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인 물

  고려시대 이전에 있어서 지역의 인물로는 현재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부터 문무(文武) 혹은 불교, 유학으로 이름난 분이 많이 배출되어 지역을 빛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성리학이 정치사상의 근간이 되는 한편,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으로 자리잡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본 군에서도 학문을 닦아 벼슬길에 나가기도 하고, 아니면 초야에 묻혀 자기의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도 하고, 국난을 당하여서는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고 위국충절 하기도 하는 등, 우리 지역은 인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졌다.
  위와 같은 인사 중에 고승대덕(高僧大德), 묘우(廟宇), 향사(鄕祠),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던 분과 문집이 간행된 분, 그리고 기존의 군읍지에 등재되었던 분, 충정이 뛰어난 분 외에 기타 등재 기준에 따라 이를 게재하였다.

   김취린(金就) :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시 호장중윤으로 큰 공을 세워 야성군에 봉해졌으며, 영덕(야성)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박송비(朴松庇, ?∼1258) : 본관은 영해, 고려 후기의 장군·재상, 고종 45년(1258)에 장군으로 대사성 유경(柳璥), 별장 김인준(金仁俊)등과 함께 최씨 무신정권의 최후의 지도자 최의(崔)를 살해하고 최씨 무신정권의 타도에 공을 세움. 이 공으로 대장군이 되고 위사공신이 됨. 이 공로로 출신지인 영해는 덕원소도호부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예주목으로 승격되었다.
1262년 공신당(功臣堂)에 초상화가 걸리면서 동지추밀원사우산상시(同知樞密院事右散常侍)가 되었으며, 1263년에는 수사공태자소부좌복야(守司空太子少傅左僕射)가 되었고 1278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러 죽었음.

   박세통(朴世通, 1187∼1263) : 본관은 영해, 고려 고종과 충열왕대의 문신, 이제현(李齊賢)이 쓴 「역옹패설」의 거북전설의 주인공임, 박세통이 통해현(평안도쪽)의 현령으로 있을 때 육지로 올라온 거북을 구해 주자 거북이 그 은혜를 보답하였다고 함. 문하시중평장사통해군(門下侍中平章事通海君)으로 봉해짐.

 

   박홍무(朴洪茂, 1227∼1285) : 본관은 영해, 고려 충열왕대의 문신, 부(父)는 문화시중평장사 세통임. 만년에 현재의 거무역리에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키는 한편 봉송정(鳳松亭)을 신축하여 자적하였음. 문하시중평장사밀직사세자빈객령(門下侍中平章事密直使世子貧客令)을 역임.

   박함(감)(朴쫛. 1256∼1338) : 본관은 영해, 호는 역옹(翁)으로 고려 충숙왕대의 문신, 부는 홍무임. 경서와 사서에 능통하였으며 관이 상징군에 이르렀음. 뒤에 관이 문화시중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정치가 어지러워짐을 보고 거무역리에 은거하였음. 사후에 강릉백으로 봉해짐.

   김    택(金쫛澤. 생몰년미상) :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함창, 시호는 간재(簡齋). 부는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인완(麟琬). 향교대현으로 괴시리에 침향정을 신축. 가정 이곡을 여서로 맞이함. 뒤에 광정대부도첨의 찬성사로 봉해짐.

   김    요(金쫛饒, 생몰년 미상) : 본관은 함창, 부는 김택이다. 관이 중대광찬성사 함녕군이 되었으며, 삼사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여동생을 가정 이곡에 시집을 보내어 인척이 된다. 가정 이곡의 무가정을 차운한 시에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이    곡(李쫛穀. 1298∼1351) : 본관은 한산.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부는 자성(自成). 1317년에 거자과(擧子科)에 합격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당시 영해부의 향교대현 김택(金澤)의 여식과 혼인하여 영덕지역과 인연을 맺었음. 이후 원에 입국 정동성 향시와 전시에 합격하여 원에서 관리생활을 하다 귀국하여 밀직부사, 지밀직사사 등의 관직을 역임. 다시 정당문학도첨의찬성사를 역임하고 한산군으로 봉해짐.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하며, 영해 관련 시로는 「영해무가정차김간재시운(寧海無價亭次金簡齋時韻)」 1수와 「차영해북양루시운(次寧海北凉樓詩韻)」, 「차영해부객사운(次寧海府客舍韻)」 각 1수가 있으며 기문으로는 「영해부신작소학기(寧海府新作小學記)」가 있음. 시호는 문효(文孝)임.

   백    견(白쫛堅. 생물년 미상) : 본관은 대흥. 충렬왕대의 무신. 응양중랑장승평부사(鷹揚中郞將昇平府使). 영해 박씨 문화시중평장사 박감의 여식과 혼인으로 영해와 인연을 맺음.

   백문보(白文寶. 1303∼1374) : 자는 화보(和父), 호는 담암(淡庵), 본관은 직산(稷山), 부는 견(堅)임. 충숙왕대에 문과에 급제. 밀직제학, 정당문학을 역임하였으며, 직산군으로

 

봉해짐. 시호는 충간(忠簡)임.

   백문질(白文質. 생몰년 미상) : 본관은 직산. 부는 견이고 문보의 동생임. 중정대부종부령(中政大夫宗簿令)을 역임.

   나    옹(懶쫛翁. 1320∼1376) : 고려말의 고승, 성은 아씨(牙氏), 속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 혹은 강월헌(江月軒), 현 창수면 가산리 불미골에서 출생, 부는 서구(瑞具)임. 1347년 원나라에 구법(求法) 유학한 후, 1358년에 귀국하여 왕사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總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해짐. 저서로는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歌頌)」 1권이 있음.

   신    현(申쫛賢.1298∼1377) : 고려 충선왕과 공민왕대의 학자로 호는 운월재(雲月齋), 혹은 불훤재(不喧齋)라고 하며, 금자광록대부를 역임하고 영해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을 받았다.

   이    색(李쫛穡. 1328∼1396) : 고려말의 문신, 학자, 본관은 한산.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으로 부는 가정 이곡(李穀)임. 영해면 괴시리 외가에서 출생함. 134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1353년에 원에 가서 향시와 정동행성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원에서 관리생활을 함. 귀국하여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을 역임하고 1367년에 대사성, 1373년에 한산군으로 봉해지고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겸 성균관대사성, 1391년에 한산 부원군에 봉해짐. 저서로는 「목은문고」와 「목은시고」가 있음.
목은의 영해관련 시부 혹은 기문으로는 「관어대부」, 「유사정기(流沙亭記)」, 「억영해(憶寧海)」 등의 10여수가 목은시고에 전함.

   박   강(朴쫛强. 생몰년 미상) : 고려말의 공민왕과 우왕대의 무신. 본관은 영해, 부는 천부(天富). 사재소감, 중현대부서운정(中顯大夫書雲正), 축산도병선도관령(丑山島兵船都管領)을 역임. 1386년에 현 포항시 북구 송라에 침입한 왜구 5∼6명을 목베었으며, 1388년에는 축산도병선도관령으로 축산도에 침입한 왜적을 크게 이기고 물리쳤음.

   백   진(白쫛瑨. 생몰년 미상) : 고려말 공민왕과 우왕대의 문신 홍건적난 때 총병관의 참좌(參佐)로 사재소감 박강과 적을 크게 쳐부수는데 공을 세움. 가정대부 판사(嘉靖大夫判

 

事)와 정주목사, 검교한성판윤(檢校漢城判尹)을 역임. 현 창수면의 장육사에 보존되어 있는 건칠좌불상을 1395년에 조성 위정사에 안치함.

   신득청(申得淸,1332~1392) : 고려말의 문신. 호는 이유헌(理猷軒)으로 부는 감찰어사 신용희(申用羲)이고, 조부는 문정공 신현이다. 본명은 중청(仲淸)이었는데, 공민왕대에 문과에 급제하자 왕이 사람을 얻었다 하여 이름을 득청이라 하였다 한다. 역대전리가를 지어 공민왕의 실정에 대하여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창수면 인량리에 퇴거하여 살았으며, 고려가 망하자 동해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관은 판례빈시사태복정(判禮賓寺事太僕正)을 역임하였다.

   신자성(申自誠, 1397∼1467)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해우(海隅)이다. 부친은 신득청이다. 태종 1년(1401)에 권근 등이 포은 정몽주를 작시(爵諡)하고자 할 때 이에 반발하여 축산도에 돌아왔다.

   백   승(白쫛昇, 생몰년 미상) : 본관은 대흥으로 부친은 백진이다. 자헌대부 대호군에 이르렀다.

   정을현(鄭乙賢, 생몰년 미상)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본관은 영덕이며, 부친은 위화도회군시 공을 세운 정송(鄭松)으로 관은 낙안군수와 평안도도사를 역임하였으며, 품계는 조산대부에 이르렀다.

   왕종신(王宗臣, 생몰년 미상) : 고려조의 종친인 왕세흥의 아들로 사재부정(司宰副正)과 시중을 역임하였다.

   남   수(南쫛須, 1395∼1477) :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양이다. 호는 송정거사(松亭居士)로 직장, 주부, 감찰, 용담현령을 역임하였으며, 세종 30년(1448)에 벼슬을 내어 놓고 산천경개를 즐기며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단종의 손위(遜位) 소식을 듣고는 문을 닫고 세상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윤   황(尹쫛, 1404~1466) : 본관은 파평으로 자는 성집(聖執), 호는 명은(溟隱)이며, 문종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과 호조판서에 이르렀다고 한다. 단종 손위시에 영해로 이거하여 와 파평윤씨 영해 입향조가 되었으며, 신도비가 있다.

 

   윤   철(尹쫛哲, 생몰년 미상) : 정종 3년(1401)에 부친인 군수 윤과(尹科)를 따라 영덕에 와서 살았으며, 어릴 때부터 가정과 상전벽해와 같이 변하는 세상사를 근심하여 부조(父祖)의 유업을 이어 받아 서사(書史)에 관심을 기울여 명망이 있었다. 일설에는 연산군 때에 영덕에 이거하였다고 한다.

   유   유(柳쫛) : 본관은 문화이고, 자는 원오(元五), 호는 은오(隱湖) 이다. 세종대의 문신으로 영해읍성의 증,개축을 상신하였으며, 세종 21년(1439) 이전에 삼가현감을 지냈다.

   이승길(李承吉) : 본관은 영천이고, 호는 처호당(處湖堂)이며, 관은 승지에 이르렀다. 한산 이돈우(李敦禹)의 묘갈명이 있으며, 영천 운천사(雲川社)에 제향되고 있다.

   권   책(權 策, 1444∼?)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오봉(五峯)이다. 부친은 부제학 권자홍(權自弘)이다. 세조 2년(1456)에 종부(從父) 충장공 권자신(權自愼)과 형 저(箸) 와 서(暑)가 사육신과 단종복위 모의에 참여하였는데, 미리 모의가 발각되어 집안에 화가 미쳤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영해에 귀양왔다. 단종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자 왕암에 올라가 북쪽을 보며 호곡하였으며, 서쪽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 철종대에 대봉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순종조에는 숙모전에 추향되었다.

   신수손(申遂孫) : 1400년대의 인물로 효행이 있었으며, 후릉 상소사건에 연루되어 영해에 은거하였다. 참봉을 지냈다. 증손이 죽노 신활이다.

   정   진(鄭쫛) : 관이 삼사도사에 이르렀다.

   황   전(黃쫛銓) : 관이 부령(部令) 혹은 승지에 이르렀다.

   남필명(南必明)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매월헌(梅月軒)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상에 중히 추대되었으며, 여섯 아들의 교육을 잘 시켜 세상의 기대를 모았다. 문집이 있다.

   남세우(南世虞, 1479~1550) : 본관은 영양으로 송정거사 남수의 증손이다. 성종조에 정릉참봉에 제수받았으며, 향약을 규정(糾正)하여 붕당의 승복을 받았으며, 이민(吏民)의 흠모를 받았다.

 

   남세주(南世周, 1494~1573) : 본관은 영양으로 송정거사 남수의 증손이다. 점필제 김종직의 문인으로 홍문관 전한에 이르렀다.

   김   곤(金쫛崑, 金崑文) : 성종조의 인물로 헌납 김수문의 동생으로 호는 해은(海隱), 학행(學行)이 뛰어나 송라역승(松羅驛承)으로 추천(推薦)되었다.

   신명령(申命齡, 생몰년 미상) : 연산군과 중종대의 인물로 주부 신희의 넷째 아들이다. 명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풍림리(楓林里, 현 우곡리)에 집을 짓고 살았으며, 다스림에는 효제(孝悌)로서 하였다. 늙으막에 초야에 묻혀 지내며 가학을 열심히 닦았다. 관은 수의부위(修儀副尉)에 올랐다.

   백수렴(白受廉, 생몰년 미상)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모정(茅亭)이다. 가정 8년(1530)에 부사 공서린과 향교를 이건하였고, 융경 4년(1570)에 태화루를 창건하였으며, 부사 정세필과 유일재 김언기(唯一齋 金彦璣)와 학제를 마련하여 향내의 선비들을 이끌었다.

   김   사(金쫛獅) : 중종대의 인물로 본관은 야성이고 자는 수령(首靈), 호는 국헌(菊軒)이다. 부친은 진사 김응청으로 학업(學業)이 높고 경학(經學)에 깊었으며,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제수(除授)받았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신봉상(申鳳祥, 1518∼1567)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중의(仲儀)이다. 부친은 공북정 신종부이며, 과묵(寡默)하며 희노(喜怒)를 잘 나타내지 않았으며, 의를 드러나게 행하였다. 증직으로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를 제수받았다.

   이응벽(李應璧, 1543∼1599) : 본관은 청안. 호는 칠송당(七松堂)으로 부는 이의감(李宜堪)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창의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렸다. 1596년 9월에는 팔공산에서 회맹하여, 망우당과 합병하여 공산의 왜적을 크게 무질렸다. 효행으로 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며, 문집으로 「칠송당실기」 2권 1책이 있다.

   신규년(申年, 1544∼1592) :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덕수(德), 호는 풍림(楓林)이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영해에 침입하자 의병을 모아 창수면 위정산에서 대적하다 순절하였다. 이 공으로 진용교위를 제수받았으며, 뒤에 통훈대부 사헌부감찰에 증직되었다.

 

   김기하(金器夏) : 본관은 김해로 부친은 교위 김대원(金大元)이다. 일찍이 동생과 함께 영덕현 서쪽에 이거하여 살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김성하(金成夏), 대구의 의병장 최동보(崔東輔)와 함께 창의하여 삼로(三路)를 나누어 요새를 삼는 한편, 복병하여 적을 치니 전공이 많았다. 정유재란 때 진영을 울산 서생포로 옮기는 도중 창암(倉巖)에 이르는 도중에 적을 만나 연전하였으나, 밤이 되어서 화살이 떨어져 결국은 순사하였다.

   차응주(車應周, 1524~1585) : 본관은 연안으로 자는 두여(斗輿), 호는 대봉(大峯)이다. 중종대(1506∼1545)에 충청도태원(忠淸道太原)에서 영해부(寧海府) 대동봉하(大洞峯下)에 이거(移居)하여 살았다. 퇴계문(退溪門)이고 학문(學問)이 정박(精博)하였으며, 기고봉(奇高峯), 조월천(趙月川), 백성헌(白惺軒) 등과 교류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김성하(金成夏) : 본관은 김해로 자는 서암(棲庵)이다. 김기하의 동생이다. 경주의 승지 우계당 김순(友溪堂 金洵)의 문하이며, 문장에 능하였으며, 일찍이 형과 영덕의 서쪽 궁벽진 곳인 북동대 해월봉 아래에 거처하면서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서암이라 이름붙이고 독서를 하고 지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창의하여 울산전투에서 기공(奇功)으로 적을 물리치자 명나라 장군 마귀(麻貴)도 크게 칭찬하였으며, 이후 일곱 번 싸움에 여섯 번이 대첩(大捷)이었으며, 돌아오는 길에 창암에 이르러 형을 위하여 호곡을 하여 동기간의 슬픔을 나타내었다.
군공으로 선략장군에서 절충장군으로 승진되었으며, 특별히 부산첨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무원종훈 공신 3등에 올랐으며, 인조조에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가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으며, 시호로는 충선(忠宣)을 받았다.

   신경제(申經濟, 1555∼1614)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경열(景說)이고, 호는 운계(雲溪)이다. 부친은 판결사에 증직된 신봉상이다. 임진왜란 때에 곽재우의 화왕산성에 참가한 공로로 군자감판관을 제수받았으며, 선교랑도 제수받았다. 김난서, 박인걸 등과 남강서원을 창립하였으며, 문집이 있다.

   배탄수(裵誕壽) : 본관은 분성으로 자는 장춘(長春)이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이 영해를 거처 남하할 때 영덕현의 부책임자(貳令)이 되어 성을 지켰다.

   권응주(權應周,1539∼1610)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곡강정(曲江亭)이다. 임진왜란 때 종자(從子) 3명을 데리고 곽재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였다. 군공으로 예빈시봉사에 되었으며, 화왕동고록에 실렸다.

 

   정승서(鄭承緖, 1566∼1640) : 본관은 야성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경훈, 백중립과 함께 경주 문천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영천, 경주복성전투, 문경당교전투에 참가하였다. 조산대부 전옥서 참봉, 선무원종 공신 1등에 올랐다.

   강계남(姜誡南, 1599∼ ?) : 본관은 진주로 호는 경재(警齋)이다. 부친은 군자정 강득호(姜得豪)이다. 학문이 깊었으며, 특히 역에 밝았다. 병자란에 경기도 광주 부근의 쌍령에서 청나라 군사와의 싸움에 힘을 보태고자 하였으나, 인조대왕의 강화로 이를 이루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숙종조에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에 증직되었다.

   신   활(申쫛活, 1576∼1643) : 호(號)는 죽노(竹老)이며, 박통경사(博通經史)하였다. 여헌장현광문(旅軒張顯光門)이며, 예론(禮論)과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임란(壬亂)에 아버지를 따라 화왕진(火旺陣)에 참획(參劃)하였으며, 단산서원(丹山書院)을 창립(創立)하여 학령(學令) 12조(條)를 정(定)했으며, 관(官)은 장락원정(掌樂院正)에 이르렀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1608년 선조의 장례에 차비관(差備官)으로 수행한 공으로 가자되었으며, 미산사(眉山祠)에 배향(配亨)되다.

   백인국(白仁國, 1530∼1613) : 유일제김언기문(唯一齊金彦璣門)이며, 전심역학(專心力學)하여 서학교수(西學敎授)가 되었으며, 명석(名碩)과 교유(交遊)가 많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子) 민수(民秀)를 화왕진(火旺陣)에 보냈다. 호(號)는 족한당(足閒堂)이며, 문집(文集)이 있다.

   임   문(林쫛文, 초명은 기()) : 본관은 울진이고 호는 양직(養直)으로 울진 임씨 영덕 입향조이다. 퇴계문(退溪門)으로 학문에 노력하였으며, 천성이 불구영달(不求榮達)하였으며, 진리 탐구를 좋아하여 당시(當時) 홍유석덕(鴻儒碩德)이 벗하려고 애썼으며, 수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제수받았다.

   이선도(李善道, 1544∼ ?) : 선조대의 인물로 호(號)는 영모당(永慕堂)이며, 부친은 진사 이완(李完)이다. 숙조(叔祖)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이고, 독지근학(篤志勤學)하였으며, 관(官)은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이르렀다. 문학(文學)이 있었다.

 

   정   진(鄭쫛, 생몰년 미상) : 선조 23년(1590)에 기자전 참봉을 제수받았다.

   권의범(權宜範, 1558∼1624)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사헌(士憲)이며, 충순위 권희언의 손자이다. 임진왜란에 홍의장군 곽재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였다. 증직으로 사복시정을 제수받았다.

   권의각(權宜恪, 1574∼?)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사엄(士儼)이다. 충순위 권희언의 손자이다. 임진왜란에 참여하여 용사훈록에 올랐다.

   박응천(朴應天,1556∼1603) : 본관은 영해로 임진왜란 때 영해향교의 오성위 위패를 등에 지고 칠보산 암곡 사이로 피난한 후, 왜란이 안정되자 다시 봉안하여 난세에 위패를 안전히 모셨다. 운계사(雲溪社)에 제향되었다.

   정승서(鄭承緖, 1566∼1640) : 본관은 야성으로 자는 효백(孝伯)이며, 부친은 김제 웅치 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순국한 김제군수 정담 장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였으며, 음직으로 전옥서 참봉에 제수되었다.

   박인걸(朴仁傑, 생몰년미상) : 본관은 강릉으로 부는 숭인전 참봉 박대붕(朴大鵬) 이다. 용모(容貌)가 수려(秀麗)하고 덕기(德器)가 있었으며 김난서(金鸞瑞), 신경제(申經濟)와 남강서원(南江書院)을 이룩했고 동중추(同中樞)를 제수받았다.

   백민수(白民秀, 생몰년미상) : 본관은 대흥으로 부친은 족한당(足閒堂) 백인국이다. 관은 군자감 참봉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때에 화왕산진영에 군량미를 대었으며, 충의로 원종공신 3등에 올랐으며, 직장으로 승진되었다.

   백구인(白求仁, 생몰년미상) : 본관은 대흥으로 부친은 첨추 백수렴이다. 신천훈도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에 곽재우의 화왕산진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원종공신록에 올랐으며, 이후 경산훈도를 제수받았다.

   주   식(朱쫛植,1553∼?) : 본관은 신안으로 호는 어대(魚臺)이다. 부친은 참봉 주춘령이며, 유일재 김언기의 문하이다. 임진왜란 때에 화왕산진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며, 화왕동고록에 등재되었다.

 

   백동현(白東賢, 생몰년미상) : 본관은 대흥으로 난고남경훈문(蘭皐南慶薰門)이다.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으며, 백형(伯兄) 둔암동량(遯庵東良)과 함께 배웠다. 음사(蔭仕)로 장사랑(將仕郞)이 되었으며, 호(號)는 농은(聾隱)이고 유집(遺集)이 있다.

   박   선(朴쫛璿, 1596∼1669) : 호(號)는 도와(陶窩)이며, 본관은 무안이다. 예(禮)로서 처신(處身)하고, 경학(經學)에 깊었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천수(薦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도계정사(陶溪精社)에 배향(配亨)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남승길(南承吉,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경보(景輔)이고, 호는 국은(菊隱)이다. 부는 둔와 남국신(遯窩 南鞠臣)이다. 임진왜란 때에 동생인 남승정(南承鄭), 남승필(南承弼)과 함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였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청음 김상헌을 찾아가 해향(海鄕)의 의사란 칭송을 들었다.

   신   철(申쫛澈, 1572∼1621)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언함(彦涵)이다. 부친은 주부 신홍제이다. 재예(才藝)가 있었으며, 대학(大學)을 읽고 성현(聖賢)의 뜻을 기렸으며, 맹자(孟子)를 읽고 몸을 규신하는 법(法)으로 삼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였으며, 음직으로 선무랑 예빈시 주부 군자감 판관을 받았다.

   유자영(柳自榮, 생몰년미상) : 호(號)는 신경제(愼敬齊)이며, 문장(文章)이 탁월(卓越)하여 명석거유(名碩巨儒)와 교제(交際)하였다. 광해정란(光海政亂)에 신경제(愼敬齊)를 짓고 후학(後學)을 가르쳤으며, 계공랑(啓功郞)에 천거(薦擧)되고 군자감(軍資監) 직장(直長)에 임명(任命)되어도 모두 불취(不就)하였다.

   백원발(白源發,생몰년미상) : 품성(稟性)이 순수(純粹)하고 지행(志行)이 겸비(兼備)하였으며, 난고남경훈(蘭皐南慶薰)에게 수학(受學)하였고, 학식(學識)이 높았으며, 호(號)는 양몽제(養蒙齊)이고 유집(遺集)이 있다.

   김사지(金四知, 1557∼?) : 호는 충의당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망우당 곽재우의병장을 도와 왜적을 무찔렀다. 화왕동고록에 그의 사적이 실려 있다.

   남   길(南쫛佶, 1594∼1654)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안분당(安分堂)이다. 부친은 난고 남경훈이다. 퇴계의 문으로 후학을 기르는데 전력을 다하였으며, 광산정사(光山精祠)에 제

 

향되었다.

   박희안(朴希顔, 1568∼1617) : 본관은 함양으로 자는 여우(汝愚)이고, 부친은 호군 박언룡이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였으며, 관은 훈련원 봉사에 이르렀다.

   이원직(李元直,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는 눌암(訥庵)으로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을 참하라는 소(疏)를 올리고는 창수면 인량리에 은거하였다.

   이휘일(李徽逸, 1619∼1673) : 본관은 재령으로 퇴계학(退溪學)을 득도(得道)하고 학행(學行)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으로 제수(除授)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고, 「홍범연의(洪範衍義)」 13권(卷)과 「일원소장도문집(一元消長圖文集)」 3권(卷)을 지었으며, 인산서원(仁山書院)에 배향(配亨)되었다.

   남상주(南尙周, 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간계(間溪)이다. 부친은 안분당 남길이다. 후학을 기르는데 정성을 다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문집이 있다.

   백빈흥(白賓興)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산야당(山野堂)으로 양몽재 백원발의 아들이다. 학행이 뛰어났다.

   권도경(權道經, 1645∼1699) : 본관은 안동으로 존재 이휘일의 문하로 위기지학과 문장에 능하였다.

   이희익(李希,생몰년미상) : 본관은 진성으로 호는 서암(西庵)으로 영모당 이선도의 증손이다. 문장에 능하여 당시에 추대를 받았으며 문집이 있다. 영양현이 영해부에서 분설하여 갈 때 소수(疏首)로 참여하여, 성주 독성에 3년간 귀양을 갔다 왔다. 영해부성의 남문루 상량문을 지었다.

   남필대(南必大,생몰년미상) : 호(號)는 용암(龍岩)이며, 덕성온순(德性溫淳)하고 은거행의(隱居行誼)하였으며, 하담김시양문(荷潭金時讓門)이고, 태릉참봉(泰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신지립(申智立,1587∼1678) : 선조와 인조대의 인물로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자건(子

 

建)으로 호는 삼익당(三益堂)이다. 부친은 신명령(申命齡)이다. 장수도찰방시에 병자호란을 당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세월을 보냈다. 남강서원을 이건하였다.

   남승필(南承弼,생몰년미상) : 호(號)는 죽은(竹隱)이며, 인조대의 인물이다. 재예문학(才藝文學) 모두 뛰어났으며, 남곡 권상길(南谷權尙吉), 진사 신길휘(進士申吉暉), 정랑박호(正郞朴)와 교분(交分)이 깊었으며,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에 제수(除授)되다.

   이윤지(李允智,생몰년미상) : 본관은 진성으로 부친은 주부 이선도이다. 임진왜란의 공으로 원종공신 3등에 올랐으며, 관이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에 이르렀다.

   이윤경(李允敬,생몰년미상) : 본관은 진성으로 부친은 주부 이선도이다. 관이 금정도 찰방에 이르렀다.

   신이효(申以孝, 1602~1649) : 본관은 평산으로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및 잠와(潛窩) 이명준문(李命俊門)이며 천자온진(天姿溫陳)하며, 학문정박(學問精博)하였다.

   배진창(裵震昌,1632∼1713) : 본관은 분성으로 호(號)는 송고(松皐)이며, 지행단결(志行端潔)하였으나, 과거(科擧)를 보지 않고 학문에 전력하였다. 모병(母病)에 북두(北斗)에 빌어 신제(神劑)를 얻었으며, 성묘(省墓)를 정성스레 다녀 언덕에 길이 날 정도였다. 수직으로 통정(通政)이 되었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남   정(南쫛,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직경(直卿)이다. 잠와 이명준의 문하이다. 의리가 확연하고 스스로 지킴이 의연하여 선비들이 준칙으로 삼으며 따랐다. 수직으로 호군을 제수받았다.

   이현일(李玄逸, 1627∼1704) : 본관은 재령으로 어릴적부터 정낙기지(貞樂奇志)하였고, 유림(儒林)의 종사(宗師)가 되었으며, 호(號)는 갈암(葛庵)이라 하였고, 관(官)은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존주록(尊周錄), 성유록(聖諭錄), 무후전서등(武候全書等) 문집(文集) 20권(卷)이 있고, 문경(文敬)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권상익(權尙益, 1622~1703)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자겸(子謙)이다. 문행이 있어 선교랑으로 증직되어 좌승지가 되었다.

 

   권   경(權쫛璟, 1604∼1666) : 호(號)는 대은(台隱)이며, 부친은 사복시정 권의협(權宜)이다. 하담김시양문(荷潭金時讓門)이고, 덕기일성(德器日成)하고 사친지효(事親至孝)하였으며, 경사(經史)에 밝았고, 도계정사(陶溪精社)에 배향(配亨)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권상설(權尙卨, 1619~1662)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우경(虞卿)이며, 호는 강와(江窩)이다. 학문이 깊고, 도의가 있었으며, 존재 이휘일과 도의로 교류하였다.

   이숭일(李嵩逸, 1631∼1698) : 박통학문(博通學問)하였으며, 은일(隱逸)로 현감(縣監)에 이르렀고, 호(號)는 항제(恒齊)이며, 문집(文集)이 있다.

   최경천(崔敬天,생몰년미상) : 자는 자정(子靜)으로 부친은 의두재 최일관(倚斗齋 崔日觀)이다. 영조 4년(1728)의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백천장(白天章,생몰년미상) : 재행특이(才行特異)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의 궁구에 깊은 깨달음을 가졌으며, 30세에 요절(夭折)하니 모두 아깝다 하였다.

   권의율(權宜慄, 1574~1622)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경숙(敬叔)이며, 관이 판관에 이르렀다.

   박유기(朴唯起,생몰년미상) : 관이 좌수사에 이르렀다.

   남상규(南尙圭,생몰년미상) : 학식박통(學識博通)하고 효우독지(孝友篤志)하였으며, 호(號)는 연당옹(蓮塘翁)이다.

   박   담(朴쫛潭,1653∼1694) : 본관은 무안으로 존갈양선생문(存葛兩先生門)이며, 문학재행(文學才行)이 높았고, 호(號)는 우계(迂溪)이며, 문집(文集)이 있다.

   박   숙(朴쫛潚,1665∼1748) : 본관은 무안으로 존갈양선생문(存葛兩先生門)이며, 학문(學問)이 높아 시망(時望)이 있었고, 호(號)는 소취헌(嘯醉軒)이며, 유집(遺集)이 있다.

   남제명(南濟明,생몰년미상) : 호(號)는 수약당(守約堂)이며, 경학(經學)에 깊었고, 효우독지(孝友篤志)하였으며, 저서(著書)에 「가례집해(家禮輯解)」 11권(卷), 「제왕상례(帝王喪禮)」 1권(卷), 「육예류회(六藝類會)」 3권(卷),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권상정(權尙精, 1634~1725) : 본관은 안동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호(號)는 회양당(晦養堂)이다. 존갈양선생문(存葛兩先生門)이며 학행(學行)이 높았고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여 친병(親病)에 꿩이 좋다하니 소리개가 꿩을 잡아 울타리에 갖다 놓고, 우황(牛黃)을 구(求)하니 밤에 소가 들어오는 등 이행(異行)이 있었다. 수직(壽職) 호군(護軍)이다.

   박기봉(朴岐鳳,1643∼1712) : 본관은 무안, 부는 징()이며, 존재문(存齊門)이다. 학행(學行)이 높았고, 호(號)는 해은(海隱)이며, 유고(遺稿) 2권 1책이 있다.

   신재형(申在衡, 1649∼1697) : 본관은 평산. 호는 쌍청(雙淸)으로 부는 신성구(申聖龜)이다. 15살에 조부의 상을 당하여 승중(承重)의 처지로 예에 따라 성인과 같이 하니, 향리에 칭찬이 있었다. 존재 이휘일의 문인으로 「쌍청당집」 2권 1책이 있다.

   백   돈(白一暾,생몰년미상) : 본관은 대흥으로 존재 이휘일문(李徽逸門)이다. 성리학(性理學)의 궁구에 깊은 성취가 있었다. 호(號)는 금헌(琴軒)이며, 문집(文集)이 있다.

   이   재(李一栽,1657∼1730) : 본관은 재령으로 호(號)는 밀암(密庵)이다. 은일(隱逸)로 장낙원주부(掌樂院主簿)가 되었으며, 문집(文集) 13권(卷)이 있다.

   권대겸(權大謙, 1659∼1729) : 본관은 안동. 호는 쌍괴당(雙槐堂)으로 부는 권득여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문호가 성행하였으며, 모친이 돌아가자 과거에 뜻을 버리고 더욱 더 학문에 정진하였다. 서숙(書塾)을 창건하여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만년에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어 이로써 당의 편액으로 삼았다. 문집으로 쌍괴당집 4권 2책이 있다.

   신유한(申維翰,1681∼1752) : 일찍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을 겸비하여 사우(士友)가 돈독(敦篤)하였다. 숙종 31년(1705)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숙종 39년(1713)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해군수를 지냈다. 문집(文集)으로는 「청천집(靑泉集)」 5권(卷)이 있다. 호(號)는 청천(靑泉)이며, 부는 태시(泰始)이다.

   박정걸(朴廷杰,1683∼1746) : 본관은 무안, 부는 박하상(朴夏相)이다. 밀암이재문(密庵李栽門)이며, 풍도괴위(風度魁偉)하고 덕성(德性)이 있었으며, 향리에서 후진을 지도하며, 교화에 힘썼으며, 효우와 유행이 있었다. 호(號)는 남포(南浦)이고, 문집으로 「남포집」 4권 2책이 있다.

 

   이유원(李猷遠,1695∼1773) : 본관은 재령, 호(號)는 냉천(冷泉)이고, 부는 지확(之)이다. 천자명수(天姿明秀)하고, 독지강학(篤志講學)하였으며, 냉천집 4권 2책이 있다.

   백시언(白時彦,1655∼1727)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벽오헌(碧梧軒)이다. 학문이 깊었으며, 남포 박정걸과 함께 영해향교 태화루를 중수하였다.

   신임송(申任宋,생몰년미상)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문경(文卿)이고,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다. 일찍이 남정면 회리의 산수를 사랑하여 회계정(晦溪亭)을 지어 거주하면서 은인자적하였다. 수직으로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받았다.

   남국추(南國錘,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휴정(休亭)이다. 남포 박정걸의 문하로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였다.

   남달만(南達萬,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처인당(處仁堂)이다. 재주와 지략이 있었으며, 증직으로 사복시정을 받았다. 문집이 있다.

   김도장(金道章,1688∼1781) : 본관은 수안이고, 자는 덕승(德升), 호는 평천(平川)이다. 17세(歲)에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여 몇 번이나 기절(氣絶)하여 조문자들을 감동시켰으며, 자칭(自稱) 평천거사(平川居士)라 하였다. 승지(承旨)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신망규(申望奎, 1631∼1701) : 본관은 평산이고, 호(號)는 송와(松窩)이며, 신이겸의 아들이다. 어릴때부터 총명(聰明)하였으며, 문명(文名)이 높아 무의공박의장(武毅公朴毅長)의 증손(曾孫) 초()가 그를 사위로 삼았고 소암(所岩) 이병하(李秉夏)는 “재(才)는 사림(士林)의 의표(儀表)가 되고 문장(文章)은 관각(館閣)의 재(材)가 된다”고 하였다. 문집으로 송와집이 율리세고에 합본되어 전하고 있다.

   최일관(崔日觀,생몰년미상) : 일찍이 덕망(德望)이 있었으며, 출사(出仕)를 권(勸)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의 닦음에 정진하였다. 진보(眞寶) 봉람서원(鳳覽書院) 사액(賜額)에 공(功)이 많았다.

 

   김세희(金世熙,1715∼1768) : 본관은 수안으로 자는 자화(子和)이다. 부친은 평천(平川) 김도장이다. 기질청수(氣質淸秀)하여 어버이를 옳게 섬겼는가, 종족(宗族)에 돈목(敦睦)하였는가, 우애(友愛)가 덜하지 않았는가, 향당(鄕堂)에 결례(缺禮)하지 않았는가의 네가지를 자경(自警)하였고 매화(梅花)를 좋아해 호(號)를 매창(梅窓)이라 하였다.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신덕하(申德河, 1676~1755) : 호(號)는 삼휴당(三休堂)이며, 문학(文學)이 뛰어나 중망(重望)이 있었고 명현석유(名賢碩儒)들과 교우(交友)가 많았다.

   신중호(申重鎬,1697~1754) : 호(號)는 이헌(怡軒)이며, 가정유훈(家庭遺訓)을 이었고, 처숙(妻叔)인 해월황여일문(海月黃汝一門)이며, 원통한 옥사(獄事)가 있어 관계(官界)의 뜻을 버리고 은일자적하여 해상고사(海上高士)의 소리를 들었다. 유고(遺稿)가 있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시하(金時夏,생몰년미상) : 호(號)는 경와(敬窩)이며 행의(行誼) 염결(廉潔)하였고 예용(禮容)이 우유(優裕)하였다.

   김정하(金鼎夏,생몰년미상) : 호(號)는 황산(化山)이며 박학(博學)하였으며, 성리학(性理學)에 능(能)하였다.

   신백환(申伯煥, 1743~1776) : 호(號)는 수헌(睡軒)이며, 13세(歲)에 부상(父喪)을 당(當)하여 성인(成人)과 같이 하였고, 자라며 예학(禮學)에 밝았으나, 연(年) 34세에 졸(卒)하였다.

   남시택(南時澤,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호(號)는 이송당(二松堂)이며, 부친은 직장 남승정(南承鄭)이다. 학문(學問)이 깊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육영(育英)에 힘쓰니 많은 학자(學者)가 따랐다.

   이   학(李一鶴,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모고제(慕古齊)이며, 옥계하대지상류(玉溪下大枝上流)에 정자(亭子)를 지어놓고 산수(山水)를 즐기며 지냈다.

 

   이화춘(李華春, 1534~1603) : 본관은 영천으로 군자(君子)의 풍(風)이 있었으며, 호(號)는 천재(川齋)이고, 통정(通政),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받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덕, 영해의 의병을 이끌고 영천, 울산 서생포전투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으며,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이정계(李廷桂,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천성(天性)이 단결(端潔)하였으며, 부화(浮華)를 싫어하였다. 관(官)은 통정장예원판결사(通政掌隸院判決事)에 이르렀다.

   김도상(金道常,생몰년미상) : 본관은 수안으로 호(號)는 제암(霽庵)이며, 문사숙성(文詞夙成)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이정가(李廷,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硏究)하여 신망이 있었다. 소옥(小屋)을 지어 학구생활(學究生活)과 후진양성을 하였지만 실화(失火)되어 전(傳)하는 것이 없다 한다.

   김상전(金尙銓,생몰년미상) : 본관은 김녕으로 호(號)는 영은(瀛隱)이며, 대산이상정문(大山李象靖門)이고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가례(家禮)에 밝았고, 문집(文集)이 있다.

   배진도(裵震度,생몰년미상) : 본관은 분성으로 호(號)는 반선제(盤旋齊)이다. 학문(學問)이 정도(精到)하였지만 과거(科擧)에 뜻이 없어 은거(隱居)하였다.

   김   련(金一鍊,생몰년미상) : 본관은 야성으로 문명(文名)이 높아 명석(名碩)과 교유(交遊)가 많았고 효종 4년(1653)에 봉정대부(奉正大夫) 내자시정(內資寺正)이 되었다.

   양진윤(梁晋胤,생몰년미상) : 자는 백언(伯彦)으로 인조대의 인물이다. 문행(文行)이 뛰어났으나, 은거자수(隱居自守)하였다.

   김용구(金龍九,생몰년미상) : 본관은 수안으로 추암 김하구의 동생이다. 호(號)는 견산(見山)이고, 총명강기(聰明强記)하였으며, 문장(文章)이 뛰어났다. 통덕랑(通德郞)을 제수받았다.

 

   정석화(鄭錫和,1736∼1789) : 본관은 영덕, 자는 이중(而中), 호(號)는 남계(南溪)이며, 추암김하구문(楸庵金夏九門)이고 재예(才藝)가 숙취(夙就)하였다.

   이성식(李成湜,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는 둔암(遯庵)이다. 명석(名碩)의 벗이 많았고, 유훈편(遺訓篇)이 있다.

   박행오(朴行五,생몰년미상) : 본관은 강릉으로 명리(名利)를 떠나 뜰안에 매화(梅花)를 심고 탁물우지(托物寓志)하였다. 추암 김하구와 교류하였다.

   이대광(李大,생몰년미상) : 호(號)는 옥매당(玉梅堂)이며, 법도(法度)가 엄(嚴)하고 우애(友愛)가 돈독(敦篤)하였으며, 현령 이귀응(李龜應), 추암 김하구 등의 명사(名士)들과 창작(唱酌)하며 즐겼다.

   유계휘(柳啓輝,생몰년미상) : 본관은 문화로 호(號)를 이우당(以友堂)이라 하고 성리(聲利)를 구(求)하지 않고 구지서사(求志書史)하여 스스로 즐기었다.

   이기선(李起善,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서봉(西峯이고, 문행(文行)이 구비(具備)하여 사류(士類)가 추중(推重)하였고, 유집(遺集)이 있다.

   이   재(李一梓,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회오(晦吾)며, 학문(學問)이 깊어 시망(時望)이 있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호군(護軍)으로 증직(贈職)되었다.

   박용성(朴龍成,생몰년미상) : 본관은 강릉으로 자는 운징(雲徵)이며, 임란불굴(臨難不屈)하고 염결자수(廉潔自修)하였으며, 매산(梅山)에서 일생(終老)을 보냈다.

   박동복(朴東復,생몰년미상) : 본관은 밀양으로 호(好)는 우모제(寓慕齊)이고, 과거(科擧)를 사양하고 산수(山水)를 좋아하여 등운산(騰雲山) 백록동(白鹿洞)에 들어가 살며 제현(諸賢)과 교우(交友)하였다.

   김몽구(金夢九,생몰년미상) : 본관은 야성으로 호(號)는 죽은(竹隱)이며 과거(科擧)를 치르지 않고 학문(學問)에만 정진(精進)하였으며, 후진(後進)을 가르치었다.

 

   신재현(申載鉉,생몰년미상) : 호(號)는 도제(道齊)이며, 풍채언론(風采言論)이 뛰어났으나 환로에 나가지 않고, 은거(隱居)하였다.

   김성탁(金聲鐸,생몰년미상) : 호(號)는 추암(湫庵)이며, 불구명리(不求名利)하고, 매일(每日) 가묘(家廟)에 분향하며 선조들을 숭앙하였으며, 서책을 가까이 하여 온종일 독서(讀書)를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첨추(僉樞)가 되었다.

   유종택(柳種澤,생몰년미상) : 호(號)는 부원(浮源)이며, 학문(學問)이 높았고, 후학을 가르치는데 힘썼다.

   신기락(申基洛, 1747~ ?) : 천부호매(天賦豪邁)하여 월천산수(月川山水)를 사랑하였다.수직(壽職)으로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최경집(崔敬緝,생몰년미상) : 천자고명(天姿高明)하고 문예숙취(文藝夙就)하여 향사(鄕士)들이 많이 따랐다.

   정종구(鄭宗龜,1761∼1837) : 본관은 영덕, 자는 성범(聖範), 호(號)는 영은(瀛隱)이며, 정조대의 인물이다. 문아행검(文雅行儉)하였으며, 반도암해학선가(蟠桃庵海鶴仙歌)와 유집(遺集)이 있다.

   배상복(裵尙福,생몰년미상) : 본관은 분성으로 호(號)는 일파(逸坡)이며, 문행겸비(文行兼備)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이만길(李晩吉,생몰년미상) : 본관은 월성으로 자는 화중(華仲)이다. 독지력행(篤志力行)하였고, 교회자손(敎誨子孫)으로 낙(樂)을 삼았다.

   박상의(朴尙義,생몰년미상) : 호(號)는 삼회당(三悔堂)이니, 이는 시효불능일회(時孝不能一悔)요 학불능이회(學不能二悔)요 신불수삼회(身不修三悔)라 하는데서 따왔다고 한다.

   정서구(鄭瑞龜,1765∼1820) : 본관은 야성으로 자는 성흠(聖欽)이다. 천자인후(天資仁厚)하고 유일(遺逸)의 풍(風)이 있었다.

 

   이만옥(李晩玉,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지촌(芝村)이며, 13세(歲)에 이미 시부(詩賦)에 능(能)했으나, 32세(歲)에 요절(夭折)하였다. 유집(遺集)이 있다.

   신재수(申在洙,생몰년미상)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만괴헌(晩槐軒)이다. 병자년의 흉년에 많은 시혜를 베풀어 가의부의에 제수되었으며, 영해향교 태화루의 중수에 공이 있었다.

   박재춘(朴載春,생몰년미상) : 자는 인중(寅仲)으로 매산(梅山)에 올라가 영음(詠吟) 자적(自適)하였고, 스스로 매산주인(梅山主人)이라 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김병원(金炳元,생몰년미상) : 본관은 안동으로 호(號)는 취한당(就閒堂)이며, 자성특수(資性特殊)하였고, 문사숙취(文詞夙就)하여 벗이 많았고 가선호판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戶判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副摠官)으로 증직(贈職)되었다.

   차복신(車輻信, 1721~ ?)) : 본관은 연안으로 자는 원정(圓正)이다. 항상(恒常) 율류송국(栗柳松菊)을 사랑하였다. 손자 차원식(車元軾)이 귀해짐에 따라 증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김동한(金東翰, 1761~1833) : 본관은 김녕으로 호(號)는 황은(篁隱)이며, 취헌(醉軒) 신상선문(申相宣門)이고, 충효제(忠孝悌) 삼행(三行)으로 추앙(推仰)을 받았다. 갈천 김희주(葛川] 金熙周)가 행장을 지었다.

   권석린(權錫麟,생몰년미상) :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군서(君瑞)이다. 천성(天性)이 인순지효(仁淳至孝)하였으며, 고성(古聖)의 뜻을 항상 받들며 생활하였다. 순조갑오(純祖甲午, 1834)에 선적(先蹟)이 불탔음을 호곡(號哭)하다가 병졸(病卒)하였다. 비서승(秘書丞)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양중(李養中,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수은당(睡隱堂)이다. 문예조성(文藝早成)하였으며, 유재 신재석(由齋 申在錫)이 찬한 행장이 있으며,유집(遺集)이 있다.

   최재엽(崔在燁,생몰년미상) : 호(號)는 낙초(洛樵)이며, 천품(天稟)이 특이(特異)하였고, 호학(好學)하였으며, 빈자(貧者)에게 학비(學費)를 대어주고 의식(衣食)을 제공(提供)하는 등 공(功)이 많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받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강흠수(姜欽秀,생몰년미상) : 본관은 진주이고 자는 훈명(勳明)이다. 천자(天姿) 영오(穎悟)하고 문사(文詞)가 일찍 이루어져 신망이 있었다.

    정건주(鄭建周,1786∼1837) : 본관은 야성으로 자는 한지(翰之)이다. 항상 스스로를 닦으며, 충심과 신의를 행(行)하였다. 초야에 은둔하여 시서를 즐기며 세상(世上)을 살았다.

    윤재표(尹在豹,생몰년미상) : 본관은 파평으로 호는 탁암(濯庵)이다. 문학덕망(文學德望)이 있었으며, 명리(名利)를 구하지 않고 은거(隱居)하였다. 유고(遺稿)가 있으며, 참의(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정혁주(鄭赫周,1797∼?) : 본관은 야성으로 자는 필지(弼之)이다. 스스로 공검(恭儉)하고, 학식(學識)이 높았으며, 훈도(薰陶)의 공(功)이 있어 문인(文人)이 많았다.

    이광호(李光浩,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는 성와(省窩)이다. 뜻을 세워 학문으로 자기를 규율하였으며, 다른 사람을 대함에 청아함과 절개가 있었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이국량(李國樑,생몰년미상) : 본관은 안성으로 호(號)는 남계(楠溪)이다. 성품(性品)이 순후(淳厚)하였고, 남의 과실(過失)을 논(論)하지 않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참의(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이기덕(李基德,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천으로 자는 경원(慶元)이다. 성품(性品)이 단정은근(端正慇勤)하였고 귀머리가 아니면서 스스로 귀머거리라 자처하여 세상이 농파옹(聾波翁)이라 하였다.

    박이곤(朴履坤, 1730∼1783) : 본관은 고령. 호는 지촌(芝村)으로 부는 박돈(朴惇)이다. 어려서 청천 신유한에게 사사하여 여러번 향시에 급제하였으나, 회시에는 불운하게도 입격치 못하였다.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근사석의(近思釋義)」, 「정서류요(程書類要)」, 「주서류요(朱書類要)」 등의 저작을 남겼으며, 문집으로 「지촌집」 2권 1책이 있다.

 

    김성린(金聖麟,생몰년미상) : 본관은 김녕으로 자는 성로(聖魯)이다. 자성(資性)이 순후(淳厚)하였고 기국(器局)이 헌앙(軒昻)하였으며, 문호(門戶)를 보존(保存)하는데 힘썼으며 수직(壽職)으로 호군(護軍)이 되었다. 유재 신재석이 찬한 묘갈명이 있다.

    신계도(申啓道,생몰년미상)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문선(文善)이다. 품행단결(品行端潔)하고 공겸자수(恭謙自守)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가선동추(嘉善同樞)를 제수받았다.

    조우정(趙友貞,생몰년미상) : 본관은 한양으로 자는 성보(聖輔)이다. 스스로 분수를 지키며 살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안석호(安錫祜,생몰년미상) : 호(號)는 둔암(遯庵)이며, 처사명민(處事明敏)하고, 풍의수정(風儀秀整)하여 일가지풍(一家之風)을 이루었다.

    김흥락(金興洛,생몰년미상) : 명리(名利)를 구(求)하지 않고 학업(學業)에 정진(精進)하였으며, 호(號)를 국포(菊圃)라 하였다. 문헌록(文獻錄)에 실려 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받았으며, 증직(贈職)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을 받았다.

    이상채(李相采,1787∼1854) : 본관은 재령. 호는 수졸재(守拙齋)이고 부는 이광전(李光琠)이다. 어려서부터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독서에 힘썼다. 서예에도 능하여 이름이 있었으며, 선조 갈암공의 신원을 위하여 가정 일은 부인에게 맡기고, 서울에 머물며 애쓴 결과 1852년에 복관작(復官爵)의 소원을 이루었다. 이후 고향에 돌아와서 옛집을 수리하여 수졸재라 이름하고 후진양성에 힘을 기울었다. 문집으로는 「수졸재집」 4권 2책이 있다.

    강수원(姜守源,생몰년미상) : 호(號)는 벽담(僻潭)이며, 소성(素性)이 강개(慷慨)하였으며, 해산(海山)에 숨어 살았다. 관(官)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받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남공수(南公壽, 1793∼1875) : 본관은 영양, 호는 영은(瀛隱)으로 한묵초결(翰墨抄訣)등의 저작이 있다.

    박세륜(朴世綸,1807∼1857) : 호는 내암(耐庵)이고, 본관은 함양이며, 부는 박광일(朴匡一)이다. 치옹(癡翁) 이해문(李海文)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세에 경사자집(經史子集)과 고금의 여러 서적을 박람강기하여 천재라는 칭찬을 받았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생활에 개의치 않고, 깊은 골짜기에 노운정사(老雲精舍)라는 집을 짓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문집으로는 내암집 6권 3책이 있다.

 

    박시찬(朴時燦, 1842∼1905) : 본관은 밀양으로 호(號)는 연계(蓮溪)이고, 부는 박래만(朴來蔓)이다. 만오(晩寤) 신진운(申晋運)을 사사하여 경학(經學)에 깊었다. 사우(士友)가 많았으며, 문집(文集)으로 「연계집」 4권 2책이 있다.

    김현용(金顯龍,생몰년미상) : 본관은 김해로 재식(才識)이 남보다 뛰어났고, 인망(人望)이 있었으며, 참봉(參奉)을 제수받았다.

    정경백(鄭景栢,1823∼1908) : 본관은 야성으로 호(號)는 난곡(蘭谷)이며, 자성(資性)이 온아(溫雅)하고, 임하지풍(林下之風)이 있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도태(金道泰,생몰년미상) : 호(號)는 운담(雲潭)이며, 효행세전(孝行世傳)하였으며, 시부로 향당에서 이름났고, 서울에서도 유명하였다. 후진(後進)을 가르치는데 노력하였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을 받았다.

    이광을(李光乙, 1855~1918) : 본관은 영천으로 호(號)를 매은(梅隱)이라 하였으며, 병신창의시에 신운석과 동참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매산하(梅山下)에 토옥(土屋)을 짓고 숨어 살았으며 소영(嘯)을 즐겼다. 유고(遺稿)가 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에도 창의를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류세원(劉世源,생몰년미상) : 본관은 강릉으로 호(號)는 제강(霽岡)이며, 천성(天性)이 인후(仁厚)하고 행의(行誼) 준정(俊整)하여 고사(高士)의 풍(風)이 있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장서홍(張瑞弘,생몰년미상) : 본관은 인동으로 성효출천(誠孝出天)하였으며, 문사조성(文詞早成)하여 현산서재(現山書齋)를 지어 자손(子孫)을 교회(敎晦)하였다.

    원태응(元泰應,생몰년미상) : 본관은 원주로 호(號)는 천오(泉塢)이며, 원주(原州)에서 처음으로 영해대동오리봉하(寧海大洞五里峯下) 저곡촌(楮谷村)에 숨어 살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장화옥(張華玉,생몰년미상) : 호(號)는 근명(近溟)이며, 세수유업(世守儒業)하고, 시문(詩文)에 능(能)하여 일세(一世)에 이름이 났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두명(金斗明,생몰년미상) : 자는 성삼(星三)으로 조상(祖上)의 유업(遺業)을 잇고 법도(法度)로서 자손(子孫) 및 향리(鄕里)를 감탄(感歎)케 하였으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았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임정호(任鼎鎬, 1844~1911) : 본관은 풍천으로 호(號)는 소은(蘇隱)이며, 박문선시(博聞善詩)하였고, 문학이 세상에 드러나 사람들이 8문장가 중 1인이라 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이창호(李彰, 1847~1896) : 본관은 영천으로 영민(英敏)하여 주위의 신망을 받았으며, 매일 유학을 닦기에 전념(專念)하였다. 재예가 뛰어났으며, 만락정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강상원(姜尙源,생몰년미상) : 호(號)는 벽유제(僻柳齊)이며, 학문(學問)이 높았고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다.

    최상순(崔尙淳,생몰년미상) : 본관은 경주로 호(號)는 죽헌(竹軒)이고, 풍의괴위(風儀魁偉)하고 기우헌활(氣于軒豁)하였으며, 옥계(玉溪)에 정자(亭子)를 지어 명석(名碩)과 교우(交友)하였으며, 관(官)은 돈영도정(敦令都正)에 이르렀다.

    윤정수(尹正銖,생몰년미상) : 본관은 파평으로 풍의준정(風儀俊整)하고 성도관후(性度寬厚)하였으며, 관(官)은 호군(護軍)에 이르렀다.

    신정석(申晶錫,생몰년미상) : 본관은 평산으로 호(號)는 운제(齊)이고, 척암김도화문(拓庵金道和門)이며, 조예정도(造詣精到)하였다. 뜰앞에 대나무를 심고 소영(嘯)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고종조에 목릉참봉(穆陵參奉)이 되었다.

    정성린(鄭聖麟,생몰년미상) : 자질고명(資質高明)하고 호학독수(好學篤修)하였으며, 「몽산유고(蒙山遺稿)」가 있다.

 

    김상필(金相弼,생몰년미상) : 자는 권일(權一)로 일찍부터 가정(家庭)에서 선조들의 뜻을 배워 익혔으며, 효우(孝友), 경애(敬愛)로써 생활의 규범으로 삼았다. 친구들과 동년배들로부터 신망이 있었다.

    강태형(姜泰馨,생몰년미상) : 자성강직(資性剛直)하고 효우절검(孝友節儉)하였으며, 강호음풍(江湖吟風)하고 지냈으며, 수직(壽職)으로 통정(通政)이 되었고, 송강실기(松岡實記)가 있다.

    김로동(金魯東,생몰년미상) : 성품이 순효(純孝)하고 사친관후(事親寬厚)하였으며, 호(號)는 매죽헌(梅竹軒)이고 90노모(老母)의 똥오줌을 손수 받았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최기영(崔基榮,생몰년미상) : 자는 덕초(德初)로 족조(族祖) 최재엽문(崔在燁門)이며, 호(號)는 남경(南耕)이고, 정직강명(正直剛明)하여 사우(士友)가 추중(推重)하였다.

    신봉균(申奉均,생몰년미상)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사옥(士玉)이다. 재예영오(才藝穎悟)하고 일찍이 학교에서 학문(學問)을 익혔는데, 이룸이 있어 인근에서 중히 여겼으며, 후학들이 학계를 세웠다.

    박능하(朴能夏,생몰년미상) : 본관은 밀양으로 일찍부터 남과 다른 점(點)이 있었으며, 부모를 사랑하고, 선배를 존경하였으며, 예절(禮節)과 문예(文藝)가 높았다.

    경응호(景應浩,생몰년미상) : 본관은 태인으로 자는 덕유(德裕)이다. 천자견고(天姿堅固)하고 지기호매(志氣豪邁)하였으며, 시명(詩名)이 높았으며, 늙으막에 강호처사라 칭하였다.

    김재호(金在鎬,생몰년미상) : 호(號)는 눌산(訥山)이다. 품성청수(稟性淸秀)하고 독지경적(篤志經籍)하였으며, 은거행의(隱居行義)하였고, 당시(當時) 명석(名碩)들과 시문(詩文)을 교환(交換)하면서 은인자적하였다.

    백   상(白 ,생몰년미상) : 호(號)는 구애(九厓)이고, 지행독실(志行篤實)하였다. 족의 (族誼) 돈독(敦篤)하였으며,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되었다.

 

   남국주(南國柱,1690∼1759) : 은거(隱居)하면서 「역범통록(易範通錄)」 「가례총설(家禮叢說)」, 「발몽도해(發蒙圖解)」등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문집(文集) 4권(卷)이 있다.

   권창적(權昌勣,1710~1777) : 호(號)는 물소와(勿小窩), 효우독지(孝友篤志)하고, 학식박통(學識博通)하였으며, 유집(遺集)이 있다.

   남경조(南景祖,1753∼1793) : 호(號)는 구고헌(九皐軒)으로, 부친은 남대만(南垈萬)이며, 남붕만(南鵬萬)에게 입양되었다. 동암(東岩) 류장원문(柳長源門)이고, 학문(學問)이 높았으며, 문집(文集)으로 「구고헌일고」 2권 1책이 있다.

   이만흡(李萬, 1740∼1814) : 호는 구완재(苟完齋)이며, 본관은 영천으로 부는 이정수(李廷秀)이며, 양부는 이정번(李廷蕃)이다. 17살에 생부가 졸하자 두 자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들과 함께 장례를 치루었으며, 집안을 잘 다스리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경전과 사기, 의학복서(醫學卜筮)에 이르기까지 박람강기하였다. 농암연보를 수정하였으며, 외선조(外先祖)인 백천장(白天章)의 저서를 정추세고(精推細考)하였다. 문집으로 구완재집 2권 1책이 있다.

   남몽양(南夢陽,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학행겸비(學行兼備)하여 덕망(德望)이 있었으며, 단산서원(丹山書院)을 중건(重建)하였고, 호(號)는 야은(野隱)이며, 유집(遺集)이 있다.

   박태춘(朴泰春,1786∼1855) : 본관은 함양, 경학(經學)이 높아 역동서원장(易東書院長)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제익우(諸益友)들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호(號)는 일휴당(逸休堂)이다.

   박영찬(朴英燦,1799∼1868) : 본관은 무안으로 호(號)는 단영(丹瀛)이며, 성도순후(性度淳厚)하며 기우엄정(氣宇嚴整)하고 불희론인(不喜論人)하였다. 도유(道儒)중, 거유(巨儒)로 덕망(德望)이 높았으며, 문장(文章)이 좋았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재려(金在礪, 1821~1909) : 본관은 김녕으로 호(號)는 만포(晩圃)이며, 문학(文學)과 행의(行義)가 높아 사우(士友)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박치린(朴致麟,1810∼1867) : 본관은 함양, 문학(文學)에 능통(能通)하여 한성(漢城)으로 과거를 보기 위하여 올라갔으나, 누시(累試)에 급제하지 못하고, 태학관과생(太學館科生)으로 있었는데, 좌우상이 (左右相)이 크게 말하기를 영남(嶺南)의 박치린(朴致麟)은 태학(太學)이라 하였다. 유고(遺稿)가 있으며, 호(號)는 칠포(七圃)이다.

   박재우(朴載祐,1829∼1870) : 본관은 무안으로 호(號)는 근암(近庵)이며, 일찍이 류정제(柳定齊) 치명(致明)의 문(門)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문학(文學)과 덕망(德望)이 높았다. 문집(文集)이 있다.

   박재홍(朴載洪, 1829∼1883) : 본관은 무안으로 호는 지남(芝南)이다. 류계당(柳溪堂) 수목(壽睦)의 문(門)에서 수학(修學)하였으며, 문사(文詞)가 돈독(敦篤)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조석(金祚錫, 1863~1935) : 본관은 김녕으로 호(號)는 운고(雲皐)이고, 문학(文學)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분수와 도를 지키며, 옛 성현들을 본받길 좋아하며, 선행을 좋아하였다. 문집(文集)이 있다.

   김   빈(金一玭, 1610~1671) : 본관은 김녕으로 호(號)는 중고(重皐)이며, 어려서부터 많은 공부(修學)를 하여,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으로 명망(名望)이 있었다.

   김덕유(金德裕, 1694~1767) : 본관은 수안으로 호(號)는 둔수(遯岫)이며, 경서를 깊이 수학(修學)하여 학문(學文)이 있었으며,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였다.

   박우용(朴宇鏞,생몰년미상) : 본관은 함양으로 호(號)는 만설(晩雪)이며, 자소(自少)로 충효(忠孝)가 지극(至極)하여 향우(鄕友)가 감복(感服)하였고 문학(文學)이 석학(碩學)이라 후세교학(後世敎學)에 전념(專念)하였다.

   신재석(申在錫, 1830~1910) : 본관은 평산으로 정재 유치명의 문인이며, 통정대부를 받았다. 유재집이 있다.

 

   강기회(姜基會,생몰년미상) : 본관은 진주로 호(號)는 종호제(從好齊)이며, 어려서부터 박종선(朴琮先) 문(門)에게 수학(修學)하여 학행(學行)이 높았다.

   김재헌(金在憲,생몰년미상) : 호(號)는 산촌(山村)이며,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이 뛰어났으며,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본관은 김녕이다.

   윤성노(尹聲老,생몰년미상) : 호(號)는 해은(海隱)이다. 어려서부터 배움을 좋아하였으며, 무예에도 뛰어나 무과(武科)에도 등과(登科)하였다. 후학(後學)을 많이 배출(輩出)하였다.

   김형복(金亨福,생몰년미상) : 역행검약자수(力行儉約自守)하여 고종조(高宗朝)에 등과(登科)하였으나, 낙향(落鄕)하여 시학(詩學)으로 세월을 보내며 은거(隱居)하였다.

   권   전(權一,1736~1808) : 호(號)는 해은(海隱)이며, 연학수도(硏學修道)하고 성경궁행(誠敬窮行)하여 향리(鄕里)의 존숭(尊崇)을 받았으며, 유학자(儒學者)로서 학덕(學德)이 있었다.

   김재명(金在明,생몰년미상) : 호(號)는 은계(隱溪)이고, 학문(學文)과 충효(忠孝)를 겸비하였으며, 덕망(德望)이 있었다. 관이 통사랑(官通仕郞)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이르렀다.

   김영석(金英錫,생몰년미상) : 본관은 김녕으로 호(號)는 벽하(碧何)이며, 유년(幼年)부터 학문(學文)에 입문하였으며, 향리(鄕里)에서 덕망(德望)이 높았다. 많은 후학(後學)을 배출(輩出)하였으며, 관(官)은 성균박사(成均博士)에 이르렀다.

   남형소(南衡召,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호(號)는 행정(杏亭)이며, 재덕겸비(才德兼備)하였고, 두문불출하며 뜻을 구하고, 수양을 하여 사우(士友)들이 중(重)히 여겼으며, 고종 광무 6년(1902)에 증손자 남경하가 귀하게 됨에 따라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다.

   이종학(李宗學, 1774∼1832) : 본관은 영천으로 호가 취수헌(醉睡軒)이다. 학행이 뛰어났으며, 은거 자수하며, 후학양성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취수헌집(醉睡軒集)이 있다.

 

   배경봉(裵慶鳳,생몰년미상) : 호(號)는 경암(敬庵)이며 경사(經史)에 박통(博通)하고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으며, 예(禮)에 밝았고 방산 허훈, 서파 유필영 등의 당대제현(當代諸賢)들과 교우(交友)가 많았다.

   박교수(朴敎壽,생몰년미상) : 자는 덕지(德之)이다. 재기(才氣)가 넘쳤으며 시사(詩詞)에 능(能)하였으며, 항상 학문에 정진하였다.

   김정련(金鼎鍊, 1783~1862) : 본관은 수안이며, 호는 청헌(淸軒)이다. 학문이 깊었으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다. 사림의 중함을 받았다.

   김로수(金魯洙,생몰년미상) : 본관은 김해로 자는 성원(聖元)이며, 양몽제(養蒙齊) 김재낙문(金在洛門)이다. 문예숙취(文藝夙就)하였으나 은거(隱居)하였으며 호(號)를 국은(菊隱)이라 하였다.

   김양정(金養正,생몰년미상) : 호(號)는 만각헌(晩覺軒)이며, 병신년(丙申年)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변(變)을 보고 비분(悲憤)하여 진연(晋淵)에서 어조(魚釣)하며 생(生)을 마치었다.

   배상학(裵相學, 1845~1938) : 본관은 분성으로 호(號)는 만취당(晩翠堂)이며, 학문(學問)이 순비(純備)하여 효제(孝悌)로 목족(睦族)하였으며, 당시(當時) 명석(名碩)과 많이 창작(唱酌)하였다.

   남유건(南有楗,생몰년미상) : 본관은 영양으로 성행단결(性行端潔)하고 독효면학(篤孝勉學)하였으며, 호(號)는 초은(椒隱)이고 임소(任所)에 거암(巨岩)이 있어 이를 호암(虎岩)이라 하고 여기에서 작시(作詩)를 하며 뜻을 달래었다.

   류진선(柳晋宣,생몰년미상) : 본관은 문화로 호(號)는 동은(東隱)이며, 자성(資性)이 강직(剛直)하고 학문(學問)이 정박(精博)하였다. 종족(宗族) 간에는 친목하고, 규범(規範)을 세워 향당(鄕黨)의 기강(紀綱)을 바르게 하여 사림으로부터 중히 여겨졌다.

   강   정(姜一鉦,생몰년미상) : 본관은 진주로 다른 사람의 위급을 자기의 일과 같이 여겼으며, 스스로 근신하며 나쁜 말을 하지 않았다.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를 증직받았다.

 

   유진성(柳晉成, 1826∼1894) : 본관은 문화로 호는 동계(東溪)이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로 산거에 은거하며, 후학을 기르는데 열과 성을 다하였으며, 「동계집」 4권 2책이 있음.

   김갑두(金甲斗) : 호(號)는 창암(蒼岩)이며, 병신창의 때에 신운석, 김건과 함께 도모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은거하였다. 효우(孝友)가 깊었고 만년에 정사(精舍)를 짓고 제생(諸生)을 가르쳤다.

   김이건(金一建,생몰년미상) : 본관은 수안으로 호(號)는 노산(老山)이며 성격(性格)이 척당(倜)하였고 논의(論議)가 정중(鄭重)하였으며, 병신창의를 시작하였으나 물러나서 서사자오(書史自娛)하였고, 일에 임해서는 신태호(申泰浩), 신재휴(申在休)와 같이 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신운석(申運錫, 1839∼1896) : 본관은 평산으로 자는 응천(應天)이다. 성격(性格)이 꼬장꼬장하였지만, 소절(少節)에 불구(不拘)하였다. 1896년 병신창의로 죽임을 당하였다.

   권대은(權大垠,생몰년미상) : 본관은 안동으로 동계(東溪) 류진성문(柳晋成門)이며, 풍류호걸풍(風流豪傑風)이 있었고, 신운석, 김 건과 같이 의병창의를 도모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은거하면서 호(號)를 계은(溪隱)이라 하였다.

   백호운(白灝運, 1809∼1883) : 본관은 대흥. 호는 하포(霞浦)로 부는 백거당(白居唐)이다. 1836년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회시를 보기 위해 서울에 갔을 때, 서울 백성들이 전염병과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노잣돈을 전부 털어 주고 과거를 보지 못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원군 재직시에 과거제도와 붕당의 폐단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고 크게 칭찬을 받았다. 문집으로 하포집 2권 1책이 있다.

   남흥수(南興壽,1813∼1899) : 본관은 영양, 호는 호은(濠隱)으로 정재 유치명의 문하이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제수받았으며, 유집이 있다.

   박인찬(朴仁燦, 1832∼1919) : 본관은 무안이고, 호는 다산(茶山)으로 부는 박관수(朴觀秀)이다. 15살에 문리를 깨우쳤으며, 사장(詞章)을 중시하였다. 1902년에는 수직으로 정3품에 올랐으며, 경술국치를 당하여 일제가 양로금으로 유혹하였으나 한사코 이를 거절하였다. 문집으로 다산집 4권 2책이 있다.

 

   김영하(金永厦, 1843∼1893) : 본관은 광산. 자는 치선(治善), 호는 삼락당(三樂堂)이며, 부는 참봉 수현(守鉉)이다. 산수(山水)와 시주(詩酒), 농상(農桑)을 즐겨 삼락이라 자호(自號)하였으며, 관이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박동진(朴東鎭, 1848∼1896) : 본관은 영해로 호는 취헌(翠軒)이며, 병곡면 사천리 출신의 애국지사이다. 1895, 1896년에 일어난 영해 을미, 병신창의진의 중군장을 맡아 활약을 하였으며, 창의진의 이수악 대장의 뒤를 이어 의병대장 직을 맡아 군내 각처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중, 1896년 8월 14일 영해 대진포구와 영덕으로부터 넘어 온 진위군의 해륙 합동 작전에 대항하여 병곡면 사천 숲에서 용맹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1977년에 이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박수찬(朴壽燦, 1867∼1922) : 본관은 무안으로 부친은 박의수(朴宜秀)이며, 창수면 인량리 출신으로 축산면 도곡 2리에 이주하여 살다. 신돌석의병장의 영릉의진에 참여하여 참모장을 지내며, 항일독립투쟁에 많은 활약을 하였다.

   이수악(李壽岳, 1845∼1927) : 본관은 재령. 호는 우헌(于軒)으로 부는 이담영(李聃榮)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경사를 탐구하였으며, 과거에도 관심을 가져 초시에 몇번이나 입격하였으나, 회시에서는 급제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후 세상이 어지려워지자 과거에 뜻을 버리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1886년에는 당색의 논쟁으로 4년동안 길주에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였으며, 1895년의 민비시해사건으로 봉기한 을미의병의 영해창의대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우헌집」 8권 4책이 있다.

   남유영(南有, 1846∼1905) : 본관은 영양, 호는 괴암(槐庵)으로 행의가 독실하였다. 사헌부감찰을 제수받았으며, 유집이 있다.

   남   건(南一健,1850∼1943) : 본관은 영양, 호는 노헌(魯憲)으로 부는 남유기(南有耆)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20살에 「학부통편(學通編)」을 찬수(纂修)하였으며, 경술국치를 당하여서는 종일토록 통곡하였다고 한다. 저서로는 「가학연원」과 「익산세고(益山世稿)」가 있으며, 문집으로는 「노헌집」 13권 6책이 있다.

   김재락(金在洛,1858∼1920) : 본관은 경주. 호는 양몽재(養蒙齋)로 부는 김종백(金宗伯)이다. 경서를 깊이 탐구하여 「소학관견(小學管見)」, 「경사동점통록(經史東漸通錄)」 등을

 

저술하였으며, 눌곡의 계곡에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특히 관찰사 신석우(申錫愚)는 양몽재를 산림학자(山林學者)로 우대하였다. 「양몽재집」 4권 2책이 있다.

    남효순(南孝順, 1863∼1941) : 본관은 영양으로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문행이 있었다. 문집이 6권이 있다.

    남조와(南朝, 1867∼1918) : 본관은 영양, 호는 고암, 조부는 남흥수(南興壽)임. 서산 김흥락의 문하이며, 문행이 있었으며, 유집이 있다.

    백순우(白淳愚,1863∼1941)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모산(某山)으로 한말의 유학자이다. 1896년 이수악의진에 가담하였으며, 1903년 조정의 해산령에 따라 향리에 돌아와 강학과 저술활동에 전념을 하였으며, 「모산문집」 9권 4책이 있다.

    최주형(崔珠衡,1876∼1908) : 본관은 경주로 지품면 도계리 출신의 항일애국지사이다. 1906년에 거병한 신돌석의병장의 영릉의병진에 영솔장으로 참여하여 영양, 울진 등지에서 많은 활약을 하였으며, 1908년 6월 26일에 있었던 병곡면 아곡리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영덕읍 우곡리 호호대의 도로변에 기념비가 있으며,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박재헌(朴載憲, 1875∼1926) : 본관은 무안, 호는 도산(道山)으로 부는 박휘찬(朴徽燦)이다.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경사백가, 복서, 병농, 산수, 풍수 등에 능하였으며, 경술국치를 당하여서는 두문불출하며,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저서로는 「도산집」 12권 5책이 있다.

    백   규(白一)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경암(敬庵)이며, 서산 김흥락, 정재 유치명의 문인으로 영해면 원구리 출신이다. 1896년 영해 병신창의진에서 외방장(外防將)을 맡았으며, 도산서원의 수임(首任)을 역임하였다. 저서에는 「성리유초(性理類抄)」가 있다.

    권진모(權進模, 1849∼1915)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동애(東厓)이며, 병곡면 송천리 출신이다. 성품이 순정하고 행의가 있었으며, 문사와 필한(筆翰)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1896년 영해 병신창의시에 부장으로 참여하였다.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백중호(白重鎬)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중암(重庵)이고, 학문에 힘썼으며, 1896년 병신창의시에 도서기를 맡았다.

 

    박재명(朴載明, 1851∼1907) : 본관은 무안으로 부친은 박회찬(朴晦燦)이며, 축산면 도곡리 출신이다. 1896년에 거병한 영해병신의병진에서 중군장을 맡았으며, 1896년 4월에 있은 축산면 기암리인 복기암 전투에서 입은 상처로 고생을 하면서도 아들인 경종, 원종 등의 세아들을 만주방면에 보내어 항일운동을 계속하게 하고는 본인도 뒤따를 것을 맹세하였으나, 불행히도 1906년에 서거하였다.

    백순경(白淳慶)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밀와정(密窩亭)으로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1896년 영해 병신창의시에 직일(直日)을 맡았다.

    신태종(申泰鍾,1881∼1950) : 본관은 평산으로 지품면 도계리 출신이다. 신돌석 의병진에 참여하여 포대장을 맡아 항일독립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남겼다.

    백종운(白宗運) : 본관은 대흥으로 정재 유치명의 문인이며, 참봉,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에 이르렀으며, 1896년 영해 병신의병진에 참여하여 도청(都廳)을 맡았다.

    백중각(白重珏,1867∼1936) : 본관은 대흥. 달산면 덕산리 출신의 한학자이다. 호가 천산재(天山齋)로 척암 김도화와 서산 김흥락의 문인으로 한시와 가사(歌辭)문에도 능하여 그가 지은 가사 6수가 국민대학교 가사논집에 선정, 수록되었으며, 영덕향교의 명륜당기문을 찬하였다. 저서로는 「천산재집」이 간행되어 전한다.

    유철영(柳澈永, 1862∼1929) : 영덕읍 삼계리 출신으로 본관은 문화, 호는 농와(聾窩)이다. 일찍부터 동계(東溪) 유진성(柳晉成) 문하에서 경사(經史)를 수학하여 학문이 깊었으며, 만년에 도계리에 거주하면서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1995년에 손자인 유경찬(柳景燦)이 발행한 「농와유고」 1권이 있다.

    배선찬(裵璇燦,1868∼1940) : 지품면 오천리 출신으로 본관은 분성으로 자는 순칠(舜七)이며, 호는 오산(午山)이다. 일찍이 효경과 명심보감, 그리고 소학을 배웠으며, 성경현전(聖經賢傳)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한 동계 유진성에게 사사하여 학문의 성취를 이루었다. 저서로는 「오산문집」이 있다.

    김수영(金洙瑩,1874∼1935) : 본관은 광산으로 호는 동림정(東林亭)인데, 부친은 승사랑 김영운(金永雲)이다. 태자궁의 봉시(奉侍)를 지냈으며, 숭록대부를 받았다.

 

    이   휴(李一烋, 1875∼1930) : 본관은 영천으로 호는 탁계(濯溪)이다. 척암 김도화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주역에 밝았으며, 후학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시문에 능하여 당세에 이름이 있었으며, 저서로는 「탁계집(濯溪集)」이 있다.

    이영석(李永錫, 1875∼1932) : 본관은 영천으로 호는 매와(梅窩)이다. 기국과 도량이 헌활하였으며, 풍채가 우뚝하였고, 뜻을 독실히 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저서로는 「매와집」(梅窩集)이 있다.

    이겸호(李謙浩, 1895∼1942) : 본관은 재령으로 창수면 오촌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에 만주로 건너가 이상룡, 이시영, 김동삼 등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노력하였으며, 1918년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하고 서로군정서에 가입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에 군자금을 모으기 위하여 귀국하여 활동하였으며, 1923년 대한통의부 제1소대원 이덕숙, 신형섭 등과 군자금을 모으던 중에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출옥 후 만주로 건너가 항일독립운동을 하다 다시 1년 7개월 동안 구금되기도 하였다. 1980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남진두(南鎭斗, 1894∼1919) : 본관은 영양으로 영해면 괴시리 출신이며, 부친은 남효백(南孝栢)이다. 영해 3.18만세의거에 가담한 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영덕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으며, 또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백남수(白南壽, 1875∼?) : 본관은 대흥으로 영해면 원구리 출신의 항일의병가, 궁내부 주사를 지내고, 신돌석 의병진에 가담하여 중군장, 후군장을 지내면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앞장섰다. 199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