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남정면(南亭面)

▒ 장사리(長沙里)

  장사리 동명의 유래는 긴불 즉, 긴 백사장이 마을 앞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긴불, 진불 또는 장사라 하였다.
  이 마을은 1470년경에 안씨(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여 내동(內洞)이라 이름하고 정착하였다고 하며, 또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한 사람이 장사 서쪽 높은 곳을 개척하여 두천(斗川)이라 이름을 짓고 정착한 데서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긴불, 뒤천(斗川), 오산(烏山), 장태, 점집 등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영덕군 외남면(外南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합할 때 이 마을들을 병합하여 장사동이라 하고 남정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장사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약 1만8천여평의 장사평야를 이룬 가운데 양성리가 있고 남은 약 2백여m 정도 되는 남산이 솟아 있는 부경리가 있고 서북은 오산이 있으며 부흥리가 있다.

 
 
오산(烏山) :
장사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산이 까마귀 형국이라 함.
 
장태(장터) :
장사장이 열리는 곳임.
 
점    집 :
장사 남쪽 길옆에 있는 마을로 유기점이 있었음.
 
장사원터 :
장사리 328번지에 있었던 조선시대 역원의 터로 명사십리와 푸른 동해가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곳으로 조선시대에 이 지역을 지나가는 관리들이 쉬어 가던 곳으로 유명하였음. 뒤에 동사무소로 쓰이다가 외남면 사무소로 사용하였다고 함.
 
쪽박산(南山) :
먼 옛날 동해 바닷물이 고여 산 정상이 마치 쪽박이 물에 떠 있는 것 같이 보였다고 한다.

         

▒ 부경리(阜境里)

  부경리는 고부동(高阜洞)의 부(阜)자와 지경동(地境洞)의 경(境)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 부경리는 고부동(高阜洞)의 부(阜)자와 지경동(地境洞)의 경(境)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경1리는 19세기 후기인 박씨(朴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원진(元津)이라 하다가 뒤에 고부라 했다 하며, 부경2리는 임진왜란때(1592) 최씨(崔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지경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고부동과 지경동을 병합하여 남정면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부경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행정동으로 부경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부경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양성리, 회리, 남은 포항시 송라면 지경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은 장사리와 이웃하고 있다.

         

 
고부(高阜) :
곱은등 밑에 있는 마을임.
 
섬   마 :
지경 남쪽에 있는 마을로 물이 양쪽으로 흐르고 외따로 떨어져서 마치 섬과 같은 마을임.
 
어목골 :
고부와 원진나리 사이의 오목한 곳에 있는 마을임.
 
원진(元津, 원진나리) :
고부(高阜) : 곱은등 밑에 있는 마을임.
 
통시밋 :
지경 북쪽에 통시(변소)가 있었는데 그 밑이 되는 마을임.
 
지경(地境, 큰 지경, 영덕지경) :
영덕군과 영일군의 지경(地景)이 되는 마을임.

         

▒ 회 리(晦 里)

  회리 동명의 유래는 회나무가 많아 횟골 또는 회동(晦洞)이라 하였다.
회1리인 아랫마을은 18세기 후기 평산신씨 신유덕(申維德)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회2리인 양지마을은 16세기 후기 진씨(陳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회동(上晦洞), 하회동(下晦洞)을 병합하여 회동이라 하고 남정면에 편입하였으며 그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회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구역상 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장사리, 부경리, 서·남은 포항시 송라면 대전리와 경계를 이루고 북은 양성리가 있다.

 
 
구릉마(구룡말) :
회동 서쪽 구렁진 곳에 있는 마을임.
 
아릿마(下晦洞) :
회동 아랫쪽에 있는 마을임.
 
양지말 :
아릿마 서쪽 양지바른 곳에 있는 마을임.
 
웃마(上晦洞 : 윗말) :
웃마(上晦洞 : 윗말) : 회동 위쪽에 있는 마을임.

 

▒ 양성리(洋城里)

  양성리 동명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마을 서쪽에 성재라는 산이 있는데 옛날 성(城)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마을에서 바다가 보이고 성이 있는 곳에서 명명된 이름이 아닌가 추측해 볼 뿐이다.
  이 마을은 17세기 후기인 숙종(肅宗) 년간에 박씨라는 분이 들어와 마을을 개척,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지역으로 양성이라 하였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양성동으로 하여 남정면에 편입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양성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성리의 위치는 동은 장사리, 부경리, 서·남은 회리, 서·북은 쟁암리, 봉전리가 있다.

 
 
쪽지골(中基) :
양성리와 쟁암리 중간에 있는 마을임.
 

▒ 봉전리(鳳田里)

  봉전리 동명의 유래는 봉황산(鳳凰山) 밑이 되므로 봉전, 또는 가름길이 있으므로 가리미라 하였다.
  옛 봉전동인 1리는 17세기 후기인 숙종(肅宗) 연간에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구리골   마을인 2리는 노씨(魯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17세기 후기에 안씨(安氏)가 입주하여 마을이 번창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동(銅洞)을 병합하여 봉전동이라 하여 남정면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봉전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부흥리, 원척리, 서는 쟁암리, 남은 양성리, 북은 도천리가 있다.

 
 
구리골(銅洞) :
가리미 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산에 구리가 난다고 함.
 
아릿못 :
구리골 아래 모통이에 있는 마을임.
 
양지마 :
문봉 동쪽 양지에 있는 마을임.
 
웃   못 :
구리골 윗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임.

 

▒ 쟁암리(爭岩里)

  쟁암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어귀에 상투방우와 탕건방우가 우뚝 솟아 마주보고 있는데 서로 싸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이 바위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70년경 신씨(申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쟁암동이라 하여 남정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쟁암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쟁암리의 위치는 동은 봉전리, 도천리, 부흥리가 있고 서는 포항시 죽장면과 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남은 양성리, 회리, 북은 사암리가 있다.

 
 
귀민재(貴明峴) :
쟁암 서쪽에 있는 마을임.

         

▒ 사암리(士岩里)

  사암리 동명의 유래는 다사동(多士洞)의 사(士)자와 적암동(赤岩洞)의 암(岩)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암1리는 15세기경 박씨(朴氏)가 처음으로 정착했으며, 16세기말 임진왜란 때 김씨(金氏)가 피난하여 이곳에 왔다 하며, 사암2리는 임진왜란 때 김씨, 이씨, 박씨가 피난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다사동과 적암동을 병합하여 사암동이라 하여 남정면에 편입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사암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사암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사암리의 위치는 동은 구계리, 우곡리 서는 달산면과 포항시 죽장면, 남은 쟁암리, 북은 중화리가 있다.

 
 
다사래(多士里,溫川) :
사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냇물이 여름에는 차고 겨울에는 따스함.
 
적암동(赤岩洞) :
마을 아래에 붉은 바위가 있음.
 
양지뭍 :
다사래 양지쪽 모퉁이에 있는 마을임.
 
음지뭍 :
다사래 음지쪽에 있는 마을임.

         

▒ 도천리(道川里)

  도천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앞에서 두 내(川)가 합하므로 두내 또는 도천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450년경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그 뒤 우씨(禹氏), 국씨(菊氏)가 살았다고 하며, 16세기 후기인 임진왜란 때(1592) 이수춘(李壽春)이라는 분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번창했다고 하며, 1909년에는 큰 화재가 나서 마을이 한때 폐허화 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덕성동(德城洞)을 병합하여 도천동이라 하여 남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도천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천리의 위치는 동은 구계리, 원척리 서는 쟁암리, 남은 봉전리, 북은 우곡리가 있다.

 
 
덕성동 :
도천 서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골 :
도천 아래에 있는 마을임.
 
큰 - 매 :
도천에서 가장 큰 마을임.

         

▒ 우곡리(羽谷里)

  우곡리 동명의 유래는 봉황산이 봉황의 형국으로 되어 있는데 이곳이 봉황의 날개에 해당한다 하여 우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5세기인 세조(世祖) 년간에 이씨(李氏)라는 분이 이곳으로 피난하여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만봉(高萬峰)이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구동(元邱洞 : 元谷洞)을 병합하여 우곡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따라 남정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곡리의 위치는 동은 남호리, 서는 사암리, 동남은 구계리, 도천리, 북은 남정리가 있다.

 
 
고만당(高滿堂) :
우곡 서쪽에 있으며 강원도 간성 현감을 지낸 바 있는 고만당 김주헌(金周憲)이 살았는 데서 붙여진 이름임.
 
원구동(元邱洞) :
우곡 윗쪽에 있는 마을로 원씨(元氏)가 많이 살았다고 하며 원곡동(元谷洞)이라고도 함.

         

▒ 중화리(中禾里)

  중화리 동명의 유래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상화동, 하화동의 중간을 택하여 중화동이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원동(元洞)은 고려시대 때 이씨(李氏)라는 분이 개척했다 하며, 상화동(上禾洞)은 조선조 중종(中宗) 때 황보(皇甫)라는 성을 가진 분이 개척하여, 경주김씨와 함께 정착했다 하며, 하화동(下禾洞)은 김씨가 개척했으며 경주최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상화동, 하화동, 원동을 병합하여 중화동이라 해서 외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재조정에 의하여 남정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중화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화리의 위치는 동남은 남정리, 우곡리, 서는 달산면, 북은 강구면과 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아릿마(下禾) :
화동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안억골(上禾) :
화동 윗쪽에 있는 마을임.
 
억골(禾洞) :
중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
 
절골(元洞) :
억골 서쪽에 있는 마을임.

         

▒ 남정리(南亭里)

  남정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남쪽에 정자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년간 (1480년경)에 주씨(朱氏)와 권씨(權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을 동남쪽 대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겠다.
   구한말(舊韓末)에는 영덕군 외남면(外南面) 지역으로써 조선시대 청하(淸河)의 송라역(松羅驛)에 딸린 남역(南驛)으로 남역 또는 역마라 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日帝)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남정동으로 하여 영덕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을 재조정할 때 남정면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남정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남정리의 위치는 동은 남호리, 서남은 중화리, 우곡리, 북은 강구면 삼사리 화전리와 접한다.

 
 
구기실 :
남역에 있는 마을임.
 
아릿마 :
남정리 아래에 있는 마을임.
 
웃마(웃톳) :
남정리 위에 있는 마을임.

         

▒ 남호리(南湖里)

  본래 영덕현의 외남면 지역으로 조선시대에 역전(驛前)으로 불리다가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개편시 남호동으로 하여 남정면에 편입시켰다. 냄불, 남역불, 내무뿔로 불리웠는데, 이는 남역 앞에 있는 벌(모래사장)가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내목불(川木沙) :
개척 당시 바닷가 중간에 내가 흐르고 양 주변에 큰 버드나무가 번성하여 내목불이라 이름하였다 함.

         

▒ 구계리(龜溪里)

  구계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앞 바위의 모양이 마치 새우가 물에 떠 있는 형상과 같아 하부(鰕浮)라 하였는데 이것이 변하여 구배, 구계가 되었다는 설이 있고 또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形局)이고 깊은 계곡이 있어 구계라 했다고도 한다.
  이 마을은 17세기 후기인 숙종(肅宗) 연간에 김씨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외남면(外南面) 지역이었는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종전의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구계리는 영덕군에 속했으며 1896년 8월 4일 칙령 제36호로 13도제(道制)를 실시할 때 경상도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구계동이라 하여 남정면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구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현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도천리, 남은 원척리, 북은 우곡리, 남호리가 있다.

 

▒ 원척리(元尺里)

  영덕현 외남면 소속으로 조선 인조 년간에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이 터를 잡고 마을을 개척하여 동해바다와 산언덕을 자로 재듯 조화있게 하여 원척이라고 하였는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시 원척동으로 하여 남정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원척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새   쪽 :
동리 북쪽에 있는 마을.
 
마   쪽 :
동리 남쪽에 있는 마을.  

         

▒ 부흥리(富興里)

  부흥리 동명의 유래는 자부랑(慈富 : 者夫郞)의 부(富)자와 신흥(新興)의 흥(興)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부흥1리는 17세기 초기인 선조(宣祖) 년간에 양씨(梁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한다. 도천리 앞산인 봉황산 주령(主嶺) 봉황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형국(形局)이므로 날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날미(飛勿)라 불렀다 하며, 2리는 16세기경에 정씨(鄭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한 뒤 지형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으로 봉황의 새끼는 아름답다 하여 가추(佳雛)라 불렀다 하며, 3리는 17세기경 권씨(權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부자가 많이 생긴다고 하여 자부(慈富)라 하였는데 지금은 자부랑(者富郞)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외남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비물동, 자부랑동, 신흥동(新興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부흥동이라 하고 영덕군 남정면에 편입하였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부흥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봉전리, 남은 장사리, 북은 원척리가 있다.

 
 
개곡(佳雛, 新興洞) :
날밋 서쪽에 새로 된 마을임.
 
날밋(飛勿, 나루끗) :
부흥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
 
자부랑(慈富郞 : 慈富) :
동가추 서쪽에 있는 마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