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영덕읍(盈德邑) ▒ 구미리(九美里) 구미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구비구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안쪽에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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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개리(華開里) 화개리 동명의 유래는 화림산(華林山)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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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석리(南石里)
남석리 동명의 유래는 남부동(南部洞)의 「남(南)」자와 비석동(碑石洞)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읍내면 지역으로 상장동(上場洞), 하장동(下場洞), 남부동(南部洞), 상남동(上南洞)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할 때 상장동, 하장동, 남부동, 상남동, 하남동, 중남동과 비석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남석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시켰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남석리가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남석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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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곡리(德谷里) 덕곡리 동명의 유래는 덕천리(德川里)의 덕(德)자와 우곡리(右谷里)의 곡(谷)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내곡리(內谷里)의 곡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연간인 7세기 후반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개척하였고, 덕천(德川)이라 하였다. 덕이 많은 곳과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른다 하여 이렇게 불리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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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전리(川前里) 천전리 동명의 유래는 내(川)가 앞(前)에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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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산리(南山里)
남산리 동명의 유래는 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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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곡리(右谷里) 우곡리 동명의 유래는 읍 남쪽 오른쪽 골짜기라 하여 우루실 또는 우곡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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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수리(華水里) 화수리는 조선시대 영덕현의 동면 주등과 미동이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 때에 영덕면이 생기면서 동면에서 이속하여 오면서 생긴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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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계리(三溪里)
삼계리 동명의 유래는 흰댕잇골, 땟골, 웃골 등 세 골짜기의 물이 합하는 곳이므로 시거랑, 시걸이 변하여 시거리 또는 삼계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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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은 류유(柳)가 문종(文宗), 단종(端宗) 때에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재임하다가 단종 폐위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하였다고 하며, 삼구당(三龜堂) 신공망(申公望)이 들어와 평산신씨 입향조가 되었으며, 야성김씨 김수문(金秀文)도 이곳에 정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종전의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삼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계리의 위치는 동은 대탄리, 창포리, 서는 화수리, 남은 덕곡리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오보리, 매정리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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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정리(梅亭里) 매정리 이명(里名)의 유래는 매정(梅亭)의 매(梅)자와 양정(良亭)의 정(亭)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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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리(石里) 석리 동명의 유래는 돌이 많은 곳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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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물리(老勿里) 노물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노물(老勿)」이란 늙지 말라는 뜻으로써 늙지않는 즉 장수(長壽)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노물이란 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도 나오며, 물(勿)자는 고구려 계통의 언어로 아마 4∼5세기 경 고구려가 남하하여 청하와 흥해를 경계로 할 때, 영덕의 지명인 야시홀이란 이름이 붙을 당시에 같이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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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탄리(大灘里) 대탄리 동명의 유래는 동해 바닷가 큰 여울 옆이 되므로 해여울, 해월, 또는 대탄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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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보리(烏保里)
오보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烏)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올치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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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포리(菖浦里) 창포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은 붓꽃이 많이 피는 갯가가 되므로 「붓개」 또는 창포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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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리(大夫里) 대부리 동명의 유래는 16세기경 안씨(安氏)가 터를 잡았으며 그 뒤 송씨(宋氏)가 들어와서 제당(祭堂)을 짓고 동명을 태고진(太古津)이라 했으며 김씨(金氏)가 들어와 태부(太夫)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대부(大夫)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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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천리(華川里) 화천리 동명의 유래는 화개동의 화(華)자와 금천동(琴川洞)의 천(川)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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