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제(稅制)의 변천
1) 광복 이전의 조세제도
고대에 있어서 조세발생은 대개 정복민과 피정복민의 지배관계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고대국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토지에 부과되는 전세와 사람에게 부과되는 인두세, 그리고 호(戶)에 부과되는 호세 등을 재원으로 하여 국가를 운영하여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고대국가에 있어서 경제의 근간이 되는 조세의 부과는 토지를 중심으로 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동서양을 불문하고 토지의 소유관계를 중요시 하여, 대개 토지소유권을 국가가 갖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이러한 현상은 동일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국가체제를 갖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나라 모두가 개국 초부터 토지를 국유제로 한 것을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고 하겠다.
특히 오늘날의 경상북도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신라의 경우를 살펴보면, 국유지인 토지를 왕궁(王宮)이나 왕사(王寺), 그리고 일반 사찰(寺刹) 및 평민에게 분배하여 이들의 수확물에서 일정한 액수의 조세를 거두어 국가경제를 지탱하였는데, 이러한 신라의 토지제도를 살펴보면 신문왕 7년 (687) 정해(丁亥)에 직전(職田)과 녹전제(綠田制)를 두고, 성덕왕 21년(722) 임술(壬戌)에 15세 이상의 남자에게 구분전(口分田)을 주었으며, 경덕왕 16년(757) 정유(丁酉)에는 군사유족(軍士遺族)과 효자(孝子)에게 구분전을 주는 등 구분전의 지급을 확대하였는데, 구분전이란 일정기간이 지나거나 지급 대상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반납하는 것으로 소유권은 국가에 있고, 다만 지급받은 자는 경작권만 있는 것으로 당시의 토지 소유관계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공신(功臣)의 사전(賜田)은 반납하지 않았으므로 평민들은 그 토지를 경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통인신라 후기에 들어오면서 신라의 토지제도는 왕족이나 귀족, 관료, 사찰 등지에서 토지의 사유화가 광범위하게 일어남에 따라 전조와 인두세, 그리고 호세를 기본으로 하여 성립되었던 국가수취제도가 파괴되어 나라 자체의 존망의 기로에 서게 되었는데, 이는 종래의 일반 백성들이 국가의 백성으로서 역할을 하였던 것이 개개의 지주에 예속된 지주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경제는 자연스레 파괴되어 가 통일신라가 쇠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일조를 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토지에 대한 조세제도는 문종 8년(1054)에 전지의 품귀에 따라 상, 중, 하 3등급으로 등급을 정하고, 상품1결(一結)은 중품2결에 해당하며 하품은 3결에 준하도록 하여, 전국적인 측량을 실시하여 측량 평수와 전세(田稅)를 정하여 토지에 대한 조세제도를 확립시켜 나갔다.
문종 23년(1069)에는 이러한 제도를 더욱 더 세분하여 1결의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이 면적에 따라 급전(給田)과 조세(租稅)의 표준을 삼았다. 이 1결의 단위를 산출하기 위하여, 기준을 보(步)로 정하고, 10분(十分)을 1척(一尺), 6척을 1보(一步)로 계산하고 사방 33보(四方三十三步)를 1결로 하였는데, 10결(十結)에 이르기까지의 면적을 일일이 명시하여, 조세부과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충열왕과 충숙왕 때에 와서는 권신(權臣)이 전토(田土)를 점탈하여, 전제(田制)가 점차 문란하게 되면서 토지에 대한 조세의 기준도 무너져 가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토지소유권은 귀족과 관료의 토지소유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국유였지만, 말기에 오면서 이러한 전제가 문란해져 권신들이 백성들로부터 증수(贈受), 기진(寄進), 개간, 점탈 등의 명목으로 수탈하여 장원제도(莊園制度)를 만들어 국유지가 점차 사유화되어 가면서 왕조 자체가 몰락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기 위하여 공양왕 2년(1390)에 공전제(公田制)를 철저히 시행하는 국전제 개혁(國田制 改革)을 단행하였으나, 기득권 세력의 반발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시대의 조세부과는 결부제(結負制)를 채택하였는데, 결부제의 1결(一結)은 대략 20명이 생산하는 토지 면적으로 환산하고, 그 생산고의 10분지 1인, 2명의 생산고를 조세에 충당하도록 한 것으로 1결은 백부(百負), 1부(一負)는 10속(十束), 1속(一束)은 10파(十把)로 환산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세종 16년(1434)인 계해(癸亥)년에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고, 새로이 전제개혁을 추진하여, 새시대에 맞는 제도의 정비를 하였으며, 이후 세종 26년(1444)에는 전분6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9등법(年分九等法)이라는 세제를 도입하여, 조세부과에 형평성을 부과토록 노력하였으며, 조세부과에 기준이 되는 전답의 경계도 항상 변하는 것임을 간주하여, 매 20년마다 전국의 토지를 재측량하여 토지대장을 경정토록 하였다.
연분9등법은 매년 흉풍작에 따라 조세부과액을 9등급으로 구분하고, 최고 20두(斗)에서 최하 4두까지 부과하였으며, 전분6등법은 토지가 비옥하고 척박함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하여 조세를 부과하였던 것으로 조세의 납부방법은 곡물이나 베, 포 등으로 하였으며, 이러한 납부방식은 조선 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으나, 고종31년(1894) 갑오경장 이후에 이르러 마침내 토지에 대한 과세를 금액(金額)제로 하게 되었다.
갑오경장 이후에 정부는 탁지부의 소속으로 양지아문(量地衙門)이란 관사(官司)를 두고 미인기사(美人技師)를 초빙하여 토지측량을 시작하여 토지의 실제 규모와 소유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대한제국 광무 8년(1904)에는 탁지부내에 양전국(量田局)을 두고 일본인 기사를 초빙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지목과 지적을 조사하고 소유자를 밝혀 조세를 부과하였으며, 이 당시의 세목으로는 지세, 호세, 가옥세, 주세, 연초세, 광세, 관세, 어업세, 선세, 염세, 인삼세 등이 있었다.
1910년 한일병탄후의 일제 강점하에서의 조세제도는 병탄 초기에는 별다른 세제의 변경은 없었으나, 1926년에 세제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세제의 기본방향을 설정한 후, 1927년에 제1차 세제개정에서 염업세와 자본이자세를 창설하였다. 1934년에는 제2차 세제개정 조치로 일반개인소득세, 상속세를 창설하였으며, 징세기관으로 세무서와 세무감독국을 신설하였다. 1935년에는 임시이득세, 1937년에는 법인자본세, 외화특별세, 휘발유세가 창설되었으며, 이해 7월에는 지나사변특별세를 설치하여 한민족의 고혈을 착취하였으며, 1940년에는 특별법인세가 신설되고, 이어서 수익배당세, 물품세, 통행세, 유흥음식제, 입장세가 신설되었으며, 한편으로 지나사변특별세가 폐지되는 등 몇 차례 세제개편이 있었다.
하여간 일제 강점하에서는 식민통치를 위한 관료기구의 유지와 경찰조직의 확대, 교통, 통신기관의 설치 등에 따른 재정규모의 증대로 국세와 지방세가 팽창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러한 중앙과 지방재정의 팽창에 따른 재원을 충당하기 위하여 식민지 백성들을 수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