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관광 특산물
1) 지품 도계 한지(韓紙)
한지는 조선종이, 참종이, 문종이 등으로 불리며, 일찍부터 중요한 특산물, 혹은 공물, 혹은 대외 무역물품으로 그 위치를 지켜왔으며, 일반 민중들과 선비들의 문방사우 중의 하나로서도 우리들과 친숙하여 왔다.
특히 우리 지역은 옛부터 한지의 원료가 되는 닥(楮)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양질의 토질과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기 위한 맑은 물이 풍부한 자연적 여건에 따라 한지의 생산량이 많았는데, 군내의 대표적인 생산지로는 지품면의 도계리였다.
도계한지를 포함하여 군내에서 생산되었던 한지는 조선조 이래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중국 본토와 만주지역, 그리고 일본지역에까지 수출되는 대표적인 무역품으로도 이름이 높았는데, 이러한 사실은 도내 한지 생산에 대한 통계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일제시대의 자료를 보면 당시 영덕의 한지 생산 정도를 알 수 있다.
일제하인 1931년 현재 경상북도 전체의 한지 수확고가 756,730관, 금액이 300,300,070원이었는데, 경주가 310,139관에 152,569,500원을 생산하여 1등 생산지이고, 영덕은 155,226관에 45,912,600원으로 도내에서 경주에 이어 2위의 생산지로 나타나고 있다. 이때 영덕에서 생산된 대부분의 한지는 화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량의 한지를 생산하던 공방은 대부분이 없어지고 지품면 도계리에 1개소의 공방만이 남아 과거 영덕한지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도계한지의 시작은 조선 현종 연간으로 처음 한지를 만들기 시작한 이는 지촌 (芝村) 김연생(金連生,1658∼1740)이다. 김연생은 사육신의 한 분인 백촌 김문기공의 후손으로 청송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모친을 모시고 두 동생과 함께 지품면 도계리로 이거, 정착하면서 한지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도계리는 낙동정맥의 중심에 우뚝 선 맹동산의 한자락으로 토질이 사질토여서 닥나무가 자라기 좋은 지역이었으며, 오십천 상류지역의 한 지류로써 수량이 풍부하고, 수질이 좋아 한지 생산에 더 할 수 없는 적지였다. 따라서 김연생은 종이 만드는 일을 생활의 수단으로 삼게 되었으며, 이후 도계리는 한지 생산이 주업이 된 지향(紙鄕)으로써 유명해지기 시작하였다.
한지의 수요가 많고 가격이 좋을 때인 조선조 말기와 일제 강점기 초기에는 전국의 수요를 맞추기 위하여 도계천변 일대에 한지공방이 빽빽이 들어 서 있었고, 겨울철에는 닥무지의 증기로 아침이 열리고 닥 깍는 소리에 밤이 깊어 갈 정도였으며, 혹 봄날에 종이 뜨기를 할 때 화전민들이 태우는 산불의 불티가 날아들까봐 영덕 현청에서 도계리 일대의 화전을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한다.
현재 도계한지의 계승자는 1대 김연생 이래 11대인 김진석(金鎭錫)이 300여년의 가업을 이어 가고 있다. 2대 김의선(金儀善), 3대 김귀원(金貴元), 4대 김운봉(金雲鳳), 5대 김여만(金麗萬), 6대 김익선(金益善), 7대 김성구(金聲九), 8대 김의권(金義權), 9대 김형룡(金炯龍), 10대 김일규(金一圭)로 이어져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11대째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김진석이 전통한지의 보존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1972년 12월 30일에는 상공부 지정 제120호 새마을 공장으로 지정받았으며, 1983년 6월 13일에는 상공부 지정 제83-51호로 공예품 전문 생산업체(한지부문)에 지정되었으며, 1995년 4월 26일에는 영덕군 지정 도계한지 특산단지로 지정받아 전통한지 생산을 계속하고 있으며, 직영판매, 우편주문판매 등의 다양한 판매망을 통하여 판로의 개척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대개 한지의 제조과정은 오늘날 생산되는 종이의 제조공정과 달리 13단계의 공정과정과 수작업이 필요로 하는데다 작업의 특성상 많은 일손과 기술적인 숙련도를 요구하고 있어, 그 제조과정이 쉽지 않을뿐더러 제조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도 없어 겨우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다음은 지품면 도계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지 제조과정과 한지 제조에 쓰이는 공구, 그리고 한지 제조과정에 따른 용어들을 살펴 본 것이다.
(1) 한지 제조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