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전기
대내외적으로 여러가지 변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지탱해오던 고려 왕조도 내부적으로는 현종 5년(1014)에 있었던 백관들의 녹봉의 부족을 경군(京軍)에 지급되었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충당하려던 문신들의 처사에 분개한 상장군이던 김훈과 최질이 난을 일으켜 정치적 실권을 잡고 1년 여간 통치하다 실패한 무신란과 의종 24년(1170)에서 시작하여 원종 11년(1270)까지 근 100년 여간 지속되었던 무신란, 그리고 인종 13년(1135)에 일어난 묘청의 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사회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
다. 따라서 위의 책 고적조(古跡)조에 등재되어 있는 부곡의 명단은 실제는 없어진 것들의 명단만 실어 놓은 것이다.
영덕에 있었던 부곡으로는 현재 오보리 지역으로 추정되는 오보부곡(현(縣)의 동해변)과 현재 남정면 구계리 지역으로 추정되는 이이(기,사)아부곡(伊已,己,巳,牙部曲)이 있었으며, 그 외에 오늘날의 지품리 지역의 북쪽인 황장재 부근의 지품부곡이 있었다. 앞의 책에 의하면 당시의 지품원(知品院)이 지품 부곡내에 있었다고 하며, 지품원의 위치를 현의 북쪽 44리에 위치하고 있다(在知品部曲距縣四十四里)고 하고, 또한 지품부곡의 위치를 이 보다 먼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在縣七十里)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품부곡의 중심지가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품부곡의 중심지를 황장재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이아부곡이 현 남정면 구계리로 추정되는 이유로는 현재의 남정면 남정리는 조선시대의 영덕현의 남역(南驛)의 소재지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원(驛院)조에 의하면 남역은 “현의 남쪽 21리에 있다(在縣南二十一里)”고 하는데, 이이아부곡은 위의 책에 의하면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在縣南二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남역보다 4리 정도 내외의 거리를 두고 있는 구계리의 지명이 오래 전부터 하부(下部, 鰕浮)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과 군내의 자연부락으로서는 드물게 200호의 집단마을을 형성하여 온 것으로 보아 이를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영해부내에 있었던 부곡으로는 석보부곡(부서(府西) 60리)와 수비부곡( 부서 90리)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지역은 오늘날 영양군 지역으로 영덕군의 관내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위치와 소멸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와같이 조선시대의 전기에 있어서 군사와 행정제도, 특히 지방제도는 중간 중간에 다소간의 변경은 있었지만 개국초에 이루어진 제도의 골격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으며, 우리 지역도 거의 변동없이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
2. 조선 중기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로 서서히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전국시대의 혼란한 일본 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그의 야심을 대륙 침략에 두고 대륙의 관문인 한반도를 넘보기 시작하는 등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
몇 차례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싸움의 꼬투리를 찾고 있던 풍신수길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전국시대의 풍부한 전투경험과 서구의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부산포에 상륙시키면서 그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은 선조 31년( 1598)까지 7년간 지속된 미증유의 대전쟁으로 당시의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 16세기의 대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으며, 대부분의 문화재가 방화, 약탈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난에 의하여 사회경제적 토대인 농촌사회의 붕괴로 기존의 체제가 무너져 사회 전반의 기강의 문란(紊亂)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7년 여간의 전쟁으로 농토가 피폐하여져 경지면적이 축소되어 국가경제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커다란 고통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이 싸움의 한쪽 당사자인 일본도 풍신수길(豊臣秀吉) 정권이 무너지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정권을 잡아 막부시대를 열었으며, 이 난의 원병(援兵)으로 참여한 명나라도 새롭게 일어난 청나라에 멸망을 당하는 등, 임진왜란은 동양 일대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이러한 임진왜란에 뒤이어 일어난 병자호란은 미쳐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에 또 한번의 불리한 타격을 입혀 조선 백성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2번에 걸친 건국 이래 미증유의 전쟁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개국 초에 정립되었던 각종의 행정제도와 군사제도가 실제적인 국난을 대처하는 데는 많은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조직과 제도로는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국난에 대비하기는 곤란할 것이란 자각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각종 제도의 개편을 서두르게 되었다. 특히 양대 전쟁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데는 기존의 제도로는 많은 문제점이 있어서 전란으로 인한 피해복구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정부차원에서의 중앙관제와 지방관제에 대한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중앙 조정은 우선적으로 중앙 정부의 기능을 개편하여 중종 12년(1517)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고는 1522년에야 다시 상설기관으로 정립된 비변사를 국방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업무까지 간여하도록 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키는 한편, 그 대신에 이러한 기능을 하던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시켰으며, 대동법과 균역법을 새로이 도입, 시행하면서 선혜청이나 균역청 등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등, 중앙관제의 개편에 일차적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앙관제의 활발한 개편에 비하여 지방제도의 개편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초기에는 의욕을 갖고 추진하였으나, 각 지방의 이해관계와 저항 등에 의하여 이의 개편에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 갔다. 따라서 이러한 소극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우리 지역의 제도변화는 거의 없었다.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영덕현은 개국초 이래로 관할구역이나 제도면에서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다만 영해부의 속현이었던 영양현이 숙종 1년(1675)에 영양현으로 분설(分設)하여 나감에 따라 영해도호부의 관할구역이 약간 축소된 것 외에는 우리 지역은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하겠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중앙제도나 지방제도에 있어서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 새로운 역사발전의 계기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것이 신분계층의 동요라고 할 수 있다. 종전까지 엄격한 반상(班常)의 구별에 의하여 지탱하여 오던 조선사회가 이 양난을 통하여 일부 부유한 상민들의 신분상승과 몰락 양반들의 조락(凋落)과 서얼들의 신분상승 등을 통한 급격한 신분계층의 해체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들 상민의 신분상승의 계기는 전쟁 중에 모자라는 군량미의 조달을 위해 일정량의 군량미를 헌납하면 신분의 제약을 풀어주도록 한 납속책(納粟策)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재력이 있는 상민이나 서얼들, 이외에 여러 계층의 백성들이 이의 혜택을 입어 서얼허통(庶孼許通)·병사들의 면역(免役)·노비의 양인화(良人化) 등을 가져와 신분계층의 활발한 이동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납속책 이외의 것으로는 양난에 참여한 향리와 양반 등이 전란의 극복에 따른 포상 등에 따른 관직의 수여로 향리들과 양반들의 중앙정부에로의 활발한 진출 등이 사회적 신분동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영덕 우리 역사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들이 부산포에 침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진 시점은 제일 먼저 침입의 선봉에 선 왜군장수 소서행장이 이끄는 18,000여명의 왜군이 다음날 4월 14일에 부산성을 공격하면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7년에 걸친 대전쟁은 한반도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 왔다. 이러한 임진왜란에 뒤이어 발발한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아직 전란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전쟁으로 병자호란 자체는 싸움의 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하고 싸움터가 한강 이북에 국한되어서 사실상 경상북도 전역과 우리 지역의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정으로 이 지역 인사와 병자호란과의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는 실정이다. 중 로 : 동래→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 좌 로 : 동래→기장→좌병영→울산 ↑ 왜군과 조선군 사이의 최초 전투는 4월 14일에 있었던 부산성 전투로 왜군들은 쉽게 부산성을 점령하리라 생각하였으나, 부산진 첨사 외에 조선군들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굳게 지키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부산진 첨사는 정발(鄭撥) 장군이었으며, 정발 장군은 왜군의 항복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대적하기로 하고 군사들을 독려하며 적을 막았다.
특히 일본군이 재차 침입한 정유재란 때는 이 지역의 많은 인사들은 또 다시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여 수많은 왜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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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선 후기
1) 신분변동과 서원 및 사우(祠宇)의 증설(增設) 양난 이후에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비변사 기능의 강화와 재정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일반백성들의 조세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선혜청과 균역청을 새로이 설치하는 등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변경이 있었지만, 각 지역에 해당되는 지방제도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 서원과 사우
대개 서원과 사우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구분되지만 여기서는 서원과 묶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서원의 건립목적은 선현봉사(先賢奉祀)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교육기능을 확대하여 사교육기관(私敎育機關)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한편, 향촌 자치기능의 일정부분을 담당하는 향촌 자치운영기구로써의 역할도 하였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양반들 사이에 동족 내지 가문의식에 의하여 조상의 제향처(祭享處) 내지 문중의 기반처(基盤處)로써 서원이 건립된 경우도 많았다. |
(남강서원의 창건은 "영영승암"에는 유경정미(1607)이고, "남강서원사적기"에는 융경 3년 (1569)으로 나오나, 창건 당시의 현령 정자의 기문에 의하면 무진(1568) 봄이라 하였으므로 정자의 기문으 기준으로 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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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영덕군지 , 영영승람 |
이러한 서원과 사우의 설립과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우리 지역의 학인들 중에 생원과 진사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는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대과인 문과에 급제하는 숫자도 많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것도 이러한 서원과 사우의 증가에 의한 영향으로 판단되어 진다.
(2) 조선시대 영덕과 영해의 사마시와 문과 합격자 명단 다음의 표〈24〉와 〈25〉는 사마방목에서 발췌한 영덕과 영해지역의 생원·진사의 명단이다. 그리고 사마방목에 등재된 영해지역의 명단 가운데는 영양지역의 일부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숙종 이전까지는 영양은 영해부의 속현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사마시에 합격하더라도 영해부에 포함시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
2) 조선 후기의 지역의 사회적 갈등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에 이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국제정세는 일찍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량생산체제를 가진 서구 열강들이 자국의 원료공급 및 상품판매용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타국의 영토를 강탈하는 제국주의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등에 따른 민란이 끊이지 않아 혼란스런 정국이었다. (1) 경자향변(庚子鄕變) 양란(兩亂) 이후 조선조 후기에 들어와서 양반 사족(士族) 중심의 향촌 사회는 커다란 변화의 와중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
신안서원측에서 서원에 봉안되어 있던 상기(上記) 두 진상(眞像)이 빗물 등에 의하여 훼손되자 이의 문책을 두려워한 신안서원측이 꾸민 자작극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괴를 일으킨 남용하(南龍河)를 섬으로 귀양보내고, 나머지 연루자는 각처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소(呈訴) 당한 사람들은 영덕현에서 많은 고초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가 1747년 8월 4일로 이 사건으로 지역 향촌내의 갈등은 더욱 더 깊어졌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향촌내 사족간의 갈등의 뿌리는 영해향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지역에서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이 사건 이후에도 끊임없는 알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이 표면에 다시 드러나게 된 것이 영해향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덕향변의 연장선상에서 영해향변의 전개과정을 작자미상의 「경자향변일기(庚子鄕變日記)」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향변의 주역들은 서얼(庶孼)들이 중심이 된 신향(新鄕)과 적장자(嫡長子)들이 중심이 된 구향(舊鄕)으로, 사건의 배경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오면서 영조 48년인 1772년의 “통청윤음(通淸綸音)”, 정조 1년인 1777년 3월의 “정유절목(丁酉節目)”, 순조 23년인 1823년의 “계미절목(癸未節目)” 등에 의하여 종래의 서얼들에 대한 신분제약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 중앙 요로의 벼슬길이 열리는 등, 제한적이나마 서얼계층의 신분상승이 이루어지게 되는 정치상황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서얼들에 대한 중앙차원의 정책적인 배려가 지방의 뿌리깊은 사회적 관습의 벽을 넘기에는 아직까지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시대의 추세에 맞추어 영해의 신향들도 구향들에게 누차 자신들도 사족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신향들에 의하여 구향들에게 요구되어진 것은 구체적으로 향교와 향청(鄕廳)의 임원직에 대한 참여였는데, 이러한 향교와 향청의 임원직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지위상승의 요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향내의 수조권(收租權)을 이들 향청의 임원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까지 요구의 수준이 미치게 된 것이었다. 신향의 이러한 요구에 구향들이 반발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이 내부적으로 세(勢) 겨루기를 하면서 향내에 잠복하여 있다가 외부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839년 8월 최명현(崔命顯)이 영해부사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최부사가 영해에 부임하자 신향들은 최부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국면을 이끌었는데, 이에 반발한 구향들도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갈등은 향중 전체로 번져 나가게 되어, 급기야는 도내 전체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구향은 남인 계열이었으며, 신향은 노론 계열이었다. 부사 최명현은 노론 집권기에 별장(別將)이 되어 승지(承旨)에 오른 인물로 자연스레 신향의 편에 서게되었으며, 대개 노론은 서얼허통에 적극적이었다. 최부사가 영해에 부임하자, 신향의 박기빈(朴基), 남효익(南孝翼),권도익(權度益) 등은 부사의 책실(冊室)이며, 신향 권치기(權致基)의 인척인 진보의 최생(崔生)이란 사람을 통하여 부사와의 인연을 맺는 한편, 그들이 추천한 신향의 향원(鄕員) 한명을 인계서원(仁溪書院)의 장(長)으로 추천하여 승인을 받는 등, 향내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7월에는 부사로 하여금 인계서원을 방문하게 하는 등, 부사와의 유대 관계를 다져나가며 그들의 위세를 증대하여 나갔다. 이러한 와중에 1840년 8월 상정(上丁)에 있을 영해향교의 추계석전(釋奠)에 향교의 교임(校任)이 기존의 관례에 따라 석전의 헌관(獻官)을 부사에게 망보(望報) 하였는데, 부사는 향교에서 망보한 인사를 물리치고 다시 첩지를 내려 인계서원의 유생 중에서 헌관 2,3명과 집사 6,7명을 선임하도록 명령하였다. 구향이 중심이 된 향교에서는 부사의 이와같은 조치가 이전에도 없는 무례한 것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간주하여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구향은 구향대로 한번 망보된 차정(差定)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며, 부사는 부사대로 신향으로 차정(差定)하기를 독촉하는 한편, 영(令)에 따르지 않은 도약정(都約正)과 도유사(都有司)를 제명하고 체포령을 내리는 등 일은 더욱 더 확대되어 갔다. 마침내 부사가 신향인 권치기를 수별감(首別監)에 임명하자 구향인 좌수 주형렬(朱亨烈)과 별감 정상희(鄭象羲)가 이러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좌수 주형렬은 결국 체임되고 신향인 박기빈이 좌수로 차임하게 되어 신향은 일시에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구향들은 안동 호계서원·의성·군위·영양 등지의 서원에 통문을 주고 받으며, 이런 실상을 알리는 한편, 감영에 발명장(發明狀)을 내어 전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에 분격한 부사는 구향의 지도자격인 7명을 잡아들여 관문에서 소란을 피운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면서 곤장을 쳤다. 구향들은 다시 고변장(告變狀)을 감영에 보내고, 감영에서는 잡힌 사람들을 영덕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영덕에서 영덕현령 이장우(李章愚)가 이 사건을 재차 조사하여 이번 사건을 신분상승의 실현과 경제적인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은 제외하고 단순히 신구향간의 쟁임(爭任) 사건으로만 규정하여 감영에 보고하는 한편, 남효익, 박기빈, 권도익, 권치기를 데려다 조사하였다. 따라서 영덕현령 이장우의 보고에 의하여 감사는 향전을 쟁임지사(爭任之事)로 규정하고, 신구향 모두를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 감사의 명에 따라 잡힌 사람들은 각지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뒤이어 나온 국가 대사면령 으로 모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영해부사 최명현은 영덕현령에 의하여 봉고파직되어 관아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신향과 구향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신향들은 그들의 지위확보를 위하여 부단이 노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인계서원이 훼철되자 그들의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어 점차 그들의 세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860년대에 최수운의 동학이 이 지역에 전파되어오자 이들은 종래의 신분적인 제약을 동학의 평등이념을 통하여 변혁시켜 보고자 하여 동학에 많이 투신하여 그들의 힘을 내부적으로 갈무리하였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노력이 1871년 3월 11일에 있었던 신미아변에까지 미쳐 신향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여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일부 남은 사람들은 정부의 추적을 피하여 만주 등지로 솔권(率眷)하여 그 이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의 상실하자 해외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 「경자향변일기」에는 구향측의 인사로 박병주(朴秉周), 박진용(朴鎭容), 박태주(朴態周), 백홍운(白弘運), 남유식(南有拭), 백중엽(白重燁), 박영찬(朴英燦)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외에 고종 1년(1864년)에는 영덕에서 남강서원과 신안서원간의 당론(黨論)에 따른 충돌이 있었다. 남강서원은 남인 계열이고, 신안서원은 노론 계열 이 두계열간의 다툼은 당시의 어사 이도재(李道宰)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2) 신미아변(辛未衙變) 신미아변은 고종 8년인 1871년 3월 11일에 영해에서 이필제(李弼濟,일명 이제발)·최시형(일명 최경오)·강수(姜洙, 일명 강사원)·박영관(朴永琯)·김진균(金震均)·전인철(全仁哲) 등이 주도가 되어 500여명의 동학교도 및 향인들이 작당(作黨)하여 당시의 영해부를 습격하여 부사 이정을 살해하고 영해부를 점령한 대사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