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통일신라시대

 신라는 660년의 백제 정복과 668년의 고구려 정복으로 삼국을 통일하면서 한반도에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확대된 정복지(征服地)를 통치하기 위한 지방행정제도를 개편하였는데, 먼저 신문왕(681∼ 691) 5년(685)에 가서 전국을 9주(州) 5소경(小京)으로 나누는 지방제도의 개편이 있었다. 이 때의 지방제도 개편은 거의 20여년이 소요된 것으로 이는 통일전의 군사중심의 지방제도에서 행정중심의 지방제도로 변경되었음을 의미하며 이 제도가 확립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소요된 것은 피정복민(被征服民)과 각 지방 유력층의 반발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려준다고 하겠다.
  이러한 제도변경에 따라 9주 밑에 군과 현이 설치되어 지방행정의 일익을 담당하였는데, 「삼국사기」 지리조에 의하면 당시 전국의 군현은 120군(郡) 305현(縣)이라 하였다. 그런데 경덕왕 16년의 주군현(州郡縣) 지명의 개명(改名) 때는 117군 293현이 있었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소간의 변동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시기의 우리 지역은 통일 전의 하슬라(何瑟羅)주에 속해 있다가 통일 후에는 하서주(河西州) 혹은 하서량주(河西良州)로 불린 뒤에 명주(溟州)로 개명된 오늘날 강릉의 영군(領郡)으로 소속되어 있었다. 이 때 명주에 소속된 군현은 모두 9군 26현(「삼국사기」 지리지와 본기의 경덕왕 16년 조와는 현의 숫자에 1개의 오차가 있다.)이었다.
  당시의 군에는 태수, 현에는 소수(少守), 혹은 현령이 임명되었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현까지만 중앙의 관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주·군·현의 밑으로는 촌과 향·부곡(鄕·部曲) 등의 말단 행정구역이 있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 영덕편 고적(古跡)조에 “ 오보부곡, 이이(기,사)아부곡, 지품부곡이 있었다”는 기록과 영해편의 “석보부곡, 수비부곡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말단 행정구역이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영승람」의 기록에 보듯이 이러한 부곡 단위의 말단 촌락에도 몇 개의 부곡을 통합, 관할하는 부곡장(部曲長) 이름의 대표자를 임명하여 이들 부곡을 다스렸던 것으로 보인다.

ㆍ부곡장(部曲長) : 우시국시대로서 부곡장은 단구, 수비, 대청, 소청, 석보, 평해의 7개 부곡을 관할하며 권리를 행사하였다.[部曲長 于尸時以部曲長權管丹邱首比 大靑小靑石保平海七部曲,「영영승람」, 원영해 관호(官號) 연혁조]

 명주군의 영현으로 속하게 된 야시홀군은 오늘날의 진보지역인 조람현(助攬縣)과 오늘날의 청송지역인 청기현(靑己縣)을 영현(領縣)으로 거느리며, 현재의 지품을 중심으로 서부 산간지역을 관할하였으며, 우시군은 병곡을 중심으로 오늘의 평해와 청하지역인 아혜현(阿兮縣)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영현으로 거느린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따르면 야시홀군은 지품을 중심으로 해안 쪽으로 뻗어 내려와서 현재의 영덕군의 남부 5개면 지역으로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영해지역은 영양을 포함하여 흥해에서 울진에 이르는 해안지역을 그 영향권 아래에 두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신라는 경덕왕(742∼763) 16년(757)에 들어와서 9주 5소경에 대한 지방제도를 고치는 한편 각 군현의 지명도 종래의 토착식 지명을 한자식(漢字式) 지명으로 개명을 하는 등 통일 후에 동요되어 가는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쇄신하고자 제도의 혁신을 시행한다. 이 때 우리 지역은 명주에 소속되면서 야시홀군은 야성군(野城郡)으로 고쳐지고 우시군은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쳐지며, 종래의 야성군의 속현(屬縣)이던 조람현은 진안현(眞安縣)으로 청기현은 적선현(積善縣)으로 고쳐졌다. 유린군은 종래의 아혜현이 해아현(海阿縣)으로 고쳐지면서 여전히 속현(屬縣)으로 거느리게 되었다.
  한편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오랜 세월을 걸쳐 누려왔던 평화로운 정치, 사회환경에 따라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체제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오랜 평화는 신라인들의 상무적(尙武的)이고 진취적인 정신을 점차 현실 안주의 현실적인 상태로 만들어 오히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권력 다툼과 자기 이익의 쟁취에 몰두하는 소아적인 국민성을 가지게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정신의 해이화(解弛化)를 거치면서 신라사회는 국론분열을 가져왔으며, 이것이 사회경제적인 모든 면에 전반적인 기강해이(紀綱解弛)를 가져와 신라사회는 점차 혼란의 지경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골품간(骨品間)의 갈등과 투쟁, 왕족간 왕위 다툼, 그리고 부(富)의 집중화로 인한 사회구조의 해체 등이 겹쳐 신라는 서서히 그 마지막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제일 먼저 신라에 반기를 든 것은 양길과 궁예이다. 이들은 오늘날 강원도 철원지역의 세력들로 신라 조정에 불만을 가지는 지방 군벌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그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또한 백제의 고지(古地)에서는 경상도 상주 사람인 견훤이 백제고토(古土)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켜 오늘날의 전라도 지역에서 독립적인 세력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났으며, 왕궁내의 권력투쟁도 격화되는 등 통일신라 후대는 그야말로 혼란스런 사회가 되었다.
  한편 궁예의 밑에서 수많은 공적을 세우며 2인자의 위치에까지 올라 간 왕건은 기회를 엿보다 궁예를 몰아내고 출신지 개성의 해상세력을 중심으로 고려를 세운 후 통일신라와 후백제, 고려가 대치하는 삼국정립(三國鼎立)의 후삼국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렇게 신라를 포함한 3국은 한반도의 패자(覇者)가 되기 위하여 대소전투를 치르면서 주도권 쟁탈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제일 먼저 신라가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후삼국의 정립과정에서 점차 국력이 약화되어 통일 후의 광대한 국토와 강력하였던 통치권을 상실한 채 겨우 통일 전, 신라 건국초기의 규모인 경주를 중심으로 일부 경상도지역에만 통치권이 미쳤으며, 그 외 지역은 반독립 상태이거나, 후백제와 고려의 영향권으로 흡수되어 갔다.
  특히 우리 지역과 많은 인적, 물적, 문화적 교류가 이루어지던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북도 북부지역과 우리 지역을 포함한 동해안 지역도 신라 경순왕(927∼934) 4년(930) 1월 21일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지역) 병산(甁山) 부근에서 발생한 후백제의 견훤군(軍)과 고려 태조 왕건군(軍)이 대전투를 벌일 때,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군이 승리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며, 이후 이들 지역은 고려 태조편으로 귀부(歸附)하여 고려 건국의 기초가 된다.
  이 병산싸움에서 고려 태조 왕건은 8,000여명에 이르는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전몰시키는 한편, 수많은 장비와 군량미를 노획하여 후백제 견훤을 거의 재기불능상태에 빠뜨렸으며, 더욱이 왕건은 이 싸움을 전후로 하여 경상북도 전역에 이르는 주군현의 지지를 받게 되어 삼국의 주도권 쟁탈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게 되었다.
  이 같은 병산전투에서 고려 태조가 승리한 주요 요인으로는 이 해 1월 2일에 있었던 진보지역의 재암성(載巖城) 성주인 선필(善弼)이 태조 왕건에게 복속(服屬)한 사례에서 보듯이 안동을 중심으로 하는 북부지역의 대부분이 고려 태조쪽으로 래부(來附)함에 의하여 지리에 밝은 이 지역 관민(官民)들의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영해와 영덕지역도 고려 태조에 호의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영해와 영덕지역에서 채집되는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를 증거한다 하겠다.
  이러한 공로를 잘 알고 있는 태조 왕건은 당시 고창의 성주 김선평(金宣平)에게는 대광(大匡)이라는 벼슬을 내렸으며, 권행(權行)과 장길(張吉)은 대상(大相)으로 삼고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시켰는데, 이것은 고려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 안동지역과 영해지역이 고려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으로 이는 이 병산싸움에서 이 지역 관민들의 협조가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임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고 하겠다.
  한편 930년의 병산전투는 이 지역을 포함한 동해안 일대의 각 지방 군현의 책임자들이 태조 왕건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는데, 이 싸움을 기점으로 그때까지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많은 군현으로 하여금 태조 왕건을 선택하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며, 이 싸움 직후에 오늘의 풍산지역인 영안(永安)과 일직·청송 등 이 지역 30여 군현이 고려 태조에게 복속하였으며, 동년 2월 1일에 가서는 강릉(溟州)에서 영해·영덕·울산(興麗府)에 이르는 동해안 일대 110여성(城)이 모두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태조 왕건이 경순왕 5년(931)에 경주를 방문할 때 불과 50여기(騎)의 병사만으로 이 지역을 무사히 지나가게 된 것도 신라가 망하기 전에 벌써 이 지역은 왕건에게 항복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 태조 왕건의 방문로(訪問路)는 안동을 거쳐 영해와 영덕을 지나서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사실은 우리 군내의 면현(眠峴, 일명 자부티 고개)의 전설과 강구의 괘방산이란 지명과 예주라는 지명의 유래를 살펴볼 때 거의 확실시 되며, 고려 조정의 관리로 있다가 조선조에 이르러 경상도 안렴사를 역임한 안노생(安魯生,생몰년 미상)이 영해에 귀양와서 지은 “면현(眠峴)”이란 시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신라의 발상지이며, 중요한 기반이던 경상도 지역이 고려 태조의 편으로 넘어가자 신라는 더 이상 나라를 지탱할 여력이 없음을 알고 고려 태조 18년(935) 11월에 마침내 고려에 항복하였다. 이어서 태조 왕건은 이듬해인 936년 9월에 견훤과 그 아들 사이의 내분을 이용하여 후백제까지 멸망시키고 새로이 삼국을 통일하면서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왕조 천년(千年)여 세월 동안 한반도 역사의 중심지였던 우리 지방을 포함한 경상북도의 각 군현들은 고려조의 일개 지방 군현으로 편입되어 가면서 동남 해안쪽의 변경지역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