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인돌(支石墓)
 
  영덕지역의 유형의 문화유적에 대한 지표조사는 필요에 따라 단편적으로 조사된 적은 있으나 본격적인 지표조사는 1980년 경상북도의 “안동·동해문화권”의 지표조사 계획에 의하여 경북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이외에 국립경주박물관팀에 의하여1999년에 전 군에 대한 조사가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도 새로운 유물의 발굴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고 대략적인 지표조사와 이미 출토된 유물의 수습에 국한된 것으로 군내의 전 지역에 대한 조사는 현재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군 전체에 대한 유적과 유물의 분포를 파악하는데 다소 곤란한 점이 있다.
  다음은 군내에 있는 고인돌을 개략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썩은 바위 고인돌                              금곡리 고인돌

1. 영덕 남산리 고인돌

 
  영덕읍 남산리 농공단지 진입로 좌측편에 상석(上石) 1기가 있다. 농공단지 조성을 위하여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 발굴한 결과로는 채집된 유물은 없었으며, 고인돌의 상석을 받치는 지석만이 있었다. 상석의 크기는 길이 250㎝×너비 240㎝×높이 210㎝이다.
 
2. 영덕 화수리 고인돌
 
  영덕읍 화수리에 고인돌이 1기가 있다는 기록과 사진은 있으나, 현재에는 사라지고 없어 그 규모나 축조형식에 대하여 알아볼 수 없다.
 
3. 병곡면 영 4리 고인돌
 
  병곡면 영 4리 190-1번지에 있는 고인돌로 드러나 있는 숫자는 모두 3기가 있다. 고인돌이 있는 위치는 현재의 썩은 바위 부근의 당집 뒷편 서쪽 능선 30m 부근의 정상부에 있다. 편의상 1,2,3호기로 구분하여 규모와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외에도 이들 주변에 다수의 고인돌이 존재할 가능성이 많아 앞으로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ㆍ제1호 고인돌 : 장방형으로 크기는 폭 100㎝이며, 길이는 180㎝이고, 높이는 70㎝이다. 장축(長軸)방향은 능선에 직교되는 북서와 남동에 걸쳐 있다. 상석(上石)은 뒤집혀진 채로 있다.
ㆍ제1호 고인돌 : 상면(上面)에 많은 성혈(性穴)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시대 신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바닥에는 폭 60㎝, 길이 140㎝, 깊이가 20㎝가 되는 석곽(石槨)이 있다.
ㆍ제2호 고인돌 : 1호 고인돌의 북서쪽 5m 정도에 위치하고 있다. 형태는 장방형이다. 크기는 폭이 110㎝이고, 길이가 150㎝, 높이가 70㎝이다. 장축방향은 1호 고인돌과 같이 북서와 남동에 걸쳐 있다.
ㆍ제2호 고인돌 : 윗면에 성혈이 7개가 있다. 성혈의 크기는 제일 큰 것이 직경이 10㎝, 깊이가 6㎝인 것도 있다.
ㆍ제3호 고인돌 : 2호 고인돌에서 북서쪽으로 2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형태는 장방형이다. 장축방향은 능선과 평행하는 북동과 남서 방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폭이 80㎝이고 길이 120㎝, 높이가 20㎝이다. 윗면에 성혈이 10개가 있으며, 성혈의 크기는 가장 큰 것이 7㎝, 깊이가 5㎝이다.

4. 병곡면 금곡리 고인돌
  병곡면 금곡리 172-11번지의 논 가운데 1기의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의 크기는 폭이 180㎝, 길이가 210㎝, 높이가 57㎝이다. 장축방향은 동서로 향하여 있으며, 윗면에는 성혈이 9개가 있다. 성혈의 크기는 제일 큰 것이 직경 9㎝, 깊이가 4㎝이다. 주변의 묘지 등에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가 묘의 축대로 쓰인 것으로 보여지며, 이를 보아 인근 지역에 다수의 고인돌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2. 석기산포지(石器散布地) 및 고분군
  작지산 출토토기
 

  대개 유물의 산포지란 유적의 흔적은 뚜렷하게 들어나지 않지만 유물들이 일부 수습되는

곳으로 보통 마을 뒷산의 나지막한 구릉지역에 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우리 지역은 영해 주변에 주로 이들 유물의 산포지가 있다.

1) 석기산포지와 고분군

1. 영해면 괴시리                                                                                                  직지산 출토토기

  영해향교 뒷편의 작지산은 서쪽 능선을 따라 넓고 완만한 구릉이 형성되어 있는데, 영해 시내 및 영해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탁 트인 영해평야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자연적 조건은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이 거주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 산의 구릉지 주변에서 석기류를 포함한 다수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는데, 현재 정확한 발견연대는 알 수 없다. 또한 발견된 유물도 보관과정에서 대부분 분실되고, 일부만 영해고등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석기류인 석촉(石鏃) 1점만이 남아 있다. 이 석촉은 농갈색(濃褐色)과 청회색(靑灰色)의 점판암제(粘板岩製)로서 횡단면은 능형(菱形)이고 촉신(鏃身)은 유엽형(柳葉形)이며 슴베가 있는 유경식(有莖式)이다.
  대개 석촉은 유경식과 무경식(無莖式), 그리고 유엽식으로 나뉘는데, 여타 마제석기와 같이 고인돌과 석관묘 등과 주거지에서 무문토기와 함께 주로 발견되는 유물이다.
  이를 보아 이 지역에서도 청동기시대의 인류가 거주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 온 것으로 추측되며, 이러한 청동기시대의 인류가 철기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는 이 지역 역사, 문화의 담당자로써의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2. 병곡면 사천리

  창수면 인량리와 영해면 원구리 사이를 흐르는 송천을 향하여 돌출한 산이 동산(東山)이다. 이 산의 동남쪽으로는 탁 트인 영해평야와 원구들이 펼쳐지며, 남쪽으로 향한 산록은 양지 바른 곳으로 일찍부터 이 산 기슭을 따라 사람들이 거주하여 왔으며, 현재에도 이 산 아래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천면 출토 석기

  최근에 와서 이 산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 결과 산의 남쪽 경사면을 따라 일부 청동기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수습되었는데, 특히 동산의 하단부에서는 석관묘가 발견되었다.
  여기에서 발견된 유물은 세형동검으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구류이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청동무기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특정의 계층만이 이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세형동검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일정한 세력을 가진 지배집단이 이 지역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그 외에 이 지역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반월형석도 2점·석촉·합인석부(蛤刃石斧)·구상봉두석(球狀棒頭石) 등이 있다.

3. 영해면 원구리

  옥녀봉과 형제봉 사이로 흐르는 송천의 한 지류가 옥금 들(坪)에서 만나는 지점에 원구리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 마을 서쪽 산의 능선 주위를 따라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석기류가 다수 발견되었다.
  원구리에서 수습된 유물로는 검신과 자루부분이 멸실된 석검조각 1점과 2점은 석영조각으로 만들어진 소형이고 2점은 사암으로 만들어진 대형 합인석부 4점이 있으며, 그 외에 석부의 머리쪽 횡단면이 타원을 이루며 석부의 배 부분에 홈이 파여 있는 유구석부(有溝石斧) 1점과 머리부분의 횡단면이 타원형이고 날부분(刃部)은 등(背)이 호형(弧形)이며 배부분은 직선인 주상편인석부(柱狀片刃石斧) 1점 등이 있다.
  이들 유적의 일부분은 현재 영해고등학교의 역사자료실에 보관되어 지역의 오랜 역사를 웅변으로 이야기 해주고 있다.

4. 영해면 괴시리 작지산 고분군


              원구리 출토 석기

작지산 폐고분

  영해향교가 건립되어 있는 작지산의 능선을 따라 다수의 고분(古墳)이 있는데, 현재는 거의 도굴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다. 이 중 일부라도 식별할 수 있는 고분은 대략 12기(基) 정도이다.
  이들 고분들의 축조형태는 광(壙)벽을 따라 할석(割石)을 쌓아 올리고 천정은 작은 개석(蓋石)으로 겨우 덮어놓은 형태이다.
  여기에서 수습된 유물도 영해고등학교에 일부 보관되어 있는데, 그 유물로는 적색연질(赤色軟質)의 유개완(有蓋)과 경질(硬質)의 대부장경호(台付長頸壺)·장경호·단경호·고배(高杯)류가 있다.
  특히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류의 개부(蓋部)에 달려있는 꼭지는 가야토기류에서 발견되는 단추 모양의 꼭지를 부착하고 있어 이 지역과 가야문화권과는 상당한 규모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5. 기타 고분군

  작지산 고분군이 위치하는 곳에서 남으로 골짜기를 하나 넘으면 나즈막한 능선을 따라 성내리 고분군이 펼쳐져 있는데, 대부분의 고분은 도굴과 토사에 의한 유실로 거의 원형상태를 잃어가고 있다.
  이 외에도 영해면 벌영리의 뒷산 능선을 따라 수십기의 고분들이 산재하여 있으나 확인된 고분의 숫자는 16기 정도이다. 현재 이들 고분들도 대부분 도굴과 봉토(封土)의 유실로 그 상태가 거의 훼손되어 있다.
  앞의 보고서에 의하여 벌영리 고분의 규모를 살펴보면 봉분의 직경이 대략 20∼30m이고 높이는 3m 이내이다. 축조형태는 장방형(長方形)의 석실로 광(壙)의 벽은 할석으로 쌓고 천정을 9매(枚)의 판석(板石)으로 덮었다. 석실의 규모는 긴쪽이 6m, 폭이 1m, 높이가 1m 정도의 세장형(細長形) 석실이다.
  현재 도굴에 의하여 유물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보다 상세한 역사를 알 수 있는 유물들이 수습되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정밀한 조사를 한다면 도굴되지 않은 고분을 통하여 다수의 유물이 발견될 것으로 생각된다.

3. 관옥 및 곡옥

  관옥(管玉)은 신석기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쓰여진 생명력이 긴 장신구이다. 모양은 구멍을 뚫은 짧은 대롱모양의 형태로 짧은 것은 1㎝ 이하에서 긴 것은 10㎝ 이상 되는 것이 있다. 곡옥(曲玉)은 선사시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6세기 중엽까지 사용되어 진 것으로 모양은 옥의 머리부분에 구멍을 뚫어 금실이나 끈으로 매다는 일종의 장신구이다. 크기는 1㎝ 내외로부터 10㎝ 내외까지 다양하며, 대개 관옥과 곡옥은 같이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지역에서는 1942년 7월에 금본성학(金本聖學)이란 일본인에 의하여 강구면 오포리의 밭에서 관옥과 곡옥이 발굴되었는데, 발견된 유물로는 관옥(管玉) 1점과 곡옥(曲玉) 2점이 출토되었다.
  곡옥의 크기는 4.8㎝으로 재질은 천하석(天河石)으로 되어 있으며, 관옥의 재질은 옥으로 되어 있다. 현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박물관 유물등록번호는 12853과 14729번이다.
  특히 신라시대에 있어서 이들 옥의 사용은 귀족들의 힘과 부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아 옥장식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을 과시하였는데, 이 관옥과 곡옥의 출토지인 오포리는 인근의 삼사리가 옛 신라시대 때 3명의 시랑(侍郞)이 와서 살았다 하여 일명 삼시랑이라고 한다는 지명 유래에 대한 설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와 결부하여 무언가 흥미로움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