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제2공화국시대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면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국민의 엄청난 저항이 시작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대구와 마산에서 봉기한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서울로 역확산되면서 마침내 자유당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제1공화국의 수반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4.19의거로 발전되어 우리나라 역사상 민권(民權)이 관권(官權)에 대항하여 승리한 최초의 쾌거인 4.19혁명을 가져왔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인 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시위가 계속되자 4월 27일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는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집권당인 자유당도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과 함께 같이 몰락하였다.
국회에 제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의 의결에 따라 수리되어 제1공화국은 끝나고 제2공화국시대의 막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아닌 시위에 따른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정권의 교체와 지도자 1인의 교체에 따라 1개 당(黨)의 운명이 결정되는 정치현실은 다소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한국의 국가통치권의 행사와 정치가 제도와 정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져 온 역사를 만든 시초로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특정 정당의 수장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정권 자체가 명멸하는 것은 그 이후 한국정치사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 되었다.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4개월 여간의 기간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에 의하여 통치되다가 마침내 민주당이 주축이 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는데, 제2공화국은 1960년 6월 15일 국회에서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구성된 제4대 국회가 제2공화국의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정하고, 양원제를 채택하여 제2공화국의 기초를 닦은 후 자진해산하고, 동년 7월 29일에는 새로이 바뀐 법률에 의하여 제5대 민의원과 최초의 참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민주당의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총선에 압승한 민주당은 8월 13일에 민주당내의 신파(新派)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여 내각의 책임수반으로 하였으며,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제2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수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거전부터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 집권대결을 벌이며 정권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려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던 민주당내의 파벌경쟁은 제2공화국 탄생 이후의 험난한 정치여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결국 새롭게 탄생한 민주당의 제2공화국은 결국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는 내홍(內訌)을 겪으면서 1961년 2월 20일에는 급기야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구파(舊派)들이 별도의 신민당을 창당하는 지경에 이르러 그 갈등은 극에 이르렀다.
결국 내각제 제도에 익숙지 못한 정치지도자들의 역량부족과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서 정권을 선점하려는 당내의 갈등 속에서 사회 전반적 분위기는 혼란과 무질서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대결과 불신에 따라 갈등을 증폭시켜 가던 민주당 정권은 사회 전체에 확산 되어가기 시작한 혼돈과 무질서를 지켜보던 군부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다.
제2공화국의 몰락은 내각제 도입에 따른 지배구조의 양분과 통치권의 이원화 등과 집권 민주당내 신·구파의 갈등,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억눌렸던 사회적 욕구의 분출 등이 사회전반에 확산되면서 무질서와 혼란과 혼돈이 극에 달하여 국민들의 의식 속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권위있는 세력이 나서주길 기대하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를 받으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이 정권을 탈취하였다. 따라서 민주당 정권은 불과 8개월만에 그들의 경륜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1961년 5월 16일부터 쿠데타의 지도자인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7개월 여의 기간동안 군정을 실시하면서 지속적인 정권유지를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여 준비한 뒤 1963년 12월 27일 정권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였다.
군정의 쿠데타 주도자들은 1962년 12월 17일에 국민투표에 의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1963년 10월 15일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이외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각축을 벌였다. 선거결과로 군정의 지도자이던 박정희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4.19혁명에서 제2공화국을 거쳐 군정기간에 이르는 제2공화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제3공화국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르렀다.
제2공화국은 국회제도를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나누어 선거를 치루었는데, 참의원 선거는 시·도를 1개 선거구로 하는 대선거구제였으며, 참의원의 임기도 1·2부로 나누어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거제도에 의하여 경상북도 선거구에서는 1·2부 각각 4명씩 8명의 참의원을 선출하였으며, 이때 1부 의원의 임기는 6년이었으며, 2부 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하였다.
이때 우리 지역과 연고가 있는 김장섭 후보가 당시 경상북도의 제2부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당시에 실시되었던 제5대 민의원선거에는 모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당시 영덕지역의 민의원 선거에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김영수 후보가 김병윤 후보와 신삼휴 후보를 24,467표로 물리치고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표 <4-19>는 제2공화국 때에 실시되었던 우리 지역의 제5대 민의원 선거결과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선된 5대 민의원들은 다음해 5.16 쿠데타에 의하여 국회 자체가 해산되게 되어 단명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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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에서도 지방자치의 실시를 위하여 도지사 및 시·읍·면장, 도의원·시·읍·면의원 등의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이후 1961년 5월 16일의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모든 것이 무산되고 본격적인 지방자치는 90년대 이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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