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씨의 유래 |
우리나라에서 성(姓)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대를 대체로 통일신라 이전의 삼국시대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성씨의 취득은 종래의 혈연공동체에서 좁은 범위의 씨족간의 구별을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들 성씨의 선택은 각 씨족간의 특징적인 것을 가지고 그 씨족의 대표성을 나타내는 특정 성씨로 하였다.
성씨가 각 씨족에 부여 혹은 취득함에 따라 비로소 각 씨족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다른 씨족집단과 구별할 수 있게 되어 종래 보다 더욱 더 씨족내의 혈연의식이 공고하여지고 그 씨족이 가진 특권을 더욱 굳건히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시대에 있어서 성씨를 가진 집단의 대부분이 왕족이나 귀족 등과 같은 지배층이었던 것으로 보아 이를 알 수 있다. 각 씨족의 성씨의 부여는 대개 시조의 출신지나 거주지의 특징을 따서 지은 것이 대부분이나, 통치권을 가진 왕으로부터 성씨를 부여받거나, 나라에 공을 세운 것에 대한 보답으로 봉지(封地)를 하사 받아 그 봉토가 소재(所在)한 지역을 성씨로 하였다. 특히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신라는 점령지의 통치를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중앙 귀족들을 이들 지방으로 이동시켜 지방을 다스리도록 하였는데, 이때 신라의 중앙귀족들의 대거 지방으로의 이동이 있었으며, 점령지인 고구려와 백제의 잔여왕족과 귀족들도 이들의 반란을 경계한 신라에 의하여 본래의 세거지(世居地)에서 타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삼국통일 후에 이들 삼국의 중앙 왕족이나 귀족들은 전국적으로 이동을 하게 되었다. 결국 이들의 이동에 따라 중앙에서 왕족과 귀족 등의 특수한 계층만 사용하던 성씨의 사용이 점차 전국화(全國化)되어 갔으며, 동일 성씨라도 지역에 따라 본관을 새로이 창관(創貫)하는 소위, 동일 성씨의 파조(派祖)도 특정지역에서 전국화되어 갔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통일 신라 말의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점차 보편화되어 갔는데, 종래까지는 왕족이나 중앙 귀족 등의 특수층만 성씨와 본관을 가졌으나,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지고 정국이 혼미해지자 중앙 정부의 지배권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각 지방의 호족이나 촌주들은 중앙의 지배체제가 무력화된 틈을 타서 스스로 성씨를 가지고는 지방의 군벌로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중앙 정부에 대항하기도 하는 등 특정한 성씨를 창성(創姓)하여 이를 중심으로 문벌을 형성하여 나갔다. 이러한 것은 후일 고려가 건국된 후 문벌 중심의 정치체제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도 성씨의 사용은 각 지역의 세력자(勢力者)들만이 사용하였으며, 아직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사용되지는 못하였다. 일반 백성들도 본격적으로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은 후삼국 이후 새롭게 개국한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부터 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도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진 것은 아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성씨 사용이 일반인들에게까지 확고히 뿌리내린 것은 조선시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근거로는 조선시대 전기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들 성씨에 대한 것들을 집대성하여 등재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들 성씨의 사용은 신라시대 이래로 상류층을 형성하던 씨족들에 한정되었으며, 또한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들의 대부분에게 성씨를 부여하여 양반이란 지배층으로 편입시켜 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성씨 제도가 확고히 뿌리 내린 조선시대에도 전기(前期)에는 전 국민이 성씨를 가졌던 것은 아니였다. 이는 이 때에도 성씨를 가지지 못한 층이 전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였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일반 백성들도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경제적인 동요에 따른 신분 상승과 기타 요인에 의하여 점차 일반 백성들도 성씨를 가지게 되었으며, 명실상부하게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1894년 갑오경장 이후이다. 갑오경장을 계기로 종래의 신분과 계급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어 성씨의 사용이 보편화 되었다. 그리고 1909년의 민적법(民籍法)의 시행으로 누구라도 성(姓)과 본(本)을 가지도록 법으로 정하게 되어 전 국민은 누구나 성과 본(本)을 가지게 되었다. 결국 일반 백성들이 고유의 성과 본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100여년 전이다. |
2. 성씨의 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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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이전의 영덕과 영해지역의 성씨에 대하여는 자료의 부족으로 그 상세한 것은 거의 알 수가 없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겨우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사재소감 박강전(司宰少監朴强傳)」에 영해 박씨,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의 기록에 함창 김씨와 영양 남씨, 영해신씨 등의 성씨들의 기록이 보이며, 나옹화상의 비문에 아(牙)씨와 영산 정씨, 그리고 대흥 백씨 등의 성씨가 보이는 정도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영덕과 영해지역에서도 다수의 성씨가 토성(土姓), 촌성(村姓), 래성(來姓), 속성(續姓)으로 구분하여 기록으로 나타나며, 이들 특정 성씨를 중심으로 문벌을 형성하며 지역의 유력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의 영덕과 영해에 상주한 성씨들의 대략적인 변화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전기와 후기에 따라 변화의 차이가 크다. 조선시대를 대개는 임진왜란을 기준으로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전기에 있어서는 건국 초기를 제외하고는 사회경제적 체제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어서 각 지역내에 정착하여 살던 인구의 이동은 거의 없었으며, 지역과 지역간의 인구의 이동과 이에 따르는 성씨의 이동도 아주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에 있어서도 인구의 이동과 성씨 분포의 변화정도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표〈115〉에 보듯이 여기에 기록된 영덕의 8대 성, 영해의 6대 성이 조선시대 전기(前期) 동안 거의 그대로 지역의 유력성(有力姓)으로 유지되어 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회경제적 체제가 동요하기 시작하여 나라 전체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사회체제 전부분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와 전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변동을 겪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구의 대규모 이동과 신분의 동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분의 동요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양반의 몰락과 수많은 새로운 양반층의 증대에 따르는 역역(力役)과 세수수입의 저하 등, 조선시대 후기에 있어서 나라의 기틀을 흔들 정도의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이 영덕과 영해지역에도 미쳤다. 우리 지역의 이러한 변화의 정도를 임진왜란 이전의 자료와 임진왜란 이후의 자료를 비교하여 보면 확연히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전기에 있어서는 영덕의 8성과 영해의 6성이 후기에 들어와서는 영덕에서는 무려 20성으로 늘어나고, 영해에서도 18성(동성이본인 경우 1개의 성으로 계산)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기록과 함께 군내의 각종 기록에 나타나는 군내의 일부 성씨들의 입향조(入鄕祖)가 군내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 대부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임을 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양난(兩難) 이후에 이 지역의 인구와 호구수가 증가한 것도 이러한 영향이 주요한 역할을 하였으리라고 보여진다. 조선 전기에 비해서 무려 3배 가까운 성씨의 증가는 향촌 사회의 지배질서 뿐만 아니라 당시의 경제적 원천인 토지에 따른 수취 문제 등 지역사회의 사회, 경제적인 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되며 이러한 갈등이 조선시대 후기에 들어와서 이 지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의 밑바탕이 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러한 것을 도표화한 것이 표〈115〉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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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덕·영해가 본관인 성씨 |
성씨와 마찬가지로 본관도 동족을 구분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혈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타 종족으로 간주하였으며, 성과 본관이 같아도 시조가 다를 수 있고, 성과 본관이 달라도 시조가 같은 경우도 있어 성과 본관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본관도 성과 마찬가지로 시조의 출신지나 거주지를 발상지로 하여 정하였으나 , 씨족 중에서도 점차 자손이 늘어나는 한편, 이들 중에 관직이 높은 이가 배출되는 경우가 있어 이들이 국가로부터 봉군지(封君地)·사관지(貫地)를 하사받아 후손의 일부가 이곳으로 새로이 이주할 경우, 이곳의 지명을 따서 본관으로 삼는 경우도 많았다. 영덕·영해를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의 경우에도 살펴 본 바로는 후손의 일부가 이 지역에 새로이 이주하여 본관을 창관(創貫)한 경우와 본래부터의 촌성이나 토성을 가지고 그 관향(貫鄕)으로 한 경우가 대체로 많다. 15세기에 나온 「세종실록지리지」와 16세기에 나온 「신증동국여지승람」, 20세기초에 나온 「영영승람」의 영덕·영해의 성씨 조(條)를 살펴보면 영덕과 영해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의 대강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영덕의 토성과 촌성은 김(金)·조(曹)(이상 토성), 윤(尹)·조(趙)·정(鄭)·주(朱)(이상 촌성), 박(朴)은 래성, 방(房)은 속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영해는 박(朴)·김(金)·황(黃)·이(李)·임(林)·신(申)으로 토성만을 기록하고 있으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덕의 토성은 기록하지 않고 김[일작(一作)에 전(全)]·조·윤·조·정·주(朱)라 하여 병촌(竝村)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박은 래성, 방은 속성으로 기록하고 있다. 영해는 박·김·황·이·임·신으로 구분 없이 기록하고 있다. 이들 자료에 의하면 성씨의 유래를 토성과 촌성·래성·속성으로 구분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대체로 이 기록에 등재된 성씨가 영덕과 영해를 근거지로 하는 토박이 성씨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은 대대로 지역의 유력문벌(有力門閥)로 행세하여 왔다. 한편 「영영승람」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후에 나온 「구읍지(舊邑誌)」와 각종 자료의 성씨(姓氏)를 취합하여 영덕과 영해를 관향으로 하는 성씨를 기록하고 있는데, 영덕은 김·정·이·방(房)·방(方)·류(劉)·최·윤·조(曺)·조(趙)·박·맹(孟)씨가 있고, 영해는 박·신·이·배·손·동(董)·지(池)·최·오·강·유(兪)씨가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지역내의 성씨들의 분포와 이들의 변천추이를 살펴보는 것은 조선시대 이래 향촌질서 및 지배구조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들 중에서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가운데 시조나 중시조의 실체를 상고할 수 있는 성씨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1) 야성 정씨 |
야성 정씨의 시조는 고려 희종 때, 대사도(大司徒)를 역임한 정가후(鄭可侯)이다. 야성 정씨 대동보에 의하면 정가후는 고려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공을 세워 야성군으로 봉해졌다고 한다.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고, 묘(墓)는 영덕현 서쪽의 궁촌(宮村)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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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인물로는 고려시대에 문화시중으로 야성백(野城伯)에 봉해진 정송(鄭松)이 있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문경공(文敬公) 정자영(鄭自英)이 있는데, 벼슬이 판중추부사, 이조판서에 이르렀으며, 특히 학문을 즐겼고 역학에 밝았다고 한다.
특히 정담(鄭湛)은 선조 22년(1589)에 무과에 급제하여 도호부 판관·청주목사를 지내고 1592년 김제군수를 지낼 때, 임진왜란을 만나 왜적과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사(殉死)하였다. 그 후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숙종 34년(1708)에 정확(鄭)은 진사에 급제하여 학행이 있었다. 유적으로는 영양군 일월면 명고리의 「명고서원」과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의 「정려각」이 있으며, 숙종 15년(1689)에 창건된 「향현사」에 제향되었으나, 현재 「향현사」는 폐지되었다. 1999년 9월에 는 증 병조참판 사적비가 건립되었다. 집성촌으로는 영양군 일월면 도곡리와 가곡리, 청송군의 부남면 감연리가 있으며, 영덕에는 영덕읍 덕곡리와 창수면 인량리, 오천리에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
2) 야성 김씨 |
야성 김씨의 시조는 당시 향직(鄕職)의 최고 벼슬인 호장중윤(戶長中尹)을 지낸 김취린(金就璘)으로 고려 고종 4년(1217)에 거란군의 침입 때, 이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시중시랑에 오르고 야성군으 로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야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인물로는 고려조에 봉익대부로 좌사윤(左司尹)을 역임한 김장문(金長文)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김수문(金秀文, 1432∼?)이 생원시(1469)와 문과(1472)에 급제하여 이름을 남겼으며, 김응하(金應河)는 세조 10년(1464)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김석령(金錫齡)은 성종 20년(1489)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또한 김응청(金應淸)은 기묘명현으로 유명하며 연산군 10년(150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김몽량(金夢良, 1588∼?)이 인조 5년(1627)의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어 가문을 빛내었다. 야성군 취린의 후예들은 김영관파와 김화파, 그리고 김광원파의 3파가 있으나, 현재 군내에는 주로 김영관파와 김화파가 거주하고 있다. 군내 이들 세거지로는 김영관파는 영덕읍 삼계리와 지품면 지품리가 있으며, 김화파는 영덕읍 천전리·직천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으며, 화전리에도 야성 김씨 후예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 외 군 이외의 집성지로는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강원도 횡성군 청일면 고시리 등에서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으며, 광원파는 대전광역시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
3) 야성 이씨 |
야성 이씨의 시조는 조선 영조대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지낸 이창례(李昌禮)라 하며, 그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라 하나 상세한 내력과 자손의 분포상황에 대한 기록이 없어 고증할 수 없다.
그러나 중종 17년(1522)의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한 이영문(李英文)의 본관이 영덕, 거주지는 함경도 함흥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영덕 이씨는 영덕을 관향으로 한 후, 타 지역으로 이주하여 간 것으로 보인다. |
4) 영해 박씨 |
영해 박씨의 시조는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의 5세손인 파진찬(波珍) 물품(物品)의 아들인 대아찬 (大阿) 제상(堤上)이 시조이다. 가문의 인물로는 제상의 26세손 명천(命天)이 고려 전법판서(典法判書)와 삼중대광벽상공신(三重大匡壁上功臣)으로 예원군(禮原君)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제상을 시조로 하고 명천을 중시조로 삼아 오늘까지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인물로는 고려 중엽의 위사공신 박송비와 삼대 시중인 박세통·박홍무·박감이 있다. 특히 위사공신 박송비는 고려 무신정권을 무너뜨리고 왕권을 회복한 공이 지대하였으며, 이로서 조정에서는 박송비의 고향인 영해를 덕원소도호부로 승격시켜 그의 공적을 기렸다. 영해 박씨는 주로 영해 일원에 세거를 하여 왔으나, 현재는 후손들이 번성하여 전국적으로 뿌리를 내리며 살고 있다. |
5) 평산(영해) 신씨 |
영덕의 평산(영해) 신씨의 시조는 이유헌(理猶軒) 신득청(申得淸)이다. 이유헌의 조부는 신현으로 장절공 신숭겸의 자손이다. 벼슬이 승상부 승상에 이르렀으며, 영해군(寧海君)으로 봉하여졌으며, 시호를 문정(文貞)으로 받았다.
그 자손중에 영덕읍의 화개리·구미리·지품면 속곡리에 주부 신홍제(申弘濟) 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영덕읍 우곡리와 구미리, 지품면 복곡리, 남정면 회리에는 풍계(楓溪) 신귀년(申龜年), 풍림(楓林) 신규년(申年)의 후손들이, 강구면 금호리·소월리에는 내어위(內禦衛) 신명령(申命齡)의 후손들이, 지품면 신안리·수암리·달산면 대지리는 판관 신경제(申經濟)의 후손들이, 창수면 미곡리·인천리에는 죽로(竹老) 신활(申活)의 후손들이 각각 세거하고 있다. 근래에는 평산으로 복관하여 영해 신씨를 관향으로 쓰고 있지 않다. |
6) 영해 이씨 |
영해 이씨의 시조는 전주 이씨 한(翰)의 후손으로 고려 때 문하시랑을 지냈으며, 공적이 있어 영해군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들이 전주 이씨에서 이적하여 영해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의 인물로는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을 지낸 을년(乙年)이 있으며, 조선조에 와서는 성무(成茂)가 이름이 났으며, 임진왜란 때 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언량(彦良)이 있다. 집성촌으로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산대월리와 강동면 상시동리가 있다. |
7) 영해 김씨 |
영해 김씨의 시조는 안동 김씨에서 분적(分籍)한 해동의 명장 김방경의 7세손인 김억민(金億敏)이다. 시조 억민은 병조정랑을 거쳐 영해도호부사를 역임한 후 고향인 함경도 단천으로 돌아가고 후손들이 시조의 임지였던 영해를 관향으로 삼았다고 하며, 후손들은 함경도 학성군과 영흥군 일대에서 세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상고할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영해부의 역대 부사의 재임 명단인 부(府)의 선생안을 살펴본 바로는 김억민이란 분이 영해부의 부사로 내려온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
8) 기 타 |
영덕과 영해를 본관으로 하는 위의 성씨들 이외에 조선 명종 16년(1561)의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한 윤상익(尹商翼)의 본관이 영덕, 거주지가 남평(南平)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임란 이전 어느 때에 전라도 나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이며, 중종 17년(1522) 식년시에 합격한 방국형(方國亨)의 본관이 영덕, 거주지가 강화(江華)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영덕을 본관으로 하는 방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영해에는 중종 17년(1522)의 식년시에 생원으로 합격한 유세걸(兪世傑)의 본관이 영해, 거주지도 영해라고 하는 것을 보아 영해 유씨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겠다. |
4. 본관별 성씨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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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2월 31일 현재 영덕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성씨의 분포를 살펴보면 2,000여 세대 이상의 대성(大姓)인 성씨로부터 불과 1, 2세대로 구성된 소수의 성씨를 포함하여 100여개 이상의 성씨(姓氏)들로 구성되어 있어 조선시대와 일제시대에 나온 기록과 비교하여 보아도 그 수가 엄청나다.
표〈115〉는 1998년 12월 31일 현재 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100세대 이상의 성씨들을 나타낸 것으로 표기된 인구의 숫자는 20세 이상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표에 의하면 가장 많은 인구와 세대수를 가진 성씨로는 김해 김씨로 1,927세대에 5,390명이다. 이는 세대수와 인구수에 있어서 군 전체의 세대수와 인구수의 거의 10%에 이르는 대성이다. 그 외에 이들 성씨들을 세대수와 인구에 의하여 차례대로 살펴보면 김해 김씨, 경주 이씨, 밀양 박씨, 김녕 김씨, 경주 최씨, 안동 권씨, 평산 신씨, 경주 김씨, 파평 윤씨, 영양 남씨, 영천 이씨 순서로 이 지역에 살고 있다. 표〈116〉는 각종 기록과 1999년 12월 31일 현재 각 읍·면에서 조사된 것으로 군내에 거주하고 있는 각 성씨들의 일람표이다 |
5. 읍·면별 성씨 현황 |
수십호 혹은 수백호씩 모여 사는 각 마을에 있어서 이들 마을을 구성하는 각각의 성씨들은 마을 발전의 중요한 사회문화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각 마을의 기원과 형성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대체로 영덕지역의 마을은 혈연관계에 기초하여 몇 개의 대성(大姓)이 한 마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통적인 마을의 형태를 띠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마을내의 친목과 단결은 이들 성씨를 중심으로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며,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특정 성씨들의 구성비에 따라 마을 전체의 발전과 대외적으로 마을의 의사를 표출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행사에 상당할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에는 산업화에 따른 농촌인구의 대도시 및 공단지역으로 유출과 가족계획 등에 의한 출산율의 저하 등으로 각 마을의 인구수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 마을 자체의 해체 뿐만 아니라 씨족공동체 자체의 해체도 서서히 일어나고 있는 실정에 있어 매우 안타깝다. 특히 농촌지역의 마을 단위의 해체는 농업기반 및 기본적인 사회구성 단계의 파괴로 이어져 지역 역사와 전통을 단절시키는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각 마을의 구성요소로써 각 성씨는 지역발전의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지역통합의 변수이기도 한 군내 각 면의 성씨의 분포를 살펴보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러한 의미에서 가능한 한 각 읍·면에 분포하고 있는 모든 성씨들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부 등재하도록 하였으며, 조사시점에서 파악되지 않은 성씨들도 기타로 하여 등재하였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각 읍·면의 성씨들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
1) 영덕읍의 성씨 분포 |
2) 강구면의 성씨 분포 |
3) 남정면의 성씨 분포 |
4) 달산면의 성씨 분포 |
5) 지품면의 성씨 분포 |
6) 축산면의 성씨 분포 |
7) 영해면의 성씨 분포 |
8) 병곡면의 성씨 분포 |
9) 창수면의 성씨 분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