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 물

    남세혁(南世赫, 1877∼1963) : 본관은 영양으로 영해면 괴시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며, 자는 여명(汝明)이고, 호는 호정(湖亭)이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창의한 신돌석의진에 군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문경의 의병장인 이강년 등의 영남일대의 의병진에도 많은 지원을 하였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석주 이상룡 등과 독립운동을 모색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후세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후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에 정규하, 남효직, 김세영, 권태원 등과 주도하여 동년 3월 18일 영해시장에서 거군적인 항쟁이 일어나도록 하는데 앞장섰다. 이 의거로 7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며, 이후에도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남효직(南孝直,1876∼?) : 본관은 영양으로 영해면 괴시리 출신의 독립유공자이며, 부친은 남조순(南朝淳)이다. 영해 3.18만세의거 주동자로 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신봉래(申鳳來,1878∼1947) : 본관은 평산, 호는 봉산(鳳山)으로 영덕읍 화개리에서 출생하였다. 약관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거의 송습(誦習)하였으며, 문장이 호한(浩汗)하여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으며, 군내의 많은 정자와 재실에 그의 기문이 전하고 있다. 방산 허훈의 문하이다. 저서로는 「봉산집」 4권2책이 있다.

    권병태(權炳台, 1882∼1953) : 본관은 안동으로 호가 건암(健庵)이다. 덕망과 학문이 박람강기하여 유림에서 존경을 받았으며, 문집이 있다.

 

    김정헌(金廷憲, 1882∼1948) : 본관은 수안으로 첨추 김간의 11세손으로 일제 강점기의 지품면장을 하였으며, 후진양성을 위하여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광덕학원의 운영에도 관여하였고, 지품면사무소내에 경신학원을 두어 지역 후진들의 교육에 앞장섰다.

    남병기(南炳基,1887∼?) : 본관은 영양으로 자는 용빈(用賓)이며, 호는 지암(遲庵)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시서에 능하였으며, 군내의 정사(亭)에 많은 기문을 남기고 있으며, 당대에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다. 유고가 있다.

    권병주(權炳周, 1889∼1951) : 본관은 안동으로 호는 대하(臺下)이며,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문사가 정치하고 박람하였다. 문집이 있다.

    권태원(權泰源, 1891∼1967) : 본관은 안동으로 부친은 권영유(權永裕)이며, 지품면 송천리 출신이다. 병곡면 송천리의 대제(大濟) 측량과를 졸업하였으며, 경성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는 지품면 낙평리의 일신의숙의 교사, 해주 구세군영 사관을 지냈다. 1919년 영해 3.18만세의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지역내 만세의거의 햇불을 들게 하였다. 이로 2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며, 이후에는 지품면 송천리의 광덕학원 교사를 하였다. 1930년대에는 국세조사원, 지품면 송천리 농촌진흥조합장, 소방조장에 임명되었으며, 1935년에는 지품면 협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영덕농업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0년에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과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정규하(丁奎河, 1885∼?) : 병곡면 원황리 출신의 독립유공자이다. 기독교의 선도자로 1919년 영해 3.18만세의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영해만세의거가 전국적으로 대단한 규모로 일어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김동택(金東澤, 1885∼?) : 본관은 경주로 병곡면 원황리 출신의 애국지사이다. 영해 3.18만세의거에 정규하, 박희락, 서삼진, 조영한 등과 함께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서삼진(徐三辰, 1890∼?) : 병곡면 원황리 출신의 독립유공자로 기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정규하, 박희락 등의 동지와 영해 3.18만세의거에 참여하였다. 이 의거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남교문(南敎文, 1987∼?) : 본관은 영양으로 병곡면 각리 출신의 애국자로 1919년 3.18일에 일어난 영해만세의거에 참여하여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조영한(趙榮漢, 1893∼?) : 본관은 한양으로 병곡면 원황리 출신의 애국지사이다. 영해 3.18만세의거에 참여하여 4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였다.

    장유학(張有鶴,1895∼?) : 본관은 울진으로 영해 3.18만세의거에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한 애국지사이다.

    김성규(金聲奎,1880∼?) : 병곡면 원황리 출신으로 3.18 영해만세의거에 참여하여 징역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김성욱(金聲旭,1869∼?) : 병곡면 원황리 출신으로 3.18 영해만세의거에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루었다.

    장두병(張斗炳,1899∼1980) : 본관은 인동. 호는 천재(川齋)이며, 강구면 소월리 출신의 한학자이다. 일찍부터 사서(史書)와 경서(經書)를 탐독하여 학문의 성취가 있었다. 특히 한시에 능하여 전국 각지의 한시백일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는데, 1957년 10월 3일 개천절 기념 전국한시백일장과 1963년 영친왕 환국 기념 전국한시대회에서 장원을 하는 등 전국적으로 필명을 날리기도 하였다.

    권영조(權永祚, 1890∼1958) : 본관은 안동. 병곡면 송천리 출신으로 영해 3.18만세 의거에 참여하여 4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탈옥하여 만주로 가서 광복단에서 활약하였으며, 광복 후 귀국하였다. 독립유공자이다.

    조영탁(趙榮鐸, 1887∼1936) : 본관은 한양으로 병곡면 송천리 출신이다. 영해 3.18 만세의거에 참여하여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항일유공자이다.

    권태응(權泰應, 1890∼1935) : 본관은 안동으로 병곡면 송천리 출신이다. 영해 3.18만세의거에 참여하여 3년의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장성열(張星列,1896∼1966) : 본관은 울진으로 병곡면 송천리 출신이다. 송천교회 장로였으며, 영해 3.18만세의거에 참여하여 2년의 형을 산 독립유공자이다.

 

    박정윤(朴正允, 1898∼1950) : 본관은 밀양으로 호는 야은(野隱)이다. 일제 말에 영해면장을 지냈으며, 사재를 털어 재난구호에 앞장섰다. 송천을 둘러싸고 있는 용당들이나 성내들이 제방의 부실로 홍수 때마다 범람하여 물난리를 겪자 사재와 각 기관의 협조를 얻어 제방을 개수하여 홍수에 대한 근심을 덜었다.

    조태헌(趙泰憲, 1896∼1982) : 본관은 한양으로 호는 헌당(軒堂)이며, 병곡면 송천리 출신으로 영해 3.18만세의거에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은 독립 애국지사이다.

    권정필(權正弼, 1883∼?) : 본관은 안동으로 병곡면 송천리 출신의 영해 3.18만세의거 참여 독립유공자이다. 이 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뤘다.

    남대철(南大轍, 1907∼1984) : 본관은 영양으로 호는 중산(重山)이며, 가학을 이어받아 문예가 남달랐으며, 다년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고문서 중, 초서류의 문서를 정서하는데 큰 공적을 남겼다. 특히 시서에도 능하여 잡록(雜錄) 1권을 남겼는데, 자료로써 가치가 매우 높다. 청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등의 도집례를 맡는 등 유림에서도 신망이 있었다.

    권경찬(權慶燦, 1909∼1980) : 본관은 안동으로 병곡면 송천리 출신이며, 구세군 정령으로 구세군 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여 많은 공로가 있었다.

    권진달(權進達, 1912∼1950) : 본관은 안동으로 병곡면 송천리 출신이며, 일제 강점기에 일본 중앙대학 법학부를 나와 교육계를 거쳐 농협중앙회 상무이사를 역임하였다.

    김원숙(金元淑, 1915∼1983) : 본관은 김녕. 자는 낙선(樂善), 호는 벽파(碧坡)이며, 달산면 용전리 출신의 한학자이다. 일찍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특히 한시작법에 능하여 경향각지의 한시백일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군내의 한학자들로 구성된 「야성시사」라는 한시동호인 모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지역 한시단(漢詩壇)의 격을 높이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옥산시초(玉山詩)」 상·하권이 전해지고 있다.

    신헌기(申憲基, 1914∼2000) : 본관은 평산으로 호는 춘곡(春谷)이다. 일찍부터 봉산 신봉래문하에 사사하여 한학에 조예가 있었다. 영덕향교의 전교를 지냈으며,도산서원 도집례(都執禮), 병산서원, 소수서원 외 약 20여 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경향 각처의 한시백일장에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군 내외의 각처에 기문과 묘갈명을 찬하였다.

 

    방태석(方泰錫,1926∼1985) : 영덕읍 화개리 출신의 시인이자 교육자이며, 호는 서하(曙霞)이다. 일찍부터 2세 교육에 전념하면서 문재(文才)를 닦아 「칠령문학」, 「경북문협」등의 동인지 혹은 문학모임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영덕군지」, 「내고향전통가꾸기」등의 집필에도 참여하여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확립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저작으로는 「복사밭 내력」이란 유고집이 전하고 있다.

    서두석(徐斗錫,1920∼1995) : 본관은 달성이며, 호는 월소(月笑)이다. 일제하에 함경남도 원산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광복 이후에는 1·2대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또한 영덕문화원을 창립하여 다년간 원장에 재직하면서 지역문화창달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윤병문(尹秉文) : 본관은 파평. 호는 매계(梅溪)로 달산면 주응리 출신의 한학자이다. 일찍부터 사서삼경을 수학하여 시서에 능하였으며, 특히 한시에 능하여 경향각지의 한시백일장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신진규(1926∼1998) : 본관은 평산. 호는 송담(松潭)으로 지품면 속곡리 출신의 교육자이며, 학자이다. 영덕공립실수학교를 졸업하고, 교육계에 종사,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 칠령문학회회장(현영덕문인협회)회장, 영덕문화원장 역임. 저서로는 「송담산고」, 「송담산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