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고려시대
고려가 비록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왕조를 개창(開創)하였지만, 신라, 후백제와의 삼국정립 과정에서의 혼란과 각 지역에서 발호(跋扈)한 호족세력들에 의하여 통일 초기에는 중앙의 행정제도와 지방의 행정제도를 정비할 여력이 없었다. 특히 점령지에 대한 지방제도 조차도 종래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단지 필요에 따라 소규모적인 개편만 있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나라의 기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고려도 중앙 및 지방의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후삼국시대에 각 나라마다 달리 적용되어 오던 각종 제도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 이들 제도와 조직을 전국적으로 단일화시켜 명실상부한 통일 고려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태조 왕건은 통일전인 6년(923), 13년(930), 18년(935)에 소규모의 제도를 개편하여 삼국 통일을 위한 기본 제도와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후삼국 통일 후, 어느 정도 지방의 호족세력들을 아우른 후인 23년(940)에 이르러 본격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태조 왕건은 우선 군사적 요충지에 진(鎭)을 설치하였는데, 후백제 도읍지인 전주에는 안남도호부, 신라의 도읍지인 경주에는 안동대호부를 설치하여 지방호족들의 발호를 견제하였다. 이어서 주·부·군·현(州·府·郡·縣)의 행정구역을 새로이 정비하는 한편, 주부군현의 명칭도 새로이 부여하여 그 면모를 일신시켜서 새로운 국가경영을 위한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지역도 태조 23년에 신라의 야성군이었던 영덕은 오늘날 우리가 부르고 있는 영덕군(盈德郡)으로 고쳐졌으며, 신라의 유린군인 영해는 예주(禮州)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 설치된 예주의 성격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신라 때까지 이 지역이 속해 있던 명주(溟洲)와의 관계설정이 그것이다. 즉 성종 2년(983)에 설치된 12목에 명주의 이름이 보이지 않을 뿐더러 현종9년(1018)에 이르러 종래의 명주가 관할하던 보성부, 영양군, 평해군, 영덕군, 청부현, 송생현 등의 대부분 지역이 예주에 래속(來屬)되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국초부터 명주와는 별다른 새로이 예주를 설치하여 여러 군현을 거느리는 새로운 주(州)로써의 기능을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국이 안정되고 각 지방의 호족세력들의 발호를 어느 정도 억제하였다고는 하나 고려는 성종초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에 거의 외관(外官)을 파견하지 못하고 호족연합적인 형태의 통치를 하였다. 그러나 성종대에 이르자 왕권이 확립되고 중앙집권적인 질서를 찾아가게 되자 성종(982∼998)은 지방행정제도의 개편을 통하여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도록 하였다. 성종은 재위 2년(983)에 이르러 우선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설치된 12목에 따라 주·부·군·현(州·府·郡·縣)의 관직(官職)을 개편하여 이들을 각각 목(牧)에 소속시켰다. 동왕 (同王) 14년에는 다시 10도(道)의 제도를 만들어 전국을 10도로 나눈 후 소관(所管) 주군(州郡)을 10도에 배속정비(配屬整備)하였다. 이렇게 성종대에 시행된 기본적인 지방제도를 거쳐 현종(1010∼1031) 9년(1018) 2월에 이르러 각 지방에 116명의 외관(外官)을 파견하게 되어 비로소 지방에까지 중앙정부의 힘이 완전하게 미치게 되었다. 물론 개국 이후 거의 100여년 만에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에까지 완전히 미치게 되었지만, 이는 이 때 외관이 처음 파견된 것이 아니고 파견된 외관이 종래의 호족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행정과 정치를 완전하게 펼치게 된 것을 이 외관 파견의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우리 지역에서도 제도의 변화가 있었다. 즉 개국초부터 예주로 승격하여 동해안 일대의 중요한 정치,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던 영해에 현종 9년(1018)에 방어사(防禦使)를 파견하여 영해(禮州)지역이 동해안 일대를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지역으로 그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때 예주방어사의 관할 군현으로는 영덕군(盈德郡)과 보성부(甫城府)·영양군(英陽郡)·평해군(平海郡), 그리고 청부현(靑鳧縣)·송생현(松生縣)의 1부 3군 2현을 소속시켜서 영해를 동해안의 실질적인 웅부(雄府)가 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 예주의 영현으로 남아있던 청하현은 동경유수관(東京留守官)의 관내(管內)로 내속(來屬)되어 갔으며, 이후 청하현은 경주,포항권으로 흡수되었다. 현종 18년(1027)에 이르러서는 성종조에 개편된 12목(牧)을 재개편하여 지방조직에 대한 것을 대략 마무리 지었다. 이것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기까지 지방 군현의 이름과 관할구역의 대강(大綱)이 정해졌으며, 대체로 이 때에 영해와 영덕의 관할구역도 정해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1214∼1259) 46년(1259)에 가서 영해는 위사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의 고향이라 하여 종전의 예주를 덕원(德原)이란 이름으로 고치고 소도호부(小都護府)로 승격시킨 후 다시 예주목(禮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이듬해에는 화주(和州), 정주(定州), 등주(登州), 장주(長州)가 몽고에 함락됨에 따라 우리 지역인 평해, 덕원(영해), 영덕, 송생 등지를 떼어서 명주도(溟州道)에 귀속시켰다. 충렬왕(1275∼1308) 대에는 양계(兩界) 중의 동계(東界)에 덕원과 영덕, 송생을 이속하였다가 충숙왕(1314∼1330) 원년에 경상도로 다시 이속(移屬)시켰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경상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충선왕(1309∼1313) 2년(1310)에는 여러 지방의 목(牧)을 정비하였다. 이 때 예주목을 영해부(寧海府)로 개편하여 부사영(府使營)을 두게 되었다. 한편 성종조부터 영해를 단양(丹陽)이란 별칭으로 불렸는데, 이는 붉은 해가 처음으로 떠오르는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고려초에 야성군에서 영덕군으로 군명(郡名)을 고친 영덕은, 현종 9년(1018)에 예주의 속읍(屬邑)이 되어 감무(監務)로서 지방관으로 삼았다가 뒤에 다시 고쳐 현령을 두게 되었는데, 신라 때부터 영현(領縣)으로 거느리던 적선(積善)과 진안(眞安)의 두 현은 영덕이 예주의 속읍이 되면서 예주로 이속되어 갔다. 이 중에 적선현(積善縣)은 부이현(鳧伊縣)과 운봉현(雲鳳縣)으로 고쳐 불리다가 다시 성종 5년(986)에 청부현(靑鳧縣)으로 바꾼 후 영덕군에서 분리하여 예주의 속현이 되었으며, 진안현(眞安縣)은 본시 신라의 조람현인데, 경덕왕 때 진안현으로 개칭된 후 고려 초에 진보현과 합쳐져 보성부로 되었으며, 보성부는 현종8년(1018)에 예주의 속현이 되었다. 후삼국을 통일한 후 통일신라 이래로 축적되어 있던 문화적 역량이 인쇄술 및 도자기 제조기술 등으로 발현되어 찬란하였던 문화를 이룩하여 민족문화를 보다 더 발전시키는 한편, 개성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국제무역을 통하여 경제적 부(富)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불교와 유학을 통한 사상적 이념의 안정 등으로 나라의 융성(隆盛)을 구가하던 고려도 13세기에 이르러 잦은 외침(外侵)과 내부의 정치, 경제적인 혼란 등으로 인한 사회기강의 흐트러짐에 따라 민심의 이반(離反)이 점차 심하여져 가게 되고 각처에서 소란이 발생하여 결국은 국가 존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특히 여진과 거란·몽고의 침입은 고려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최대의 원인이었으며, 뒤이은 왜구의 침략은 고려가 망하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침입으로 고려는 거의 전국이 초토화(焦土化)되어 경제적으로는 거의 빈사상태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으며, 몽고제국인 원(元)에 대항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항전하였지만 결국은 항복을 하게 되어 몽고(元)의 부마국이 되었다. 또한 몽고가 주도한 두 차례의 일본원정에 참여하게 되어 그나마 조금 남은 국력이 거의 고갈되었으며, 고려말에 이르러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그 피해가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고려는 점차 쇠망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한편 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영덕과 영해지역은 거란이나 몽고제국에 의한 피해보다 왜구에 의한 피해가 심각하였는데,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이들 왜구가 우리 지역에 보이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1352∼1375) 때 부터이다. 공민왕 21년(1372) 6월에 왜구들이 영덕·영해에 침입한 것을 시작으로 우왕 7년(1381) 2월, 3월, 5월, 7월에도 영해에 침입하였고, 동왕 11년(1385) 4월에는 영해 축산도에 침입하였다. 이들 왜구에 의한 피해를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영해부서루기(寧海府西樓記)」에 의하여 살펴보면 그 참혹성을 짐작할 수 있다.
“왜구가 날로 일어나 침입하니 그 피해가 점차 심하여져 가더니 신유년인 우왕 7년(1381)에 이르러 그 피해가 더욱 심하였다. 성과 읍은 폐허가 되고 민가는 모두 불타서 재가 되어버렸다. 두어 해 동안 적의 소굴이 되도록 버려 두니, 관리들은 인근의 다른 고을에 가서 정무를 보게 되었으며, 범과 산돼지는 옛 마을에 와서 날뛰었다.[自倭興日以衰替在辛酉其禍益烈城邑丘墟閭閻燼數年之間棄賊藪官吏寄寓於他州虎豕來棲於古里 … 以下略.]” 「신증동국여지승람」, 권24 영해도호부 루정조
이 당시 축산도로 침입한 왜구들은 경상북도 지역뿐만 아니라 원주와 춘천·철원까지 쳐들어갔으며, 심지어 충남 공주에까지 쳐들어가서 그곳의 수령을 살해하는 등 그 만행이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표〈21〉은 이 당시 영덕과 영해에 침입한 왜구들의 횟수인데, 왜구들은 고려말인 우왕대에 집중적으로 이 지역에 침입한 것으로 나오며, 이 당시 이 지역의 참상이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은 이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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