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광복 이전 영덕의 우거(寓居)와 주거(住居) |
여기에 실린 우거와 주거는 1935년에 발간된 「영영승람」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이다. 대개 우거란 타향에서 우리 지역으로 들어와 살게된 것을 말한다. 우리 지역에 와서 살게된 사유로는 이쪽 지역과 혼사 관계로 인하여 여기에 눌러 살게된 경우와, 전란과 재난을 피하여 이주하여 온 경우, 그리고 부친이나 일가 친척이 영덕이나 영해로의 벼슬살이를 할 때, 따라서 와서 그대로 살게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우거로 온 이들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이들이 우거 이전에 토착하여 살고 있던 지역민들과 함께 우리 지역의 중요한 구성원을 이루면서 지역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과거 인구의 이동이 거의 없던 농업 중심사회에 있어서는 이러한 우거는 지역의 토착인들과 이들간의 구별이 필요하였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인구의 이동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들어와서는 토착이니, 우거니 하는 것은 점차 그 의미가 퇴색하여 간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거는 위의 우거로 이곳에 이주하여 온 각 성씨들 뿐만 아니라 종래부터 이곳에서 정착하여 생활을 하고 있던 각 토착 성씨들을 포함한 군내의 대부분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각 면별로 기록한 것이다. 여기에 있는 기록은 군내에 상주하고 있는 성씨 전체는 아니지만 주요 성씨 대부분이 망라된 것으로 오늘날에 와서도 각 읍·면 지역의 성씨 분포를 알아보는데, 매우 유용하다. 조선시대 영덕현은 오늘의 영덕읍을 중심으로 읍내면은 영덕읍, 중남면은 강구면, 외남면은 남정면, 서면은 달산면, 북면은 지품면을 말하며, 영해부는 영해면을 중심으로 읍내면과 묘곡면은 영해면, 남면은 축산면, 북면은 병곡면, 서면, 오서면은 창수면으로 이루어졌다. |
1. 우 거 |
이 곡(李 穀): 본관은 한산으로 호는 가정(稼亭)이다. 이윤경(李允卿)의 7세손으로 고려 충선왕대에 영해면 괴시리의 함창 김씨 김택의 여식과 결혼하여 우리 지역과 인연을 맺었으며 고려말의 대학자인 목은 이색을 낳았다. 관직이 대제학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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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견(白 堅) : 본관은 대흥으로 백양신(白良臣)의 증손이다. 고려 충선왕대에 대흥에서 외가 쪽의 영해 박씨 박감을 따라 창수면 인량리로 이거하여 살게 되었으며, 관직이 전리판서에 이르렀다. 후손들이 이에 따라 대흥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윤 과(尹 科) : 본관은 파평이며, 판도판서 윤승례(尹承禮)의 6세손으로 호는 청헌(淸軒)이며, 조선 태조대에 영덕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본래 부친 윤근덕(尹謹德)이 고려의 유신으로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킬 때, 조선 태조가 불로써 이들을 죽이려고 하자 이를 피하여 양주에서 영덕으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관직은 지군수(知郡守)에 이르렀다. 배 담(裵 湛) : 본관은 분성으로 호는 야은(野隱)이다. 분성군(分城郡) 배원용(裵元龍)의 7세손으로 조선 세종대에 영덕 지군사로 와서 지품면 삼화리(군자동)에 은퇴하여 살았다고 한다. 신 희(申 禧) : 본관은 평산으로 신득청(申得淸)의 증손이다. 고려가 망할 때, 부친 신연남(申戀南)이 겨우 10세로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의 도움을 받아 원주에서 살게 되었는데, 이로써 원주에서 출생하여 자라게 되었으며, 참판 정지도(鄭之道)의 여식과 결혼하게 됨에 따라 연산군대에 영덕에 옮겨 살게 되었다. 박자창(朴自昌) : 본관은 강릉으로 호는 우산(愚山)이며, 충열공 박제상의 후손이다. 중종대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영덕읍 우곡리 남강에 이주하여 살았다. 관직이 무공랑순적부위(務功郞順迪副尉)에 이르렀다. 김 호(金 浩) : 본관은 수안으로 자는 청원(淸源)이다. 고려 전리판서 김위(金爲)의 8세손으로 창수면 인량리에서 거주하다 강구면 원직리(상직)로 옮겨 살게 되었다. 선조 22년(1589)에 봉열대부 장사랑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김주린(金周麟) : 본관은 경주로 장령 김을진(金乙軫)의 6세손이며, 호는 아천(我泉)이다. 임진왜란 때 경주에서 마고산 아래인 지품면 눌곡리에 옮겨와서 살게 되었으며, 수직으로 첨지중추부사를 받았다. 남국신(南鞠臣)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둔와(遯窩)이고, 회암(悔庵) 남유의(南有義)의 아들이다. 일찍이 유일재 김언기의 문인으로 학문을 닦았으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기도 하다. 영해에서 영덕으로 옮겨 살게 되었으며, 선조대의 사람이다. 강연상(姜延祥) : 본관은 진주로 호는 야암(野庵)으로 대제학 강회중(姜淮仲)의 6세손이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친교가 있었으며, 임진왜란을 피하여 영덕의 광사산(廣沙山) 아래로 옮겨 살게 되었다. 최 림(崔 琳) : 본관은 완산(전주)으로 호는 낙교(樂郊)이다. 평도공(平度公) 최유경(崔有慶)의 8세손으로 관직이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병자호란 때에 척화하는 것을 극력 반대하다가 태백산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지품면 낙평리에 옮겨 살게 되었다. 이희원(李希元) : 본관은 월성으로 부친은 당곡(棠谷) 이수춘(李壽春)이다. 임진왜란 때 남정면과 달산면에 걸쳐 있는 해월봉 아래의 당곡에 옮겨 살다가 다시 남정면 봉황산 아래의 도천리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백원진(白源進) : 본관은 대흥으로 호는 우헌(寓軒)이고, 부친은 직장(直長) 백민직(白民直)이다. 김천도찰방을 역임한 후 만년인 숙종대에 영해에서 영덕읍 매정리로 옮겨 살았다. 왕세흥(王世興) : 고려 왕실의 종친으로 전리판서 백견의 여식과 결혼하여 공민왕대에 영해에 옮겨 살게 되었다. 주 운(朱 雲) : 본관은 신안으로 문절공 주열(朱悅)의 후손이다. 고려 공민왕대에 좌령사정판정사에 이르렀으며, 진보에 살다가 영해면 괴시리에 다시 옮겨 살았다. 김 유(金 쫛) : 본관은 수안이며, 고려 전리판서 금자광록대부 김위(金爲)의 손자로 이조정랑을 지냈다. 왕종신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공민왕대에 영주로부터 창수면 인량리에 옮겨 살게 되었다. 남 수(南 須)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송정(松亭)이다. 세종대에 관직이 감찰어사를 거쳐, 용담현령에 이르렀으며, 울진으로부터 창수면 인량리에 옮겨 살게 되었다. |
윤 황(尹 쫛) : 본관은 파평으로 호는 명은(溟隱)이고, 소정공(昭靖公) 윤곤(尹坤)의 현손(玄孫)이다. 단종 1년(1453)에 학행으로 특별히 예조정랑에 제수되었다가 단종 3년이고, 세조 1년인(1455)에 호조판서에 제수되었다고 한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창수면과 병곡면에 걸쳐 있는 칠보산에 내려와 산중에다 단종의 가위(假位)를 마련해놓고 제사를 지내며,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매일 왕암에 올라 북쪽을 향하여 통곡하였다고 한다. 현재 거무역리에 신도비가 있다.
이 애(李 쫛) : 본관은 재령으로 부친은 부제학 이맹현(李孟賢)이며, 숙부인 이중현(李仲賢)이 영해부사(재임 1497∼1503)로 올 때, 따라와서 판서 백원정(白元貞)의 여식에게 장가를 들어 영해에 살게 되었으며, 관직은 현령에 이르렀다. 박지몽(朴之蒙) : 본관은 무안으로 병조판서 박의룡(朴義龍)의 현손이다. 내종4촌 임사홍(任士洪)의 전횡을 미워하여 종백부(從伯父)인 평강공(平康公)이 1468년경 영덕의 현령으로 오자 따라와서 영덕인 도사 박종문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영해에 살게 되었다. 관직은 부사직에 이르렀으며, 사복시정을 증직 받았다. 권 책(權쫛策) :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부제학 권자홍(權自弘)이다. 세조 2년(1456)에 종부(從父) 충장공 권자신이 두형과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자 여기에 연루되어 영해로 귀양오게 되었다. 영해에 와서 신씨의 여식과 혼인하여 영해에 살게 되었다. 윤 긍(尹 兢) : 본관은 파평으로 호는 죽재(竹齋)이고, 종외구(從外舅) 남수를 따라 영해에 와서 살았다. 박종산(朴從山) : 본관은 함양으로 판서 박구(朴矩)의 손자이다. 관직이 사직에 이르렀으며, 명종대에 종백형(從伯兄)이 진보의 수령으로 올 때, 영해의 산수절경에 취하여, 성주로부터 창수면 인량리에 옮겨 살았다. 정 진(鄭 쫛) : 본관은 야성으로 대사성 정자함의 4세손이다. 인조대에 무안 박붕(朴鵬)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평해에서 영해로 옮겨 살았다. 이사민(李士敏) : 본관은 영천으로 효절공 농암 이현보의 증손이다. 명종말과 선조초에 영해부사로 온 조부 이중량(李仲樑, 재임1567∼1570)을 따라와서 재령 이은보의 여식에게 장가들며, 예안에서 창수면 인량리에 옮겨 살게 되었다. 이선도(李善道) : 본관은 진성으로 좌찬성 이식(李埴)의 증손이며, 선조대에 재령 이은보의 여식에게 장가들어 축산면 상원리(와고리)에 살게 되었다. 신만걸(申萬傑)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둔와(遯窩)이다. 임진왜란 때, 용궁에서 영해로 옮겨와 영해면 괴시리(입천동)에서 살았다. 관직이 사복시 첨정에 이르렀다. 장운한(張雲翰) : 본관은 울진으로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평해에서 창수면 인량리로 이사를 와서 살았는데, 후손들은 축산면 상원리에 산다. 김귀지(金貴祉) : 본관은 선산으로 부친은 부사 김석(金碩)이다. 수원에서 영해로 옮겨 살게 되었다. 전지명(田祗明) : 본관은 담양으로 울진에서 창수면 신기리 배나루에 옮겨 살았으며, 관직이 자헌대부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이중진(李重鎭) : 본관은 전의로 안동 풍산에서 축산면 상원리(수일정)로 옮겨 살게 되었다. 김 현(金 鉉) : 본관은 김녕으로 호는 문충당(文忠堂)이며,김녕군 김시흥(金時興)의 후손이다. 평해에서 병곡면 원황리로 옮겨 살았으며, 관직이 경기전참봉을 역임하였다. 이필근(李必根) : 본관은 안성으로 판서 이선(李瑄)의 9세손이다. 세조초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창수면 인량리에 내려와 살게 되었다. 이종근(李宗謹) : 본관은 영천으로 호는 초은(樵隱)이다. 세조초 왕위찬탈시 영천에서 영덕읍 남산2리(지곡)에 내려와서 살았다. 관직이 직장에 이르렀다. 김한중(金漢重) : 본관은 김녕으로 호는 둔적옹(遯跡翁)인데, 백촌 김문기의 후손이다. 세조 2년(1456)에 단종복위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영해에 내려와서 살게 되었다. 증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
최연석(崔鍊碩) : 본관은 경주로 관가정(觀稼亭) 청(靑)의 후손이다. 명종대에 양주에서 영해로 이사하여 와 살게 되었다.
김 응(金 쫛) : 본관은 경주로 임진왜란 때에 영천 동산에서 영덕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 유원문(劉元文) : 본관은 강릉으로 광주에서 처음 영덕으로 와서 살았다. 관직이 부호군에 이르렀다. 장효일(張孝一) : 본관은 울진으로 호는 명고(明皐)이다. 판서 장량수(張良守)의 후손이다. 처음 영해에서 거주하였다. 박호진(朴好鎭) : 본관은 밀양으로 임진왜란 때에 남정면 사암리로 피난와서 살게 되었다. 호는 나천(羅川)이다. 김천일(金千一) : 본관은 경주로 장령 김을진의 후손이다. 경주에서 축산면 대리에 이사와서 살게 되었다. 김영남(金英南) : 본관은 김해로 김녕군 김목경(金牧卿)의 후손이다. 신녕에서 영덕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관직이 장예원판도사에 이르렀다. 김금수(金錦壽) : 백촌 김문기의 후손이다. 인조 병자호란 때, 화를 입고 합천에서 달산면에 이사와서 살게 되었으며, 호를 묵와(默窩)라 하였다. 차근황(車謹璜) : 본관은 연안으로 호는 송암(松巖)이다. 대봉 차응주의 손자로 인조대에 영해로부터 지품면 율전리에 옮겨 살게 되었으며, 수직으로 가선대부를 받았다. 강필수(姜必秀) : 본관은 진주로 봉화에서 창수면 보림리 오령산 아래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손자 강정(姜鉦)이 존귀해 짐에 따라 좌승지로 증직되었다. 박승원(朴承元) : 본관은 밀양이고 호는 천석재(泉石齋)이다. 밀성대군 박언침(朴彦沈)의 후손이다. 개성에서 영덕으로 이사와서 살게 되었으며, 관직이 공조참의에 이르렀다. |
송유명(宋有明) : 본관은 여산으로 효종대에 진보에서 창수면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김예남(金禮南) : 본관은 김해로 김녕군 김목경의 후손이다. 숙종 30년(1704)에 서울에서 영덕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권상재(權尙在) : 본관은 안동으로 강정공 권철(權轍)의 5세손이다. 경종 2년(1722)에 지품면 삼화리(월전리)에 내려와 살게 되었으며, 관직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강제환(姜齊煥) : 본관은 진주로 고구려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의 후손이다. 진주로부터 영해에 이사하여 살았다. 박종수(朴宗洙) : 본관은 밀양으로 숙종 40년(1714)에 영덕읍의 남쪽에 이사하여 살았으며, 호를 안심처사(安心處士)라 하였다. 양몽희(梁夢羲) : 본관은 제주로 부친은 양천의(梁千毅)이다. 영해로부터 영덕읍의 남쪽에 이사와서 살게 되었다. 최국남(崔國楠) : 본관은 경주로 정무공 최진립(崔震立)의 손자이다. 숙종대에 경주로부터 영해로 옮겨 살았다. 김성호(金盛浩) : 본관은 안동으로 감찰 김영전(金永銓)의 후손이다. 숙종대에 안동의 오락리에서 병곡면 아곡리에 이사와서 살았다. 최모노(崔模老) : 본관은 진주로 안동으로부터 병곡면 금곡리에 옮겨 살았다. 김시윤(金時允) : 본관는 김해로 김녕군 김목경의 후손이다. 영조 1년(1725)의 영남유생들의 집단상소사건에 연루되자 달산 구곡산 아래에 이거하여 살게 되었으며, 호를 오유옹(烏有翁)이라 하였다. 박상춘(朴尙春) : 본관은 밀양으로 부친은 동지중추부사 박문지(朴文枝)이다. 영조 2년(1726)에 영해에서 지품면의 모령산 아래로 이사하여 살았다. 호를 모령은사(牟嶺隱士)라 하였으며, 수직으로 통정대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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