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전 설(傳說)

(1) 팔령신(八鈴神)과 역동(易東)선생

  창수면 인량리 앞 속칭 팔풍정(八風亭)에 두 그루의 큰 느티나무(槐木)가 있었다. 옛날 고려(高麗)시대에 팔령신(八鈴神)이라는 방울소리를 내는 여덟 요귀(八妖鬼)가 이 큰 나무 위에 있었는데, 형체(形體)는 보이지 않고 방울소리만 났다. 지붕 위에 방울소리가 나기만 하면 그 집은 폭패를 당했다고 하는데 당시 오서면(烏西面:현, 미곡, 오촌쪽)과 서면(西面, 碧水 현 신리쪽) 쪽에 피해가 많았다고 한다. 이때 영해 부사(府使)나 사록(司錄)이 부임하면 미리 1주일 전부터 이 팔풍정 앞에서 큰 소 몇 마리를 눕히고 술을 빚고 음식을 준비한 다음 여러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부사나 사록이 정성껏 치성을 드려야 재직(在職)하는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약 8백여년 전 문희공(文僖公)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이 영해 사록(司錄)으로 부임하자 영해부의 벼슬아치들이 앞서처럼 굿을 시작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우사록(禹司錄)은 이때 치성 드림을 거절하고 사자(使者)를 시켜 두서너줄의 문자를 써 보내어 팔령신들을 제압한 후, 그 중 한 신(神)은 영양에서 울티재(泣嶺)로 넘어 오는 잡귀를 막게 하고 한 신은 인량리 팔풍정을 수호케 하고, 한 신은 동해에서 들어오는 잡귀를 막게 하기 위하여 관어대 입구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다섯 요귀는 바다에 던져 없애 버렸다. 이 후로는 팔령신의 행패로부터 벗어나 모두 무사히 생업에 종사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1명의 요귀만 살려주어 동해로 들어오는 잡귀를 관어대 입구에서 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다음 나머지 일곱 요귀를 모두 수장(水葬)했다고 한다.
현재 팔풍정에는 느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언제부터인가 이 나무를 동신목(洞神木)으로 받들고 있다.

(2) 관어대 눈먼 할머니 (어대노구 : 魚臺老)

   관어대(영해면 괴시2리) 입구에 이름을 춘진(春眞)이라고 하는 한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일찌기 한양(漢陽) 사람 사남(士男)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 못가 사별(死別)하고 홀로 외롭게 살았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 이웃의 삯바느질이나 품팔이를 하며 끼니를 이어 갔다.
   어느 해 봄날 춘진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웃집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이 어두워져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 뒤 춘진은 이웃의 동정도 받고 구걸도 해 가며 살아간 지 몇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해 갑자기 이(齒)가 빠지는 등 기구한 나날을 보내고 살아 가던 중 어느날 밤 꿈에 낭군인 사남이가 나타났다.
「고생이 얼마나 많았소?」
하고 사남이가 말하였다.
「나를 데려가 주시오」
하고 춘진이 말하자 사남이는
「나를 따라 오시오」
하고 미곡(美谷)쪽을 향하여 훨훨 걸어가고 있었다. 춘진이 허겁지겁 사남의 뒤를 따라 가는데 남편인 사남이는 냇물을 건넜으나 춘진이 앞이 안 보여 물을 건너지 못한다고 소리쳤다. 이때 사남이가 뒤돌아 보면서
「앞을 못보니 저렇게 따라오지 못하는구나」
하면서 가시 침으로 눈을 찔러 버렸다.
   붉은 피가 낭자했다.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다 한다.
   이 노파가 8령신 중 하나라고도 전해지며 그 자리에 고사집이 있었고 옆에 탱자나무가 있었으며 수십년 전만 해도 이곳에 치성을 드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3) 용마총(龍馬塚)

지품면 삼화리(三和里)에 돌무덤 세개가 나란히 있다.
신라(新羅) 때 한 화랑(花郞)이 궁술(弓術)을 이곳에서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용마(龍馬)에게
“너가 이 화살을 물고 오라”
하고 활을 쏘았다. 나는 듯이 뛰어가던 용마가 그대로 돌아왔다.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생각한 화랑은 앞뒤를 생각하지도 않고 칼을 빼어 말의 목을 쳐버렸다. 그 때 한 농부가 달려와서 < 말이 화살을 찾다가 간 뒤 화살이 떨어졌다> 하면서 화살을 내어놓았다.
   화랑은 경솔했던 자기의 행동을 깊이 뉘우치면서 그 자리에 말을 묻고 양 곁에 말 안장과 칼을 따로 묻어 세개의 무덤을 나란히 만들어 놓았다.
뒷사람들이 보검(寶劍)이 탐이 나서 무덤을 헤치면 뇌성벽력이 일어나 파낼 수가 없었다고 하며, 일명 말무덤이라고도 한다.

(4) 자방송(子房松)

   지품면 복곡리(洑谷里) 북쪽 기슭에 큰 노송(老松)이 있다.
  옛날 중국 진시황(秦始皇)의 폭정(暴政)을 제거하기 위해서 장자방(張子房)은 한고조(漢高祖)와 의논한 끝에 천하의 장사를 구하기 위해 나섰으나 그럴만한 인물을 찾지 못하다가 해동(海東)에 역사(力士)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으로 나와 장사를 찾다가 지쳐서 이 소나무 아래 기대서 탄식하였다.
“장사(壯士)를 만나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고조(高祖)를 뵈오랴…”
그때 기이하게도 그 소나무에서 “북으로 백여리만 가면 천하의 장사가 있느니라” 하는 계시(啓示)가 들려 왔다. 자방은 곧 바로 평해(平海) 지방으로 가서 창해역사(滄海力士)를 만났다.
그 뒤부터 이 소나무를 자방송(子房松)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사람들이 이 소나무의 가지만 베도 재앙이 닥쳐 왔다 하며, 근래 이 소나무 위에 또 다른 소나무가 피어나고 있는데, 지금부터 약 백여년 전에 어떤 정신병자가 새순을 다려 마셨드니 정신병이 완치되었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

(5) 까치소(鵲淵 : 작연)와 나옹화상(懶翁和尙)

창수면 가산리(佳山里)에서 인량리(仁良里)로 가는 산비탈 중간 지점에 소(沼)가 있다.
당시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어머니인 정씨(鄭氏) 부인은 남편인 아씨(牙氏)가 세리(稅吏)의 횡포에 견디다 못해 도망을 쳐버리고 만삭이 된 몸으로 남편 대신 동헌(東軒, 당시 禮州府)으로 끌려가던 도중 이 소 위에서 애기를 낳았으며, 세리들은 갓난애기를 그냥 둔 채 동헌으로 끌고 갔다.
  부사(府使)의 후덕(厚德)으로 풀려 나온 부인이 급히 이곳에 당도했을 때 수십마리의 까치들이 날개를 펴서 갓난애기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날이 음력 정월 보름이었다고 하며 이 애기가 자라서 고려 불교를 조선에 전한 나옹화상이라 한다. 이 뒤부터 소 이름을 작연 또는 까치소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6) 반송(盤松)과 나옹화상(懶翁和尙)

  창수면 신기리(新基里)에 오래된 반송(盤松)이 한 그루 있었는데, 이는 나옹화상이 출가할 때 지팡이를 바위 위에 거꾸로 꽂아 놓고
“이 지팡이가 살아 있으면 내가 살아 있는 줄 알고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
하는 유언을 남겼다 한다.
   거금 7백여년 동안 전설의 거목(巨木)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반송은 1965년경에 고사(枯死)했으며 1970년경에 이곳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선사(禪師)의 초상화를 모셔 두었다. 지금 신기리를 반송정이라 부르기도 한다.

(7) 나옹(懶翁)의 잉태

  아씨 부인 정씨가 11월 어느 날 빨래하러 냇가에 나와 빨래를 하던 중 우연히 참외 한 개가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겨 주워 먹었다. 그날부터 태기가 있어 나옹을 낳았다 한다.

(8) 왕암(王巖) ; 왕바위

  창수면 인량리 뒷골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바위를 중심으로 마치 여섯 바위가 육신(六臣)이 엎드려 읍(揖)을 하고 있는 듯 하므로 이 바위를 왕바위라 부르고 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世祖)가 어린 조카 단종(端宗)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오봉(五峰) 권책(權策) 선생은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되었는데, 당시 나이 13세로 참형은 면하고 이곳 영해로 유배(流配)되어 귀양살이를 하였다. 이때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실패하자 오봉선생은 죽령고개에서 대성통곡하였으며, 단종이 승하(昇遐) 했다는 소식을 듣고 왕암을 끌어안고 피맺힌 호곡을 하다가 여러 번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곤 하였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는 왕암에 가서 분향하고 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으며 그 뒤 두문불출하여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한다.
   선생이 분을 못이겨 읊은 시 가운데
   憤號天地怒 : 분하여 울부짖음에 하늘과 땅이 노하고
   寃泣鬼神悲 : 원통한 울음소리에 귀신이 슬퍼한다.
   라는 귀절이 있다.
   고종 을유년에 후손과 향인들이 선생의 충절을 추모하여 왕암이란 두 자를 세기었으며 원근의 명현거유(名賢巨儒)들이 모여 주옥같은 추모시를 읊었다.
   선생은 철종 갑인년에 종부(從父) 충장공(忠壯公)과 함께 대봉서원(大峰書院)에 향사(享祀) 되었으며, 뒷사람들이 두고두고 그 충절을 흠모하였다.

(10) 면경대(面鏡臺) 전설

영덕읍 화개리에서 서북쪽으로 2km지점 무둔산 서쪽 기슭에 넓이 6평 가량의 거울처럼
맑고 넓은 바위가 있으며 “면경대(面鏡臺)”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득히 먼 옛날 야시홀(也尸忽) 한 촌에 할아버지 내외(內外)가 아기 두기를 원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밤마다 쉰넷골(五十川) 건너 무둔산(일명 무릉산) 바위에 가서 아기 얻기를 빌었다.
   어느날 “내가 너에게 아들을 점지할 터이니 말을 삼가라”는 신령의 소리가 허공에서 들리자 곧 뇌성벽력이 천지를 얼마간 뒤흔들었다. 할머니가 잠시 혼절해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빌고 있던 바위가 면경(面鏡)같이 변해 있었고 그 위에는 투구, 갑옷, 칼이 놓여 있고, 홍안(紅顔) 소년이 용마(龍馬)를 타고 할머니 앞에 와서
“어머님”
하면서 공손히 절을 하였으며, 그 뒤 할머니는 이 소년과 함께 그 곳에서 살게 되었다.
아들은 날마다 무술을 익혔으며 바위로 짜게를 받는 등 큰 장정이 되었다.
어느 날 어머니에게 조 한말과 콩 한되를 받은 아들은 면경같은 바위 위에 조와 콩을 놓고 경문(經文)을 외었다. 이때 콩은 갑자기 대장으로 변하고 조는 군졸로 변해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 나라에 충성할 때가 왔으니 콩 한말과 조 한섬을 더 구해 주십시오」
하고 용마를 타고 북쪽으로 떠나 버렸다.
   그 뒤 조와 콩을 구한 할머니는 쉰넷골 물을 건널 수 없어 주저하고 있을 때 한 청년이 나타나서 냇물을 건너 집에까지 운반해 주었다. 할머니는 그 청년이 묻는 말에 자기의 아들 자랑을 모조리 이야기해 주었다. 주위를 두루 살핀 청년은 무둔산(無屯山, 무릉산)을 타고 서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들이 돌아온 지 몇 달만에 남쪽나라와 북쪽나라가 싸움이 벌어졌다. 이때 아들은 조와 콩을 앞에 놓고 경문을 외었으나 군사가 되지 않았다. 이상히 여긴 아들은 자루에 담긴 조와 콩을 풀어 보았더니 물에 젖어 모조리 썩어 있었다. 이때 먼저 번 그 청년이 군사를 앞세우고 쳐들어 왔다. 크게 패한 아들은 할머니에게 이 연유를 물었다. 할머니는 경솔하게 그 청년에게 모든 이야기 해 준 것을 크게 뉘우치고 그 자리에서 자결하였으며, 소년 장수는 피할 길이 없어 용마(龍馬)를 타고 북쪽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이 바위를 마귀(마고)바위라고도 하며, 바위 옆에 용마의 자취와 바구니의 자국이 있고 짜게 받은 돌이라 하여 바위가 놓여 있다.

(11) 용치소(龍岩池) 전설

  달산면 대지리(大枝里, 가질마을) 뒷바위에 용마(龍馬) 발자국이 남아 있으며 그 옆에는 못이 있다.
   옛날 가질마을에 애기가 출생한지 삼일도 안 가서 방 구석구석 기어 다녔다. 괴이하게 여긴 식구들과 마을 사람들은 이 애기가 커서 만약 역적이 된다면 앞으로 이 마을에 큰 화가 닥쳐올 것이라 생각하고 미리 화를 막기 위해서 죽여 버리기로 하였다. 이 계획을 알아차린 애기는 펄쩍 뛰어서 선반 위에 숨어 있었다.
   애기를 찾아 빨랫돌로 짓눌려 죽이자 뇌성벽력이 마을을 얼마 동안 뒤흔들었으며 그때 난데없이 큰 말 한마리가 나타나 마을 뒤 바위에 올라서서 허공을 쳐다 보고 울부짖었다. 3일간 계속 울부짖다가 바위 밑 소(沼)에 빠져 죽어 버렸다. 애기장수가 탈 용마였으며 주인이 죽자 함께 죽은 것이다. 그 뒤부터 소 이름을 용암지(용치소)라 했다 하며, 그 바위는 마을 사람들의 토속신(土俗神)으로 모셔지고 있다.

(12) 용당(龍塘)샘 이야기

  영해면 원구리 앞 용당산(龍塘山) 아래 샘이 있다.
  아득히 먼 옛날 이곳에 살던 황룡(黃龍)이 영덕 오십천에 있던 청룡(靑龍)과 싸움을 하게 되었다.
어느날 밤 그 마을 한 청년의 꿈에 황룡이 나타나서 칼을 청년에게 주면서 < 내일 낮 오시(午時) 정각에 청룡이 공중으로 치솟거든 이 칼을 겨누어 달라>하고 부탁하였으며, 그 청년은 그렇게 하기를 약속하였다. 꿈인데도 칼이 옆에 있었다.
   다음날 그 시간에 청룡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 청년은 칼을 쥔 채 떨고 있다가 잠깐 사이 황룡이 솟구치자 칼을 겨누었다. 그 순간 황룡은 힘없이 샘에 빠져 죽어 버렸다. 그 뒤 청년의 가문(家門)은 몰락하다시피 되어 버렸다고 하며, 그 뒤부터 용당산이라 하고 황룡이 빠져 죽은 샘을 용당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지금도 샘물이 매우 차며 가뭄이 심해도 마르지 않는다.
일설에는 눈 먼 황룡이 이 샘에 있다고 한다.

(13) 정장군(鄭將軍)과 장군수(將軍水)

  정담(鄭湛) 장군이 위장사(葦長寺)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때 가개도치라는 이 절의 중이 기운도 장사인데 약탈과 횡포가 심했다.
   정장군은 가개도치가 법당 뒤에 있는 샘물을 마시고 기운이 세어졌다는 말을 듣고 가개도치가 샘을 덮어놓은 큰 돌틈을 타서 붓대롱으로 샘물을 빨아 먹었다. 점점 힘이 세어지자 돌문을 열고 물을 몰래 마셨다. 어느날 상좌 중을 때려 주었다고 해서 가개도치와 싸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정장군은 싸움할 마음을 잃은 채 그의 마을인 비익동(飛翼洞, 현 인량리)으로 쫓겨 왔으나 가개도치는 그 마을까지 따라왔다. 어쩌다 가개도치의 무기인 철퇴방망이를 탈취해서 가개도치를 죽였다.
   그 뒤부터는 약탈, 횡포가 없었고, 중과 정장군이 마셨던 샘물을 장군수라 불렀다. 지금은 샘터마저 없어 졌지만 그 당시 가개도치가 놋잔을 샘웅덩이에 띄워 둔 것이 소리가 가끔 났다고 한다.
   이 위장사는 형제봉(兄弟峰) 아래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마저 찾아볼 수 없다.

(14) 망일봉(望日峰)과 주세붕(周世鵬)선생

영해면 괴시리와 사진리 경계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이 망일봉이다.
조선시대 중엽 주세붕 선생의 아버지가 옥에 갇힌 몸이 되었다. 어린 주선생은 마침 이 지방에 순시차 온 관찰사를 찾아가서 방면(放免)해 줄 것을 호소했으나 풀어 주지 않았다. 어느날 관찰사가 동해의 해뜨는 광경을 보기 위해 망일봉에 올랐다. 어린 주선생은 거기까지 따라와서 아버지를 풀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관찰사는 어린 주선생의 효성에 느낀 바 있어
「지금 운자(韻字)를 부를 터이니 시를 읊어 보아라」
하고 운자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쓸쓸한 고향, 낙엽은 뒹굴겠지만 
높고 험한 봉우리 위에서 아침 해돋이 바라보네
금(金) 빛 같은 햇빛은 하늘을 이었고 
파도 소리 우렁참은 땅을 가르는 것 같네
상공(相公)의 넓은 마음 해악(海嶽)삼킬 듯 너그러운데
서생(書生)의 큰 눈엔 천지(天地)가 작아 보이네
만약 양 겨드랑이에서 바람이 이는 날개 있다면 
넓게 퍼져 있는 높은 구름 위를 날아 보련만

  이 소년의 시구(詩句)에서 나타나는 높은 기개에 감탄한 관찰사는 어린 주선생을 여러 번 칭찬하고 그의 부친을 즉시 풀어 주었다.

(15) 용두(龍頭)목 이야기

   달산면 대지리(大枝里) 앞 소(沼) 위에 용두목이라는 언덕 비슷한 산이 있다. 옛날에 염장자라는 큰 부자가 이 용두목 위에 살았는데 손님이 하루에 수십명씩 찾아 들었다.
어느날 바랑을 진 시주승(施主僧)이 이 집에 들어오자 이 집 자부(子婦)가 시주승에게
“스님께 시주는 얼마든지 할 터이니 우리 집에 손님만 오지 않도록 해 주십시요” 하고 간청하였다. 시주승은 백미(白米) 서말만 시주하라고 하고 내일부터 큰 장정을 시켜 이 목을 잘라 버리면 된다고 하면서 어디론가 가버렸다.
   다음 부잣집 자부는 장정 30여명을 동원하여 산목을 끊었는데, 그 밑 소(沼)는 붉은 피로 엉켜져 있었다. 즉 용(龍)의 목을 끊어 버린 것이다.
이 일이 있는 뒤 얼마 안되어 그 집에 손님의 발은 끊겼고, 집은 폭패를 당해 버렸다. 그 뒤부터 이름을 용두목이라 했다 한다.

(16) 운용지(雲龍池)의 유래

지금부터 약 370여년 전에 지품면에 운용사(雲龍寺)라는 조그만 절이 있었다.
하루는 이 절 우물에 전에는 없던 붕어 두마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고 있었다. 스님이 괴이하게 여기고 천기(天氣)를 살펴 보았다. 동쪽 하늘에 노란 구름이 일고 있었다. 이 절에 어떤 변화가 닥쳐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든 스님은 급히 바랑만 챙겨 절을 빠져 나와 도주하였다. 그날 오후가 되자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었으며, 절과 산이 뒤엎어지고, 갑자기 우물에서는 물이 솟구쳐 큰 못이 되었다 하며, 그 뒤부터 못 이름을 운용지라 했다 한다.

(17) 용지(龍池) 제(祭) 전설

  창수면 칠보산 정상 하단에 용지(제)터라는 천연제단(天然祭檀)이 있고 주위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 있으며, 그 옆에 있는 샘 웅덩이는 가뭄이 극심해도 마르지 않는다. 옛날 호지말(영해면 괴시리) 어느 가난한 집에서 애기가 태어나자 곧 천정에 뛰어 올랐다가 선반에 앉았다간 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애기가 앞으로 자라면 큰 역적이 될지도 모르며, 만약 그렇게 되면 우리 마을은 역적 마을로 몰락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기를 빨랫돌로 눌려 죽였는데 3일만에 목숨이 끊어졌으며 죽은 뒤 아기의 겨드랑 밑에 날개가 돋혀 있었다. 애기가 죽자 갑자기 용마(龍馬)가 마을에 나타나 10여일간 뛰어 다니며 울다가 칠보산 용지터에서 죽었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용마가 죽은 그 자리에 용마를 묻어 주었는데, 이상하게도 몇 달이 안가 그 자리에 샘이 솟구쳤다고 하며, 그 뒤부터 용지터라 불렀다 한다. 몇 년 전까지도 여름에 가뭄이 심하면 병곡·창수 면민들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18) 우역동(禹易東)과 등운산(騰雲山) 호랑이

  등운산 일대에 여러 해 묵은 호랑이가 중으로 변신해서 민가(民家)에 작폐(作弊)가 심하자 우역동이 배자(호출장)를 써 범에게 주려고 절 뒤에 가니 중이 신을 삼고 있으므로 배자를 보여 주니 중이 눈물을 흘리며 따라 왔다. 역동선생이 중을 보고 너의 동류(同類)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다 잡아 죽인다 하니 범이 제 동류를 모두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으며, 그 뒤부터는 호랑이의 피해가 없어졌다고 한다.

(19) 칠보산(七寶山)과 화인지감(華人知感)

  병곡면 금곡리(金谷里)에 샘이 있는데 중화인(中華人) 두사충이 이 물을 마셔보고 이 산에 반드시 일곱가지 보배가 있으리라 하여 칠보산이라 하게 되었다. 칠보(七寶)는 돌옷, 더덕, 산삼, 황기, 묏돼지, 구리, 철이라고 하며, 특히 이곳의 철은 지남석으로 가루는 뼈가 뿌러진데 좋다고 한다.

(20) 울티재(泣嶺)와 감사 손순효(孫舜孝)

  창수면과 영양군 경계에 있는 독경산(讀經山)의 줄기로 창수에서 영양으로 넘나드는 산길로써 울티재는 재가 높고 험하며 계곡도 깊었다. 옛날에는 석양(夕陽)에 이 재를 넘으면 반드시 그 나그네는 참상을 입었다 해서 울고 넘는다는 뜻으로 울티재(泣嶺)라 했다 하며 저녁만 되면 이 재 넘어 가기를 꺼려했다 한다.
어느날 원님이 오다가 길에서 풀벌레를 보고
「저 벌레가 무슨 벌레냐?」하고 물었다.
「범아제비입니다.」
하고 하인이 대답하였다. 조금 더 오다가 호랑이(범)을 만났다. 겁이 났으나 정신을 차리고
「내가 오다가 자네 백부 (伯父·阮丈)를 만났으니 길을 비켜라」
하니 범(호랑이)이 길을 비켜주어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울티재와 관련된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울티재는 영해 고을의 교통의 요충지로 영해 고을을 오고가는 대소의 관리들이 처음 이 고개를 넘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하곤 하였다. 그래서 영해 고을의 관리가 되는 것을 모두가 꺼리게 되었다.
  그래서 손순효(孫舜孝)가 경상도 감사가 되자 바로 울티재에 내려와 주위를 살핀 다음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베고 글을 쓰기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汝揖華山呼萬歲 我將淪命慰群氓
個中輕重誰能會 白日昭然照兩情

너희들이 공손히 화산곡(華山曲)을 만세토록 부른다면
내 장차 임금의 명을 받아 너희들을 위로하리라.
개개일들의 가볍고 무거움을 누가 능히 헤아리랴
밝게 비추는 햇님이 우리 양 충정을 비추어 주지 않은가

  그러자 바로 괴이한 일들이 없어지고 이후로는 흉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울티재는 괴이한 일들이 없어졌다고 하여 파괴현(破怪峴)이라 하였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 2년(1393) 5월에 전조 고려 왕씨들의 후예들을 영해에 옮겨 살도록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의 후예들이 점차 장성하면서 조선 왕조에 대한 반감으로 범아제비 혹은 산적 등으로 변장하여 새왕조의 관리들을 살해하여 선조들의 원한을 갚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 왕조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오래 방치하면 구왕조의 부흥운동이 일어 날까봐 병조좌랑 등을 역임한 손순효(1427∼1497)를 경상도 관찰사(감사)로 삼아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 때가 성종 16년(1485)이었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지 불과 73년 밖에 되지 않은 시점으로 이 때까지도 신왕조에 대하여 반발하는 세력이 영해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손순효가 써서 붙인 방문(榜文)의 마지막 구절에도 여실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으며, 이후 연산군 1년부터 연산군 4년(1495∼1498)에 이르는 동안 영덕현령으로 재직한 권오복(權五福)의 ‘파괴현’이란 시로써도 이를 알 수 있다.

(21) 목골재(혹은 望峴)

  고려시대에 상원(上元) 마을은 큰 마을이었으며, 마을 중앙에 제일 가는 부자집이 있었는데 집이 크고 재물이 많아 손님이 끊어질 때가 없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며느리가 손님이 너무 많아 견뎌내기 힘들자 하루는 탁발을 다니는 중에게 손님들이 덜 오게 하는 방법을 물으니 영해(寧海)로 들어가는 언덕 목을 끊으면 된다고 하였다. 새며느리는 틈나는 대로 언덕 목을 끊어나가 마침내 목을 완전히 끊었는데, 얼마가지 않아서 손님도 줄고 더불어 재물도 줄어 드디어 가세가 기울어 집안이 망하였다.
   지금 동네어귀에 있는 큰 바위가 그 집의 뜰 안에 있었고 그릇을 씻어 얹어 놓았던 자리가 남아 있다. 그 뒤 한때 마을이 없어지고 이곳에 인가가 없다가 삼백년쯤 전에 다시 마을이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22) 상원(上元)마을 풍수설(風水說)

  축산면 상원리의 형국(形局)은 배가 가는 행주(行舟) 형국이므로 우물을 파면 물이 새어 배가 가라앉아 가지 못하는 형국이므로 마을이 잘 되지 않는다 하여 우물을 파지 말라는 말
이 전해져 내려온다. 얼마 전 까지도 마을엔 우물이 거의 없고 도곡(陶谷) 가까운 큰 길가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한다.

(23) 장인탄(丈人灘)

  신라(新羅) 때 야성(野城) 고을의 한 원님이 고기를 낚고 있을 때, 원님을 찾던 농부 한 사람이 원님을 보고
「장인영감, 원님이 어디 계신지 알겠소?」
하였다. 원님이 웃으면서
「아마 장인탄 위에 있을 거요.」
하면서 고기만 낚고 있었다. 이 농부는 장인탄이 어느 곳인지 몰라서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그 뒤부터 고을 사람들이 원님이 놀던 그 여울을 장인탄이라 불렀다.

(24) 등은기(嶝圻基)

  임진왜란 때 왜놈들은 영해 고을까지 쳐들어 와서 백성들은 울부짖으며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인 석계공을 데리고 영해 대동(大洞, 항골) 어느 두메 마을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는데, 석양이 되자 일행은 짐을 풀어놓고 쉬게 되었다. 이때 어린아이였던 석계공이 울기 시작하였다. 피난민들은 울음소리 때문에 들킨다면서 다른데로 가든지 울지 않게 하라고 야단들이었다. 어린아이는 계속 울기만 하여 할 수 없이 독경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있자 마침내 아이는 울음을 그치었다. 그래서 그 곳에서 구덩이를 파서 위장엄폐하고 잠을 청하였다.
  그날 밤 피난민들이 모여 있던 곳에는 도적떼가 나타나 피난민들은 거의 학살당했는데, 오직 석계 이시명(李時明) 모자는 살았다 한다. 지금도 독경산 산허리에 오목하게 구덩이가 있다 하며, 곧 이 울음으로 인하여 한 집안의 목숨을 건지게 된 곳이라 하여 이를 등은기라 한다.

(25) 향교암 (鄕校巖)과 처사(處士) 박응천(朴應天)

  향교암은 등운산 범흥사(梵興寺) 뒷산에 있는 바위굴로 처사(處士) 박응천(朴應天)이 피난하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영해로 침입하여 오자 향교(鄕校) 장의(掌儀)였던 박응천이 오성(五聖) 위패를 안고 가서 이 바위굴에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焚香)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다른 지방에는 향교가 타버리고 위패가 없어 5성 위패를 다시 만들었지만 영해는 박공(朴公)의 지극한 정성으로 고이 환안(還安)시켰다. 뒤에 유림(儒林)에서 단을 쌓고 예를 갖춘 뒤 이 바위 이름을 향교암이라 부르고 박응천을 길이 칭송하였다. 박공은 영해박씨로서 고려시대 시중(時中) 박세통(朴世通)의 후예이다.

(26) 정신방(貞信坊)

  옛날 고려 때, 축산면 고실(古室, 谷)에 한 여인이 초년에 남편을 잃어 버렸다. 친정 어버이가 개가(改嫁)하기를 여러 번 권했으나 듣지 않고 절개(節介)를 굳게 지켰으며, 시부모 모시기를 극진히 하였다. 본부(本府, 당시 예주부사:禮州府使) 사또가 이 말을 듣고 그 집에 부역과 세금을 면제해 주고 이름을 정신방이라 하였다. 안노생의 ‘정신방’이란 시가 있다.

(27) 거무역리(居無役里)와 시중(侍中) 박세통(朴世通)

  고려 원종(元宗)시대에 안렴사(按廉使) 박세통(朴世通)이 열읍(列邑)을 순행하는 도중 예주부(禮州府)에 이르렀을때 한 어부가 거북이 한 마리를 잡았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 거북이에게 짖궂은 장난을 계속 하였다. 박공이 자세히 보니 거북이 등에 분명히 < 王>자가 새겨져 있기에 그 거북이를 잡은 어부에게 후하게 곡식을 주고 거북이를 사서 바다로 보내 주었다. 그날 밤 꿈에 한 백발 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동해용왕으로 오늘 내 아들이 나들이 나갔다가 뭇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죽을 뻔한 것을 공이 살려 주었으니 무엇이라 감사함을 말할 수 없오. 내가 용궁(龍宮)에 있으므로 공을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은 공의 집안에 대대로 영광을 베풀도록 하겠소」하고 사라졌다.
  원래 덕망(德望)이 있고 풍채가 좋기는 했지만 그날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갔으며 임금의 총애는 더욱 깊어 드디어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 平章事)라는 최고 벼슬에 올랐으며, 그 아들 홍무(洪武) 또한 밀직사(密直使)에 이르고 손자 감()은 벼슬이 복야(僕射)의 중직(重職)에 올랐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모두 중직에 올랐음은 예주부의 큰 경사였다. 부(府)에서는 그 뒤부터 이 마을에 부역을 없앴다 하여 거무역이라 했다 한다. 그 뒤 영조(英祖) 때 정언(正言) 남기만(南基萬)이 이 마을에 살면서 자호(自號)인 묵산(默山)의 묵자를 따서 (거묵리:居默里)라 하다가 다시 거무역으로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8) 아기당(娥妓堂) 성황당(城隍堂)

  예주부사(禮州府使) 부인이 딸과 함께 친정에 가다가 호식(虎食)을 당해 버렸다. 부사는 부인을 잊지 못하여 부인의 화상(畵像)을 그려 놓고 내아(內衙)에서 제사를 지냈다. 그 뒤 부사가 다른 곳으로 전근가면서 화상은 그대로 두고 떠나게 되었으며, 새로이 부임해 오는 신임 부사가 와서 제사를 지내지 않았는데, 밤마다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나서 내 화상을 위해 달라고 하자 부사는 당집을 짖고 동신(洞神)으로 받들게 하였다.
  그 뒤부터 현몽도 없었으며 마을도 편안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미친 여자가 당집에 들어가서 여인의 화상을 불에 태워 버렸으며, 그 뒤부터 마을에 참상이 자주 일어났으며 꿈에 현몽이 되자 다시 화상을 그려 모신 후 지금까지 무사하며 현재 성내3리 동신으로 위하고 있다.

(29) 둔갑술(遁甲術)

  옛날 오촌(梧村) 마을에 한 청년이 어려서부터 산에 가서 공부를 하였다. 여러가지 공부를 한 끝에 둔갑술까지 하게 되었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병을 앓고 계시므로 의원에게 물으니 개고기가 좋다고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개를 살 힘이 없어 책을 보고 범으로 둔갑해 개를 물고 집에 오니 어머니는 책을 태워 물을 끓이고 있었다. 자기 재주로는 다시 사람으로 둔갑하지 못해 개를 마당에 두고는 호랑이 모습으로 마을 뒷산에서 방황하며 책을 태운 어머니를 원망하며 지냈다. 그러나 사람이 가까이 가면 물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흘리며 피했다. 어느날 신리, 보림, 영양 세곳의 목수에게 한날 한시에 꿈에 나타나서 자기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기를 위해 원수모기에 집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세 사람이 원수모기에 오니 큰 호랑이가 소나무 밑에 죽어 있었다. 세 목수가 의논하여 당집을 짓고 범의 화상을 그려 모셨다고 한다.

(30) 유금사(有金寺)와 지네

  옛날 병곡 유금사에는 스님이 와서 이튿날만 되면 시체로 변해 나왔다. 새로 온 한 도승(道僧)이 이 말을 듣고 이 절의 안팎을 샅샅이 살펴 본 결과, 절에서 약 30m 떨어진 석굴을 발견하였다. 이날 저녁 도승은 목욕재계하고 법당에 정중히 앉아 정신을 가다듬으며 합장하였다.
  자시(子時)가 가까워 오자 뇌성벽력이 얼마 동안 계속되다가 조용해 졌다. 이튿날 석굴 안에는 큰 지네가 돌에 치여 죽어 있었다. 그 뒤부터는 그런 일이 없었다 한다.

(31) 배암골 자라목

  창수면 오촌 건너편 마을인 배암골은 마을 형국이 자라 모양으로서 자라가 목을 내민 목부분에 남씨가 살았다. 남씨는 깨만도 천석(千石)을 하는 부자 집이어서 쌀을 씻으면 쌀뜨물이 원구까지 흘러갔다. 그런데 어느날 마을 사람들이 보를 막기 위해 땅을 파는데 피가 나오므로 이상하게 생각하고 지관(地官)에게 알아보니 마을 형국이 자라 형국이며 피가 난 그곳이 자라 목부분이었다. 가래를 댄 사람은 죽고 남부자도 얼마 가지 않아 패가(敗家)를 하였다. 지금도 이곳의 봇물은 역수(逆水)로 흐른다.

(32) 추레밭골의 유래

  오촌리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이곳에 수안김씨가 살면서 도사를 맞이하여 명당을 구하는데 도사를 박대하자 도사가 큰 부자가 될 자리와 벼슬을 할 자리 중에서 마음대로 고르라고 하였다. 김부자가 벼슬이 날 자리를 택하자 그 자리를 정해 주었는데 얼마 안가서 원님이 나발을 불리며 지나가는데 그 자손이 무엇인가 잘못하여 추래(주리) 틀림만 당했다고 하여 그 뒤부터 추레밭골이라 했다.

(33) 주춤바위

  지품면 토곡동에 있는 큰 바위로, 옛날 이 근방에 있던 절 주지의 비행이 심했다. 영일청이란 사람이 절을 부수러 달려오니 절이 벌써 물에 떠내려 갔다는 말을 듣고 그 자리에 주춤 앉아서 바위로 변해 버렸다 한다.
  바위는 마치 탕건처럼 생겼는데 행인(行人)이 돌을 던져서 그 바위 위에 얹으면 생남(生男) 한다고 한다.

(34) 장수바위

  오촌 마을에서 좀 떨어진 구릉마을에 한 부인이 아기를 낳았는데 아기가 남달리 총명하였다. 어머니가 이웃집에 다녀와서 보니 콩을 가지고 진치는 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이런 소문이 마을에 퍼져 마침내 원님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원님이 이상히 생각하고 그 집에 가서 아이에게 콩을 주니 과연 소문대로 진치는 놀이를 하므로 필시 커서 위험한 일을 저지르리라 생각하고 돌로 눌러 죽이니 마을 뒷산에서 천마(天馬)가 슬피 울더니 날아가 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그후 천마가 날아간 바위를 장수바위라 불렀다.

(35) 업(業)

  영해에 노씨(魯氏)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시어머니가 죽어서 구렁이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며느리 눈에만 구렁이로 보였다.
  구렁이로 화한 시어머니는 매일같이 빈소로 찾아와 음식을 먹었다. 며느리는 그 모습이 너무 징그러워서 하루는
「이렇게 다니지 말고 쌀독 속에 있으면 밥은 줄테니 있으라」
하였다. 그래서 쌀독 속에 들어가 있게 되었는데 얼마쯤 시일이 흐른 뒤 며느리는 너무 징그러워 없애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죽이려고 쌀독을 열고 보니 구렁이가 먼저 알고 밖으로 획 나가더니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뒤부터 노씨 집 살림이 점점 줄어들어 끝내는 패가하고 말았다.

(36) 수달바위

박경보(朴景輔)의 어머니가 병이 위독했다. 잉어가 좋다고 해서 얼음을 깨고 잉어를 구하려고 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고래산(鯨山)을 지나는데 수달이 큰 바위 위에 잉어를 놓고 있었다. 수달은 박효자(朴孝子)의 울고 있는 모습을 봤던지 박효자 앞에서 잉어를 던지고 가버렸다. 박효자가 잉어를 가지고 와서 다려 드린 후 어머니 병이 나았으며 그 뒤부터 이 바위를 수달 바위라 불렀다.
  박공(朴公)은 함양박씨로 나라에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았다고 하며 그 자손들은 정신방(貞信坊)과 화천 등지에서 사는데 번성해서 인물이 많이 나고 인근의 명문(名門)이 되었다고 한다.

(37) 지품(知品) 대궐산성(大闕山城)

  옛날 중국 주(周)나라 때 비운(悲運)의 왕자인 도군(度君)이 동으로 정처없이 내려 오다가 이곳에 머물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사자암이란 암자를 짓고 성을 쌓아 놓고 피난했다 해서 뒷사람들이 대궐산성이라 불렀다 한다

(38) 자우터재 (眠峴)

  고려 왕건(王建) 태조가 영해 지방을 순시하던 도중 이 재를 넘다가 피곤하여 졸고 있었다. 이 때 한 아전이 술을 바치기에 깨어나서 술을 마시면서 마을 이름을 수헐(愁歇)이라 하고 재 이름을 면현(眠峴, 자우터재)이라 했다 한다.
  이 재는 영해와 영덕 중간에 있는 즉, 화수에서 화천, 기암, 칠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재로 일명 자부티재라고도 한다.

(39) 정촌못

  창수면 오촌리 윗마을에 못이 있었다. 옛날 이 마을에 정씨(鄭氏)가 부자로 살았는데 이웃에게 너무 인색하게 굴어 모두 미워하고 있었다. 어느날 한 노파가 바가지를 들고 정씨 집에 가서 구걸을 하다가 박대를 당하고 나와서 바가지를 머리에 쓰고 마을 뒤 못에 빠져 죽었다. 그 뒤 정씨는 점점 가세(家勢)가 줄고 빈궁해져서 이 마을을 전부 떠나 버렸다 한다.

(40) 고사집
  옛날 오촌리에 고사집(상여집)이 생이골에 있었다. 그때부터 오촌에 참상이 자주 났다. 어느 풍수에게 물었더니 고사집은 마을 복판에 있어야 참상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마을 복판으로 옮겼다 한다.
  일설에는 옛날 오촌 마을에 장사가 많이 났는데 장사가 많이 나면 나라에 역심(逆心)을 품게 되어 마을에 재앙이 생기므로 어떻게 하면 장사가 나지 않겠느냐고 지인(知人)에게 물으니 고사집을 마을 복판에 세우면 된다고 하므로 마을 복판에 고사집을 세운 후 장사가 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41) 밭네미 마을

  영해면 사진리의 한 마을로 처음에는 영해에서 < 바로 넘어 왔다> 해서 < 바르네미>라고 하다가 이 마을에 대나무로 발을 많이 엮었기 때문에 < 발네미>라 하다가 산비탈에 밭이 많기 때문에 지금은 < 밭네미>라 부른다고 한다.

(42) 기사촌(棄仕村)
  영덕 대둔산(大遯山) 아래 있는 마을로 신라 말년에 많은 충신들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와 은거(隱居)했으므로 동명을 기사촌(棄仕村)이라 하였는데, 그것을 생각한다 하여 지금은 기사촌(其思村)이라 고쳐 쓴다

(43) 삼시랑촌(三侍郞村)
  현재 강구면 삼사리(三思里)로 이 마을은 들어올 때 생각하고 살면서 생각하고 떠나면서 생각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며, 신라(新羅) 때 이 마을에서 한집안의 세명이 시랑(侍郞) 벼슬을 했다 해서 삼시랑촌이라고 불렀다 한다.

 

(44) 버텀바위 마을

  축산면에 있는 마을로 옛날 홍길동이 화천동에서 받은 짜개돌이 이 마을에 날아와서 버티어 서 있으므로 마을 이름을 버텀바위 마을이라 했다 한다.

(45) 자래실

  현재 병곡면 병곡리(柄谷里)로써 옛날에는 이 마을에 자루만 들고 와도 잘 살았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라 한다. 이것은 들어오는 사람이 잘 산다는 뜻으로 원래 자루실이었는데 자래실로 변했다 한다.
  이 마을 바다쪽에 큰 바위가 용머리 같이 생겼고 또 마을 복판은 용의 배같이 생겼으며 꼬리는 뒷산 불미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을에서 우물을 판 곳이 용(龍)의 뱃구멍으로 이곳에 우물을 팠기 때문에 이 마을에는 불치병이 옛날에 있었다고 한다.

(46) 죽산(竹山)과 영양남씨(英陽南氏)

  죽산은 축산면 축산항에 있는데 옛날 일본의 한 중(僧)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명당산(明堂山)이라는 산은 모조리 사기 말뚝(쇠말뚝은 썩기 때문에)을 박아 인재 나는 것을 막았다. 한번은 지도에 있는 죽산에 대고 말뚝을 박으니 그 산으로 장군이 올라오다가 죽었다고 한다.
  영양 남씨의 시조인 영의공(英毅公)이 명당인 죽산에 처음 정박했기 때문에 영양 남씨는 지금도 못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47) 신당송(神堂松)

  병곡면 영리(榮里) 동쪽에 있는 동신목(洞神木)으로 지금부터 약 180년 전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을 휩쓸었다. 그때 소나무 두 그루가 물에 떠내려오다가 현재 제당(祭堂)이 있는 곳에 머물러 있기에 이 마을에 거주하던 박씨 성을 가진 분이 이상히 여겨 그곳에 심었으며, 그로 인하여 박씨의 집안은 점점 부유해졌으며, 마침내 이 마을에서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그 소나무는 신(神)이 점지해 준 것이라 하여 동신(洞神)으로 모셨다. 그 뒤부터 이 마을을 박씨 골매기라 전해지고 있다.

(48) 암석(岩石) 동신(洞神)

  지품면 황장리에 우뚝 서 있는 바위로 옛날 진시황제(秦始皇帝)가 만리장성을 쌓을 때 이 바위가 그곳에 갈려고 이곳에 당도하자 장성(長城)을 다 쌓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오도가도 못하고 여기서 안타까워 바라보고 서 있는 돌이라 하여 선돌이라 하는데 이 선돌 위에 돌을 던져 얹히면 생남(生男)한다 하며 황장리 동신(洞神)으로 신봉하고 있다.

(49) 신안(新安) 동신(洞神)

  옛날 한 부사(府使)가 딸을 데리고 부임지인 예주부(禮州府)로 가던 도중 이곳에서 딸이 호식(虎食)을 당하고 말았다. 부사와 마을 사람들은 신령이 노한 것으로 알고 호식한 자리에 동신으로 모셨다고 한다.

(50) 대진(大津) 해불신(海佛神)

  영해면 대진 마을에는 천장군(千將軍), 권동수(權洞守), 해불신의 3신과 우물 신을 모신다. 우물 신을 모시는 것은 옛날 식수(食水)가 곤란해서 이의 타개를 위해서이며, 천장군은 마을의 질병과 잡귀를 없애기 위해서이며, 권동수는 이 마을에 제일 먼저 와서 살았기 때문에 모신다고 한다. 해불신은 어느날 부처님 하나가 바닷가에 떠 있기에 다시 바다로 띄어 보냈더니 20여 일이 지난 뒤 다시 파도에 밀려 똑 같은 장소에 와 있었다. 동민들이 기이하게 여겨 동신으로 모시고 해불신이라 하였다.

(51) 괴시리(槐市里) 장승

  이 마을에 역질(疫疾)이 덮쳐 폐동(廢洞)이 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즈음 이 마을 한 노인의 꿈에 선조가 나타나서 < 축귀장군(逐鬼將軍) 남정중(南正重) > 이라 써서 동구(洞口) 앞에 세워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 말에 따라 장승을 세웠더니 역질이 점차 사라졌다고 한다.

(52) 신석(神石)

  병곡면 덕천리에 있는 돌로서 주민들이 동신으로 받들고 있다. 돌 옆에 한 그루의 노송(老松)이 있는데 이 노송이 가끔 운다고 한다. 만약 가뭄 때 이 나무가 세 번 울면 비가 내리고 평시에 울게 되면 그해는 고기가 많이 잡힌다고 하며 또 신석(神石)에 붙였던 백지에 글씨 연습을 하면 글씨가 빨리 숙달된다고 하며 제수(祭需) 음식을 먹으면 머리가 총명해진다고 한다.

(53) 용제(龍祭)의 유래

  옛날에 일꾼들이 한여름 내내 농사를 지었는데 복(伏)날 주인집에서 떡을 해서 혼자만 먹고 일꾼들에게는 주지않자 일꾼들이 꾀를 내어 모가 자라고 있는 논 한복판에 맑은 모래를 묻으니 모가 자라지 못하고 죽으므로 주인이 이상히 여겨 벼가 잘 자라지 못하는 연유를 물었다. 일꾼이 복날 떡을 해서 종이에 싸서 묻어 놓으면 농사가 잘 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부터 주인집에서 일꾼들을 위해 떡을 빚어서 제(祭)를 지낸 다음 떡을 종이에 싸서 논 가운데 묻고 막대기에 한지를 붙여 떡을 묻은 곳에 꽂아 놓고 그해 농사 잘 되기를 비는 데서 용제가 유래되었다 한다.

(54) 상대산(上臺山)의 방마(放馬)

  임진왜란때 대진(大津) 상대산(上臺山) 꼭대기에 겨를 수백 가마 뿌리고 말을 여러 마리 놓아두었다. 상대산(上臺山)에 큰 티끌이 올라와서 먼 곳에서 상대산을 바라보니 마치 많은 군사들이 있는 것 같이 보여 왜병들은 겁을 집어먹고 돌아갔다고 한다.

(55) 천마(川馬) 바위

  오촌(梧村) 마을 서쪽 냇가에 말머리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그 가운데 오목한 데가 있어 그 곳에 돌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좀체로 잘 들어가지 않으나 재수좋은 사람은 들어가 장가도 가고 득남(得男)도 한 사람도 있었다. 투석기복(投石祈福)하는 냇가에 있는 말모양의 바위라 해서 천마 바위라 한다.

(56) 벼락딤

  역동(易東)선생이 팔령신(八鈴神)을 잡으로 인량 팔풍정에 가니 팔령신이 미리 알고 도망치고 없었다. 다시 신리(新里)로 가던 도중 팔령신이 돌로 화하여 벼락딤 바위에 붙어 있었다. 세어보니 하나는 벌써 알고 없어지고 일곱개만 있었다. 사령을 시켜 따서 궤짝에 넣어 바다에 던져 버렸다. 그날밤 동헌(東軒)에 한 할머니가 찾아와서 내가 팔령신 중 하나라고 하면서 빌고 용서를 구하므로 역동선생이 용서해 주고 관어대 입구에 당집을 지어 주었다.
  일설에는 역동선생이 여덟개의 돌로 화한 팔령신을 벼락딤 바위에서 모두 잡아 상자에 넣어 군졸을 시켜 바다에 넣게 하였는데 군졸이 호기심에 바닷가에서 상자를 열어 보다가 한개를 놓쳐 버리고 일곱개만 바다에 던졌으며 이튿날 밤 꿈에 역동선생에게 한 귀신이 나타나 용서해 달라고 빌므로 관어대에 당집을 지어주고 바닷바람을 막게 하였다고 전해진다.

(57) 울릉도 동신(洞神)
  이 설화는 울릉도가 영해 관할이었을 때 전해온 것이며, 울릉도는 뒤에 평해 관할이 되었다.
  당시 영해부사는 보통 일년에 한번씩 울릉도를 순시하였는데, 이 해에도 순시를 끝내고 통인(通引) 관비(官婢) 등을 데리고 돌아오려고 배에 올라 노를 저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배가 움직이지 않았다. 원이 누군가를 남겨 놓고 가라는 뜻으로 생각하고 말하기를
「일행 중 어느 사람이 죄가 있어 배가 뜨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되니 한 사람씩 내려보자」
하고 먼저 원이 내리니 배가 돌고 뒤이어 이속(吏屬), 통인, 관비가 차례로 내려도 배가 돌았다. 원이 다시 생각하여
「그럼 두사람씩 내려보자」
  하고 먼저 원과 이속이 내렸는데 그래도 배가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관비와 통인이 내리자 배가 떠나기 시작했다. 원이 말하기를
「양식을 줄 터이니 내년까지 기다리라」
하였다. 관비와 통인 그리고, 일행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통인과 관비는 울릉도에 남아서 부사가 준 양식으로 끼니를 잇다가 양식이 떨어지자 나무 열매 등을 따먹고 움막을 짓고 살면서 하루는 두 사람이 앉아서
「버티어도 일년은 살 수 없을 테고, 아마 하늘이 우리가 이곳에서 죽기를 원하는 같다.」고 말한 다음 두사람은 그 자리에서 함께 죽었다. 다음해 원이 통인과 관비의 소식이 궁금해서 울릉도 순회를 빨리 마치고 가보니 시체가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부사는 장사를 지내고 돌아섰는데 꿈에 죽은 통인과 관비가 나타나서 말하기를
「묻어주니 고마우나 우리를 위해 달라」
함으로 울릉도 서면 태하동에 당을 짓고 마을 사람들에게 위하라 하여 이 마을 동신(洞神)이 되었다.

(58) 신청천(申靑泉)의 시(詩)

  청천 신유한(申維翰)이 중국에 가서 시를 짓는데 인간 사희(四喜)에 대해서 지으라고 하였다. 중국 사람이 먼저 글을 지었는데 보니 대한봉감우(大旱逢甘雨) 타향봉고인(他鄕逢故人) 등과괘명시(登科掛名詩) 동방무월야(洞房無月夜) 라는 5언시를 지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시가 미흡한데가 있었다. 그래서 이 시 위에 두자씩을 얹여 7언(七言)으로 하였다. 칠년대한봉감우(七年大旱逢甘雨) 소년등과괘명시(少年登科掛名詩) 화촉동방무월야(花燭洞房無月夜) 라고 하여 중국에서 당선되었다. 그런데 먼저 사희를 쓴 중국 사람이 자기가 당선되지 못하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신청천이 어느날 밤 잠이 들었는데 죽은 이 사람이 찾아와서
「내가 짓는 이 글의 뒷구절을 대답하지 못하면 너를 잡아 갈 것이다.」
하고 이매망량사석귀(魅四碩鬼) 라고 글을 지어 뒷 구절을 맞추라고 하였다.
  앞서 신청천이 중국에 가다가 비가 와서 어느 길옆 주막에 들어가서 비를 피하는데 주막집 딸이 방으로 들어와서 바둑을 두자고 하여 바둑을 두는데 아홉판을 내리지게 되었다. 바둑을 둔 뒤에 처녀가 정색을 하면서
「이매망량사석귀라 한데 대해서는 비파금슬팔대왕(琵琶琴瑟八大王)이라 해야 합니다.
당신이 이런 글은 글 같지 않게 생각했다가는 혼이 나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한 일이 있었다.
  신청천이 잠결에 어찌할 줄 모르다가 중국에 가다 만난 처녀가 한 말이 번개처럼 떠 올라서 비파금슬팔대왕이라고 대답해서 귀신을 물리쳤다고 한다. 이는 곧 이매망량이 귀신 귀(鬼)자 한 개씩 들어 있는 네 큰 귀신인데 반하여 비파금슬은 임금 왕(王)자 여덟이나 있는 여덟 분 대왕으로 여덟 대왕이 네 귀신을 누르는데 따라 이기게 된 것이다.

(59) 방학중 일화(逸話)

  방학중은 강구면 하저리 출신으로 지금부터 약 180년 전에 태어나 8도를 떠돌아다니던 해학가로서 한문은 물론 문장이 능하고 언변이 좋아 해학(諧謔) 넘치는 익살스러운 사람으로 영덕 사람들은 아이들이 말썽 피우거나 곁말 잘 하는 사람을 보면 「이 방학중 같은 놈아」 할만큼 기인(奇人)으로 회자되고 있다.
  서울의 정수동, 평양의 김선달, 영일의 정만서 그리고 영덕의 방학중이 각각 출신 신분 등은 다르지만 해학적인 면은 같은 유형으로 볼 수 있다. 이제 영덕에서도 점차 사라져 가는 방학중의 일화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본다.

● 방학중과 정만서

방학중이와 정만서가 처음 만나 인사를 하는데 정만서가
「나는 에누리없는 정가요」
하니 방학중이는
「나는 문지방 안에 방가요」하였다.

● 물 건너 온 방학중

방학중이가 오십천 물을 건너오니 물을 건너 갈려던 사람이 물었다.
「물이 깊던 가요?」
「모르겠소」
「아니, 금방 건너 왔는데도 모른다니 무슨 말이요?」
「내가 건너 온 물은 저 만큼 내려가 버렸으니 모를 수 밖에」

● 송절(松節)

  전라도 전주(全州)에 유명한 기생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한번 만나 보기 위해 길을 떠나 저물녘에 송절의 집에 당도했는데 마침 송절이가 석양을 등지고 들어오는 남루한 옷차림의 방학중을 보고
「저건 도대체 무엇이냐? 신 돌려 내치라」
하니 방학중이 이 말을 듣고 「너 이름이 「절」이라고 했지 내 이름은 「중」이로다. 산고곡심(山高谷深) 저문 날에 신 돌려 어딜 가랴. 동자야 가사장삼 받아 상방에 걸어라. 내가 오늘 밤 자야할 「절」이, 이「절」이니라」
  송절이 문자를 들으니 보통 인물이 아니라 생각하고 버선발로 뛰어 나와 방학중을 모셔 들어가 하룻밤을 잘 지냈으며 이러한 솜씨로 당대 일류 기생들이 방학중에게 몸을 바쳤다.

● 술맛보기

  친구들과 길을 가다가 주막집에 이르러 주막 술이 좋으면 마시고 가기로 하였는데 술맛을 보아 수염을 내리 쓰다듬으면 맛이 좋은 것, 치켜 쓰다듬으면 나쁜 것으로 신호를 정하고 몇푼을 걸어서 방학중이 들어가서 술맛을 보기로 했는데 한잔 마시고는 눈쌀을 찌푸리면서 수염을 치켜 쓰다듬고 또 한잔 마시고는 또 그 시늉하고 이렇게 하여 혼자 대취(大醉)하였다.

● 하던 방석(方席)

  친구들과 길을 가는데 길가 어느 집에 여인이 바느질하는 것을 보고 「저 여자 건드릴 수 있느냐?」 하자 방학중이 할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방학중이 여인에게 물을 청하여 마신 다음 자기의 성이 「내」가라고 말하고 가위를 방석 밑에 숨긴 다음 고맙다고 하직 인사를 하고 나왔다.
  가위를 잃어버린 여인은 뒤쫓아오면서 「내 서방 내 서방 가위 어쨌소?」하고 소리 지르자 방학중은 태연히 뒤돌아보면서 「하던 방석 밑에 있네」 하였다.

● 방안 낚시

  그의 집이 어찌나 가난한 지 지붕도 제대로 하지 못한 여름에 몹시 비가 퍼부어 방에 물이 고였는데 그는 방한쪽 구석에 비를 피하여 긴 담뱃대에 실을 꼬여 바늘로 낚시 삼아 고기를 낚는다고 하니 부인이 짜증을 내면서 나무라자 그는 대답하기를 「배가 있으면 당장 타고 가서 죽여 버리겠노라」 하고 호통을 치더란다.

● 방학중과 두루막 도둑

  방학중이가 옥양목 두루막을 해 입고 영덕 시장에 가서 술집에 두루막을 맡기고 술을 마신 다음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앗따 오늘 영덕 장에 두루막 도둑이 어찌 많던지」
「당신 두루막은?」
「내 두루막 같은 것은 초장에 휫딱했지」
「…」

(60) 신돌석(申乭石) 의병장의 일화(逸話)

신돌석 의병장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다. 그 중 몇 편만 소개한다.

● 신돌석 의병장의 줄다리기

  한번은 영해 벌영 냇가에서 줄다리기를 하는데 줄이 한쪽 편으로 끌려가자. 이때 신의병장이 줄이 끌려가는 반대쪽으로 가서 줄을 당겨 이겼다고 한다.

● 신의병장의 출생 신분

  신의병장은 일명 신돌석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이름은 돌선(乭先)인데 사람들이 돌석이라 하였다. 관명은 태호(泰鎬)이며, 옛날 읍신(邑申:영해 읍내에서 아전 노릇하는 신씨)이라 하기도 하고,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낸 분의 자손이 이곳에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여간 그 집에서 신돌석이가 태어났는데, 신돌석이 순국한 후 그때 (일제때)는 패가(敗家)가 되다시피 했으나 광복이 되어서는 괜찮아졌고 한다.

● 신의병장 고함에 나무가 뿌리 뽑히다.

  고래산에 집터만큼 큰 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 방 같이 생긴 굴이 있어, 신의병장 부모가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려 신의병장을 낳았다고 한다. 하루는 신의병장이 일월산(日月山)에 가서 산공부를 하는데 잘되지 않아 산을 내려오는데 앞에 큰 호랑이 같은 것이 막아 서 있었다. 신의병장이 주춤하면서
「이놈 뭣이냐?」
  하고 고함을 지르니 호랑이가 아닌 큰 나무였는데, 고함소리에 막아섰던 큰나무가 뿌리째 뽑혀 버렸다고 한다.

● 신의병장이 호랑이를 쫓다.

  미친 개는 보통 사람이 건드리지 못하는데 어느날 신의병장은 미친 개를 보면 꼬리를 잡고 던져 버리곤 하였다. 하루는 모내기하는 사람들이 모를 심다가 ‘어어어’ 하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신의병장이 어느새 집체만한 호랑이를 쫓고 있었다 한다.

(61) 대홍수와 위목(位木)

  대홍수로 지품면의 용수골, 속곡, 도계골의 물이 합류되는 지점이 바뀌고 새벌(속칭 세빌)이 신안리(新安里)로 형성될 때의 이야기이다.
임승준(任承準)은 기골이 장대하고 체격이 건장하고 무술에 뛰어나고, 차력에 조예가 있었으며, 약자를 돕고 나쁜 것을 물리치는 전형적인 기사(騎士)였는데, 일찌기 독짓골에 좋은 느티나무를 심고 돌보며 정성껏 가꾸던 중 공의 나이 26세 때 헌종(憲宗) 12년에 큰 홍수로 이 나무가 떠내려가 산내(山內: 신안리 뫼안) 입구에 멈추어 물길을 막고 물 방향을 돌리므로 공이 신기하게 여겨 이 느티나무를 보살펴 가꾸었다. 현재 지품중학교 정문 옆에 있으며,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며, “임씨나무”라고 구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