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군내 비(碑)와 금석문

  비(碑)와 금석문은 사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나무와 돌, 그리고 쇠붙이에 글을 새켜 놓은 것을 말하며, 엄밀한 의미에서 비와 금석문은 차이가 많으나, 군내의 비와 금석문의 숫자가 이를 구별하여 기술할 정도로 많지 않으므로 같이 설명하고자 한다.
  대개 비의 종류로는 묘비, 탑비, 능묘비, 신도비, 사적비, 유허비, 기공비, 송덕비, 효자비, 열녀비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우리 지역에는 대체로 탑비와 능묘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비가 있다.
   신도비는 3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이와 공신과 대학자에게 왕명에 의하여 세우도록 하였으며, 유허비는 고적에 세우는 비를 말하며, 관아의 근방에 세워 그곳에 인연을 맺은 이를 칭송하는 비를 불망비, 선정비 등이라 말한다.
   비문(碑文)은 대개 산문으로 된 서(序)와 운문으로 된 명(銘)으로 구성되며, 이 두가지를 다 갖춘 비문을 대개 비문병서(碑文幷序)라고 한다. 대개 선정비 등은 운문으로 공적을 미화해서 표현한 것이 많으며, 효자, 효부,열녀의 정려비는 사적과 찬송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다음은 군내에 기립(起立)된 비의 명단이다. 대부분 임진왜란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그 중에는 현재 없어진 것도 있으며, 있더라도 오랜 비바람에 마모되어 비문을 알아볼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이 중에 기존 군지 등에 실린 것을 중심으로 몇 개의 비문을 여기에 싣고자 한다.
 

 

 

 

 
 

1. 비 문

   고래로 우리 지역은 문향의 고장으로 수 많은 비를 세워 선조 혹은 효자, 인물들을 드러내고 칭송하여 왔다. 이러한 비문들을 전부 조사하여 이번에 실어 후세에 전해야 하지만, 주어진 시간과 지면관계로 기존의 「경상북도 영해군읍지」와「영영승람」에 실린 몇편 만을 뽑아 그 편린만 살펴보고자 한다.

1) 당(唐) 안렴사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 유허비

維南有三籍曰英陽曰宜寧曰固城皆以英毅公爲始祖猶魯衛之分封而同出於周其後世亦新羅高麗今千餘年於此矣英毅公名敏初名忠姓金氏汝南人仕唐爲按廉使天寶十四年使日本還過大風漂泊于新羅之有隣 公遂願居焉景德具奏聞天子天子許之王謂公以自南來賜姓南氏封英毅公以英陽縣爲食邑子孫仍居焉有諱翼襲封英陽君其後又分封宜寧固城遂有三貫之別德業文章之士蔚然踵武何其壯也按國誌有隣初屬辰韓今爲嶺南之寧海府府東十里有丑山島者世傳公下船於此有吏部洞通仕者世傳公築室於此又有所謂望祭壇者公離父母邱墓而去國萬里時節望祭以寓霜露之感卽此地也有所謂望鄕臺者公雖來仕屬國意未嘗一日而忘唐故登臨覽中國山川慨然有遊子故鄕之思者亦此地也公之官閥事蹟史無載錄此皆出於後世傳疑設然南氏之所自起實本於此公之平生忠孝大節有亦可見其一二焉可不敬歟昔孔子聖人也嘗曰吾欲居東夷天寶之亂極矣玄宗在位旣久荒于政楊國忠與貴妃用事士大夫不樂仕官而及祿山反帝奔蜀西江南海之間連年用兵諸國貢獻之路絶矣公之居東不返抑或有慕於聖人之意也耶古者天子建德因生而賜姓謂若舜由訥故陳襲姓如禹之錫土姓是也諸侯不得賜姓而命族春秋隱公八年無該卒羽父請諡與族衆中曰官有世功則有官族邑亦如之請取其舊官舊邑之希以爲族也然則公之受姓於王者此乃因舊邑 命族之意也而天子之所以許之者又與昨土而賜姓者無以異也王不敢自專而爲有禮請命於天子而尤有光此又後人之所當知者也乃者宗人之居寧海者相與鳩財謀竪公遺墟之碑僉樞景宅幼學景烈甫使一運千里走書屬公轍以辭僉宗追遠之誠可謂勤且厚矣遂感其事而樂爲之述如右盖自唐之亡五代作亂五十年而宋興又三百年而爲元又八十年明興又二百餘年而爲淸中州之士君子髮而左者數矣獨南氏居於東方者誦習詩書禮樂之說而不改衣冠此 英毅之遺澤也於乎豈非天也哉
銘曰 於赫南氏肇基 于唐有德有勳亦有文章歷羅 麗逮于本朝冠冕圭璋令聞孔昭執其始祖曰英毅公惟此英毅自南來東時維天寶帝在于蜀萬里浮海君命不辱王曰天下莫非王土羅服唐禮比周之魯稽首請命願爲陪臣王曰矣南方之人予敢自專具奏天子錫姓加伯因邑命氏乃安玆土子孫保之旣昌而熾英固宜自唐後元淸相傳赤縣神州今爲腥西江左今爲髮獨我諸南衣冠之閥以文以武爲公爲卿千有餘年安享太平子孫之慶先祖之賜寧海之東島山長翠想公初至如聞船謠山有時磨水有時消後千百世易失其處我庸作銘永垂令譽後孫大提學公轍撰判書曺允亨書

  남씨는 본관이 셋이니 영양, 의령, 고성이며 모두 영의공을 시조로 하니 노(魯)나라와 위(衛)나라가 분봉(分封)을 하여도 같은 뿌리인 주(周)나라에서 나온 것과 같다. 그 후세에 신라와 고려를 거쳐 이제 천여 년이 넘는다.
   영의공의 휘(諱)는 민(敏)이요. 초명은 충(忠)이며, 성은 김씨이니 여남(汝南) 사람이다.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안렴사(按廉使)로 천보(天寶) 14년에 사신(使臣)으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올 때 태풍을 만나 신라의 유린(有隣) 고을에 포박하였다. 공이 그곳에 살기를 원하자 경덕왕(景德王)이 천자(天子)에게 아뢰니 천자가 허락하거늘 신라왕이 공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로 사성하여 영의공으로 봉하고 영양현으로 식읍(食邑)을 삼게 하니 자손들이 그대로 살게 되었다. 휘 익(翼)이라는 분이 영양에 습봉(襲封)되고 그후에 또다시 의령, 고성으로 분봉되어 드디어 삼관(三貫)이 되었으며 덕업(德業)과 문장의 선비들이 울연히 뒤를 이으니 그 번성함이 비할 데가 없다. 도지(圖誌)를 살펴보면 유린 땅은 처음 진한(辰韓)에 속했다가 지금은 영남의 영해부이다.
   부의 동쪽 십리에 축산도가 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공이 이곳에서 하선(下船)하였다 하고, 이부동(吏部洞) 통사동(通使洞)은 세상에 전하길 공이 여기다 집을 지었다 하고, 또한 망제단(望祭壇)은 공이 고향을 떠나 부모의 묘소로부터 만리 타국에서 시절(時節)로 망제를 올려 쓸쓸함을 달래던 곳이 이곳이다. 망향대(望鄕臺)는 공이 비록 속국에서 종사하나 하루도 고국인 당(唐)나라를 잊지 못하는 고로 산에 올라 멀리 중국의 산천을 바라보고 개연히 멀리 떠나있는 사람이 고향 생각에 잠기던 곳이 이곳이다.
   공이 벼슬한 사적은 역사에 기록이 없고 이 모두가 후세의 전설에서 나온 말이나 그러나 남씨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곳이니 공의 평생의 충효대절(忠孝大節)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하나 둘이겠는가! 어찌 공경하지 않을 건가?
   공자는 성인이로되 일찌기 동이(東夷:朝鮮 땅을 말함)에서 살고 싶다 하였으니 천보 년간의 난이 극에 달하였고, 현종(玄宗)이 왕위에 있은 지 오래되어 정사는 거칠고 양국충(楊國忠)이 귀비(貴비)와 더불어 정사를 그르치니 사대부가 벼슬길에 나서기를 싫어하고, 안록산이 모반하여 황제는 촉(蜀)으로 달아나니 서남 강해지간(江海之間)이 연이어 병란이 일어나서 여러 제후의 나라들이 공헌(貢獻)하는 길마저 두절되었으니 공이 신라에 거류하여 돌아가지 않음이 성인의 뜻을 사모하여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겠는가? 옛날 천자가 건덕(建德:王位에 오름을 말함)함에 출생한 곳을 따라 사성하니 순(舜)임금이 규예(汭)를 연유한 고로 규씨를 진습(陳襲)한 것과 우 임금이 토성(土姓)을 준 것과 같은 것이다.
   제후(諸侯)는 사성하고 일족(一族)을 명할 수 없으나 춘추(春秋)시대인 은공(隱公) 八년에 무해(無駭)가 죽자 우부(羽父)가 시호(諡號)와 사성(賜姓)을 청하거늘 중중(衆仲)이 말하기를 벼슬함에 세(世)로 공이 있으면 관족(官族)이 있고 세읍(世邑)에도 또한 이와 같이 하니 청컨데 구관(舊官) 구읍(舊邑)으로 인하여 사성을 받은 뜻이며 천자(天子)가 허락한 것이니 천자가 식읍을 주고 사성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왕이 감히 스스로 전결하지 못하는 것은 예(禮)가 있어서 이고 천자에게 청하여 명(命)을 받음은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니 이는 후인들이 마땅히 알아야할 일이다.
   이에 영해에 사는 종인들이 서로 의논하여 돈을 모으고 공의 유허비를 세울 것을 계획하여 첨추(僉樞) 경택(景宅)과 유학(幼學) 경열씨(景烈)가 일운(一運)에게 서찰을 주어 천리 길을 달려와서 공철(公轍)에게 글을 부탁하니 첨종들의 추원(追遠)하는 정성이 두텁도다.
   드디어 그 정성에 감동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쓰노라. 대게 당나라가 망한 후 오대(五代)가 작란(作亂)하여 五十년 후에 송(宋)나라가 일어나고 또 三백년이 지나서 원(元)나라가 되고 또 八十년이 지나서 명(明)나라가 일어서고 또 二백년후에 청(淸)나라가 되었다. 중국땅의 사대부(士大夫)와 군자(君子)들이 머리를 깎고 옷깃을 돌려 입은 일이 여러 번 있었으나 남씨는 동방(東方)에 살면서 시서(詩書)를 외우고 예악을 논하면서 의관(衣冠)을 고치지 않았으니 이 모두 영의공이 남기신 유택이로다. 아! 이 어찌 하늘의 도움 아니겠는가 명(銘)하여 말하노라.

빛나도다 남씨여 당(唐)에서 터전이 비롯되었네.
덕업(德業)과 공훈(功勳)도 있고 또한 문장도 있네.
신라를 거쳐 고려를 지나 조선에 이르러 관면(冠冕)과
규장(圭章)의 영광된 소문이 밝기도 하여라.
어느 분이 시조인고 영의공이 시조로다.
영의공은 남쪽에서 동국으로 오시었네.
때는 천복년간이요 황제께서 촉(蜀)에 계셨네.
바닷길 만리에서도 군명(君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네.
공께서 말씀하길 천하는 왕의 땅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하였네.
신라의 옷을 입고 당나라의 예를 행함은 주(周)나라의 옷을 입고
노 (魯)나라의 예를 행함과 같도다.
머리를 숙이고 명(命)을 청하여 신하되기를 원하였네.
왕이 말하기를 먼 중국 사람을 내 어찌 마음대로 할소냐
천자에 주청하여 벼슬도 내리고 식읍도 주었으며 사성도 하였네.
이 땅에 편히 살며 자손을 보존했네.
그 자손 창성하고 빛이 나니 영양과 의령, 고성이로다.
당나라 뒤로 원나라 청나라로 변하였고 중국땅은(赤縣神州) 비린내나는 외국사람의 천지로 변하였고 농서강(西江) 왼쪽은 이제 모두 오랑캐가 되었으나 홀로 우리 남씨만은 의관(衣冠)의 문벌(門閥)이라 문무(文武) 양반(兩班)에서 공(公)도 되고 경(卿)이로세
천년을 넘기면서 태평(太平)을 누렸으니 자손의 경사는 선조께서 내린 것이라
영해의 동쪽에는 도산(島山竹島)이 길이 푸르도다.
공이 처음 오신 것을 생각하니 뱃노래가 들리는 것 같구나.

산도 때로는 마멸되고 물도 때로는 소진하거늘 후세 수천년의 그곳을 잃을까봐 내 비록 용열하나 명(銘)을 지어 길이 영예를 전하리라

2)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

(1)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

府治東三里古有濠池村高麗進士金公諱澤之所居稼亭李先生以館甥隨而卜焉牧隱先生寔生是地先生詩曰丹陽我鄕曲雲物冠東方畢齋亦云先生一出爲人瑞從此丹陽草木枯丹是寧之舊號則兩詩有足徵者先生以文章游上國歸來移歐陽博士之坊名改其村人曰槐市取其眼界平遠景物之佳麗盖有彷彿村人至今傳之歲丙辰先生後孫泰永以巡節到本府訪其址亭礎臺尙留春草荒原之間有若待於今日然遂托不立石以表之石旣治略記其事實殺後之過此里者敬式之云爾通訓大夫寧海都護府使黃記
有許多山水特此寧海則以胎鄕尤有重緣而自丹山毁撤後更寓慕之所只此然一閭餘在於荒野草原之間使後人懷古事而傳之可勝恨哉 玆役也 與南永宗甫始終協謀事記畢略其顚末以備後日詳考之資

辛亥初夏後孫前郡守象馥謹識

  부(府)의 관아로부터 3리 되는 곳에 옛날 호지촌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니 고려조의 진사 김공(金公) 택(澤)이 살던 곳이다. 가정 이곡이 그의 사위가 되어 계속하여 이곳에 살았으니 목은이 여기에서 났다. 선생의 시에 이르기를 “단양은 나의 고향인데 문물이 동방에서 으뜸일세”라고 했으며 점필재 김종직의 시에 이르기를 “선생이 한번 나시어 사람들의 상서가 되니 이때 단양의 초목이 시들었네”라고 했다. 단양이 영해의 옛 이름임은 이 두편의 시만으로도 증명할 수가 있다. 선생은 문장으로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쳤으며 본국으로 돌아오자 구양박사(歐陽博士)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 마을을 괴시라고 고쳐 불렀다. 마을은 시야가 넓고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 구양박사의 마을과 비슷해서 이 이름을 취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1795년에 후손 태영이 본도의 감사로서 도내를 순찰하다가 본 부에 이르러 이 유허를 찾았다. 정자의 주춧돌과 대(臺)의 벽돌이 아직도 봄 풀 우거진 황량한 언덕 사이에 남아 있어서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이에 돌을 세워 표시하도록 하고 돌이 다듬어지자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일 이곳을 지나는 자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게 하는 바이다.

숭정(崇情) 3 병진(丙辰) 지군사(知郡事) 황은(黃) 삼가 씀.

〔추기〕
   가정 목은 두 선생의 유허비는 숭정 3 병진(1796)에 세운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70여년 전의 일이다. 비바람에 돌이 깎이고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또 이끼에 가리워져서 글자를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마침내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슬퍼하고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에 예전 것을 따라서 비를 고쳐 세우고 예전 비는 경내에 묻었다. 그리고 비각의 무너진 곳도 중수하여 이를 완전하게 하였다. 이렇게 면모를 새롭게 하고 돌 위의 기록도 선명하게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모두 기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자손 된 자야 오죽하겠는가!
   아아! 두 선조의 유적이 널리 산재해 있고 특히 영해는 목은 선생이 출생하신 곳으로 더욱 인연이 깊다. 더구나 단산(丹山)서원이 철폐된 뒤로 경모하는 뜻을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오직 이 높은 비각만이 거칠은 벌판 초원 사이에 남아 있어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옛 일을 추억하여 이를 전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은가? 이번 역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영종씨와 협의해서 했다. 일이 이미 끝났기에 그 전말을 대략 기록해서 후일 참고하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2) 중수가정목은양이선생유허비각기(重修稼亭牧隱兩李先生遺墟碑閣記)

勝國牧隱兩先生以文章節行鳴行上國上國之人慕其風焉我東士乎哉余到郡之初按郡之職方誌有以知兩先生遺墟碑在郡之東數市許槐市里往在英祖丙辰先生後孫泰永巡節時所創竪而知府黃公所撰記也閣則憲廟癸卯後孫景在所覆也余乃心竊感焉以暇日謁是閣而禮焉百年之間典護曠解風雨渗磨丹靑剝落然有朝夕之患彷徨久之謂鄕人曰先生之風世所共仰玆閣之責固不在士林耶丹山爲先生尸祝而恩撤後買田贍學所則不可無助余捐以助之謀葺諸僉曰諾遂屬本洞章甫南朝涵南朝浩監董焉仍其舊制而新之隔世徽依然若可徵於今日矣遠近人士行過是墟者豈不尤加敬式也哉嗟夫古人有言曰不知其土視其草木不知其家視其子孫今以先生之雲仍家于鄕洛者言之圭組軒冕炳燿一世者前後相望則醴泉靈芝豈無源根而然歟先生我百世師也而若乃後生之想像彷彿於播芬(잉)馥之地爲羹墻之寓將不在斯耶於以誦先生之文講先生之道復有一方興起之效則太守之適玆會不亦與有光焉者乎至於左右湖山之水麗與夫草木雲煙之杳出沒於空曠者已悉於先生題詠之句覽者自得之矣於乎余過客也今今玆之役不敢自謂效尺寸之誠而自附於數公尊衛之意後之視今猶今之視昔則嗣而葺之以國不朽者未無其人焉豈是閣之不壽乎遂爲之記以遺寧人戊戌南至月知郡延安李炳記

  전 왕조 목은 양 선생은 중국에 가서 문장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니, 중국인들도 그 풍도를 흠모하였다. 하물며 우리나라 선비들에 있었음이랴. 내가 고을에 도착한 초기에 고을의 직방지를 살펴보고, 양 선생 유허비가 고을 동쪽 괴시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영조 병진년에 선생의 후손 태영이 순절로 있을 때, 처음 세운 것으로 지부 황공 은 이 기문을 지었다.
   비각은 현종 계묘년에 후손 경재가 덮었다. 나는 이에 은근히 마음에 가몽을 받아서 여가 날에 이 비각을 찾아보고 예를 드렸다. 백년 동안의 보호함이 쬐이는 햇볕에 드러나고, 비바람에 스며들고, 갈리어 단청이 떨어지고 하여, 안타깝게도 아침, 저녁으로 근심거리가 된지 오래이다.
   향인들이 이르기를 “선생이 세상에 떨친 기풍은 우러러 받들어야 하는데, 이 비각의 책임은 진실로 사림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단산서원은 선생을 제향하는 곳인데, 훼철 후 밭을 사서 섬학소(贍學所)로 한 즉, 돕지 않을 수가 없어, 내가 녹미로서 보태었는데, 여러 선비들과 어찌 비각 수리를 의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선비들도 승낙하여 마침내 괴시리의 남조함, 남조호씨를 감독으로 삼아 일을 시작하니, 옛 비각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었으며, 세상을 달리해도 아름다운 자취를 오늘날에도 의연하게 증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원근의 인사들이 이 유허지를 지날 때 어찌 존경하는 마음이 더하여 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옛 사람이 “그 땅을 모르거던 그 초목을 보아야 하며, 그 가문을 모르거던 그 자손을 보아야 한다.” 고 말하였듯이 지금 선생의 자손들이 경향 각지의 가문을 형성하고 벼슬길에 진출한 이와 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이가 전후로 서로 바라볼 정도이니 예천과 영지가 어찌 근원과 뿌리가 없겠는가.
   선생은 우리 백세의 스승이며, 만약 후생들이 가슴속에 새겨 상상하여 선생의 향기가 떨쳐지고, 향기가 남아 있는 땅이라 하여 추모의 장소로 의탁한다고 하면 바로 이곳이 아니리요.
   선생의 글을 낭송하고, 선생의 도를 강구(講究) 하여 다시 한 지방을 흥기하는 효과가 있다면 태수의 적임이요, 이 기회가 역시 더불어 빛이 있는 것이 아니리요. 여기에 이르러 좌우의 호수와 산의 수려함은 초목과 구름과 안개와 더불어 아득히 우거지어 빈 허공에 출몰할 뿐이니, 선생의 제영의 구절을 갖춘다면 찾는 자들은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이리라
어와! 나는 지나가는 과객이라 지금의 이 일을 감히 한 자의 정성이라 스스로 이를 수 없으며, 은근히 공을 존경하는 뜻에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뒷날에 오늘을 보듯이 옛날을 오늘에 보듯 하면 잊고 고치고 하여 나라에서 이를 썩게 하지 않을 자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그 오래 가지 못함을 두려워 하리오.
   마침 기문을 써서 영해인에게 보낸다. 무술년 남지월 지군 연안 이병옥이 쓴다.

3) 정려비문

(1) 열녀(烈女) 사인(士人) 강달해처(姜達海妻) 유인(孺人) 김녕김씨 정려(旌閭) 비문

   열녀 김씨의 정려비문은 유인 김녕김씨의 열녀비문이다. 김씨는 득암(得岩)의 여식으로 선비 강달해와 혼인하여, 지아비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나아가 여러 족친들도 받들어 모시는 등 부덕이 있었다. 그러나 시집 간지 몇 년 후인 김씨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에, 지아비인 강달해가 질병을 얻으메 조석으로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백약을 구해 병구완을 하였으나, 결국은 소생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김씨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지아비를 따라 죽으니, 향리에서 열녀로 이름이 나 중앙정부에 정려해주길 요청하였다.
   따라서 당시(1903) 장례원경이던 조정희(趙定熙, 1845∼?)가 주청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으며, 1904년 봄에 당시 대광보국숭록대부원임의정부의정규장각학사이던 윤용선 (尹容善,1829∼?)이 비문을 지어 김씨의 정열을 기렸다.
   현재 영덕읍 화개리 보건소 옆에 1904년 2월(음력)에 세운 정려각이 있다. 단 정려각에는 “열녀 사인 강달해처 유인 김녕김씨지려”라는 비명은 있으나, 아래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旌 閭 閣 記

光武七年十二月日掌禮卿臣趙定熙奏慶尙盈德郡故士人姜達海妻金氏自歸達海孝奉舅姑敬待諸族年二十五達海孀疾金氏晝夜調護竟不救金氏一哭便止不以戚容見於舅姑逮營葬金氏從容謂舅姑曰願作雙坎以爲後日未亡者之地舅如其言葬日柩旣發金氏感痛成疾却粥不食舅聞之自葬所馳歸視則金氏開目一呼舅遂不復語得疾 凡二日而 沒沒沒夕赤光滿家家人自外至者疑其失火旣苒苒而滅初葬之日若有瑞氣環迎壙外 後三十年移葬他所又有赤光亘路如始死之日人謂前後異徵皆烈婦精誠所感是宜復以歎來者天子可其奏於是達海之孫景福將樹棹楔于里門請余記之觀夫古昔傳記所載孝子節婦多有格天感物之事而天道至遠難以推測人事至近勉斯可至故學道君子往往捨天道不之言而惟責人事然余以金氏之事觀之其疾病之跡或與舅決性命者有間而來後人疑惑則天於是赤光瑞氣種種發現而以表烈婦之精誠也 金寧金氏得岩之女也

光武 八年甲辰仲春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
議政府議政奎章閣學士勳一等海平尹容善撰

  광무 7년(1903) 12월 일 장례경 신(臣) 조정희가 정려해주길 주청(奏請)하였다. 경상 영덕군 고 사인 강달해 처 김씨는 달해에게 시집간 이래 시부모를 효성스럽게 받들고, 여러 족친들을 존경심으로 대하였으며, 나이 스무다섯에 달해가 병을 얻자, 김씨는 주야로 조섭(調攝)하고 간호(看護)하였으나, 결국에는 구하지 못하였다. 김씨는 한번 곡(哭)을 하고, 문득 그친 후 얼굴에 슬픈 빛을 시부모에게 보이지 않고는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면서, 조용히 시부모에게 말하기를 “원컨데 두 개의 구덩이를 만들어 후일 미망인의 묘지로 쓰고자 합니다.” 하니 시아비는 그 말대로 하였다.
   관이 출발하자, 김씨는 애통함이 지나쳐 병이 들어 갑자기 죽조차 넘기기 힘들었다. 시아버지가 이를 듣고 장지에서 급히 달려와 이를 살펴본 즉, 김씨 눈을 한번 뜨며, ‘아버님’하고 부르고는 마침내 두 번 다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병을 얻은 지 이틀만에 죽으니, 그 날 저녁에 붉은 빛이 집안 가득히 내려 앉았는데, 집안 사람이 밖에서 오며, 이를 보고 집 에 불이 난 것으로 의심할 정도였으며, 온 집안에 늘어지듯 퍼져 있다가 사라졌다.
   장례를 치르던 날, 상스러운 기운이 묘구덩이를 둘러싸고 환영하는 것 같았으며, 이후 30년 지난 뒤에 다른 장소에 이장을 하려고 하니, 또 붉은 빛이 처음 장례일과 같이 묘구덩이 주위에 서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날과 뒷날의 특이한 징표는 모두 열부의 정성에 감동된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감탄한 사람들이 와서 당연하게 거듭 증거(證據)하니 천자께서 이 주청을 허가하였다.
   달해의 손자 경복(景福)이 장차 마을 입구에 세워 도계(棹)라도 지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왔다. 무릇 옛날부터 전해지는 기록(傳記)에 실린 것을 살펴보니, 효자와 열부들을 하늘이 헤아리고, 사물이 감동하는 일이 많이 있으나, 천도(天道)는 도달하기가 아득하여 추측하기가 곤란하지만, 인사(人事)는 도달하기가 가까워 여기에 다다르려고 애써 힘을 쓰고 있어, 도를 배우는 군자들도 가끔씩 천도를 버리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인간사만 그러려니 책(責) 잡는다.
   내가 김씨의 일로써 그 질병의 자취와 천명을 결정할 때 시아비가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니, 약간의 사이가 있어 후인이 와서 의혹을 제기하는 즉, 그러나 하늘은 붉은 빛과 상서로운 기운을 종종 발현(發現)시켜 열부의 정성을 드러낸다고 하니, 김녕 김씨 득암(得岩)의 딸이다.
광무 8년(1904) 갑진 중춘 정일품 대광보국숭록대부원임
의정부의정 규장각학사 훈일등 해평 윤용선이 찬하다.

4) 효자비문

(1) 효자 최흥수갈명(孝子 崔興壽碣銘)

寧海新羅谷有一座佳城山不高而洞開 水不深而源長內經金莎外緯松林此故孝子崔公諱興壽之幽宅也 公字興柱號稼隱官通政大夫慶州人文昌侯孤雲先生諱致遠始祖也曾祖諱國衡贈戶曹參議祖諱濟孝贈禮曹判書考諱世福嘉善大夫貞夫人潁陽千氏公生於星州早習詩禮遺訓孝親其天性也好學其餘力也孝是學之本學是行之餘不事功令反求爲記之學二十年不出山門親老家貧採葛拾實以供奉養之資甲子春移搬于寧海沿路四百里或十里負夫或十里負母遞父遞母匍匐到達越明年乙丑春親瘠彌欲晝夜侍湯冠不解帶睡不交睫嘗糞驗症祝天求命採芹於雪中求魚於氷穴夢得神方路逢 良醫快見奏效後遭艱哀毁泣血幾至滅性遂日省墓冬則掃雪夏則除草終三祥猶不衰後遭內艱送終儀節一如前喪丙子 荒捐土出穀周恤貧窮噫 積而能散散而不吝非君子則果難能也而公能之此豈非由於孝而及於人者歟己巳二月六日以天年考終于寢 葬于蒼水之新羅谷壬坐原 配全州李氏亦有賢淑之德孝舅姑敬夫子克遵原始造端之道有子三人長參奉在鉉次英鉉性鉉長孫根海述海次孫道海德海季孫敬海龍海以下不盡記公之歿已久而墓道尙闕顯刻其子在鉉昆季孝思攸篤夙夜憂懼將欲竪石敬修家狀囑余爲文顧病閣鉛不能當時役讀其狀而愛其誠乃爲之銘曰崔胄慶州自羅始昌赫赫勳業道德文章公又篤生克世有光長松老栢新羅之岡久闕顯刻子孫傷竪龜趺乃攷典常銘以闡發孝子之藏

完山李載現撰

  영해 신라곡은 가성산 한 좌향에 있는데, 산이 높지 않으면서 동이 열려 있고, 물이 깊지 않으면서 원류가 길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안으로는 금빛 모래가 세로로 쌓여 있으며, 밖으로는 소나무 숲이 가로로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 이곳이 고(故) 효자 최공 휘 흥수의 유택이다.
   공의 자는 흥주이고, 호는 가은이며,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경주인 문창후 고운선생 휘 치원이 그 시조이다. 증조의 휘는 국형인데, 증직으로 호조참의를 받았으며, 조부의 휘는 제효로 증직으로 예조판서를 받았다. 부의 휘는 세복으로 가선대부를 받았으며, 비는 정부인 영양 천씨이다.
   공은 성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시예(詩禮)와 유훈(遺訓)을 익혔으며, 천성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한편, 남는 힘으로 배우기를 즐겨하였다. 효도는 배움의 근본이요, 배움이란 효를 행하고 남은 것이라 하며, 공을 다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의 수양을 하는 학문을 산문을 닫은 채 20여년이나 공부를 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여 늙은 부모를 모심에 칡을 캐고, 나무 열매를 따다가 받들어 공양하였다.
   갑자년 봄에 영해로 이사를 하였는데, 거리가 4백여리라 혹 십리마다 부친을 업기도 하고, 모친을 업기도 하면서 겨우 영해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을축년 봄에는 부모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약을 다려 드렸으며, 잠을 잘 때도 관을 벗지 않았으며, 조금도 싫은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았으며, 대변을 맛보아 그 증상을 살필 정도였다. 하늘에 축원하여 목숨을 기구(祈求) 하였으며, 눈 속에서 미나리를 구하고 얼음굴에서 잉어를 구하는 정성으로 간호하니, 꿈속에서 문득 신기한 방책을 얻어 이에 따라 길에서 양의를 만나 효과를 보게 되었다.
   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슬픔으로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였으며, 장례를 치른 후에는 매일 성묘를 하는데, 겨울에는 눈을 쓸어 내리고, 여름에는 풀을 베내며, 삼년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하였으며, 뒤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서도 끝까지 전번의 상례와 같이 하였다.
   병자년 흉년에는 토지를 출연하고 곡식을 내어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였으니, 오라, 쌓이면 능히 나누어야 하며, 나눔에 있어 아까워하지 않음은 군자가 아니면 과연 어려운 것인데, 공은 능히 이것을 하였으니, 어찌 효에 말미암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침이 아니랴
   기사년 2월 6일에 침소에서 천년(天年)을 마치니, 창수의 신라곡 임좌 두들에 장례를 치뤘다. 배는 전주 이씨인데, 역시 현숙한 덕이 있어 시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지아비를 공경하였으며, 자식들에게는 근본을 중히 여기는 도리를 극진히 따르도록 하였다.
   세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맏이는 참봉 재현이고, 다음으로는 영현, 성현이다. 장손으로 근해, 술해가 있고, 차손으로는 도해, 덕해가 있고, 계손(季孫)으로는 경해, 용해가 있는데 이하는 모두 기록치 못한다.
   공이 돌아간지 이미 오래이고, 묘도(墓道)에 현각(顯刻)이 빠져 있어, 그 자식인 재현이를 보듯 맏이와 막내 모두가 효를 생각하고, 이를 독실하게 행하였지만, 밤낮으로 이를 근심하여, 장차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삼가 가장(家狀)을 닦아 나에게 부탁하려 왔다. 돌아보니 병들고, 문필이 당시의 일을 감당하는데 능하지는 못하지만 그 가장을 읽어보고, 그 성의를 사랑하여 이에 짓고, 명을 붙인다.

최씨는 경주의 후예
신라에서부터 번창하기 시작하였네
공훈과 업적
도덕 문장이 뛰어났도다
공 또한 독실한 삶
세상에 지극함이여, 빛이 있음에라
늘어진 소나무, 오랜 잣나무
신라의 두들이여
오래도록 비를 세우지 못함에
자손들은 이수(首)와 귀부(龜趺)를 세움에 근심했네
이에 전적(典籍)을 상고하여
명을 하여 감추어진 효자를 드러내고자 하네
완산 이재현이 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