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오경장 이전의 체육

  심신을 수련하고, 지적, 도덕적 인격의 완성에 목적을 두는 것을 체육이라 한다면 대개 우리나라 체육의 시작을 갑오경장(1894) 이후부터 라고 한다. 물론 갑오경장 이전에도 심신을 수련하는 체육활동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체육활동은 전쟁을 위한 무술연마 활동이 대부분으로 오늘날 체육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즉 갑오경장 이전의 체육활동은 궁술, 검술, 창술, 격구, 수박, 석전(石戰), 수렵, 검무 등 대부분 무예를 중심으로 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영덕의 체육은 대개 이러한 군사체육을 중심으로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지역은 영해를 중심으로 2개 여(旅)의 국가상비군이 주둔하여 있었고, 축산포와 오포에 수군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어 상당한 규모의 군사들이 항상 이 지역에서 상주하였다. 이들은 주둔기간 동안 수시로 군사훈련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며, 또한 병농일치제에 의하여 농한기를 이용한 일반 백성들의 군사훈련도 상당할 정도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아 우리 지역의 군사체육 수준은 매우 높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야성고읍지를 중심으로 한 용마총의 전설이라던가, 각 읍지 풍속조에 기록되어 있는 궁마지향(弓馬之鄕)이란 명칭과 검무지희(劍舞之戱)가 있었다는 기록, 그리고 영해의 독묘(纛廟)의 유지(遺址)는 우리 지역의 군사체육의 발달정도를 말한다고 하겠다.
  그외에 우리 지역에서는 오늘날 여가의 선용이라 할 수 있는 연날리기, 씨름, 투호가 있었으며, 널뛰기, 줄타기, 줄다리기, 그네뛰기 등의 전통적인 민속놀이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속놀이는 오늘날까지도 국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2. 일제 강점기의 체육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민속경기와 놀이 등 우리 민족이 종래부터 지켜 온 전통문화놀이마저 못하게 하는 등 민중들이 단결할 수 있는 여지 자체를 없애기 위한 탄압을 심하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학교 교육을 통한 학교체육이나 체육단체를 통한 체육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학교체육의 대표적인 것은 운동회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때인 1910년부터 1942년까지는 서구(西歐)의 스포츠 종목인 축구, 야구, 농구, 배구, 탁구, 정구, 유도, 권투, 수영 등의 서구식 운동종목이 도입되고 정착되는 단계였으며, 1942년부터는 일제가 일으킨 태평양전쟁으로 정상적인 체육활동보다 군사훈련 차원의 체육활동이 이루어졌다.
  일제시대에 있어서 영덕군내의 대표적인 체육활동인 학교운동회는 각 학교마다 사정에 맞게 연중 1회씩 개최하였는데, 대부분 가을에 개최하였다. 운동회의 종목으로는 육상이 대부분이었다.
  학교체육 외에 일제 강점기 아래서의 군내의 사회체육활동을 살펴보면 축구에 있어서는 당시 경상북도내의 축구계에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영덕군의 축구실력이 뛰어났다. 특히 1936년 포항에서 개최된 도내 각 시·군 대항 축구대회에서 우승과 다음해인 1937년 안동에서 개최된 시·군 대항 축구대회에서 우승, 그리고 1938년 영덕에서 개최된 시·군 대항 축구대회에서의 우승 등 연속 3회의 우승은 영덕이 축구 강군(强郡)이란 명성을 도내 전역에 떨쳤다. 이후에도 고장의 축구팀은 울진과 삼척까지 원정하여 우승을 하는 등 강원도에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
  야구는 일제시대 당시 대단히 성행하였는데, 지품면 오천, 신양리 등지의 일본광업소(금광)가 채광일을 할 당시 일인(日本人)들로 구성된 광산팀과 이에 맞서는 영덕읍내 청년팀이 구성되어 1930년 이후부터 1945년 해방(解放)이 될 때까지 수차에 걸쳐 자웅을 겨루는 대전이 있었다.
  결국 일제시대에 있어서 초기에는 체육활동을 통한 한국인들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함양을 꺼려 가능한 억제를 하는 정책의 여파로 일부 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학교체육만이 겨우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으며, 후기에 들어와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이러한 억압은 더욱 더 심하여 일부 구기 종목과 육상 정도만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