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의 정치

  인류가 지구상에 존재한 후 가족단위, 혹은 씨족단위의 평등한 사회적 구조에서 지배와 통치의 계급구조인 정치적 사회로 변화된 시기를 대체로 청동기시대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청동기시대로 들어오면서 금속농구(金屬農具)의 사용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살상력(殺傷力)이 높은 금속무구(金屬武具)의 사용으로 부족간의 정복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구석기·신석기시대로 이어지는 원시공동체는 서서히 해체되고 지배와 피지배의 계급이 형성되는 새로운 사회질서가 발생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를 전후하여 농업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하였으며, 정복에 따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발생하면서 종래의 공동체적인 사회에서 자연적으로 복종과 지배라는 정치적인 사회로 사회질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새로운 사회질서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부족 전체를 이끌고 갈 부족 지도자의 역량이 크게 요구되어 졌으며, 부족 구성원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부족장(部族長)은 부족 내에서 영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부족 내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보한 후 부족장들은 그의 영향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가 살아 있을 때만 아니라 그의 사후에도 권한(權限)과 권위(權威)를 후예(後裔)들에게 물려주게 되어 점차 이들 부족장 친족들에 의한 새로운 지배집단의 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지배집단은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목책(木柵)을 세우거나, 토성(土城) 혹은 석성(石城)을 쌓아서 그들의 본거지로 삼는 한편, 농경에 종사하는 인근 수 개의 읍락(邑落)을 정복하거나 귀속시켜 그들의 영역권(領域權)에 두어 다스려 나갔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古朝鮮)·예맥(濊貊)·진국(辰國) 등이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부족국가 혹은 군장국가(君長國家)들로 비정(比定)되고 있다. 특히 고조선의 경우에는 정치적 지배자로써의 권력과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제사장으로써의 권리를 동시에 겸직하는 제정일치제(祭政一致制)의 나라였다.
  지배자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을 정점으로 초보적이지만 각기 업무를 분담하는 조직을 만들어 이들의 세력 아래에 각 부족들을 복속(服屬)시켜 다스리는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어 미분화 (未分化)된 형태의 초기국가체제(初期國家體制)를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록에 나오는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은 이 시대에 있어서 각기 분담된 업무를 통할하는 그 조직의 수장(首長)으로 볼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 우리가 살고 있는 동해안 지역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낙동정맥이 지나가면서 만들어 놓은 우리 지역의 오십천과 송천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구릉지를 따라서 많은 청동기인들이 거주하면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면서 지역의 주인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우리 지역에서의 최초의 지배집단의 조직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곳은 영덕은 현재의 지품면 지품리 일대로 추정되고 영해는 창수면 일대와 병곡면의 칠보산, 등운산 일대로 추정된다. 이들 지역의 선거주인(先居住人)들은 이들 각 동일집단끼리 산곡간(山谷間)에 흩어져 살다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발달된 청동기 문화를 수입한 특정부족에 의하여 연합 혹은 정복되면서 서서히 부족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여 점차 소규모의 부족국가로 발전하여 나갔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인 원삼국(原三國)시대 이전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야시홀군(也尸忽郡)과 우시군국(于尸郡國)이란 군명(郡名)이 있었다는 사실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명의 존재는 초기 철기시대인 사로국(신라의 초기 국명)시대부터 이 지역에는 국가단위 혹은 군단위(郡單位)의 지명으로 불릴 만큼의 인구가 거주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들은 이 지역에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초기 군장국가로 볼 수 있다 하겠다.
  뒷날 영덕지역의 중심이 된 야시홀군은 지품면 지품리 일대에서 발상하여 그 세력을 오십천 연변을 따라 현재의 영덕읍쪽으로 뻗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철기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수도작(水稻作)인 벼농사가 전파됨에 따라 종전의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밭농사보다 논농사가 농업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었기 때문에 용수를 구하기 쉬운 오십천 유역으로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족국가시대에 지품면 지품리에서 치소(治所)를 정하고는 일정기간을 지내 오던 야시홀군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오면서 군명을 야성으로 고치고 읍치(邑治)를 남동쪽으로 옮겨 현재의 지품면 오천리 앞의 삿갓봉의 동북 산기슭에 치소를 정하고 제2의 군치(郡治)로 하였다.
  이곳을 오늘날에는 야성고군지(野城古郡址)라고 부르고 있는데, 고군지 뒤로는 삿갓봉(笠峰)이 가로막고 있으며, 앞으로는 오십천이 흐르고 있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방비하기가 용이한 천연의 요새지로 일제시대에 34번 국도가 생기기 전까지 영덕과 안동을 이어주는 주요 길목으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대개 초기의 야시홀군이 이곳으로 치소를 옮긴 시기를 신라 경덕왕 16년(757)경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현재의 모든 기록들이 여기를 야성고지(野城古址)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야시홀군에서 야성군으로 개칭(改稱)하면서 치소도 같이 옮긴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야성군은 현재의 군청이 있는 자리로 옮기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는데, 현재의 군청자리로 옮긴 시기를 대략 고려 태조 연간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고려초의 태조대에 들어와서 야성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영덕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읍치(邑治)도 현재의 군청자리로 옮겨왔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촌 권근의 영덕현 “객사기문”을 보아도 이를 추정할 수 있으며, 현재의 군청이 있는 자리가 옛날 흥덕사(興德寺)가 있던 절터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야성고군지에서 영덕현의 읍치(邑治) 소재지로 현의 치소를 옮긴 것은 불교가 흥한 고려 후기보다는 신라말의 불교가 쇠퇴할 당시에 폐사(廢寺)한 절터에다 고려조가 개국하자 바로 영덕의 치소로 정하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한 것으로 보아 고려초에 이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해지역은 병곡과 창수지역을 중심으로 초기 부족국가인 우시군국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남아있는 자연부락의 숫자로 이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이들 지역의 자연부락의 숫자는 타 어느 지역보다 많은 것으로 일찍부터 이 지역을 중심으로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지역을 우시군국의 발상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이렇게 산악을 중심으로 세력을 펼치던 우시군국은 초기 철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영해평야에 까지 그들의 세력을 넓히기 시작하였다. 영해평야에 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한 우시군국은 북으로는 멀리 평해·울진까지 세력을 넓혀 훗날 실직국(悉直國)이 되는 삼척지역과 접경을 하였으며, 남으로는 청하에 이르는 지역에 까지 진출하여 사로국이 북상하는 것을 저지하는 한편, 서북으로는 영양과 진보에 까지 진출하여 내륙 산간지역을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전체적으로는 동해안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청동기시대의 도래와 함께 계속된 약탈과 정복에 의한 세력의 확장은 보다 강력한 무기체계와 이들을 통합하고 관리할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을 요구하기 시작하여 결국 이러한 요구가 곧이어 철기시대를 열게 된 원동력이 되었는데, 철기시대가 도래하자 내부적으로는 농업생산력의 비약적인 증대에 따른 경제적 환경의 변화로 부족 내에서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확연히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외부적으로는 보다 강한 외부의 부족과 대항하기 위한 부족간의 연합의 필요성이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부족간의 연맹체인 연맹왕국이 생겨나 각 연맹 부족간에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면서 비상시에는 특정 연맹장의 지휘 아래에서 이들 난관을 극복하는 부족연맹체의 정치형태가 출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비상시에 한시적으로 이루어진 부족연맹체도 이를 통솔할 대표가 있어야 하는데, 여러 부족의 지도자 중에 능력이 있고 신망이 있는 부족장이 여러 부족의 합의에 의하여 선출되어 부족연맹체의 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왕이란 직위가 출현하게 된 계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비상시에 따라서 구성된 부족연맹체는 곧 각 부족단위의 조직이 소규모의 국가조직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권력의 집중화라는 중요한 정치적 발전의 방향을 제시하여 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나아가서 이러한 것을 오늘날에도 존속되는 왕정제도의 초기형태라고 한다면 오늘날에도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어 오는 것으로 각 국가단위의 정치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가장 오래된 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인 부족국가시대에 있어서 이 지역에 존재하였던 야시홀이나 우시군국의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에 대하여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그 전모를 알아보기는 사실상 곤란하다. 다만 오십천이나 송천 주위의 구릉지에서 발견되는 이 시대의 유물들을 통하여 이들의 삶을 추정할 뿐이고, 이후 이들 소국이 흡수되어 간 신라의 화백제도 등을 통해서 우리 지역의 이들 소국들의 정치체제를 유추해 볼 뿐이다.
  따라서 이 당시의 정치제체는 특정의 일인(一人)에 의한 강력한 독점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독제체제라기 보다는 씨족 혹은 부족내의 합의에 따라 정치행정이 이루어진 합의제적 정치체제로 볼 수 있다.

2. 삼국의 정치

  초기의 부족연맹 단위의 느슨한 조직체계에서 국가단위의 조직체계로 권력이 집중되기 시작하면서 부족연맹장 중에서 유능한 부족장은 주변 인근의 여러 부족들의 힘을 모아 넓은 범위의 조직체를 만들고는 보다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때 이러한 부족집단 중에 대표적인 부족집단으로는 북부지방의 대소부족을 통합하여 내몽고와 만주지역까지 그 세력범위를 넓히며 건국된 고구려와 부여가 있으며, 남부지방을 중심으로는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협조하는 부족의 수장들은 귀족으로 편입하여 지배층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는 한편, 저항하는 부족은 강력한 응징으로 이들을 피지배민으로 만들면서 점차 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형태로 나라를 형성시켜 나갔는데 고구려는 부여를 복속시켜 초기 국가체제를 이루었으며, 마한은 백제로 발전하여 나갔으며, 변한과 진한은 사로 즉, 신라로 발전하였다.
  이들 국가내의 부족단위의 구성은 부여의 5가(加), 고구려의 5부(部), 진한의 6부촌(部村) 등인데, 이와 같은 5가, 5부, 6부촌 등은 부족연합체의 한 부족을 나타내거나 피지배국 혹은 복속된 집단의 유력한 부족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러한 것은 이들 국가의 지배층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의 성격을 말하여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초기 국가의 미분화된 국가조직의 형태가 정복이나 귀속에 의하여 점차 인구와 토지가 넓어지고, 조직의 규모와 통치의 영역이 넓어짐에 따라 종래의 합의나 협의에 의한 통치보다 제도적으로 뒷받침을 해주는 새로운 통치의 기술이 필요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곧 초기 국가에서 도입하기 시작한 율령(律令) 제도의 도입이다.
  사실상 우리나라에 있어서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기 시작한 시점을 대개 율령(律令)이 도입된 시기 이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율령도입은 초기 국가형태가 이루어진 시대부터 바로 도입된 것이 아니고 초기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사상적 기반이 어느 정도 통일이 이루어 진 후에야 가능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사상적인 통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불교의 전래였다.
  불교를 통하여 먼저 사상적인 공감대를 형성한 후에 율(律)과 령(令)을 도입하여 국가통치의 근간으로 삼기 시작하였는데, 즉 율령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백성들 스스로가 잘못된 행동에 따른 죄의식이 선행되어야 법이 준수되고 법이 준수되어야 제도에 의한 통치가 가능한데, 이러한 죄의식을 갖게 해준 것이 내세관과 윤회의 사상이 있는 불교였다. 즉 잘못을 저지르면 지옥에 빠져 고통을 받게 되고 축생(畜生)으로 태어나 고생을 한다는 불교의 일반적인 가르침이 큰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율령제도의 도입이 가능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 불교를 수용하여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백제에는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기록은 없으나 침류왕 때 불교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율령의 정치가 이미 이루어졌으리라 보이며, 신라는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는데 이르러 명실상부한 국가체제를 다듬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정치는 율령과 부족국가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지배계층인 귀족들의 연합에 의하여 통치된 귀족정치의 시대라 할 수 있다. 신라의 골품제·화백제도, 백제의 8대성(大姓) 등과 고구려의 귀족연합들이 왕을 선출하거나 혹은, 수상인 대대로(大對盧)를 선출하는 경우 등의 예를 보더라도 귀족들이 지배세력으로써 그들의 귀족적인 지위를 고스란히 향유하는 귀족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지역에서는 초기의 야시홀군과 우시군국이 보다 강력한 집단(集團)으로 성장하여 새로운 정치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진한 12국내의 소국으로 존재하면서 어느 정도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동해안 일대의 맹주로 지배권력을 행사하였다.
 이러한 야시홀군 및 우시군국 시대의 정치는 삼국시대의 전반적인 정치의 흐름과 같이 지방단위의 세력가들을 중심으로 협의 혹은 합의의 형태로 이루어 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진한 12국의 패자가 된 사로국(신라)에 흡수된 후에도 이들 야시홀과 우시군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던 씨족들은 신라의 지방 호족세력으로 재지사족(在地士族) 혹은 이족(吏族)으로 남아 지역의 유력층을 이루며 여전히 지도층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것은 뒷날 조선시대 초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나 「경상도지리지」의 영덕·영해의 성씨조(姓氏條)에 나오는 토성(土姓)과 촌성(村姓)들은 대부분 이들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삼국시대 이래로 지역의 주요한 유력집단층을 형성하면서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3. 통일신라시대

 신라의 삼국통일은 오랫동안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며 분립, 쟁투하여 온 삼국을 정벌하여 하나의 통일적 국가체제를 이룩하고, 이후 한민족이 하나의 정체성을 갖으며 발전해 나갈 수 있는 위대한 계기를 만들어 준 대역사(大役事)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무엇보다 먼저 통치체제의 정비를 서둘렀다. 먼저 늘어난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지방제도의 개편을 서둘렀는데, 전국을 9주 5소경(九州五小京)으로 나누는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9주 5소경제도의 도입은 전국을 9주와 5소경으로 나누어 이들에게 하부 행정기관을 통할하도록 하는 것으로 이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지방의 모든 촌락단위까지 중앙의 행정력이 미치게 되어 전국을 하나의 통치단위로 일원화시킨 획기적인 제도의 도입이었다.
  한편 삼국통일이 달성되기 전부터 신라사회는 종래의 귀족중심의 정치가 점차 전제왕권에 의한 정치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진골(眞骨)인 김춘추(金春秋)가 화백(和白)회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김유신(金庾信)의 무력을 배경으로 왕위에 등극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보듯이 통일전의 귀족중심의 정치가 통일이 달성된 전후로부터 점차 유명무실화되어 갔는데, 특히 9주 5소경 등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른 중앙귀족의 지방이주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급속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유명무실화되었던 귀족정치도 통일신라 후대에 이르면 다시 귀족중심의 정치가 부활되는데, 즉 삼국통일 직후 무력화되었던 귀족들의 세력은 경덕왕 때에 이르러 전제왕권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지방으로 이주 당한 귀족들의 세력화의 성공과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해야 하는 전제왕권의 몰락을 들 수 있다. 그래서 경덕왕은 중앙 관부와 전국 주군의 이름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한편, 왕권의 공고화를 통하여 이들의 동요를 막아보려고 하였지만, 역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으며, 바로 다음의 혜공왕 때부터 각지에서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은 흔들리기 시작하여, 결국은 진골 연합체인 귀족연합 정치가 부활되면서 통일신라는 패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편 우리 지역은 경덕왕 16년인 757년에 지방의 주군명(州郡名)을 중국식으로 고칠 때, 야시홀군은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치고, 우시군국을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쳤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지역이 부족국가시대를 지나 초기 신라에 귀속된 후에도 최소한 신라의 지방제도 중에서 인구와 영토면에서 군단위 규모의 세력을 유지하며 동해안 일대의 정치·행정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