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 강점기의 항일 독립투쟁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한 1910년 이후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항일 독립운동은 종래의 충군구국(忠君救國) 항쟁과는 달리 근대적인 애국애족의 사상이 바탕이 된 항일구국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기까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이루어져 왔다. 물론 이러한 끈기있는 투쟁은 한말 의병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져 왔음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우리 민족의 끈기를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1910년 한일병탄과 더불어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산림조사·회사령 등으로 식민지 수탈을 위한 경제적인 기반을 다져 가는 한편, 정치적으로는 정치적 결사와 집회를 엄격히 금지하면서 한민족이 다시 항일운동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가혹한 탄압을 하였다.
  따라서 을미의병 이래로 불같이 일어났던 의병활동은 점차 그 기세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으며, 종국에는 활동이 거의 불가능하여 비밀결사적인 항일투쟁 방식을 택하여 소규모적이고 단속적(斷續的)인 투쟁을 할 수밖에 없었다.
  1910년 이후의 영덕지역의 항왜독립투쟁은 전기의 을미의병 때와 후기의 신돌석의병진 때의 대규모 집단적인 투쟁보다 군자금의 모금, 친일파의 처단 등과 같은 개별적이고 비밀적인 투쟁으로 바뀌어 갔으며, 이러한 투쟁도 일본의 잔혹한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더 이상의 투쟁의 발판을 마련치 못하여, 만주를 비롯한 해외로 망명하거나 이주하여 해외에서의 항왜독립투쟁을 모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탄압 아래서 식민지 백성의 고통을 되씹으며 숨죽여 있던 우리에게 항왜독립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 온 민족적인 쾌거가 있었으니 바로 3.1 만세의거였다. 1919년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되어 한반도 전 지역 및 해외에까지 번져나가 한민족의 위대성을 남김없이 드러낸 3·1만세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외부적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동유럽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혁명과 식민지 해방이라는 새로운 물결에 영향받은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통치에 따른 민족적 울분과 항일의식이 주요한 원인이 되어 일어났다.
  이렇게 발발한 3·1 만세운동은 지역단위를 넘어선 전국적인 만세운동으로 번져 한말 을미의병의 좌절과 1900년대 초의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활동의 패배로 인한 조선 백성들의 패배의식을 일거에 없애버리고 동포들에게 강렬한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부여하여 이후의 독립투쟁 전선에 새로운 활기와 전기를 마련하는 분수령이 되었다.
  3월 1일 파고다 공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한말의 을미의병과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寧陵義兵陣)」의 자랑스런 역사를 간직한 이 지역에까지 파급되어 드디어 3월 18일 영해를 시발로 전군(全郡)으로 확산되어 항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지역의 3·1만세운동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이 지역민들의 잠재된 항왜독립정신에 불을 붙였을 뿐만 아니라 만세의거의 규모와 희생자의 숫자면에서도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대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1) 일제 강점기의 영덕지역의 무장항일투쟁

  이 지역에 있어서 항일독립투쟁의 흐름은 전국적인 성격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한말 을미의병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투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직접적으로 적과 전투를 벌이는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온 것이다.
  그러나 1910년도 이후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종래의 대규모적이고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소규모적이고, 개별적인 비밀결사식의 독립투쟁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따라서 1910년대 이후 1919년 3·1 만세의거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비폭력적이고 간접적인 독립투쟁이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한말 을미의병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 지역은 해방이 될 때까지 수많은 지역인들이 끊임없는 항일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자기 한 몸을 희생해 가며 독립투쟁을 벌였다.
한일병탄이 된 1910년 이후 1945년의 광복까지 이 지역에 발생하거나 이 지역 인사가 관련된 항왜독립운동을 경상북도에서 발간된 「경북의병사」외 여러 기록을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권태일의 독립군자금 모금 의거

  1910년 이후 전국에 걸쳐 조직적으로 항일활동을 한 중요한 단체로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1913), 경성고등보통학교 교원양성소 비밀결사(1915), 민단조합(民團組合, 1915), 광복회(1915),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 1915) 등이 주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들 단체 중에는 경상북도의 많은 인물들이 참여하여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단체에 영덕지역 관련인사들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거명되고 있지 않아 다소의 의외성은 있으나, 광복회의 경우 회장인 박상진(朴尙鎭) 의사가 신돌석 의병장과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 인사들의 참여가 다수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권태일의 독립군자금 모금 의거는 1919년 3.1의거가 일어난 후 이 해 11월에 영해 출신인 권태일(權泰鎰, 30세)이 양한위(梁漢緯)·오기수(吳麒洙)·허병률(許秉律) 등과 독립투쟁을 위해 죽음으로 맹세하고 청송 등지에서 모집하여 만주의 독립군들에게 전달하다가 일제에 의하여 발각된 사건이다.
  먼저 위 권태일 등은 청송 등지의 지주와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주민들로부터 모금한 군자금 180원(圓)을 권태일이 상해로 가지고 가서 독립군들에게 전달하는 한편, 일제에 투탁(投託)하여 일신의 안위와 동족을 탄압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폭살(爆殺)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비밀리에 폭탄을 만들면서 군자금을 모으는 등 경북 북부 및 동해안 일대에서 맹활약을 하다 1920년 7월 24일 일본경찰에 적발되어 관계자 11명이 일본검찰에 송치되었다. 이 사건은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그들의 식민지 통치방식을 바꾼 이후 우리 지역인사가 처음으로 참여한 항일독립사건으로 경향 각지에서 많은 관심을 끌었다.

(2) 노병곤(盧炳坤)의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턴회의 청원서 사건

  1923년 1월 24일 독립공채 모집과 워싱톤회의 청원서 사건이 있었는데, 이 사건은 달성군 사람 이현수(李賢壽)가 주도가 되어 독립공채를 모집하는 한편, 1919년 8월에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국 의원단 일행에게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알리고자 선전문을 발송한 항일 운동사건이다.
  이 같은 청원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경남 합천을 중심으로 하는 경남 일원과 영일, 고령, 상주, 김천, 안동 등지의 경북 일원에까지 광범위하게 조직을 구성하여 청원서 작성을 위한 준비와 지지를 받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인지한 일본경찰의 집요한 탄압으로 결국은 27명이 체포되어 검찰에 송치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사건에는 영덕 화개리의 노병곤(盧炳坤, 26세)도 관련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노병곤은 1923년 7월 영덕청년회의 서무간사로 지명되어 활동하였는데, 당시 영덕청년회의 회장은 문명기(文明琦)였다.

(3) 이겸호의사와 창수면의 대한통의부 군자금 모집 사건

  1923년 6월 5일 창수면의 일본인 순사가 청년 한 사람을 주재소로 데리고 가던 중, 청년이 순사를 폭행하고 상처를 입힌 후 달아나자 한국인 순사가 이를 추격하니 청년은 등운산(騰雲山)으로 도피하며 권총을 쏘고는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울진쪽으로 자취를 감춘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것이 속칭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자금모집사건( 資金募集事件) 혹은 창수사건이라 하는 것으로 우리 지역에서도 유명한 무장투쟁 사건이다.
  이때 달아난 청년은 이덕숙(李德淑,일명 宣雨)인데, 이덕숙은 안동 사람으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3년 5월에 대한통의부 제4중대 1소대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하던 중, 국내에 들어가 군자금을 모집해 오도록 명령을 받고는 국내로 잠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동기생인 창수면 오촌리의 이겸호(李謙浩)와 영양 청기의 권동호(權東鎬) 등과 비밀리에 합세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우선 영덕·영해지역의 지주와 부호를 상대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정하고 그 첫째 대상으로 창수면의 김상락(金相洛)을 지명하였다. 이들은 김상락으로부터 군자금 300원을 각출하기로 약속을 받는 등 비교적 순탄하게 일을 시작하며 본격적인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덕숙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마을을 다니던 중, 이를 수상히 여긴 일본인 순사 시마네(島根)로부터 불심검문을 받아 관할주재소인 창수 순사주재소로 연행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재소에 연행되기 전에 이덕숙은 일본 순사와 격투 끝에 등운산으로 도주하였다.
  이 사건을 접한 영덕경찰서의 일제 고등경찰은 창수면 일대를 면밀히 수사하는 도중 그 동조자로 이겸호 의사를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겸호 의사는 창수면 오촌리 출신으로 1910년에 만주로 나아가 삼원포무관학교(三源浦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서울에서 1919년 3·1 만세에 참여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한 항일 무장독립 의사였다.
  그는 이듬해인 1920년 11월에 군자금 모집의 명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였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7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고향인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에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침내 1923년 5월 대한통의부 소속의 이덕숙이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창수면 오촌리로 방문하자 그는 이덕숙과 공모하여 일차로 같은 면의 김상락에게 군자금 300여원을 협조받기로 하였으나, 이덕숙의 총격사건으로 이것이 탄로나게 되어 김상락을 협박하여 300여원의 거금을 강탈하려 하였다는 죄목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되었다.
  조사를 받던 중 3개월여 후인 1924년 9월 8일에 이덕숙이 경기도에서 잡히게 됨에 따라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어 이겸호 의사는 6월 19일에 검찰로 송치되어 대구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4) 남정면 장사리의 김창진·김홍진 의사 순국의거

  창수면 오촌리에서 일본 순사를 때려 눕힌 후 추격하는 한국인 순사에게 권총을 발사한 창수사건이 일어나 동해안 일대에 비상경계령이 펴져 있던 1923년 6월 9일 남정면 장사리에서 항일독립운동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김홍진(金洪鎭)과 김창진(金昌鎭)의사가 영덕경찰서 장사주재소 수석순사 무라세(村瀨重一)와 한국인 악질 순사 오기영(吳基永)에게 사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속칭 장사사건이다.
  김홍진은 영일군 죽장면 상옥리 출신으로 1920년대 길림·장춘 등지에서 활약한 의성단(義成團) 소속으로 평안북도 출신인 김창진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국내에 들어왔다가 남정면 사암리에 있는 아버지 산소를 찾았다가 장사리 입구에서 한국인 순사 오기영에게 연행되었다.
  그는 일본인 순사 무라세와 한국인 순사 오기영이에게 소지품 수색을 당하여 신분이 탄로나려고 하는 순간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있던 권총을 꺼내어 일본 순사 무라세와 한국인 순사 오기영을 향하여 발사하였다. 불시에 기습을 당한 두명의 순사들은 허벅지와 어깨 등에 총탄을 맞고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이르렀으나, 불행히도 창수사건으로 본서에 소집되어 갔다 돌아온 한국인 순사 김익환(金益煥)과 일본인 순사 데라가와(寺川明德)가 사택에서 쉬고 있다가 총성을 듣고 가세하여 4대 2로 총격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수차에 이르는 일본 순사들의 항복권고를 무시하고 끝까지 총격전을 벌인 두 의사는 결국 전사하였으며, 일본인 순사 2명과 한국인 순사 오기영도 겨우 목숨을 건질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창수지서 총격사건 이후 군내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총격사건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다.

2. 해외의 항일 독립투쟁

1) 박대춘(朴帶春) 의사

  창수면 백청리 출신인 박대춘(1875∼1919) 의사는 1896년 영해의진에 참여하였다가 영해의진이 해산한 후, 1906년 3월에 창의한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에 참여하여, 대소전투를 치르다가 1908년 초에 체포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박의사는 1913년 2월 25일의 특사에 의하여 풀려 나오기까지 5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박의사가 풀려 나온 1913년에는 국내의 의병활동은 거의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 지역에도 거의 의병활동은 없었다. 그리고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이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박의사는 해외로 나가 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정하고, 동포들과 독립투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를 독립투쟁의 근거지로 정하고 이주하게 되었다.
  만주로 이주한 박의사는 안동출신의 이상룡, 김동삼 지사와 영해출신인 박경종 의사 등과 합세하여 독립투쟁을 하였으며, 독립군 군자금 모집을 위해 1916년 국내로 들어와 활동하다가 일경에 탐지되어, 체포되기 직전에 음독자결(飮毒自決)하였다. 이때가 1919년 6월 29일이다.
  정부에서는 박의사의 애국정신을 기려 1977년 대한민국 건국공로 훈장을 수여하였다.

2) 박경종(朴慶鍾) 의사

  박경종(1875∼1938) 의사는 현재의 축산면 도곡리 출신으로 을미사변에 따라 전국 각처에 의병이 일어날 때, 영해지역의 병신창의진에 참여한 애국지사이다. 이후 신돌석 의병장의 영릉의병진에 참여하였다가 신돌석의 영릉의병진이 해산된 후, 1911년 1월 27일 중부(仲父) 재희(載喜), 동생 기종(基鍾)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게 되었다.
  만주 삼원보에 도착하여 이상룡, 김대락 등과 합쳐서 독립투쟁을 하는 한편, 교육사업에도 열과 성을 다하여 신흥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에 취임하고 인재들을 양성하였다. 이때의 신흥중학교는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바뀌어 독립군 양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13년에는 이상용과 협의하여 독립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고, 이해 7월에 국내로 들어와 이종태(李鍾泰), 이승연(李昇淵), 이승화(李承和) 동지와 연락하여 각처에서 2만7천원을 모집하여 만주로 돌아왔으며, 1914년 8월에 다시 국내에 들어와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2만6천원을 만들어 동지에게 전달하고 다시 대구지역에서 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군경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가서 독립투쟁을 하다가 1938년 1월에 고향으로 귀국하여 이해 4월 6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박의사의 애국애족 정신을 기려 건국공로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3) 박의연(朴義然), 의열(義烈), 의훈(義熏) 삼형제 애국지사

  일제 강점기에 국권회복을 위한 국내외 독립투쟁사(獨立鬪爭史)에서 한 집 삼형제분이 독립투쟁에 참여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한 집의 삼형제가 독립투쟁에 몸바친 사적이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으니, 창수면 출신의 박의연(1880∼1943), 의열(1989∼1930), 의훈(1895∼1983) 삼형제가 바로 이들이다.
  박의연 의사는 일찍이 신돌석의진에 참가하여 항왜구국의 항일투쟁에 앞장서서 활동을 하다 신돌석의진이 해산한 후 고향에서 은거하다 1912년 동생인 의열과 안동의 김동삼, 이상용 등과 만주 통화현으로 이주하여, 그곳의 독립지사들과 경학사부민단(耕學社扶民團)을 이끌면서 1914년에는 남흥학교를 설립하여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에 한민회와 촉성회를 조직하거나 또는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일제의 조선인 밀정인 유길선(柳吉善)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통의부 총관을 역임하였으며,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국내실태 조사원으로 국내에 잠입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어 사형장으로 가는 도중 동지들의 도움으로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이후 1927년 3월에는 동지들과 독립촉성회를 결성하여 전만주(全滿洲) 대표자회의를 길림에서 소집하여 북만주 대표로 참석하는 등 지속적인 독립투쟁에 일신을 바쳤다.
  이같은 지속적인 항일독립투쟁에 앞장서다 몸과 마음에 숱한 고초를 겪은 박의연 지사는 1943년 6월11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여 박지사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로 하였다.
  박의열 지사는 1912년 24세때 형인 박의연 지사를 따라 만주로 이주하였으며, 1917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에는 부민단 통화현의 검찰감이 되는 등 독립투쟁전선의 제일선에서 맹활약을 하였다.
  이후 동원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여 독립군 장교의 양성과 민족교육에 헌신하였으며, 1930년 11월 17일에 일제의 밀정에 의하여 피살되어 순국하였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여 박지사의 구국정신을 기렸다.
  박의훈 지사는 두형의 망명 이듬해에 만주 환인현에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의부 제4중대원으로 배속되어 독립투쟁에 나섰으며, 이후 서로군정서 헌병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독립군 결사대 50여명과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을 습격하였으며, 1931년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지속적인 독립투쟁을 하였다.
  1945년에는 광복군 국내지대 선전부장 및 경리부장으로 활약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국내에 귀국하여 광복동지들과 대종교에 관여하면서 민족정신의 고양에 힘쓰다가 1983년 6월 19일에 서거하였다.

3. 영덕군의 3.18만세의거

  영덕지역의 3·18만세의거는 기독교 장로파 전도사 김세영(金世榮), 예수교 조사(助事) 정규하(丁奎河),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유생(儒生) 남세혁(南世赫, 일명 汝明) 등이 주도하여 서울에서 일어난 3.1만세의거에 영향을 받아 1919년 3월 18일 영해·영덕 장날을 기하여 군내 전지역에서 일으킨 조직적인 만세의거이다. 특히 군내의 만세의거 중 남정면 장사리의 만세의거는 군내의 만세의거 소식을 접한 남정면 청년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 지역의 첫 만세의거는 3월 18일 영해 장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영해장터에서 시작된 우리 지역의 3.18만세의거는 초기에는 비폭력 무저항으로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였으나, 점차 시위대가 늘어나면서 일제의 강제적인 해산방식에 격분한 군중들에 의하여 점차 분위기가 험악해져 일제 경찰주재소를 파괴하고 일제순사를 무장해제(武裝解除)시키고, 이를 진압하러 온 영덕경찰서장을 붙잡아 포로로 하는 등 기세를 올리면서 억눌린 민족 감정을 폭발시켰다.
  일제도 이들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포항헌병대, 대구의 보병 18연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압을 시도하는 한편, 군내의 자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강구항에 정박해 있던 일본어선의 어부 60여명과 일본인 재향군인, 일본인 소방대원을 동원시켜 자구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발발한 영해 3.18만세의거가 군민들의 호응을 얻어 점차 규모가 커져가자 이를 진압하러 온 일본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일제 헌병의 발포로 시위대 중의 8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16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같은 사상자의 숫자는 3.1의거 당시 전국 어느 곳보다 많은 숫자로 영덕의 3.18시위가 얼마나 격렬하였는지 웅변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영해 3.18만세의거로 촉발된 군내의 만세의거는 군내 전체로 확산되어 남정면에서부터 병곡면에 이르는 전지역에서 일어났는데, 영덕 군내에서 일어난 3·18의거는 위에서 보듯이 세가지 방향에서 추진 조직되어 일어났는데, 김세영·권태원·정규하·강우근(姜佑根)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계열과 남세혁으로 대표되는 유림을 중심으로 하는 계열, 3·1의거에 대한 신문이나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의거를 일으킨 남정면의 의거와 같은 세 계열로 나눌 수 있다.

1) 영해 3.18만세의거

  영해3.18만세의거의 동인(動因)을 제공한 김세영은 지품면 낙평리의 낙평교회의 전도사로 3·1만세의거 당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3·1만세의거를 목격하고 고향에 돌아와 평소 절친하던 권태원을 만나 서울의 3.1만세의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는 영덕지역에서도 만세의거를 거행하기로 약속하고 다시 병곡면 송천리의 정규하와 상의하여 영덕지역에서의 만세의거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3.1만세의거의 전국 확산을 막기 위한 일제경찰의 예비검속에 의하여 김세영이 3월 13일 영덕경찰서에 구금당하자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리로 돌아와 정규하와 의논하여 거사계획을 세우고 이를 준비하였다.
  한편 3월초부터 서울의 3·1의거에 대하여 소식을 들은 영해면 괴시리의 남세혁도 안동유림과 함께 만세를 부를 것을 약속하고 남씨 문중을 중심으로 동지 규합에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이렇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던 의거계획이 송천동의 남효직의 집에서 남세혁과 권태원·정규하 등이 모여 하나의 거사로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은 후 준비를 착착 진행시켜 나갔다. 이로써 기독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영해의 유림, 그리고 주위의 군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으며, 이상화(李祥和)·권영조(權永祚)·남교문(南敎文)·김원발(金源發)·서삼진(徐三辰)·조영한(趙榮漢)·백수학(白壽鶴)·손영세(孫永世)·박희락(朴羲洛) 등의 동지들이 새롭게 참여하여 태극기 제작 등 의거 당일의 필요한 장비를 준비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동지를 규합하는 등 만세 의거를 위한 준비는 급류를 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영해 장날인 3.18일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영해 장날인 3월 18일 오후 1시쯤, 정규하와 남세혁 등의 주동 인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시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미리 준비한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원된 군중과 영해 시장에 나온 많은 군중들이 이들을 따라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당시 여기에 모인 군중은 이들 주동자들의 재판 판결문에 의하면 2,000여명이라고 하였다.
  군중들은 시장을 돌며 일반인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만세를 외치며 일제경찰 주재소로 몰려가서 일제로부터 독립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미 보고를 받은 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부장은 시위군중들을 향하여 해산을 명령하고 태극기를 압수하려고 하자 흥분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들어가 집기와 무기류를 탈취하고 일본인 순사부장과 순사 2명을 짓밟은 후 다시 영해 읍내를 다니며 만세를 불렸다.
  주재소로부터 빠져 나온 군중들은 만세의거에 비협조적인 보통학교·소학교·우편소·면사무소 등을 돌며 이들 직원의 동참을 유도하거나 기물을 파괴하면서 다시 주재소로 몰려가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한국인 순사를 비롯한 5명의 순사들의 옷을 벗기고 무기를 회수하였다. 이때 압수된 무기는 칼과 총이 4자루, 실탄이 87발이나 되었다.
  이때의 일본인 및 한국인 순사는 순사부장 스즈끼(鈴木鶴次郞)·순사 야마구찌(山口直一), 순사보 진익조(陳益祚)·김려송(金麗頌)·권상식(權相植) 등의 5인이었다.
  순사들은 시위대의 성격이 폭력성을 띠는 등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영덕경찰서에 긴급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연락을 받은 영덕경찰서장은 순사 4명을 데리고 영해로 들어왔으나 이들도 군중들에게 잡혀 일본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감금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장과 4명의 순사는 군중들에 의해 구타를 당하여 죽음 일보 직전에 이르렀는데, 이때의 일본인 서장과 4명의 순사는 서장인 무의손팔(茂義孫八)·순사 중원청병위(中原淸兵衛)·정고원오(井高源吾)·홍소수(鴻巢守)·한국인 순사보 김경수(金景守) 등이었다.
  한편 3월 18일의 영해의 시위가 무르익자 정규하는 오후 2시쯤에 200여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병곡면의 일제주재소를 습격하기로 하고 병곡을 향하였다. 병곡면으로 가는 도중에 많은 읍민이 참여하여 어느덧 군중 수는 400명이 넘어서게 되어 대단한 기세를 이루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병곡주재소는 평해 헌병 분견대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일찍 도착한 군중들이 주재소를 습격하자 주재소 순사들은 평해쪽 백석리로 도망하였으며, 시위대 일부가 이를 쫓자 이들은 평해에서 긴급히 달려 온 헌병들과 합세하여 군중과 대치하였다. 병곡면의 시위는 오후 6시까지 대치하다 끝이 났다. 당시 병곡면 주재소의 일제순사는 궁기무인(宮崎武人)이었다.
  영해의 시위 소식은 창수면 오촌리와 삼계리에도 전해져 이 마을의 장정 10여명이 시위에 동참하기 위하여 영해로 떠났다. 이들 시위대의 주동인물(主動人物)은 영양의 유생 이종구(李鐘龜) 였는데, 이들 시위대가 영해로 내려오는 도중 인근의 수많은 사람들이 합세하여 군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은 시간상으로 보아 영해로 내려가서 시위 군중들과 합세하기는 너무 늦은 것으로 알고 19일 오후 4시쯤, 신기리에 들어가 이장(區長)인 이현설(李鉉卨)의 협조를 얻어 신기리에서 만세를 외친 후 창수리에 있는 창수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들이 창수주재소에 이르자 주재소 순사들은 모두 도망가고 없었으며, 시위대는 주재소를 점거하고 건물을 부수는 한편, 3자루의 총기를 수거하여 처리하는 등 마음껏 기세를 떨치다가 오후 7시쯤 해산하였다. 당시 창수주재소의 일제순사는 고목이삼랑(高木伊三郞)이었으며, 한국인 순사보는 송상원(宋相元), 권찬규(權燦奎)이었다.
  이와같이 군내 각처로 만세의거가 확산되어 갔으며, 특히 만세의거의 시발지인 영해에서는 의거에 참여하는 군중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한편, 이들의 요구가 점차 독립만세에 이르고, 일제 순사주재소를 포위하여 만세소리를 높여가자 일제헌병과 경찰들은 먼저 공포탄을 쏘아 군중들을 해산하고자 하였으나 군중들은 도리어 만세를 크게 외치며 이들이 쏘는 공포탄에 조금도 겁을 먹지 않고 오히려 더 격렬하게 이들을 압박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마침내 무차별 실탄 사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비무장 시위대는 이들이 쏘는 총탄에 의하여 순식간에 8명의 사망자와 16명의 부상자만 남긴 채 일단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의 사망자와 부상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3명 미상)
이해술(李海述), 이회동(李會東), 임창목(林昌穆), 최재곤(崔在崑), 신동송(申東松)

부상자(8명 미상)
권정돌(權正乭), 김도식(金道植), 김위석(金渭錫), 김위환(金渭煥)
남만진(南晩鎭), 남홍진(南洪鎭), 남효량(南孝樑), 이두관(李斗寬)

2) 영덕의 3.18만세의거

  영덕에서도 금호리에 거주하고 있던 기독교 신자인 강우근(姜佑根)이 김세영·권태원으로부터 3.18만세의거에 대한 의거계획을 전해듣고 3월 18일 영덕 장날을 기해 만세 시위를 하기로 결심하고 화개리·금호리의 교회 신도들과 남정면 남정리의 김용하, 김용규, 강두황, 이복이, 최명술 등의 교회 신도들에게 통문(通文)을 하여 영덕장터에 모이도록 하였다. 강우근은 이들 신도들과 영덕시장에 시장을 보기 위하여 나온 장꾼 및 농민들과 합세하여 3월 18일 낮 시간에 영덕장터를 돌며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시위가 시작되자 이날 대규모 시위가 있으리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미리 경계를 하고 있던 일제의 군경이 달려와 시위 군중 21명을 체포하여 가자 시위는 일시 중단이 되었다. 한편 영덕보통학교 학생들이 영해의 시위대와 합세하여 영덕경찰서를 습격한다는 소문이 돌아 다급해진 일본 경찰은 영덕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모두 소집하여 경계를 시작하였으며, 소집된 인원은 제대군인·소방대원 등으로 모두 20여명이었으나 이것도 부족하여 때마침 강구항에 정박 중이던 일본 어선의 어부 60여명도 긴급 소집하여 무장을 시켜 경계를 펴는 등 일본 군경들은 간담을 졸이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가자 영덕경찰서에서는 포항헌병대에 급전을 쳐 지원을 요청하였다. 연락을 받은 포항헌병대에서 6명의 헌병이 밤을 꼬박 세우며 달려 와 우선 영해에 감금되어 있던 영덕경찰서장 일행을 구출하고 시위대를 진압하기 시작하였으나 그래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지품면 원전리에서도 김세영의 연락을 받은 주명우(朱明宇)가 기독교 신도 20여명을 인솔하여 3월 19일 지품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일본의 침략행위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다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18연대의 지원 병력이 영덕에 도착하자 일제 군경측의 시위 진압 방법이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종전의 수동적인 진압에서 공포탄을 쏘는 등 적극적인 진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무력진압 과정에서도 만세의거는 계속되어 지품면 신안리에서는 3월 21일 밤 9시쯤 문의향(文義鄕)이라는 사람이 일족 60여명을 인솔하고 만세를 부르며 동네를 돌다가 지품주재소 순사에게 잡혀갔으며, 4월 4일 남정면 장사리에서는 20여명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를 벌이다가 박명방(朴命方)을 포함한 8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3) 군내 타 지역의 3.1만세의거

  영덕 군내의 3·1의거는 3.18일을 기하여 영해·영덕·병곡·창수에서 일어났으며, 이날 19일에는 지품 원전에서, 21일에는 지품 신안에서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남정면 장사리에서 대한매일신보 등의 기사를 보고 김석조, 박명방, 정상용, 신조경 등이 주동이 되어 장사 시장에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 연행되는 등 전 군민이 거군적으로 참여한 대규모 비폭력 독립운동으로 수천년 동안 내려온 우리 지역의 굳센 기상을 아낌없이 보여준 일대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4) 3·1 의거탑(義擧塔)

  3·1의거탑은 영해면 성내리 산 49-1에 있는 영해 3·18만세의거 기념탑을 말한다. 이 탑은 1958년부터 영해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동심회(東心會)가 주축이 되어 1975년 11월부터 발의되기 시작하여 건립의 뜻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당시 동심회원으로는 권경달(權京達), 권수운(權壽雲), 권종구(權鍾九), 권종대(權鍾大; 송천), 권종대(權鍾大; 어대), 남서순(南曙純), 남용진(南瑢鎭), 남인성(南仁星), 남중익(南重益), 남효달(南孝達), 박동수(朴東洙), 박성식(朴成植), 박종열(朴鍾烈), 박종수(朴鍾壽), 박주락(朴主洛), 박증택(朴曾澤), 백운한(白雲漢), 신병종(申炳宗), 이삼교(李參敎), 이숭교(李崇敎), 이순교(李純敎), 이주희(李周熙), 이춘태(李春泰) 등 이었다.
  이듬해인 1976년 3월 18일에 발기대회를 개최하고, 이 해 4월 18일에 영해중고등학교 강당에서 3·1독립의거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공식 결성하였으며, 10월 4일에는 추진위원장에 조경한(趙擎韓), 부위원장에 이강훈(李康勳), 주병호(朱秉毫), 간사장에 남서순을 선출하여 본격적으로 의거탑 건립에 나섰다.
  이후 8여년에 이르는 기간동안의 준비를 거쳐 8.8m 높이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현재의 탑을 건립하였는데, 건립 당시 각계 각층의 지원금, 성금, 회비, 찬조금 139,197,401원을 들여 1983년 11월 29일에 준공하였다. 탑의 조각은 조각가 민복진(閔福鎭)씨가 조각을 하였으며, 이은상(李殷相)씨가 탑의 비문을 짓고, 김응현(金膺賢)씨가 탑의 비문 글씨를 썼다.
  건립 당시의 워원장 및 감사, 이사진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조경한, 부위원장 이강훈, 김용한(金龍漢), 감사 남시호(南時浩), 윤상아(尹相雅), 간사장 남서순, 이사 권종대, 김옥동(金玉東), 김진석(金鎭錫), 김헌무(金憲武), 남서순, 남학구(南鶴九), 박경열(朴敬烈), 박성식, 배개산(裵介山), 신선권(申善權), 이강훈, 이진교(李振敎), 이종탁(李鍾鐸), 조경한, 최칠만(崔七萬).

4. 군내 3.18만세의거 수형자(受刑者) 명단

  영덕과 영해지역 외 군내 전체에서 3.18만세의거와 관련하여 600여명의 시위 참여자가 검거되어 이 중 170명이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인이 너무 많아 1, 2차로 나누어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1차 재판에는 김세영을 포함하여 96명이 재판을 받았으며, 2차 재판은 강봉조(姜鳳祚)·강삼인(姜三仁)을 포함한 74명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이 받은 주요 죄목은 소요죄·공무집행방해죄·건조물손괴죄·기물손괴죄·보안법위반죄 등의 8개항의 죄목이다. 이들이 선고받은 형랑은 7년형이 4명, 4년형이 9명, 3년형이 6명, 2년형이 18명, 1년 6개월형이 38명, 1년형이 42명, 3개월형이 46명, 미상이 3명이었다. 특히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 중에는 조사과정에서 일경의 심한 고문으로 68명이 반신불수가 되거나 옥사(獄死)를 하는 등 이 지역 군민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우리 군내에서 일어난 3·18 만세의거로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은 애국지사들의 명단과 형량은 다음의 표〈2-9〉와 같다.

5. 한말의병 및 일제 강점기의 항일 애국투사 추가명단

  표 〈2­10〉는 한말의 을미의병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의병들 중에서 이 지역 출신으로 각종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없어 이분들의 공적을 확인할 수가 없어 이분들의 명단이 기록치 못하였으나, 1981년 군지 발간 후에 나온 「구국창의록」 등과 각종 독립운동 자료에서 새로이 발굴한 명단이다. 추후에 이분들의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발굴되어 지역독립운동사가 보다 풍부해지길 바라며 여기에 등재한다.
  표〈2­11〉는 완전히 국권이 상실 당한 1910년 이후 해방 전까지 항일독립투쟁을 한 애국지사들의 명단이다. 표에서 보듯이 고등학생으로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영덕에서부터 멀리 동경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 출신의 많은 분들이 독립투쟁 전선에 앞장섰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의 일부는 일제 식민지화에 동조하기도 하였지만 우리 지역 출신들의 구국독립투쟁은 일제 식민지시대 전기간 동안 끊임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은 삼국시대로부터 내려오는 항왜구국 정신의 계승에 말미암음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