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인 구
인구는 일정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집단의 계수로서 그 지역내의 주민의 총계를 말하며 성별·연령별에 따라 그 구성도를 달리하고 있다. 인구는 제도·사상·관습을 만들거나 이를 발전시켜 가는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이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제공과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는 수요자로써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이다. 사회적으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보통 인구라고 하면 그 지역에 사는 자국민 뿐만 아니라 외국인 등의 이민족(異民族)도 인구의 수에 포함시켜 말한다. |
특히 우리나라는 지난 백여년 사이에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와 3년간의 6.25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이후 급격히 이루어진 산업화 등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1945년에서 1950년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해외에 이주한 해외동포들의 귀국과 국내 거주 일본인들의 철수와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과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남, 혹은 북으로 피난한 남북간의 인구 이동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1960년대 이후는 주로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잠재적 실업상태의 유휴인력(遊休人力)들이 대도시의 산업 현장으로 빠져나가는 도농(都農)간의 대규모적인 인구의 이동이 특징이었다. 영덕군의 인구변동도 위와 같은 우리나라 인구변동의 전반적인 추세와 같이 광복 이후 1950년을 기준으로 점차 인구의 수가 증가하다가 1966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즉 1950년의 군내 인구는 15,664세대수에 82,272명인데, 이것이 1967년에는 20,372세대수에 119,498명의 인구로 늘어나 최정점에 이르렀다가 1998년 현재는 세대수 19,317에 인구수 54,085명으로 불과 30여년 사이에 인구수가 반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이 영덕군의 인구변동의 추세도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상황과 같다고 볼 때 인구가 점차 감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문제는 그 감소의 폭이 심각하다는데 있다고 하겠다. 인구의 감소(減少)는 환경오염의 최소화를 가져와서 쾌적한 생활과 전원적인 자연생활을 하는데는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지만 지역 자체에서의 경제적 자립과 독자적인 교육, 문화권을 형성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업기반을 파괴시켜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등 농촌지역의 인구감소는 점차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농촌지역 인구감소와 같이 영덕군의 인구변동의 일차적인 원인은 196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도시에로의 인구의 유출이다. 특히 인근의 포항에 철강 공단이 들어서는 시점을 기준으로 이러한 인구의 유출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차적인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강력한 가족계획의 영향에 따른 출산율의 저하에도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변화의 정도를 1950년 이후부터 세대당 인구수를 살펴보면 다음의 표〈17〉과 같다. 표에 의하면 1950년의 군내의 세대당 인구수가 5.25명, 1957년에는 5.65명, 1967년에는 5.87명으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로 나온다. 그러나 10년 후인 1977년에는 4.99명, 1987년에는 3.89명, 1997년에는 2.84명으로 종전의 증가 추세에서 완전히 반전되어 점차 감소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군의 인구감소는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유출에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러한 인구감소층의 대부분은 청장년층으로 실질적으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는 노동인구의 유출이므로 지역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
1. 광복 이전의 인구
1) 고 대 선사시대에도 한반도에는 사람이 거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부지역인 우리 지역에도 사람이 거주한 흔적들이 다양한 유물·유적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2) 고려와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호구현황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고려도 개국 이래 엄격한 호구조사제도를 제정하여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려사」 등지의 기록에 의하면 호구조사를 소홀히 하거나 위반한 자에 대하여 엄격한 벌칙을 시행하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호구수에 대하여서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다만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 등으로 고려시대의 호구상황을 추론하는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
표〈1-10〉은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기록된 영덕과 영해지역의 면별 호구와 인구수이다. 표에 의하면 영덕현에서는 오늘날의 남정면 지역인 외남면의 호구와 인구숫자가 974호에 4,146명으로 가장 많은 숫자를 나타내고, 오늘날의 영덕읍의 바닷가 지역인 동면이 780호에 3,280명의 인구수를 가짐에 따라 두번째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에 걸쳐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할 역역(力役)이 상당히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가장 작은 호구와 인구수를 가진 지역으로는 오늘날의 달산면인 서면으로 454호에 716명의 인구수를 가진다.
영해부에서는 오늘날의 축산면 지역인 남면의 호수와 인구수가 635호에 2,177명으로 가장 많으며, 영덕현에 비하여 호수는 2,466호, 인구수는 8,488명으로 많이 적은 편이다. 이는 영해부 지역에 사대부가들이 많아 이들이 호구총수에 포함되지 않아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
3) 근대와 현대
1880년대 이후의 호구와 인구수는 조선시대 말기의 내외 정세의 격변에 따라 조사의 불성실과 신고자들에 의한 신고누락이 많아 그 이후 일제 강점 아래에서의 호구조사에 따른 호구와 인구수에 비하여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조사의 신뢰도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
이와 같은 인구감소 현상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기본적 요소인 환경적 측면으로는 좋은 점이 많지만, 독립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보존 전승하는 것이라든지 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 사회, 그리고 교육 등에 있어서 자체적인 수요와 공급이 창출되지 않고 거의 전부가 역외로 유출되어 오히려 역수입이 되는 현실이 되고 있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구감소의 원인으로는 이때까지의 농업사회에서 계절적으로 집중되는 농업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잉여인력으로 농촌에 유보되었던 농촌인구가 1960년대 초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산업화 우선 정책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도시의 산업현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데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외의 원인으로는 열악한 교육·문화적 기반에 따른 이농 현상도 무시 못할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인구의 유출을 막고, 유출된 인구의 유입을 위하여 문화시설의 확충과 농공단지의 조성 등으로 수준 높은 문화와 삶을 위한 경제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어 그 효과가 점차 나타나고 있다. |
2. 인구의 변화추이
조선시대의 인구조사는 부역과 조세의 징수를 목적으로 하여 이것들을 직접 부담하는 일반인들만 조사하였으며, 조사 방법도 호(戶)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현재의 인구조사와 다를 뿐만 아니라 조사한 통계수치도 들쑥날쑥하여 정확한 통계수치를 알아보는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나라의 통계에 대하여 그나마 정확성이 담보되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 아래부터라고 할 수 있다. |
광복 이후의 인구변동을 살펴보면 1945년에서 1949년까지의 인구의 변동은 광복전의 증가추세와 광복 이후 해외동포의 유입 등으로 다소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영덕군 통계연보에 기록이 나오는 1950년도의 세대수와 인구수는 15,664세대에 82,272명이 군내에 거주한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수치는 해방전 보다 다소 증가세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 큰 폭의 변동이 없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1950년 이후에도 군의 인구와 세대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왔으며, 1967년에 이르러서는 군내의 인구수가 119,498명으로 역대 최정점을 이룬다. 1967년 이후에는 국가단위의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대규모 인력의 수요가 발생하여 전국 농촌의 유휴인력이 산업현장으로 이동하는 상황에 따라 영덕군의 인구도 산n업현장 혹은 대도시로의 유출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이후 군내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한편 세대수에 있어서는 광복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오다가 인구수의 최대 정점인 1967년과 달리 이 보다 8년 후인 1975년에 이르러 21,393세대로 최정점을 이룬 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세대와 인구수의 불일치는 인구수가 사회 경제적 여건에 따라 변동하듯이 종래의 대가족 중심시대에서 핵가족화 되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대수가 증가하다가 1975년 이후로는 농촌인구 자체가 감소함에 따라 이들이 구성하는 세대수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고 하겠다. 표〈111〉은 1950년 이후 영덕군의 총인구 변동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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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구동태 영덕군의 자연적인 인구동태와 인구의 이동을 광복 이후 1998년에 이르기까지 10년이나 5년 단위로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거의 이행된 90년대의 인구의 변동과 인구의 동태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사료된다. |
표에서 보듯이 전출의 종류가 시·도내의 이동보다 시도간의 전출이 월등히 많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1993년 이후부터 시도간에 있어서 전입보다 전출이 월등하게 많다. 1996년도에는 전입의 수보다 무려 117.6%를 초과하여 시·도간 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후 1998년에는 위와 똑같은 IMF체제 이유로 전입보다 전출이 처음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시·도간의 전출의 주요한 원인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가 최고로 큰 이유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1차적인 방법은 지역의 경제적 토대를 굳건히 하여 합리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표〈114〉는 인구동태를 나타낸 것인데, 출생율과 사망률 자체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망율이 출생율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농촌인구의 고령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젊은 층이 대거 대도시로 유출되어 새로이 이들의 빈자리를 채워 줄 젊은층이 이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혼인에 비하여 이혼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점차 대도시형으로 닮아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인구이동과 인구동태를 살펴보면 특히 청장년층을 포함한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의 유출이 심하여, 이들에 의한 출생율의 저하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노동력의 제공이 불가능하여 지역의 경제적인 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과 민속, 풍속, 사회적인 유대 등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전승과 보존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어 전통사회의 기반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