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에 유배 온 인물
유배란 죄인을 먼 곳으로 송치하여 귀양살이를 시키는 형별인데 오형(五刑)의 하나이다. 유형이라고도 하며 중한 죄를 범하였을 때 차마 사형(死刑)에는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그 죄값을 치르게 하는 형벌(刑罰)이다. 이 혼(李쫛混) :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관제개혁으로 실직당한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받아오던 중, 숙비(淑妃)의 미움을 받아 유배 겸 영해방어사(목사)로 와서 무고(舞鼓)를 만들어 중앙에 전했다. 윤신걸(尹莘傑, 1266∼1337) : 고려 충선왕과 충숙왕대의 인물로 충선왕과 충숙왕의 갈등으로 영해에 귀양왔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기성군(杞城君)에 봉해졌다. 신 현(申쫛賢) :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였다가 영해로 귀양왔다. 금자광록대부, 영해군(寧海君)으로 봉해졌다. 권 근(權쫛近,1352∼1409) : 고려말과 조선초의 학자, 정치가.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영해에 귀양왔다. 이때 영덕현의 “객사기문”과 영해부의 “서루기”, “사재소감박강전”을 지었다. 변중량(卞仲良,?∼1398)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밀양, 호는 춘당(春堂).태조 4년(1395)에 전중경에 있을 때, 정도전, 남은, 조준 등에게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이 집중되는데 대하여 탄핵하다가 영해로 귀양왔다. 이 빈(李쫛彬,?∼1410)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우왕 14년(1388)에 동북면부원수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태조 4년(1395)에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축성제조(築城提調)에 임명되어 공사감독의 소홀로 영해에 유배되었다. 장 익(張쫛翼) : 의관(醫官)으로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급하게 불렀는데, 입궐하지 않은 죄로 태조 6년(1397)에 영해로 귀양왔다. 양홍달(楊弘達) : 위의 장익과 같은 죄로 동년에 축산에 귀양왔다. 정신의(鄭臣義)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태조 6년(1397)에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도전 일파로 몰려 영해진(寧海鎭)에 유배되었다. 정 탁(鄭쫛擢, 1363∼1423)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자는 여괴(汝魁), 호는 춘곡(春谷). 태종 3년(1403)에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태종 5년(1405)에 살인죄에 연루되어 영해로 귀양왔다. 장 이(張쫛弛) : 전의감(典醫監)으로 민무질, 민무구사건에 연루되어 태종 8년(1410)에 영해로 귀양왔다. 김 섭(金쫛涉) : 태종 8년(1410)에 참위설을 유포한 죄로 곤장 1백대를 맞은 후 영해로 귀양왔다. 안노생(安魯生)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호는 춘곡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충청도관찰사 재직 때에 실농(失農)한 내역을 허위보고한 죄로 태종 9년(1409)에 영해에 유배당하였다. 영해에 와서 영해 부근의 명승절경을 읊은 12영(詠)이 유명하다. 강사덕(姜思德, ?∼1410) : 태종 10년 동북면 도순문사로 재직시 윤목(尹穆), 이빈(李彬), 조희민(趙希閔)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태종 9년(1409)에 영해로 귀양왔으나, 이듬해 영해에서 사사되었다. 이 목(李쫛牧) : 역모와 관련된 이빈의 백숙부(伯叔父)로 태종 10년(1410)에 영해로 귀양왔다. 박인간(朴仁幹) : 회안군 이방간(李芳幹)의 난과 관련하여 왕명을 사칭한 죄로 태종 11년(1411)에 영해로 귀양왔다. 곽승우(곽승우, ?∼1431) :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충주. 태종 10년(1410)에 경원부 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야인과 싸움에 패한 문책으로 태종 11년(1411)에 영해에 귀양왔다. 강상신(姜尙信) : 태종과 세종 사이의 태종의 병권친장책(兵權親掌策)에 저촉되어 처단된 강상인(姜尙仁)의 동생으로 세종 1년(1419)에 영해로 귀양왔다. 강장생(姜長生) : 위의 사건에 연루된 강상인의 아들로 세종 1년(1419)에 영덕으로 귀양왔다. 이안우(李安愚) : 왜관(倭館)의 금법과 임금의 명령을 허위 조작한 죄로 세종 2년(1420)에 호조판서로 귀양왔다. 한문직(韓文直) : 환관으로 궁실의 주방을 맡고 있다가 수박(西瓜)를 도둑질해 쓴 까닭에 세종 5년(1423)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영해에 귀양왔다. 김처선(金處善, ?∼1505) : 문종(1451∼1452)때에 영해로 귀양와서 단종 1년(1452)에 귀양이 풀렸으며, 단종 3년(1455)의 세조의 왕위찬탈에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어 관노가 되었다. 김 희(金쫛喜), 성우상, 정분: 안평대군의 당류로 몰려 단종 2년(1453)에 영해로 귀양왔다. 육신(六臣)이 죽임을 당할 때, 김희는 같이 사사(賜死)되었다. 유 한, 오율산: 세조 5년(1459)에 유한은 영해에, 오율산은 영덕에 귀양왔다. 홍 강(洪쫛剛) : 세조 12년(1466)에 영덕으로 귀양왔다. 이 성(李쫛筬) : 세조 12년(1466)에 영해에 귀양왔다. 배효사(裵孝思) : 세조 12년(1466)에 영해로 귀양와서 세조 13년(1477)에 석방되어 갔다. 이 준(李쫛浚,1441∼1479) :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2남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등의 공훈이 있었으나,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다는 정인지 등의 모함을 받아 성종 1년(1470)에 영해에 귀양와서 10년만에 영해에서 죽었다. 손 주(孫쫛澍, ?∼1539)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림(汝霖), 본관은 평해이고 부는 경상감사로 창수면 서읍령에 와서 방(榜)을 남긴 손순효(孫舜孝)이다.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영해에 귀양왔다. 정 렴(鄭쫛, 1505∼1549) : 본관은 온양,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으로 천문, 지리, 복서에 밝았으며, 특히 의술에 능하였다. 명종 1년(1545)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영덕에 귀양왔다. 이명준(李命俊, 1572∼1630) : 본관은 전의,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로 형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광해군 5년(1613)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영덕에 귀양왔다. 진 희(秦쫛喜(善)) : 본관은 충주. 광해군대에 전라병사로 재직시 사건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왔으며, 이로써 자손이 영해에 살게 되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 : 호는 하담(荷潭)이고,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이름. 광해군 4년(1612)에 전라도사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하면서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내었다 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영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되었다. 영해 귀양시에 「자해만필(紫海漫筆)」을 썼다. 서 성(徐쫛, 1558∼1631)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약봉(藥峯)으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광해군 5년(1613)의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를 왔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관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고용후(高用厚, 1577∼?)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흥, 호는 청사(晴沙). 부는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이다. 인조 9년(1631)의 명나라에 가는 동지사를 잘못 수행한 죄로 영덕에 귀양왔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남이고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이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죄로 인조 16년(1638) 3월에 귀양을 받아 6월에 영덕에 도착하여 이듬해 2월에 방면될 때까지 약 8개월간 영덕에 있으면서 20여 수의 시와 부를 남겼다. 이해창(李海昌, 1599∼1651)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계하(季夏)이고, 호는 송파(松坡)이고, 관이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인조 16년(1638)에 주전파의 우두머리인 김상헌을 신구(伸救)하다가 영덕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김종일(金宗一, 1597∼167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관지(貫之), 호는 노암(魯庵)으로 관은 울산부사를 지냈다. 인조 15년91637)에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수행하여, 매국노 정명수(鄭命壽)와 김돌(金突)을 제거할 계획이 탄로나 본국으로 소환된 뒤 영덕에 유배를 당하였다. 정태제(鄭泰齊, 161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자는 동망(東望), 호는 국당(菊堂)으로 관은 울산부사에 이르렀다. 인조 23년(1645)에 밀양부사로 재임시 임담과 유탁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영해로 귀양왔다. 신 상(申쫛, 1598∼166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자는 효은(孝恩)이고, 호는 은휴와(恩休窩)이며,관은 종성부사에 이르렀다. 효종 3년(1652)에 뇌물수수죄에 연루되어 영덕으로 귀양왔다. 이 상(李쫛翔, 1620∼169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 자는 운거(雲擧).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 허적을 탄핵하다가 숙종 1년(1675)에 영해로 귀양왔다. 권 해(權쫛楷,1639∼170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으로 관은 형조참의,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숙종 5년(1679)에 판중추부사 허목(許穆)과 영의정 허적(許積)과의 알력에 허목의 당으로 몰려 영해에 귀양왔다. 정 일(鄭쫛鎰) : 허적, 윤후 등을 제거하려는 경신대출척(1680)에 연루되어 숙종 6년(1680)에 영덕에 귀양왔다. 이이명(李命, 1658∼172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지인(智仁), 호는 소재(疎齋)이며,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을 당하여 영해에 유배되었다. 이현령(李玄齡) : 숙종 15년(1689)에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의 소두(疏頭)가 되어 율곡 이이와 성혼을 비방한 죄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이한응(李漢膺, 1711∼?)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 자는 사준(士俊)으로 이순신장군의 증손이다. 관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영조 28년(1752)에 선전관이 되어 영조에게 직언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영해에 귀양왔다. 김준탁(金俊鐸) : 자는 원문(遠聞), 호는 서포(西浦)로 관은 부호군에 이르렀으며, 영조대에 영남유생들의 상소에 연루되어 영덕에 귀양왔다. 정이환(鄭履煥) : 영조 40년(1764)에 필선으로 있으면서 역마를 잘못 탄 죄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권명규(權命奎) : 철종 13년(1862)에 영해로 귀양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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