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인 구

  인구는 일정 지역에 살고 있는 인간집단의 계수로서 그 지역내의 주민의 총계를 말하며 성별·연령별에 따라 그 구성도를 달리하고 있다. 인구는 제도·사상·관습을 만들거나 이를 발전시켜 가는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존재이며,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생산을 위한 노동력의 제공과 생산된 재화와 서비스를 소비하는 수요자로써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이다. 사회적으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보통 인구라고 하면 그 지역에 사는 자국민 뿐만 아니라 외국인 등의 이민족(異民族)도 인구의 수에 포함시켜 말한다.
  최근 수세기 동안에 지구상에 일어난 수많은 변동 중에 인류사회 만큼 급격한 변동을 겪은 경우도 드물 것이다. 특히 이러한 인류사회의 변동 중에 가장 두드러진 변동은 급격한 인구의 증가와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인구의 대규모 이동과 집중현상을 들 수 있다.
  인구의 과도한 증가와 집중화는 현대 산업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노동력의 동원 및 인구에 대한 정치, 사회적 통제와 관리에 있어서는 다소간의 편리함을 가져다 주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도시화의 문제, 환경의 문제, 고용의 문제, 부족한 식량자원의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가져다 주고 있어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원인의 일단을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현대에 일어나고 있는 대부분의 일들은 인구의 이러한 도시화, 집중화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난 백여년 사이에 36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와 3년간의 6.25한국전쟁, 그리고 1960년대 이후 급격히 이루어진 산업화 등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급격한 인구변동이 있었다.
  1945년에서 1950년대는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해외에 이주한 해외동포들의 귀국과 국내 거주 일본인들의 철수와 6.25한국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인명손실과 전쟁의 참화를 피해 남, 혹은 북으로 피난한 남북간의 인구 이동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다.
  1960년대 이후는 주로 산업화로 인한 농촌의 잠재적 실업상태의 유휴인력(遊休人力)들이 대도시의 산업 현장으로 빠져나가는 도농(都農)간의 대규모적인 인구의 이동이 특징이었다.
  영덕군의 인구변동도 위와 같은 우리나라 인구변동의 전반적인 추세와 같이 광복 이후 1950년을 기준으로 점차 인구의 수가 증가하다가 1966년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 즉 1950년의 군내 인구는 15,664세대수에 82,272명인데, 이것이 1967년에는 20,372세대수에 119,498명의 인구로 늘어나 최정점에 이르렀다가 1998년 현재는 세대수 19,317에 인구수 54,085명으로 불과 30여년 사이에 인구수가 반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이 영덕군의 인구변동의 추세도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상황과 같다고 볼 때 인구가 점차 감소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지만 문제는 그 감소의 폭이 심각하다는데 있다고 하겠다.
  인구의 감소(減少)는 환경오염의 최소화를 가져와서 쾌적한 생활과 전원적인 자연생활을 하는데는 많은 이점을 가져다 주지만 지역 자체에서의 경제적 자립과 독자적인 교육, 문화권을 형성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을 가져다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농업기반을 파괴시켜 나라의 기틀을 무너뜨리는 등 농촌지역의 인구감소는 점차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농촌지역 인구감소와 같이 영덕군의 인구변동의 일차적인 원인은 1960년대의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대도시에로의 인구의 유출이다. 특히 인근의 포항에 철강 공단이 들어서는 시점을 기준으로 이러한 인구의 유출이 심화되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이차적인 원인으로는 1960년대 이후 정부 주도하에 이루어진 강력한 가족계획의 영향에 따른 출산율의 저하에도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변화의 정도를 1950년 이후부터 세대당 인구수를 살펴보면 다음의 표〈1­7〉과 같다. 표에 의하면 1950년의 군내의 세대당 인구수가 5.25명, 1957년에는 5.65명, 1967년에는 5.87명으로 점차 증가하는 추세로 나온다. 그러나 10년 후인 1977년에는 4.99명, 1987년에는 3.89명, 1997년에는 2.84명으로 종전의 증가 추세에서 완전히 반전되어 점차 감소하는 추세이다. 따라서 군의 인구감소는 산업화에 따른 인구의 유출에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이러한 인구감소층의 대부분은 청장년층으로 실질적으로 농업에 종사할 수 있는 노동인구의 유출이므로 지역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히 크다.
 
1. 광복 이전의 인구

1) 고 대

  선사시대에도 한반도에는 사람이 거주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동부지역인 우리 지역에도 사람이 거주한 흔적들이 다양한 유물·유적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선사시대에 한반도나 우리 지역에 거주한 인류에 대한 구체적인 숫자나 생활방식에 대한 정보나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이들에 대하여 알아 볼 방법은 없다. 다만 발견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하여 이들의 생활상태 등을 유추할 따름이다.
  단편적으로나마 고대의 인구나 생활상을 기록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는 시기는 고대 부족국가시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이 때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기록으로는 중국측의 기록인 사마천의 「사기(史記)」나 진수의 「삼국지위지동이전」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통하여 단편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들 기록들에 의하더라도 한반도 전체에 거주한 인구수와 생활상을 파악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으며, 나아가 당시에 소부족(少部族) 형태로 존재한 영덕지역의 인구와 생활상을 파악하기는 더더욱 불가능하다.
  고대 영덕지역의 인구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유추할 수 있는 시대는 통일신라시대 이후로 고려시대에 저술된 「삼국사기」 지리조(地理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 16년(757) 에 통일 신라의 행정구역을 개편하여 전국을 9주 5경 117군 293현으로 하였다는 기록과 이 때에 영덕과 영해도 야시홀(也尸忽)에서 야성군(野城郡)으로 우시군국(于尸郡國)에서 유린군(有隣郡)으로 개명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에 걸맞는 상당한 규모의 인구가 이 지역에 상주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신라시대의 지방통치의 근간은 대성(大城,州)→성(城,郡)→소성(小城,縣)의 단계로 이루어졌으므로 소성보다 상위의 군 단위인 이 지역은 여기에 걸맞는 인구와 호수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2) 고려와 조선시대

  고려시대의 호구현황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렇지만 고려도 개국 이래 엄격한 호구조사제도를 제정하여 실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려사」 등지의 기록에 의하면 호구조사를 소홀히 하거나 위반한 자에 대하여 엄격한 벌칙을 시행하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의 호구수에 대하여서는 현재 정확하게 알 수는 없고, 다만 조선시대 초기의 기록 등으로 고려시대의 호구상황을 추론하는데 그치고 있을 뿐이다.
  호구조사에 대한 자료가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 있는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개국 초부터 호적의 정비에 많은 힘을 기울여 호적제도를 새로이 하고 호구조사도 여러 번 실시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이나 「경상도지리지」·「호구총수」·「탁지지」 등의 문헌자료에 이들 조사기록들이 남아 있어 조선시대 및 그 전의 고려시대의 호구수를 알아보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오늘날의 인구센서스와는 거리가 있어 전체적인 인구의 수와 생활상을 파악하는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이는 호구의 조사가 전국의 인구수를 알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부역의 해당자를 파악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고, 호구조사의 방법도 오늘날의 인구통계조사 방법과는 완전히 판이한 것이었으며, 그 조사 개념과 목적도 오늘날과는 다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점이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호구조사는 세(稅)·역(役)·공물(貢物) 등의 역역(力役)과 공부(貢賦)의 부담 대상호(對象戶)로서의 편호(編戶)방식에 따른 호구조사가 대부분이었으며, 이 때 호의 기준은 3호를 합하여 1호로 묶거나 3가(家)를 묶어서 1호로 하거나 3정(丁)을 1호로 하는 법제적인 편호의 방식이었으며, 이 경우에 있어서도 역의 경중이나, 신분의 고하(高下), 또는 지역에 따라 규모의 차이가 있어 일률적인 방식으로 조사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였다.
  구(口)의 경우에 있어서도 남정(男丁)의 숫자만 기록되거나 남녀정(丁), 또는 남녀노장약(男女老壯弱)으로 기록한 경우가 있어 당시의 호구 전체에 대한 파악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호구조사가 실제 호구수의 파악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으나, 이것도 당시의 실재 가구수와 인구수를 참작하여 조사된 것인 만큼 당시의 지역별 인구의 다과를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전국의 호수와 경상도, 그리고 영덕, 영해의 호구수를 조사하여 보면 표〈1 - 8〉과 표 〈1­ 9〉와 같다.
  표〈1­8〉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경상도 지방의 호수는 현종(재위 1660∼1674) 이후부터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30만호를 넘긴다. 이후 이러한 성장세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영조(재위1725∼1776)초에 이르러 40만호로 정점을 이룬 후 점차로 경상도 인구수는 감소하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로는 인조(재위1623∼1649)대에 들어와서 임진왜란(1592∼1597)으로 멸실(滅失)된 전적의 정비와 사회경제체제의 안정에 따라 기존의 호구수가 정확하게 파악됨에 따라 호구수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일차적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영조대 이후의 호구수의 감소와 완만한 증가세는 호구파악의 부정확과 호구조사에 대한 비협조 등과 당시에 닥친 재난과 전염병 등의 질병이 인구감소의 주요한 원인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영조 7년(1731), 영조 9년(1733), 영조 18년(1742), 영조 25년(1748)에 이르기까지 대역병(大疫病)이 엄습하여 경향각지에서 죽은 자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한편 조선시대의 영덕과 영해 지역의 호구수의 변동을 위의 경상도지역 호구수의 변동과 관련지어 살펴보면 표〈1-9〉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표에서 보듯이 태종 10년(1410)에 영덕의 호수와 인구수는 862호에 3,252명이며, 영해의 호수와 인구수는 593호에 2,492명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이 지역의 호구와 인구수의 대강을 알 수 있다. 이 당시의 호구수는 양반과 천민을 제외한 일반 백성들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경상도 전체의 호구수의 변동과 같이 영덕지역에서도 임진왜란 이후에 호수와 인구수에 급격한 변동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에 사회체제가 안정되자 호구정비에 철저를 기한데 기인한 것도 있지만, 전란에 따른 인구의 이동에 기인한 것도 주요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의 근거로는 임진왜란 전의 지역의 주요 성씨(姓氏) 숫자와 임진왜란 이후의 성씨들의 숫자를 비교하여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영덕지역은 숙종(재위1675∼ 1721) 이래로 호수와 인구수에 있어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나 영해지역은 영조대 이후부터 호구와 인구수가 감소하고 있다. 이러한 영해지역의 인구감소의 원인은 재난이나 역병에 기인한 것도 있지만 과도한 역역을 피하기 위하여 사대부가(士大夫家)에 투탁(投託)하여 신고가 누락된 경우에 기인한 것도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표〈1-­10〉은 1789년에 간행된 「호구총수」에 기록된 영덕과 영해지역의 면별 호구와 인구수이다. 표에 의하면 영덕현에서는 오늘날의 남정면 지역인 외남면의 호구와 인구숫자가 974호에 4,146명으로 가장 많은 숫자를 나타내고, 오늘날의 영덕읍의 바닷가 지역인 동면이 780호에 3,280명의 인구수를 가짐에 따라 두번째로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에 걸쳐 이들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할 역역(力役)이 상당히 무거웠음을 알 수 있다 하겠다. 가장 작은 호구와 인구수를 가진 지역으로는 오늘날의 달산면인 서면으로 454호에 716명의 인구수를 가진다.
  영해부에서는 오늘날의 축산면 지역인 남면의 호수와 인구수가 635호에 2,177명으로 가장 많으며, 영덕현에 비하여 호수는 2,466호, 인구수는 8,488명으로 많이 적은 편이다. 이는 영해부 지역에 사대부가들이 많아 이들이 호구총수에 포함되지 않아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3) 근대와 현대

  1880년대 이후의 호구와 인구수는 조선시대 말기의 내외 정세의 격변에 따라 조사의 불성실과 신고자들에 의한 신고누락이 많아 그 이후 일제 강점 아래에서의 호구조사에 따른 호구와 인구수에 비하여 엄청난 차이가 나타나고 있어 조사의 신뢰도 자체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영덕과 영해지역만 보더라도 1899년의 영덕지역의 호수와 인구수가 1,815호에 6,780명이고 영해지역은 1.998호에 6,492명으로 나오고 있는데, 이보다 25년 전인 고종 10년(1874)의 영덕지역의 호수 3,772호와 인구수 15,065명, 영해지역의 호수 2,503호와 인구수 8,672명에 비교하면 영덕의 경우는 그 차이가 2배 이상 나고 있어 실제 호수와 인구수를 추정하는데 무리가 있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하에 있어서 인구조사는 일제 식민정책의 따르는 식민지수탈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져서 역설적이지만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정확한 인구통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또한 일제에 의한 수탈과 탄압이 지속되면서 국내의 많은 인구가 국외로 탈출하는 등 국내외적으로 인구의 유동이 심한 시기였다.
  특히 일제의 식민통치가 극치에 이르기 시작하는 1930년대의 우리 지역의 세대수와 인구수를 살펴보면 1933년에는 14,999세대에 78,589명의 인구가 이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1937년도에는 세대수 14,931세대에 인구수 79,995명이 이 지역에 거주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일제 강점하의 전국의 연평균 인구증가율 1.9%에도 미치지 못하는 1.79%에 달하는 수치로 일제 강점하의 이 지역의 열악한 생존조건에 의하여 인구가 급격히 늘지 못하였으며, 다수의 국민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이주하였듯이 우리 지역에서도 많은 수의 군민들이 만주 등지의 해외로 이주함에 따라 인구증가를 상쇄시켰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시대를 거쳐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지만 어수선한 시국과 6.25 한국전쟁이란 미증유의 불행을 겪으면서 전국에 걸쳐 인구이동의 대변동을 맞이한다. 일제치하에서 해외로 이주한 해외동포의 귀국과 6.25 한국전쟁으로 인한 남북간의 인구 이동은 이 당시 인구변동의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광복 이후부터 1960년까지의 우리 지역의 인구변동 추세를 살펴보면 전국의 연평균 인구증가율 1.1%보다 훨씬 높은 2.9% 이상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데, 위와 같은 원인이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표〈1-­11〉에 의하여 살펴보면 이러한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표에 의하면 1950년 이래로 영덕의 인구는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출생율에 따르는 자연적인 인구의 증가라기보다 위와 같은 인위적인 요인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1960년 이후의 이 지역의 인구의 변동은 꾸준히 증가하여 1967년에 이르러서는 20,372세대에 119,498명의 인구로 역대 최고의 정점에 이른 후 점점 줄어들어 1998년 현재는 세대수 19,317세대에 인구수 54,085명으로 이 때의 절반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것은 군의 인구가 최대에 이르는 1967년에 비하여 무려 65,413명이 줄어든 것으로 군단위 지역의 인구감소로는 전국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이다. 인구감소율도 1967년을 기준으로 할 때 1998년 현재는 55.2%나 감소한 것으로 나온다. 불과 30여년 사이에 군의 인구가 55.2%가 줄어 들었으니 그간의 변동치고는 엄청난 변동이다.

  이와 같은 인구감소 현상은 인간생활에 있어서 기본적 요소인 환경적 측면으로는 좋은 점이 많지만, 독립적인 주체성을 가지고 지역의 고유한 문화를 보존 전승하는 것이라든지 지역의 정치, 경제, 행정, 사회, 그리고 교육 등에 있어서 자체적인 수요와 공급이 창출되지 않고 거의 전부가 역외로 유출되어 오히려 역수입이 되는 현실이 되고 있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같은 인구감소의 원인으로는 이때까지의 농업사회에서 계절적으로 집중되는 농업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하여 잉여인력으로 농촌에 유보되었던 농촌인구가 1960년대 초기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산업화 우선 정책에 의하여 점차적으로 도시의 산업현장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데 가장 큰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그 외의 원인으로는 열악한 교육·문화적 기반에 따른 이농 현상도 무시 못할 원인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한편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인구의 유출을 막고, 유출된 인구의 유입을 위하여 문화시설의 확충과 농공단지의 조성 등으로 수준 높은 문화와 삶을 위한 경제적인 토대를 제공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어 그 효과가 점차 나타나고 있다.

2. 인구의 변화추이

  조선시대의 인구조사는 부역과 조세의 징수를 목적으로 하여 이것들을 직접 부담하는 일반인들만 조사하였으며, 조사 방법도 호(戶)를 기준으로 하는 것으로 현재의 인구조사와 다를 뿐만 아니라 조사한 통계수치도 들쑥날쑥하여 정확한 통계수치를 알아보는데는 많은 한계가 있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나라의 통계에 대하여 그나마 정확성이 담보되는 시기는 일제 강점기 아래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倂呑)한 일제는 효과적인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 무엇보다 한반도에 대한 정확한 실정을 알아야 했으며, 그 실정파악 방법의 하나가 정확한 조사통계였다. 특히 태평양전쟁으로 치닫는 1930년대 이후에는 그 조사통계의 강도는 어느 때 보다 심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일제 강점 아래의 영덕군의 총인구를 살펴보면 1933년에는 14,999세대에 78,589명이었으며, 4년 후인 1937년에는 14,931세대에 79,995명(외국인 포함, 1936년의 「경북대감」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음)의 인구가 군내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인구수가 절정기를 이룬 1960년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보다는 4만여명이 적은 숫자이나 1998년 현재의 인구수 보다는 오히려 많은 인구가 군내에 거주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광복 이후의 인구변동을 살펴보면 1945년에서 1949년까지의 인구의 변동은 광복전의 증가추세와 광복 이후 해외동포의 유입 등으로 다소 증가한 것으로 보이며, 영덕군 통계연보에 기록이 나오는 1950년도의 세대수와 인구수는 15,664세대에 82,272명이 군내에 거주한 것으로 나온다. 이러한 수치는 해방전 보다 다소 증가세를 가지고 있으나 그렇게 큰 폭의 변동이 없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1950년 이후에도 군의 인구와 세대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왔으며, 1967년에 이르러서는 군내의 인구수가 119,498명으로 역대 최정점을 이룬다. 1967년 이후에는 국가단위의 경제개발 추진에 따른 대규모 인력의 수요가 발생하여 전국 농촌의 유휴인력이 산업현장으로 이동하는 상황에 따라 영덕군의 인구도 산n업현장 혹은 대도시로의 유출이 일어나기 시작하여 이후 군내의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한편 세대수에 있어서는 광복 이후 꾸준히 증가하여 오다가 인구수의 최대 정점인 1967년과 달리 이 보다 8년 후인 1975년에 이르러 21,393세대로 최정점을 이룬 후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세대와 인구수의 불일치는 인구수가 사회 경제적 여건에 따라 변동하듯이 종래의 대가족 중심시대에서 핵가족화 되어 가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세대수가 증가하다가 1975년 이후로는 농촌인구 자체가 감소함에 따라 이들이 구성하는 세대수도 점차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고 하겠다.
  표〈1­11〉은 1950년 이후 영덕군의 총인구 변동추이를 나타낸 것이다.
 

1) 읍·면·리별 인구분포

  군내의 전체 인구수에서 영덕읍·강구면·영해면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9년 12월 31일 현재 전체의 60.39%로 거의 2/3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된 주요한 원인으로는 예로부터 부치(府治)와 현치(縣治)가 있던 영해와 영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하여 왔으며, 현대에 들어와서도 관공서가 집중하여 있고, 군내의 모든 정치·문화·교육·상업의 중심지로써 역할을 하여왔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거주하는 인구가 많아진 것이 그 원인으로 볼 수 있으며, 강구면의 인구가 많은 것은 해방 전부터 강구항이 어항으로 개발되면서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이들 3개 읍·면 이외에 군을 구성하고 있는 6개의 면 지역에도 다수의 인구가 거주하면서 군 전체의 일부분을 구성하면서 군정의 수요 및 공급을 담당하는 주체로써 각 지역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가며 풍요로운 삶을 영위해 가고 있다.
  군내 읍·면·리에 거주하고 있는 인구에 대하여 그간의 세대수와 인구수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지역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하나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지역의 발전과 변화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여 주기 때문에 읍·면 및 리별 인구 변화추이를 살펴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따라서 영덕군의 1979년과 1999년의 군내의 읍·면 및 리별 인구의 분포와 변화를 표〈1­12〉에 나타내어 보았는데, 표에 의하면 지난 20년 동안 군내의 인구수에 있어서 변동은 엄청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구수와 함께 인구통계에 있어서 중요한 기준인 세대수의 변동은 거의 미미한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는 종래의 대가족 중심사회에서 핵가족화 되어 가는 영향으로 세대수가 늘어난 데 그 영향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실제 농촌과 어촌에는 빈집이 수두룩한 것으로 보아 통계조사의 부정확성이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표에 의하면 1979년을 기준으로 1999년의 변동을 살펴보면 세대수의 변동에 있어서는 영덕 22%, 강구 9.7%, 영해 14%로 세대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위와 같이 이들 지역이 교육이나 문화, 그리고 관공서를 중심으로 하는 상권(商圈)이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인구수는 오히려 영덕 24%, 강구 35%, 영해 32%가 줄어들고 있어 영덕·강구·영해의 읍·면 소재지 지역 외에는 그간의 많은 인구의 유출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내의 1읍 8면 중에서도 인구와 세대수에 있어서 극심한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은 달산·지품·창수면이다. 이들 면은 군내에서도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잠재적 노동력이 대거 대도시로 유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3개 면의 세대수와 인구감소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대수의 감소율은 달산면이 33%, 지품면이 18%, 창수면이 24%이며, 인구수에서는 달산면이 64%, 지품면이 58%, 창수면이 61%나 감소하였다.
  아래의 표〈1-­12〉는 1979년 대비 1999년의 읍·면·리별 전체적 인구와 세대수의 변화추이를 보여주는 표이다. 표에 의하면 영덕읍 우곡리의 변화가 가장 크다. 우곡리란 동명은 1638년에 영덕에 귀양 온 고산 윤선도의 시(詩)에 나올 정도로 아주 유서(由緖)깊은 동리이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는 읍내에 있어서도 한가한 주변지역이었으나 1990년대에 들어와서 조용하고, 공기 맑은 주거지역으로써 점차 개발되기 시작하여 1979년도의 138세대수가 665세대로 증가하였으며, 주민의 수도 1979년의 614명에서 무려 2,090명으로 늘어났다.
  강구면에서는 세대수에 있어서는 오포 1리와 오포 2리, 그리고 금호 1리가 두드러지는데, 오포 1리의 경우는 195세대에서 321세대로 증가하였으나, 주민의 수는 1,064명에서 996명으로 줄어들고 있으며, 오포 2리의 경우에도 세대수는 402세대에서 613세대로 증가하고 있으나, 주민수는 오히려 1,925명에서 1,888명으로 감소하고 있다. 다만 금호 1리의 경우에는 세대수가 44세대에서 180세대로 증가하였으며, 주민의 수에 있어서도 241명에서 582명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는 강구 4리를 포함한 해안지역 주민들을 집단 이주하여 금호 1리에 신주택단지를 조성한데 따라 이들 세대수와 주민수가 늘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정면 지역은 세대수와 주민수에 있어서 전반적으로 감소 추세에 있으며, 특히 남정리의 변화가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달산면의 경우도 대지 1리를 비롯하여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이며, 특히 세대수의 감소보다 주민수의 감소 폭이 심각할 정도로 크다. 1999년도의 주민수는 1979년도에 비해 35.8%에 불과할 정도이다.
  지품면의 경우도 세대수와 인구수의 감소는 급격히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삼화 1리, 눌곡, 신안의 경우만 세대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주민수는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축산면, 병곡, 창수면의 경우도 세대수와 주민수에 있어서 그 감소 폭이 크다. 영해면에 있어서는 괴시 1리와 괴시 3리, 그리고 벌영 1리, 성내 4리, 원구 1리만 세대수가 늘어나고 있으나, 이 경우도 대부분의 주민수는 줄어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인구동태

  영덕군의 자연적인 인구동태와 인구의 이동을 광복 이후 1998년에 이르기까지 10년이나 5년 단위로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지만,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거의 이행된 90년대의 인구의 변동과 인구의 동태를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 사료된다.
  사실 영덕의 인구가 최대를 자랑하던 1967년의 119,498명에서 그 절반인 59,749명이 되는 연도는 1993년에서 1994년 사이이다. 이렇게 되는 기간은 대략 27년이 걸렸다. 따라서 절반으로 줄어든 시점인 1993년 이후의 영덕의 인구 이동과 동태를 살펴보면, 표〈1­13〉과 표〈1­14〉와 같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표에서 보면 1993년 이후에는 인구이동 중에서 전입보다 전출이 해마다 증가함을 알 수 있는데, 1993년도에는 전입보다 전출이 무려 40.4%가 더 많다. 이러한 추세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해마다 전출의 수가 전입의 수보다 증가하여 오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1998년 IMF체제가 되자 이러한 전출의 증가추세가 잠시 주춤하여 전출과 전입이 거의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IMF체제가 끝나고 경제가 호전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갈 것으로 보여진다.

 

 
  표에서 보듯이 전출의 종류가 시·도내의 이동보다 시도간의 전출이 월등히 많은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1993년 이후부터 시도간에 있어서 전입보다 전출이 월등하게 많다. 1996년도에는 전입의 수보다 무려 117.6%를 초과하여 시·도간 전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후 1998년에는 위와 똑같은 IMF체제 이유로 전입보다 전출이 처음으로 줄어들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시·도간의 전출의 주요한 원인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가 최고로 큰 이유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구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한 1차적인 방법은 지역의 경제적 토대를 굳건히 하여 합리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 여건을 조성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표〈1­14〉는 인구동태를 나타낸 것인데, 출생율과 사망률 자체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사망율이 출생율보다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농촌인구의 고령화를 보여주는 사례로 젊은 층이 대거 대도시로 유출되어 새로이 이들의 빈자리를 채워 줄 젊은층이 이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한 혼인에 비하여 이혼율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점차 대도시형으로 닮아가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인구이동과 인구동태를 살펴보면 특히 청장년층을 포함한 경제활동이 가능한 인구의 유출이 심하여, 이들에 의한 출생율의 저하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노동력의 제공이 불가능하여 지역의 경제적인 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전통과 민속, 풍속, 사회적인 유대 등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전승과 보존이 불가능해져 가고 있어 전통사회의 기반이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