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쟁 전의 지역상황

  1949년 8월부터 시작된 김달삼부대의 준동은 지역 곳곳에서 무장전투를 가져와 무장공비측과 토벌대 상방간에 많은 피해를 가져 왔으며, 무고한 민간인들의 피살과 민간의 가옥과 재산의 파괴 또한 심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지역에서 많은 비극을 가져다 준 제3병단의 대장인 김달삼이 아군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점차 북으로 퇴각하다가 1950년 3월에 강원도 정선군 군북면 전투에서 사살되자( 동년 4월 28일 삼척에서 사살되었다는 설도 있음) 지역에서의 무장공비의 활동은 거의 약화되게 되었다. 그러나 김달삼부대의 중화기 중대를 이끌고 있던 강구면 금진동 출신의 박종화(朴鍾和)가 잔여부대를 모아 강철부대라 명명하고 동대산과 대둔산을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벌여 지역에서 또 하나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도 1950년 5월에 생포되어 이후에 이들 무장공비들은 뿔뿔이 흩어진 채 겨우 관공서나 민가를 습격하는 정도의 소란을 피웠으나, 6.25한국전쟁이 일어나기까지는 지역에서 무장공비의 준동은 거의 미미한 수준으로 되었다. 이는 곧 이어 일어날 민족대재앙인 6.25한국전쟁의 전조를 알려 주는 고요였다.
  6.25한국전쟁 직전의 대외정세는 그간 미궁 속에 있던 중국 대륙의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1949년에 가서 마침내 승리하여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모험심을 부추키기 시작하였고, 이듬해인 1950년 1월 12일에는 미국의 국무장관인 에치슨이 미국의 방위선에 한국을 제외한다는 발언을 하여 이들을 더욱 고무시켰으며, 이어서 실시된 5월 30일의 제2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무소속이 대거 당선되는 등 국내외 정세가 혼란하여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다시없는 무력침공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상황이 되어 갔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북한의 김일성은 남한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하여 그간 비밀리에 준비하였던 무장력을 앞세우고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선 전지역에 걸쳐 남침을 감행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까지 3년 1개월 동안 남북한 및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하여 상방간에 무수히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는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하여 무려 150여 만명이 전사 또는 사망하였으며, 360여 만명의 사람이 중상 혹은 경상에 이르는 부상을 입었으며, 남북한 모두 1,000만 이산가족을 만들어 1999년 12월 31일 현재에도 그 고통을 지속시키고 있다. 그 외에 물적 피해는 너무나 엄청났다. 전국의 가옥 3분의 1이 파괴되어 수많은 이재민을 양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업시설도 2분의 1이 파괴되어 전후에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고통을 겪었으며, 남북한 모두가 이와 같은 전쟁 후유증을 극복하는데 전후 수십년의 세월을 허비하여야 했다.
  우리 지역도 전쟁과 전쟁전의 좌우익 갈등으로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광복 이후로부터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 동년 9월 25일 국군에 의하여 영덕지역이 탈환될 때까지 우리 지역의 피해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적측 피해 〉
(1945년 8월 15일∼ 1950년 7월 12일까지)
공비사살 : 86명
공비생포 : 229명

〈아군측 피해 〉
경찰관전사 : 33명
청년단원순직자 : 26명

〈아군측 피해 〉
(1950년 7월 12일∼ 1950년 9월 25일까지)
영덕경찰서 경찰관 전사 : 10명
영덕경찰서 경찰관 부상자 : 40명
일반군민 사망자 : 563명
일반군민 부상자 : 193명
납치 : 81명
학살 : 73명
행방불명 : 603

2. 영덕지역 전투

1) 아군의 방어전

  무방비 상태의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이 영덕지역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50년 7월초이다.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독전으로 동해안을 따라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오던 북한군 제5사단이 울진 부근에서 국군에 의하여 그 기세가 저지되면서 잠시 멈추게 되는데, 6월 29일 국군 제3사단 23연대는 울진에 도착한 후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약 15일 정도 적의 진공을 지연시킨 후 평해를 거쳐 7월 12일에 영덕으로 철수하여 영덕 부근에 연대 전투지휘소를 설치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7월 14일에는 먼저 설치되어 있던 제3사단 지휘소를 포항으로 옮긴 후 미8군의 해·공군의 지원을 받아 영덕지구를 고수하기로 결정하고는 탄탄한 방어막을 구축하여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 제5군단장은 국군의 저항에 부딪혀 진격이 늦은 제5사단 지휘부를 질책하는 한편, 북한군 제12사단으로 하여금 안동을 거쳐 포항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하달하고는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러한 제12사단의 안동을 거쳐 포항을 점령하는 공격전술은 영덕지구에서 강력하게 북한군의 침공을 막고 있는 국군 제3사단의 후방을 차단하여 사단을 고립시키는 전술이었다.
  영덕지역에서 아군과 대치하고 있던 북한군 제5사단은 상부의 질책과 제12사단의 안동을 우회한 포항 점령의 작전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7월 17일 여명을 기하여 영덕 북방 화수동에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던 국군 제23연대를 집중 공격하여 왔다. 적의 맹렬한 공격에 제23연대는 영덕을 적의 수중에 넘기고 영덕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영덕이 안동과 영양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포항방어를 위한 최일선의 전초기지로써 그 중요성이 높아 국군과 미8군은 영덕을 재탈환하기로 결정하고, 제3사단은 미8군으로부터 105㎜ 곡사포 부대를 지원 받은 후, 7월 18일 새벽에 미 전투기의 폭격과 미 전함의 함포사격의 지원 아래에서 제23연대와 독립대대가 영덕탈환 작전을 펼쳐 영덕을 다시 탈환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화림산 쪽으로 패주하였다.
  그러나 이튿날인 7월 19일에는 전열을 정비한 북한군은 다시 영덕을 공격하여 강구에까지 진출하여 강구와 영덕의 중간에 위치한 181고지, 즉 금호리 뒷산 일대를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공방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181고지를 선점하기 위한 공방은 이후 7월 29일까지 계속되었으며, 7월 29일 아군은 영덕을 세번째 탈환하고 영덕 북쪽 2㎞선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이에 앞서 북한군이 영덕­강구선에 이를 때 아군측은 영덕경찰서 경찰부대와 강원도경 소속의 제1, 제2대대가 국군 제3사단과 합동으로 북한군 제5사단의 진격을 저지하고 있었는데, 7월 27일에 북한군은 아군의 강구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강구정면으로 공격함과 동시에 달산방면으로 우회공격을 시도하였다.
  달산방면의 332고지(현 흥기3리 뒤산)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해안쪽의 제3사단과 함께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던 경찰부대는 적의 맹렬한 공격에 대하여 해안선의 아군과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와같이 적들은 영덕­강구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무려 15여일 동안에 20여 차례의 공격을 시도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는데 영덕경찰서 부대와 강원도경 부대는 332고지 및 칠령 주변을 피로 물들이며 적의 공격을 용감하게 막아내었는데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8월 9일에 강구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날 미공군의 폭격과 미해군의 함포 사격, 제3사단의 맹렬한 공격으로 적은 또 다시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이튿날인 10일에는 다시 강구 북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적사살 350명, 포로 82명, 박격포 3문, 중기 5정, 경기 10정, 소총 86정 노획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경찰부대의 전투력에 힘입어 군경은 다시 영덕을 탈환하였으나 8월 10일에 적의 일부 병력이 포항과 흥해에 진출하여 영덕지구를 사수하던 아군 제3사단의 후방과 측면을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아군측은 일부의 병력을 남정면 장사리에 배치하여 교두보를 구축하였지만, 영덕과 장사에 이르는 해안선에 고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안 적들은 더욱 더 공격을 집중하여 마침내 8월 14일 적의 반격에 후퇴하여 영덕을 포기하고 강구를 거쳐 남정면 장사리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으나, 완전히 고립되어 진퇴양난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전황을 파악한 미8군 워커중장은 제3사단 및 경찰부대를 해상으로 철수시켜서 전열을 정비시킨 후 다시 반격하고자 하여 8월 15일 해상철수 명령을 하달하고 8월 17일 새벽 6시를 기하여 포항시 송라면 독석리 해안에 4대의 LST를 접안시켜 제3사단 병력 9,000여명, 영덕경찰서 경찰부대를 포함한 경찰부대원 1,200여명, 공무원 및 노무자, 피난민 등 1,000여명을 승선시켜 새벽 7시에 독석리 해변을 떠나 무사히 구룡포에 상륙하여 포항의 적을 격퇴하는데 큰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7월 12일에서 8월 17일에 이르는 한달여간에 이르는 영덕지구의 방어전투는 끝이 났으며, 이후 영덕지역은 9월 24일 국군 제3사단 26연대가 오후 5시에 남호동에 진출할 때까지 북한군 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 지품 삼화동 전투

  개전초에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오던 북한군 제5사단 이외에도 북한 제766유격부대가 이미 영덕지역으로 침투하여 영덕에서 안강지구에 이르는 아군의 후방지역을 교란하고 있었다. 따라서 7월 12일 울진에서 영덕으로 후퇴한 제3사단 23연대장은 적 정규군의 공격이 있기 전에 후방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7월 15일 아침 35명의 고참 중대원을 선발하여 박관영 상사로 하여금 지휘토록 하여 화림산 좌단(左端)으로부터 34번 도로 북방일대에서 주간에는 수색정찰, 야간에는 매복으로 적 유격대의 영덕침입을 저지하고 이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였다.
  대원들은 첫날 주간에 삼화리 일대를 수색한 후 야간에는 웃김치(金泉), 지금의 오천리 마을 뒤의 오솔길 양측에 매복을 하면서 중기관총 1정을 우측대열 중간에 배치하였다. 밤이 깊어지자 소대 규모의 적들이 오솔길을 따라 접근하여 왔다. 대원들은 적들이 오솔길 가운데 들어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일제히 기습사격을 가하여 완전히 섬멸한 후 적의 증원부대의 공격에 대비 약 4㎞ 동쪽의 화림산 좌단에 새로이 매복을 하고 적의 증원부대를 기다렸다.
  대장인 박관영 상사는 35명의 대원을 3개조로 나누어 “ㄷ”자형으로 배치하고 좌측에 중기관총을, 박관영대장이 배치된 정면에는 2.36인치 로켓포를 배치하고 사격개시 신호는 로켓포의 초탄발사로 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아군의 대유격특공대원(對遊擊特功隊員)들은 적의 증원부대가 다가오도록 조용히 기다렸다.
  이날은 일기가 불순하여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쳐 피로에 누적된 대원들을 괴롭혔으나, 중대장인 박관영 상사의 격려와 조금 전에 있었던 전투로 대원들은 긴장을 한 채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먼동이 터 오를 무렵 풀이 우거진 전방에서 인기척과 함께 적 유격대원들의 조심스런 접근이 포착되었다. 대원들은 초긴장 속에 적 유격대가 “ㄷ”자형의 정면으로 들어 올 때까지 쥐죽은 듯이 기다렸다.
  마침내 적들은 “ㄷ”자형의 올가미 가운데로 들어오자 중대장인 박관영 상사의 로켓포가 섬광을 일으키며 작열하자 전 화기는 포효와 같이 적들을 향하여 발사되어 적들을 섬멸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부 도주하는 적들은 아군과의 백병전에 의하여 모두 섬멸되었다.
  그림 〈2 ­3〉은 이날의 전투상황을 나타내어 주는 작전상황도이다.

(2) 축산 도곡지구 적 전차 습격전

  1950년 7월 하순경에는 북한군 제5사단은 영덕선까지 진출하여 아군 제3사단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공방전을 치르고 있었다. 이때 3사단 지휘부는 서울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던 22연대를 사단에 복귀시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181고지를 점령할 수 있도록 요청하여 22연대를 복귀시켜 적을 압박하여 마침내 181고지 일대를 쟁탈하여 영덕지구 방어를 위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적 전차에 의하여 입은 피해가 엄청났다. 따라서 22연대장은 이같은 적 전차를 없애지 않고는 아군의 작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이들 전차의 파괴를 위한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연대장은 제3대대 12중대 2소대장인 이명수 상사를 특공대장으로 선택하고 2소대에서 6명, 타소대에서 3명의 대원을 엄선하여 3개조의 특공대를 조직하였다. 특공대원들에게 트럭을 적 전차로 가장시켜 철저한 파괴훈련을 시킨 후 7월 28일 21:10에 특공대장 이명수 상사 외 9명의 대원들에게 5발의 수류탄을 분배한 다음 이 대장의 인솔하에 미리 파악한 정보에 따라 적 전차가 있는 지역으로 침투하여 적의 전차 모두를 파괴하도록 명령을 하였다.

  이들은 침투 도중 전방 약 3㎞ 지점에서 적 1개 소대 규모가 휴식을 취하는 것을 보고 3면에서 포위 공격하여 4명을 제외한 전원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생포된 4명 중 3명은 이 지역에서 북한군에 강제로 징집된 신병으로 아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겠다고 하여 포로로 잡았다. 이들은 적의 전차대에 소속된 정찰병으로 전차의 움직임에 대하여 상세히 알고 있어 특공작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특공대원들은 포로를 앞세우고 적 전차 진지까지 무사히 접근하였다. 적 전차 진지에는 3대의 전차가 있었다. 이 대장은 3명의 포로를 1명씩 각조에 배치하여 각조가 1대씩 적 전차를 파괴하도록 지시한 후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각조의 조장은 먼저 포로를 이용하여 전차병을 유인하여 전차의 해치를 열도록 하였으며, 적 전차병이 해치를 열면 포탑 옆에 숨어있던 특공대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해치 안으로 집어넣어 적 전차 3대를 모두 파괴시켰다.
  임무를 완수한 특공대는 재빨리 계획된 철수로를 따라 철수하였다. 그러나 철수도중 상곡재 부근의 138고지 동쪽에서 적의 경계부대에 발각되어 치열한 접전 끝에 후미의 3조는 행방불명이 되고 1,2조만 귀환하였다. 그러나 7월 29일 여명을 기하여 138고지 탈환을 위한 특공대를 편성한다는 말을 들은 이명수 상사는 또 다시 특공작전에 자원하여 전날의 특공작전에 참가하였다가 포로가 되었던 부하 3명을 구출하여 귀환하였다.
  그림 〈2­-4〉는 이날의 특공작전을 설명해주는 작전상황도이다.

2) 아군의 반격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파죽지세로 밀려오던 북한군에 대하여 아군은 지연작전을 펼치며 포항과 낙동강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과의 일진일퇴의 공방을 치르게 되었다. 따라서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져 있어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이 맥아더 장군이 계획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3개월이 되는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에 시작된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서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으로 일시에 이러한 상황은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전선(全戰線)에서 총반격전이 시작되어 북한군을 밀어내기 시작하였는데, 포항을 비롯한 흥해, 영덕지역의 반격부대는 국군 제3사단과 영덕 및 강원도 경찰부대였다.

  동년 8월 17일 포항시 북구 청하면의 독석리에서 해상으로 철수한 제3사단과 영덕 및 강원도 경찰부대는 구룡포에 상륙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후 포항지역에 투입되어 낙동강 방어선의 동부축인 형산강 일대에서 적 5사단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 대치하고 있었다.
  반격전이 시작되자 3사단 23연대와 26연대, 22연대는 19일 새벽을 기하여 일시에 형산강을 도하하여 적을 압박하기 시작하여 이날 오후에 포항의 적을 완전히 물리치고 포항을 탈환하였다. 포항을 탈환한 3사단은 전열을 정비한 후 26연대를 선봉으로 23일 새벽부터 공격전을 시작하여 완강히 저항하는 적을 격파하고 24일 17:00에는 남정면 남호리까지 진출하여 영덕지역의 적의 부대를 압박하기 시작하였으며, 22연대도 26연대의 후속부대로 잔존한 적을 소탕하면서 이날 17:00에 남정면 장사리에 집결하여 영덕지역의 적의 정규군을 모두 물리치고 영덕지역을 완전히 탈환하였다. 이때가 1950년 9월 25일이었다.
  이로써 영덕지역은 영덕지역에서 적의 진격을 방어하고 있던 제3사단이 독석리에서 해상으로 철수한 1950년 8월 17일부터 국군 제3사단이 영덕을 다시 탈환한 9월 25일까지 적의 점령 아래에 놓여 있었다.

(1) 장사상륙작전

  ① 상륙부대의 편성
  1950년 9월 15일 05:00를 기하여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위하여 사전에 적의 경계를 약화시키고 인천지역으로 적의 이동을 저지시키고자 하는 소위 “양동작전”의 하나로 실행된 것이 장사상륙작전이다.
  상륙작전을 담당한 부대는 1950년 8월 24일 대구에서 긴급 모집된 총 772명의 대원을 주축으로 8월 27일 밀양에서 이명흠 소령을 대장으로 하여 창설된 육군본부직할 독립 제1유격대였다. 이들은 이달 31일까지 밀양에서 주둔하며 기초적인 교육을 받은 후 다시 부산의 육군본부 청사로 옮겨 9월 11일까지 기본적인 유격교육을 받으며 유격부대로써의 부대편성을 완료하였는데, 부대는 편의상 정규사단 형태로 편제를 하고 유격부대의 특성상 군번과 계급을 부여하지 않고 임시계급을 부여하여 상륙작전에 대비하였다.
  이때의 부대편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총 사 령 관 : 이 명 흠(현역소령)
전 술 고 문 : 전 성 호(육군대령)
참 모 장 : 백 운 봉(현역대위)
본 부 사 령 : 조 수 경
인 사 참 모 : 이 수 희
작 전 참 모 : 김 응 록
정 보 참 모 : 이 승 삼
군 수 참 모 : 이 태 호
정 훈 부 장 : 서 상 덕
의 무 부 장 : 이 봉 구
통 신 부 장 : 권 찬 두
연 락 관 : 이 홍 배(현역중위)
제28연대장 : 이 영 훈
제29연대장 : 문 학 경
제32연대장 : 이 원 직
제37연대장 : 오 운 환

 이상과 같이 편성된 유격대는 1개 연대병력의 약 180명으로 구성하고 지휘관은 임시계급으로 대령 혹은 중령으로 보임(補任)하여 사단의 체제를 갖추었으며, 일반 사병들도 임의대로 계급을 부착하도록 하였다.

  ② 상륙작전과 유격대의 활약
  1950년 9월 10일의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4호에 의하여 부대편성과 출동준비를 완료한 제1유격대는 남정면 장사리 해안으로 상륙하여 김무정이 이끄는 북한군 제2군단의 후방지역을 교란시켜 적이 인천상륙작전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적이 알더라도 인천지역으로의 적부대의 이동을 지연시키는 임무를 띠고 9월 13일 오전에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출정식을 거행한 후, 14:00에 부산항에서 2,700톤급인 LST 문산호를 타고 상륙지인 장사리 앞바다로 향하였다.
  9월 14일 04:30분경 장사리 해안에 도착한 제1유격대는 적의 경계가 소홀한 일출전(日出前)에 상륙작전을 완료하기로 하고 문산호를 해안의 백사장으로 접안시켰다. 그러나 해안지형에 대한 사전정보의 부족과 태풍 “케지아”의 영향으로 거의 4∼5m에 이르는 높은 파도로 문산호는 해안에 접안하지 못하고 수중의 모래턱에 좌초되어 정상적인 상륙작전은 실행하지도 못한 채 대원들은 좌초된 문산호에 갇혀 적의 집중사격을 받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장사리 주변의 적정은 적 제5사단이 포항 형산강을 중심으로 아군 제3사단과 대치하고 있었으며, 적 5사단의 후방지역은 적의 제101 치안연대가 배치되어 해안경비와 점령지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포항 형산강 일대의 치열한 공방으로 적의 정예부대의 대부분은 여기에 투입되고 후방지역인 영덕지역 및 장사리에는 소수의 경비병력만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적들이 상륙작전을 염두에 두고 해안 모래사장을 따라 구축해 놓은 토치카와 소위 남산이라고 불리는 200고지와 부흥리 뒷편의 야산과 봉황산이라고 불리는 271고지에 설치된 박격포와 직사포는 상륙부대의 최대 위협이 되었다.
  비록 상륙함이 좌초되었더라도 작전명령에 의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우선 특공대를 뽑아 상륙함과 해안의 소나무와 긴 밧줄을 연결시켜 이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특공대에 의하여 밧줄이 연결되자 먼저 작전명령에 따라 제28연대가 먼저 상륙을 감행하여 연대장 이영훈 이하 다수의 사상자를 낸 뒤에 해안지역을 완전히 평정하여 제29, 37, 32연대가 순조로이 상륙할 수 있도록 엄호하였다.
  해안지역에서 아군의 상륙작전을 저지하던 적들을 맹렬한 공격으로 200고지 및 220고지로 패주시키고 해안선에서 교두보를 완전히 구축한 유격대는 작전명령대로 예비대인 37연대를 제외한 3개 연대가 3개 방면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200고지를 공격하였다. 적들도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패색이 짙은 적들은 마침내 서남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하여 9월 14일 14:50분경 아군 32연대에 의하여 200고지는 완전히 점령되었다.
  이로써 해안 교두보와 200고지를 확보하여 지휘부를 설치한 유격대 사령부는 장사리 일대에 산개하여 있는 적의 포진지와 잔여부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4개 연대에서 각 2개 대대를 선발하여 이들을 공격하여 완전히 소탕시킨 후, 이어서 제29연대로 하여금 장사리 북쪽의 중요한 고지인 271고지인 구계리 뒤편의 봉황산을 공격, 점령하도록 하여 영덕으로부터 지원되는 적의 주요 보급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은 일련의 전투과정은 현지 부대장의 판단과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당시 육군본부의 작전명령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작전명령〉
1. 상륙순서는 제28, 29, 37연대, 지휘부, 제32연대 순으로 한다.
2. 제37연대는 제28, 29연대가 상륙을 완료할 때까지 아군 전면에 있는 적 화력진지를 제압, 상륙을 엄호한다.
3. 제28연대는 상륙완료와 동시에 저의 토치카를 파괴하고 200고지의 좌측인 지경리를 수색한 다음 좌단산록(左端山麓)에 진지를 구축 대기하다가 아군의 상륙완료와 동시에 200고지 왼쪽 도로변으로 우회하여 200고지 동남방에서 200고지 정상을 공격하여 적을 섬멸한다.
4. 제29연대는 상륙완료와 동시에 200고지를 우측으로 우회하여 서북방 능선에서 진지를 구축 대기하다가 아군의 상륙완료와 동시에 200고지를 공격 적을 섬멸한다.
5. 제37연대는 상륙완료와 동시에 200고지 동북방에 진지를 구축하고 우측방의 장사리의 적 포진지를 제압하면서 200고지를 공격하는 아군을 엄호한다.
6. 모든 통신은 각 연대에 배속된 SCR 300 무선기를 이용한다.
7. 부대장은 상륙시까지 제29연대와 행동을 같이하고 200고지를 공격시에는 제32연대와 행동을 같이 한다.

 따라서 9월 14일 새벽을 기하여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이날 종일 전투를 벌여 적을 완전히 패주시키며 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아군은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다.

  ③ 적의 역습과 유격대의 철수작전
  아군 유격대가 장사리에 상륙하여 포항지구에서 아군과 접전을 벌이던 적 2군단 5사단의 배후를 공격하는 한편,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당황한 적 2군단장 김무정은 포항지구에 배치된 적 정예부대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차출하여 장사리 방면으로 북상 유격대를 공격토록 하였다.
  한편 유격대는 상륙하자 즉시 장사리 부근의 적을 섬멸하고 그림〈2­5〉의 전투상황도와 같이 28연대와 32연대를 화진리와 화진리 뒤의 219고지까지 전진 배치하여 적의 북상을 저지하는 한편, 29연대를 구계리 뒤의 봉황산까지 진출시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등 적의 역습을 저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9월 16일 19:00경에 남쪽에 배치된 28, 32 연대장으로부터 지휘부로 적의 대부대가 북상한다는 보고가 있어 유격대 대장은 28연대를 125고지 좌측 능선으로 32연대장에게는 219고지 우측 능선으로 이동시키는 한편, 271고지의 29연대의 3개 대대를 차출하여 지휘소 옆의 고지인 220고지 능선에 배치하여 적의 역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이때가 17일 03:00경이었다.
  적은 17일 05:00경부터 아군 32연대가 배치된 219고지 전면으로 공격하여 왔으나 아군의 분투로 40분 정도 교전 끝에 적을 물리쳤으며, 32연대를 돌파하지 못한 적은 재차 125고지에 배치된 28연대 전면으로 공격하여 왔으나 28연대는 집중사격으로 또 다시 남쪽으로 퇴각시켰다.
  적의 북상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아군측에서도 상부와 연락할 SCR 694 장거리 무선기가 상륙작전 당시에 파괴되고 통신반장과 전술고문인 전성호대령, LST 문산호 선장인 황중이 상륙 당시에 전사하여 거의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져 있었다.
  따라서 유격대장은 2명의 연락병을 선발하여 상부에 보내어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17일 일몰을 기하여 28, 32연대에 연락하여 각 1개 대대 병력만 잔류시키고 전원 지휘부가 설치되어 있는 200고지로 이동시켜 재배치 시키고, 지휘부는 좌초된 문산호에다 이동 설치하였는데, 이때가 18일 02:30분경이었다. 현지 지휘부의 이러한 조치는 부득이 할 경우 200고지 뒤편 능선을 타고 동대산에 잠입하여 아군의 반격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하는 것과 이것도 불가능하면 좌초된 문산호와 함께 장렬히 산화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다.
  9월 18일 07:40분 경에는 남아있던 28, 32연대의 잔류부대를 완전히 철수시켜 200고지 주변에 포진시켜 적과의 최후의 일전을 기다렸다. 적은 18일 09:00시를 기하여 선발대를 앞세우고 조심스레 200고지를 공격하여 200고지 서남방 능선을 타고 200고지 정상을 점령하고자 하였다. 아군의 맹렬한 사격으로 적의 공격은 일단 멈추었으나 아군은 남아있는 실탄으로 적의 공격을 더 이상 저지하기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해안선을 따라 육상후퇴 하기로 결정하였다. 12:50분을 기하여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제28, 29, 37, 32연대 순으로 도로를 따라 남진(南進)하여 약 3㎞ 정도 행군하였는데, 마침 미순양함으로부터 날아온 헬기에 의하여 미해군 및 육군본부와 연락이 되어 육상철수는 취소되고 19일 일출전에 장사리 해안에서 해상으로 철수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다시 유격대는 장사리 방면으로 북상하게 되었다.
  남진하는 역순으로 32연대부터 북상하기 시작하였으나, 적은 아군이 철수한 200고지를 완전히 점령하고 아군의 북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16:00경부터 아군과 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공중과 해상에서 아군을 엄호하는 폭격과 함포사격이 있어서 아군은 18: 50분경에 장사리 해안의 좌초된 문산호 부근에 집결하여 철수준비를 서둘렀다.
  19일 05:15분경에 해상철수용 LST함에서 미해군 소령 1명이 보트로 문산호에 와서 대장과 철수작전을 협의하여 중경상자, 제28, 37, 지휘부, 32, 제29연대 순으로 철수순서를 정하는 한편, 높은 파도로 인하여 철수용 LST함은 해안접근이 불가능함으로 해안으로부터 약 200m 지점까지 접근하면 밧줄을 이용하여 철수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철수시간은 06:30분으로 약정하였다.
  06:30분부터 함포의 엄호사격과 동시에 철수작전이 시작되었는데, 파도가 높아 완전무장한 대원들이 파도에 이기지 못하고 물속으로 휩쓸려 익사하는 대원들이 속출하였다. 이것을 지켜보던 미해군 소령의 제안으로 유격대원들은 군장을 벗어 던지고 간편한 복장으로 철수작전을 원활하게 진행하였다. 그러나 높은 파도와 200고지에 포진한 적의 맹렬한 사격으로 아군의 피해가 속출하였으며, 철수작전도 예정시간을 초과하여 12:00까지 완료하기로한 시간이 15:00가 넘도록 완료되지 못하여 진지에는 약 60여명의 유격대원이 승선하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적의 박격포탄이 구출용 LST함 주위에까지 떨어지자 미해군 소령은 구출용 LST함도 좌초된 문산호의 운명과 같은 꼴이 될까 우려한 나머지 철수작전의 종료를 선언하고 LST함 선수를 닫으며 후진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 약 30여명의 유격대원이 해안의 모래톱 위에서 적의 총탄 사이로 승선대기하고 있었으나 결국은 철수하지 못하고 최후의 1인까지 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④ 상륙작전의 전과
  위와 같이 1950년 9월 14일 새벽부터 19일 15:30분경까지 6일여 동안 장사리 일대에서 활약한 육군본부 직할 독립 제1유격대의 전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적군 피해 〉
① 적 2군단 제5사단의 배후를 공격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적의 후방을 교란시켜, 아군의 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9월 15일에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② 적사살 270명, 포로 4명, 토치카 파괴 11개소, 직사포 3문, 포탄 450통, 지프차 1 대, 기관총 4정, 로켓트포 1문, 따발총 5정, 소련식장총 12정, M1소총 9정, 교량 파괴 2개소, 도로 파괴 6개소,

〈아군 피해 〉
① 전사 139명(LST 선원 및 장사리 잔류대원 30명 포함)
② 부상자 92명 (LST 선원 17명 포함)
③ LST 문산호 1척( 2,700톤급)

(2) 해병대의 영덕지구 작전

  ① 작전 준비
  1951년 1월 4일 수도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오산과 원주를 잇는 선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무렵 중동부의 안동과 영덕 일대의 산악지대에서는 적 제10사단과 적의 낙오병, 그리고 지방출신의 공비들이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고 식량약탈, 살인, 납치 등의 만행을 저질러 치안질서를 교란하여 아군의 작전에 막대한 지장을 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유엔군은 마산의 미해병 1사단을 포항으로 이동시켜 안동­영덕간의 도로를 경비하면서 지역내의 북한 비정규적 부대와 공비의 소탕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 해병 제5대대를 안동에 투입하여 미1사단 제1연대에 배속시켜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는 한편, 한국 해병 제1연대를 1951년 1월 26일에 진해를 출발시켜 적의 낙오병과 공비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해병 제1연대는 영덕 남동쪽 3㎞지점의 강구면 하저리에 상륙하여 1월 29일에는 다시 영덕에 집결하여 본격적인 작전준비를 하였다.

  ② 작전의 경과 및 전과
  1월 29일에 영덕에 집결한 해병 1연대는 1월 30일 제1대대를 영덕­안동간의 34번 도로를 따라 원전리로, 제3대대를 청송으로 각각 진출시키고 제2대대를 예비연대로 하여 영덕에 주둔하도록 하였다.
  이러던 중 황학산 북쪽 3㎞지점에 400여명의 공비가 출몰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연대장은 제3대대 부대대장으로 하여금 1개 중대를 인솔하고 공비들을 소탕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병력의 열세로 상황이 불리하여지자 청송의 제3대대와 원전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1대대 제1중대를 추가 투입하는 등 초기 토벌작전에서 상당히 고전을 하였다.
  이와 같이 연대의 주력이 황학산과 청송 일대에서 공비들을 소탕하고 있을 때, 공비들은 이 틈을 이용하여 영덕에 있는 연대본부를 기습하였다. 이로 인하여 연대 예비로 달산면 덕산리 부근에서 영덕으로 통하는 길목을 경비하던 제2대대 제1소대가 큰 타격을 받았다.
  한편 영덕에서 남서쪽으로 15㎞ 떨어진 동대산 부근의 항동에 적의 패잔병 2,000명이 집결하여 북상을 기도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제1연대장은 제1대대를 신양리로 이동시키는 동시에 제2대대에 제11중대를 배속시켜 영덕지역에 출몰하는 공비들을 토벌하도록 하여, 2월 6일에는 덕산리의 공비를 소탕하는 전과를 올렸다.
  2월 7일에 항동에 집결하여 있던 공비들은 제1연대의 신속한 배치와 공격으로 더 이상 아군을 공격하지 못하고 동대산에 잠입하였다는 6중대에 귀순한 패잔병의 진술에 따라 해병 제1연대장은 동대산을 공격하여 적을 완전히 괴멸시키기로 결정하고는 이날 12시에 제1대대와 제2대대로 하여금 공격을 개시토록 명령하였다. 작전계획에 따라 공격부대들은 동대산의 서쪽 고지인 팔각산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설치한 다음 계속 전진하여 9일 16시에는 동대산을 완전히 점령하여 적의 근거지를 없앴다.
  공비들은 아군의 강력한 소탕작전에 밀려 동대산 남쪽 능선을 따라 남쪽 5㎞지점인 향로봉으로 도주하였다. 이와 같이 영덕지구에서 강력한 공비소탕작전을 벌인 제1연대는 작전을 완전히 마치고 새로운 작전에 참가하기 위하여 묵호로 이동하였다.
  1951년 1월 29일부터 2월 23일 실시된 영덕지구 공비토벌작전에서 해병 제1연대는 8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며 그때까지 혼란하던 영덕지구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3. 양민의 피해

  오늘날의 전쟁은 전후방이 따로 없는 총력전의 형태로 실제 전투행위에 참여하는 군인들 이외에 많은 민간인들의 물적, 인적 피해를 가져온다. 특히 전쟁전부터 좌와 우로 나누어 사상대립을 겪으면서 크고 작은 공방을 벌여 온 한반도에서는 6. 25라는 비극적인 전쟁을 통하여 수많은 양민들의 학살이 있었다. 우리 지역에서도 예외없이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1950년 8월 17일부터 적치하(敵治下)에 들어 간 영덕지역에서는 1950년 9월 25일 아군에 의하여 탈환될 때까지 북한군의 정치공작대에 의하여 인민위원회, 보안서, 농민회, 군사원호회, 직업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이 결성되어 전쟁전에 좌익들에 비협조적인 인사와 우익활동을 하던 인사들을 소위 “반동분자”라 칭하고 이들을 체포하여 재산몰수는 물론 많은 인사들을 학살하였다.
  이때에 학살된 인사들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영해면 회장인 박정윤을 비롯한 73명의 인사가 학살되었으며, 영덕면 화개리의 주병호를 비롯한 230여명의 인사가 체포 구금당하는 등 많은 인사가 고초를 겪었다.
  한편 아군에 의해서도 다수의 양민학살이 있었는데, 「경상북도의회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 활동보고서에 의하면 영덕군에서도 “영덕읍 화개2리 일명 묏골”, “창수면 가산 2리”, “영해면 대 2리”, “지품면 원전리 각별계곡”, “달산면 주응 2리” 등의 5건의 신고가 접수되어 있다.
  이와같이 적군과 아군에 의하여 사상의 갈등과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 아래에 수많은 무고한 양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으며, 민족적 비극이었다.

1) 영덕읍 화개 2리 묏골사건

  속칭 묏골사건은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회원 및 회원의 가족 약 160여명을 조사 및 교육의 명목으로 2일에서 1주일 정도 교육시킨 후 영덕읍 남석리 소재의 곡물창고에 1∼2일 감금시킨 후 국군 제3사단 제23연대 맹호부대 김종원 연대장의 명령에 의하여 동년 7월 14일 화개 2리 묏골로 끌고 가서 집단으로 총살한 사건이다.
  보도연맹이란 광복 후 좌익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로 구성된 단체로 정식명칭은 국민보도연맹이다. 1949년 6월에 결성되었으며 1950년 초에 30여만명 정도였으며, 가입대상은 남로당과 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농민조합총연맹, 인민위원회, 민족주의민주전선,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 등의 남로당계열의 외곽단체 구성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후에 좌익분자들의 색출과 자수권유, 반공대회, 문화예술행사개최 등에 활동하면서 사상전향을 시키고자 하는 당국의 노력에 협조하였다. 그러나 6.25가 발발하자 당국에 의하여 예비검속이란 명목으로 체포 구금되어 흑백의 가림없이 많은 연맹원들이 현장 지휘자들의 명령에 의하여 처형되었다.
  사실상 영덕에 인민군 즉 북한군이 나타난 것은 이해 7월 12일에 제3사단 23연대의 지휘소가 설치되고 7월 15일에 지품면의 삼화지구 전투가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7월 12일 이후라고 보여 지는데, 이 사건은 6.25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는 전쟁전의 좌익활동에 관련된 인사들이 주로 피해자인 것으로 보인다.
  도의회의 조사에 의하여 밝혀진 피해상황과 사건의 성격을 보면 1950년 7월 14일 화개 2리 묏골에서 희생된 숫자는 160여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사망자 중에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진 것은 10여인에 불과하고 그 외 대다수의 사망자는 불명(不明)으로 남아 있다.
  신병태(도의회 조사 당시 77세)의 증언에 의하면 제23연대장 김종원이 영덕에서 32명의 보도연맹원을 총살시킬 때 이 중의 일부가 인민공화국만세를 부르자 이에 격분하여 영덕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전원을 화개 2리 묏골로 끌고 가서 총살시켰다고 한다.

  조사에 참가한 조사자의 의견에 “인민군에 협조했거나 보도연맹 등에 가입한 사람들을잡아들이는 과정에서 그 당시 상황이 밤에는 인민군에 협조하고 낮에는 국군에 협조해야 살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죄없는 양민의 희생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사건 당시에 억울한 양민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집단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표〈2 ­12〉는 경상북도의회의 양민학살진상규명특별위원회에 의하여 밝혀진 묏골사건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인사의 명단이다.

2) 지품면 원전리 각별계곡 사건

  지품면 원전리 각별계곡 사건은 6.25전쟁 전의 공비토벌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1949년 12월부터 청송 주왕산 부근의 산악지대에서 공비들을 추적 소탕작전을 벌이던 아군 1개 중대가 12월 31일 지품면 원전리의 원전초등학교에 주둔하면서 원전 인근의 주민들을 체포하여 공비들의 은신처를 밝히기 위한 조사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의 피해자 김수환(도의회 조사 당시 73세)이 도의회 조사위원에게 진술한 것을 보면 31일 이전에 원전초등학교에 주둔하면서 복곡, 수암리 일대의 주민들을 조사하면서 구타와 폭행을 하였으며, 이러한 사실은 인근 주민들에게 널리져 있었으며 31일 낮 12시경에 지품면 송천리에 진입한 군인들은 총소리로 사람을 모은 뒤에 공비의 은신처를 추궁하며 집합한 주민들을 구타하고 여기에 반항하는 김수왈을 이송 도중에 총살시키고는 50여명의 마을 주민들을 원전초등학교로 끌고가서 다음해 1월 1일 정보계 상사 2명이 이들을 조사한 후 중대장이 무작위로 이들 중 15명을 총살시켰다고 한다.
  보고서에 의하면 현재까지 신원이 밝혀진 사망자는 12명에 이르며, 나머지 2명의 신원은 불명이다. 이 때 희생자들은 전부 지품면 송천 1·2리 사람들로 1949년 6월에 결성된 보도연맹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수한 민간인이었다고 한다.
  각별계곡 사건은 광복 공간의 좌우익의 갈등구조 속에서 시골에서 순수하게 농사를 짓고 있던 양민들이 입은 대표적인 피해 사례의 하나로 조사자의 의견인 “ 국군이 마을 사람을 빨갱이(공비)로 인정하여 무작위로 끌고 가 15명 정도는 총살하고 17명은 살아 나왔는데 이 과정에서 젊은 사람 몇몇은 살려주라고 하는 등으로 특별한 기준이나 증거없이 총살했다고 볼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도 이 당시에 원칙과 기준없는 조치로 수많은 민간인들의 피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표〈2 ­13〉는 경상북도의회의 양민학살진상규명 특별위원회에 의하여 밝혀진 각별계곡사건 희생자 중 신원이 확인된 인사의 명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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