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업정책

  1945년 8월 15일에 이루어진 광복은 우리 손으로 자주적인 농업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년여의 미군정기를 거처 1948년 정부가 수립되자 여러가지 농업정책이 입안 시행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농지개혁과 식량수급정책이 최우선으로 다루어졌다.
  멀리는 고려와 조선, 가까이는 일제 강점시대를 거치면서 왕실과 세도가, 조선총독부, 친일관료, 지주 등에 의한 토지의 대량점유는 많은 소작농을 양산하였으며, 이들 소작농들은 생산량의 80% 정도를 수탈당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어, 유민화(流民化)되기도 하고, 종국에는 농민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며,일제 강점기에 들어와서는 끊임없는 소작쟁의 운동으로 사회불안을 야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특히 일제 강점하인 1930년대에는 지주의 횡포가 심하여 소작농들의 반발이 심하자 식민정책에 차질이 생길까봐 일제는 1935년에 「조선농령(朝鮮農令)」을 공포하여 소작권 이전을 금지하고 소작료를 수확량의 50% 이내로 제한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광복이 되자 민심을 안정시킬 정책으로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이 토지소유와 관계된 농지개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우선 광복 이후 한반도의 지배권을 장악한 미군정 당국은 동양척식회사 및 일본인 소유의 농지 일부분을 농민들에게 분배하였는데, 이마저도 세력가 및 친일분자들에게 분배된 경우가 많아 오히려 농민들 사이에 불평불만을 비등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게 되었다.
  이후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1949년 6월 2일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여 유상매수, 유상분배 방식으로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자작농의 확대, 식량자급체제의 확립, 농촌경제의 부흥의 3대 목표를 중점으로 두고 새로운 농업정책을 시도하였으나, 이마저 뒤이은 6.25한국전쟁의 발발로 유야무야 되기에 이르렀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6.25한국전쟁은 한국 사회전반에 있어서 모든 것을 후퇴시키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농업분야에서는 정부 수립 즉시 세웠던 정책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등 많은 애로사항을 가져왔으며,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일반 국민들이 현실로 직면하게 된 것은 식량부족 사태였다.
  이러한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는 미국의 원조를 받는 한편, 지속적인 증산정책을 펼치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1950년 이후 5.16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까지의 제1공화국시대의 농업정책은 식량증산에 제일 큰 초점이 맞추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1953년에 시작된 제1차 농업생산 5개년 계획, 1958년에 시작된 제2차 농업생산 5개년 계획 등은 모두 식량증산을 위한 계획이었다.
  한편으로 1956년부터 시작된 PL480호에 따른 연간 40만∼60만t에 이르는 미국의 잉여농산물의 도입은 전후 한국경제의 회복과 식량부족 사태를 해결하는데 상당한 기여를 하였으나, 농업의 자생력을 약화시켜 결국 식량의 대외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광복 이후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자 새로운 농업기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1957년 5월 1일에 농사교도법에 의거 농사원을 설립하여 농업기술의 시험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으며, 농업은행을 1958년 4월에 설립하여 농업금융을 전담시켜 농민들의 영농자금의 이용을 용이하게 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되면서 농정은 중농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농공병진, 농어촌의 혁신적 개발 등에 목표를 두면서 식량의 자급자족을 추진하였다. 한편 이 기간의 고미가정책과 이중곡가제의 실시는 농정사상 획기적인 정책으로 종래의 저미가정책으로 야기된 식량증산 의욕의 감퇴를 일시에 만회하여 그 결과 1966년말 식량자급률은 거의 90%에 이르게 되었다.
  특히 3차 경제개발 계획이 시작되면서 식량증산의 목표가 종래의 식량자급에서 주곡자급으로 변경됐으며, 녹색혁명이 시작된 것도 이때의 일로 1971년부터 다수확 신품종인 < 통일벼>가 농가에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이 때 우리 지역에도 통일벼가 보급되어 지역의 많은 곳에서 재배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결과로 1974년 쌀생산량은 3,000만 섬에 달하게 됐고, 1977년에는 4,000만 섬을 돌파하게 됐다.
  < 통일벼>가 주도한 녹색혁명으로 쌀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자 정부는 종전까지 금지해 왔던 쌀막거리 제조를 1977년부터 허용했으며, 농어촌의 연례적인 행사였던 ‘보릿고개’란 말이 사라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유사 이래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식량부족 문제, 특히 주식인 쌀부족 문제는 녹색혁명을 통해 해결된 반면, 1960년대 말부터는 공업화가 본격 추진되면서 농촌에서 젊은 사람이 대거 도시로 이동하는 이농현상이 시작되면서 농업활동이 공업화에 밀려 점점 위축돼 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따라서 우리 지역의 인구유출도 이 시기를 정점으로 점차 줄어들어 현재는 이 시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에 있다.
  한편, 1970년대에 들어와서 선진국의 개방압력에 따른 농산물 수입이 확대되면서, 농산물의 공급안정과 물가안정은 어느 정도 달성되었으나, 늘어난 수입 농산물에 의하여 농촌경제는 점차 붕괴하기 시작하여 이농현상을 더욱 더 부추겼다.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도시에로의 공급을 목표로 하는 상업농이 발달하고 농자재의 급속한 발전으로 비닐하우스가 도입되면서 대도시 주변을 중심으로 주곡 위주의 농업에서 채소, 과채농업, 원예농업의 발전이 급격히 이루어졌으며, 종전의 “생산이 소비를 만들어 낸다”는 논리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농산물을 원하는 시기에 공급하는 농업이 등장하여 농업생산 방식의 새로운 전기가 일어났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우루과이라운드(UR)로 대표되는 수입개방화 압력이 드세어져 농업부문의 개방화가 가속화되고 이에 대응한 농어촌 구조개선 대책이 추진되면서 규모화, 현대화가 농정의 주요기조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IMF 관리체제로 인해 시련을 겪으면서 농정의 방향전환이 시도되어 친환경농업과 신지식 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특히 세기말 환경문제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부각되고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주로 하는 농산물의 소비욕구가 증대하면서 이제 농정은 농민과 농촌은 물론 소비자까지 아우르는 생명산업으로 21세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2. 영덕의 주요 농업현황

1) 농가호수 및 인구

  광복과 6·25한국전쟁 및 1950년대의 전후 회복기를 지나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업화정책으로 농촌의 유휴인력이 도시로의 집중과 국민들의 소비성향의 증가, 그리고 산업화에 따르는 농지의 잠식, 비농업분야의 고용증대에 따른 농업인구 감소 등의 변화를 가져와서 농업분야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초래하였다.
  1960년 영덕군의 총호수는 18,485호였으며, 인구는 106,198명이었다. 이 중에 농가는 12,475호에 인구는 76,145명으로 전체 호수 중에 농가가 차지하는 비율은 67% 였으며, 농업인구의 비율은 72%로 전형적인 농업 중심의 군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이 1960년대까지의 군의 중요한 산업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던 농업부문이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농업에 종사하는 세대수와 인구수가 줄어들었다.
  표<5­4>에서 보듯이 1960년대 이후 매 10년 단위마다 농가호수는 연10% 내외로 줄어들고 있으며, 인구수에 있어서도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점차 줄어들어,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줄어드는 폭이 매우 심하였다.
  1998년 현재의 군의 총호수 및 인구변화를 1960년대와 비교하면 호수의 변화는 미미한 수준이나 인구수에 있어서는 절반 정도의 인구가 줄어들었다. 따라서 농업에 종사하는 농가인구도 1960년대의 농가인구의 삼분의 일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이는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가족계획 등에 의한 출산율의 저하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2) 경지면적

  1998년도 현재 군의 경지면적은 8,287㏊로 경지면적이 가장 많이 늘어난 1970년 9,544㏊ 비하면 1,257㏊ 감소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농가호당 경지면적은 농가호수의 감소로 인하여 1970년도 0.66㏊에서 1998년에는 1.12㏊로 늘어났다.
  경지면적은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개간 등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늘어나 1970년의 9,544㏊을 기점으로 최대로 늘어났으나 이후 점차 줄어들어 해를 거듭할수록 그 줄어드는 폭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농지면적이 줄어드는 대신 1인당 경지면적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농가 1호당 농지를 넓혀 규모의 농업경영을 위한 것이 아니고 농촌인구의 줄어듦에 따라 산술적인 계산에 의한 것으로 농촌의 이농현상이 심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이농현상과 힘든 농사일을 기피하는 영향으로 교통이 불편한 산간계곡의 농경지는 거의 휴경상태로 남아 있으며, 이러한 휴경지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으로 식량부족에 따른 이들 휴경지의 이용방안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표 <5­5>는 1960년대 이후 군내의 경지면적의 변화추이를 살펴본 것이며, 표 <5­6>은 1998년 12월 31일 현재 군내 논에 대한 경지정리 현황이다. 현재 전체 논 중 경지정리가 가능한 논의 86.3%정도 경지정리가 되어 있어 논농사를 짓기 위한 환경은 좋은 편이라 하겠다.

3) 농작물 생산

(1) 식량작물 생산

  1998년 현재 식량재배가 가능한 영덕군의 경지면적은 4,330.3㏊이며, 여기서 생산되는 생산량은 16,674.1 M/T이다. 표<5­9>에 알 수 있듯이 전체 경작가능 면적 중에 벼 재배면적은 3,288.3㏊이고, 맥류 재배면적은 306.2㏊이며, 잡곡은 28.4㏊, 두류는 610.3㏊, 서류 97.1㏊이다. 이는 1960년도 전체면적 12,154㏊에 비하여 무려 7,823.7㏊(64%)나 되는 식량재배 가능한 경지면적이 줄어든 것으로 그만큼의 휴경지가 늘어난 것을 말한다 하겠다.
  그러나 식량재배 가능 경지면적 대비 생산량의 정도를 살펴보면 오히려 적은 농지에 비하여 월등히 많이 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960년의 식량재배면적 12,154㏊에서 15,840 M/T의 식량이 생산되었으나, 1998년의 4,330.3㏊의 경작지에서 16,674.1 M/T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생산량의 증대는 농업의 기계화, 과학화에 기인한 농업기술의 발달과 선진농법에 주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변화를 경작지 면적의 변화에 따라 작목별 생산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벼재배의 경우 재배면적은 1998년 현재 3,288.3㏊로 1960년 4,141㏊에 비교하면 852.7㏊(20%)가 감소되었다. 특히 재배면적이 가장 늘어난 1983년도 재배면적 4,515㏊에 비교하면 1,226.7㏊(27%)가 감소되었다. 벼 재배면적 감소의 주된 원인은 산간 계곡논의 휴경이 늘어나고 논농사 지대에 소득이 높은 밭작물(채소류, 과수 등)의 시설채소 재배가 늘어났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벼 생산량은 1960년 7,462 M/T에서 1998년에는 오히려 13,154M/T으로 늘어났으며 10a당 생산량도 1960년 180㎏에서 1998년 400㎏로 증수되었다. 이러한 적은 농지에서 많은 벼가 생산된 주요한 요인으로는 벼 다수확 신품종의 개발보급과 영농기술의 혁신 등으로 인해 토지의 생산성이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5년에는 이 해 전국 쌀 최고증산왕에 지품면 신양리의 남진호씨가 쌀 10a당 979㎏를 생산하여 은탑산업훈장을 수상하는 등, 지역의 벼농사 기술이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맥류 재배면적은 1998년 306.2㏊로 1960년 4,736㏊에 비교하면 4,430㏊가 감소되었으며 가장 많이 재배한 1970년 5,515㏊에 비교하면 무려 5,209㏊가 감소되었고, 따라서 생산량도 1960년도 3,866M/T에 비하여 1998년 797M/T으로 줄어들었다. 면적이 줄어든 주된 요인은 단위 면적당 소득이 낮은 작물로 전략되었기 때문이며, 한편으로는 맥류재배 자체가 인력으로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농촌인구의 감소에 따라 힘들고 고된 경작물류는 점차 농업에서 도태되고 있는 것도 주요한 원인이다.
  그러나 10a당 생산량은 새로운 품종의 개발보급과 경종법 개선으로 1960년 80㎏에서 1998년도는 260㎏로 증산되었다. 1988년에는 보리밭 10a당 551㎏를 생산한 병곡면 신평리 보리단지가 전국 최우수 보리단지로 선정이 되어 대통령표창을 수상하는 등 새로운 재배기술를 접목시켜 보리증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요즘 와서는 맥류가 무공해식품, 건강식품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기계화 경작이 가능하여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으므로 확대 재배를 권장하고 있다.
  또한 두류, 서류, 잡곡도 1960년부터 계속 면적이 줄어들고 있으나 두류는 1983년부터 면적이 약간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2) 채소류생산

  채소류의 재배는 과거에 자급자족을 위하여 전체 농경지 중의 일부 면적에만 이를 재배하였다. 그러나 식생활의 변화와 인구의 대도시 집중에 따른 도시민들의 수요가 늘어남에 의하여 이제는 상업적, 전업적인 농업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 재배방식도 종래의 자연농법에서 비닐멀칭재배, 대형 비닐하우스 시설재배로 년중 생산체제로 전환되어 가고 있으며 재배면적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통일벼를 비롯한 다수확 품종개발 보급으로 소위 녹색혁명이라 할 수 있는 쌀의 자급시대를 이룩하였다고 하면,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채소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작물의 생산방식이 비닐피복에 의한 것으로 바뀐 백색혁명을 이룩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표 <5­11>은 1970년 이후 군내에서 생산된 채소류 생산량 추이를 나타낸 것이며, 표 <5­12>는 군내의 시설채소의 재배면적을 나타낸 것이다.

(3) 과일류 생산

  생활의 향상으로 과일류의 소비가 늘어나고 새로운 과일에 대한 욕구도 높아가고 있다. 영덕군의 과일 생산면적은 1980년도부터 복숭아, 사과, 배, 포도 등의 재배면적이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복숭아는 오십천 주변에서 집단 재배되어 품질이 우수하고 생산량이 많아 주산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복숭아의 경우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 과잉생산에 따른 복숭아나무의 간벌과 나무의 고목화로 인한 신품종의 교체로 그 재배면적이 많이 줄어들었다.
  표<5­13>은 1970년대 이후의 복숭아, 사과, 배, 포도, 감의 생산량 추이를 도표화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