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축산업

  축산업은 가축이나 가금(家禽)을 사육하여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생산, 공급하는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들을 사육한 역사는 대개 2만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이 당시 사육되었던 가축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 사육되었던 가축은 소나 말, 개 등으로 이들 사육되었던 가축의 용도는 대개 식용 또는 군사용, 그리고 농경용으로 이용되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인류에게 식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 주요한 기여를 하였던 가축류들이 언제부터 국가단위에서 관리, 사육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로써는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으나, 대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초기부터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변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히고자 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국가단위에서 말의 사육을 중요시 하였으며, 소는 농경생산의 중요한 생산수단으로 취급되어 이의 사육이 증대되었으며, 소의 힘을 농업에 이용하므로써 농업생산력 증대에도 많은 기여를 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국방에 긴요한 말의 사육을 중요시하여 마정(馬政)을 철저히 하였으며, 농사를 짓기 위한 농우(農牛)의 확보를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같이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가축의 생산은 주로 국방상의 이유와 당시의 경제적 기반인 농업의 생산도구로써 가축을 사육한 반면, 오늘날과 같이 식육을 위한 가축의 사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육류를 먹어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특히 고려는 국초부터 전국 9개소에 이르는 국립목장을 세워 관용축산(官用畜産)을 위하여 상당히 노력하였으나, 후대에 내려와서 몽고의 침입으로 마필의 징발과 간섭 등으로 고려의 축산은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대개 우리나라는 축산을 중시하는 유목시대를 거치지 않고 바로 농업이 중시되는 정주(定住)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가축의 용도가 식육이나 가죽 등을 이용하는 데에는 중요시하지 않았다. 또 오랜 기간 불교와 유교의 영향으로 축산물 이용이 기피되어 축산의 발달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으며, 축산의 지위도 매우 낮았다. 따라서 근대 이전에는 가축의 이용이 축력의 확보, 군마 육성, 제물용 등 대부분 보완적 영역에 머물렀다고 하겠다.
  고려시대에 중점적으로 관리하던 목마사업(牧馬事業)은 조선시대에도 계승되어 태종과 세종대에 들어와서 체계가 갖추어져지기 시작하여 전국 각지에 목장이 설치 운영되었다. 특히 말은 전마, 역마, 농경, 승마, 육식, 무역용으로 이용되었으며, 특히 무역용(명나라에 보내는 공물용)으로 중요하였는데, 태조 원년부터 세종 10년까지 36년간에 58,611마리나 중국에 보냈다고 한다.
  제도적으로는 마정(馬政)을 위하여 병조에 사복시(司僕侍)를 두고는 전국적으로 목장을 확충하여 임진왜란 전까지 전국적으로 159개소의 목장을 세워 연평균 24,000두 이상을 사육하도록 하는 등 목장의 건설과 축산의 진흥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초기의 이러한 흐름은 임진왜란의 발발로 거의 폐장이 되어, 조선조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펴져 있던 목장의 대부분은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조선시대의 축산업도 고래(古來)로부터 내려오는 방식 그대로 군사용이나 농업용으로 국한되어 발전하였으며, 상업용이나 식육산업으로 발전하는데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가축에 대한 각종 축산관계 서적이 발간되어 과거보다는 진일보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에 발간된 서적을 살펴보면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 「우의방(牛醫方)」, 「마의서(馬醫書)」,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 등이 발간되어 가축의 전염병과 가축의 질병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선시대에 영덕에서도 목장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영영승람(盈寧勝覽)」에 의하면 영덕의 목장에는 분양마 2필이 배정되어 이를 사육하여 상납하여야 하는데, 2필의 말 대신에 돈으로 상납할 경우에는 76냥 6전을 9월에 상납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로보아 영덕에도 일정 규모의 목장이 있어 지역내의 각 역의 역말을 여기서 공급한 것으로 보인다. 폐장연대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 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목장의 황폐화가 일어난 것이 임진왜란 직후이므로 영덕의 목장도 이 시기에 폐장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근대와 현대의 축산

1) 근대와 일제시대의 지역의 축산

  근대에 들어와서 축산분야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00년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1902년에 프랑스에서 젖소가 들어왔으며, 1903년에는 요크셔로 대별(大別)되는 돼지의 개량종이 들어오고, 1908년에는 에어셔 등의 소가, 1909년에는 람비에 등의 면양이 들어오는 등, 각종 외국산 가축들이 들어와서 국내에서 사육되기 시작하였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관립 수원농림학교가 1906년에 건립되어 축산과 수의학을 교육시키기 시작하였으며, 1908년부터는 수의(獸醫)가 배출되어 가축의 질병을 담당하였으며, 1909년에는 수출우 검역소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1905년부터 국내에서 이루어진 모든 정책은 일제 통감부에 의한 한반도 식민지 수탈정책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는데, 결국 축산도 일제의 수탈정책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일제는 통감부 정치가 끝나고, 1910년에 한일병탄을 이룩하자 1911년에 우역혈정제조소(牛疫血精製造所)를 부산에 설립하고, 1915년에 수역(獸疫) 예방령과 중요물산동업조합령을 공포하여 축산동업조합을 조직하는 등, 일제 식민지 축산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정지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부터는 일제 당국의 국고 보조와 1931년부터 축우 저리자금의 융자로 우리나라 축산, 특히 축우의 증식에 큰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는데, 그 결과 1908년에 전국에서 약 46만두였던 소가 1940년경에는 170만두를 상회할 정도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축산은 사양화되었으며, 특히 축우가 큰 피해를 입었다.
  면양은 남면북양(南綿北羊) 정책에 의하여 도입되었고, 꿀벌은 밀납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특수한 수요가 있어 오래 전부터 전국적으로 양봉이 이루어졌는데, 1910년에 28만kg의 꿀이 생산되기도 하였으며, 개량종 벌도 수입되어 1925년에는 재래종이 약12만 통, 개량종이 1만5천 통이 사육되었다. 1933년에는 전체 통수가 20만 통으로 증가되었고 개량종의 비율이 높아졌다.

일제하에 나온 1936년도의 「경북대감」에 의하면 영덕군의 가축사육 두수는 소가 6,149마리, 말이 91마리, 돼지가 655마리 닭이 21,491마리로, 대가축으로는 소가 으뜸을 차지하였다.
  근대와 일제시대를 걸쳐 지역 축산의 역사를 살펴보면 1907년에 민간단체로 영덕군 조합이 결성되어 소의 증산과 가축위생의 향상을 꾀하였으며, 1915년에는 영덕군 축산조합으로 개편되어 여러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설립된 조합은 재정의 자립도가 어느 정도 확립이 되자 조합의 활동범위를 점차 넓혀 나갔는데, 특히 조합에서 건초(乾草)의 수확과 저장을 장려하고, 저장고의 건립을 보급, 주선하기도 하는 한편, 건초 다수확 품평회를 개최하는 등 축산 의욕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1929년 말에 이르러 군내의 축우(畜牛)의 숫자가 12,900두에 달하였다.
  다음의 표<5-25>는 일제시대인 1930년대의 군내 축산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표에 의하면 소의 경우는 산지가 많은 지품과 창수지역에 많이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숫소보다 암소의 사육율이 높은 것은 송아지 생산을 통한 재산증식에 기대를 크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말의 경우는 종래에 있어서 군사용이나 운반수단으로 이용되던 것이 이러한 이용도가 기계문명으로 대체(代替)되자 그 사육량이 급격히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돼지나 닭의 경우에도 그 사육숫자가 미미하여 본격적인 축산업으로 발전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2) 현대의 지역축산

(1) 가축 사육가구 및 사육두수

  현대에 들어와서 축산업의 최대 위기는 광복후의 혼란기와 6·25한국전쟁이었다. 광복과 6.25한국전쟁에 이르는 기간동안 국내의 축산업은 막대한 피해를 입어 존립기반 자체가 무너질 정도였다. 당시 영덕군도 이의 영향을 받았는데, 1948년도에 9,240두였던 축우가 6.25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도살되어 소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가축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자 정부는 1951년 1년간 소의 도살을 금지시키기로 하는 등 축우보호시책을 강력하게 펼치기 시작하였으며, 제도적으로는 1954년에 가축보호법을 제정, 공포하여 축산을 장려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오늘날 축협의 전신인 대한축산동업조합이 결성되었으며, 가축의 등록도 실시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축산업은 대개 1960년까지는 농가부업 수준으로 농가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당히 낮았다.
  한편 군내의 축산업은 1967년 11월 16일에 영덕군 축산업협동조합이 창립총회를 가지고, 이듬해 1월 6일에 설립등기를 하면서 조합이 설립되고, 지역 축산인들의 재정지원이 가능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또한 1960년 이후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국민들의 소득수준이 향상되자 육류에 대한 소비가 증대하여, 축산업이 점차 상업성을 가지는 기업화가 되기 시작하면서 지역에서도 축산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종래보다 큰 규모의 축산농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정부에서도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낙농진흥법(1967)과 초지법(1969)을 제정하여 제도적으로 축산업을 뒷받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제반 여건의 변동으로 1960년 이후에는 축산업이 농가부업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농가의 주요 소득원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으며, 일반 시중의 시세변동에 따라 축산 농가가 직접 영향을 받는 주요한 업종이 되기 시작하였다.
  다음의 표<5-26>은 1960년대 이후 군내의 축산현황을 나타낸 것인데, 한우의 경우에는 1960년의 사육호수 6,377호에 사육두수가 6,923두로 축산농가 1호당 약 1,08두로 아주 영세한 규모였으나, 1998년 현재는 사육호수가 1,018호에, 사육두수가 5,857두로 축산농가 1호당 약 5.75두로 점차 영세성을 벗어나 전문축산농으로 변모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돼지의 경우는 1960년도에는 사육호수 943호에 사육두수가 2,041두로 돼지사육농가 1호당 약 2.17두였으나, 1998년 현재는 사육호수 104호에 사육두수가 16,543두로 돼지사육농가 1호당 159두로 거의 돼지사육이 전업농 수준에 도달하였다.
  젖소의 경우에는 식생활의 개선 등에 따른 우유소비의 증가로 전국적으로 젖소 사육의 붐이 일어났으며, 우리 지역에는 영해쪽을 중심으로 사육농장이 들어서기 시작하여 1990년에 사육호수 27호에 사육두수 363두가 되었으며, 1998년 현재는 사육호수 14호에 사육두수 533두가 되었다.

현재 양봉의 경우도 점차 증가하여 농가에 농업 외의 소득증대에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현재 군내에서는 한우와 젖소, 돼지, 사슴, 개, 토끼, 닭, 오리, 산양, 칠면조, 거위, 꿀벌 등의 다양한 종류의 가축이 사육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군내 축산농가의 주종은 한우와 돼지사육이다.

(2) 가축의 전염병 발생 및 예방

  가축의 사육은 좁은 축사 내에 많은 수가 동시에 사육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으로 특정 전염병이 발생하면 순식간에 전 막사에 전염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가축에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이 많으며, 가축의 질병이 이를 사육하는 사람에게도 전파되는 병균이 많기 때문에 가축질병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행정당국에서는 가축질병에 대한 방역과 전염병 예방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표<5-27>은 1960년도 이후 매 10년 주기로 군내 가축 전염병 예방주사 실시 실적이다.

(3) 수의사

현재와 같이 인류에게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여 주는 축산류의 가축질병의 담당은 수의사(獸醫師)들에 맡겨져 있다. 표<5-28>은 1965년 이후 매 5년 마다 군내 거주 수의사들의 숫자를 나타낸 것이다. 표에 의하면 1965년에는 2명의 수의사 각기 영해와 영덕에 1명씩 거주하면서 지역의 가축질병과 가축전염병을 책임졌는데, 1998년 현재는 영덕읍에 4명과 영해면에 2명의 수의사가 있어 가축질병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3. 축산업 관련기관

1) 영덕군축산업협동조합

  축산업협동조합은 1968년 1월 6일에 조합으로 설립되어, 1983년 6월 13일부터는 신용업무를 시작하여 지역 축산인들의 금융을 도맡아 왔으며, 1984년 12월 20일에는 종합사무실을 신축하였다. 현재의 축협장은 직선제 조합장 선출로 선출제도가 바뀐 이래 3대째 박택열씨가 재임하고 있으며, 1998년 12월 31일 현재 기획계, 총무계, 예금계, 대부계, 구매계, 유통계, 생활물자계, 가축계량계, 운송계, 지도계, 일일감사계, 채권관리계의 12계와 영해지소의 1지소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합원 구성은 군내 축산인 1,46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1) 영덕군축산업협동조합 조직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