에는 산신제에 소용되는 제구(祭具)를 보관해 두기도 한다.

2) 산신당(山神堂)
  산신은 마을을 수호(守護)하는 신이다. 따라서 제사의 목적은 기자(祈子), 풍농(豊農) 그리고 질병퇴치, 호환(虎患) 등 산로안전(山路安全)을 빌기 위해서이다.
  제사 시기는 음력으로 정월 3일부터 15일 사이에 하는 예가 가장 많으며 부득이한 경우 예를 들어 정초(正初)에 동민이 사망하는 등 크게 부정타는 일이 있으면 연기하는 수도 있다.
  연기했을 때에는 2월 초, 4월 초파일, 또는 가을에 날을 다시 잡거나 한 해 거르기도 하였다. 주로 정월에 산신제를 지내는 뜻은 한 해의 첫달이기 때문에 1년 동안 있을 재앙을 쫓고 풍농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이다.
  제사 지내는 시각은 초저녁 또 자정이 지난 이른 새벽인데 주로 부정한 것이 없고 맑고 깨끗한 자정이 지난 후에 지내는 경우가 많다.
  제관 선출이나 제물(祭物) 준비는 동제(洞祭)와 같다. 제의(祭儀) 순서도 강신(降神), 참신(參神), 진찬(進饌), 헌작(獻爵), 독축(讀祝), 사신(辭神), 소지(燒紙), 분축(焚祝), 철상(撤床), 음복(飮福) 등 순으로 유례식(儒禮式)이며 동제와 같다.
  산신은 개인에게 영향을 주지만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마을 공동의 제사로 동제(洞祭)인 것이다. 좀 급한 생각이긴 하지만 고대에는 산 정상이나 산 중복에 산신제를 별도로 지내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그 기능이 동제당에 습합(習合)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재 본 군내 사찰에 있는 산령각(山靈閣) 외 별도로 산신당을 모시는 마을은 없는 것 같다.

 

< 참고문헌(參考文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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