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투쟁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1910년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항일 독립운동은 종래의 충군구국(忠君救國) 항쟁과는 달리 근대적인 애국애족의 사상이 바탕이 된 항일구국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이루어져 왔다. 물론 이러한 끈기있는 투쟁은 한말 의병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져 왔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우리 민족의 끈기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1) 일제 강점기의 영덕지역의 무장항일투쟁 이 지역에 있어서 항일독립투쟁의 흐름은 전국적인 성격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한말 을미의병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직접적으로 적과 전투를 벌이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온 것이다. (1) 권태일의 독립군자금 모금 의거 1910년 이후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항일활동을 한 중요한 단체로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1913),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양성소 비밀결사(1915), 민단조합(民團組合, 1915), 광복회(1915),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 1915) 등이 주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단체 중에는 경상북도의 많은 인물들이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2) 노병곤(盧炳坤)의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사건 1923년 1월 24일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톤회의 청원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달성군 사람 이현수(李賢壽)가 주도가 되어 독립공채를 모집하는 한편, 1919년 8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국 의원단 일행에게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선전문을 발송한 항일 운동사건이다. (3) 이겸호의사와 창수면의 대한통의부 군자금 모집 사건 |
1923년 6월 5일 창수면의 일본인 순사가 청년 한 사람을 주재소로 데리고 가던 중, 청년이 순사를 폭행하고 상처를 입힌 후 달아나자 한국인 순사가 이를 추격하니 청년은 등운산(騰雲山)으로 도피하며 권총을 쏘고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울진쪽으로 자취를 감춘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속칭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자금모집사건( 資金募集事件) 혹은 창수사건이라 하는 것으로 우리 지역에서도 유명한 무장투쟁 사건이다.
이때 달아난 청년은 이덕숙(李德淑,일명 宣雨)인데, 이덕숙은 안동 사람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5월에 대한통의부 제4중대 1소대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하던 중, 국내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해 오도록 명령을 받고는 국내로 잠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동기생인 창수면 오촌리의 이겸호(李謙浩)와 영양 청기의 권동호(權東鎬) 등과 비밀리에 합세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선 영덕·영해지역의 지주와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그 첫째 대상으로 창수면의 김상락(金相洛)을 지명하였다. 이들은 김상락으로부터 군자금 300원을 각출하기로 약속을 받는 등 비교적 순탄하게 일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덕숙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마을을 다니던 중, 이를 수상히 여긴 일본인 순사 시마네(島根)로부터 불심검문을 받아 관할주재소인 창수 순사주재소로 연행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재소에 연행되기 전에 이덕숙은 일본 순사와 격투 끝에 등운산으로 도주하였다. 이 사건을 접한 영덕경찰서의 일제 고등경찰은 창수면 일대를 면밀히 수사하는 도중 그 동조자로 이겸호 의사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겸호 의사는 창수면 오촌리 출신으로 1910년에 만주로 나아가 삼원포무관학교(三源浦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서울에서 1919년 3·1 만세에 참여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한 항일 무장독립 의사였다. 그는 이듬해인 1920년 11월에 군자금 모집의 명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7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고향인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923년 5월 대한통의부 소속의 이덕숙이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창수면 오촌리로 방문하자 그는 이덕숙과 공모하여 일차로 같은 면의 김상락에게 군자금 300여원을 협조받기로 하였으나, 이덕숙의 총격사건으로 이것이 탄로나게 되어 김상락을 협박하여 300여원의 거금을 강탈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되었다. 조사를 받던 중 3개월여 후인 1924년 9월 8일에 이덕숙이 경기도에서 잡히게 됨에 따라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이겸호 의사는 6월 19일에 검찰로 송치되어 대구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
(4) 남정면 장사리의 김창진·김홍진 의사 순국의거
창수면 오촌리에서 일본 순사를 때려 눕힌 후 추격하는 한국인 순사에게 권총을 발사한 창수사건이 일어나 동해안 일대에 비상경계령이 펴져 있던 1923년 6월 9일 남정면 장사리에서 항일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김홍진(金洪鎭)과 김창진(金昌鎭)의사가 영덕경찰서 장사주재소 수석순사 무라세(村瀨重一)와 한국인 악질 순사 오기영(吳基永)에게 사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속칭 장사사건이다. |
2. 해외의 항일 독립투쟁
1) 박대춘(朴帶春) 의사 창수면 백청리 출신인 박대춘(1875∼1919) 의사는 1896년 영해의진에 참여하였다가 영해의진이 해산한 후, 1906년 3월에 창의한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에 참여하여, 대소전투를 치르다가 1908년 초에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박의사는 1913년 2월 25일의 특사에 의하여 풀려 나오기까지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
박의사가 풀려 나온 1913년에는 국내의 의병활동은 거의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 지역에도 거의 의병활동은 없었다. 그리고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박의사는 해외로 나가 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정하고, 동포들과 독립투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를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정하고 이주하게 되었다.
만주로 이주한 박의사는 안동출신의 이상룡, 김동삼 지사와 영해출신인 박경종 의사 등과 합세하여 독립투쟁을 하였으며, 독립군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6년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기 직전에 음독자결(飮毒自決)하였다. 이때가 1919년 6월 29일이다. 정부에서는 박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려 1977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수여하였다. 2) 박경종(朴慶鍾) 의사 박경종(1875∼1938) 의사는 현재의 축산면 도곡리 출신으로 을미사변에 따라 전국 각처에 의병이 일어날 때, 영해지역의 병신창의진에 참여한 애국지사이다. 이후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에 참여하였다가 신돌석의 영릉의병진이 해산된 후, 1911년 1월 27일 중부(仲父) 재희(載喜), 동생 기종(基鍾)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3) 박의연(朴義然), 의열(義烈), 의훈(義熏) 삼형제 애국지사 |
일제 강점기에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외 독립투쟁사(獨立鬪爭史)에서 한 집 삼형제분이 독립투쟁에 참여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한 집의 삼형제가 독립투쟁에 몸바친 사적이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으니, 창수면 출신의 박의연(1880∼1943), 의열(1989∼1930), 의훈(1895∼1983) 삼형제가 바로 이들이다.
박의연 의사는 일찍이 신돌석의진에 참가하여 항왜구국의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활동을 하다 신돌석의진이 해산한 후 고향에서 은거하다 1912년 동생인 의열과 안동의 김동삼, 이상용 등과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독립지사들과 경학사부민단(耕學社扶民團)을 이끌면서 1914년에는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에 한민회와 촉성회를 조직하거나 또는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일제의 조선인 밀정인 유길선(柳吉善)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통의부 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내실태 조사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1927년 3월에는 동지들과 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전만주(全滿洲) 대표자회의를 길림에서 소집하여 북만주 대표로 참석하는 등 지속적인 독립투쟁에 일신을 바쳤다. 이같은 지속적인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다 몸과 마음에 숱한 고초를 겪은 박의연 지사는 1943년 6월11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여 박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로 하였다. 박의열 지사는 1912년 24세때 형인 박의연 지사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1917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에는 부민단 통화현의 검찰감이 되는 등 독립투쟁전선의 제일선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이후 동원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장교의 양성과 민족교육에 헌신하였으며, 1930년 11월 17일에 일제의 밀정에 의하여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여 박지사의 구국정신을 기렸다. 박의훈 지사는 두형의 망명 이듬해에 만주 환인현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의부 제4중대원으로 배속되어 독립투쟁에 나섰으며, 이후 서로군정서 헌병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독립군 결사대 50여명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 1931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하였다. 1945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선전부장 및 경리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국내에 귀국하여 광복동지들과 대종교에 관여하면서 민족정신의 고양에 힘쓰다가 1983년 6월 19일에 서거하였다. |
3. 영덕군의 3.18만세의거
영덕지역의 3·18만세의거는 기독교 장로파 전도사 김세영(金世榮), 예수교 조사(助事) 정규하(丁奎河),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유생(儒生) 남세혁(南世赫, 일명 汝明) 등이 주도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만세의거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8일 영해·영덕 장날을 기하여 군내 전지역에서 일으킨 조직적인 만세의거이다. 특히 군내의 만세의거 중 남정면 장사리의 만세의거는 군내의 만세의거 소식을 접한 남정면 청년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
1) 영해 3.18만세의거
영해3.18만세의거의 동인(動因)을 제공한 김세영은 지품면 낙평리의 낙평교회의 전도사로 3·1만세의거 당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3·1만세의거를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평소 절친하던 권태원을 만나 서울의 3.1만세의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는 영덕지역에서도 만세의거를 거행하기로 약속하고 다시 병곡면 송천리의 정규하와 상의하여 영덕지역에서의 만세의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2) 영덕의 3.18만세의거
영덕에서도 금호리에 거주하고 있던 기독교 신자인 강우근(姜佑根)이 김세영·권태원으로부터 3.18만세의거에 대한 의거계획을 전해듣고 3월 18일 영덕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심하고 화개리·금호리의 교회 신도들과 남정면 남정리의 김용하, 김용규, 강두황, 이복이, 최명술 등의 교회 신도들에게 통문(通文)을 하여 영덕장터에 모이도록 하였다. 강우근은 이들 신도들과 영덕시장에 시장을 보기 위하여 나온 장꾼 및 농민들과 합세하여 3월 18일 낮 시간에 영덕장터를 돌며 만세를 외쳤다. 3) 군내 타 지역의 3.1만세의거 영덕 군내의 3·1의거는 3.18일을 기하여 영해·영덕·병곡·창수에서 일어났으며, 이날 19일에는 지품 원전에서, 21일에는 지품 신안에서 일어났다. 4) 3·1 의거탑(義擧塔) 3·1의거탑은 영해면 성내리 산 49-1에 있는 영해 3·18만세의거 기념탑을 말한다. 이 탑은 1958년부터 영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동심회(東心會)가 주축이 되어 1975년 11월부터 발의되기 시작하여 건립의 뜻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심회원으로는 권경달(權京達), 권수운(權壽雲), 권종구(權鍾九), 권종대(權鍾大; 송천), 권종대(權鍾大; 어대), 남서순(南曙純), 남용진(南瑢鎭), 남인성(南仁星), 남중익(南重益), 남효달(南孝達), 박동수(朴東洙), 박성식(朴成植), 박종열(朴鍾烈), 박종수(朴鍾壽), 박주락(朴主洛), 박증택(朴曾澤), 백운한(白雲漢), 신병종(申炳宗), 이삼교(李參敎), 이숭교(李崇敎), 이순교(李純敎), 이주희(李周熙), 이춘태(李春泰) 등 이었다. |
4. 군내 3.18만세의거 수형자(受刑者) 명단
영덕과 영해지역 외 군내 전체에서 3.18만세의거와 관련하여 600여명의 시위 참여자가 검거되어 이 중 170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인이 너무 많아 1, 2차로 나누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1차 재판에는 김세영을 포함하여 96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2차 재판은 강봉조(姜鳳祚)·강삼인(姜三仁)을 포함한 74명이 재판을 받았다. |
5. 한말의병 및 일제 강점기의 항일 애국투사 추가명단
표 〈210〉는 한말의 을미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의병들 중에서 이 지역 출신으로 각종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없어 이분들의 공적을 확인할 수가 없어 이분들의 명단이 기록치 못하였으나, 1981년 군지 발간 후에 나온 「구국창의록」 등과 각종 독립운동 자료에서 새로이 발굴한 명단이다. 추후에 이분들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되어 지역독립운동사가 보다 풍부해지길 바라며 여기에 등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