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府)의 관아로부터 3리 되는 곳에 옛날 호지촌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니 고려조의 진사 김공(金公) 택(澤)이 살던 곳이다. 가정 이곡이 그의 사위가 되어 계속하여 이곳에 살았으니 목은이 여기에서 났다. 선생의 시에 이르기를 “단양은 나의 고향인데 문물이 동방에서 으뜸일세”라고 했으며 점필재 김종직의 시에 이르기를 “선생이 한번 나시어 사람들의 상서가 되니 이때 단양의 초목이 시들었네”라고 했다. 단양이 영해의 옛 이름임은 이 두편의 시만으로도 증명할 수가 있다. 선생은 문장으로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쳤으며 본국으로 돌아오자 구양박사(歐陽博士)의 마을 이름을 따서 그 마을을 괴시라고 고쳐 불렀다. 마을은 시야가 넓고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 구양박사의 마을과 비슷해서 이 이름을 취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1795년에 후손 태영이 본도의 감사로서 도내를 순찰하다가 본 부에 이르러 이 유허를 찾았다. 정자의 주춧돌과 대(臺)의 벽돌이 아직도 봄 풀 우거진 황량한 언덕 사이에 남아 있어서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고 한다. 이에 돌을 세워 표시하도록 하고 돌이 다듬어지자 그 사실을 기록하여 후일 이곳을 지나는 자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게 하는 바이다.
숭정(崇情) 3 병진(丙辰) 지군사(知郡事) 황은(黃) 삼가 씀.
〔추기〕 가정 목은 두 선생의 유허비는 숭정 3 병진(1796)에 세운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170여년 전의 일이다. 비바람에 돌이 깎이고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또 이끼에 가리워져서 글자를 분간하기 어려워지고 마침내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니 오고 가는 사람들이 슬퍼하고 탄식해 마지 않았다. 이에 예전 것을 따라서 비를 고쳐 세우고 예전 비는 경내에 묻었다. 그리고 비각의 무너진 곳도 중수하여 이를 완전하게 하였다. 이렇게 면모를 새롭게 하고 돌 위의 기록도 선명하게 되어 이곳을 지나는 사람이 모두 기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 자손 된 자야 오죽하겠는가! 아아! 두 선조의 유적이 널리 산재해 있고 특히 영해는 목은 선생이 출생하신 곳으로 더욱 인연이 깊다. 더구나 단산(丹山)서원이 철폐된 뒤로 경모하는 뜻을 붙일 곳이 없게 되었다. 오직 이 높은 비각만이 거칠은 벌판 초원 사이에 남아 있어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옛 일을 추억하여 이를 전하게 하고 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은가? 이번 역사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영종씨와 협의해서 했다. 일이 이미 끝났기에 그 전말을 대략 기록해서 후일 참고하는 자료로 삼는 바이다.
(2) 중수가정목은양이선생유허비각기(重修稼亭牧隱兩李先生遺墟碑閣記)
勝國牧隱兩先生以文章節行鳴行上國上國之人慕其風焉我東士乎哉余到郡之初按郡之職方誌有以知兩先生遺墟碑在郡之東數市許槐市里往在英祖丙辰先生後孫泰永巡節時所創竪而知府黃公所撰記也閣則憲廟癸卯後孫景在所覆也余乃心竊感焉以暇日謁是閣而禮焉百年之間典護曠解風雨渗磨丹靑剝落然有朝夕之患彷徨久之謂鄕人曰先生之風世所共仰玆閣之責固不在士林耶丹山爲先生尸祝而恩撤後買田贍學所則不可無助余捐以助之謀葺諸僉曰諾遂屬本洞章甫南朝涵南朝浩監董焉仍其舊制而新之隔世徽依然若可徵於今日矣遠近人士行過是墟者豈不尤加敬式也哉嗟夫古人有言曰不知其土視其草木不知其家視其子孫今以先生之雲仍家于鄕洛者言之圭組軒冕炳燿一世者前後相望則醴泉靈芝豈無源根而然歟先生我百世師也而若乃後生之想像彷彿於播芬(잉)馥之地爲羹墻之寓將不在斯耶於以誦先生之文講先生之道復有一方興起之效則太守之適玆會不亦與有光焉者乎至於左右湖山之水麗與夫草木雲煙之杳出沒於空曠者已悉於先生題詠之句覽者自得之矣於乎余過客也今今玆之役不敢自謂效尺寸之誠而自附於數公尊衛之意後之視今猶今之視昔則嗣而葺之以國不朽者未無其人焉豈是閣之不壽乎遂爲之記以遺寧人戊戌南至月知郡延安李炳記
전 왕조 목은 양 선생은 중국에 가서 문장과 절행으로 명성을 떨쳤으니, 중국인들도 그 풍도를 흠모하였다. 하물며 우리나라 선비들에 있었음이랴. 내가 고을에 도착한 초기에 고을의 직방지를 살펴보고, 양 선생 유허비가 고을 동쪽 괴시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난 영조 병진년에 선생의 후손 태영이 순절로 있을 때, 처음 세운 것으로 지부 황공 은 이 기문을 지었다. 비각은 현종 계묘년에 후손 경재가 덮었다. 나는 이에 은근히 마음에 가몽을 받아서 여가 날에 이 비각을 찾아보고 예를 드렸다. 백년 동안의 보호함이 쬐이는 햇볕에 드러나고, 비바람에 스며들고, 갈리어 단청이 떨어지고 하여, 안타깝게도 아침, 저녁으로 근심거리가 된지 오래이다. 향인들이 이르기를 “선생이 세상에 떨친 기풍은 우러러 받들어야 하는데, 이 비각의 책임은 진실로 사림에 있지 않는가” 하였다. 단산서원은 선생을 제향하는 곳인데, 훼철 후 밭을 사서 섬학소(贍學所)로 한 즉, 돕지 않을 수가 없어, 내가 녹미로서 보태었는데, 여러 선비들과 어찌 비각 수리를 의논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여러 선비들도 승낙하여 마침내 괴시리의 남조함, 남조호씨를 감독으로 삼아 일을 시작하니, 옛 비각이 새로운 모습으로 되었으며, 세상을 달리해도 아름다운 자취를 오늘날에도 의연하게 증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원근의 인사들이 이 유허지를 지날 때 어찌 존경하는 마음이 더하여 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옛 사람이 “그 땅을 모르거던 그 초목을 보아야 하며, 그 가문을 모르거던 그 자손을 보아야 한다.” 고 말하였듯이 지금 선생의 자손들이 경향 각지의 가문을 형성하고 벼슬길에 진출한 이와 한 세상에 이름을 드러낸 이가 전후로 서로 바라볼 정도이니 예천과 영지가 어찌 근원과 뿌리가 없겠는가. 선생은 우리 백세의 스승이며, 만약 후생들이 가슴속에 새겨 상상하여 선생의 향기가 떨쳐지고, 향기가 남아 있는 땅이라 하여 추모의 장소로 의탁한다고 하면 바로 이곳이 아니리요. 선생의 글을 낭송하고, 선생의 도를 강구(講究) 하여 다시 한 지방을 흥기하는 효과가 있다면 태수의 적임이요, 이 기회가 역시 더불어 빛이 있는 것이 아니리요. 여기에 이르러 좌우의 호수와 산의 수려함은 초목과 구름과 안개와 더불어 아득히 우거지어 빈 허공에 출몰할 뿐이니, 선생의 제영의 구절을 갖춘다면 찾는 자들은 스스로 얻을 수 있을 것이리라 어와! 나는 지나가는 과객이라 지금의 이 일을 감히 한 자의 정성이라 스스로 이를 수 없으며, 은근히 공을 존경하는 뜻에 붙일 수 없을 것이다. 뒷날에 오늘을 보듯이 옛날을 오늘에 보듯 하면 잊고 고치고 하여 나라에서 이를 썩게 하지 않을 자가 있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그 오래 가지 못함을 두려워 하리오. 마침 기문을 써서 영해인에게 보낸다. 무술년 남지월 지군 연안 이병옥이 쓴다.
3) 정려비문
(1) 열녀(烈女) 사인(士人) 강달해처(姜達海妻) 유인(孺人) 김녕김씨 정려(旌閭) 비문
열녀 김씨의 정려비문은 유인 김녕김씨의 열녀비문이다. 김씨는 득암(得岩)의 여식으로 선비 강달해와 혼인하여, 지아비 뿐만 아니라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나아가 여러 족친들도 받들어 모시는 등 부덕이 있었다. 그러나 시집 간지 몇 년 후인 김씨의 나이 25세가 되던 해에, 지아비인 강달해가 질병을 얻으메 조석으로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며 백약을 구해 병구완을 하였으나, 결국은 소생하지 못하였다. 이어서 김씨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지아비를 따라 죽으니, 향리에서 열녀로 이름이 나 중앙정부에 정려해주길 요청하였다. 따라서 당시(1903) 장례원경이던 조정희(趙定熙, 1845∼?)가 주청하여 나라에서 정려를 받았으며, 1904년 봄에 당시 대광보국숭록대부원임의정부의정규장각학사이던 윤용선 (尹容善,1829∼?)이 비문을 지어 김씨의 정열을 기렸다. 현재 영덕읍 화개리 보건소 옆에 1904년 2월(음력)에 세운 정려각이 있다. 단 정려각에는 “열녀 사인 강달해처 유인 김녕김씨지려”라는 비명은 있으나, 아래의 비문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았다.
旌 閭 閣 記
光武七年十二月日掌禮卿臣趙定熙奏慶尙盈德郡故士人姜達海妻金氏自歸達海孝奉舅姑敬待諸族年二十五達海孀疾金氏晝夜調護竟不救金氏一哭便止不以戚容見於舅姑逮營葬金氏從容謂舅姑曰願作雙坎以爲後日未亡者之地舅如其言葬日柩旣發金氏感痛成疾却粥不食舅聞之自葬所馳歸視則金氏開目一呼舅遂不復語得疾 凡二日而 沒沒沒夕赤光滿家家人自外至者疑其失火旣苒苒而滅初葬之日若有瑞氣環迎壙外 後三十年移葬他所又有赤光亘路如始死之日人謂前後異徵皆烈婦精誠所感是宜復以歎來者天子可其奏於是達海之孫景福將樹棹楔于里門請余記之觀夫古昔傳記所載孝子節婦多有格天感物之事而天道至遠難以推測人事至近勉斯可至故學道君子往往捨天道不之言而惟責人事然余以金氏之事觀之其疾病之跡或與舅決性命者有間而來後人疑惑則天於是赤光瑞氣種種發現而以表烈婦之精誠也 金寧金氏得岩之女也
光武 八年甲辰仲春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 議政府議政奎章閣學士勳一等海平尹容善撰
광무 7년(1903) 12월 일 장례경 신(臣) 조정희가 정려해주길 주청(奏請)하였다. 경상 영덕군 고 사인 강달해 처 김씨는 달해에게 시집간 이래 시부모를 효성스럽게 받들고, 여러 족친들을 존경심으로 대하였으며, 나이 스무다섯에 달해가 병을 얻자, 김씨는 주야로 조섭(調攝)하고 간호(看護)하였으나, 결국에는 구하지 못하였다. 김씨는 한번 곡(哭)을 하고, 문득 그친 후 얼굴에 슬픈 빛을 시부모에게 보이지 않고는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하면서, 조용히 시부모에게 말하기를 “원컨데 두 개의 구덩이를 만들어 후일 미망인의 묘지로 쓰고자 합니다.” 하니 시아비는 그 말대로 하였다. 관이 출발하자, 김씨는 애통함이 지나쳐 병이 들어 갑자기 죽조차 넘기기 힘들었다. 시아버지가 이를 듣고 장지에서 급히 달려와 이를 살펴본 즉, 김씨 눈을 한번 뜨며, ‘아버님’하고 부르고는 마침내 두 번 다시 말을 하지 못하였다. 병을 얻은 지 이틀만에 죽으니, 그 날 저녁에 붉은 빛이 집안 가득히 내려 앉았는데, 집안 사람이 밖에서 오며, 이를 보고 집 에 불이 난 것으로 의심할 정도였으며, 온 집안에 늘어지듯 퍼져 있다가 사라졌다. 장례를 치르던 날, 상스러운 기운이 묘구덩이를 둘러싸고 환영하는 것 같았으며, 이후 30년 지난 뒤에 다른 장소에 이장을 하려고 하니, 또 붉은 빛이 처음 장례일과 같이 묘구덩이 주위에 서렸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전날과 뒷날의 특이한 징표는 모두 열부의 정성에 감동된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감탄한 사람들이 와서 당연하게 거듭 증거(證據)하니 천자께서 이 주청을 허가하였다. 달해의 손자 경복(景福)이 장차 마을 입구에 세워 도계(棹)라도 지내기 위하여 나에게 기문을 청하여 왔다. 무릇 옛날부터 전해지는 기록(傳記)에 실린 것을 살펴보니, 효자와 열부들을 하늘이 헤아리고, 사물이 감동하는 일이 많이 있으나, 천도(天道)는 도달하기가 아득하여 추측하기가 곤란하지만, 인사(人事)는 도달하기가 가까워 여기에 다다르려고 애써 힘을 쓰고 있어, 도를 배우는 군자들도 가끔씩 천도를 버리고, 말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인간사만 그러려니 책(責) 잡는다. 내가 김씨의 일로써 그 질병의 자취와 천명을 결정할 때 시아비가 있었다는 것을 살펴보니, 약간의 사이가 있어 후인이 와서 의혹을 제기하는 즉, 그러나 하늘은 붉은 빛과 상서로운 기운을 종종 발현(發現)시켜 열부의 정성을 드러낸다고 하니, 김녕 김씨 득암(得岩)의 딸이다. 광무 8년(1904) 갑진 중춘 정일품 대광보국숭록대부원임 의정부의정 규장각학사 훈일등 해평 윤용선이 찬하다.
4) 효자비문
(1) 효자 최흥수갈명(孝子 崔興壽碣銘)
寧海新羅谷有一座佳城山不高而洞開 水不深而源長內經金莎外緯松林此故孝子崔公諱興壽之幽宅也 公字興柱號稼隱官通政大夫慶州人文昌侯孤雲先生諱致遠始祖也曾祖諱國衡贈戶曹參議祖諱濟孝贈禮曹判書考諱世福嘉善大夫貞夫人潁陽千氏公生於星州早習詩禮遺訓孝親其天性也好學其餘力也孝是學之本學是行之餘不事功令反求爲記之學二十年不出山門親老家貧採葛拾實以供奉養之資甲子春移搬于寧海沿路四百里或十里負夫或十里負母遞父遞母匍匐到達越明年乙丑春親瘠彌欲晝夜侍湯冠不解帶睡不交睫嘗糞驗症祝天求命採芹於雪中求魚於氷穴夢得神方路逢 良醫快見奏效後遭艱哀毁泣血幾至滅性遂日省墓冬則掃雪夏則除草終三祥猶不衰後遭內艱送終儀節一如前喪丙子 荒捐土出穀周恤貧窮噫 積而能散散而不吝非君子則果難能也而公能之此豈非由於孝而及於人者歟己巳二月六日以天年考終于寢 葬于蒼水之新羅谷壬坐原 配全州李氏亦有賢淑之德孝舅姑敬夫子克遵原始造端之道有子三人長參奉在鉉次英鉉性鉉長孫根海述海次孫道海德海季孫敬海龍海以下不盡記公之歿已久而墓道尙闕顯刻其子在鉉昆季孝思攸篤夙夜憂懼將欲竪石敬修家狀囑余爲文顧病閣鉛不能當時役讀其狀而愛其誠乃爲之銘曰崔胄慶州自羅始昌赫赫勳業道德文章公又篤生克世有光長松老栢新羅之岡久闕顯刻子孫傷竪龜趺乃攷典常銘以闡發孝子之藏
完山李載現撰
영해 신라곡은 가성산 한 좌향에 있는데, 산이 높지 않으면서 동이 열려 있고, 물이 깊지 않으면서 원류가 길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안으로는 금빛 모래가 세로로 쌓여 있으며, 밖으로는 소나무 숲이 가로로 둘러싸고 있는 곳으로, 이곳이 고(故) 효자 최공 휘 흥수의 유택이다. 공의 자는 흥주이고, 호는 가은이며,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경주인 문창후 고운선생 휘 치원이 그 시조이다. 증조의 휘는 국형인데, 증직으로 호조참의를 받았으며, 조부의 휘는 제효로 증직으로 예조판서를 받았다. 부의 휘는 세복으로 가선대부를 받았으며, 비는 정부인 영양 천씨이다. 공은 성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릴 적부터 시예(詩禮)와 유훈(遺訓)을 익혔으며, 천성적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한편, 남는 힘으로 배우기를 즐겨하였다. 효도는 배움의 근본이요, 배움이란 효를 행하고 남은 것이라 하며, 공을 다투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고, 도리어 스스로의 수양을 하는 학문을 산문을 닫은 채 20여년이나 공부를 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여 늙은 부모를 모심에 칡을 캐고, 나무 열매를 따다가 받들어 공양하였다. 갑자년 봄에 영해로 이사를 하였는데, 거리가 4백여리라 혹 십리마다 부친을 업기도 하고, 모친을 업기도 하면서 겨우 영해에 도착하였다. 이듬해 을축년 봄에는 부모가 병이 나자 밤낮으로 약을 다려 드렸으며, 잠을 잘 때도 관을 벗지 않았으며, 조금도 싫은 기색을 나타내지도 않았으며, 대변을 맛보아 그 증상을 살필 정도였다. 하늘에 축원하여 목숨을 기구(祈求) 하였으며, 눈 속에서 미나리를 구하고 얼음굴에서 잉어를 구하는 정성으로 간호하니, 꿈속에서 문득 신기한 방책을 얻어 이에 따라 길에서 양의를 만나 효과를 보게 되었다. 후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서는 피눈물을 흘리는 슬픔으로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였으며, 장례를 치른 후에는 매일 성묘를 하는데, 겨울에는 눈을 쓸어 내리고, 여름에는 풀을 베내며, 삼년 동안 조금도 변함없이 하였으며, 뒤에 모친의 상을 당하여서도 끝까지 전번의 상례와 같이 하였다. 병자년 흉년에는 토지를 출연하고 곡식을 내어 가난한 이들을 구휼하였으니, 오라, 쌓이면 능히 나누어야 하며, 나눔에 있어 아까워하지 않음은 군자가 아니면 과연 어려운 것인데, 공은 능히 이것을 하였으니, 어찌 효에 말미암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침이 아니랴 기사년 2월 6일에 침소에서 천년(天年)을 마치니, 창수의 신라곡 임좌 두들에 장례를 치뤘다. 배는 전주 이씨인데, 역시 현숙한 덕이 있어 시부모에게 효도하였고, 지아비를 공경하였으며, 자식들에게는 근본을 중히 여기는 도리를 극진히 따르도록 하였다. 세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맏이는 참봉 재현이고, 다음으로는 영현, 성현이다. 장손으로 근해, 술해가 있고, 차손으로는 도해, 덕해가 있고, 계손(季孫)으로는 경해, 용해가 있는데 이하는 모두 기록치 못한다. 공이 돌아간지 이미 오래이고, 묘도(墓道)에 현각(顯刻)이 빠져 있어, 그 자식인 재현이를 보듯 맏이와 막내 모두가 효를 생각하고, 이를 독실하게 행하였지만, 밤낮으로 이를 근심하여, 장차 비석을 세우기로 하고 삼가 가장(家狀)을 닦아 나에게 부탁하려 왔다. 돌아보니 병들고, 문필이 당시의 일을 감당하는데 능하지는 못하지만 그 가장을 읽어보고, 그 성의를 사랑하여 이에 짓고, 명을 붙인다.
최씨는 경주의 후예 신라에서부터 번창하기 시작하였네 공훈과 업적 도덕 문장이 뛰어났도다 공 또한 독실한 삶 세상에 지극함이여, 빛이 있음에라 늘어진 소나무, 오랜 잣나무 신라의 두들이여 오래도록 비를 세우지 못함에 자손들은 이수(首)와 귀부(龜趺)를 세움에 근심했네 이에 전적(典籍)을 상고하여 명을 하여 감추어진 효자를 드러내고자 하네 완산 이재현이 찬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