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기 의병 활동

  한말의병이란 대체로 1895년 8월 20일(음력)의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이 선포된 이후부터 일제가 한국을 병탄한 1910년 말까지의 항일무력항쟁을 말하며, 이 같은 한말의병도 일반적으로 그 공격대상에 따라 두가지로 나누어지고 있다.
  첫번째는 민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된 1895년에서 1896년까지 집중적으로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과 병신의병이 그 하나인데, 이때 의병들의 주 공격대상은 진위군(鎭衛軍)이었다.
  진위군이란 고종대의 군제개편에 의하여 새롭게 편성된 정부군(官軍)으로, 이 당시 일본군은 서울 등의 일부지역에 주둔하면서 정부군의 배후에서 이를 조정하는데 그쳐 의병들과 직접적인 전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번째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1910년 말까지의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인데, 이때의 주 공격대상은 일본의 군경이었으며, 의병들에 대한 일본군의 진압방법도 매우 잔인하였다.
이 고장의 을미, 또는 병신의병의 창의(倡義)는 1896년 1월(음력)에 영해에서 유림을 중심으로 창의한 이수악(李壽岳)의진(義陣)과 달산 주응을 중심으로 거병한 윤면익(尹冕翼)의진, 영덕의 신운석(申運錫)의진, 지품면 송천리의 김노헌(金魯憲)의진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진들도 독자적인 활동을 하기보다는 원근 각처의 의진들과 서로 연계하면서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따른 유생들과 일반 백성들의 불만을 모아 일제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친일세력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정도였다. 다만 영해의진이 이해 3월에 영덕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급보를 받고 이를 구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다소간의 전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진압측 병력이 관군이었으므로 본격적인 항왜근왕(抗倭勤王)의 의병활동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이 지역에 있어서 전기 의병활동은 경기도 이천에서 기병(起兵)하여 영덕 오십천에까지 내려온 김하락(金河洛)의진이 영양에서 기병(起兵)하여 안동의진에 참여한 김도현의진과 안동의진, 그리고 영덕, 영해의진이 합진하여 1896년 7월 13일(양력)의 중앙정부의 진위군과의 오십천 호호대 전투에서 김하락의병장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들이 전몰할 때에 이르러 이 고장 의병들의 항왜근왕 의병활동은 극치에 이른다.

1) 김하락의진과 영덕의 의병활동

(1) 김하락의진과 영덕의 의병

  을미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 김하락(1846∼1896)은 1895년 12월에 경기도 이천에서 의진을 결성, 남한산성을 근거지로 하여 서울진공작전을 펴는 등, 수많은 전투를 겪으면서 남으로 내려와 의성·경주·영덕 일대에서 싸우다 강구의 오십천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한 한말 의진중에 제일 먼저 창의했으면서도 자진해산이 아닌 완전히 전몰할 때까지 항전한 한말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따라서 김하락 의병장은 영덕과의 관련이 많은 분으로 김하락의진의 영덕지역에서의 활동과 영덕지역의 의병과의 관련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면 영덕지역의 을미의병의 내력도 알 수 있다.
  김하락의진이 영덕에 도착하기 앞서 이 지역에서도 의병활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영덕의 신운석(申運錫) 의병장은 향중의 천거로 아장에 김필헌(金弼獻), 중군장에 유동욱(柳東郁), 영솔장에 남진수(南鎭壽) 등으로 하는 약 300여명의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들을 조련시키는 한편, 군장(軍裝)을 준비하면서 관군과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 영덕의진은 1896년 4월 8일(음력)에 관군인 달성병대 60여명이 남으로부터 진격하여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남정면 지경리에까지 병력을 출동, 매복시켜 관군이 오도록 기다렸다. 그러나 의병들의 무장 정도로 보아 세가 불리한 것을 알고 후퇴하였다. 그리고 4월 9일에는 경병(京兵) 63명이 흥해에서 영덕으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또 다시 입수하고 남정면 장사리에서 매복하여 기다리다 이 역시 세 불리함을 알고 후퇴하였다.
  이러한 긴장속에서 4월 11일(음력)에 영덕의진은 장사리에서 물러나와 남정면 원척리에서 잠시 주둔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때 관군이 식사 중의 영덕의진을 습격하여 영덕의진은 교전도 하지 못한 채 영덕의병 12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어 관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신운석의진은 중과부적으로 남정면 원척리에서 영덕의 남천숲(南川藪)에까지 밀리게 되었다. 남천숲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공격해 오는 관군을 반격하고자 하였지만 여의치 못하여 결국 신운석 의병장은 의병들을 잠시 해산하고는 고향인 지품면 신안으로 물러나 이 지역을 중심으로 병사와 장비를 모아 재기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천의 김하락의진이 6월 29일(양력) 영덕에 도착하자 신운석 의병장은 이에 합세하여 7월 13일(양력) 연합의진의 강구 오십천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김하락의병장이 순사(殉死)하는 등 연합의진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전투에 참여한 신 의병장의 부대도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어 결국 신의병장은 지품면 속곡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속곡에 피신한 사실을 알고 있는 밀정의 신고로 관군에 잡히는 몸이 되어 숱한 고문을 꿋꿋이 견디다가 8월 3일에 북송정에서 순국하였다. 특히 김하락 의병장의 「진중일기」의 6월 29일자에 나오는 “본부의 의병대장 신씨(申氏)가 와서 보이고 갔다.”라는 구절은 신운석 의병장을 일컸는 것으로 보이며, 김하락의진에서도 신운석 의병장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896년에 들어와서는 김노헌도 영덕의병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해 4월 5일(음력)에는 청송의병진을 돕기 위하여 영덕의진에서 군문도지휘 겸 포장 김노헌과 전방장 심의종, 후방장 신병렬, 서기 안문익을 포함하는 포군 42명이 청송 이평동에까지 진출하였다가 4월 7일에 영덕으로 회군하는 등, 영덕과 청송지역을 오가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영덕 본진으로 회군하여 돌아온 김노헌부대는 신운석의진과 함께 이해 4월 8일과 9일에 관군이 영덕으로 북상한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남정면 지경리와 남정면 장사리에서 적을 기다리다가 관군이 북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는 다시 남정면 원척리로 철수하여 식사를 하였는데, 마침 은밀히 접근한 관군들이 습격을 하여 와서 쌍방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김노헌 의병장이 총상을 입는 등, 십이명에 이르는 의병들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가 있었다.
  이후 김노현 의병장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영덕을 중심으로 친일관리 및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수많은 의병활동을 전개하다가 1910년 5월 23일 남정면 원척리 전투에서 얻은 총상으로 순국하였다.
  영해지역에서는 이수악의진이 1896년 1월에 유림을 중심으로 창의하여 의병활동에 들어갔으며, 중군장 박재명, 복병장 박동진 의병장을 중심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중군장인 박재명 의병장은 영양·안동·청송·영덕·평해 등지의 의진들과 합세하여 의병활동을 하면서 군기와 군량을 조달하여 의병활동의 뒷바라지를 하였다. 특히 이해 3월(음력)에는 영덕방면으로부터 관군이 영해로 들어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축산면 기암동에서 이를 막고자 하여 이수악의진의 도서기(都書記)로 있던 중형(仲兄) 박재희 의사와 상의하여 인근의 의병 50여명을 인솔하여 복기암 구릉에 진을 치고 관군을 맞아 장시간 전투를 하여 이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으나 중과부적으로 위급(危急)을 맞이하였는데, 이같은 절대절명의 순간에 영덕의진에서 긴급히 원병을 보내어 와서 마침내 이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하였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박의병장도 관통상을 입는 등, 의병진에서도 10수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여 부득이 싸움을 멈추고 후퇴하였다.
  또한 이수악의진의 복병장으로 참여한 박동진 의병장도 영양·평해·울진·삼척 등지의 의병진과 합세하여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대소 전투를 벌이면서 맹렬한 활동을 벌였다.
  한편 이수악 의병장이 나이가 많아 전체 의병의 통솔과 전투의 선봉에 서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의병진에서 박동진 의병장을 대장으로 추대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된 박동진 의병장은 안동의병장 권세연 등과 연합하여 영양·진보 등지의 적을 공격하고 석보·화매를 거쳐 영덕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 김하락의진은 경주에 까지 이르러 경주의 의병진과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강원도 쪽으로 북상하기 위하여 영덕에 다다랐는데, 이 때 영해의진에서도 김하락의진이 7월 5일 영해 인근의 축산에 머무르자 선봉장과 좌익장을 보내어 합진할 것을 제의하고 영해부로 진을 옮기도록 하였다. 이수악의병진의 조직표인 「창의시파록(倡義時爬錄)」에 의하면 전봉장(前鋒長)에는 김하규(金夏圭), 좌익장에는 권준모(權濬模)이다.
  7월 5일에 영덕에 도착한 김하락의진은 마침내 7월 13일날 이들을 꾸준히 추격하여 온 관군과 오십천의 중류인 호호대(浩浩臺) 부근에서 전면적인 대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수륙양면으로 공격하여 오는 관군의 우수한 화력과 많은 군사들에 비하여 열악한 무기와 때 마침 쏟아져 내리는 폭우에 의하여 화승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러한 치열한 전투 와중에 김하락 의병장은 총탄을 맞고는 오십천의 깊은 강물에 뛰어 들어 순국을 하였다. 따라서 대장을 잃은 의병들은 부득이 흩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십천 전투에서 김하락의진이 무너지자 영해의진은 흩어진 부대를 수습하여 영해 일원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쳐 나갔으나, 이해 8월 4일 육로인 영덕에서 진격하여 온 관군과 해로(海路)인 대진으로 들어오는 관군의 수륙협공에 의하여 박동진 의병장은 병곡면 사천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으나, 결국은 관군에게 잡히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건양 원년(1896) 9월 19일자 「독립신문」의 기사에 의하여 확인된다.

“ 팔월 이십구일 대대장 이겸대씨가 군부에 보고하였는데 영덕, 영해, 영양으로 비도(匪徒)가 다시 일어나 소요한다 하기로 선유사에게 즉시 가서 효유하라고 조회하고 만일 효유하여 듣지 않커던 군사를 거느려 치기로 하였다 하더라”

 위의 기사는 김하락의진이 영덕에서 전몰한 이후에도 박동진 의사와 같은 의병활동이 우리 지역에서 봉기하여, 계속적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자 중앙정부 차원에서 진위대대를 파견하여 이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을 진압한 것을 나타낸 것으로 우리 지역의 빛나는 의병활동을 웅변적으로 말해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2) 김하락의진의 동해안 일대의 의병활동

  을미의병의 최대의 격전지인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맹렬히 활동한 조선 후기의 최대 의병진인 김하락의진이 경주성에서 영덕지역에 이르기까지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당시 흥해와 청하, 그리고 영덕에 이르는 지역의 의병들의 활약상을 알 수 있다.
  김하락의진이 경기도 이천에서 경주에 도착한 것은 1896년 6월 15일로 그를 따르는 병력의 규모는 50∼60여명 정도였다. 경주에 도착한 김하락의진은 평소에 그의 활동에 대하여 소식을 듣고 있던 경주지역의 유림 김병문·이시민·서두표·박승교 등이 경주 의병진과의 연합의진을 제의하자, 이들의 제의를 수락하고 이들과 경주연합의진을 구성하여 6월 17일 조성학이 선봉이 되어 경주성을 공격하였다.
  경주성을 점령한 후 김하락 의병장은 각지의 명문대성(名門大姓)들에게 격문을 보내어 창의를 하도록 권고하였는데, 이때 영덕에서도 이수악·윤면익·신운석·김노헌·구한서 등의 의병장들이 창의하여 김하락의진과 연합을 도모하였다.
  영덕지역의 의병들은 이보다 앞서 1896년 4월에 영덕군수 정재관(丁在寬)과 10여명의 친일관리를 처단하는 등 맹활약을 하고 있었으며, 김하락 의병장의 격문을 받고 경주의진과 연합하기 위하여 경주쪽으로 움직이기도 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6월 23일 안강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친위대와 대구의 일군수비대의 응원으로 경주성이 다시 정부군에 함락된 후 김하락의진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기계, 흥해를 거치면서 흥해·청하의 열혈의사들을 모으는 한편, 청송의진을 새롭게 가담시키면서 6월 29일에 영덕에 도착하여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 의진을 주둔시킨다.
  이때 영덕의진의 윤면익·구한서 등도 합세하였으며, 여기서 영덕의병 100여명을 모집하여 그 기세를 높였다. 7월 2일에 영덕읍에 도착하여 이곳의 의병들과 합세하는 한편, 소모사(召募使)들로 하여금 의병들을 모으고, 군수품을 준비하였다.
  7월 5일에는 본진을 축산에 주둔시켰는데, 이때 영해의진의 선봉장과 좌익장이 찾아와 합세를 요청하자 김하락 의병장은 이들의 요청에 응하여 이채구·이준구·홍병태 등과 함께 영해로 진을 옮기게 된다.
  이 당시의 영해의진은 이수악의진으로 보이며 영해의진의 안내로 영해부의 장교청에 본진을 두었으며, 7월 9일에는 안동의진의 유시연이 6개 부대를 거느리고 와서 합진하기를 요청하고, 화부(花府,현 안동)로 들어가기를 요청하였으나, 김하락 의병장은 이를 거절하고 계속 영해에 머물렀다.
  이와같이 당시 이 지역에서는 김하락의 경기의진과 연합한 경주연합의진·청송의진·흥해의진·청하의진·영덕의진·영해의진·안동의진의 연합의진이 결성되어 의병들의 기세가 드높았다.
  이 때 김하락 의병장은 의병들의 사기진작 및 무기와 군수품을 확보할 일환으로 영덕 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던 중에 관군 300여명이 흥해를 거쳐 영덕을 향하여 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우선 이채구(李采久)·이준구(李俊求)·홍병태(洪秉泰)로 하여금 1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영덕을 향하여 출발하게 하고 자신도 조성학과 함께 영덕에 도착하여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
  영덕에 도착한 김하락 의병장은 영덕을 가로질러 흐르는 오십천의 호호대 부근에다 진을 치고 관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7월 13일 드디어 대격돌이 시작되었는데, 이날은 김하락 의병장을 비롯한 여러 의병장의 독려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튿날에는 관군들이 수륙양면에서 공격하여 오는 한편, 갑작스런 폭우가 쏟아져 화승총으로는 적을 대적할 수 없게 되어 드디어 의병진은 흩어지고 김하락 의병장은 2발의 적탄을 맞고는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며 스스로 오십천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이로써 경기도 이천에서 창의한 김하락의진은 남한산성에서 영덕 오십천에 이르는 7개월여간 항일투쟁의 대단원을 우리 지역 오십천에서 그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영덕 오십천 싸움에서 김하락 의병장, 홍성태 의병장 등 수많은 의병들이 장렬히 전사하였으며, 영덕에서 김하락의진의 강력한 지원자이며 영덕의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달산면 주응리의 윤면익 의사도 7월 13일 김하락의진이 대패하던 날 달산 주응에서 체포되어 영덕읍 화개리 북송정 숲(北松亭藪)에서 순국하였다.

2) 김도현의진과 영덕의 의병활동

  을미와 병신의병으로 창의한 영덕의진과 이천의진이 영덕전투에서 참패한 후 흩어진 의진들은 안동의진, 청송의진에 의하여 수습되어 일부는 청송의진을 따라 청송으로 이동하고 일부는 안동의진의 김도현 의병장을 따라 창수원으로 가서 대열을 정돈한 후 뒷날을 도모하기로 하였다.
  이때에 살아남은 이 지역 의병들은 산곡간에 숨어 있다가 을사조약 이후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으로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후일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구한서 의병장과 영릉의병진을 창의하여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신돌석 의병장 등이 대표적이다. 이때 참여한 영양의진의 김도현 의병장은 1896년 1월초에 영양에서 거병하여 안동의진에 참여하고 선성(宣城:예안)의진의 중군장으로 3월 29일 일본군의 병참기지가 있는 태봉(胎封)을 공격하는 등 북부 경상도 지역에서 맹활약을 한 의병장이다.
  김도현 의병장은 태봉전투에서 패한 후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영양·봉화·영해·영덕지역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하였으며, 김하락의진이 영덕에 도착하였을 때 이들과 합진하여 관군과 대적하였으며, 김하락의진이 영덕 오십천 싸움에서 패하여 흩어졌을 때 이들을 오늘의 영덕읍 화천1리인 웅창(熊倉, 곰창)과 창수면 창수리의 창수원에서 수습하여 영양에 파견되어 있는 진위군을 공격하는 등 맹활약을 하다가 고종의 의병해산 칙서를 받고 10월에 영양의진을 해산하고 고향에서 칩거하였다.
  이와같이 이 지역 의병활동의 최후의 거점인 김도현의진이 유교사상에 입각한 근왕(勤王)적인 사고(思考)로 김도현이 그의 의진을 해산하자 여기에 몸담았던 많은 의병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흩어진 을미·병신의병진은 해산 이후에도 각처에 흩어져 친일관료·일본거류민·지주·일본상인 등을 약탈·방화하고 일본군의 주요 군사시설인 전선과 교량을 파괴하는 등 일본의 침략에 끝없이 저항을 하면서 을사보호조약 이후의 대 일본군과의 의병투쟁을 대비하였다.
  이러한 을미와 병신의병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불과 1,2년에 끝난 것은 의병지도부 자체가 대부분은 유교로 무장된 유생들로, 충군근왕(忠君勤王) 사상이 온 몸에 배여 있어서 해산하라는 고종황제의 칙유와 의병의 공격 대상이 주로 정부군인 관군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명분에 약한 유생지도부의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이때 고종황제의 칙유가 이들에게 적당한 명분을 만들어 주었기에 대부분의 의병진은 해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것은 이 지역의 의병 지도자들에게도 동일하였을 것이다.
  결국 김하락의진이 영덕에서 패산(敗散)한 이후로 이 지역 의병활동의 범위는 점차 줄어들어 1896년 10월 15일(음력 9월 9일)에 김도현의 영양의진마저 해산되면서 경상북도 지역과 영덕지역의 을미와 병신의병의 활동은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항일과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은 일본이 한반도를 병탄하기 위한 첫 단계로 러일전쟁 후 강제로 맺은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부터로 넘어가게 되었다.

2. 후기의 의병활동

1)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 의병장

  경상북도 지방의 후기 항일 의병활동의 시기는 대개 1906년 봄부터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일제에 의하여 강탈당하기 시작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의 창의가 불같이 일어났는데,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전기의 의병 창의에 이어 항일구국의 의병 창의가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을미의병 창의시에 안동에서 기병(起兵)하여 김하락의진과 연합해서 활약한 유시연(柳時淵)이 경주에서 의병을 모아 항일구국에 앞장섰으며, 부자(父子) 의병으로 유명한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부자가 영천에서 산남의진(山南義陣)을 창의하였으며, 청송에서는 이하현(李夏鉉)이 창의하는 등 경북 곳곳에서 의병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후기 항일 의병활동이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경상북도 전역에서 의병활동이 맹렬히 전개될 때, 우리 지역의 신돌석 의병장도 1906년 3월 27일(음 3월 3일)에 영해군 남면 복평리(현 영덕군 축산면 도곡 2리, 일명 복더미)에서 기병하여 항왜의 기치를 올렸으며, 1908년 11월 18일 순국하기까지 영해를 중심으로 하는 동해안 일대에서 항일의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경북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의병활동과 더불어 1905년에서 1910년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의병활동은 신돌석 의병장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영릉의병진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항왜의 기치를 올리며 창의한 신돌석의진이 이러한 공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독자적인 전투를 수행하면서도 을미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인근의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수많은 전공을 올릴 수 있었다. 특히 신돌석의진과 연합하여 활약한 의병진 가운데 이 지역에서 뚜렸한 의병활동의 발자취를 남긴 부대는 영천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에 의하여 창의된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신돌석 의병장이 창의하여 순국할 때까지의 발자취를 살펴보면, 신돌석 의병장은 병신창의군이 해산된 이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는 1905년까지 전국을 유람하면서 은인자중하다가 1906년 3월에 이르러 부친 석주(錫柱)공과 의논하여 가산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평소에 사귀어 둔 원근 각지의 열렬의사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의병진을 구성하고는, 의병진의 진명(陣名)을 영해진이라 하였다. 의병진의 체제가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다시 의병진을 영릉(寧陵)의병진이라 개칭하였는데, 영릉이란 영해와 강릉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곧 동해안 일대에 왜적을 한명이라도 발붙이게 할 수 없다는 신돌석 의병장의 강력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사실을 말해 준다.
  3월에 의진을 결성한 신돌석 의병장은 의병들을 조련하는 한편, 영덕·영해·울진·영양·진보·청송과 강원도의 삼척·강릉·원주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며 일본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11월에 들어서는 영양의 일월산, 지품의 대둔산, 포항과의 경계인 동대산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군들을 쳐부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군들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신출귀몰한 신의병장의 전술에 놀라 비호장군이라 부르며 굉장히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지략과 용맹을 겸비한 장군으로 전국에 그 명성을 떨치자 1907년 음력 11월에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의 의병장들이 모여 〈13도의병창의대진소〉를 결성할 때 「교남창의대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영덕을 중심으로 동해안 일대를 오르내리며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항왜의 기치를 드높인 신돌석 의병장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날 이 지역에서 전설이 되어 구전되는 것은 많으나 기록이 되어 전해지는 것은 거의가 산일(散逸)되어 안타깝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은 일본측의 사료가 주종을 이루고 있어 일본측 시각에서 기술한 내용이 많아 신돌석 의병장을 비하(卑下)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들을 자료로 선택할 때에는 신중히 접근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료들은 신의병장이 일본군과 접전한 사실을 기록으로 전하고 있는 것으로 신의병장의 활약상을 알아보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신돌석장군 영정 및 기념관내 전시물
다음은 일본측의 신돌석 의병장 관련 기록이다.

1906년 24월 20일 - 신돌석이 영해에서 창의하여 영덕·영해·영양 및 강원도 평해·울진·삼척 등 각지에서 출몰하였다.
1907년 28월 20일 - 약 300여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영양을 공격하여 분파소를 포위 습격하여 1명이 부상당했으며, 분파소와 군청을 불태웠다.
1907년 29월 15일 - 영양 동북 2리 지점에서 신돌석이 이끄는 약 150여명의 부대를 공격하였다. 신돌석 부대는 12구의 시신을 버리고 영덕 가도로 궤주하였다.
1907년 10월 12일 - 약 150여명이 영해를 공격하여 와 2시간 동안 교전하였다.
1907년 10월 12일 - (1907년 11월에 들어와 이강년, 신돌석 등이 이끄는 무리들이 일월산 부근에서 예천에 이르기까지 약탈 횡포가 극에 달하였다.)
1907년 11월 11일 - 이강년이 거느린 약 300여명, 신돌석이 이끄는 약 200명이 영월 방면에서 함께 순흥읍을 공격하여 전읍(全邑)이 불탔다. (1908년, 본년에 들어와서 신돌석 출현, 토벌작전으로 신돌석은 영해방면으로 퇴각하였다.)
1908년 27월 19일 - 영해에서 폭도 약 60여명 중 3명을 사살하였다.
1908년 27월 24일 - 신돌석이 약 50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영해 북이면(현 병곡면)을 습격하였다.

 위의 기록은 일본측의 「고등경찰요사」 및 「폭도사편집자료」에서 발췌한 것으로 위의 기록만 보더라도 불과 33개월여의 의병활동이지만 신돌석 의병장의 활동이 얼마나 치열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맹렬히 의병활동을 하던 신돌석 의병장은 1908년 후반기에 들어와서 점차로 강화되어 가는 일본군의 토벌작전과 다가오는 엄동설한을 대비하고자 하여 부대원들을 각기 집으로 보내어 겨울을 무사히 넘기도록 하였다. 부대원들을 해산시켜 각자의 집으로 귀환시킨 후 신의병장은 몇몇 측근들과 비밀리에 의병활동을 하던 중 지품면 눌곡리 두집매(집 두채가 있었다고 하여 붙은 이름임)에서 예전의 부하들이었던 김상호, 김상열, 김상태 삼형제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신돌석 의병장 피살 당시의 보고서에는 김상호, 김상열, 김상태란 이름 대신에 김도룡(金道龍), 김도윤(金道潤)이란 이름으로 나오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후자가 본명일 가능성이 높다.

  이때가 1908년 12월 12일(음력 11월 19일) 신돌석 의병장의 나이가 31살이 되던 해이다. 신의병장은 왜적의 침탈로 국운이 기울어 가는 시대에 우리 지역에서 거병하여 전국적인 항일 의병활동에 대단한 영향을 미친 의병장으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분투한 한말 의병을 대표하는 분이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 1962년 2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하여 신돌석 의병장의 숭고한 항일 구국정신을 기리고자 하였으며, 1971년에는 장군의 묘를 국립묘지에 이장(移葬)하여 후세의 귀감(龜鑑)이 되게 하고자 하였다.

2) 산남의진(山南義陣)과 영덕의 의병

  영해·영덕지역을 발판으로 창의한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이 수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며, 여러 번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의병진의 독자적인 활동에서 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여러 의병진들과의 합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도 정환직(鄭煥直)·정용기(鄭鏞基) 부자의 산남의진과의 연합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한말 고종황제의 측근으로 관직생활을 하던 정환직은 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의 밀서를 받고 고향에 내려와서 아들 정용기와 함께 1,000여명의 의병을 모아 1906년 3월에 영천을 근거지로 산남의진을 창의(倡義)하였다.
  이렇게 창의된 산남의진은 영천지역 뿐만 아니라 경북 각지에 연락책을 두었는데, 이는 각처에서 의병들을 쉽게 모을 수 있을 뿐더러, 각 지역에 분산되어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의병진과의 교류와 연락을 원활하게 할 수 있게 되어 의병활동의 효율성을 꾀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영덕·영해지역에도 연락책을 두었는데, 이 지역의 연락책으로는 을미의병 때 영덕에서 활동한 구한서(具漢書)·김태언(金泰彦)이 바로 이들이다.
  산남의진은 영천·경주· 포항·흥해·청하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영덕의 신돌석 의병진과도 연합체제를 갖추어 동해안 일대에서 맹활약을 하였는데, 산남의진과 영해의 영릉의병진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기 산남의진의 대장은 정용기였는데, 정용기 대장은 먼저 정순기(鄭純基)를 영해에서 의병활동을 하고 있는 신돌석(泰浩) 의병장에게 보내어 공조체제를 도모하였다. 이에 신돌석 의병장도 종사(從事)로 있는 김종필(金宗弼)을 산남의진으로 보내어 일본군을 축출하기 위하여 서로 협력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정용기가 1906년 4월에 경주진위대 참령(參領) 신석호의 위계(僞計)에 의해 체포된 후에도 계속되었다. 즉 정용기가 체포된 후 산남의진의 중군장(中軍將)인 이한구(李韓久)가 의병들을 인솔하여 영덕에까지 와서 영해의 신돌석 의병진과 합군(合軍)하여 달산의 주방산으로 이동하는 한편, 우익장(右翼將)인 정래의(鄭來儀)를 신돌석 의병장에게 보내어 정용기가 경주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경우 경주를 습격하기로 약정하고 이를 준비하는 것을 보아도 이들 양 진영의 공조체제는 계속적으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영덕으로 산남의진을 이끌고 온 중군장 이한구는 이해 윤4월 10일 한밤에 강구를 습격하여 수명의 일본인을 죽이고 상옥·청송 등지로 일시 퇴각하였다가 다시 달산의 산성리(현 봉산리)에서 이들을 추적하여 온 일본군을 물리치고 주방(현 주응리)에 들어와서 유진(留陣)을 하였다.
  5월에는 다시 산남의진 본대가 달산의 상마산(上馬山, 현 옥산리)을 거처 주방에 도착하여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는데, 신돌석 의병장은 신태종(申泰宗)과 김종필을 이곳으로 보내어 연합의진에 대하여 의논하였다.
  그러나 이해 9월에 정용기 대장이 석방되자 이러한 논의는 일단 잠복하게 되었으며, 산남의진은 정용기가 다시 대장을 맡은 후 항일투쟁에 적극성을 다시 띄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석방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용기 대장은 일본군의 전초병을 본대로 오인하여 공격하다 적의 복병에 걸려 고전을 하고 있던 좌포장(左砲將) 이세기(李世紀)를 구하려다 마침내 적의 대부대와 격돌하게 된 죽장면 입암리 전투에서 이한구·손영각·권규섭 등과 전사하게 되는데, 이때가 1907년 9월 1일이었다.
  정용기 대장이 입암 전투에서 전몰하자 정대장의 부친인 정환직이 제2대 산남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새로이 대장에 추대된 정환직 의병장은 전열을 정비하여 의병진을 2개의 부대로 나누어 1부대는 포항시 죽장면 쪽으로 1부대는 정환직 대장이 직접 지휘하여 청하에서 남정면 쟁암리의 동대산을 1차 목표지로 하여 북상하기로 결정하고 정환직 대장은 산남의진의 해안쪽 1대(隊)를 움직여 영덕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도 영덕의진과 인연이 있는 구한서 등을 영덕에 보내어 새로운 의병들을 모으는 한편, 영덕의 의병진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1차 목표지인 동대산에 도착한 정환직 의병장은 이해 10월 20일에 동대산의 동쪽 사면(斜面)으로 하산하여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남정면 쟁암리에서 부대를 정리하여 출발하였다. 이때 이들 의진의 동향을 감시하던 일본군 척후병 1명과 순검 1인을 포획 사살하여 산남의진의 사기를 높인 후, 도천을 거쳐 오늘날 남정면 사암(士岩) 1,2리인 붉은바우(赤岩)와 따스내를 거쳐 달산면 옥산리 부근에서 죽장방면으로 북상한 부대인 내륙쪽 2대(隊)와 합친 후, 29일에 일본군 척후병 1명을 사살하고 다시 동대산 기슭인 남정면 사암(“산남창의지”에 유암(酉巖)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암 혹은 적암의 오기임)에 머무르고 11월 3일에는 영덕읍에 들어와 일본군 4명을 사살하고 일본학교를 파괴하는 등 계속적으로 영덕지역에 머무르며, 신돌석의진과 연합하여 일본군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렇게 이 지역에서 맹활약을 하던 정환직 의병장의 산남의진은 부족한 무기와 탄약,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할 여력이 없음을 알고 의병진을 일단 소수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벌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도 여의치 못하자 이듬해 봄에 강릉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후, 의병부대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는 자신은 영덕군 병곡면 각리에서 은신하고 있다가 1907년 11월 7일 일본군에 체포되어 영덕·청하·포항·경주를 거쳐 11월 16일 영천에서 순국하게 된다.
  산남의진의 2대(代) 대장인 정환직 대장이 영덕에서 체포되어 영천에서 순국함에 따라 영덕지역의 의병활동은 소강상태로 들어갔으며, 영덕지역의 대표적 의진인 영릉의진의 신돌석 의병장도 정환직 대장이 체포되는 1907년 11월 7일에 이어 다음해인 1908년 11월 18일에 지품면 눌곡리에서 살해되는 정황을 보아서 이 당시 일본군의 압박이 얼마나 격렬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으며, 정대장의 체포에 따른 신돌석 의병장의 정신적 충격도 컸으리라 생각된다.
  2대 정환직 대장의 순국에 따라 제3대 산남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된 이는 흥해 출신의 최세윤 대장이었다. 최세윤 의병장을 3대 대장으로 옹립한 산남의진은 이후에도 신돌석의진과의 인연이 있는 정래의(鄭來儀)와 구한서 등을 산남의진의 참모장과 청하·죽장·기계 방면의 유격장으로 임명하여 계속적으로 이 지역의 신돌석의진과 상호공조하면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이와 같은 영해의 영릉의병진의 신돌석 의병장은 산남의진과의 상호공조 혹은 연합으로 1908년 말에 이르기까지 영덕·영양 등지에서 맹렬한 의병활동을 하면서 영덕과 동해안 일대에서 후기 의병활동의 전성기를 이룬다. 즉 신돌석 의병장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창의하여 영양, 울진 등지에서 활약한 1906년부터 1908년에 이르는 기간이 경북 동해안 일대에 있어서 후기 의병활동의 최정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신돌석 의병장이 불의에 피살된 후에는 신돌석의진에 참여한 의병들의 대부분은 산곡간에 은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거나, 해외로 탈출하여 새로운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흩어지게 되어, 이 지역의 의병활동도 거의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며, 1908년 12월 이후의 지역에서의 의병활동은 1909년 12월 23일 영해서방 50리에서 의병 14명이 공격하여 와 그 중 2명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과 1910년 11월 14일 영해 서북 약 40리에서 의병 약 20명이 공격하여 와 그중 7명이 부상하였다는 기록만이 있을 정도로 거의 소멸상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표〈2­8〉은 광복 이후에 발간된 「신돌석장군실기」에 실린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 명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