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 이후 현대체육의 태동

1) 일반체육의 태동
  광복 이후의 영덕군의 체육활동은 광복과 6.25한국전쟁에 이르는 혼란기를 거치기 까지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 1952년 3월이 되어서야 최남수(崔南壽), 이근석(李根錫), 이춘길(李春吉) 등의 10여명의 지역인사들이 모여 영덕군 체육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동년 5월 5일에 이를 결성하면서부터 지역 체육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초대(初代) 영덕군 체육회장으로 정기모(鄭基模)를 선출하고, 경기이사에 이춘길, 섭외이사에 최남수, 구기종목이사에 이근석 등을 임명하는 등 순수한 민간인들로 구성하고는, 동년 10월 3일에 제1회 군민체육대회를 성대히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영덕체육사상 처음으로 열린 군민체육대회는 각 면 대항으로 하는 육상, 구기, 씨름 등의 종목으로 열렸으며, 이 대회를 계기로 각 면별 면 체육회가 구성되어 군내의 사회체육활동이 진작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민간인으로 구성된 영덕군 체육회는 불과 5년을 넘기지 못하고 5회의 군민체육대회를 끝으로 영덕군 체육회는 해체가 되고 말았다.
  1963년도에 들어와서 정부 방침에 따라 시장, 군수를 시·군 체육회 회장으로 하는 체육회가 구성됨으로써 체육회 자체는 새로이 조직되었으나, 사회체육 발전의 견인차가 되는 군민체육대회는 다년간 갖지 못했다. 1970년도 이후에도 군민체육대회를 연차적으로 개최하지는 못하였으며, 도민체전 등에는 전 종목에 걸쳐 선수를 파견하지 못하고 일부 육상 종목과 축구, 정구 등의 종목만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축구는 수년을 두고 우승하여 일제시대 이래 유명한 영덕축구의 명성을 도내에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63년 영덕군 체육회가 관주도(官主導)로 개편되어 본격적으로 지역의 체육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하기 시작하였으나, 여러가지 여건상 여의치 못하였다. 일례로써 1963년부터 1981년에 이르는 18년 동안 군민체육대회를 불과 5회만 개최하는데 그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건 아래에서 도민체전 등의 대외 경기대회에 선수들을 출전시켰지만 구기(축구) 종목 일부를 제외한 육상 등의 다른 종목의 성적은 거의 하위권에 머무는 정도여서 선수발탁과 체육인력 육성이 무엇보다 급선무로 대두하였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행정기관이 아닌 일반기관에서도 사회체육이 활발히 태동하였는데, 영덕문화원이 주최하는 영덕군수기 타기 정구대회와 영덕검찰지청과 영덕지원이 합동으로 개최한 정구대회도 그 중의 하나이다. 정구는 그간 군내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종목으로 금융기관이나 군청과 기타 기관에서 이루어져 온 것으로 1965년에 들어와서 정구 애호가가 늘어나 영덕정구회가 발족되었다.
  영덕문화원은 1970년 4월에 제1회 영덕군수기 쟁탈 연식정구대회를 시작으로 매년 4월에 정구대회를 개최하여 정구인들의 친선과 후진 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나, 사정에 의하여 1977년 제8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영덕정구회에 대회 개최업무를 이관하였다.
  또한 1973년 9월에는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원과 대구지방검찰청 영덕지청의 합동 주최로 영덕군, 울진군, 영양군 3군 대항 제1회 연식정구대회를 개최하여 정구인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등 정구를 통한 체육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정구를 제외한 체육종목으로는 축구대회가 활성화되었는데, 영덕군내 각 신문 지국장들이 기우회를 조직하여 1954년 8월에 영남동해지구 축구대회의 개최를 시작으로 1958년 8월까지 제5회 대회를 개최하여 6.25한국전쟁 이후 폐허 속의 지역민들의 정서를 달래주었다. 이후 1975년부터는 영남일보 영덕보급소 주최로 영덕군내 각 기관단체 대항과 초등학생 대항, 중학생 대항 축구대회를 개최해 왔다. 그러나 1980년 제5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영남일보사가 폐사됨에 따라 대회가 중단되게 되었으며, 현재는 1970년에 구성된 영덕축구협회가 매년 군내 각 면 대항전을 개최하여 도민체전에 파견할 일반인 축구선수를 선발하고 나아가 지역 축구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군체육회의 활성화와 건강을 중요시하는 군민들의 의식의 증대로 일반 체육활동이 증대된 시기였다. 특히 1990년대의 군내 체육활동의 특징이라면 동호인 모임의 활성화이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축구, 테니스, 탁구, 볼링, 배드민턴, 등산, 낚시, 에어로빅, 골프, 태권도, 정구, 씨름 등의 군내 동호인 수는 84개의 조직에 2,878명의 군민들이 참여하고 있어 체육의 생활화와 체육인구의 저변화에 어느 정도 성공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군내에서 이루어졌던 체육활동으로는 활쏘기(國弓)가 있었는데, 활쏘기는 옛부터 우리 지역이 궁마의 고장이라 할 정도로 이름이 났다. 일제시대에 관덕정(觀德亭)이라는 사정(射亭)을 영덕읍 남쪽 풍치림(風致林) 속에다 세우고 약 50명에 달하는 궁사(弓士)들이 매일 하오부터 모여서 기예를 겨루며 후진(後進) 양성에도 힘써 왔다. 관덕정은 1930년에 국궁사수 기예보유자인 이사숙(李士淑)씨를 궁사(弓師)로 지방유지 등 10여명이 세운 것으로 이를 계기로 전국대회 또는 경북도대회 등 단체 및 개인 우승 등을 여러 차례 수상한 바 있었으나 6·25한국전쟁 이후 폐쇄되었다. 최근에 들어와서 국궁을 부활하기 위한 움직임이 있어 화개리 적벽봉 아래의 구 체련공원 부지에 화림정이란 사정을 세우고 열심히 궁술을 연마하고 있다.

2) 학교 체육
  군내의 학교체육은 1960년부터 본격적인 태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교육청 주관으로 1960년부터 시행되어 1970년대까지 개최되어 온 군내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대항 축구대회는 초등학생들의 축구실력을 향상시켜 여기에서 선발된 학교가 도내 초등학생 축구대회에 파견되어 전국대회에 경북을 대표하는 학교로 출전의 영광을 차지하는 등 축구 이외의 다른 체육종목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당시 경북을 대표한 영덕군내 초등학교 축구단으로는 영덕, 강구, 영해, 매정 등의 각 초등학교 팀이 있었다.
  한편 중등부의 축구로는 강구중학교가 1963년부터 도민체전 또는 지구별대회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는데, 1972년 6월 19일의 제1회 전국 스포츠 소년대회 축구경기에서 전국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축구 영덕을 과시하고 고장에 빛을 안겼다. 본래 강구중학교는 이 대회에 출전하기 전 1965년도부터 경북도민체전과 도내학생축구대회를 비롯하여 경상북도지사기타기대회 4회, 도교육감기타기 8회, 동아일보 사장기타기대회 3회, 경북축구협회장기 3회와 기타 대회 우승 등 1980년까지 각종 대회에서 21회에 이르는 우승을 하여 축구 명문학교로 이름이 났다.
  또한 1966년 8월 4일에 영덕초등학교에 야구부가 창설되어 1967년 8월 28일에 개최된 대구시 교육장기 타기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을 비롯하여 1978년에 야구단이 해체될 때까지 경북소년체전 야구대회 우승, 전국소년체전 경상북도 초등학교 대표, 경상북도 교육감기타기대회, 도지사기타기대회, 대한야구협회장기타기대회 등의 대회에 출전하여 도합 18회의 우승과 준우승을 하는 등 많은 좋은 성적을 이루며 고장을 빛내었다.
  1972년부터는 영덕군 소년체육대회가 탄생되어 매년 대회를 개최하게 되어 군내 초등학생들이 각기 학교의 명예를 걸고 출전하여 육상과 구기 등의 각 종목에서 개인과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열심히 선전하였다. 이와는 달리 각 면별 학모(學母)들로 구성된 배구대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년체육대회와 겹치는 경우가 많아서 1979년까지 3회를 끝으로 대회가 중단되어 학생들을 통한 학부모들의 체육활동의 여지가 줄어들게 되어 다소 안타까움이 남게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교육청 주관으로 1999년 현재 27회에 이르는 영덕군 소년체육대회를 개최하여 학교체육을 통한 체력현상과 경기력 향상을 도모하고 있으며, 1996년 11월 15일부터 새로이 주최하고 있는 교육장기타기 초등학생 축구대회가 99년 현재 4회에 이르고 있으며, 교육장배타기 탁구대회도 매년 개최하여 지역 학교체육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