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족국가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계급이 분화되고 지배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때를 청동기시대라고 보고 있다. 이 시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농업에서의 생산력이 증대되기 시작하면서 빈부의 차이가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혈연이나 지연 등의 이해관계에 의한 집단생활이 지역단위의 사회생활로 그 경제적 활동영역을 넓히면서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사회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생산력의 우열에 의한 사회계층의 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종래의 원시공동체적인 소유관계에서 점차 개인 위주의 사유재산제도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바탕 위에 혈연이나 지연을 중심으로 하는 폐쇄된 사회가 점차 지역단위의 사회생활로 그 활동영역이 넓어지는 개방형 사회로 변모해 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경제적 자립을 할 수 있는 지역의 족장들은 이들 경제력을 바탕으로 그 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면서 여러 소국들을 거느리며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를 일반적으로 부족국가 혹은 성읍국가(城邑國家), 군장국가(君長國家)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이 만주벌에서 이 시기에 건국되어 한반도 북부를 포함한 중국의 동북부와 산동지역의 대부분을 관할하였다.
  이 당시 우리 지역에서도 위와 같은 소국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삼국지위지 동이전」의 진한 12국의 내력과 「삼국사기」의 지리조(地理條)의 야시홀(也尸忽)과 우시군(于尸郡)의 기록들이 이들 흔적의 편린으로 볼 수 있다.
  우리 군은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에 위치하며 동(東)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서(西)로는 청송군·영양군과 접하며 북(北)으로는 울진군, 남(南)으로는 포항시와 경계를 갖고 있으며,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온화한 기후와 오십천 유역을 따라 펼쳐지는 구미평야와 금호평야, 그리고 송천 유역을 따라 발달한 영해평야의 비옥한 토지 등을 기반으로 하여 일찍이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으며, 이들 지역을 기반으로 일정 규모의 소국가(小國家)를 형성하며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의하면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개국이 있다. 그 북쪽은 낙랑과 접하고 남은 왜(倭)와 더불어 접해 있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12개국이며 그 북에 예맥(濊貊)이 있으며 변진(弁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다. 남쪽은 왜(倭)와 더불어 접해 있는데 모두 78개국이다. 이 중에 대국은 4,000∼5,000家, 소국은 600∼700家의 규모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위의 기록과 「삼국사기」 지리조의 경덕왕 16년(757)에 있었던 야시홀과 우시군이 야성군(野城郡)과 유린군(有隣郡)으로 개편하였던 기록으로 보아 최소한 600∼ 700호 규모의 군단위(郡單位) 정도의 소국이 우리 지역에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병곡면 사천리에서 출토된 세형동검과 작지산 및 영해 인근에서 발견되는 고분과 고인돌 등의 유물들이 이를 증명하여 준다고 하겠다.
  이렇게 하여 성립된 우리 군의 소국들은 영해평야와 오십천 유역의 전답(田畓)으로부터 생산되는 농업생산력을 바탕으로 북쪽으로는 울진과 평해를, 남쪽으로는 청하, 서쪽으로는 청송과 영양, 그리고 진보를 아우르는 동해안 일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로 그 역할을 다하여 왔을 것이다.
  특히 우리 지역은 예로부터 국방상으로는 동해안으로 침입하는 외적들, 특히 왜인(倭人)들의 침입을 저지하는 1차 방어지(防禦地)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함에 따라 영양, 진보, 안동 등의 내륙 산간지역의 사람들이 생업에 종사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경제적으로는 동해에서 잡히는 해산물의 내륙 공급지(供給地)로써의 역할과 내륙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해안유통을 연결하여 주는 가교(架橋) 역할을 충실히 한 교역의 기지(基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뒷날 조선시대의 “영덕산(盈德産) 안동 간고등어”가 탄생하는 것과 일맥상통(一脈相通) 한다.
  영덕과 영해지역에 있어서 소국 단위의 성장은 문헌기록으로 야시홀(영덕)과 우시군(영해)이 최초의 소국으로 기록되어 나온다. 이들의 최초 발상지(發祥地)를 살펴보면, 야시홀은 오십천 상류지역인 지품면 지품리와 황장재 일대의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진보·청송·영양 등을 영향권 안에 두면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의 자료에 의해서도 알 수 있는데, 현재 지품면의 자연부락 숫자는 54개로 군내의 어느 면보다 숫자가 많다. 자연부락이란 긴 세월 동안에도 쉽게 변하거나 소멸되지 않는 것으로, 이 지역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이 곳곳에 거주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겠으며, 영덕은 이곳을 발상지로 하여 현재에 이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덕지역의 소국인 야시홀군은 오늘의 지품지역을 발상지로 하여 성장하면서 부족단위의 공동체로 형성되었다가 점차 오십천 하류지역으로 그 범위를 넓혀 독자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는 부족국가로 성립하였다 하겠다.
  반면 영해지역의 우시군은 병곡을 중심으로 병곡·후포·평해·기성·울릉도 등을 영향권으로 하는 부족단위 공동체가 송천 유역을 따라 드넓게 펼쳐진 영해평야를 그 세력의 중심으로 삼아 강력한 부족국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우시군의 중심된 역할을 한 곳은 창수와 병곡을 들 수 있는데, 창수면의 자연부락은 북부 4개면 중에도 최고로 많은 44개의 자연부락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다 영양군으로 이속되어 간 지역까지 계산한다면 보다 많은 자연부락이 있게 된다. 따라서 영해지역의 발상지도 창수면을 중심으로 점차 병곡면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되며, 병곡면은 포성을 중심으로 하여 창수면 쪽으로 일부 진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칠보산 산자락을 둘러싸고 창수면 인량리에 이르는 고인돌과 고분의 유적과 유물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영덕과 영해의 발상지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산악으로 이루어진 오지(奧地)인 것은 당시에는 수도작물인 벼농사가 시작되지 않아서 논보다 밭이 있는 산악지역이 사람들이 생존하는데, 훨씬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2. 삼국시대

  부족국가 혹은 군장국가들 사이에서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힘의 우열이 발생하여 상하관계 및 통합의 관계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진한 12국도 서서히 내부적으로 변화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 중의 하나인 사로국(新羅)의 움직임이 크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사로국은 먼저 박혁거세를 군장으로 추대한 후에 내부적으로는 훌륭한 정치를 펼쳐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외부적으로는 진한 11국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펼쳐 영토확장 및 세력확대를 꾀하여 점차로 진한 11국 내의 맹주(盟主)의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로국의 북동쪽 변경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면서 소국가로 존재하던 영덕과 영해지역도 점차 사로국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영영승람」과 「대동지지」에 나오는 탈해왕(57∼80) 23년(79)에 영덕과 영해지역이 사로국(신라)에 복속(服屬)되었다는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영덕과 영해지역은 사실상 이 때부터 사로국(이후 신라로 표기)의 영향권으로 흡수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독자적인 위치를 고수하려는 이 지역과 신라는 수시로 마찰을 빚으며 2세기 초반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우리 지역이 신라에 완전히 복속된 것은 신라 5대 왕인 파사니사금 23년(102)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유로는 오늘날의 안강지역으로 비정(比定)되는 음즙벌국(音汁伐國)과 삼척지역으로 비정되는 실직국(悉直國)이 이 때에 신라에 항복하여 왔다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파사왕 23년조에 의하여 파악될 수 있다.
  이는 안강지역과 흥해, 청하지역을 지나고 우리 지역을 지나야 실직국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우리 지역은 신라의 잦은 침략은 받았을지언정 이 보다 먼저인 탈해왕 23년(79)에 신라에 완전히 복속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이 지역은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시작되는 5세기 후반까지도 신라와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이 유지된 소국가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건국 초의 신라가 지방에까지 중앙의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지역은 명목상으로 신라에 복속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이 지역 소국가의 장이 중앙정부를 대신하여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것은 5세기 후반에 이 지역을 잠시 점령하였던 고구려에 의하여 붙여진 군명(郡名)이 지방행정 단위의 토착식(土着式) 명칭으로 굳어져 경덕왕 16년(757)에 가서야 중국식 이름으로 고쳐진 사실을 보더라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다.
  이와같이 삼국시대 초기에 있어서 우리 지역이 신라에 복속되어 있는 동안 우리 지역을 둘러싸고 있는 외부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고구려 남방정책의 태동이었다.
  고구려는 종전까지는 중국을 향하여 세력확장을 꾀하며 영향력을 넓히는 한편 한반도 남부지역은 다소 소홀히 하는 대중국우선정책(對中國于先政策)을 펼쳤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부터 고구려는 국가경영의 목표를 한반도 남부에 두고 강력한 남하정책을 시도하는데, 이 때 고구려의 임금은 장수왕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위업을 이어받은 장수왕(394∼413)은 먼저 수도를 평양으로 옮긴 후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기 시작하였는데, 신라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적하자 자비왕 11년(468)에 삼척지역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하여 469년에는 오늘의 경상북도 동부해안 지역인 우리 군을 포함한 흥해지역까지 공략하여 아산만과 남양만으로부터 흥해에 이르는 전지역이 일시적으로 고구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지역은 고구려에 점령되어 고구려의 최남단에 위치한 전초기지로써 청하·흥해를 경계로 신라와 국경을 마주하게된 것이다. 이 때에 영덕과 영해는 야시홀과 우시군이란 고구려식 지명을 얻게 되었으며, 군내 리·동의 지명 중에 골, 홀, 물(勿)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이 때의 흔적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 때도 일시적으로 고구려에 속하여 있었지만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이후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주춤하는 사이에 신라가 점차로 그 세력을 넓혀 가면서 이 지역은 다시 신라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는데, 대체로 이 시기를 6세기초로 보고 있다.
  이렇게 영덕과 영해지역을 다시 복속시킨 신라는 그 영역을 주변 지역으로 점차 확대하여 삼국통일을 위한 초석을 다져가게 된다. 따라서 이때 이후로는 우리 지역은 완전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어 신라의 일개 군현(郡縣)으로 녹아들게 되었다.
  신라의 지배권으로 완전히 복속된 후에도 영덕과 영해는 계속 고구려식의 군명(郡名)인 야시홀군과 우시군으로 불리어지다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에 가서야 비로소 야성군과 유린군으로 개칭되면서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지리조”에 그 이름이 나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