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절 세시풍속(歲時風俗)의 변천(變遷)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세시풍속은 농경의례(農耕儀禮)에 맞추어 풍농(豊農)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 자체에서 인화(隣和)와 유오(遊娛)의 성격을 지닌 연중행사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1910년부터 일제(日帝)의 강권통치(强權統治)로 우리의 고유 풍속은 겨우 명맥한 유지해 오다가 광복(光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한국전쟁의 쓰라린 참상을 겪은 후, 곧이어 서구풍(西歐風)이 물밀듯이 밀려오면서 점차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한편 정부에서는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전통적인 세시풍속을 현대적 의미로 부활하기 위하여 3·1절, 제헌절(制憲節), 광복절(光復節), 개천절(開天節) 등 국가적인 경축행사를 실시하여, 이 날들은 휴일로 정하여 행사의 의미를 되새기며 하루를 즐기도록 하고 있으며, 또 4월 8일의 초파일과 12월 25일 그리스도의 탄생일 등의 서구에서 들어 온 종교의 창시자들을 기리는 날들도 휴일로 정하여 역시 하루를 즐기도록 하였다.
  한편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도 종래의 농경 중심의 농업사회에서 산업과 상공업이 중심이 되는 산업사회로 사회체제가 전환되는 1960년대 이후부터는 농촌으로부터의 대규모의 인구가 대도시로 유출되는 도시집중 현상이 나타나는 한편, 라디오, 텔레비젼 등이 농촌에 보급되고 또 정부 주도하에 근대화 운동과 70년대 새마을 운동 등이 전개되자 고래의 세시풍속은 하나 둘씩 사라지게 되어, 현재는 설과 추석 정도만 중요한 세시풍속으로 남아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고래의 세시풍속의 잔흔이 남아 있다면, 한식(寒食) 정도로 이날이 4월 5일의 식목일과 겹쳐지면, 조상의 산소를 찾아 성묘(省墓)하고 하루를 즐기기도하고 있으며, 그밖에 6월 6일을 현충일(顯忠日)로 정하여 우국충정으로 산화한 선조들을 추모하고 있으며,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여 전국민에게 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1) 설

  설은 광복 이후 1950년대부터 정부 당국의 2중과세(二重過歲)의 금지로 일제(日帝)에 이어 다시 수난(受難)을 맞았다. 1950년대에는 신생활운동을, 1960년대에는 근대화운동을 그리고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을 범국민운동으로 펼쳐 양력단일과세(陽曆單一過歲)를 권장하였다.
  그러나 천년이 넘도록 겨레와 함께 한 설은 당국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으며, 설과 관련하여 1950년대에 당시 국민생활의 흐름을 대변하여 구정(舊正:설) 과세를 허락하도록 호소하는 국내 언론기관의 논설이 각 신문지상에 실렸는데, 이 중 몇몇 신문의 논설 구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력과세(陽曆過歲)를 주장하는 관계 당국도 잠시 그 소리를 멈추고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신생활운동(新生活運動)이 국민들의 생활감정 속에 젖어들어 뿌리를 박을 수 있을 것인지? 한편 국민들도 위선 구미(歐美)에 선다 해서 길을 두고 뫼(山)로 갈 것인지?

< 한국일보(韓國日報), 1955년 1월 26일자>

이중과세(二重過歲)를 금(禁)한다. 구력(舊曆)을 못쓰게 한다. 치안국(治安局)에서는 떡방아를 못 찧게 한다. 해도 설은 역시 음력설이라야 「우리 설」같이 느껴지는 풍습을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 조선일보(朝鮮日報) 1959년 2월 8일자>

  1960년대 군사정권(軍事政權)이 시작되면서부터 구정에 대한 억압은 더욱 심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에도 계속 되었다. 그래도 국민들은 이날 일찍 일어나 조용히 윗어른께 세배와 조상께 차례(茶禮)만을 올리고 급히 서둘러 각각 생업(生業)에 종사해야 했다. 그
뒤 1991년부터 앞서 태양력(太陽曆)인 신정(新正)에 비유해서 태음력(太陰曆)인 구정(舊正)이라 호칭해 오던 것을 우리 고유의 옛 호칭인 “설”로 환원하고 연휴(年休)로 정하여, 이 때부터 민족의 명절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추석(秋夕)

  추석은 예나 다름없이 우리 고유 명절 중 가장 큰 명절로 민족의 대이동이라 할 만큼 도시로 나갔던 사람들은 고향을 찾아 그립던 부모님과 친척을 뵈옵고 천신(薦神)을 하기도 하고 또는 바로 조상 묘소(墓所)에 성묘(省墓)를 하기도 한다. 시장의 방앗간과 옷가게, 어물전, 각 가게는 추석 며칠 전부터 흥청거렸으며 적막감 마저 감돌던 농촌 골목에는 주차장을 방불케 할만큼 진풍경을 이루며, 집집마다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그러나 6·25의 전화(戰禍, 1950∼53)로 육친(肉親)을 잃고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우리 영덕에 있는 실향인(失鄕人)들은 고향을 떠난지 4∼50년이 되는 오늘까지도 중천(中天)에 솟아오른 둥근 달을 보고 괴로워하기도 하고 자위(自慰)도 할 것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아픔이 아니고 우리들 영덕인 모두가 공동으로 나누어 가져야 할 아픔인 것이다.

(3) 석탄일(釋誕日)과 성탄일(聖誕日)

  석탄일은 초파일로 더 알려져 있다.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탄생일로 일명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한다. 이날 불교도들은 인근 사찰을 찾아 소원성취를 위해 등(燈)을 달고 불공(佛供)을 드리며 일반인들도 휴일로 정해짐에 따라 가족과 함께 가까운 절이나 경치 좋은 곳을 찾아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있다. 이 석탄일은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양력 세모(歲暮)에 느낄 수 있는 풍속은 양력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인 성탄일이다. 양력 12월 중순쯤 되면 개신교(改新敎) 신도들이 아닌 학생들과 일반인까지도 크리스마스(christmax) 카드(card)를 보내기 위한 준비에 바쁘다. 크리스마스 카드가 일반 대중에게 관심거리가 된 것은 광복 이후부터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christ)의 매스(mass)에서 온 말이며 본디 태양의 신생(新生)을 축하하는 로마인의 동지제(冬至祭)였으며 선물, 크리스마스 트리, 캐럴(carol)에 의한 축하는 유럽 각지의 신화와 풍습에 기원하며 산타 클로즈의 이름으로 선물하는 풍습은 약 3
백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주한 신교도(新敎徒)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다.
  2월 영둥, 3월 삼진 등 달마다 있는 우리 고유 명절은 일제(日帝)의 민족문화 말살정책, 전쟁의 상처, 서구풍의 유입 등 여러가지 영향을 받아 사라지게 되었다.
  수천여년을 겨레와 함께 맥락을 같이 해 온 우리의 고유 세시풍속들이,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그 자취를 감추고 있어 매우 안타깝다.

參考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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