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절 영해면(寧海面)

▒ 성내리(城內里)

  성내리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영해부(寧海府) 읍성(邑城)의 안이 되므로 성안 또는 성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아득히 먼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부족(部族)국가인 우시국(于尸國)이 있었다는 선주민(先住民)들의 기록이 보이며,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유린군(有隣郡)의 중심이 되었으며, 고려(高麗) 초에는 예주(禮州)의 관아(官衙)가 있었고, 고려 중기에는 단양(丹陽)의 관아가 있었고, 고려 후기에는 덕원(德原)의 관아가 있었고, 조선 태종(太宗) 13년(1413)부터 영해부(寧海府)로 개칭하여 부사(府使)를 두었다. 고려시대 전기까지 영양, 청기, 영덕, 기성, 울릉도까지 관장하는 부(府)의 소재지가 되었으나, 고종(高宗) 21년(1895)에 군수(郡守)를 두고 병곡, 창수, 축산과 영양(英陽) 석보면(石保面)까지 이곳에서 관장하였으나 광무(光武) 10년(1906)에 석보면이 영양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에 영해군은 영덕군에 통합되고 면(面)으로 강등되어 면 소재지로 오늘에 이른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 소재지였으나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노상동(路上洞), 노하동(路下洞), 지동(池洞)과 송계동, 교동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성내동이라 해서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성내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성내리1,2,3,4, 5리로 분동되어 있다.
  성내리의 위치는 동은 괴시리, 서는 벌영리, 남은 축산면, 도곡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북은 연평리와 연해 있다.

 

 
못골(池洞·池谷) :
성내 서쪽에 있는 마을임.
 
시거동(屍去洞·屍去門洞) :

못골 북쪽에 있는 마을임.

         

▒ 괴시리(槐市里)

  괴시리 동명의 유래는 고려(高麗) 말엽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중국 사신으로 다녀와서, 자기 고향인 호지촌(濠池村)의 지형이 중국의 괴시와 흡사하다 하여 괴시라 하였다고 한다.
  괴시1리인 호지촌(濠池村) 마을은 13세기말인 고려 말년에(1260년경) 함창김씨(咸昌金氏)가 입주하여 세거(世居) 했다고 하며, 그 뒤 16세기인 명종(明宗) 연간에 수안김씨(遂安金氏)와 영해신씨(寧海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하며, 17세기경(1630년경) 영양남씨(英陽南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괴시2리인 관어대(觀魚臺)는 16세기초인 중종(中宗) 연간에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입주하였으며 만취(晩翠) 권의철(權宜喆), 취옹(醉翁) 권의협(權宜) 형제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관어대란 이름은 목은 이색이 명명했다 한다.
  괴시3리인 교동(校洞) 마을은 17세기경 윤태남(尹泰南)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로 영해군(寧海郡) 읍내면(邑內面) 지역이 되어 호지마 또는 호지촌, 괴시, 입천곡(卄川谷) 등으로 불렀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어대동(魚臺洞), 교동(校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괴시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괴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괴시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괴시리의 위치는 동은 망월봉(望月峰)과 대진리와 연해 있고, 남·서는 성내리·벌영리와 접해 있고, 북은 연평리가 있다.

 

 
건네마(건너모태) :
관어대 앞들 건너에 있는 마을임.
 
목다리 :

관어대 동쪽에 있는 마을임.

 
아리마 :

괴시 아래에 있는 마을임.

 
안마(안모태) :

관어대 안쪽에 있는 마을임.

 
양지동(陽地洞) :

괴시 서쪽에 있는 마을임.

 
어대(관어대) :

괴시 동북쪽에 있는 마을임.

 
웃새마 :

괴시리 위에 있는 마을임.

         

▒ 대진리(大津里)

  대진리 동명의 유래는 동해 바닷가에 있으므로 한나리, 한날기 또는 대진이라 하였다.
  대진1리는 17세기경 강씨(姜氏)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그 뒤 차씨(車氏)가 들어와 마을 형국(形局)이 공(公)자로 생겼다고 하여 동명을 공수진(公須津)이라 했다 하며, 대진2리는 17세기 중기에 김해김씨의 김해은(金海銀)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마을 지형이 비봉포란지형(飛鳳抱卵之形)이라고 한다. 대진3리인 건달(乾達) 마을은 윤씨(尹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본래의 동명은 건화동(乾花洞)인데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피난간 주민들이 돌아오지 않으니, 관(官)에서 마을을 시찰할 때 사람이 살지 않자 건달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때에 영해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공수진과 건달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대진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대진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대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괴시리, 연평리, 남은 사진리, 북은 상대산, 덕천리가 있다.

 

 
공수진(公須津) :
건화동(건달)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공시개, 공수개라고도 함.
 
금댓말 :

대진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금이 났다 함.

 
문암바우 :

대진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문암바우가 있음.

 
샛골모태 :

대진 북쪽에 있는 마을로 두 골짜기 사이가 됨.

 
아릿모태 :

공수진 위에 있는 마을임.

 
큰골모태 :

대진 남쪽에 있는 마을로 큰 골짜기 모퉁이 밑이 됨.

         

▒ 사진리( 津里)

  사진리 동명의 유래는 나루가 실(悉)과 같이 길게 뻗어 있다하여 실나리, 변하여 시나리 또는 사진이라 하였다.
  사진1리인 밭내미 마을은 17세기 전기인 광해군(光海君) 연간에 안동권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걸리동(傑里洞)이라 불렀다 하며, 19세기 전기에는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정착하여 밭이 많다고 하여 밭내미라 불렀다 한다.
  사진2리인 시나리 마을은 18세기 후반에 평택임씨(平澤林氏)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수안김씨(邃安金氏), 평해황씨(平海黃氏)가 들어 왔다고 한다.
사진3리 마흘발 마을은 뒤에 봉화산(烽火山)이 있어 공수진, 대진, 건달리, 밭내미, 시나리와 함께 6진(津) 중의 하나로, 14세기말 고려(高麗) 유신(遺臣)의 후예인 배씨(裵氏)와 김씨(金氏)가 은신(隱身)하기 위해 이 마을에 정착하여 마흘발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건리진(件里津), 마흘진(磨屹津), 건달동 일부와 남면(南面)의 축산동 일부를 병합하여 사진동이라 해서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사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사진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사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성내리, 남은 축산면 축산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북은 대진리, 괴시리가 있다.

 

 
마흘발(磨屹洞) :
사진 남동쪽에 있는 마을임.
 
밭내미(件面津 ) :

사진 북쪽에 있는 마을임.

 
장골마을 :

시장을 갈 때에는 이 골을 통해야 갈 수 있다 함.

 

▒ 연평리(蓮坪里)

  연평리 동명의 유래는 들에 연못이 있으므로 연들 또는 연평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8세기 전기(1712년경)에 유씨(劉氏)라는 분이 황무지를 개척하여 마을을 이룩하고 신기동(新基洞 : 새터)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동(새터)과 읍내면의 괴시동 일부를 병합하여 연평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연평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연평리의 위치는 동은 괴시리, 서는 벌영리, 신평리 남은 성내리, 북은 송천리가 있다.

 
 
새터(新基) :
연평 북쪽에 새로 된 마을임.
 
아래-새터(下新基) :

새터 아래쪽(북)에 있는 마을임.

 
웃새터(上新基) :

새터 위쪽에 있는 마을임.

         

▒ 벌영리(閥榮里)

  벌영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이 넓은 버렁에 있으므로 버렁, 벌영 또는 지산(芝山)이라 하였다.
  벌영1리는 16세기 중기에 평산신씨(平山申氏)가 개척했다 하며 원래 지산이라 칭해 오다가 뒷날 벌영으로 개칭했다 한다. 벌영2리인 갈매물(갈마물) 마을은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개척하고 마을 형국(形局)이 갈마음수(渴馬飮水) 형이라 하여 갈매물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갈물동(葛勿洞), 송계동 일부와 묘곡면의 임두정을 병합하여 벌영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벌영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행정구역상 벌영1,2리로 분동되어 있다.
벌영리의 위치는 동은 성내리와 접하고 서는 원구리와 연해 있으며, 남은 축산면 도곡리, 북은 병곡면 신평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갈매물(渴梅勿·渴馬勿·葛勿洞) :
벌영 남서쪽 큰 들가에 있음.
 
땅골(唐谷) :

갈매물 남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모태(아릿마) :

벌영 아랫쪽에 있는 마을임.

 
웃모태(웃마) :

벌영 위쪽에 있는 마을임.

         

▒ 원구리(元邱里)

  원구리 동명의 유래는 둔덕진 곳에 있는 들이었으므로 원두들, 원구 또는 원파(元坡)라 하였다.
  원구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영양남씨의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남준(南晙)이 평해에서 이곳으로 와 16세기경인 연산군(嚥山君) 연간에 무안박씨의 박양기(朴良基), 다음으로 16세기 중기(1544년경)에 진성이씨의 영모당(永慕堂) 이선도(李善道)가, 그 뒤 명종(明宗) 연간(1556년경)에 대흥백씨의 족한당(足閒堂) 백인국(白仁國)이 각각 마을에 입주하였다 하며, 지금은 남씨, 박씨, 백씨의 3성이 마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원구2리인 옥금(玉琴) 마을은 안동권씨의 오월헌(梧月軒) 권재덕(權載德)이 개척하였다 하며, 17세기경 약봉(藥峰) 서성(徐省)이 유배(流配)되어 이 마을 왼쪽 골짜기에 거주하면서 옥녀(玉女)가 거문고 타는 형국이라 하여 옥금이라 명명(命名)했다 한다.
  윗마을은 안동권씨, 아랫마을은 영양남씨가 살고 있으며 마을 이름을 오산(梧山)이라 했다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묘곡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원상동(元上洞), 원중동, 원하동, 옥금동을 병합하여 원구동이라 해서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원구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구역상 원구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원구리의 위치는 동은 벌영리, 서는 창수면 신기리와 면계(面界)를 이루고 남은 부곡리와 축산면 부곡리, 북은 창수면 인량리와 마주하고 있다.

 

 
옥금(玉琴) :

원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국이라 함.

 

▒ 묘곡리(畝谷里)

  묘곡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본래 묘곡부곡(畝谷部曲) 이었는데, 조선시대 묘곡면이 되면서 묘곡이라 하였다.
  묘곡1리인 임실(任實·林實) 마을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때 경주손씨(慶州孫氏)가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묘곡2리인 백일동(白日洞) 마을은 전응시(田應時)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백일동이라 명명했다 한다.
  이 마을은 영해부(寧海府)에 딸린 묘곡부곡으로서, 조선시대 묘곡면이 되어 묘곡 또는 임실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일동과 원상동(元上洞·元邱洞) 일부를 병합하여 묘곡동이라 하고 영덕군 영해면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묘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묘곡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원구리, 벌영리, 서는 대리, 남은 축산면 칠성리, 북은 창수면 신기리와 면계(面界)를 이룬다.

 
 
골   마 :
광산마 북쪽에 있는 마을임.
 
광산마 :

임실 남쪽에 있는 마을임.

 
백일동(白日洞) :

묘곡 북쪽에 있는 마을로 백일홍이 많았다고 함.

 
삼거리 :

백일동 동쪽에 있는 마을임.

 
아릿마 :

임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양지마 :

임실 양지쪽에 있는 마을임.

 
웃   마 :

임실 윗쪽에 있는 마을임.

 
음지마 :

임실 서쪽에 있는 마을임.

 

▒ 대 리(大里)

  대리 동명의 유래는 큰 골짜기의 안이 되므로 한골 또는 한자로 대동(大洞)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7세기경(1600년경)인 선조(宣祖) 연간에 신학익(申學益)이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뒤 18세기 후반인 정조(正祖) 연간에 해주최씨(海州崔氏)가 입주하였으며, 이어 진주강씨(晉州姜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寧海郡) 묘곡면(畝谷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가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묘곡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동이라 하였다가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변경할 때 대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대리1,2리로 분동되어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묘곡리, 서는 영양군 석보면과 군계(郡界)를 이루며, 남은 지품면, 북은 창수면과 면계(面界)를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명동산(鳴動山)이 양쪽으로 뻗어 있고 망암령(望岩嶺)이 북쪽에 솟아 있다.

 
 
밤나무진(밤진) :
한골 동쪽에 있는 마을로 밤나무가 많이 있음.
 
삼   지 :

밤진 동쪽에 있는 마을임.

 
새마을(新村) :

밤진 서쪽에 새로된 마을임.

 
선바우골 :

새마을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앞에 큰 바위가 있음.

 
잿   마 :

한골 동쪽에 있는 마을임.

 
지통마 :

잿마 동쪽에 있는 마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