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절 창수면(蒼水面)

▒ 인량리(仁良里)

  인량리 동명의 유래는 예부터 명현(名賢)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어진 분이 많이 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뒷산의 지형이 학(鶴)이 날아갈 듯한 형국과 같다 하여 나래골, 또는 익동(翼洞), 비개동(飛蓋洞)이라 하다가 음이 변하여 나라골, 한자로 국동(國洞)이라고도 했다는 설이 있으며, 일설에는 삼한(三韓)시대에 우시국(于尸國)이라는 부족국가(部族國家)의 도읍지에서 나라골 즉, 국동이라는 설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서면(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상동(仁上洞), 인하동(仁下洞)을 병합하여 인량동으로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인량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인량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인량리의 위치는 동은 병곡면 사천리, 서는 가산리와 신기리, 남은 들을 지나 멀리 영해면 원구리와 마주하며, 북은 칠보산이 있다.

 

 
강학소(講學所) :
인량리 동쪽에 있는 마을임.
 
사당골(舍堂谷) :
웃나라골 서북쪽에 있는 마을임.
 
세원모치(新院) :
강학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신원이란 원집이 있었음.
 
아랫나라골(아릿마) :
나라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 가산리(佳山里)

  가산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의 산세(山勢)가 아름다운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산1리는 원래 가사리(佳士里) 또는 단산(丹山)이라 불렀으며 어느 시대인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인사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뒤 함양박씨(咸陽朴氏)와 영양남씨(英陽南氏)가 들어와 세거(世居)하고 있으며, 가산2리인 우렁리(愚峴, 愚仰里) 마을은 안동권씨(安東權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영해군(寧海郡) 서면(西面) 지역으로서 가사리 또는 가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總督府令) 제98호로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우앙현과 우상동(愚上洞) 일부를 병합하여 가산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어 왔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에 의해 종전의 동(洞)이 리(里)로 개칭될 때 가산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가산1,2리로 분동되어 있다.
  가산리의 위치는 동은 인량리, 남서는 신기리, 북은 미곡리, 칠보산의 한지맥으로 큰한티(大峴) 작은한티(小峴)가 솟아 있다.

 

 
구미(龜尾) :
가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이 거북이 꼬리와 같다 함.
 
동짝모태 :
가산 동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임.
 
두들마(두들모치) :
구미 서북쪽 두둘(둔덕)에 있는 마을임.
 
서원마 :
가산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단산서원(丹山書院)이 있었음.
 
서짝모태 :
가산리 서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임.
 
우렁티(雨仰峴, 雨峴) :
큰 한티와 작은 한티에 둘러쌓여 있는 마을임.
 
점못(점촌) :
가산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음.

 

▒ 신기리(新基里)

  신기리 동명의 유래는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 새술막 또는 신기라 하였다.
  본래는 영해군(寧海郡) 서면(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우정동(雨井洞)을 병합하여 신기동이라 해서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신기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신기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신기리의 위치는 동은 인량리, 서는 신리, 남은 영해면 묘곡리, 북은 가산리와 이웃하고 있다.

 
 
가나무지(柯木亭) :
새터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가죽나무가 많았다 함.
 
반송정(盤松亭) :
새술막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반송나무가 있는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고려말 나옹대사(懶翁大師)가 출가(出家) 할 때 지팡이를 꽂은 것이라고 한다.
 
배나리(舟津) :
반송정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바닷물이 거슬러 올라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함.
 
우장골(위장골, 雨井洞, 葦長谷) :
새술막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위정사 (葦井寺)가 있었다 함.
 
중간마 :
신기 북쪽에 있는 마을임.

 
학교옆 :
새술막 남동쪽에 1936년에 신축된 초등학교가 있는 옆 마을임.
 

▒ 신  리(新  里)

  신리 동명의 유래는 배와 같이 된 지형에 새로이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배실(新梨)이라 했다고 하며, 일설에는 마을에 큰 배나무가 있어 새배실이라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신이(新梨)가 신리(新里)로 변해진 것이라 한다.
  이 마을은 언제 누구에 의해 처음을 개척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약 6백년 정도 되는 느티나무를 신목(神木)으로 받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14∼15세기에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조선시대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서면(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상동(葛上洞, 벼락딤)을 병합하여 신리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신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신리리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신리의 위치는 동은 갈천리, 미곡리, 서는 창수리, 남은 영해면 대리, 북은 갈천리가 있다.

 
 
도리갈면 :
신리와 갈천리에 걸쳐있는 마을임.
 
갱빈모치(강변못) :
갈면 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임.
 
마리배기(馬峴洞) :
배락딤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말처럼 되었음.

 
배락딤(葛上洞) :
갈면 윗쪽에 있는 마을임.
 
새모치 :
새배실 북쪽에 새로된 마을임.

 
선   들 :
선들 옆에 있는 마을임.
 
매배실(碧水) :
신리의 으뜸되는 마을임.
 
아릿모치 :
갈면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모치 :
도리갈면 윗쪽에 있는 마을임.
 
쟁골모치 :
새배실 서쪽에 있는 마을로 재령이씨 재궁(齋室)이 있음.
 
정자모치 :
도리갈면 북쪽에 있는 마을로 무안박씨의 자려(紫廬) 박재만(朴載萬)이 창건한 도천정(道川亭)이 있음.
 

▒ 갈천리(葛川里)

  갈천리 동명의 유래는 갈면(葛面)의 갈(葛)자와 옥천(玉川)의 천(川)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마을은 12세기 말경에 개척되었다고 하며, 그 뒤 19세기 후기인 1879년경에 재령이씨(載寧李氏)의 운서(雲棲) 이현규(李鉉圭)가 마을 주위 산에 칡이 많다 하여 갈면(葛面)이라 했다 하며, 또 18세기초인 1705년 경에는 무안박씨(務安朴氏)의 죽헌(竹軒) 박태주(朴泰胄)가 인량리에서 이곳 운서산(雲棲山) 기슭에 새못(新洞)이라 이름하고 닥나무밭을 일구어 한지를 생산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에는 피난처로 이름있는 곳이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寧海郡) 서면(西面) 지역이었는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갈면동(乫面洞 : 葛面), 옥천동(玉川洞), 일모소(日暮所)를 병합하여 갈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갈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갈천1,2리로 분동되어 있다.
  갈천리의 위치는 동은 미곡리, 서는 창수리, 남은 신리리, 북은 오촌리, 인천리가 있다.

 

 
도리갈면 :
갈면 남쪽 골짜기에 휘돌아 있는 마을임. 1970년대에는 신리리에 딸린 바 있음.
 
전골갈면 :
갈면 서쪽 골짜기에 장륙사(莊陸寺)가 있는 마을임.
 
밀밭마을 :
밀밭재 밑에 있는 마을임.
 
방골(芳谷) :
일모실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새못(新洞) :
진시골 북쪽에 새로된 마을임.

 
옥천(玉川) :
새못 위쪽에 있는 마을임.
 
일모실(日暮室, 日暮所, 日池) :
물래바 이골 서쪽에 있는 마을임.
 
진시골(進水谷) :
갈면 남쪽에 있는 마을임.
 

▒ 창수리(蒼水里)

  창수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창수원(蒼水院)이라는 숙식(宿食)시설이 있어 창수원 또는 창수라 하였다.
  이 마을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개척되어 마을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동제당(洞祭堂)의 전설에는 변씨(卞氏) 터전에 임씨(林氏) 골매기라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변씨가 처음 개척하고 임씨에 의해서 마을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이 마을은 영해부(寧海府)에 딸린 창수부곡(蒼水部曲)이었으나 조선시대 서면(西面)이 되고 또 창수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방가동(芳佳洞), 장구동(場邱洞)을 병합하여 창수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창수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창수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신리, 서는 영양군(英陽郡) 영양읍 양구리, 남은 영해면 대리, 북은 보림리가 있으나 맹동산(萌洞山), 옥녀봉(玉女峰), 작산(爵山) 탕관봉 등이 둘러 있다.

 
 
마당두들(瑪邱洞) :
창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마당처럼 생겼음.
 
방가골(芳佳洞, 방갓골, 방갯골) :
창수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약수(藥水)가 유명함.
 
밤남골(栗南洞, 밤나뭇골, 자라모기) :
창수 남동쪽 자라모기 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이 있음.
 
점두들 :
창수 북쪽에 있는 마을로 토기점(土器店)이 있었음.

 

▒ 미곡리(美谷里)

  미곡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가 아름다운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등운산 밑이 되므로 미실 또는 미곡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이 마을을 옛날 유원서(兪元瑞)란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3세기말에 정씨(鄭氏)라는 분이 와서 정촌(鄭村)이라 하였으며 조선 초기인 14세기 말에 신자악(申自嶽)이라는 분이 마을에 정착했으며, 그 뒤 필선(弼善)의 관직에 있은 후손 신대원(申大元)이라는 분이 양촌(陽村)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미하동(美下洞), 미상동(美上洞) 일부와 서면(西面) 우상동(愚上洞) 일부를 병합하여 미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미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미곡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미곡리의 위치는 동은 병곡면, 서는 갈천리, 남은 가산리, 신리, 북은 오촌리로 칠보산이 있다.

 
 
굼마(굼마치) :
미실 동쪽에 있는 마을임.
 
대봉(大鳳) :
미곡 서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 형국이 봉(鳳)과 같다 함.
 
돌밭(石田) :
미실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음.
 
두들못 :
미실 북서쪽에 둔덕이 있는 마을임.
 
뒤삼(뒷모치) :
미실 북쪽에 있는 마을임.
 
쑤안못 :
미실 북쪽 마을 앞에 숲이 있는 마을임.
 
안마(안마치, 음지마) :
미실 안쪽에 있는 마을임.
 
양지마(陽村) :
미실 서쪽에 있는 마을임.
 
작은 봉정 :
미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오촌리에 있는 봉정 남쪽의 작은 마을임.
 
중간못 :
두들못과 쑤안못 중간에 있는 마을임.
 
장무동 :
미실 서쪽에 있는 마을임.
 
황파동 :
미실 서쪽에 있으며, 옛날 황씨와 파씨가 살았다고 함.

 

▒ 오촌리(梧村里)

  오촌리 동명의 유래는 오동나무가 많았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3세기 고려 후기 원종(元宗) 충렬왕(忠烈王) 연간에 안씨(安氏)가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그 뒤 오씨(吳氏)가 들어와서 오장골이라 했다 하며, 조선 초에는 정씨(鄭氏)가 들어와서 정촌(鄭村)이라 했다 하며, 17세기인 1600년대에 재령이씨(載寧李氏)가 들어와 오촌이라 하고 세거(世居)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정동(鳳亭洞)을 병합하여 오촌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오촌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오촌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오촌리의 위치는 동은 칠보산이 있고, 서는 갈천리와 이웃하고, 남은 미곡리, 북은 삼계리와 칠보산 주봉이 솟아 있다.

 
 
골마(골모태) :
오촌 북쪽에 있는 마을임.
 
닥실(楮谷) :
오촌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날 닥나무가 많았다 함.
 
명서암(冥棲庵) :
오촌 입구에 있는 마을로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의 정자가 있음.
 
뱅골(白岩谷, 巳谷, 뱀골) :
명서암 서쪽에 있는 마을임.
 
봉정(鳳亭) :
오촌 동쪽 등너머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은 봉이 대열매(竹實)를 먹는 형국이라 하며, 15세기경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정촌못(鄭村) :
오촌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정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고 함.
 
최촌(崔村) 못 :
뱅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최씨가 살고 있음.
 

▒ 삼계리(三溪里)

  삼계리 동명의 유래는 세 골짜기의 물이 합해지는 곳이므로 시내골, 이 말이 변하여 시라골, 시락골, 한자로 삼계(三溪)라 하였다.
  삼계1리인 배목(舟項) 마을은 15세기말인 성종(成宗) 연간에 한 인사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 중기인 인조(仁祖) 연간에 영양남씨의 남도명(南道明)이 입주하여 그 후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삼계2리인 시락골은 고려말(高麗末)에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8세기 중기인 영조(英祖) 연간에 함양박씨(咸陽朴氏) 박세옥(朴世玉)이 입주한 뒤 그 후손이 세거하고 있으며, 구렁말(九龍村)은 어느 시대인가 최씨(崔氏)가 개척하여 살았는데, 마을에 큰불이 나서 피해를 입었고 그 뒤 안동권씨가 구룡촌이라 개칭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운계동(雲溪洞) 일부를 병합하여 삼계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삼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삼계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삼계리의 위치는 동은 칠보산, 서는 인천리, 남은 오촌리, 북은 수리가 있다.

 

 
구렁말(九龍, 구롱말) :
삼계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구렁이처럼 생겼다 함.
 
국골(菊谷, 굴곡) :
장바우 남쪽에 있는 마을임.
 
동삿거리 :
구렁말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동사(洞祠)가 있음.
 
배   목 :
국골 남쪽 냇가에 있는 마을로, 배의 형국(行舟形)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며,
또는 등운산의 운(雲)자를 따서 운계라고도 한다.
 

▒ 수 리(水里)

  수리 동명의 유래는 숯을 구웠으므로 숯골, 숙골, 수곡 또는 수동(水洞)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5세기말에 원씨(元氏)와 주씨(朱氏)라는 분이 들어왔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초인 선조(宣祖) 연간에 최씨(崔氏)라는 분이 들어와 숯을 굽고 살았으므로 탄동(炭洞)이라 하였다. 그 뒤 함양박씨(咸陽朴氏)가 입주하여 마을 식수(食水)가 좋지 못하자 식수가 좋을 것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수동(水洞)이라 개칭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희암동(喜庵洞)을 병합하여 수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수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수리의 위치는 동은 삼계리, 서는 백청리, 남은 인천리, 북은 삼승령(三僧嶺)이 솟아 있고 서는 독경산 지맥(支脈)인 군봉(軍峰)이 있다.

 
 
유어동(遊魚洞) :
숙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 용머리(龍頭)와 같은 바위가 있으며, 또 소(沼)가 있어 쌍용이 있었다고 하며, 각종 물고기가 이 소에서 놀았다고 함.
 
자모터(者武基) :
집희암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자모(慈母)가 살았다고 함.
 
집희암(集喜庵, 喜庵, 집함, 지패암) :
문바위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약 4백년전에 마을을 개척할 때 수만근 되는 바위를 들어내니 그 안에 두줄기물이 솟아 올랐다고 하여 젖우물(乳井)이라 했다 함.

 

▒ 인천리(仁川里)

  인천리는 원래 인아리(仁雅里)로 마을 주위의 산과 바위, 마을 앞 냇물이 맑은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말 성종(成宗) 연간에 마을이 개척되어 인아리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으로서 이나리, 이내리 또는 인천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을 기해 일제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일모실(日暮室)의 일부 지역인 한밭(大田)과 골말(寶下洞)을 병합하여 인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인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구역상 인천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인천리의 위치는 동은 삼계리, 서는 보림리, 날은 갈천리, 북은 수리가 있다.

 
 
거릿마 :
한밭 동북쪽에 있는 마을임.
 
신천(新川) :
인천 동쪽에 있는 마을임.
 
안   마 :
인천에서 한밭골로 가는 안쪽에 있는 마을임.
 
양짓마 :
거릿마 양지쪽에 있는 마을임.
 
골말(臥谷, 와우, 寶下) :
인천 서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한밭(大田谷) :
인천 남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이 마을에는 6천평이나 되는 큰 밭이 있음.
 
새점골(釗丁谷, 金店谷) :
양짓마 서쪽에 있는 마을임. 이 골짜기에 옛날 쇠점이 있었다 함.
 
황촌(黃村) :
양짓마 동쪽에 있는 마을임.

 

▒ 보림리(寶林里)

  보림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주위에 수목이 울창하여 좋은 재목이 나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원씨(元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버임이라 했다 하며, 그 뒤 무안박씨(務安朴氏)가 들어와 옷재(烏峴)라 하다가 보림으로 개칭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烏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보중동(寶中洞, 중말)을 병합하여 보림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보림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보림리의 위치는 동은 인천리, 서는 옷재(烏峴) 넘어 영양군, 남은 독경산(讀經山) 맥을 넘어 멀리 인천리, 갈천리가 있으며 북은 백청리가 있다.

 

 
거릿마 :
웃버임 앞길 옆에 있는 마을임.
 
중말(중마, 寶中洞) :
웃버임과 아릿버임 중간에 있는 마을임.
 
아릿버임 :
버임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버임(寶上洞) :
버임 위쪽에 있는 마을임.

 

▒ 백청리(栢靑里)

  백청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잣나무가 많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6세기초인 성종(成宗) 연간에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초인 선조(宣祖) 연간에 수안김씨(遂安金氏)의 진사(進士) 김필경(金必慶)이 입주하여 흘리(屹里)라 했으며, 함창김씨(咸昌金氏)가 입주하여 잣나뭇골이라 했으며, 또 망상골은 밀양박씨(密陽朴氏)의 박경룡(朴景龍)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서리가 오지 않는 곳이라 하여 망상골(望霜谷, 忘霜谷, 忘星洞)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오서면 지역으로 잣나뭇골 또는 백목동(栢木洞)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백청동이라 하고 영덕군 창수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백청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백청리의 위치는 동은 수리, 서는 영양군(英陽郡), 남은 보림리, 북은 울진군(蔚珍郡)으로, 삼승령 등 수봉(秀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망상골 :
잣나뭇골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서리가 오지 않음.
 
큰   골 :
백청리 남쪽 큰 골짜기에 있는 마을임.
 
허릿골(屹里) :
백청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임.

 

  이상으로 본 군내 118개 법정동(法定洞) 중심으로 각 동의 유래와 연혁을 간략하게 기술해 보았다.
  그 마을의 동명(洞名 : 里名)은 그 마을을 상징한다. 즉, 동명에서 우리 선주민(先住民)들의 문화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맥박이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수백년 또는 수천년을 살아오면서 우리 마을을 그 곳의 특성에 따라 알맞게 이름을 붙여 놓았기 때문에 그 마을의 유래와 그에 얽힌 사연들을 더듬을 수 있으며 그 마을이 성립된 시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형이 바뀌고 주민들의 이동이 있어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마을이라도 동명으로서 마을의 내력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그 마을의 동명은 그 마을의 특색을 최대한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전래동명(傳來洞名)은 조그만 씨족(氏族) 마을의 공동체 속에서 생산되어 애칭되기 시작했음을 볼 때, 향토문화(鄕土文化)의 원천(源泉)으로 선주민의 숨결을 찾을 수 있는 수단이 되며 나아가 향토사(鄕土史)를 탐구하는데 있어 초석이 됨을 알 수 있다.
  인명(人名)을 짓는 데 고심하듯이 동명을 짓는 데도 뜻 깊은 이름을 지어 우리 후손들에게 정신적인 유산이 될 수 있게 해야 할 것을 다시 깨닫게 한다.

< 참고 문헌 >

-이재곤(李在崑), 「우리마을」, 「영덕신문」 < 창간호∼128호>
-(1995년 11월 29일 ∼ 1999년 6월 25일), 영덕신문사.
-영덕문화원, 「영덕군향토사(盈德郡鄕土史)」, 1992.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경북편), 1979.
-내무부(內務部), 「지방행정구역요람(地方行政區域要覽)」,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