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광자원 현황

  영덕군은 백두대간에서 뻗어 나오는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종주하고 있는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칠보산, 등운산, 맹동산, 대둔산, 화림산, 팔각산, 해월봉, 동대산 등의 크고 작은 명산들이 연립(連立)하여 있는 곳으로, 군 전체의 지형구성은 해안과 산간내륙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의 동쪽을 구성하고 있는 지대는 푸른 동해가 직접 부딪치는 해안 53㎞를 이루고 있으며, 명산들이 연이어 있는 내륙산간지대는 천하의 절경을 이루고 있어, 산과 바다를 동시에 관광할 수 있는 복합관광의 장소로서의 훌륭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영덕군은 이러한 자연적인 관광자원 외에도 영해를 중심으로 창수면 인량리, 영해면 괴시리의 고가(古家) 집단촌과 이들 고가에서 거처하며, 남긴 선현들의 유교문화유산과 유금사, 장육사 등의 고찰로 대변되는 불교문화유산이 있으며, 기타 각 읍·면·리에 산재해 있는 정자, 제실, 그리고 지정·비지정 문화재 등의 문화유산이 수없이 많이 남아 있어, 어느 타 시·군보다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우리 지역은 향후 동서 및 남북을 연결시켜 주는 도로가 개설되고, 포항과 울진간의 7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포장되면 접근성이 한층 용이하여 관광객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위하여 군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 주요 관광지 현황

  우리 군의 관광지로는 바다를 이용한 해수욕장과 산을 이용한 폭포, 계곡, 칠보산, 등운산, 팔각산 등의 명승절경 관광지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그 외 박물관, 사찰, 의병활동 유적지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표 <5-126>은 이러한 기준에 따른 군내의 주요 관광지들의 현황이다.

2) 관광지별 시설물 현황

  다음의 표 <5-127>은 2000년 1월 31일 현재 위의 주요 관광지에 설치된 시설물의 현황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지역민과 타 시·군에서 온 휴양객 및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2. 관광객과 관광 코스

1) 관광객 현황

  1995년부터 1999년 12월 31일 현재 군내 각 관광지를 찾아 온 방문객의 숫자는 다음과 같다. 1996년도에 방영된 「그대 그리고 나」란 MBC 연속극의 영향과 군내의 각 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관광자원을 정비하여 볼거리를 제공한 결과, 방문객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표 <5-128>는 연도별 관광객 방문현황을 나타낸 것으로 1995년에 563,000이던 관광객이 1999년에는 1,250,514을 넘어서고 있어, 무려 2.2배의 신장을 보이고 있다.

2) 관광 코스

  관광산업의 발전을 위해서는 관광자원의 개발뿐만 아니라 관광을 위한 시간적인 조율도 필요하다. 아무리 좋은 관광자원이 부존해 있더라도 일정과 시간이 맞지 않는다면 경제적인 관광이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지역 관광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고려한 군에서는 다양한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관광객들에게 안내하고 있는데, 아래의 표와 같이 무려 다섯 개의 다양한 코스를 개발하여 관광객들의 편리를 도모하고 있다.

3. 관광 특산물

1) 지품 도계 한지(韓紙)

  한지는 조선종이, 참종이, 문종이 등으로 불리며, 일찍부터 중요한 특산물, 혹은 공물, 혹은 대외 무역물품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일반 민중들과 선비들의 문방사우 중의 하나로서도 우리들과 친숙하여 왔다.
  특히 우리 지역은 옛부터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楮)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양질의 토질과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맑은 물이 풍부한 자연적 여건에 따라 한지의 생산량이 많았는데, 군내의 대표적인 생산지로는 지품면의 도계리였다.
  도계한지를 포함하여 군내에서 생산되었던 한지는 조선조 이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본토와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지역에까지 수출되는 대표적인 무역품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도내 한지 생산에 대한 통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일제시대의 자료를 보면 당시 영덕의 한지 생산 정도를 알 수 있다.
  일제하인 1931년 현재 경상북도 전체의 한지 수확고가 756,730관, 금액이 300,300,070원이었는데, 경주가 310,139관에 152,569,500원을 생산하여 1등 생산지이고, 영덕은 155,226관에 45,912,600원으로 도내에서 경주에 이어 2위의 생산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 영덕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한지는 화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량의 한지를 생산하던 공방은 대부분이 없어지고 지품면 도계리에 1개소의 공방만이 남아 과거 영덕한지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도계한지의 시작은 조선 현종 연간으로 처음 한지를 만들기 시작한 이는 지촌 (芝村) 김연생(金連生,1658∼1740)이다. 김연생은 사육신의 한 분인 백촌 김문기공의 후손으로 청송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모친을 모시고 두 동생과 함께 지품면 도계리로 이거, 정착하면서 한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도계리는 낙동정맥의 중심에 우뚝 선 맹동산의 한자락으로 토질이 사질토여서 닥나무가 자라기 좋은 지역이었으며, 오십천 상류지역의 한 지류로써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아 한지 생산에 더 할 수 없는 적지였다. 따라서 김연생은 종이 만드는 일을 생활의 수단으로 삼게 되었으며, 이후 도계리는 한지 생산이 주업이 된 지향(紙鄕)으로써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한지의 수요가 많고 가격이 좋을 때인 조선조 말기와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전국의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도계천변 일대에 한지공방이 빽빽이 들어 서 있었고, 겨울철에는 닥무지의 증기로 아침이 열리고 닥 깍는 소리에 밤이 깊어 갈 정도였으며, 혹 봄날에 종이 뜨기를 할 때 화전민들이 태우는 산불의 불티가 날아들까봐 영덕 현청에서 도계리 일대의 화전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한다.
  현재 도계한지의 계승자는 1대 김연생 이래 11대인 김진석(金鎭錫)이 300여년의 가업을 이어 가고 있다. 2대 김의선(金儀善), 3대 김귀원(金貴元), 4대 김운봉(金雲鳳), 5대 김여만(金麗萬), 6대 김익선(金益善), 7대 김성구(金聲九), 8대 김의권(金義權), 9대 김형룡(金炯龍), 10대 김일규(金一圭)로 이어져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11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김진석이 전통한지의 보존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1972년 12월 30일에는 상공부 지정 제120호 새마을 공장으로 지정받았으며, 1983년 6월 13일에는 상공부 지정 제83-51호로 공예품 전문 생산업체(한지부문)에 지정되었으며, 1995년 4월 26일에는 영덕군 지정 도계한지 특산단지로 지정받아 전통한지 생산을 계속하고 있으며, 직영판매, 우편주문판매 등의 다양한 판매망을 통하여 판로의 개척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대개 한지의 제조과정은 오늘날 생산되는 종이의 제조공정과 달리 13단계의 공정과정과 수작업이 필요로 하는데다 작업의 특성상 많은 일손과 기술적인 숙련도를 요구하고 있어, 그 제조과정이 쉽지 않을뿐더러 제조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없어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다음은 지품면 도계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지 제조과정과 한지 제조에 쓰이는 공구, 그리고 한지 제조과정에 따른 용어들을 살펴 본 것이다.

(1) 한지 제조과정

① 거두기
한로(寒露)를 전후하여 서리가 내리기 전에 1년생 닥을 잘라서 단으로 모아 거두어 들인다.

② 닥찌기
커다란 가마솥에다 닥나무를 넣고 하루 종일 찐다

③ 벗기기
쪄낸 닥나무에서 저피를 벗겨 낸다. 흑피, 조피, 녹피, 백피로 분리한다.

④ 말리기
닥이 겨울 추위에 얼지 않도록 볕에 내어서 말린다.

⑤ 담그기
흐르는 냇물에 24시간 담구어 철분을 빼고 부드럽게 한다.

⑥ 삶기
물에 불린 두터운 백피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솥에 넣고 충분히 익을 때까지 끓인다. 이때 가성소다를 넣는다.

⑦ 씻어내기
삶겨진 백피를 철분기 없는 흐르는 물에 3일 동안 담궈 둔다.

⑧ 고르기
물에서 건져낸 백피에서 잡티나 불순물·이물질을 골라내어 깨끗한 원료로 선별한다.

⑨ 두드리기
고르기가 끝난 백피 닥을 닥돌 위에다 얹어서 팔프가 잘 풀릴 때까지 서너시간 닥방망이로 친다.

⑩ 뜨기
풀어진 닥을 지통에 넣고 닥풀에서 추출한 응접액과 혼합, 고루 휘젓는다. 그 뒤에 한 장씩 한 장씩 발로 종이를 뜬다.

⑪ 물빼기
발로 떠낸 종이를 차곡 차곡 재여서(5백장 정도) 무거운 돌로 눌러 물을 뺀다.

⑫ 말리기
물이 빠져버린 습지를 한 장씩 떼내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린다.

⑬ 다듬이질
종이가 질기고 윤택이 나도록 여러 겹으로 쌓아(150장정도) 윗판을 덮고 위에서 압축을 가하듯 무거운 도구로 두들겨 팬다.

(2) 생산도구 용어

  한지를 제조할 때 쓰이는 생산도구에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01. 닥낫 : 산에서 닥을 벨 때 쓰는 낫. 보통 농가에서 쓰는 낫을 이용한다.

02. 닥칼 : 닥나무 껍질을 벗길 때나 흑피를 벗길 때 쓰는 칼, 과일칼보다 좀 크다. 길이는 약 30센티미터 정도. 끝이 뾰족하지 않고 칼날도 그리 날카롭지 않다.

03. 솥 : 닥나무를 삶는 솥. 긴 솥을 썼으나 요즘은 보통 솥에다 닥나무를 세워 비닐을 덮어씌워 삶는다.

04. 보고리틀 : 삶은 닥을 삼베보에 싸서 얹어놓고 씻는 틀. 보자기에 싸서 얹어 씻는다고 보고리틀이라고 한다.

05. 닥돌 : 삶은 닥껍질을 두드릴 때 쓰는 넓적한 받침돌.

06. 닥방망이(닥메) : 닥껍질을 삶아서 두드릴 때 쓰는 방망이.

07. 휘젓이 : 지통에 닥 섬유를 풀어넣고 휘젓는 막대기. 낫처럼 ㄱ자로 굽은 막대기이다.

08. 수통 : 닥껍질을 씻는 물통. 옛날에는 흐르는 시냇물을 이용했다.

09. 지함 : 두드려서 연해진 닥껍질 반죽을 담는 통.

10. 닥풀자루 : 황촉규(黃蜀葵)나 느릅나무 즙을 담은 자루. 이것을 지통에 담가 여기서 나오는 즙을 고루 섞는다.

11. 지통 :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개 가로 6자, 세로 8자, 높이 1자반 정도의 소나무 판자로 만든 통. 여기에다 물을 붓고 닥의 섬유 및 닥풀을 풀어 넣고 한지를 떠낸다.

12. 풀작대기 : 지통에 닥풀을 넣고 젓는 작대기.

13. 발틀 : 종이를 뜨는 틀로서, 둘레는 목재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 대발을 얹어 한지를 뜬다.

14. 벼개(벼갯골) : 떠낸 한지를 겹쳐 놓으면 서로 달라붙게 된다. 이것을 쉽게 떼기 위해 종이를 떠서 칸자리에 놓을 때, 매장마다 넣는 가느다란 실이나 노끈같은 것. 물춤풀을 말려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가는 비닐끈을 쓴다.

15. 구불뎅이(궁글통) : 떠낸 젖은 종이 위로 굴러서 물기를 빼는 데 쓰는 둥근 나무 기둥.

16. 이릿대 : 여러 장 붙은 종이를 뗄 때 쓰는 대가지.

17. 비(빗자루) : 젖은 종이를 건조판에 부착시킬 때 쓰는 비 혹은 솔. 의령에서는 텃새라고도 한다.

18. 건조기 : 젖은 한지를 건조시키는 철판. 뜨거운 물을 이용하여 철판을 덮히는 장치가 되어 있다. 옛날에는 옥외에서 햇볕에 말리거나, 토방에 불을 때어서 말리기도 했다.

19. 지방 : 젖은 한지를 건조시키는 방. 대게 토방을 이용했다. 요새는 건조실을 이용한다.

(3) 제조과정 용어

  한지 제조 과정에 쓰이는 용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01. 통꾼(퉁꾼) : 한지를 뜨는 사람. 지장.

02. 저피 : 닥나무의 껍질.

03. 흑피 : 닥나무의 겉껍질. 삶아 놓으면 검은 색깔이 된다.

04. 백피 : 닥나무의 속껍질. 한지의 원료가 되는 것이다.

05. 박피 : 닥나무의 껍질을 벗기는 일.

06. 고쇄, 고해 : 방망이로 닥껍질을 두들겨 반죽을 만드는 일.

07. 풀바라지 : 지통에 닥풀용액을 함께 풀어 넣는 일.

08. 유지 : 갓 떠낸 젖은 종이.

09. 압축 : 젖은 종이를 쌓아놓고 물을 빼는 일.

10. 물질, 반물질 : 발로 종이를 뜨는 일.

11. 앞물질 : 발을 지통에 담가서 앞쪽을 치켜들어 닥의 섬유질이 앞쪽에서 뒤쪽으로 천천히 골고루 퍼지게 하는 일.

12. 중물질 : 앞물질 다음, 발을 다시 지통에 담가서 좌우로 치켜들어 닥의 섬유질이 골고루 건져지게 하는 일.

13. 끝물질 : 발을 지통에 담가 뒤쪽부터 치켜들어 닥의 섬유를 골고루 퍼지게 하는 일.

14. 칸자리(마실자리) : 발로 뜬 종이를 펴놓는 자리.

15. 닥달 : 한지로 장판지를 만들 경우, 다듬이질을 하여, 반들반들하고 빳빳하게 하는 일.

16. 거품 : 닥달한 것을 건조시키는 일.

17. 서도 : 장판지의 가장자리를 깨끗이 칼로 잘라내는 일.

18. 비벽질 : 종이 말리는 일.

19. 한지 1권 : 20장. 1축 : 2백장. 1동 : 2천장.

2) 지품 오천의 옹기

  영덕지역에서 도기(陶器, 甕器)나 토기 생산의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길게는 선사시대로까지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옹기와 관련지어 영덕지역의 도기가 최초로 문헌에 기록되어 나오는 것은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에 의하면 당시 영덕현의 서쪽인 성산리에 도기소(陶器所)가 1개 있으며, 품질은 하품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보아도 우리 지역의 도기는 상당할 정도로 그 깊은 역사를 가진다고 할 수 있으며, 도기의 산출지로도 영덕읍의 화개리, 달산면 흥기리, 지품면 삼화리, 지품면 송천리, 오천리, 축산면 망골과 이외의 다수의 지역에도 옹기막, 혹은 사기막이란 이름으로 존재하면서 군내 및 동해안 일대의 도기의 공급지로서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레스, 플라스틱류 등의 용기 등이 생활의 주요한 도구로 자리잡기 전에는 위의 생산지 등에서 거의 50여 호에 이르는 생산집단이 있었으나, 근자에 들어와서는 거의 사양화되어 지품면 오천리의 백광훈(白光薰) 1호(戶)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 가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지품면 삼화리의 속칭 독점을 중심으로 옹기생산이 유명하였는데, 특히 이대춘(李大春)이 경영하던 옹기굴은 1회에 무려 8톤의 옹기를 구울 수 있을 정도였으며, 년간 100여톤에 이르는 옹기를 구워 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부터 서구식 생활용구의 확산과 농촌인구의 감소로 삼화리 일대의 도기, 옹기 생산가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옹기 제작 기술자 및 옹기 생산, 경영자였던 이대춘은 작고하였으며, 엄삼규, 김봉겸, 박해양 등이 생존하여 과거 옹기생산 전성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천리의 백광훈 옹기굴은 지품면 오천리 316-2 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옹기장의 전수자인 백광훈이 선대로부터 옹기 굽는 기술을 배워 12살 되던 해인 1962년부터 옹기 만들기에 참여하여, 1970년에는 옹기공장을 설립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백광훈은 전래의 옹기제작을 중심으로 하면서 흙을 이용한 다양한 도기 작품을 제작하고 있으며, 현대의 기계화식이 아닌 전통식으로 옹기를 제작하고 있다.
  다음은 웅기제작 공정과 옹기의 종류, 그리고 옹기 제작용구를 살펴본 것이다.

(1) 지품면 오천리 백광훈의 옹기제작 방법

① 흙다루기
질좋은 쪼대흙(찰흙)을 채취하여 파래기로 고른 후 발로 쳐서 입자가 큰 흙, 돌, 풀뿌리 등을

골라내고, 물을 뿌려 2∼3일간 불린 후, 삽으로 뒤집은 다음 2∼3회 떡매로 두드려 흙을 충분히 섞어 마지막으로 맨발로 밟아 흙 속의 공기를 완전히 빼낸다. 배합된 흙은 떡골미(가래떡) 모양으로 약 2∼3m 가량 길게 늘린다.

② 옹기제작
가늘게 늘린 흙을 물레(발틀)에 올려 천천히 돌려서 옹기의 기본 형태를 만든다. 형태를 잡은 후, 물레를 돌리면서 나무 부채로 표면을 때려 단단히 굳히고, 솔에 물을 묻혀서 표면과 내면을 완벽하게 고른 다음, 표면이 다소 굳으면 물레를 가볍게 돌리면서 무늬를 만든다.

③ 옹기건조(초벌 말리기)
완성된 옹기를 들보에 싸서 들어낸 다음, 음지에서 3∼5일 정도 말린다.

④ 유약바르기
3∼5일 정도 말린 옹기를 건조실에 옮겨서 유약을 바른다.

⑤ 옹기건조(재벌 말리기)
유약을 바른 옹기를 음지에서 1일정도 말린 다음 밀폐된 곳으로 옮겨서 약15∼20일(옹기 1개 기준) 정도 말려 옹기의 습기를 완전히 제거한다.

⑥ 옹기굽기
건조된 옹기를 굴로 옮겨 수평기를 이용하여 옹기를 쌓은후, 굴문을 흙벽돌로 막는다. 7일 정도의 초불로 지펴 옹기 및 굴을 건조시킨다. 그런 후 3일은 초중불, 1일은 중불, 2일은 환불을 때며 마지막 1일은 약 1300℃의 장불을 올린다. 굴의 불을 끈 후 3∼4일 정도 식힌 후 옹기를 굴에서 꺼낸다.

⑦ 유약제작법
약토 60%와 솔잎을 태운 재 40%를 물로 혼합한 후, 약 3일간 삭히고, 삽으로 저어서 모래와 돌을 가라앉게 한 후, 결이 쫌쫌한 채로 흙물을 걸러 유약을 만든다.

(2)옹기의 종류
ㆍ대 옹(大甕) : 큰독 「달리공독」이라고도 부르며 오지로 된 높이 5∼6척이 보통이고 장이나 술을 빚어 넣는데 많이 썼다.
ㆍ중두리 : 대옹보다 작은 독, 높이 2∼3척이며 양편에 손잡이가 달린다.
ㆍ바랭이 : 중두리 보다 작고 배가 볼록한 것
ㆍ물두뭉 : 주로 식수를 담는 것으로 높이 3∼4척이다.
ㆍ소래기 : 대웅, 중두리, 물두뭉 등의 두껑. 물독두껑은 가벼운 나무를 많이 사용 했으나 술독뚜껑은 소래기를 많이 사용했다.
ㆍ두   멍 : 두뭉과 비슷한 것
ㆍ동   이 : 두멍보다 작고 입이 좁으며 허리가 둥글게 부풀어 물긷는데 많이 쓰인다. 가장 작은 것을 「작은 동이」중간치를 「반동이」라고 한다.
ㆍ자배기 : 두멍보다 작고 밑이 얕다. 채소 등을 씻거나 저리는데 쓴다.
ㆍ옹배기 : 자배기보다 작은 것으로 용도도 자배기와 같다.
ㆍ밧두리 : 양념, 꿀 등을 담는 것은 항아리
ㆍ장   군 : 술, 간장, 물 때로는 오줌을 넣는 그릇
ㆍ 오줌장군 : 거름용 오줌만 넣는 장군
(3) 옹기 제작 용구

  각 령(閣令) : 그릇을 만드는 장인(匠人)들이 일하는 곳. 사방 벽의 두께는 1척 내외의 군데군데 창을 내어 볕을 들이고 실내 일부에 온돌을 놓아 그릇을 말리며 겨울 추위를 막기도 한다.

ㆍ 물   레 : 흙이 긴 것을 그릇 모양으로 안팎을 깎는 데 쓴다. 규목으로 만들며 심대는 나무 중 가장 딱딱한 박달나무를 쓴다.
ㆍ 윤대(輪臺) : 물레와 같은 구실을 한다.
ㆍ 안질개 : 장인들이 물레질 할 때 앉는 의자
ㆍ 안증널 : 물레 터 가까이에 말뚝을 박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흙을 이기는데 쓴다.
ㆍ 잔   편 : 흙으로 그릇 모양을 만든 것을 얹어서 운반하기도 하고 말리기도 하는 소나무로 만든 널판길이 6 폭 3∼4 널판지 두께 56푼
ㆍ 땅구멍 : 「귀웅」에 흙과 물을 뒤섞은 것을 땅을 파서 만든 「땅두멍」으로 옮겨 흙을 가라앉혀 쓴다.
ㆍ 귀   웅 : 땅두멍 옆에 놓인 통 흙과 물을 섞는데 쓴다.
ㆍ 방망이 : 옹기등 속의 밑부분을 만들 때, 흙을 두들기는 구실을 한다.
ㆍ 도   개 : 독의 배를 만들 때 안에서 때려 다진다.
ㆍ 지질박 : 자기를 만들때나 작은 그릇을 만들 때, 그 속을 다듬는 나무 조각, 때로는 박조각을 쓰기도 한다.
ㆍ 예   새 : 흙으로 그릇 모양을 만든 다음, 굽을 떼어내기 위하여 쓰는 쇠, 나무로 된 것도 있다.
ㆍ 가리새 : 흙으로 그릇모양을 만들고 마르기 전에 모양을 다듬는 갈퀴 같은 것 : 흙
ㆍ 도침(陶枕) : 흙으로 만든 그릇을 가마에 넣을 때 가마 밑바닥에 성긴 모래를 깔고 그 위에 도침을 놓는다. 그릇을 구울 때 땅바닥에 붙지 않도록 하기 위해 놓는 「대」를 괴는 구실을 한다.
ㆍ   대    : 도침 위에 얹는 것으로 그릇을 구울 때 밑자리 구실을 한다.
ㆍ 가마아궁이 : 가마 첫머리 불을 지피는 구멍을 말한다. 「가마굴」「부엌통」이라고도 한다.
ㆍ 도수리구멍 : 가마 옆구리에 난 구멍으로 이곳을 통하여 장작을 지핀다.
ㆍ 굴  뚝 : 가마 끝에 구멍을 여러 개를 뚫었을 뿐 따로 굴뚝을 세우지 않는다.

3) 영덕대게

  우리 지역 바다에서 산출되는 게의 종류(지역에서 부르고 있는 게의 명칭으로 분류)는 대게, 왕게, 털게, 꽃게, 빵게 등으로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영덕대게(竹蟹)의 명성은 아주 오래되었다. 동해가 생기고 대게의 종자가 여기에 자리잡은 이래 우리 지역에서 산출되었지만, 우리 지역의 고유한 지명을 그 앞에 달고 “영덕대게“라 이름하기 시작한 것은 대개 고려시대부터라고 생각된다.
  그 서식처는 수심이 150m∼250m 연안의 대륙붕이 발달한 지역으로, 축산면 차유리 앞 바다에 널리 형성되어 있는 왕돌잠이 그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남획으로 점차 그 서식처가 수심이 깊은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현재의 냉동, 냉장 기술이 발달되기 전의 옛날에 영덕대게의 유통은 인근지역을 제외한 원거리 지역으로는 대개 포(脯)의 형태로 말려서 거래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것은 조선시대 말기의 학자이며, 문신이던 최영년(崔永年)이 쓴 「해동죽지(海東竹枝)」에 게의 다리 살로 만든 해각포(蟹脚脯) 중에 최고 맛있는 것은 경상북도 영해에서 산출되는 것이라 하는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대게가 일반인들에게 보다 친숙해진 것은 불행히도 일제 강점하이다. 일제가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1900년대 초부터 강구항을 중심으로 그들의 발달된 어구와 어로 기술로 군내 연안에 서식하고 있던 어족들을 마구잡이로 포획하면서 영덕대게도 대량으로 남획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는 그 생산량이 어마어마하여 군내 곳곳에 대게가 쌓일 정도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 1950년대에 들어와서 강구면 오포리의 수산물 가공업체인 「조일산업」에서 대게통조림을 만들면서 그 명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대게와 더불어 많이 잡히고 있는 홍게가 있는데, 이는 대게 서식지보다 수심이 깊은 곳인 대략 300m∼ 3000m에 심해에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그 맛은 대게보다 짭짤한 맛이 난다. 그러나 대게보다 가격이 저렴하여 수요가 상당히 많다.
  위의 표는 1990년대 이후 군내에서 위판된 대게와 홍게의 현황이다.

4) 영덕복숭아

  영덕의 특산물 중의 하나가 복숭아이다. 길게 흘러 동해로 빠져 들어가는 오십천 유역을 따라 끝없이 펼쳐져 있는 복숭아 밭은 그 꽃의 계절인 4월이면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영덕에 복숭아 밭이 대규모로 조성된 것은 사라호 태풍으로 오십천 유역이 범람하여 대부분의 농경지가 수몰되고, 사질토가 쌓여 농사 짓기가 부적절한 땅으로 바뀌자 일부 농가에서 대체작목으로 복숭아 나무를 심은데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62년부터 강구의 조일산업에서 복숭아 통조림을 생산하면서 판로가 보장되자 점차 그 식재 범위가 넓어져, 1970년에는 영덕읍 화개리를 중심으로 영덕복숭아단지회가 결성되었으며, 1972년부터는 복숭아 납품이 조일산업 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복숭아 재배는 지역 농가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영덕복숭아는 처음에는 영덕읍 화개리, 구미리, 천전리, 덕곡리 등을 중심으로 재배되기 시작하여 강구면의 금호리, 지품면의 삼화리, 오천리, 신양리, 달산면의 대지리, 흥기리, 영해면, 축산면, 창수면 등으로 점차 그 식재 범위가 확대되어 1999년 현재 군내의 많은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어 명실상부하게 군을 대표하는 특산물로 자리잡고 있다.
  다음은 1998년 현재 군내에서 생산된 복숭아의 생산현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