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전기

  대내외적으로 여러가지 변란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지탱해오던 고려 왕조도 내부적으로는 현종 5년(1014)에 있었던 백관들의 녹봉의 부족을 경군(京軍)에 지급되었던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충당하려던 문신들의 처사에 분개한 상장군이던 김훈과 최질이 난을 일으켜 정치적 실권을 잡고 1년 여간 통치하다 실패한 무신란과 의종 24년(1170)에서 시작하여 원종 11년(1270)까지 근 100년 여간 지속되었던 무신란, 그리고 인종 13년(1135)에 일어난 묘청의 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사회기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경제적으로는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귀족들의 광대한 토지의 사유화와 이에 따른 수탈(收奪)과 탐학(貪虐), 불교의 흥성에 따른 사찰들의 대토지의 겸병 등에 의하여 농촌경제는 피폐되었으며, 농촌경제의 피폐는 국가재정의 근간이 되는 토지제도의 문란을 가져와 나라경제 자체의 붕괴를 가져왔다. 따라서 농촌지역과 도시지역에서 대규모의 유민(流民)이 발생하여 이들은 사회불안의 요소가 되어갔으며, 심지어 이들은 고려 후기 왜구들의 침략시에 왜구로 가장하여 일반 백성들을 상대로 약탈과 살상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는 내부적으로 지배층 내부의 국론분열이 크게 일어났는데, 권문세족으로 대표되는 친원(親元)의 보수세력과 친명(親明)으로 대표되는 신흥 사대부간의 정치적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론분열에 따른 정치적 혼란은 지배층 내에서도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어 올바른 개혁을 실행할 수 없게 되었으며, 고려를 지탱하고 있던 정신적인 기둥인 불교도 세속화로 치닫게 되어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점차적으로 고려조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民心)은 이반(離反)되어 갔다.
  외부적으로는 충선왕(1349∼1351) 이후부터 시작된 왜구들의 본격적인 노략질에 의하여 내부적으로 점차 혼란스러워지던 고려의 정치적, 사회적인 구조를 뒤흔들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고려 왕조는 대내, 대외적으로 안정을 찾지 못하고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하여, 결국 이러한 혼란스런 대내외 환경 속을 틈타 침입한 여진이나 왜구 등의 외적의 토벌과정에서 급격히 성장한 신흥 무인계급이 고려조의 중심적 지배계층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의 대표적인 인물인 이성계가 서기 1388년에 “위화도회군”을 빌미로 신흥사대부와 결탁하면서 일시에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후, 새로이 조선 왕조를 창건(創建)함으로써 고려 왕조는 결국 34대 474년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이렇게 새로이 개국한 조선 왕조는 무엇보다 먼저 민심의 안정과 회유를 1차 목표로 정하고 이를 위하여 제도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고려의 제도와 문물을 그대로 따르기로 하여 개국 초기의 혼란스러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한편, 점차적으로 제도와 조직을 개편하여 개국 이념의 실현과 통치의 원활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새로이 왕조를 세운 조선의 위정자들은 새로운 정치기반의 조성과 그들의 정치적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정치·행정조직 및 지방제도·지방조직에 대한 개편의 필요성을 점차 느끼기 시작하여 하나 둘 제도의 정비를 꾀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점차적인 제도의 정비에 따라 왕조의 교체에 따른 여파가 중앙으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파급되어 갔으며, 우리 지역에도 이러한 왕조 교체의 영향이 서서히 미치기 시작하였다.
  본래 영덕과 영해는 고려초에 영덕과 예주라는 행정 명칭을 가진 주군(州郡)으로 동해안 일대의 지방행정을 담당하여 왔는데, 고려 후대인 고종 46년(1259)에 들어와서 명주도(溟州道)에 일시 소속되었다가 충렬왕 16년(1290)에 다시 동계(東界)로 소속이 바뀐 후, 충숙왕 원년(1314)에 들어와서 경상도도 귀속되어 이후부터는 변경(變更)이 없이 경상도에 소속되어 조선시대 초기에 이르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지방제도의 변경 중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태종(1401∼1418) 14년(1414)에 단행된 8도체제의 확립이다. 그 전에도 도 단위의 구획을 위한 시도가 있었지만 태종대의 8도 체제의 확립은 이후 조선시대 말까지 우리나라 지방제도의 중요한 골격이 되는 개편이었다.
   태종은 지방통치의 원활화를 위하여 우선 전국을 8도로 나누고는 각 도의 책임자를 종 2품의 관찰사를 임명하였으며, 도(道) 밑으로 부·대도호부·목·도호부·군·현을 두고는 부에는 종 2품의 부윤, 대도호부에는 정3품의 대도호부사, 목에는 정3품의 목사, 도호부에는 종3품의 부사, 군에는 종4품의 군수, 혹은 지군사(知郡事), 현에는 종5품의 현령, 혹은 지현사(知縣事)를 두었으며, 혹 현보다 작은 규모에는 종6품의 현감을 두고 지방행정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구분과 지방관의 임명품계는 조선시대 후기 갑오경장 이후 1895년에 실시된 지방제도의 개편으로 지방제도가 완전히 바뀔 때까지 거의 그대로 존속되어 올 정도로 우리나라 지방제도의 분기점이 되었다.
  우리 지역의 경우에도 조선시대 전기에 이루어진 영해부와 영덕현의 체제가 영해군과 영덕군으로 각각 변경되는 1895년까지 아무런 변동없이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 따라서 영해부에는 종3품의 문관이, 영덕현은 종5품의 문관이 우리 지역의 목민관으로 부임하여 왔다. 따라서 우리 지역은 행정적인 측면에서의 제도변경은 조선시대 전기간 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전국적인 지방제도 개편 중에 제일 먼저 이루어진 분야는 개국초부터 중요시되던 군사제도 부분이었다. 태조(1392∼1398)는 즉위 후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군사조직의 정비를 꾀하는 한편, 즉위 6년(1397)에 이르러서는 종래까지 각 도단위(道單位)에 설치된 병마절제사를 없애는 한편, 대신에 도내에 2개 내지 4개의 진(鎭)을 설치하여 첨절제사를 두고, 좌우익에 해당하는 군현을 배속시켜 비상시에는 첨절제사가 이들을 지휘하여 침입한 외적을 물리치도록 하는 거진(巨鎭) 중심의 군사제도를 두었다.
  조선초에 들어와서도 우리 지역은 왜구의 주요 침략지역이었다. 태조 5년(1396) 8월 23일(음력)에는 왜구가 영해에 침입하여 영해성을 함락시켰으며, 이해 11월 13일에는 경상도 도절제사 최운해(崔雲海)장군이 영해에까지 와서 왜구를 쳐죽였으며, 이해 12월 9일에는 최운해와 경주부윤 유양(柳亮), 안동부사 윤저 등이 영해에서 왜구들과 싸움에서 패하여 영해 서쪽에서 진을 치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왜구의 괴수 5명이 왜선 60척을 이끌고 항복하여 오는 등, 조선초부터 이 지역은 국방의 전초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앙에서는 영해부에 영해진을 설치하고, 태조 6년(1397) 5월 21일에 첨절제사를 두어 영해부사가 첨절제사를 겸하게 하는 한편, 영덕현령과 청하현감를 좌우익으로 삼도록 하는 첨절제 영(營)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지방군사제도의 개편으로 생긴 첨절제사 영(營)은 별도로 설치된 것이 아니고 영해도호부의 도호부사가 첨절제사를 겸직하는 제도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군제인 진관(鎭管)체제의 특징으로 평시에는 관할행정구역을 다스리다 전시 혹은 비상시가 되면 정해진 군사적 지위를 갖고 계통에 따라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복속되어 비상시를 대비하는 그런 체제였다. 이후 도절제사 제도가 부활되어 첨절제사(僉節制使鎭) 진영은 도절제사 지휘를 받으며, 정규군으로의 확고한 지위를 가졌다.
  이러한 군사제도의 개편과 더불어 태종대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태종대에 이르러 왕권이 안정되자 군사적인 면보다 행정적인 면을 중시하여 동왕(同王) 14년(1414)에 8도체제를 확립하고 지방행정제도를 일신시킨다.
  이때 영해는 태종 13년(1413)에 도호부사영(太宗十三年癸巳例改爲都護)를 두고 종3품의 문관을 도호부사로 임명하였으며, 영덕은 태종 15년(1415)에 바닷가에 있다고 하여 지군사(知郡事)를 두었다가 다시 세조 12년(1466)에 이를 고쳐 현령을 두는 한편, 영해부의 영현(領縣)으로 소속시켰다.
  조선초에 들어와서 지방행정단위의 또 하나의 변화는 고려시대 이래로 내려온 주현(主縣)·속현(屬縣)·부곡(部曲) 등의 말단행정단위의 정비이다. 고려시대 이래로 이들 속현과 부곡 등은 지방행정 조직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는데, 조선초에 들어와서는 주현의 정비와 함께 이들 속현과 부곡의 주현화(主縣化)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조치가 이루어지게 된 요인으로는 양반관료체제에 따르는 중앙집권체제 강화가 제일 큰 요인이 되었으며, 이들 속현들의 주현화 변경 순서로는 주읍(主邑)과 멀리 떨어져 있어 왕래가 불편하며, 관리들의 횡포가 심하여 민폐가 발생하는 지역 등의 속현을 그 현의 자립여부를 따져서 우선적으로 주현으로 승격시켜 나갔는데, 이러한 정책에 의하여 당시 영해부를 둘러싸고 있던 영덕현·진보현·청송도호부·평해군 등은 중앙에서 외관이 파견되는 주군현(主郡縣)으로 독립하여 가고 주읍(主邑)에 종속되는 속현만 남게 되었다. 이 당시 영덕현에 속한 속현은 없었지만, 영해부에는 2개의 속현이 남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양과 청기현이다.
  이들 영양현과 청기현은 17세기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주현인 영해부로부터 분리되어 나갔는데, 영양은 인조 11년(1633)과 동왕 18년(1640), 그리고 현종 5년(1664)년 4월 6일, 이해 8월 6일에 조암 등이 영해부로부터 분설해주길 상소하였으며, 숙종 1년(1675) 9월 19일에는 조책이, 동왕 7년(1681)에는 유생 남시직 등의 인사들이 영양현의 분설(分設)을 요구하는 상소를 거듭 올린 결과, 마침내 숙종 7년 (1681)에 설관분사(設官分司)의 뜻을 이루어 영양현으로 분리되어 나갔으며, 오늘날 영양군에 속해 있는 석보와 청기는 숙종 8년(1682) 1월 15일 영해의 주헌문(朱憲文)의 상소에 의하여 영해부에 다시 소속되어 남아 있다가 1906년에 가서야 비로소 영양군으로 편입하여 갔다. 단 청기현의 기록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기까지 기록이 없어 언제 독립되어 갔는지 알 수 없다.
  그 외 최하위 지방행정조직의 하나였던 부곡(部曲)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점차 폐지되어 갔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되는 1530년대에는 부곡의 존재는 거의 소멸되었

다. 따라서 위의 책 고적조(古跡)조에 등재되어 있는 부곡의 명단은 실제는 없어진 것들의 명단만 실어 놓은 것이다.
  영덕에 있었던 부곡으로는 현재 오보리 지역으로 추정되는 오보부곡(현(縣)의 동해변)과 현재 남정면 구계리 지역으로 추정되는 이이(기,사)아부곡(伊已,己,巳,牙部曲)이 있었으며, 그 외에 오늘날의 지품리 지역의 북쪽인 황장재 부근의 지품부곡이 있었다.
  앞의 책에 의하면 당시의 지품원(知品院)이 지품 부곡내에 있었다고 하며, 지품원의 위치를 현의 북쪽 44리에 위치하고 있다(在知品部曲距縣四十四里)고 하고, 또한 지품부곡의 위치를 이 보다 먼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在縣七十里)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지품부곡의 중심지가 현의 북쪽 70리에 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품부곡의 중심지를 황장재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한편 이이아부곡이 현 남정면 구계리로 추정되는 이유로는 현재의 남정면 남정리는 조선시대의 영덕현의 남역(南驛)의 소재지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역원(驛院)조에 의하면 남역은 “현의 남쪽 21리에 있다(在縣南二十一里)”고 하는데, 이이아부곡은 위의 책에 의하면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在縣南二十五里)”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남역보다 4리 정도 내외의 거리를 두고 있는 구계리의 지명이 오래 전부터 하부(下部, 鰕浮)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과 군내의 자연부락으로서는 드물게 200호의 집단마을을 형성하여 온 것으로 보아 이를 추정하여 볼 수 있다.
  영해부내에 있었던 부곡으로는 석보부곡(부서(府西) 60리)와 수비부곡( 부서 90리)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들 지역은 오늘날 영양군 지역으로 영덕군의 관내를 벗어나 있기 때문에 그 위치와 소멸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이와같이 조선시대의 전기에 있어서 군사와 행정제도, 특히 지방제도는 중간 중간에 다소간의 변경은 있었지만 개국초에 이루어진 제도의 골격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으며, 우리 지역도 거의 변동없이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2. 조선 중기

16세기에 들어오면서 세계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로 서서히 변화를 겪기 시작한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전국시대의 혼란한 일본 열도를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그의 야심을 대륙 침략에 두고 대륙의 관문인 한반도를 넘보기 시작하는 등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몇 차례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서 싸움의 꼬투리를 찾고 있던 풍신수길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에 전국시대의 풍부한 전투경험과 서구의 신식무기로 무장한 왜군을 부산포에 상륙시키면서 그의 야망을 들어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은 선조 31년( 1598)까지 7년간 지속된 미증유의 대전쟁으로 당시의 조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끼친 16세기의 대사건이었다.
  국내적으로는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으며, 대부분의 문화재가 방화, 약탈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며, 난에 의하여 사회경제적 토대인 농촌사회의 붕괴로 기존의 체제가 무너져 사회 전반의 기강의 문란(紊亂)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7년 여간의 전쟁으로 농토가 피폐하여져 경지면적이 축소되어 국가경제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커다란 고통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이 싸움의 한쪽 당사자인 일본도 풍신수길(豊臣秀吉) 정권이 무너지고 덕천가강(德川家康)이 정권을 잡아 막부시대를 열었으며, 이 난의 원병(援兵)으로 참여한 명나라도 새롭게 일어난 청나라에 멸망을 당하는 등, 임진왜란은 동양 일대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이러한 임진왜란에 뒤이어 일어난 병자호란은 미쳐 임진왜란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한 조선에 또 한번의 불리한 타격을 입혀 조선 백성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가져다 주었다.
  이러한 2번에 걸친 건국 이래 미증유의 전쟁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개국 초에 정립되었던 각종의 행정제도와 군사제도가 실제적인 국난을 대처하는 데는 많은 취약성을 드러내게 되었다. 따라서 기존의 조직과 제도로는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국난에 대비하기는 곤란할 것이란 자각이 도처에서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각종 제도의 개편을 서두르게 되었다.
  특히 양대 전쟁의 후유증으로 발생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 대처하는 데는 기존의 제도로는 많은 문제점이 있어서 전란으로 인한 피해복구를 위하여 필연적으로 제도의 개혁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정부차원에서의 중앙관제와 지방관제에 대한 개편의 필요성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중앙 조정은 우선적으로 중앙 정부의 기능을 개편하여 중종 12년(1517)에 여진과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고는 1522년에야 다시 상설기관으로 정립된 비변사를 국방문제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업무까지 간여하도록 하여 비변사의 기능을 크게 강화시키는 한편, 그 대신에 이러한 기능을 하던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시켰으며, 대동법과 균역법을 새로이 도입, 시행하면서 선혜청이나 균역청 등의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등, 중앙관제의 개편에 일차적 목표를 두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중앙관제의 활발한 개편에 비하여 지방제도의 개편에는 다소 소극적이었다. 초기에는 의욕을 갖고 추진하였으나, 각 지방의 이해관계와 저항 등에 의하여 이의 개편에는 점차 소극적이 되어 갔다.
  따라서 이러한 소극적인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우리 지역의 제도변화는 거의 없었다. 결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도 영덕현은 개국초 이래로 관할구역이나 제도면에서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며, 다만 영해부의 속현이었던 영양현이 숙종 1년(1675)에 영양현으로 분설(分設)하여 나감에 따라 영해도호부의 관할구역이 약간 축소된 것 외에는 우리 지역은 아무런 변화를 겪지 않았다고 하겠다.
  한편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중앙제도나 지방제도에 있어서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지만 사회·경제적으로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와 새로운 역사발전의 계기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의 대표적인 것이 신분계층의 동요라고 할 수 있다. 종전까지 엄격한 반상(班常)의 구별에 의하여 지탱하여 오던 조선사회가 이 양난을 통하여 일부 부유한 상민들의 신분상승과 몰락 양반들의 조락(凋落)과 서얼들의 신분상승 등을 통한 급격한 신분계층의 해체를 가져오게 되는데, 이들 상민의 신분상승의 계기는 전쟁 중에 모자라는 군량미의 조달을 위해 일정량의 군량미를 헌납하면 신분의 제약을 풀어주도록 한 납속책(納粟策)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재력이 있는 상민이나 서얼들, 이외에 여러 계층의 백성들이 이의 혜택을 입어 서얼허통(庶孼許通)·병사들의 면역(免役)·노비의 양인화(良人化) 등을 가져와 신분계층의 활발한 이동이 있게 되었다. 이러한 납속책 이외의 것으로는 양난에 참여한 향리와 양반 등이 전란의 극복에 따른 포상 등에 따른 관직의 수여로 향리들과 양반들의 중앙정부에로의 활발한 진출 등이 사회적 신분동요에 큰 영향을 미쳤다.

1) 임진왜란·병자호란과 영덕

  우리 역사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임진왜란은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군들이 부산포에 침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가 벌어진 시점은 제일 먼저 침입의 선봉에 선 왜군장수 소서행장이 이끄는 18,000여명의 왜군이 다음날 4월 14일에 부산성을 공격하면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7년에 걸친 대전쟁은 한반도 전체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 왔다. 이러한 임진왜란에 뒤이어 발발한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아직 전란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인조 14년(1636)에 일어난 전쟁으로 병자호란 자체는 싸움의 기간이 수개월에 불과하고 싸움터가 한강 이북에 국한되어서 사실상 경상북도 전역과 우리 지역의 인사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사정으로 이 지역 인사와 병자호란과의 관계가 뚜렷하게 드러난 것이 없는 실정이다.
  다만 영덕출신의 봉사 유시경(奉事 柳時)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대왕을 모시고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서울의 여러 의사들과 의병을 조직하여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또한 영덕사람 강계남(姜誡南)은 병자호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서울)으로 올라가다가 경기도 광주 부근의 쌍령(雙嶺)에 이르러 인조가 청나라와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은거할 정도의 병자호란과 우리 지역과의 관계는 소략하다.
  한편 부산성을 공격한 왜군들은 10여 시간만에 부산성을 함락시킨 후, 바로 다음날에 동래성을 공격하여 이마저 함락시킨다. 이후에 왜군들은 전열을 정비하여 그 진로를 좌·중·우 3로(路)로 삼분(三分)하여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였는데, 이들은 불과 보름도 안되어 전 조선을 유린할 정도로 신속하게 공격을 하였다.
  이렇게 진격해 온 왜적들은 각처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전열을 재정비한 조선군, 그리고 원병 온 명군 등에 의하여 구축될 때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약탈과 방화, 그리고 무고한 백성들의 살상 등의 갖은 만행을 저질렀으며, 결국 의병과 조선군, 명군의 반격에 의하여 울산을 중심으로 하는 경상도 남부지역으로 구축되었다가 쫓겨 갔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당시의 왜군들의 서울 공략을 위한 그 진격로는 다음과 같으며, 다행히도 왜적의 진격로에 우리 지역은 비켜 있어 이들 진공시의 피해는 거의 없었다.

    중 로 : 동래→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

    좌 로 : 동래→기장→좌병영→울산                                         ↑
           경주 → 영천 → 신녕 → 의흥 → 군위 → 비안 → 용궁 → 문경
                          여주→양근→용진나루→경성동로
                             ↑
                      → 충주 →
                            ↓
                          죽산→용인→한강
    우 로 : 동래→김해→ (출우도)→성주→무계→지례→금산→추풍령→영 동→청주→경기도

 왜군과 조선군 사이의 최초 전투는 4월 14일에 있었던 부산성 전투로 왜군들은 쉽게 부산성을 점령하리라 생각하였으나, 부산진 첨사 외에 조선군들이 일치단결하여 성을 굳게 지키자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부산진 첨사는 정발(鄭撥) 장군이었으며, 정발 장군은 왜군의 항복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대적하기로 하고 군사들을 독려하며 적을 막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창·칼, 그리고 활로 무장된 아군에 비해 신식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전투 경험이 있는 왜적들을 막아내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결국 고군분투하였지만 이 싸움에서 정발 장군을 비롯하여 수많은 아군측 병사들이 전몰하였다.
  이 싸움에서 영덕읍 화개리 출신의 장희식(張希) 장군도 정발 장군 휘하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참전하였는데, 장희식 장군 또한 밀려드는 왜군들을 온몸으로 막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렇게 보면 우리 지역은 부산성 전투에서 순국(殉國)한 장희식 장군을 통하여 임진왜란 초부터 왜군과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는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질긴 인연을 맺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임진왜란은 7년간 지속되면서 관군은 관군대로 일본군을 토벌하기 시작하였으며, 관군에 들지 못한 전국 각지의 백성들과 선비들은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들을 물리치기 시작하였는데, 관군 및 의병으로 참여하여 일본군을 무찌른 우리 지역 출신 인사들도 많았다.
  관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대적한 인사로는 경주부의 판관으로 경주성 수복전투에 큰 공을 세운 영해 원구 출신의 박의장(朴毅長) 장군, 하양 전투에서 공을 세운 박홍장(朴弘長) 장군, 영해의 남의록(南義祿)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영덕 출신의 김난서(金鸞瑞) 영일현령, 김제군수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사한 영해 출신 정담(鄭湛) 장군이 있으며,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대적한 이로는 찰방 조현(趙玹), 생원 이함, 유학 백현룡(白見龍) 등이 있는데, 이들은 멀리 홍의장군 곽재우의 화왕진(火旺鎭)에 합류하여 왜군들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전투가 마침내 우리 지역에도 미치게 되어 풍림 신규년(楓林 申年) 등은 영덕·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켜 창수면 위정골에서 남하하는 일본 왜적을 맞이하여 종일 전투를 벌여서 결국 대승을 거두고는 전사하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때 영해지역으로 내려온 왜군은 모리길성(毛利吉城)과 추월종장(秋月種長), 고교원종(高橋元種)의 부대로 이들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강원도로 침입하여 일부는 함경도 안변으로 올라가고, 일부는 평해를 거쳐 경상도로 침입하였는데, 이렇게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왜군을 막기 위하여 전성균관전적(前成均館典籍)인 유종개(柳宗介)의 의병부대가 봉화에서 접전을 벌였으나 패퇴하여, 의병장 유종개 이하 대부분의 군사들이 장렬하게 전몰하였다.
  이 기세를 타고 왜군들은 평해 백암을 지나 영해의 서쪽 지역인 오늘의 창수면 삼계리와 수리 쪽으로 진격하여 왔는데, 왜군이 영해 경계에 들어온 것은 1592년 7월 25일(음력)이후로 생각되는데, 이는 의성인으로 당시 경상도 관찰사인 김수(金)의 막료였던 이탁영(李擢英)의 「정만록(征蠻錄)」에 실려있는 7월 25일자 장계에 의하면 “영해, 영덕…. 등 14관(官)은 적이 침범하지 않았다.” 기록과 “왜군이 강원도로부터 내려온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병사(兵使)와 영해부사가 적절한 지역에서 매복하여 적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의 책 승정원개탁 좌감사(左監司) 장계편에 의하면 “좌도(경상북도)에서. 6월 10일 후로 … 영해, 영덕 등의 10여 읍은 적이 침범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 안동, 예안, 봉화는 적이 침입하였고, 또 강원도에서 내려 온 왜군이 영해부를 함락하였으니, 그 나머지 연해의 읍도 모두 영해부와 같은 지경에 있다”고 기록한 것과 우리 지역에 남아 있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왜군이 영해 경내에 들어온 것은 7월 25일 이후 8월초 사이로 생각된다.
  당시의 우리 지역에서 왜군과 싸운 지휘관으로는 영해부사 한효순(韓孝純)과 영덕현령 안진(安璡), 그리고 축산포만호 오사청(吳士淸) 이었으며, 영해부사 한효순은 영해싸움에서의 공로로 1592년 8월 7일에 경상좌도 관찰사로 특진하였다.
  한편 영해전투에는 우리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들이 참전하였는데 대흥 백인국(白仁國), 신규년(申年), 배태원(裵泰元) 등의 의사들이 지도자가 되어 참여하였다. 이들은 남하하는 적을 맞이하여 정규군과 함께 창수면 위정계곡에 매복하여 적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왜군의 선발대를 본진으로 오인 공격하는 바람에 도리어 후속 왜군의 대병력에 역포위되어 신규년 의병장을 비롯한 다수의 의병들이 장렬히 전사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다.
  한편 왜군이 영해 경내로 들어오자 처사 박응천(朴應天)은 영해향교의 오성위패를 등운산 밑 범흥암석(현 향교암) 사이에 모셨다가 왜군이 물러난 후 향교에 환안(還安)하였다.
이외에 영덕 출신의 김기하(金器夏)·김성하(金成夏) 형제는 정유재란 때에 울산 서생포로 가는 창암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로 김기하는 전사하고 김성하는 명장(明將) 마귀(麻貴)와 함께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등 임진왜란 전기간 동안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의 항왜섬멸의 충성심은 눈부셨다고 할 수 있으며, 일본군의 주력부대의 통과지점이며 후방보급로인 대구의 공산성 전투에서도 영해 출신인 이함(李涵)·백인경(白仁鏡) 같은 분이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한편 당시의 영해부, 영덕현의 많은 인사들은 영남 우도(右道) 지역의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진에 참가하여 많은 왜적을 무찔렀는데, 당시 이 지역의 인사들로 여기에 참여한 이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백현룡(白見龍), 이함(李涵), 남경훈(南慶薰), 남사명(南士明)

  특히 일본군이 재차 침입한 정유재란 때는 이 지역의 많은 인사들은 또 다시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진에 참여하여 수많은 왜적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홍의장군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화왕산성 진영에 참여한 이 지역 출신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 덕〉:
김사지(金四知), 신철(申澈), 정이성(鄭以惺), 최수(崔琇),윤사휘(尹士輝), 안희성(安希聖), 신홍제(申弘濟), 신의제(申義濟), 신경제(申經濟), 김흔(金昕), 신겸제(申兼濟), 김욱(金旭), 신흘(申屹), 김봉서(金 鳳瑞), 김난서(金鸞瑞)

〈영 해〉:
박의장(朴毅長),신준민(申俊民),박유(朴瑜),이함(李涵), 김인제(金仁濟), 권의범(權宜範), 권응주(權應周), 신원영(申元英), 백현룡(白見龍), 신원걸(申元傑), 신덕룡(申德龍), 이태운(李泰運), 권의정(權宜正), 박문걸(朴文傑), 남광세(南光世), 박희안(朴希顔), 이형운 (李亨運), 정승서(鄭承緖), 이번(李蕃), 신정립(申挺立), 권의각(權宜恪), 이시청(李時淸), 남의록(南義祿), 남사문(南士文), 남율(南慄), 남사명(南士明), 남경생(南慶生), 백중립(白中立), 박염(朴琰), 이숙(李菽), 오수눌(吳受訥), 남사필(南士弼), 조검(趙儉), 조전(趙佺) 권성(權誠), 백인경(白仁鏡), 박응장(朴應長), 백구인(白求仁), 백민수(白民秀), 조건(趙健), 주식(朱植)

〈영 양〉:
조임(趙任), 남윤조(南胤曹), 조광의(趙光義)

3. 조선 후기

1) 신분변동과 서원 및 사우(祠宇)의 증설(增設)

  양난 이후에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비변사 기능의 강화와 재정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일반백성들의 조세의 부담을 줄여주기 위하여 선혜청과 균역청을 새로이 설치하는 등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의 도입과 변경이 있었지만, 각 지역에 해당되는 지방제도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중앙 정부의 제도개편 가운데, 큰 폭의 변화를 겪은 분야는 군사제도 분야인데,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종래의 5위(衛)의 기능이 붕괴되어 실제의 사태를 대비하는데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따라서 전쟁 중에 중국의 것을 본받아 선조 27년(1594)에 훈련도감을 설치하는 것을 필두로 군사제도 개편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개편은 여러가지 사정상 그 시행이 미루어져 오다가 19세기 후반에 가서 대폭적인 개편으로 이루어지는데, 19세기 후반의 대대적인 제도개편은 외부적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침탈을 막고, 내부적으로는 삼정의 문란과 갑신정변, 동학혁명 등으로 야기된 여러가지 제도적 모순점을 개선하고, 민심을 하나로 모아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하는데 있었다.
  대체로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영덕지역은 제도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상당한 정도의 변화를 겪는다. 특히 신분계층의 이동(성씨의 이동, 거주의 이동)과 신분계층 자체내의 지위상승 욕구에 따른 변화가 두드러졌는데, 신분이동의 경우는 전기에 있어서 영덕의 8성(姓)과 영해의 6성(姓)이 후기에 이르러 영덕이 20성으로 늘어나게 되고, 영해가 18성으로 늘어나게 될 정도로 이동이 많았으며, 신분계층내의 지위상승 욕구는 조선시대 이 지역 향촌 사회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흔들었던 “향변(鄕變)”으로까지 진행될 정도로 그 변화의 정도는 극심하였다.
  이러한 변화와 변동을 바탕으로 점차 후기에 들어오자 신분의 갈등은 문란한 삼정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시대를 약속하는 동학이 뒤섞인 가운데 마침내 1871년에 이르러 “신미아변(辛未衙變)”이라 일컫는 대규모 민란이 영해를 중심으로 발생하게 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키게 된다.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제도의 개혁은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알려진 1894년의 행정제도의 개혁이다. 갑오경장은 고종31년(1894)부터 시작되어 1·2·3차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조선시대 후기의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준 대개혁이었다.
  갑오경장의 1차 개혁은 우선 정치제도의 개편에 중심을 두어 혼란스런 국내 정국을 안정시키고 점증하는 외세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하였으며, 2차 개혁은 중앙 정부의 기구개편과 더불어 지방제도의 개혁에 그 무게를 두어 중앙과 지방과의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추어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하였다.
  특히 우리 지역에도 영향을 미친 지방제도의 개편은 고종 32년인 (1895) 5월 26일 지방제도 개정령(改正令)의 공포에 따라 시작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전국의 행정구역이 통폐합되어 23부 337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당시 개편의 특징은 중간 행정기관인 목(牧)과 말단(末端) 행정기관인 현(縣)이 없어지게 되어 행정의 절차가 간편해지고 조직이 축소화되는 방향으로의 개편이었다.
  이때 영덕과 영해는 영해부 자체가 없어지면서 안동부의 관할로 소속되었다. 그리고 영해부는 영해군으로, 영덕현은 영덕군으로 영양현은 영양군으로, 각각 승급 개편되어 군(郡)에는 군수(郡守)를 두게 되어 영덕군수, 영해군수에 의하여 각기 지역별로 동일 품계의 군수가 부임하여 수평적인 행정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 부와 현의 위치에서 영현(領縣)이나 속현(屬縣)의 관계에서 상위의 행정기관의 감독을 받던 제도의 폐지를 의미하며, 종래의 주·부·군·현간의 영속(領屬)관계에서 모두 독립되어 군(郡)으로 승격됨에 따라 대등한 지위를 부여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지방제도의 정비와 함께 지방관이 갖고 있던 행정권과 사법권, 그리고 군사·경찰권을 분리하여 행정권만 지방관이 갖도록 하고 사법권은 1심인 지방재판소와 2심인 고등재판소에 넘겨주었으며, 경찰권은 각 도의 관찰사 관할 아래에 새로이 신설한 경무관의 지휘하로 넘겨주어 종래의 지방관의 권한을 행정에만 국한하도록 대폭 축소시켰다.
  고종 33년(1896) 8월 4일에는 전국 23부가 다시 13도로 정비되었으며, 이를 다시 7부·1목·331군으로 세분하였다. 이 때 경상북도는 41개의 군으로 정비되었다.
  이렇게 새로이 개편된 군도 영역의 대소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누어 차별화시켜 관리를 임명하였는데, 영덕과 영해는 4등급의 군으로 결정되어 1914년의 부군도(府郡島)가 통폐합되어 영해군과 영덕군이 합쳐 새로이 영덕군이 탄생할 때까지 그대로 4등급의 군으로 이어져 왔다.
  조선조 후기에 있어서 우리 지역 향촌사회내의 또 하나의 흐름은 조선시대 지배계층인 양반관료사회의 세력층임을 나타내는 생원과 진사 등의 급제자가 급격히 증가한 점이다. 이들 시험의 급제자는 대개 유학(儒學)의 소양을 갖춘 문학인(文學人)들로 이러한 급제자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지역의 학문적 바탕이 튼튼하였다는 것으로 이 시기를 영덕 유학(儒學)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역외(域外)이던지 역내이던지 이러한 신분계층의 이동은 향촌사회의 세력구도와 토지의 소유, 조세의 수취권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관계를 잘 나타내어 주는 것이 각 문중에서 집중적으로 건립하기 시작하는 서원과 사우(祠宇)들이다. 이들 서원과 사우을 건립하여 선현들과 선조들을 배향 혹은 제향하는 한편, 향촌사회에서 각 문중의 거처로 삼았다. 따라서 군내에 세워진 서원과 사우를 통하여 향촌사회의 내면을 살펴볼 수 있다.

(1) 서원과 사우

  대개 서원과 사우는 엄격한 의미에서는 구분되지만 여기서는 서원과 묶어서 살펴보기로 한다. 서원의 건립목적은 선현봉사(先賢奉祀)가 우선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교육기능을 확대하여 사교육기관(私敎育機關)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한편, 향촌 자치기능의 일정부분을 담당하는 향촌 자치운영기구로써의 역할도 하였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들어와서는 양반들 사이에 동족 내지 가문의식에 의하여 조상의 제향처(祭享處) 내지 문중의 기반처(基盤處)로써 서원이 건립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 서원의 설립은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입지를 공고히 한 점도 있지만 지역의 학문적 자극을 가져와 각 지역에서 많은 유학자와 관인(官人)을 배출하는데 기여하였다.
  표〈2­2〉와 〈2­3〉은 조선시대에 우리 지역에 설립된 서원과 사우의 명단이다. 표에서 보듯이 영덕에서 제일 먼저 건립된 것은 남강서원(南江書院)으로 1568년에 영덕현령 정자(鄭磁) 등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 외의 대부분의 서원과 사우는 160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이들 서원의 배향 및 제향인물의 면면을 보면 일부 고려대(高麗代)의 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대개 조선시대의 인물들로 거의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를 보아 이들 서원과 사우들은 지역 향내의 교육적인 기능보다 문중의 향내 기반처로써의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으리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남강서원의 창건은 "영영승암"에는 유경정미(1607)이고, "남강서원사적기"에는 융경 3년 (1569)으로 나오나, 창건 당시의 현령 정자의 기문에 의하면 무진(1568) 봄이라 하였으므로 정자의 기문으 기준으로 하였음)
1981년 영덕군지 , 영영승람

 
  이러한 서원과 사우의 설립과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우리 지역의 학인들 중에 생원과 진사시험인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는 숫자가 급격히 증가하였으며, 대과인 문과에 급제하는 숫자도 많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것도 이러한 서원과 사우의 증가에 의한 영향으로 판단되어 진다.

(2) 조선시대 영덕과 영해의 사마시와 문과 합격자 명단

  다음의 표〈2­4〉와 〈2­5〉는 사마방목에서 발췌한 영덕과 영해지역의 생원·진사의 명단이다. 그리고 사마방목에 등재된 영해지역의 명단 가운데는 영양지역의 일부 인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조선시대 숙종 이전까지는 영양은 영해부의 속현으로 존재하였기 때문에 사마시에 합격하더라도 영해부에 포함시켜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태조부터 고종 31년(1894)까지 생원과 진사시험은 총 230회가 시행되었는데, 현존하는 사마방목에는 186회분만 등재되어 있어 상당부분은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지역의 생원과 진사시험의 등재자 중에 몇몇 인사들의 명단도 누락될 수도 있을 것이다.
  표<2-6>은 태조 원년 이래 고종 31년(1894)에 과거제도가 폐지되기까지 500여년 동안 이루어진 과거시험에 급제한 역대 인명 중에 영덕과 영해지역의 인물들만을 국조방목(國朝榜目)에서 발췌하여 실은 것이다.
  대개 조선시대에 있어서 관리의 채용방법은 채용시험인 과거(문과, 무과, 잡과)를 통하거나, 음직(蔭職)이라 해서 고관과 충신, 공신 및 유현(儒賢) 후손 중에서 선발하거나, 숨어 있는 인망 높은 사림(士林)들 중에 천거하여 임명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과거를 통하여 임용되는 것이 가장 정상적으로 관계에 진출하는 길이었으며, 이렇게 진출한 이들은 조선시대 500년 동안 각계 각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태조 원년 이래 고종 31년까지 우리 지역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문과에만 국한)한 이는 세종대의 정자영(鄭自英)을 포함하여 도합 44명으로 (국조방목에 등재된 명단임) 이들은 우리 지역이 학문의 고장임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2) 조선 후기의 지역의 사회적 갈등

  조선시대 후기인 19세기에 이르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던 국제정세는 일찍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량생산체제를 가진 서구 열강들이 자국의 원료공급 및 상품판매용 시장을 확보하기 위하여 타국의 영토를 강탈하는 제국주의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으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등에 따른 민란이 끊이지 않아 혼란스런 정국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상업농(商業農)이 태동하기 시작하였으며, 수공업분야에 있어서도 가내(家內)의 부업적(副業的)인 수준에 벗어나 점차 전업(專業)적인 수공업자가 생기기 시작한 시기였다.
  특히 1791년에 발효되었던 신해통공(申亥通共)에 의하여 사상(私商)과 도고(都賈), 장시(場市)에 대한 금령이 해제되자 전국 각지에서 장시가 우후죽순으로 생기기 시작하여 물품의 유통을 촉진시켰다.
  우리 지역에도 1830년대 이전에 영덕에서는 읍내, 식율, 장사장이 개설되었으며, 영해에서는 영해부시장, 석보시장이 개설되어 일반 백성들의 상거래와 물물교환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급변하는 국내외 환경의 변화 속에 지역에서는 향촌사회에서는 변화하는 세상에 맞추어 신분상승과 향촌사회의 경제적인 이해관계에서 우선권을 주장하고자 하는 향촌내의 갈등관계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대표적인 것이 신향(新鄕)과 구향(舊鄕)으로 나누어 일대 격돌을 벌인 소위 “1840년 경자영해향변(庚子寧海鄕變)”이다.
  경자향변에 뒤이어 경주인 최제우가 서학에 반대하여 창교(創敎)한 동학이 “인내천(人乃天)” 이란 이념을 갖고 이 지역 일대에 포교를 펼치자 전통적인 신분제약에 억눌려 지내던 일반 백성들과 향변으로 세력을 잃은 일부 유생들이 이에 가입하여 동학을 신봉하기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1871년 3월에 교조신원(敎祖伸怨)운동이라는 명분으로 전국 최초로 동학전쟁을 일으킨다. 이것이 1871년의 3월 11일의 영해 신미아변(辛未衙變)이다

(1) 경자향변(庚子鄕變)

  양란(兩亂) 이후 조선조 후기에 들어와서 양반 사족(士族) 중심의 향촌 사회는 커다란 변화의 와중에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내부적으로는 사족내의 신분의 동요와 외부적으로는 기존의 사회경제적인 토대의 붕괴에 따른 혼란 등으로 종래의 사족으로서의 지위가 점차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서도 이러한 추세에 따라 사족내의 내적인 동요가 있었는데, 이것이 사족내의 신분상승운동과 겹쳐서 1840년에 들어와서 향촌내의 사족간의 갈등이 있었다. 소위 경자향변, 영해향변, 혹은 영해향전(鄕戰)(이하 영해향변)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이 보다 앞서 영해향변이 일어나기 백여년 전인 1744년 10월 26일에 영덕현의 신안서원을 둘러싼 사족간의 갈등이 있었는데, 그 대략적인 내막은 영덕현에 사는 신세적(申世績)외에 9인이 야밤에 신안서원(新安書院)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주부자(朱夫子)와 문정공 송시열의 진상(眞像)을 훔쳐 불태운 사건이 있었다는 상소에 따라 영조 임금이 영남어사 한광조(韓光肇)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도록 하는데서 부터 사건이 시작되었다.
  어사 한광조는 다년간의 조사 후에 1747년 6월 15일에 영조 임금을 친히 배알하면서 이 사건을 보고하는데, 보고에 의하면 이 사건은 영덕현 내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고가(故家)와 대족(大族)인 남인 계열과 새로이 신향이라 하는 서인 계열의 신안서원간의 알력이라고 결론 짓고, 그 책임을 신안서원에 있다고 하였다.

  신안서원측에서 서원에 봉안되어 있던 상기(上記) 두 진상(眞像)이 빗물 등에 의하여 훼손되자 이의 문책을 두려워한 신안서원측이 꾸민 자작극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변괴를 일으킨 남용하(南龍河)를 섬으로 귀양보내고, 나머지 연루자는 각처에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고 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정소(呈訴) 당한 사람들은 영덕현에서 많은 고초를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 때가 1747년 8월 4일로 이 사건으로 지역 향촌내의 갈등은 더욱 더 깊어졌다고 하겠다.
  이와 같은 향촌내 사족간의 갈등의 뿌리는 영해향변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지역에서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이 사건 이후에도 끊임없는 알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이 표면에 다시 드러나게 된 것이 영해향변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영덕향변의 연장선상에서 영해향변의 전개과정을 작자미상의 「경자향변일기(庚子鄕變日記)」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향변의 주역들은 서얼(庶孼)들이 중심이 된 신향(新鄕)과 적장자(嫡長子)들이 중심이 된 구향(舊鄕)으로, 사건의 배경은 조선조 후기에 들어오면서 영조 48년인 1772년의 “통청윤음(通淸綸音)”, 정조 1년인 1777년 3월의 “정유절목(丁酉節目)”, 순조 23년인 1823년의 “계미절목(癸未節目)” 등에 의하여 종래의 서얼들에 대한 신분제약이 어느 정도 완화되어 중앙 요로의 벼슬길이 열리는 등, 제한적이나마 서얼계층의 신분상승이 이루어지게 되는 정치상황이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서얼들에 대한 중앙차원의 정책적인 배려가 지방의 뿌리깊은 사회적 관습의 벽을 넘기에는 아직까지 많은 한계가 있었지만, 시대의 추세에 맞추어 영해의 신향들도 구향들에게 누차 자신들도 사족으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신향들에 의하여 구향들에게 요구되어진 것은 구체적으로 향교와 향청(鄕廳)의 임원직에 대한 참여였는데, 이러한 향교와 향청의 임원직에 대한 요구는 단순한 지위상승의 요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향내의 수조권(收租權)을 이들 향청의 임원들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면에까지 요구의 수준이 미치게 된 것이었다. 신향의 이러한 요구에 구향들이 반발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이 내부적으로 세(勢) 겨루기를 하면서 향내에 잠복하여 있다가 외부에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1839년 8월 최명현(崔命顯)이 영해부사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최부사가 영해에 부임하자 신향들은 최부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국면을 이끌었는데, 이에 반발한 구향들도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게 되었다. 마침내 이러한 갈등은 향중 전체로 번져 나가게 되어, 급기야는 도내 전체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구향은 남인 계열이었으며, 신향은 노론 계열이었다. 부사 최명현은 노론 집권기에 별장(別將)이 되어 승지(承旨)에 오른 인물로 자연스레 신향의 편에 서게되었으며, 대개 노론은 서얼허통에 적극적이었다.
  최부사가 영해에 부임하자, 신향의 박기빈(朴基), 남효익(南孝翼),권도익(權度益) 등은 부사의 책실(冊室)이며, 신향 권치기(權致基)의 인척인 진보의 최생(崔生)이란 사람을 통하여 부사와의 인연을 맺는 한편, 그들이 추천한 신향의 향원(鄕員) 한명을 인계서원(仁溪書院)의 장(長)으로 추천하여 승인을 받는 등, 향내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7월에는 부사로 하여금 인계서원을 방문하게 하는 등, 부사와의 유대 관계를 다져나가며 그들의 위세를 증대하여 나갔다.
  이러한 와중에 1840년 8월 상정(上丁)에 있을 영해향교의 추계석전(釋奠)에 향교의 교임(校任)이 기존의 관례에 따라 석전의 헌관(獻官)을 부사에게 망보(望報) 하였는데, 부사는 향교에서 망보한 인사를 물리치고 다시 첩지를 내려 인계서원의 유생 중에서 헌관 2,3명과 집사 6,7명을 선임하도록 명령하였다.
  구향이 중심이 된 향교에서는 부사의 이와같은 조치가 이전에도 없는 무례한 것으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간주하여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구향은 구향대로 한번 망보된 차정(差定)을 바꿀 수 없다고 하였으며, 부사는 부사대로 신향으로 차정(差定)하기를 독촉하는 한편, 영(令)에 따르지 않은 도약정(都約正)과 도유사(都有司)를 제명하고 체포령을 내리는 등 일은 더욱 더 확대되어 갔다.
  마침내 부사가 신향인 권치기를 수별감(首別監)에 임명하자 구향인 좌수 주형렬(朱亨烈)과 별감 정상희(鄭象羲)가 이러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며 크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좌수 주형렬은 결국 체임되고 신향인 박기빈이 좌수로 차임하게 되어 신향은 일시에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구향들은 안동 호계서원·의성·군위·영양 등지의 서원에 통문을 주고 받으며, 이런 실상을 알리는 한편, 감영에 발명장(發明狀)을 내어 전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에 분격한 부사는 구향의 지도자격인 7명을 잡아들여 관문에서 소란을 피운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하면서 곤장을 쳤다. 구향들은 다시 고변장(告變狀)을 감영에 보내고, 감영에서는 잡힌 사람들을 영덕으로 압송하도록 하였다.
  영덕에서 영덕현령 이장우(李章愚)가 이 사건을 재차 조사하여 이번 사건을 신분상승의 실현과 경제적인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측면은 제외하고 단순히 신구향간의 쟁임(爭任) 사건으로만 규정하여 감영에 보고하는 한편, 남효익, 박기빈, 권도익, 권치기를 데려다 조사하였다.
  따라서 영덕현령 이장우의 보고에 의하여 감사는 향전을 쟁임지사(爭任之事)로 규정하고, 신구향 모두를 처벌하도록 지시하였다.
  감사의 명에 따라 잡힌 사람들은 각지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뒤이어 나온 국가 대사면령 으로 모두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으로 영해부사 최명현은 영덕현령에 의하여 봉고파직되어 관아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신향과 구향간의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그 후에도 신향들은 그들의 지위확보를 위하여 부단이 노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인계서원이 훼철되자 그들의 근거지를 상실하게 되어 점차 그들의 세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860년대에 최수운의 동학이 이 지역에 전파되어오자 이들은 종래의 신분적인 제약을 동학의 평등이념을 통하여 변혁시켜 보고자 하여 동학에 많이 투신하여 그들의 힘을 내부적으로 갈무리하였다.
  결국 이들의 이러한 노력이 1871년 3월 11일에 있었던 신미아변에까지 미쳐 신향의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하여 엄청난 피해를 보았으며, 일부 남은 사람들은 정부의 추적을 피하여 만주 등지로 솔권(率眷)하여 그 이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의 상실하자 해외 독립운동의 선봉에 서서 항일독립투쟁을 벌였다.
「경자향변일기」에는 구향측의 인사로 박병주(朴秉周), 박진용(朴鎭容), 박태주(朴態周), 백홍운(白弘運), 남유식(南有拭), 백중엽(白重燁), 박영찬(朴英燦)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외에 고종 1년(1864년)에는 영덕에서 남강서원과 신안서원간의 당론(黨論)에 따른 충돌이 있었다. 남강서원은 남인 계열이고, 신안서원은 노론 계열 이 두계열간의 다툼은 당시의 어사 이도재(李道宰)에 의하여 해결되었다.

(2) 신미아변(辛未衙變)

  신미아변은 고종 8년인 1871년 3월 11일에 영해에서 이필제(李弼濟,일명 이제발)·최시형(일명 최경오)·강수(姜洙, 일명 강사원)·박영관(朴永琯)·김진균(金震均)·전인철(全仁哲) 등이 주도가 되어 500여명의 동학교도 및 향인들이 작당(作黨)하여 당시의 영해부를 습격하여 부사 이정을 살해하고 영해부를 점령한 대사건이다.
  신미아변이 발생한 1800년대 후반기는 밖으로는 제국주의가 팽배하여 서구 열강들이 영토확장을 위하여 동양을 넘보고 있었고, 안으로는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그리고 삼정의 문란 등으로 야기된 사회경제적 기반의 붕괴와 사회기강의 급격한 파탄 등에 의한 기존 사회조직이 무너져 각처에서 민란의 발생이 빈번하였다.
  이로 인하여 인심이 흉흉해지고, 백성들은 지향없이 떠도는 등 대내외적으로 변혁과 변화가 소용돌이 친 격동의 시기였다.
  이와같은 현실에서 백성들 내부에서도 새로운 자각이 태동하여 변혁과 변동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자 하였으니, 이것이 경주 사람 최제우가 창교(創敎)한 동학이다.
  동학은 창교 되자마자 백성들의 성원에 힘입어 그 교세를 급격히 펼쳤으니, 이 지역에서도 1863년 7월에 동학의 접소와 접주가 정해질 정도로 그 교세를 크게 떨쳤다. 이 당시 영덕의 접주는 오명철(吳明哲), 영해의 접주는 박하선(朴夏善)이었다. 우리 지역의 동학의 전파는 이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우리 지역에 접주가 임명되는 시점보다 3개월이나 앞선 4월에 위의 강수가 최제우에게 도를 물으니, 최교주는 좌잠(座箴)이라는 잠명(箴銘)을 주며 깊이 수양을 하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동학이 포덕(布德)되기 시작한 1860년과 동시에 이 지역에도 벌써 동학이 전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시대 상황에 인내천(人乃天)이 종지(宗旨)인 동학사상이 전파되자 지역민들에게 광범위한 호응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이 때 진주농민란에 연루된 이필제 등이 영양 일월산으로 피신하여 와서 이 지역에서 다시 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은밀히 활동하고 있어 민란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이필제 등은 동학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사회 불만세력을 규합해 나가는 한편, 영해향변 등으로 향촌사회에 깊은 적의(敵意)를 가진 지식인, 불평인들을 비밀리에 포섭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들 외에 해월 최시형도 1865년경에 영양의 용화동(龍化洞)에 은거하면서 영덕의 강수(姜洙), 전성문(全聖文), 박춘서(朴春瑞) 등과 접촉하고 있었으며, 1867년경에는 유성원(劉聖元), 김용녀(金用汝), 임만조(林蔓祚), 구일선(具日善), 신성우(申聖祐), 정창국(鄭昌國) 등과 1870년에는 영해의 이인언(李仁彦), 박군서(朴君瑞), 1871년에는 영해의 박사헌(朴士憲), 권일원(權一元) 등과 교류하면서 포교활동을 하며, 은근히 기회를 보고 있었다.
  1871년 들어와서는 최시형 및 이필제는 창수면 위정리의 주막에 머물면서 무기와 식량을 모으는 한편, 당시 영해부사인 이정의 부정부패를 교묘히 이용하여 민심을 선동하면서 이인(理人)의 설을 퍼뜨려 동조자를 널리 규합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마침 1871년은 초대 교주 최제우 선생이 순교한 지 7주년으로 이필제·강수·전인철·박영관 등은 교조신원운동이란 명분을 내세우며, 마침내 이해 3월11일 야밤에 동학교도 및 초군(草軍,초동), 그리고 지역의 유생 등 5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영해부의 관아를 습격하기 시작하면서 신미아변은 시작되었다.
  이들은 관아를 습격하면서 수교(首校) 윤석중(尹錫中)을 살해하고 동학교도 김낙균(金洛均, 일명 金震均)은 부사인 이정을 칼로 쳐 살해하였으며, 병자각(丙子閣) 등 관아를 불지르고, 부중(府中)을 휩쓸고 다니면서 부민(府民)들의 동조를 유도하는 등 영해부를 점령하여 그 기세를 올렸으며, 이어 영덕현도 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접한 영덕현의 정중우(鄭仲愚) 현령 및 안동과 경주진의 군사들과 지역의 유생들이 진압에 나서면서 난은 발생한지 10여일 만에 종언을 고하게 되었으며, 동학란에 가담한 일부 동학교도 및 이필제 등의 인사들은 창수면 가산을 통하여 영양의 상죽현(上竹峴, 웃대치)에 모인 후, 다시 봉화 등의 각지로 흩어지면서 후일을 기약하였다. 이 때 최시형, 이필제, 강수, 전성문 등은 충청북도 단양에까지 피신하게 되었다. 특히 동학의 2대 교주가 된 최시형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끝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동학은 이 지역에서 그 세력을 잃기 시작하였다.
  이 사건의 여파로 관군 측에서는 부사 이정을 비롯하여 30여명이 살해, 혹은 부상당하였으며, 작변(作變) 측에서는 안동대호부에서 조사한 후, 32명이 효수(梟首)되었으며, 12명이 조사 도중에 고문으로 죽고, 5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원근 각처에 유배되는 등 많은 인적·물적 피해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렇게 발발하여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끼치고 진압된 신미아변은 영해부에 국한된 지역적인 민란이 아니라 지역의 한계를 벗어난 광범위한 지역의 민중이 조직적으로 참여한 변란(變亂)으로 뒷날의 갑오동학혁명 등의 많은 민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는 종래의 민란이 고립적이고 폐쇄적이며, 비신념적(非信念的)이고, 자기 이해관계 중심으로 발생한데 반하여 신미아변은 민중들 사이에 동학이란 종교를 통한 사상적 연대의식과 광범위 지역의 인사들이 참여한 것으로 이들도 뭉치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최초의 조직적인 민란으로 이후 각처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난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1894년에 일어난 전국적인 동학혁명에도 다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의 표<2­7>은 위의 신미아변의 결과에 따른 동학교도들의 피해자 명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