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절 지품면(知品面)

▒ 삼화리(三和里)

  삼화리 동명의 유래는 용수(龍水), 관동(官洞), 전여(箭如)의 세 마을을 병합하여 삼화동이라 하였다.
  삼화1리는 15세기경(1400년경) 나씨(羅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삼화2리인 전여 마을은 17세기경(1600년경) 영천이씨 이계원(李啓元)이란 분이 개척했다고 하며, 장등(長嶝) 마을은 같은 시대에 김현철(金顯哲)이란 분이 개척했다 하며, 월전(月田) 마을도 같은 시대에 오씨(吳氏)라는 분이 개척했는데 마치 보름달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달밭골 또는 월밭골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덕면(盈德面)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 때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삼화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으로는 삼화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삼화리의 위치는 동은 영덕읍 구미리, 서는 오천리, 남은 신애리, 북은 국사봉을 면계(面界)로 영덕읍 화천리가 있다.

 

 
관동(官洞) :
사리골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구읍곡이 있어 관원들이 살았다고 함.
 
사리골(沙里谷,寺里谷) :
용수골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절이 있은 흔적이 있다 함.
 
용수골(龍水洞) :
삼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 마을 한 가운데 있었는데 이곳에서 용이 등천(登天)하였다 함.

         

▒ 오천리(午泉里)

  오천리 동명의 유래는 오일(午日)의 오(午)자와 김천(金泉)의 천(泉)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천1리인 오일리(午日里)는 15세기인 세종(世宗) 때(1428년경) 야은(野隱) 배담(裵湛)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오천2리인 김(금)천(金泉) 마을은 15세기에 홍씨(洪氏)라는 분이 개척하여 김천이라 했다 하며, 또 정씨(鄭氏)라는 분이 마을 입구를 개척, 돈골(金谷)이라 하다가 떠나고 다시 밀양박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금동(上金洞), 중금동(中金洞), 하금동(下金洞), 오일동(五逸洞)을 병합하여 오천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오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오천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오천리의 위치는 동은 영덕읍 구미리, 화개리, 천전리, 서는 신양리, 남은 삿갓봉(해발320m)과 달산면 대지리, 북은 율전리, 옥류리가 있다.

         

 
오일(五逸) :
오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18세기 전기(1710년경)에 배씨 가문의 5형제가 마을 보(洑)를 만들고 오가대리(五家大里)라 하다가 오일리라 개칭했다 함.
 
김(금)천동(金泉洞, 김치이) :
오일 북쪽에 있는 마을임.
그 밖에 상금, 마금(磨金), 하금 등이 있으며 이들 마을은 일제(日帝) 때 금광을 개설하였으며 계곡 냇가에는 사금(沙金)을 채취하기도 하였다.

         

▒ 신양리(新陽里)

  신양리 동명의 유래는 신기(新基)의 신(新)자와 양원리(陽原里)의 양(陽)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 후반(1580년경)에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입주하여 양원과 신기를 개척하였고, 월성이씨(月城李氏)가 같은 시기에 입주하여 식률(植栗)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동, 식률동, 양원동의 각 일부와 서면(西面)의 재궁동(齋宮洞) 일부를 병합하여 신양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신양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신양리의 위치는 동은 오천리, 서는 눌곡리, 남은 달산면 대지2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북은 눌곡리, 신안리가 있다.
  이 마을은 안동과 영덕간의 34번 국도가 통과하며 달산천(達山川)과 지품천(知品川)이 합류하여 오십천(五十川)을 이루어 수원(水源)이 풍부한 편이다.

         

 
장터(삼거리) :
신양리 중앙에 있는 마을로 옛날 장이 섰음.
 
신양리 :
신양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

         

▒ 눌곡리(訥谷里)

  눌곡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황곡(黃谷)이라 했다는 말이 있는데 황(黃)은 누르실 또는 누리실이라고도 하며, 이 누르실의 한자 표기로 눌곡(訥谷)이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마을은 어느 시대인지 경주김씨의 김주린(金周麟)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동명을 황곡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양원동, 구룡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눌곡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눌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눌곡리의 위치는 동은 신양리, 서는 송천리, 용덕리, 남은 달산면 인곡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북은 신안리가 있으나 동은 시루봉, 남은 퉁소암, 북은 마고산 등이 가로놓여 있다.

▒ 용덕리(龍德里)

 용덕리 동명의 유래는 구룡기(九龍基)의 용(龍)자와 대덕동(大德洞)의 덕(德)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용덕1리는 16세기경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용덕2리는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임씨(任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지형(地形)이 흡사 사자가 머리를 내미는 것 같다 하여 사자골이라고도 불렀다 하며, 일명 대덕리(大德里)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대덕동과 구룡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용덕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용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용덕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용덕리의 위치는 동은 달산면 대지리와 눌곡리와 신양리, 서는 청송군, 남은 달산면 인곡리, 북은 송천리가 있다.

         

 
구룡터(九龍基, 구룡) :

용덕리에서 가장 큰 마을임.

 
대덕동(大德洞) :
구룡터 서쪽에 있는 마을임.
 
사자동(獅子洞) :
대덕동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웃절골, 아랫절골(上, 下寺谷) :
절이 있었던 마을임.

         

▒ 송천리(松川里)

  송천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주위에 소나무 숲이 무성하였고 또 옛날 이 마을에 솔가지를 따서 먹(墨)을 제조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한 분은 15세기 후기인 임진왜란(壬辰倭亂 : 1592) 2년 전인 1590년에 수안김씨의 묵와(默窩) 김간(金)이 피난처를 찾는데 송(松)자 든 지명을 찾아서 영해면 괴시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마을 이름을 송대(松臺)라 했다 하며, 또 들국화가 많이 피어 국골(菊谷)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묵동(上墨洞), 외묵동(外墨洞)을 병합하여 송천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송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송천리의 위치는 동은 눌곡리, 서는 청송군과 기사리, 남은 용덕리, 북은 낙평리가 있으며 대둔산(大遯山)의 연봉(連峰)들이 마을을 감싸고 있으며, 옛날에는 송림(松林)이 울창하여 인적이 드물었다고 한다.

         

 
먹골(먹동, 墨洞) :

송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

 
밭먹골(外墨洞) :
먹골 바깥(북)쪽에 있는 마을임.
 
안먹골(內墨洞) :
먹골 안쪽에 있는 마을임.
 
웃먹골(上墨洞) :
먹골 위쪽에 있는 마을임.

         

▒ 낙평리(洛坪里)

  낙평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 앞으로 오십천(五十川)이 흘러 들어 수원(水源)이 풍부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된다.
  이 마을은 16세기 중종(中宗) 연간(1530년경)에 제주고씨(濟州高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1636) 최림(崔淋)이란 분이 호란을 피해 이 마을로 들어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신리동과 당시 진보군(眞寶郡) 동면(東面)의 낙평동 일부를 병합하여 낙평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낙평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신안리, 서는 기사리, 수암리, 남은 송천리, 북은 속곡리가 있으며 마을의 산주령(山主嶺)은 오마형국(五馬形局)이라 하며 앞에는 오십천 냇물이 흐르며 서쪽에는 신선암(神仙巖)이 우뚝 솟아 있다.     

 

 
세류동(잔버들, 細柳洞) :

낙평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버드나무가 많았다고 함.  

         

▒ 신안리(新安里)

신안리 동명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성(新星) 등 몇몇 자연 마을을 합쳐 새롭게 출발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싶다.
이 마을은 17세기경(1629년경)인 인조(仁祖) 연간에 남원방씨(南原房氏)가 줄포(茁浦)를 개척하였다 하며, 그 뒤 유씨(兪氏)가 들어왔고 방씨는 복곡(洑谷)으로 이주하였고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산내(山內)를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상주동(줄포), 중주동(신성), 하주동(산내)을 병합하여 신안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안리의 위치는 동은 오천리, 서는 낙평리, 남은 눌곡리, 북은 율전리 속곡리가 있다. 이 마을은 옥녀봉(玉女峰)과 마고산(麻姑山)이 뒤에 있으며, 영덕읍을 통하는 34번 국도(國道)가 마을 앞을 지나는 면 소재지이다.

         

 
거랫마 :

신안리에 있는 마을임.

 
뫼안(山內, 下注洞,임안) :
새마 동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마고산(麻姑山)이 있음.
 
새마(新星, 中注洞) :
신안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약 60여년 전에 새로 생긴 마을임.
 
솔정마을 :
거랫마와 새마 사이에 있는 마을로 큰 소나무 정자가 있었음.
 
용치매기 :

생싯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임.

 
줄포(茁浦, 上注洞) :

새마 북쪽에 있는 마을임.

         

▒ 속곡리(粟谷里)

  속곡리 동명의 유래는 속골짜기가 되므로 속골 또는 속동, 속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지세가 높으며, 신안리에서부터 시작되어 무려 30여리에 이르는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 승지(勝地)로 이름이 있는 속곡계곡이 있다. 마을은 17세기초(1620년경)에 옥산장씨가 하속곡을 개척하고, 뒤이어 임씨가 상속곡을 개척한 뒤 18세기(1702년경)에 평산신씨 신문식(申文)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뒤이어 윤씨(尹氏), 김씨(金氏), 차씨(車氏) 등이 들어 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말기에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속동(上粟洞), 하속동(下粟洞), 외속동(外粟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속곡동이라 해서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속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속곡리의 위치는 동은 도계리, 율전리, 서는 수암리, 낙평리, 복곡리, 남은 신안리, 북은 영해면과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당촌(堂村) :

지와집마 옆에 있는 마을로 당이 있었음.

 
양지마 :

속곡리에 있음.

 
예탑(예터, 古基) :

속곡리에 있음.

 
지와집마(瓦村) :

예탑 옆에 기와집이 있음.

 
그 밖에 상속동은 마을 위쪽에 있는 마을로 일명 신촌(申村)이라고도 하며 하속(下粟)은 마을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일명 윤씨촌(尹氏村)이라고도 했다 한다. 

 

▒ 율전리(栗田里)

  율전리 동명의 유래는 밤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밤실 또는 율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5세기 중기에(1450년경) 김녕김씨 김후생(金厚生)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1500년 경에 연안차씨 차제동(車濟東)이라는 분이 이곳에 들어왔다고 하며, 현재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 뒤 17세기 중기(1650년경) 경주최씨의 최가은(崔家隱)이라는 분이 이 곳을 개척하고 윗밤실(上栗洞)이라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율동(上栗洞), 하율동(下栗洞) 등을 병합하여 율전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율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율전리의 위치는 동은 삼화리, 옥류리, 서는 속곡리, 남은 신안리, 오천리, 북은 도계리가 있으며 마을 뒤에는 맹동산(孟冬山)이 있다.

 

 
아래밤실(下栗洞) :

밤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밤실(上栗洞) :

밤실 위쪽에 있는 마을임.

         

▒ 도계리(道溪里)

  도계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복숭아꽃이 많이 피어 도계동(桃溪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도(桃)」자를 「도(道)」자로 바꾸어 도계동(道溪洞)이라 하였다.
  도계1리는 17세기경 김녕김씨(金寧金氏)의 김연생(金蓮生)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많은 지사(志士)가 양성되어 독지곡(篤智谷) 또는 하소(下所)라 했다 한다.
  도계2리인 배목(船項) 마을은 17세기경 임씨(林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지형이 배를 매어둔 나루터와 같다 하여 동명을 배목이라 했다 하며, 절골 마을은 16세기경 유씨(劉氏)라는 분이 입주하였으며 절이 있었는데 소실되었다 하며 배목과 절골 사이에 있는 새마을(新村)은 류씨(柳氏)가 새로 마을을 이룩했다 하며 또 가라골은 차씨(車氏)가 개척했다고 하며 이 마을들을 상소(上所)라 칭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소동(上所洞), 하소동(下所洞)을 병합하여 도계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도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 구역상 도계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도계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조항리(馬項里), 옥류리(玉柳里), 서는 영양군 석보면(石保面) 포산리와 군계(郡界)를 이루고, 남은 율전리, 속곡리, 북은 영해면 대리(大里 : 대동)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독지골(篤智谷, 下所洞) :

도계 남쪽에 있는 마을임.

 
상소동(上所洞) :

하소동 북쪽에 있는 마을임.

 
상소항(上所項) :

독지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상소동 길목이 됨.

         

▒ 옥류리(玉柳里)

  옥류리 동명의 유래는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경(1425년경) 문화류씨(文化柳氏)가 외옥류(外玉柳)를 개척하고 또 진주강씨(晉州姜氏)가 내옥류(內玉柳)를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내류동(內柳洞), 외류동(外柳洞)을 병합하여 옥류동이라 해서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옥류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옥류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대곡리, 칠성리, 서는 도계리, 남은 율전리, 북은 축산면 조항이며 마을 뒤에는 옥녀봉(玉女峰 해발400m)이 있다.

         

 
내류동(內柳洞) :

옥류 안쪽에 있는 마을임.

 
외류동(外柳洞) :
옥류 바깥쪽에 있는 마을임.

         

▒ 신애리(信愛里)

  신애리 동명의 유래는 믿으면서 사랑하라는 곧 박애(博愛) 정신의 상징적인 뜻이 담긴 이름으로 천주교(天主敎) 등 종교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마을은 오천(午泉)리 산 219번지 산 중턱에 위치한 음성 나환자(癩患者) 마을로 1965년 3월 정부 주선으로 신애원(信愛院) 또는 신애농장(信愛農場)으로 오천 1리에 속해 있다가 1989년 1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1021호로 오천리 일부를 분리하여 신애리로 독립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 안동을 연결하는 34번 국도에서 오십천 냇가를 건너가면 바로 마을 입구가 된다.
  이 마을은 매월 정부에서 지급하는 양곡과 연료비, 부식비 등을 수령하여 생활하며 일부는 복숭아 등 과수재배, 양계(養鷄), 양돈(養豚)으로 생활하며 천주교 안동교구(安東敎區)에서 지원받기도 한다.

 

▒ 수암리(壽岩里)

  수암리 동명의 유래는 수곡(壽谷)의 수(壽)자와 대암(臺岩)의 암(岩)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수곡(水谷)으로도 쓴다. 동명은 대암(臺岩) 곧 바위처럼 장수(長壽)하라는 상징적인 의미로써 대암에서 동명이 붙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마을은 16세기 전기(1514년경)에 제주고씨(濟州高氏)가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마항(馬項)이라 했다 하며, 그 뒤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수곡동, 수내동(臺岩) 그리고 신리 일부와 진보군(眞寶郡) 동면(東面)의 낙평리 일부를 병합하여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수암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속곡리, 낙평리, 서·북은 복곡리, 기사리, 남은 낙평리가 있다.

         

 
대암(臺岩, 臺內洞) :

수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대(臺)를 이룬 바위가 있음.

 
수곡(水谷) :
대암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깊은 산골짜기에 물이 흘러내린다고 하며 옛날 호랑이가 있어 범호골 이라고도 했다 함.

         

▒ 복곡리(洑谷里)

  복곡리 동명의 유래는 보(洑)가 있으므로 보골 또는 보곡이라 하였는데 변하여 복곡이 되었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반(1480년경) 죽산안씨(竹山安氏)가 개척하여 제지(製紙)공장을 세워 지통(紙桶) 마을이라 했다 하며, 또 같은 해에 분성김씨(盆城金氏)가 개척하여 고등곡(孤燈谷)이라 했다 하며, 또18세기초에는 청송김씨(靑松金氏)가 들어와 보두마을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복곡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복곡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수속곡리, 서는 지품리, 기사리, 남은 수암리, 북은 원전리가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으며 들이 적고 산림이 울창한 마을이다.

 

 
고등골(孤登谷, 고드골) :

복곡 서쪽에 있는 마을임.

         

▒ 원전리(院前里)

  원전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지품원(知品院)의 앞이 되므로 원앞 또는 원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1460년경)에 이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여 원터라 하였으며, 그 무렵 향교(鄕校) 제관(祭官)이 거주하였다 하여 제관곡(祭官谷)이라 하였으며, 그 뒤 향장(鄕長) 임병영(林秉英)이라는 분이 재양(載陽)이라고도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재곡동(才谷洞)을 병합하여 원전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원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원전리의 위치는 서북으로는 황장리, 지품리, 북은 영양군 화매리와 군계(郡界)를 이루며 남쪽은 복곡리가 있으며, 영덕 안동간 34번 국도가 마을을 통과한다. 옛날에는 5일 시장이 있었다.

         

 
목너매 :

원 앞 서북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모치(모티, 모퉁이) :
원전 아래에 있는 마을임.
 
웃모치 :
원전 서북쪽에 있는 마을임.
 
장   터 :
원전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장이 섰음.
 
재곡동(才谷洞) :
원전 동북쪽에 있는 마을임.
 
쟁   골 :
높은 꼭지 남쪽에 있는 마을임.
 
주막모치 :
원 앞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었음.

         

▒ 지품리(知品里)

  지품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지품부곡이 있었으며, 조선시대 이 마을에 지품원(知品院)이 있었던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에 (1470년경)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하며, 그 뒤 4성(姓)의 지사(志士)가 공론하였다 하여 지품이라 하기도 하고 학곡(鶴谷)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본래 옛 영해부(寧海府)에 딸린 지품부곡(知品部曲)이 있었고, 조선시대 지품원(知品院)이 있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대동동(大同洞)을 병합하여 지품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지품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지품리의 위치는 동은 원전리, 서는 청송군, 남은 기사리, 북은 황장리가 있다.

 

 
대동동(大同洞) :

지품 동북쪽에 있는 마을이며, 그밖에 대학동, 소학동이 있다.

         

▒ 기사리(其思里)

  기사리 동명의 유래는 옛날 신라(新羅) 말년(未年 935년경)에 신라의 많은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 대둔산(大遯山) 아래로 들어와 은거(隱居)했으므로 동명을 기사촌(其仕村)이라 했으나 현재는 그것을 생각한다 하여 기사리(其思里)로 고쳐쓰고 있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송씨(宋氏)라는 분이 벼슬을 버리고 초야(草野)에 살고 싶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기사(其思)라 했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북면(北面) 지역이었으나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현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영덕군에 속했으며 그 뒤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조선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할 때 평지동(平地洞)을 병합하여 기사동(其思洞)으로 하고 지품면에 편입되었으며, 그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기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사리의 위치는 동은 낙평리, 수암리, 복곡리가 있고 서는 대둔산과 청송군 부동면(府東面)과 군계를 이루고, 남은 지품리가 있다.

         

 
안기사(內其思) :

기사리 안쪽에 있는 마을임.

 
평지마(平地洞) :
기사 북쪽 평지에 있는 마을임.

         

▒ 황장리(黃腸里)

  황장리 동명의 유래는 황장산 밑이 되므로 붙인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 후기(157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남평문씨(南平文氏)가 들어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조선 초기에 이곳에서 나는 나무를 나라에서 재목으로 쓰기 위하여 황장봉산으로 봉하였으며, 황정(黃井)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북면(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토곡동(土谷洞)을 병합하여 황장동이라 하고 지품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황장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황장리의 위치는 동은 원전리, 서는 황장재 넘어 청송군 진보면과 군계를 이루며, 남은 지품리, 북은 영양군 석보면 화매리가 있다.
  이 마을의 전래 동명은 황장 동쪽에 톳골, 토곡(土谷洞)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