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에서 고려말까지의 농업

  자연상태가 아닌 인위적인 노력으로 야생의 동물을 사육하고, 식물을 재배하여 인간이 또 다시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그 수확물을 얻는 행위를 농업이라고 할 때, 대개 그 시원(始原)을 신석기시대부터라고 추정하고 있다.
  농업의 이러한 의미는 자연상태의 결실물(結實物)들을 채취하거나, 수렵 혹은 어로작업으로 획득하여 그 생활을 영위하던 인간의 삶의 방식에 커다란 전환을 가져 왔으며, 인류문화의 발전에 거의 혁명적인 계기를 가져왔는데, 종전의 이동식, 유람식의 생활방식에서 정착식 생활방식으로 삶의 양식이 바뀌어 감에 따라 반복, 지속적인 행위의 연속으로 점차 문명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농업은 이후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있어서도 인간 개개인의 생존뿐만 아니라 인류전체의 생존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산업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에 있어서 우리 지역의 농업활동은 당시의 일반적인 사정과 대부분 동일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수렵과 어로 및 식물의 열매와 뿌리를 채집하여 먹거리로 사용하였던 구석기인들이 거주한 유적과 청동기 유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 두시기의 중간에 위치하는 신석기시대에 이 지역에 이들 신석기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들 또한 여타 신석기인들과 같은 농업의 방식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개 신석기시대의 농법은 자연적으로 자생하는 피나 조와 같은 잡곡류의 씨앗을 채취하여 가까운 공터에 석기류의 농기구를 이용하여 경작하는 아주 조잡한 원시적인 농법으로 주로 산간 구릉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우리 지역에서는 영해평야나 금호평야 같은 논이 형성된 지역에까지는 이들의 힘이 미치지는 못하고 지품이나 창수지역의 산간벽지를 중심으로 주로 화전을 일구어 곡식을 재배하거나, 해인 인근의 구릉지나 비탈진 땅을 중심으로 신석기 농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농업은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사회구조를 지탱하는 중요한 경제적 원천이 되었으며, 대표적인 생산적 산업으로 그 중요성은 더해 갔는데, 특히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종래의 나무나 돌과 같은 사용하는 부분이 무디고, 일회성이며, 비생산적인 농기구의 사용보다 날카롭고, 연속적인 사용이 가능한 생산적인 농기구인 금속제 농기구의 사용에 따라 농업의 생산성이 늘고, 생산량의 증대가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더 많은 생산량을 얻기 위하여 분업이란 새로운 생산방식이 도입되기 시작하여 생산량이 종전보다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생산량 증가에 따른 사적 소유의 과다에 의하여 빈부의 차이 및 계급의 형성이 일어나게 되어 인류에게는 발전을 위한 새로운 토대를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반면에 인류에게 더 많은 생산을 얻기 위한 경쟁심과 욕심이란 것을 가져다 주어, 인류에게 이의 해결을 위하여 죽고 죽이는 살육을 가져다 주는 등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재배된 곡물의 종류로는 조·피·콩·보리·벼 등으로 그 경작종이 종전보다 크게 늘어났으며, 또한 이들의 부산물로 소와 돼지, 말 등의 가축도 사육하게 되어 인류의 식문화(食文化)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 지역에서의 농업은 대체로 위의 밭작물 외에 벼농사가 동시에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현재 발견되고 있는 이 시기의 유적과 유물들이 송천 주변의 영해평야와 오십천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이 당시 우리나라 농업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삼국지위지(三國志魏誌) 동이전」인데, 이 책 마한조에 의하면 “그 백성들은 땅에 맞는 종자를 심으며, 누에치는 법을 알고 있어 면포(綿布)를 만들 줄 안다.(其民土著 種植 知蠶桑作綿布)” 또한 진한조에 “오곡 및 벼를 때에 맞게 심으며, 누에치는 것을 알고 있어 겸포(布)를 만들 줄 안다.(土地肥美 宣種五穀及稻 曉蠶桑 作布)”라 한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인 삼한시대 이전부터 밭농사와 논농사, 그리고 잠업이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며, 우리 지역도 이에 따라 밭농사와 논농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있어서 대규모의 저수지 등 논농사에 필요한 농업용수 확보의 곤란에 따라 논보다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밭농사는 보리, 조, 기장 등의 오곡이 주요 재배 작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인 삼한시대를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농업의 특색은 밭농사와 더불어 벼농사가 점차 농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청동기 이후 초기 철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벼농사는 재배기술의 발달 뿐만 아니라 각처에 많은 저수지가 축조되어 점차 농업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신석기시대 이래 변화되어 온 농업은 생산량이 증대하고, 증대된 생산량은 곧 경제력의 증가로 나타났으며, 이러한 생산량의 증대는 또한 많은 생산력을 요구하게 만들었으며, 나아가서 보다 많은 생산력을 가진 집단을 동일 범위의 세력권 내에서 우세한 정치권력으로 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는데, 결국 이렇게 하여 발생한 정치권력은 점차 주변국을 통합하거나 정복하여 하나의 국가단위로 성장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로 나타나는 삼국시대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생산력의 기반이 되는 토지가 가장 중요한 경제력의 원천으로 간주되어 모든 토지는 왕토(王土), 즉 국가의 소유가 되었으며, 간혹 전쟁에서 공을 세우거나 치적을 쌓은 장군이나 공신들에게 식읍(食邑), 혹은 녹읍(祿邑)의 명목으로 토지와 노비를 주어 왕으로 나타나는 국가의 권위와 은혜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일반 농민들의 농업방식은 대부분 국가 소유의 토지를 경작하는 대신에 곡식과 면포 등으로 일정량의 세금을 바치고 군역을 부담하는 한편, 각종 국가적인 부역에 동원되어 국가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양상으로 바뀌어 갔다.
  당시 우리 지역은 삼한 이래 신라의 영역에 속하였으므로, 신라의 농업제도의 틀 안에서 농업생산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부에 위치한 관계로 대체로 기후가 온난하고 건조하여 벼와 보리를 이어서 심는 이모작(二毛作) 농법이 발달하였으며, 토지 소유제도는 대체로 고구려나 백제와 같이 국가가 소유하는 국유제였으며, 이에 따라 일반백성들은 결부제(結負制)에 의하여 조세를 부담하는 형태의 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농민 대부분은 자영농이었다.
  한편 신라는 벼농사의 진흥을 위하여 일찍부터 수리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건국 초기인 일성왕 11년(144), 법흥왕 18년(531), 원성왕 6년(790), 헌안왕 3년(859)에 제방의 축조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과 흘해왕 21년(330)에 벽골지(壁骨池)를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논농사를 시작하였으며, 논농사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였는데, 이는 새로운 농법의 개발과 이에 따르는 농기구의 발달에 기인한 것으로, 말이나 소에다 쟁기를 매달아 논밭을 가는 기술은 종래에 인력에 의지하던 농사법보다 몇배의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와 농업생산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호미, 낫, 괭이, 가래, 써레, 두레, 도리깨 등의 사용도 이 시대 농업생산량을 증대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실정에 비춰 보아 삼한시대나 삼국시대에 있어서 이 지역의 농업도 대략 위와 같은 범주에서 송천 유역의 영해평야와 오십천 유역의 넓은 들을 이용한 논농사가 서서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이외의 산간오지에는 당시의 주곡인 조와 보리, 콩 등의 밭농사도 동시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의 농업기술 수준으로 보아 논농사가 전체 식량 자급도에서 차지하는 정도는 여전히 미미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밭농사가 당시 이 지역의 주요 식량생산의 기반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농업은 국초부터 전제의 개혁, 부세의 조정 등의 제도의 개혁으로 농상(農桑)을 장려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이는데 주력하였으나, 고려의 지배구조가 점차 문벌귀족들이 광대한 토지의 소유 기반 위에 정치, 경제, 사회를 이끌어 가는 구조로 변질되어 감에 따라 일반백성들은 이들 문벌귀족의 대농장에 소속되어 소작의 지위로 떨어지는 형태로 변질되어 갔다.
  그러나 국가 전체로는 중농정책을 추진하여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산간오지 등을 개간하여 농토의 확장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자급자족의 농업경제체제를 구축하여 병란과 홍수, 가뭄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의 농업의 중심은 벼농사였는데, 이를 위하여 장정과 병졸을 동원하여 제방의 개축과 증축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밭농사는 주로 2년3작(二年三作)의 윤작법이 중심이 되었는데, 보리, 밀, 수수, 조, 기장, 콩, 팥 외에 다양한 종류의 곡물이 재배되었으며, 오이, 가지, 무, 파, 박 등의 여러 가지 채소류가 재배되어 일반 농민들의 식생활 변화와 영양의 공급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배와 복숭아, 밤 등의 과수도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였으며, 삼한시대 이래로 백성들의 옷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잠업이 발달하여 뽕나무 등의 재배가 이루어졌다.
  고려 말엽에 들어와서 중국에서 발달된 농업기술과 농작물의 도입이 있었는데, 공민왕 22년(1362년)에는 백문보가 중국의 벼농사 지대인 강남에서 당시 유행하던 수차(水車)를 국내에 가져와 보급하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시도는 농업경작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 매우 주목받는 일이었다. 동왕 25년(1365)에는 역시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씨를 국내로 가져 와 재배에 성공하게 됨에 따라 이후의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복제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있어서 우리 지역의 농업도 고려시대의 일반적인 농업방식의 영향 아래 밭농사와 논농사가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영해평야를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력의 증대는 지역의 사인(士人)층의 형성을 가져와서 지역의 인물들을 중앙에 진출시키기도 하는 한편, 지역의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어 우리 지역이 동해안 일대에서 문화의 중심지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조선시대의 지역 농업

1) 전기의 농업

  고려시대에 있어서 왕실과 권문세족, 사원에 의한 광범위한 토지의 겸병은 고려의 경제적인 토대인 토지제도의 근간을 무너뜨려 결국은 고려왕조 자체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고려왕조는 토지제도의 붕괴를 막고자 창왕의 즉위 초인 1388년부터 토지를 측량하는 한편, 토지제도의 개혁을 시행하여 철저한 공전제(公田制)를 확립하여 농민들의 경제적 안정을 꾀하는 한편, 관리들의 녹봉으로 지급하는 과전제(科田制)를 확립하여 관리들의 생활의 안정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이러한 제도 개혁은 기존 관료체제를 무너뜨리고, 신흥 사대부의 발흥을 가져 와서 고려왕조의 몰락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국내적인 여건과 원명 교체기의 여건의 틈을 타서 신흥 사대부와 무인들의 신망을 이용한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는데, 새로이 왕조를 개창한 주체세력들은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고 국가의 근간이 되는 여러가지 제도개혁을 단행하여 새 왕조의 기틀을 닦아 나갔다. 그 중에서도 국가 경제의 기본이 되는 토지에 대하여는 철저한 조사를 하여, 이를 통한 조세의 부과로 국가재정의 확보를 추구하였는데, 태종 1년(1401)의 “답험손실법”, 세종 26년(1444)의 “전분연분법”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새 왕조의 주도세력들은 농업생산력을 높이기 위하여, 새로운 농법과 전통적으로 우수한 농법을 선택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보급하기 위하여 국가 주도로 농사에 필요한 월력(月曆)을 간행, 배포하여 절후(節候)에 따른 파종시기를 알 수 있도록 하였으며, 측우기를 설치하여 물관리를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한편, 「농사직설(農事直說)」 등의 농서를 간행하거나, 이를 일반 백성들이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한글로 언해를 하여 배포하는 등 농업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새 왕조의 중농정책에 따라 조선시대 이 지역에서도 농지제도의 변동과 더불어 농법과 경작품종의 종류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전기에 간행되어진 사서(史書)를 통하여 이 당시 우리 지역의 농업생산력 정도를 알 수 있는데, 먼저 우리 지역의 경작지 규모와 수확량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덕현의 경작지 규모는 밭(田)이 1,068결, 논(畓)이 178결로 도합 1,246결이다. 이들 경작지에 대한 수확량을 살펴보면 밭의 수확량은 피를 기준으로 연간 85,440섬이 생산되었으며, 논의 수확량은 7,120섬이 생산되어 각종 조세를 부담한 후에 지방민의 양식으로 자급자족되었다.
  영해부의 경작지 규모는 총 2,720결로 이 중에 밭이 2,331결, 논이 389결이다. 밭의 수확량은 피를 기준으로 186,480섬이 생산되었으며, 논의 수확량은 15,520섬이었다. 이와같은 수확량에 국가에서 조세의 기준으로 정해진 전분연분법에 의한 세금을 공제하고는 이 지역 백성들의 양식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전기에 있어서 이 지역의 풍토에 맞는 재배곡물을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여 살펴보면 영덕현에서는 벼, 기장, 조, 콩, 보리, 밀이 경작되었으며, 삼(麻)과 닥나무, 왕골풀, 뽕나무 등도 경작되었다. 영해부에서는 벼, 기장, 조, 보리, 밀, 콩 등과 위의 삼, 왕골풀, 뽕나무 등이 재배되었으며, 특히 우리 지역은 지형과 지세가 바다와 접하고 있어 서늘하고 온화한 기후로 약재 재배의 적격지로 방풍, 인삼, 결명자 등의 많은 약재가 재배되어 진상공물로 중앙에 공납(貢納)하였다.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부역과 공물의 부담은 상민, 즉 일반 백성들의 몫이었다. 공물의 부담정도는 그 지방의 자연조건과 토산물품의 종류 및 다과(多過)에 의하여 결정되었는데, 특히 그 지역의 토산명물의 상납(上納)을 의미하는 공물(貢物)의 종류는 그 지역의 경작품종을 알아보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된다.
  공물의 종류로는 농산물, 과실, 목재류, 수공업제품, 광산물, 수산물, 수렵물품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경상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여 농업과 관련된 지역의 공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덕현과 영해부에서는 면주, 목면, 정오승포, 설면자, 상면자, 점갱미, 간중미, 갱미, 상중미, 전미, 진맥, 태, 진임자, 녹두, 법유, 진유 등이 있었다.
  따라서 위의 공물의 이름들은 오늘날에 생산되는 농작물의 이름이 대부분 들어 있는 것으로 그 생산방법은 오늘날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 후기의 농업

  조선시대를 전·후기로 구분할 때, 대개 1592년 4월부터 시작되어 7년간 전국토를 유린한 임진왜란과 1636년에 발생한 병자호란이 일어난 시기를 그 기점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이들 두 전쟁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우리 역사상 중대한 사건이다.
  조선은 개국 후 임진왜란 전까지 200여년 간은 큰 전란이 없었던 평화적인 시대로 정치, 경제, 사회제도 전반에서 안정적인 발전을 하여 왔으며, 우리나라의 문예부흥기라 할 정도로 다방면에서의 문화적인 발전이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특히 나라 전체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어 각종 제도와 생활양식, 그리고 사회 지배구조 자체 등에 많은 전환을 야기시켰다. 따라서 임진왜란은 어떤 의미에서 조선왕조가 몰락하여 가는 시초를 배태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임진왜란이 조선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무엇보다 먼저 전쟁에 따른 인구의 급감과 농토의 황폐화이다. 국가체제의 근간이던 농민의 급감과 농토의 황폐화는 바로 국가경제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으로 왜란 전의 160여만결의 토지가 왜란 후에는 30만으로 줄어든 것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뒤 이어 발발한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이후 그나마 회복되어 가던 국가경제에 또 한 번의 충격을 주었는데, 호란의 영향으로 광해군대에 확보되었던 54만결의 토지의 확충사업과 개간사업이 중단되어, 국가재정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양난(兩難)의 결과로 국가재정의 중요한 수입원인 농업생산물에 조세를 부과할 수 있는 기본자료인 토지대장과 호적 등의 장적(帳籍)들이 거의 소실, 혹은 훼손되어 조세와 요역의 부과에 많은 곤란을 겪었으며, 따라서 이후 이들 장적의 복원은 상당한 기간을 요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른 영향은 이후 지속적으로 국가 전체에 미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 양난을 계기로 사농공상의 엄격한 신분제도와 인구이동 자체가 통제되어 있어서 사회변동의 폭이 거의 미미하던 것이 양란을 겪으면서 백성들의 피난과 유민화(流民化)에 따른 자연스런 인구이동과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재원을 조달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납속정책과 장적의 멸실에 따른 신분위조 등에 따라 자연적으로 신분의 동요가 발생하여 사회 전반적인 지배구조가 문란해짐에 따라 크게는 국가체제가 분해되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양난은 이와 같은 영향을 우리 지역에까지 전파시켜 지역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 왔다. 일례로 지역의 신분계층의 이동을 들 수 있는데, 양란을 계기로 우리 지역의 많은 성씨들이 입향하고 있는데, 난을 피하기 위하여 지역에 입향한 각 성의 입향조들은 종전의 향촌사회 세력구도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는 농업부분에도 많은 변화를 겪는데, 새로운 농업기술의 발전과 농업정책의 실시, 농서(農書)의 간행과 배포, 제언(堤堰)과 보(洑)의 개선, 농기구와 종자의 개량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농업에 있어서 변화의 큰 특징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태동하기 시작한 상업농의 등장과 벼농사에서의 이앙법 등 신농법의 도입인데, 당시 우리 지역에서도 16세기 말부터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시작된 이앙법(移秧法)이 전파되어 벼와 보리의 이모작 농법이 일반화되어 농업생산력이 증대하였으며, 이를 위한 수리시설의 확충이 필요함에 따라 제방의 축조에 의한 수로의 정비와 저수지의 축조가 다수 이루어지게 되어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게 되어 농업생산량이 증대하게 되었으며, 농업생산량의 증대는 이를 기반으로 하는 사대부 문화를 발흥시켜 조선시대 후기에 지역에서 많은 선비들이 관계로 진출하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한편 후기에 들어와서 토지소유관계가 10% 내외의 부농층이 전체농지의 43%를 차지하는 등 지배층에 의하여 독점되자 광작하는 부농과 농촌을 버리고 유민화하는 농민간의 분화를 촉진시키게 되었으며, 이러한 관계가 지대(地代)의 배분에도 영향을 미쳐 종전까지의 지주와 소작농이 반반씩 나누던 수확량(分半打作)이 수확량의 3분의 1만 지주에게 주는 정률지대인 도조법(賭租法)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제도 역시 이 곳 향촌 사회에 영향을 미쳐 이 지역의 향촌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후기에 들어와서 이 지역에서 경작되었던 주요한 작물로는 벼(稻), 기장(梁), 피(稷), 조, 대두(大豆), 대맥(大麥), 소맥(小麥), 녹두 외에 각종 채소류 및 후기에 도입된 감자와 고구마, 고추, 담배, 호박 등과 뽕(桑), 삼(麻), 목화(木棉), 과실 등이 재배되었으며, 이 외에 농가의 부업 및 보조생계수단으로 다수의 가축이 사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