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 전의 지역상황
1949년 8월부터 시작된 김달삼부대의 준동은 지역 곳곳에서 무장전투를 가져와 무장공비측과 토벌대 상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 왔으며,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살과 민간의 가옥과 재산의 파괴 또한 심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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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덕지역 전투
1) 아군의 방어전 무방비 상태의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영덕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7월초이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동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오던 북한군 제5사단이 울진 부근에서 국군에 의하여 그 기세가 저지되면서 잠시 멈추게 되는데, 6월 29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는 울진에 도착한 후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약 15일 정도 적의 진공을 지연시킨 후 평해를 거쳐 7월 12일에 영덕으로 철수하여 영덕 부근에 연대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
이와같이 적들은 영덕강구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무려 15여일 동안에 20여 차례의 공격을 시도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는데 영덕경찰서 부대와 강원도경 부대는 332고지 및 칠령 주변을 피로 물들이며 적의 공격을 용감하게 막아내었는데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8월 9일에 강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날 미공군의 폭격과 미해군의 함포 사격, 제3사단의 맹렬한 공격으로 적은 또 다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이튿날인 10일에는 다시 강구 북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사살 350명, 포로 82명, 박격포 3문, 중기 5정, 경기 10정, 소총 86정 노획 등의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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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경찰부대의 전투력에 힘입어 군경은 다시 영덕을 탈환하였으나 8월 10일에 적의 일부 병력이 포항과 흥해에 진출하여 영덕지구를 사수하던 아군 제3사단의 후방과 측면을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아군측은 일부의 병력을 남정면 장사리에 배치하여 교두보를 구축하였지만, 영덕과 장사에 이르는 해안선에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적들은 더욱 더 공격을 집중하여 마침내 8월 14일 적의 반격에 후퇴하여 영덕을 포기하고 강구를 거쳐 남정면 장사리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완전히 고립되어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전황을 파악한 미8군 워커중장은 제3사단 및 경찰부대를 해상으로 철수시켜서 전열을 정비시킨 후 다시 반격하고자 하여 8월 15일 해상철수 명령을 하달하고 8월 17일 새벽 6시를 기하여 포항시 송라면 독석리 해안에 4대의 LST를 접안시켜 제3사단 병력 9,000여명, 영덕경찰서 경찰부대를 포함한 경찰부대원 1,200여명, 공무원 및 노무자, 피난민 등 1,000여명을 승선시켜 새벽 7시에 독석리 해변을 떠나 무사히 구룡포에 상륙하여 포항의 적을 격퇴하는데 큰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7월 12일에서 8월 17일에 이르는 한달여간에 이르는 영덕지구의 방어전투는 끝이 났으며, 이후 영덕지역은 9월 24일 국군 제3사단 26연대가 오후 5시에 남호동에 진출할 때까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 지품 삼화동 전투 개전초에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오던 북한군 제5사단 이외에도 북한 제766유격부대가 이미 영덕지역으로 침투하여 영덕에서 안강지구에 이르는 아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따라서 7월 12일 울진에서 영덕으로 후퇴한 제3사단 23연대장은 적 정규군의 공격이 있기 전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7월 15일 아침 35명의 고참 중대원을 선발하여 박관영 상사로 하여금 지휘토록 하여 화림산 좌단(左端)으로부터 34번 도로 북방일대에서 주간에는 수색정찰, 야간에는 매복으로 적 유격대의 영덕침입을 저지하고 이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
(2) 축산 도곡지구 적 전차 습격전
1950년 7월 하순경에는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선까지 진출하여 아군 제3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공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3사단 지휘부는 서울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던 22연대를 사단에 복귀시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181고지를 점령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22연대를 복귀시켜 적을 압박하여 마침내 181고지 일대를 쟁탈하여 영덕지구 방어를 위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적 전차에 의하여 입은 피해가 엄청났다. 따라서 22연대장은 이같은 적 전차를 없애지 않고는 아군의 작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이들 전차의 파괴를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
이들은 침투 도중 전방 약 3㎞ 지점에서 적 1개 소대 규모가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3면에서 포위 공격하여 4명을 제외한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생포된 4명 중 3명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에 강제로 징집된 신병으로 아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겠다고 하여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적의 전차대에 소속된 정찰병으로 전차의 움직임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어 특공작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공대원들은 포로를 앞세우고 적 전차 진지까지 무사히 접근하였다. 적 전차 진지에는 3대의 전차가 있었다. 이 대장은 3명의 포로를 1명씩 각조에 배치하여 각조가 1대씩 적 전차를 파괴하도록 지시한 후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각조의 조장은 먼저 포로를 이용하여 전차병을 유인하여 전차의 해치를 열도록 하였으며, 적 전차병이 해치를 열면 포탑 옆에 숨어있던 특공대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해치 안으로 집어넣어 적 전차 3대를 모두 파괴시켰다. 임무를 완수한 특공대는 재빨리 계획된 철수로를 따라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도중 상곡재 부근의 138고지 동쪽에서 적의 경계부대에 발각되어 치열한 접전 끝에 후미의 3조는 행방불명이 되고 1,2조만 귀환하였다. 그러나 7월 29일 여명을 기하여 138고지 탈환을 위한 특공대를 편성한다는 말을 들은 이명수 상사는 또 다시 특공작전에 자원하여 전날의 특공작전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던 부하 3명을 구출하여 귀환하였다. 그림 〈2-4〉는 이날의 특공작전을 설명해주는 작전상황도이다. 2) 아군의 반격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파죽지세로 밀려오던 북한군에 대하여 아군은 지연작전을 펼치며 포항과 낙동강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과의 일진일퇴의 공방을 치르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맥아더 장군이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
동년 8월 17일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독석리에서 해상으로 철수한 제3사단과 영덕 및 강원도 경찰부대는 구룡포에 상륙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후 포항지역에 투입되어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축인 형산강 일대에서 적 5사단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대치하고 있었다. 반격전이 시작되자 3사단 23연대와 26연대, 22연대는 19일 새벽을 기하여 일시에 형산강을 도하하여 적을 압박하기 시작하여 이날 오후에 포항의 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포항을 탈환하였다. 포항을 탈환한 3사단은 전열을 정비한 후 26연대를 선봉으로 23일 새벽부터 공격전을 시작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격파하고 24일 17:00에는 남정면 남호리까지 진출하여 영덕지역의 적의 부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22연대도 26연대의 후속부대로 잔존한 적을 소탕하면서 이날 17:00에 남정면 장사리에 집결하여 영덕지역의 적의 정규군을 모두 물리치고 영덕지역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때가 1950년 9월 25일이었다. 이로써 영덕지역은 영덕지역에서 적의 진격을 방어하고 있던 제3사단이 독석리에서 해상으로 철수한 1950년 8월 17일부터 국군 제3사단이 영덕을 다시 탈환한 9월 25일까지 적의 점령 아래에 놓여 있었다. (1) 장사상륙작전 ① 상륙부대의 편성
이상과 같이 편성된 유격대는 1개 연대병력의 약 180명으로 구성하고 지휘관은 임시계급으로 대령 혹은 중령으로 보임(補任)하여 사단의 체제를 갖추었으며, 일반 사병들도 임의대로 계급을 부착하도록 하였다. ② 상륙작전과 유격대의 활약
따라서 9월 14일 새벽을 기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이날 종일 전투를 벌여 적을 완전히 패주시키며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아군은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다. ③ 적의 역습과 유격대의 철수작전 |
④ 상륙작전의 전과
위와 같이 1950년 9월 14일 새벽부터 19일 15:30분경까지 6일여 동안 장사리 일대에서 활약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의 전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 해병대의 영덕지구 작전 ① 작전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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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양민의 피해
오늘날의 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의 형태로 실제 전투행위에 참여하는 군인들 이외에 많은 민간인들의 물적, 인적 피해를 가져온다. 특히 전쟁전부터 좌와 우로 나누어 사상대립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공방을 벌여 온 한반도에서는 6. 25라는 비극적인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양민들의 학살이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도 예외없이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1) 영덕읍 화개 2리 묏골사건 속칭 묏골사건은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회원 및 회원의 가족 약 160여명을 조사 및 교육의 명목으로 2일에서 1주일 정도 교육시킨 후 영덕읍 남석리 소재의 곡물창고에 1∼2일 감금시킨 후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맹호부대 김종원 연대장의 명령에 의하여 동년 7월 14일 화개 2리 묏골로 끌고 가서 집단으로 총살한 사건이다. |
조사에 참가한 조사자의 의견에 “인민군에 협조했거나 보도연맹 등에 가입한 사람들을잡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당시 상황이 밤에는 인민군에 협조하고 낮에는 국군에 협조해야 살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죄없는 양민의 희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사건 당시에 억울한 양민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집단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표〈2 12〉는 경상북도의회의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에 의하여 밝혀진 묏골사건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인사의 명단이다. 2) 지품면 원전리 각별계곡 사건 지품면 원전리 각별계곡 사건은 6.25전쟁 전의 공비토벌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49년 12월부터 청송 주왕산 부근의 산악지대에서 공비들을 추적 소탕작전을 벌이던 아군 1개 중대가 12월 31일 지품면 원전리의 원전초등학교에 주둔하면서 원전 인근의 주민들을 체포하여 공비들의 은신처를 밝히기 위한 조사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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