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려시대의 정치

  고려시대의 통치세력의 근간은 개국초에는 호족(豪族)연합이 그 중심이었으나, 체제가 안정되고 제도가 정비되는 성종과 현종 대에 이르러서 시행된 과거제도나 음서제도 등에 따라 호족세력이 일부 약화되고 과거제도나 음서제도에 의하여 선발된 신진세력과 호족연합 세력으로부터 두각을 나타낸 문벌귀족(門閥貴族)들이 통치의 중심에 선 문벌귀족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고려의 통치 세력의 근간은 점차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들 문벌귀족과 권문세가, 사대부세력들이 지배층을 형성하여 정치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지배구조에 따라 이루어진 고려시대의 정치제도의 골격을 살펴보면 다음의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여러 번의 정치제도와 행정제도가 바뀌었지만 대체적으로 다음의 그림과 같은 골격을 가지면서 변천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정치, 행정 구성도〉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고려시대의 정치는 중앙과 지방이 나누어져 시행되었는데, 중앙은 3성과 6부, 그리고 중추원 , 어사, 삼사로 정치가 이루어졌으며, 지방은 5도 양계(兩界)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우리 지역은 지방제도의 하나인 5도 중의 경상도에 속하였으며, 각 도에는 도호부, 그리고 부와 현으로 이어지는 계통을 가졌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우리 지역의 정치적 변화는 먼저 태조 23년인 940년에 야성군은 영덕군으로 고쳐지고, 유린군은 예주로 고쳐지는 읍호(邑號)의 변경이다. 이는 우리 지역이 신라의 중심지였으므로 새로 개국한 고려조에서는 통일신라 때에 사용하던 읍호를 고쳐 새 왕조가 개국되었음 알리는 한편, 명실상부한 고려의 영토임을 나타내고자 하는데 일단의 목적이 있었다.
 이 후 현종 9년인 1018년에 예주에 방어사를 두어 인근의 영덕군·보성부·영양군·평해군·청부현·송생현을 관할하도록 하여 영해가 동해안 지역의 정치의 중심지가 되도록 하였다.
 고려초의 우리 지역과 타 지역과의 관계를 그림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명 주(강릉, 신라 경덕왕 때)
                                         ↑(領郡)
  야성군(야시홀, 영덕) - 유린군(우시군, 영해)
                                        ∥
                                      예 주(현종 9년 1018년 유린에서 예주로 개칭)
                                         ↑
    영양군 - 보성부 - 영덕군 - 평해군 - 청부현 - 송생현

               (감무를 두었다가 고쳐 현령을 둠)
                                         ↑
적선현(뒤에 보성부로 이전) - 진안현(뒤에 예주의 속읍으로 이전)

  위와 같이 이 지역의 정치는 예주를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져 왔으며, 예주에는 중앙에서 파견되는 외관(外官)인 부사(방어사 겸임)에 의하여 다스려졌으며, 고려초에는 예주에만 중앙관리가 파견되어 인근의 군현을 예주에 소속시켜 다스렸다. 중기 이후에 가서야 각 군 현에도 중앙의 외관이 파견되어 지역의 정치·행정을 펼쳤다.
  여러 기록을 통하여 예주에 파견된 지방관을 살펴보면 부사(방어사 겸직)·부방어사·판관·사록·장서기 등이 중앙에서 파견되어 지방의 조세의 수납과 운송, 그리고 지역의 문교의 진흥에 힘쓴 것으로 생각되며, 영덕에는 현령 또는 감무가 파견되어 온 것으로 파악된다.

2. 조선시대의 정치

  조선시대 정치체제의 대강은 양반관료제에 의한 정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계층이 고려말에 이르러 새롭게 부상한 사대부 계층들인데, 이들이 새 왕조에 들어와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관직을 차지하면서 또 하나의 지배층을 형성하여 그들만의 특권을 향유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과거 고려시대와는 달리 권문세족 혹은 문벌(門閥)로만 가지고는 그들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물론 음서(蔭敍)나 일천(逸薦)에 의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가 있었으나, 과거시험이라는 격심한 경쟁을 통한 급제(及第)야말로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첩경이었기 때문에 권문세족이나 문벌보다 일정의 유학적 소양을 갖추고 행정적인 경험을 갖춘 양반관료들이 조선시대의 지배층을 형성하면서 정치체제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는 곧 조선시대의 지배층은 권문세족보다 유학이라는 학문적 소양이 있으며, 나아가서는 전문적인 관료로써 관계에 진출한 학인(學人)들만이 양반으로써 출세가 보장되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정치의 또 하나 특색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정치의 심화와 양반관료체제를 심화시키는 사림(士林)에 의한 사림정치(士林政治)를 들 수 있다.
  이들은 향촌지주(鄕村地主)의 사회적 구실을 중요시 하는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을 선호하여 개국초부터 훈구파(勳舊派)에 의하여 이루어지던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에 반대하여 지방사회에서의 재지사족(在地士族)들의 활동범위를 넓히고자 하는 지방분권적인 정치제도를 선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지방의 유향소(留鄕所)를 근거로 그들의 활동무대를 넓히는 한편, 이를 통한 향촌질서의 재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제보다 지방분권적 관료제를 펼치고자 하였다.
  조선시대의 또 하나의 정치적 특색은 조선조 후대에 내려와서 외척(外戚)에 의하여 이루어진 세도정치(勢道政治)를 들 수 있다. 세도정치란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도가(勢道家)의 일족(一族)만이 배타적인 정권을 독점하는 한편, 여타 관료들은 그들 세도정치의 협조자로 인식하는 체제로 조선조 후기에 국가 전체가 혼란과 민란이 수없이 일어나게 된 원인의 일단도 이들 세도정치(勢道政治)에 기인하였다.
  위와 같은 통치체제의 근간 아래에 조선시대의 통치제도는 이전의 고려와 신라시대와 동일하게 중앙과 지방제도를 구분하여 시행하였다. 중앙의 통치기구로는 가장 핵심적이며, 최고기관인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曺)가 있었다. 합의체 기구인 의정부에는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대신(三大臣)이 합의하여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고 이를 국왕에게 품의하면, 국왕은 이를 결재하여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서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육조는 국왕에게 직접 정무를 보고하고, 이에 대한 지시를 받으면서 국정을 분장하는 중앙정치기구로 이조(吏曹), 호조(戶曹), 형조(刑曹), 공조(工曹), 예조(禮曹), 병조(兵曹)를 지칭하는 것이다. 육조는 1894년 갑오경장에 의하여 근대적인 관제로 개편될 때까지 중앙행정기관으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육조는 개국 후 점차 왕권이 안정되어가자 그 기능이 증대되어 왕과 육조 대신들 간에 주요 정무가 직접 보고되고 하달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의정부의 기능은 점차 변질되어 의정부는 국왕의 자문기구 성격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는 곧 육조를 통하여 국왕의 명령이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합의제하의 왕권이 점차 강화되어 강력한 전제군주로써의 권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전권을 완전히 가지는 전제군주체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간원, 사헌부, 승정원 등의 기구들이 왕권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조선사회를 이끌고 나왔다.
  즉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 왕명에 의하여 죄인을 다루는 의금부, 홍문관, 시정을 논하고 관리들을 감찰하는 사헌부, 왕명에 대한 간쟁과 논박(論駁)을 하는 사간원 등이 중요한 중앙 정치기구로써 왕명을 이행하거나 혹은 간쟁을 하면서 정치에 간여하여 왔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정치는 의정부의 합의제에 의한 의결권과 대간(臺諫)의 간쟁과 서경 등을 통하여 국왕과 행정관료들의 전횡을 견제하는 한편, 실제의 행정을 집행하는 육조에게도 대간(臺諫)을 감찰할 수 있는 감찰권을 부여하여 서로 견제받게 하는 상호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정치체제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앙통치제도와 달리 지방정치의 근간이 된 지방제도로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300여 개의 주·부·목·군·현을 설치하여 각각 감사와 수령을 파견하여 철저한 지방통치를 하였다.
  지방관아에서는 중앙의 육조체제를 본 따서 육방체제를 설치하고 지방의 재지사족이나 이족(吏族)들을 등용하여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들을 도와서 그 지역의 일반 백성들로부터 조세의 수납과 부역, 그리고 이들의 운송 및 기타 대민업무(對民業務)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주·부·군·현에 파견되는 외관의 품계는 각 고을의 규모에 따라 차등을 두어 종2품에서 6품까지의 품계를 가지는 수령을 파견하여 해당 지방의 행정권·사법권·군사권까지 부여하여 농업의 장려·부역·송사·향리(鄕吏)의 지휘·감독 등을 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서 조선시대 영해부에는 종3품의 부사가 파견되어 왔으며, 영덕현에는 종5품의 현령이 파견되어 와서 1896년 구한말 관제개혁으로 부사와 현령의 직(職)이 혁파(革罷)될 때까지 지역의 목민관으로써 책무를 다하였다.

3. 일제 식민정치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는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의 질곡(桎梏) 아래에 있었다. 일제에 의한 본격적인 식민통치는 1910년부터 시작되었지만 일제에 의한 실질적인 한반도 잠식은 1875년 9월 20일 일어난 일본군함인 운양호가 강화도에 불법 침입하면서 일으킨 운양호사건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일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을 협박하여 억지 주장을 펼치다 마침내 1905년에 들어와서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구한국의 일부 국가통치권인 외교권 등을 하나 둘씩 늑탈(勒奪)하여 차후에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 바탕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1905년에 일제는 한반도에 조선통감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본격 식민지화할 계락을 꾸미기 시작하였다. 통감부는 이후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의 근간이 되었으며, 1910년 한일병탄 후에는 조선총독부로 변신하여 한민족을 늑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9월 30일 칙령 제354호로 설치되어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한반도 구석구석을 감시하고 억압한 악명 높은 식민통치기관이다.
  일제에 의한 한반도의 식민통치 방식은 무단정치(武斷政治)와 내선일체(內鮮一體)로 나타나는 끝없는 동화정책(同化政策)이었다. 무단정치는 소위 헌병과 경찰에 의한 강압정치로 그들의 시책에 어긋나는 조선 민중에 대하여 가혹한 규제를 가하고 억압하는 악명 높은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은 1919년 3월 1일 한민족의 대대적인 항거에 의하여 소위 문화정책이라는 것으로 바뀐다.
  문화정책이란 일명 동화정책으로 한민족의 민족성과 독자성을 말살시키는 한편, 한반도를 일본의 속령으로 만들어 한민족을 그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어와 조선글의 사용을 폐지하고, 심지어는 고래(古來)로부터 내려오는 한국인 성명마저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일제의 식민통치는 오늘날의 한반도가 짊어지고 있는 모든 재앙의 원인을 제공한 기초이며, 한국의 발전에 장애를 가져다 준 민족 최대의 불행이었다. 특히 상고시대(上古時代) 이래로 왜구의 침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어 온 우리 지역으로서는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화함으로써 만주를 비롯한 주변 인근의 자원이 풍부한 지역을 자국의 부국화(富國化)를 위한 식민지 원료공급지로 삼아 세계의 강국으로 부상하였으나, 결국에는 서구 신흥공업국인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켜 패망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희생과 경제적 약탈을 당하였으며, 현재까지 이러한 영향이 우리 사회의 곳곳에 미치고 있어 일본 식민통치의 해독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남북한의 분단이며, 국토의 불균형적인 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