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덕에 유배 온 인물

  유배란 죄인을 먼 곳으로 송치하여 귀양살이를 시키는 형별인데 오형(五刑)의 하나이다. 유형이라고도 하며 중한 죄를 범하였을 때 차마 사형(死刑)에는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그 죄값을 치르게 하는 형벌(刑罰)이다.
  귀양, 정배(定配), 부처(付處), 안치(安置), 정속(定屬), 충군(充軍), 천사(遷徙), 사변(徙邊), 병예(屛裔), 투비(投), 원무(遠武), 혹은 배(配), 적(謫), 방(放), 찬(竄), 사(徙) 등으로 표현되는 이러한 형벌은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도 형벌제도의 하나로 시행되어 왔다.
  영덕과 영해는 고려시대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는 상당히 먼 곳에 위치한 연유로 조정에서 죄인을 유배 보낼 유배지의 대상으로 항상 수위(首位)에 위치하였다. 조선 태종13년 1월에 있었던, 유형(流刑)살이 대신에 돈(銅錢)으로 대속(代贖) 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만들 때에, 그 간에 사용하던 대명률(大明律)의 이수(里數)가 우리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면서 이수(里數)를 우리나라 실정에 맞추어 고치면서 이수(里數)에 따라 동전의 액수를 부과하였는데, 영덕과 영해는 그 액수면에서 전국에서 2, 3 등을 다툴 정도의 먼 곳으로 나온다.
  이러한 연유로 고려말기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많은 분들이 유배의 형벌을 받아서 이 지역으로 유배살이를 왔다. 이 지역으로 유배 온 분들의 숫자는 「영영승람(盈寧勝覽)」, 각종의 기발간된 「영덕군지」와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살펴보면 대략 50여명 정도이다.
  현대에 와서는 죄(罪)에 대한 교정의 수단이 과거와는 달라서 이러한 일은 없지만 불과 백여 년 전까지는 이러한 유형, 유배의 제도가 있었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이 지역으로 유배 온 이들의 자취는 현재 아무 곳에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몇몇 문적에 약간의 기록으로 남아 있어 겨우 이 분들의 흔적만 더듬어 볼 뿐이어서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 고려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영덕에 유배 온 인사들의 기록이다.

이   혼(李쫛混) :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관제개혁으로 실직당한 사람으로부터 원망을 받아오던 중, 숙비(淑妃)의 미움을 받아 유배 겸 영해방어사(목사)로 와서 무고(舞鼓)를 만들어 중앙에 전했다.

윤신걸(尹莘傑, 1266∼1337) : 고려 충선왕과 충숙왕대의 인물로 충선왕과 충숙왕의 갈등으로 영해에 귀양왔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기성군(杞城君)에 봉해졌다.

신   현(申쫛賢) : 고려 공민왕 때 신돈의 전횡을 비판하였다가 영해로 귀양왔다. 금자광록대부, 영해군(寧海君)으로 봉해졌다.

권   근(權쫛近,1352∼1409) : 고려말과 조선초의 학자, 정치가. 명나라 예부자문(禮部咨文)을 도당(都堂)에 올리기 전에 중도에 몰래 뜯어본 죄로 영해에 귀양왔다. 이때 영덕현의 “객사기문”과 영해부의 “서루기”, “사재소감박강전”을 지었다.

변중량(卞仲良,?∼1398)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밀양, 호는 춘당(春堂).태조 4년(1395)에 전중경에 있을 때, 정도전, 남은, 조준 등에게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이 집중되는데 대하여 탄핵하다가 영해로 귀양왔다.

이   빈(李쫛彬,?∼1410)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우왕 14년(1388)에 동북면부원수로 위화도 회군에 참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태조 4년(1395)에 판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축성제조(築城提調)에 임명되어 공사감독의 소홀로 영해에 유배되었다.

장   익(張쫛翼) : 의관(醫官)으로 태조가 몸이 불편하여 급하게 불렀는데, 입궐하지 않은 죄로 태조 6년(1397)에 영해로 귀양왔다.

양홍달(楊弘達) : 위의 장익과 같은 죄로 동년에 축산에 귀양왔다.

정신의(鄭臣義)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태조 6년(1397)에 지중추원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정도전 일파로 몰려 영해진(寧海鎭)에 유배되었다.

정   탁(鄭쫛擢, 1363∼1423)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자는 여괴(汝魁), 호는 춘곡(春谷). 태종 3년(1403)에 판한성부사가 되었으며, 태종 5년(1405)에 살인죄에 연루되어 영해로 귀양왔다.

장   이(張쫛弛) : 전의감(典醫監)으로 민무질, 민무구사건에 연루되어 태종 8년(1410)에 영해로 귀양왔다.

김   섭(金쫛涉) : 태종 8년(1410)에 참위설을 유포한 죄로 곤장 1백대를 맞은 후 영해로 귀양왔다.

안노생(安魯生) : 고려말과 조선초의 무신. 호는 춘곡이며 본관은 죽산이다. 충청도관찰사 재직 때에 실농(失農)한 내역을 허위보고한 죄로 태종 9년(1409)에 영해에 유배당하였다. 영해에 와서 영해 부근의 명승절경을 읊은 12영(詠)이 유명하다.

강사덕(姜思德, ?∼1410) : 태종 10년 동북면 도순문사로 재직시 윤목(尹穆), 이빈(李彬), 조희민(趙希閔)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태종 9년(1409)에 영해로 귀양왔으나, 이듬해 영해에서 사사되었다.

이   목(李쫛牧) : 역모와 관련된 이빈의 백숙부(伯叔父)로 태종 10년(1410)에 영해로 귀양왔다.

박인간(朴仁幹) : 회안군 이방간(李芳幹)의 난과 관련하여 왕명을 사칭한 죄로 태종 11년(1411)에 영해로 귀양왔다.

곽승우(곽승우, ?∼1431) :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충주. 태종 10년(1410)에 경원부 병마절도사가 되었을 때 야인과 싸움에 패한 문책으로 태종 11년(1411)에 영해에 귀양왔다.

강상신(姜尙信) : 태종과 세종 사이의 태종의 병권친장책(兵權親掌策)에 저촉되어 처단된 강상인(姜尙仁)의 동생으로 세종 1년(1419)에 영해로 귀양왔다.

강장생(姜長生) : 위의 사건에 연루된 강상인의 아들로 세종 1년(1419)에 영덕으로 귀양왔다.

이안우(李安愚) : 왜관(倭館)의 금법과 임금의 명령을 허위 조작한 죄로 세종 2년(1420)에 호조판서로 귀양왔다.

한문직(韓文直) : 환관으로 궁실의 주방을 맡고 있다가 수박(西瓜)를 도둑질해 쓴 까닭에 세종 5년(1423)에 곤장 1백대를 맞고 영해에 귀양왔다.

김처선(金處善, ?∼1505) : 문종(1451∼1452)때에 영해로 귀양와서 단종 1년(1452)에 귀양이 풀렸으며, 단종 3년(1455)의 세조의 왕위찬탈에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어 관노가 되었다.

김   희(金쫛喜), 성우상, 정분: 안평대군의 당류로 몰려 단종 2년(1453)에 영해로 귀양왔다. 육신(六臣)이 죽임을 당할 때, 김희는 같이 사사(賜死)되었다.

유   한, 오율산: 세조 5년(1459)에 유한은 영해에, 오율산은 영덕에 귀양왔다.

홍   강(洪쫛剛) : 세조 12년(1466)에 영덕으로 귀양왔다.

이   성(李쫛筬) : 세조 12년(1466)에 영해에 귀양왔다.

배효사(裵孝思) : 세조 12년(1466)에 영해로 귀양와서 세조 13년(1477)에 석방되어 갔다.

이   준(李쫛浚,1441∼1479) :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의 2남으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등의 공훈이 있었으나,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한다는 정인지 등의 모함을 받아 성종 1년(1470)에 영해에 귀양와서 10년만에 영해에서 죽었다.

손   주(孫쫛澍, ?∼1539)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여림(汝霖), 본관은 평해이고 부는 경상감사로 창수면 서읍령에 와서 방(榜)을 남긴 손순효(孫舜孝)이다. 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영해에 귀양왔다.

정   렴(鄭쫛, 1505∼1549) : 본관은 온양, 자는 사결(士潔), 호는 북창(北窓)으로 천문, 지리, 복서에 밝았으며, 특히 의술에 능하였다. 명종 1년(1545)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영덕에 귀양왔다.

이명준(李命俊, 1572∼1630) : 본관은 전의, 자는 창기(昌期), 호는 잠와(潛窩)로 형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광해군 5년(1613)의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영덕에 귀양왔다.

진   희(秦쫛喜(善)) : 본관은 충주. 광해군대에 전라병사로 재직시 사건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왔으며, 이로써 자손이 영해에 살게 되었다.

김시양(金時讓, 1581∼1643) : 호는 하담(荷潭)이고, 평안도관찰사 겸 체찰부사에 이름. 광해군 4년(1612)에 전라도사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하면서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내었다 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다가 광해군 10년(1618)에 영해로 귀양지를 옮기게 되었다. 영해 귀양시에 「자해만필(紫海漫筆)」을 썼다.

서   성(徐쫛, 1558∼1631) : 조선 중기의 문신. 호는 약봉(藥峯)으로 율곡 이이의 문인이다. 광해군 5년(1613)의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영해에 유배를 왔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방환되었다. 관이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고용후(高用厚, 1577∼?)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장흥, 호는 청사(晴沙). 부는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이다. 인조 9년(1631)의 명나라에 가는 동지사를 잘못 수행한 죄로 영덕에 귀양왔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남이고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이다. 병자호란 때에 인조 임금을 호종하지 못한 죄로 인조 16년(1638) 3월에 귀양을 받아 6월에 영덕에 도착하여 이듬해 2월에 방면될 때까지 약 8개월간 영덕에 있으면서 20여 수의 시와 부를 남겼다.

이해창(李海昌, 1599∼1651)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한산, 자는 계하(季夏)이고, 호는 송파(松坡)이고, 관이 이조정랑에 이르렀다. 인조 16년(1638)에 주전파의 우두머리인 김상헌을 신구(伸救)하다가 영덕으로 유배를 당하였다.

김종일(金宗一, 1597∼1675)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 자는 관지(貫之), 호는 노암(魯庵)으로 관은 울산부사를 지냈다. 인조 15년91637)에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갈 때 수행하여, 매국노 정명수(鄭命壽)와 김돌(金突)을 제거할 계획이 탄로나 본국으로 소환된 뒤 영덕에 유배를 당하였다.

정태제(鄭泰齊, 161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동래, 자는 동망(東望), 호는 국당(菊堂)으로 관은 울산부사에 이르렀다. 인조 23년(1645)에 밀양부사로 재임시 임담과 유탁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영해로 귀양왔다.

신   상(申쫛, 1598∼166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 자는 효은(孝恩)이고, 호는 은휴와(恩休窩)이며,관은 종성부사에 이르렀다. 효종 3년(1652)에 뇌물수수죄에 연루되어 영덕으로 귀양왔다.

이   상(李쫛翔, 1620∼169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봉, 자는 운거(雲擧). 현종 말년의 예송(禮訟)에서 남인 허적을 탄핵하다가 숙종 1년(1675)에 영해로 귀양왔다.

권   해(權쫛楷,1639∼170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개옥(皆玉), 호는 남곡(南谷)으로 관은 형조참의, 호조참의에 이르렀다. 숙종 5년(1679)에 판중추부사 허목(許穆)과 영의정 허적(許積)과의 알력에 허목의 당으로 몰려 영해에 귀양왔다.

정   일(鄭쫛鎰) : 허적, 윤후 등을 제거하려는 경신대출척(1680)에 연루되어 숙종 6년(1680)에 영덕에 귀양왔다.

이이명(李命, 1658∼1722)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지인(智仁), 호는 소재(疎齋)이며,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을 당하여 영해에 유배되었다.

이현령(李玄齡) : 숙종 15년(1689)에 성균관과 사학(四學) 유생의 소두(疏頭)가 되어 율곡 이이와 성혼을 비방한 죄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이한응(李漢膺, 1711∼?) :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덕수, 자는 사준(士俊)으로 이순신장군의 증손이다. 관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어영대장에 이르렀다. 영조 28년(1752)에 선전관이 되어 영조에게 직언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영해에 귀양왔다.

김준탁(金俊鐸) : 자는 원문(遠聞), 호는 서포(西浦)로 관은 부호군에 이르렀으며, 영조대에 영남유생들의 상소에 연루되어 영덕에 귀양왔다.

정이환(鄭履煥) : 영조 40년(1764)에 필선으로 있으면서 역마를 잘못 탄 죄로 영덕에 유배되었다.

권명규(權命奎) : 철종 13년(1862)에 영해로 귀양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