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 물

1) 유금사 삼층석탑(有金寺 三層石塔)
   1980년 9월 16일 보물 제674호 지정된 유금사 삼층석탑은 병곡면 금곡리 838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천년고찰 유금사 경내에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원래 사찰의 대웅전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을 일제시대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석탑의 양식은 각부의 균형이 갖추어져 있고, 각선도 분명하나 전체 규모의 축소와 옥개석 받침이 감소가 보이는 이중기단 위의 3층 석탑으로 높이가 3.2m이고, 하대석의 넓이는 2.3m이며, 여러 개의 장대(長臺)로 된 지대석(地臺石) 위에 하대석과 중석(中石)을 한돌로 하여 얹었는데, 중석의 각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모각(模刻)되어 있다. 갑석(甲石)은 4매석으로 덮여 있고 위에 약간의 경사가 있는 가운데 2단의 각형 굄이 있어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탑신부(塔身部)에는 옥신석(屋身石)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1석씩 있고 각층 옥신석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받침 수는 각층 4단씩이며, 낙수면(落水面)은 옥개석 전체가 평편한 관계로 경사가 완만하다가 추녀 위에서 꺾어 들며 정상에는 옥신 굄이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석탑 건립 당시 자기로 만들어 얹었다고 하나 중도에 훼손되어 없어졌으며, 현재의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2) 장육사 건칠보살좌상(莊陸寺 乾漆菩薩坐像)
장육사 건칠보살좌상은 창수면 갈천리 120번지 장육사에 봉안되어 있는 보살상이다.
1989년 4월 10일에 보물 제93호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그 조성연대는 조선 태조 4년(1395)으로 위장사 선당의 관음보살상으로 조성되어 태종 7년(1407)에 개금한 것으로 전체 높이는 86.6cm이고, 앉은 높이는 79cm이다.
이 건칠좌불상은 고려조에 판사를 지낸 백진(白瑨)이 공덕주가 되어 영해부사 이귀산(李貴山)과 후임부사 심천우(沈天雨) 및 부민(府民)들의 시주로 조성되었으며, 이후 개금불사에도 백진이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고 한다. 건칠좌불상의 조성목적은 태조 이성계와 현비(顯妃), 그리고 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된 것으로 처음에는 위정사에 봉안되었다가 위정사가 폐찰되면서 장육사로 옮겨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에 조성된 이 불상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불상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머리의 금동관에는 얇은 삼각형의 금동판에 꽃무늬 동판을 오려 붙인 것으로 관과 이마 사이는 머리칼이 띠처럼 되어 있으나, 머리 자체는 상투대신 민머리로 기존의 고려 보살상과는 차이가 있다.
얼굴은 사각형으로 날카로운 코에 눈은 길게 치켜세우고 있어 얼굴 전체는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 있으며, 앞으로 숙여진 상체는 건장하면서도 자연스런 모습을 하고 있다. 건장한 상체에 비하면 하체는 오히려 작아 보이지만 앉아 있는 범위는 넓다. 불상의 옷은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通肩衣)로 가슴에는 쬒형의 독특한 가사고리 장식과 띠매듭을 하고 있다.
전신의 영락장식은 화려하고 복잡한 구슬장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것은 팔이나 등에까지 이어져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말과 조선초 당대 보살상의 편년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따라서 장육사 건칠좌불상은 15세기 불상연구에 귀중한 자료로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2. 중요민속자료

1) 영덕 충효당(忠孝堂)
국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영덕충효당은 창수면 인량리 465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4년 1월 10일에 중요민속자료 제168호로 지정된 민가이다. 종택의 정확한 창건년대는 알 수 없으나 재령이씨 영해입향조 통정공 이애(通政公 李, 1480∼1561)가 연산군 연간(1494∼1506)에서 중종 연간(1506∼1544)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뒤 운악 이함(雲嶽 李涵, 1554∼1632)이 선조 37년(1604)에 원위치에서 뒤쪽 높은 자리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루정(樓亭)의 성격을 띤 충효당은 운악 이함이 후진양성을 위한 교육장으로 활용키 위해 선조 35년(1602)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의 담장 사이에 서향으로 난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충효당이라 편액된 사랑채와 정침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으며, 사랑채와 정침 사이의 후면에는 사당이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정침은 정면 7칸반, 측면 6칸 규모의 口자형 내정(內庭)의 좌측 사랑방 부분이 안채보다 1칸 좌측으로 벗어난 튼口자형으로 되어 있다. 삼칸통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샛방을 우측에는 도장방과 안방, 부엌을 두었는데 좌익사에 자리잡은 큰 사랑방은 충효당을 바라보며 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막돌 쌓기한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 2본만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대들보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마룻대를 받게 한 간결한 구조의 3량가이다.
   충효당이라 편액된 사랑채는 임란 이후의 건물로 정자와 같은 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주로 후학들의 교육장으로 사용되었다 한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 집인데 사랑채에 걸려있는 충효당기(忠孝堂記)에 의하면 동쪽 방에는 따로 소루 2칸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우측에 ㄱ자형의 온돌방을 두고 나머지는 우물마루로 꾸몄으며, 그 주위에는 모두 판벽과 들문을 설치하였다. 높은 자연석 기단 위에 방주를 세웠으며 대청의 상부가구는 파련대공의 웃몸에 첨차를 끼워 종도리를 받게 한 5량가의 구조이다.
   안채와 사랑채, 사당이 구존하는 조선시대의 반가(班家)로서 안채는 이건시 다소 변형은 있었으나 간략한 가구수법을 보여주는 고졸한 건축물로 조선 중기에 건축한 양반가 종택 건축물의 전형(典型)으로, 주위 자연경관과 조화있는 건물배치는 사대부(士大夫)들의 건축에 대한 의식과 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며, 이황의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켜 영남유학을 중흥시킨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