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절 축산면(丑山面)
▒ 축산리(丑山里)
축산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地形)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形局)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8세기 중기인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때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나, 영양남씨(英陽南氏) 입향시조 유래로 더 유명하다. 즉, 경덕왕 14년(755년) 당(唐)나라 현종(玄宗) 연간에 김충(金忠)이란 안렴사(按廉使)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漂着)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씨(南氏)로 사성(姓)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食邑)을 영양(英陽)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되었다고 한다. 축산2리인 염장(鹽場) 마을은 약 2백여년전 해일(海溢)로 인하여 염수(鹽水)가 스며들어 붙여진 이름이며, 양장(羊腸)은 약 5백년전에 영해박씨(寧海朴氏)가 입주하여 양을 사육하였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며, 양장(良庄)은 약 3백년전에 김복용(金福龍)이라는 분이 현 구평들을 개척하여 좋은 농장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축산3리는 죽도산(竹島山) 밑으로 약 3백년전 오씨(吳氏)가 개척하여 추씨(鄒氏)라는 분과 함께 대나무를 심고 죽산동(竹山洞)이라 했다 하며, 일명 신기(新基)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해군 남면(南面) 지역으로서 축산포영(丑山浦營)을 두고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있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양장동, 차유동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축산동이라 하고 영덕군 축산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축산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축산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1924년 3월 축산항을 개발하여 어항으로 발전되고 있으며, 축산, 축산항, 축산포, 축산도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워진다. 축산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도곡리, 상원리, 남은 경정리, 북은 영해면 사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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