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읍·면 행정

  1998년 12월 31일 현재 읍·면은 군단위 기초자치단체의 최일선 지방행정기관으로써 주민을 상대로 직접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들 읍·면의 책임자는 읍장과 면장이라 통칭하고 있다.
  읍·면장은 기초자치단체장인 군수의 지휘감독을 받으며, 국가의 사무를 위임받은 군의 지시에 의하여 업무를 수행하는 한편, 소속 직원을 지휘 감독하는 최일선 기관장으로 중요한 직위이다.
  1994년 3월 17일 법률 제4741호에 의하여 읍·면장의 임명규정의 개정 전까지는 5급 사무관에 준하는 별정직 지방공무원이 임명되었으나 이후에는 일반직 5급으로 읍·면장을 보임하도록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개 읍·면장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시대에는 촌주(村主), 고려시대에는 촌대감(村大監)·촌제감(村弟監)·촌장(村長)·촌정(村正)으로 불리웠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읍·면 단위를 면(面)·방(彷)·사(社)라고 부르고 이들의 장(長)을 풍헌·약정·집강 등으로 불렀다. 또한 이들은 각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나 별감의 추천에 의하여 당해 고을의 수령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이들의 임무는 상부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으며, 그 외에 호적의 작성, 유민의 방지, 면내의 간단한 쟁송(爭訟)사건의 처결권, 조세의 부과 및 징수권 등을 가지고 있으며, 당해 촌락을 대표하였다.
  이러한 이들이 공식적으로 지방행정관의 직책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일제 강압시기인 1910년 10월 1일 총독부령 제8호인 「면에 관한 규정」의 제정 공포에 의하였는데, 이후 1912년 3월 6일 총독부령 제16호「면경비부담방법」이 공포되고 나서 면단위가 지방자치단체의 하부기관으로 확립되면서부터 이들의 지위는 확고하여 졌다.
  또한 일제 강압시기인 1930년 12월 1일 총독부령 제12호인 「읍면제개정」의 제정 공포에 의하여 종래 군수가 읍면의 관리를 임명하던 것을 읍·면장이 직접하도록 하고 읍면에 읍면규칙과 이 규칙에 읍면세를 부과할 수 있는 규정을 둘 수 있도록 하여 읍면장의 권한을 대폭 신장시켰다.
  광복 이후에는 1947년 미군정 법령 제126호를 공포하여 주민이 직접 면장을 선출하도록 하였으나 여건의 미비로 무산되었으며, 1952년 4월 25일에 면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면장을 면의회에서 선출하도록 하였다. 1956년 2월 13일에 법률 제385호에 의하여 면장 선출권이 주민직선제로 바뀌게 되어 동년 8월 8일에 시·읍·면장, 시·읍·면의원을 선출하는 동시선거가 있었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시·읍·면장을 주민들에 의한 선출제에서 다시 임명제로 하는 지방자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확정되었다. 그러나 1960년 11월 1일에는 다시 주민이 직접 선출할 수 있도록 하는 개정지방자치법이 공포되어 동년 12월 9일에는 시·읍·면의원 선거가 있었으며, 동년 12월 26일에는 시·읍·면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의 쿠데타에 의하여 동년 9월에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하여 면은 지방자치단체의 기능을 상실하였으며, 읍·면장도 군수가 임명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영덕군의 구성은 1읍 8면, 204개의 행정리와 118개의 법정리, 329개의 자연부락과 881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후기인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 의하여 영덕현은 6면 126개의 리(里), 영해부에는 6면 86개의 리가 있었으며, 이보다 백여년 후인 1899년의 「경상북도 영덕·영해군읍지」에 의하며 영덕군은 6면 113개 리, 영해군은 석보면을 포함하여 7개 면에 84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3년 12월 29일에 공포된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영덕군과 영해군이 통폐합되어 영덕군이 새로이 발족할 당시인 1914년 3월 1일에는 9개 면 116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1. 영덕읍

1) 연 혁

  영덕읍은 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군청을 비롯한 군내의 행정·교육·사법·체신 등의 공공기관들이 밀집하여 있어 자치행정의 중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의 영덕읍의 발족은 일제 강압기인 1914년에 조선시대의 영덕현의 읍내면(邑內面)과 중남면, 그리고 동면의 화수리가 합쳐서 새로이 생긴 읍(邑)이다.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에는 영덕현의 읍내면은 우곡리, 덕천리, 곡내리(谷內里), 장기리, 남문리, 동상리, 삼구리(三丘里), 천전리, 구마리(仇麻里)의 9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구성된 읍내면의 동리는 거의 백여년 뒤에 편찬된 1899년의 「경상북도 영덕군 읍지(盈德郡邑誌)」에 의하면 우곡(右谷), 덕천(德川), 내곡(內谷), 외곡(外谷), 비석(碑石), 남부(南部), 상장기(上場基), 하장기(下場基), 상남문(上南門), 중남문(中南門), 하남문(下南門), 동상리(東上里), 서상리(西上里), 삼근리(三近里), 수정(藪亭), 구마(九麻), 천전(川前)의 17개 동리가 되어 무려 8개의 동리가 늘어난다. 이러한 것은 인구의 증가에 의한 것인지 단순히 행정적 편의에 의한 것인지는 오늘날에 와서 확인할 바가 없지만 대체적으로 그 이후의 인구증가 추세로 보아 인구증가에 의한 동리의 증가로 볼 수 있다.
  일제시대 영덕면의 일부가 된 조선시대의 중남면의 구성을 위의 「호구총수」에 의하여 살펴보면 죽산리, 거산리, 소월천리, 지곡리, 이동리, 상·하·외직천리(上·下·外直川里), 장전동리, 눌우미리, 오포리, 구강구육·해리(舊江口陸·海里), 월강구리·해리(越江口里·海里), 삼사랑육·해리(三思浪陸·海里), 피전리(皮田里)의 18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도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죽산리(竹山里), 둔리(屯里), 지곡(枝谷), 소월천(素月川), 금리(今里), 직천리(直川里), 이산리(梨山里), 장전리(長田里), 눌우미리(訥于味里), 오포리(烏浦里), 강구리(江口里), 삼시랑리(三侍郞里), 피전리(皮田里)의 13개 리로 오히려 5개의 동리 명이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호구총수 작성시에는 육리와 해리를 구분하여 기록한 것을 「경상북도영덕군읍지」 작성시에 이들의 구분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은 갑오경장 이후 반상의 구분이 철폐되어 육리와 해리를 구분해야 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의 동면(오보면)은 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주등리, 삼거리, 성황당리, 기곡리, 매령리, 양장리(羊腸里), 돌면리, 예진육·해리(芮津陸·海里), 노물내동·내육·해리(老勿內洞·內陸·海里), 오보육·해리(烏保陸·海里), 대탄리, 창포육·해리(菖蒲陸·海里), 당사동리(堂詞洞里), 대부육·해리(大夫陸·海里), 하저육·해리(下渚陸·海里), 임리(林里), 도라리(悼羅里), 금진육·해리(金津陸·海里), 소하육·해리(小下陸·海里)의 28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주등역(酒登驛), 삼거리(三巨里), 성황당(城隍堂), 양정리(羊亭里), 기곡(基谷), 매령리(梅嶺里), 돌면리(乭面里), 예진리(芮津里), 노물(老勿), 창포리(菖蒲里), 대탄리(大灘里), 대부리(大夫里), 하저리(下渚里), 금진리(金津里), 오보리(烏堡里), 소하리(小下里), 임리(林里), 노내동(老內洞)의 18개 동리로 구성되어 있어 10개의 동리 명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육리와 해리의 구분이 없어지고 하나의 지명으로 나온 것이 동리가 감소된 주요한 원인이다.
  이와같이 영덕현을 구성하고 있던 각 면들의 동리들은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다시 변경되어 읍내면은 구미(九美: 구마), 화개(華開: 동상리, 삼근리, 서상리), 남석(南石: 남부,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 비석, 상장기, 하장기), 덕곡(德谷: 덕천, 내곡, 외곡), 천전(川前), 우곡(右谷: 수정)의 6개 동으로 변경되었으며, 중남면은 남산(南山: 죽산리, 둔리, 지곡), 소월(素月: 소월천, 금리), 상직(上直: 이산리), 하직(下直), 오포(烏浦), 화전(花田: 장전리, 눌우미리), 삼사(三思 :삼시랑리, 피전), 강구(江口), 금호(錦湖: 상검(上劍))의 9개 동으로 바뀌었다.
  한편 동면은 주등, 미동, 삼거, 성황당, 기곡, 양장, 매령, 돌면, 예진, 노물, 오보, 대탄, 창포, 대부, 하저, 금진, 소하의 17개 리가 되었다.
  현재 영덕읍 구성의 골격이 갖추어진 것은 1910년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원활히 하고자 1914년 3월 1일에 전국의 부군면을 통폐합하여 새로이 행정구역을 조정하였는데, 이때 우리 지역에서도 이의 영향으로 조선조 후기까지 부(府)로 존속하던 영해가 1895년에 영해군으로 개칭되어 북부 7개 면을 통할하던 영해군과 조선시대의 영덕현으로 존속하며 남부 6개 면을 통할하다가 1895년에 영덕군으로 개칭된 영덕군에 합쳐져 새로이 영덕면, 강구면, 남정면, 달산면, 지품면, 축산면, 영해면, 병곡면, 창수면의 9개 면으로 축소 통합되어 통합된 영덕군이 구성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이 구성된 통합영덕군의 1면으로써 영덕면의 구성을 살펴보면 1914년 3월 1일 통합전 영덕군 읍내면의 6개 동과 중남면의 9개 동, 동면의 화수리(華水里: 주등, 미동)가 새로이 추가되어 16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면명을 영덕면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1934년 4월 1일에 이르러 다시 군의 행정구역 변경으로 중남면의 소월, 상직, 하직, 오포, 화전, 삼사, 강구, 금호의 8개 동이 강구면으로 이속(移屬)되어 가고, 대신 동면(東面)인 오보면(烏保面)의 창포(菖浦), 대부(大夫), 대탄(大灘), 노물(老勿), 오보(烏保), 매정(梅亭: 매령, 성황당, 기곡, 양장), 석동(石洞: 돌면, 예진), 삼계(三溪 ; 삼거) 등의 8개의 동을 영덕면으로 이관시켜 영덕면을 새로이 구성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영덕면의 행정구역은 크게 변경된 것이 없었으나, 1979년 5월 1일에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하여 영덕면이 영덕읍으로 지위가 승격되어 명실공히 영덕을 대표할 수 있는 군 행정의 중심지로써 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93년 6월 29일에는 군조례 제1293호에 의하여 축산면 화천리를 영덕읍 화천리로 이속(移屬) 개편하였으며,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95년 12월 29일에는 군조례 제 1375호에 의해 덕곡리가 덕곡1·2리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읍의 구성

  현재의 영덕읍의 구성은 구미리, 우곡리, 삼계리, 천전리, 석리, 노물리, 오보리, 대탄리, 대부리, 창포리, 덕곡1·2리, 화계1·2리, 남석1·2·3리, 남산1·2리, 화수1·2리, 매

정1·2·3리, 화천1·2·3리, 삼계리 등의 27개의 행정리와 17개의 법정리, 37개의 자연부락, 그리고 179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1년 6월 2일 군조례 제585호에 의하여 읍 소재지를 덕곡리 301번지에서 우곡리 310번지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읍의 면적은 66.072㎢이며,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4,620세대로 인구는 13,276명이다. 이중에 남자는 6,429명, 여자는 6,847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읍의 지세(地勢)는 낙동정맥(洛東正脈)이 남북으로 길게 동해와 일직선을 이루며 뻗어 내리는 관계로 서쪽은 높고 동쪽은 경사진 형태의 산지(山地)가 많은 지세이다. 읍의 주위로는 화림산(華林山), 입내산(入來山:들온산), 삿갓봉(笠峰), 고불봉 등이 펼쳐져 있으며, 이들의 산세가 동쪽 해안까지 뻗어있어 경작지가 적으며, 해안선은 단조로우나 바다의 수심은 매우 깊다.
  읍내를 지나는 주요 하천으로는 달산, 지품을 지나오는 오십천이 읍을 서에서 남으로 흘러 강구항을 지나 동해로 들어가고 있으며, 덕곡리를 가로질러 흐르는 덕곡천이 삼각주 공원 앞에서 오십천 본류와 합류하여 강구항으로 흐르고 있다.
  읍내의 주요한 농경지로는 오십천의 연안을 따라 분포하여 있으며, 이들 농토는 오십천의 유속에 의하여 운반되어 쌓인 충적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구미평(九美坪)과 천전평(川前坪)이 있다. 따라서 이들 지역에는 일찍부터 논농사가 발달하였으며, 토질이 뛰어나 양질의 쌀이 많이 생산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읍의 지계(地界)는 서쪽으로 지품면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축산면,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남쪽은 강구면과 접하고 있다.
  읍을 관류하는 오십천에는 메기, 황어, 은어 등의 민물고기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으며, 특히 오십천에서 태어나 멀리 태평양까지 갔다 다시 회귀하는 연어는 오십천의 명물로 유명하다. 또한 오십천 중류와 하류지역에는 뱀장어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오십천 유역과 34번 국도를 따라 복숭아 재배가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복숭아의 주산지로 각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복숭아꽃이 만발하는 4월이면 일대장관을 이루고 있어 많은 관광객과 사진작가들이 찾아오는 명소로 이름이 나 있다.
  대부, 창포, 대탄, 노물, 오보, 석동 등 해안에 위치한 마을은 예로부터 어업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에 들어와서는 어촌의 소규모 어항개발을 위한 집중적인 투자의 결과로 어업활동 여건이 좋아짐에 따라 어업(漁業)활동이 활발하여, 수산물의 어획량이 점차 늘어나고 있어 어민들의 소득이 크게 증대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이외에도 김, 미역 등의 자연산 해조류와 멍게, 미역 등의 양식어업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점차 살기 좋은 어촌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읍의 교통은 부산에서 온성까지 연결되는 7번 국도가 읍을 가로질러 남북으로 지나가며, 서북의 내륙도시인 안동을 연결해주는 34번 국도가 영덕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외에도 영덕과 청송을 연결해주는 932번, 914번의 지방도가 읍내를 지나가기 때문에 인근 타 시군과의 교통은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읍내의 교통은 영덕읍과 하저리를 연결해주는 군도 10호와 영덕과 오보를 연결해주는 농어촌 도로가 있으며, 해안을 따라서는 지방도인 918번이 강구와 축산, 그리고 영해를 이어주는 해안도로로써 큰 역할을 하고 있어, 읍의 내륙과 해안을 편리하게 연결해 주고 있다.

4) 역대 면·읍장 현황

2. 강구면

1) 연 혁

  원래 강구면은 일제 강점시대인 1934년 4월 1일 군 행정구역 개편 때 새로이 신설된 면으로 조선시대 원래의 오보면(東面, 元烏保面)의 하저(下渚), 금진(金津), 소하(小下)의 3개 동과 조선시대 중남면(中南面)의 상검(上劍), 하직(下直), 상직(上直), 화전(花田), 소월(小月), 삼사(三思), 강구(江口)의 7개 동이 합쳐져 강구면으로 새로이 탄생한 면이다. 이후 면구역의 변경과 면명의 개칭이 없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강구면내의 동을 리로 개칭하였으며, 1990년 1월 3일에는 군조례 제1146호에 의하여 종전의 하직리를 원직리(元直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면의 구성

  현재의 면의 구성은 강구1·2·3·4리, 오포1·2·3리, 화전1·2리, 상직1·2·3리, 원직1·2리, 금호1·2·3리, 금진1·2리, 삼사리, 소월리, 하저리로 나누어 22개 행정리와 10개의 법정리, 29개의 자연부락과 115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 소재지는 오포리 514번지이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면의 세대수는 3,409세대이고 인구는 9,975명인데 남자는 4,830명이며, 여자 5,145명이고, 면의 면적은 36.81㎢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지세는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관계로 서쪽은 높고 동쪽은 경사진 지세를 가지며, 군의 젖줄인 오십천이 금호와 원직리 일대에 넓은 들을 만들면서 동해로 유입되고 있다. 또한 이 강의 하구에는 천연의 어항인 강구항이 있어 동해안 일대의 주요한 어업기지의 하나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지계는 남쪽으로 남정면과 접하고 있으며, 서북쪽으로는 영덕읍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달산면과 이어지며,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다.
  교통으로는 면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7번 국도와 달산과 강구를 연결해주는 군도 6호가 있으며, 강구와 축산, 영해를 연결하여 주는 지방도 918번인 강축도로가 강구에서 시작하고 있다. 현재 이 도로를 따라서 강구와 축산, 영해에 이르는 해안의 아름다운 절경을 보기 위하여 많은 관광객이 찾아들고 있으며, 면내의 금진과 금호리를 이어주는 농어촌 도로가 해안과 내륙을 이어주고 있어서 면내의 교통은 편리하다.
  면내를 통과하는 하천으로는 약 40㎞의 길이와 유역면적이 약 30㎢인 오십천이 있다. 특히 하구에 위치한 강구항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천연항으로 오래 전부터 동해안에 있어서 어항과 군사적 요충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여 왔다.
  강구항이 현재의 형태로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은 1900∼1901년부터이다. 이때는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일 때로 이에 편승한 일본인 어부들이 강구 앞바다의 풍부한 어자원을 약탈하기 위하여 집단적으로 몰려올 때이다.
  이들은 강구항을 이용하기 위하여 오십천 상류로부터 내려오는 토사들이 항내 구석구석에 쌓여 있는 것을 여러 차례 준설한 후 임시정박지로서 강구항을 이용하며 그들의 어업기지로 삼았으며, 이후 일제는 자국민들의 어업기지화를 위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축항을 축조하기 위한 공사를 강구항에다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는데 이때가 1919년부터이다.
  1919년은 3.1만세의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으며, 이 지역에도 영해를 비롯하여 전군에서 만세의거가 있었다. 이러한 어수선한 와중에 이해 8월에 대홍수와 태풍이 몰려와서 오천 하류지역인 강구에서는 불어난 강물과 밀려드는 파도에 의하여 300호의 민가가 침수되어 이중에 60호가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망자가 50여명이나 발생하는 등 대참사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대참사가 발생한 후 지역유지 및 일제의 관리들 사이에서 축항의 설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져 마침내 1927년 2월에 도사업(道事業)으로 공사비 20만원을 투입하여 공사를 시작하여서 1930년 5월에 1차 공사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해 7월에 태풍으로 1차 공사에 의하여 축조되었던 축항이 막대한 피해를 입어 다시 1931년 7월에 공사비 18만 9천여원을 투입하여 제2차 공사를 시작하여 1934년 3월에 2차 공사를 마무리하고는 이어 1934년 4월에는 공사비 13만원을 들여 물량장 및 계류장시설, 여타 시설들을 보완하는 공사를 시작하여 1936년 2월에 3차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하여 완성된 강구항의 규모는 도수제인 남쪽 방파제의 길이가 255m, 북쪽 방파제 길이가 340m, 물량장 및 호안축대가 500m로 어엿한 항구의 형태를 가졌으며, 광복 이후에도 여러번 증·개축이 되어 오늘과 같은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보다 앞서 강구항은 국가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는데, 조선시대 전기(前期)인 중종(재위 1506∼1544) 때에 순변사 고형산이 둘레 1,490척, 높이 9척의 돌로 오포성을 쌓고는 만호진(萬戶鎭)의 본영으로 삼아 해상으로 침입하는 왜적들을 방비하는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조선시대 후기인 고종 8년(1871)에는 대원군이 서양 제국주의 세력을 경계하기 위하여 연안 일대에 척화비를 세울 때 강구항에도 이 비가 세워질 정도로 중요한 항구였다.
  오늘날에도 강구항은 연안과 원양어업의 전진기지로써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연간 수천톤의 수산물이 거래되고 있다. 또한 강구항을 중심으로 홍게, 고동, 명태 등을 이용한 수산물 가공공장이 여러 곳에서 가동되고 있어 지역경제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면내의 농경지로써는 비옥한 토질 덕분에 양질의 쌀 생산지로 유명한 오십천 유역의 금호평(錦湖坪)과 직천평(直川坪)에서 논농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내륙 산간 및 해안을 따라서 일부 밭농사도 이루어지고 있다. 면내의 대체적인 경제적 기반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형태가 주종을 이룬다.
  특히 강구면의 해안선은 주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전복, 미역, 김 등의 해산물이 풍부하며, 육지가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급격하게 깊어지는 수심으로 연안 어장이 발달하여 대소의 삼각망, 정치망 등이 연안 바다에 펼쳐져 있어 성어기에는 많은 물량의 고기를 잡아서 높은 어획고를 올리고 있다.
  1987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삼사해상공원은 강구항의 아름다운 전경과 동해가 한눈에 펼쳐지는 관광명소로 이름이 높으며, 1997년 12월에 준공된 경북대종은 그 소리와 모양이 웅장하고 아름답기가 그지없어 이를 구경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파가 연중 끊이지 않고 있으며, 매년 1월 1일의 해맞이행사 때에는 수만명이 동시에 몰려 일대장관을 이룬다. 또한 1999년 11월에 개장된 삼사해상 야외공연장은 3,000여석 규모의 야외공연장으로 문화공간이 부족한 이 지역의 문화 창달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4) 역대 면장 현황

3. 남정면

1) 연 혁

  남정면은 조선시대 영덕현의 외남면(外南面)으로 1899년 이전인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외남면에 속한 동리로는 남역리(南驛里), 역전리(驛前里), 역전해리(驛前海里), 구배육리(臼背陸里), 구배해리(臼背海里), 원척육리, 원척해리, 비물육리, 비물해리, 신흥육리, 신흥해리, 자부랑리(者父郞里), 장사육리, 장사해리, 고부육리(高夫陸里), 고부해리, 지경육리, 지경해리, 골곡리, 사라동리(士羅洞里), 쟁암리, 동동리, 도천리, 소근동리(小斤洞里), 다사라리(多沙羅里), 고만당리, 영귀동리(詠歸洞里), 사동리, 화무동리의 29개의 리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899년의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는 남역(南驛), 역전리(驛前里), 구배리(龜(臼)背里), 원척리(元尺里), 비물리(飛勿里), 신흥리(新興里), 자부랑리(者夫郞里), 장사리(長沙里), 고부리(古(高)阜里), 두천리(斗川里), 원(완)진리(院(浣)津里), 지경리(地境里), 다사라(多沙羅), 도천리(道川里), 쟁암리(錚巖里), 동동(銅洞), 적암리(赤巖里), 덕성리(德城里), 고만당(高滿當), 화무동(禾蕪洞), 익동리(翼桐里), 사동리(寺洞里), 골곡(骨谷), 와하(臥火)의 24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이후에 두천리와 원진리가 장사리에 합쳐지고, 덕성이 도천에, 익동이 화무에 합쳐지므로써 1914년의 부군면 폐지까지 20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914년의 부군면 폐합 때에는 남정동(南亭洞: 남역), 남호동(南湖洞: 역전리), 구계동(龜溪洞: 구배리), 원척동(元尺洞), 부흥동(富興洞: 비물리, 신흥리, 자부랑리), 장사동(長沙里), 부경동(阜境洞: 고부, 지경), 회동(晦洞:골곡), 사암동(士巖洞: 다사라, 적암), 쟁암동(爭岩, 동동), 봉전동(鳳田洞: 와화), 도천동(道川里), 우곡동(羽谷洞: 고만당), 중화동(中禾洞: 사동, 화무), 양성동(洋城洞)의 15개 동으로 변경되면서 면 이름을 남정면으로 고쳤다.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면의 구성

  1999년 12월 31일 현재는 장사리, 부경1·2리, 회1·2·3리, 봉전1·2리, 사암1·2리, 부흥1·2·3리, 양성리, 쟁암리, 도천리, 우곡리, 중화리, 남정리, 남호리, 구계리, 원척리로 나누어 22개의 행정리와 15개의 법정리, 26개의 자연부락과 58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의 남부에 위치한 남정면은 면적이 73.27㎢이고 면 소재지는 장사리 398-1번지이다.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1,446세대이며, 인구는 4,203명으로 남자가 1,910명이고 여자가 2,113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군의 남쪽 관문인 면의 지계는 동은 동해와 접하며, 남은 포항시 북구 송라면, 서는 포항시 북구 죽장면, 북은 달산면과 강구면에 접하고 있으며, 본면의 서쪽은 낙동정맥의 줄기가 뻗어 나와 동대산, 대둔산의 연봉들이 겹겹이 이어지는 산세로 서쪽이 높은 반면에 동쪽은 낮은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면을 둘러싸고 있는 유명한 산들은 해월봉(海月峰), 봉황산(鳳凰山), 내연산(內延山), 동대산 등이 있으며, 면내를 흐르는 소하천으로는 이들 산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남호천, 구계천, 부흥천, 회리천 등이 있다.
  산세들이 면의 동쪽 지경인 해안선까지 뻗어 내리고 있어 경지면적이 좁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이 아주 단조롭다. 그러나 해안의 대부분이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미역이나 김 등의 생산량이 많아 면민들의 생계에 보탬이 되고 있다. 면민들의 경제적인 생활기반은 해안을 끼고 있는 마을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반농반어의 형태의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봉전리와 도천리 등의 산지에는 특수작물 및 농업에 경제적 기반을 두고 있다.
  특히 남정면은 동해안을 지나가는 7번 국도가 준고속화 도로가 됨에 따라 이 도로 주변의 장사해수욕장, 남호해수욕장 등이 여름철의 휴양명소로 등장하고 있으며, 현재 추진되고 있는 부경의 온천지구개발 및 장사리의 장사해수욕장의 개발계획의 완료와 달산과 장사를 잇는 도로가 개통이 되면 새로운 관광지로써 부상될 것으로 기대되어 9개 읍면 중에 가장 기대되는 지역이다.
  또한 면내의 어촌 마을인 부경, 부흥, 원척, 구계 등은 어촌 소규모 어항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어항시설의 확충 등 어업활동을 위한 어업기반시설이 잘 갖추어 지게 됨에 따라 어로작업이 활기를 띠고 있으며, 나아가서 수산물 생산의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면내의 북부 해안지역인 구계리의 생선회 단지와 남호리의 바다낚시터는 원근 각지에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고 있어 주민소득에도 많은 보탬을 주고 있으며, 원척리에는 1996년 6월 26일에 개관한 국내 유일의 화석박물관인 경보화석박물관이 건립되어 있어 4천여점의 국내외 화석이 전시되고 있어 이를 관람하기 위한 수학여행단 및 관광객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어 면내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4) 역대 면장 현황

4. 달산면

1) 연 혁

  달산면은 본래 영덕현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조선시대에는 서면(西面)이라 하였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재궁리, 대지곡리(大枝谷里), 광삼리(光三里), 용천리, 산하리, 궁기리, 마산리, 주방리(走防里), 서점리, 일이동리, 주산리, 상오등리(上烏等里), 입암리(笠巖里), 하오등리의 14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1899년의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 의하면 재궁(才宮), 상대(上大), 하대(下大), 중평(中坪), 용천(龍泉), 일이(日伊), 서점(西店), 산하(山下), 광산(光山), 오봉(五峰), 궁기(宮基), 주방(周坊), 중응(中鷹), 상응(上鷹), 가구(加邱), 상마(上馬), 하마(下馬), 수구(水口), 상오(上烏), 하오(下烏), 중오(中烏), 고마(高滿), 상립(上笠), 하립(下笠), 관암(冠巖), 덕계(德溪), 청련(靑蓮), 봉동(俸洞), 굴암(窟巖), 산성(山城), 주산(走山) 등으로 31개의 리로 구성되어있다.
  갑오경장 이후 일제 강점기의 통폐합 때까지 영덕군의 서면으로써 그 역할을 담당하여 오다가 1914년 3월의 부군면 통폐합 때에 당시의 청하군 죽북면의 해월리(海月里)와 북면의 식율리의 일부를 편입하여 대지동(大枝洞: 재궁, 상대, 하대), 매일동(梅日洞: 일이, 서점, 산하), 용평동(龍坪洞: 용천, 중평), 용전동(龍田洞: 상립암, 관암, 하립암), 흥기동(興基洞: 광산, 궁기, 오봉), 덕산동(德山洞: 덕계, 청련), 옥산동(玉山洞: 상마, 하마, 수구, 해월), 봉산동(鳳山洞: 봉동, 굴암, 산성, 주산), 주응동(周鷹洞: 주방, 상응, 중응, 가구), 인곡동(仁谷洞: 상오, 하오, 중오, 고만)의 10개 동으로 개편하면서 면명을 달산면으로 고쳤으며, 1983년 2월 15일에 대통령령 제11027호에 의하여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하옥리 일부를 이속하여 옥계리로 하였다. 그리고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면의 구성

  1998년 12월 31일 현재 달산면의 구성은 1983년 2월 15일 대통령령 제11027호로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하옥리 일부를 이속하여 대지1·2리, 매일1·2리, 흥기1·2·3리, 주응1·2·3리, 옥산1·2·3리, 덕산1·2리, 용평리, 인곡리, 봉산리, 옥계리로 나누어 19개의 행정리와 11개의 법정리, 그리고 36개의 자연부락과 52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 소재지는 대지리 448번지이다.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의 면적은 72.92㎢이고,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731세대이며, 인구는 1,745명으로 남자는 820명, 여자는 925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면의 지세와 지계는 서쪽으로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달리면서 대궐령(大闕嶺), 양설령(兩雪嶺), 돌시산(乭枾山), 삿갓봉, 팔각산(八角山) 등을 만들어 주어 명승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은 강구면과 남정면, 남쪽은 남정면과 포항시 죽장면, 서쪽은 청송군 부동면, 북쪽은 본 군의 지품면과 접하고 있다.
  면내를 지나는 소하천은 포항시 북구 죽장면 상옥리와 청송군 부동면 내룡리에서 발원하는 대서천(大西川)과 봉산 성암(星巖)에서 발원하는 소서천(小西川)이 있으며, 대서천이 흘러내리는 곳을 대곡(大谷)이라 하며, 소서천이 흘러 내리는 곳을 소곡(小谷)이라 불리고 있다.
  특히 대서천이 흘러내리는 주변지역을 옥계계곡이라 하여 1983년 9월 29일에 지방기념물 제45호로 지정 되었다. 옥계계곡은 인근의 팔각산과 더불어 명승절경을 이루고 있으므로 여름에는 전국 각지에서 많은 휴양객들이 찾아오고 있으며, 봄 가을에는 수많은 등산객들이 이곳을 찾아 들고 있다.
  농경지는 대서천이 지나는 곳을 따라 옥산평(玉山坪), 흥기평(興基坪), 매일평(梅日坪), 대지평(大枝坪)이 비옥하게 펼쳐져 있으며, 소서천이 흐르는 지역은 봉산저수지의 축조로 전천후 농업지역으로 탈바꿈하게 됨에 따라 특수작물의 생산지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달산면내를 흐르는 대서천과 소서천은 대지평에서 합쳐져 오십천으로 흘러들어 오십천의 원류를 이루는데 큰 역할을 하고있다.
  교통은 옥계를 경유하여 청송으로 연결되는 도로와 봉산을 경유하여 청송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있으며, 달산과 강구를 연결해주는 군도 6호가 있다. 조만간 달산-남정을 연결해 주는 도로가 개통될 예정에 있어 면내의 교통은 편리하다.
  이러한 교통의 편리는 옥계계곡과 주왕산과 삼사해상공원, 그리고 강구와 축산, 영해간의 청정해안을 이어주는 관광로정(路程)을 가져와 영덕군을 외부에 널리 알리는데 일조를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수축산물의 대도시 운반이 종래 보다 용이하게 되어 지역 농어가의 소득 증대에 많은 보탬이 되고 있다.

4) 역대 면장 현황

5. 지품면

1) 연 혁

  본래 지품면은 조선시대 영덕현의 북면(北面)으로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용기리(龍基里), 사자동리, 묵방리, 오십곡리(五十谷里), 보곡리, 기사리, 대동리, 지품리, 입석주막리(立石酒幕里), 입석리, 율곡리, 소항리, 유산리, 속곡리, 주을포리, 눌우곡리, 식율리, 양원리, 신기리, 오일리, 금천리, 전여동리, 도원리(陶原里)의 23개 리가 있었으며, 1899년의 「경상북도영덕군읍지」에 의하면 구룡기(九龍基), 사자동(獅子洞), 묵방(墨坊: 상묵, 외묵), 복곡리(洑谷里), 기사리(基思里), 지품리(知品里), 대동리(大洞里), 입석리(立石里), 주막리(酒幕里), 평지리(平地里), 황장리(黃場里), 속곡리(粟谷里), 소항리(所項里: 상소, 하소), 유산리(柳山里), 상율(上栗), 하율(下栗), 주을포(注乙浦 상주, 중주, 하주), 조족리(鳥足里), 눌우곡(訥于谷), 식율리(植栗里), 오일리(午日里), 금천리(金泉里), 전여동(箭如洞), 관동리(館洞里), 대덕(大德), 원전(院前), 세류(細柳), 수암(壽巖), 수내(壽內), 마항(馬項), 재곡(才谷), 토곡(土谷), 용수(龍水), 신기(新基), 양원(陽原), 신성(新星), 월전(月田), 장전(長田), 죽전(竹田), 지통리(紙桶里), 서당리(書堂里)의 45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다.
  후에 다시 진보면의 낙평을 편입하여,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에 신안동(新安洞: 주을포, 신성, 주막리, 조족리), 신양동(新陽洞: 신기, 양원, 식율), 기사동(其思洞: 기사리, 평지리), 수암동(壽巖洞: 마항, 수내), 삼화동(三和洞: 관동, 전여, 월전, 용수), 옥류동(玉柳洞: 유산리, 장전리), 도계동(道溪洞: 소항리, 대동리, 죽전리), 낙평동(洛坪洞: 낙평, 세류), 지품동(知品洞: 지품), 송천동(松川洞: 묵방), 율전동(栗田洞: 상율, 하율), 보곡동(洑谷洞: 지통리), 눌곡동(訥谷洞), 오천동(午泉洞: 오일, 금천), 용덕동(龍德洞: 구룡기, 사자동, 대덕), 원전(院前: 입석, 재곡), 황장동(黃場洞: 황장, 토곡), 속곡리(粟谷里: 서당리) 등의 18개 동으로 개편하면서 면명을 지품면이라 하였다.
  1974년 7월 10일에 군조례 제270호에 의하여 원전리 286-1번지에 원전출장소가 설치되어 북부 6개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1989년1월 1일에는 군조례 제1021호에 의하여 오천리 일부를 분리하여 신애리를 신설하였다. 한편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면의 구성

  1998년 12월 31일 현재 면의 구성은 삼화1·2리, 오천1·2리, 용덕1·2리, 송천1·2리, 도계1·2리, 신양리, 눌곡리, 낙평리, 신안리, 속곡리, 율전리, 옥류리, 수암리, 복곡리, 원전리, 지품리, 기사리, 황장리, 신애리를 합쳐서 24개의 행정리와 19개의 법정리, 54개의 자연부락과 85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 소재지는 신안리 186-4번지이다. 면적은 150.27㎢이며,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1,340세대, 인구는 3,491명이다. 이중 남자가 1,687명이고, 여자는 1,804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지세는 대둔산, 맹동산이 서북쪽에 높이 솟아 있어 서북쪽은 산세가 험하지만 동으로는 점차 낮아지는 형세를 하고 있다. 면을 가로질러 오십천의 원류(源流)가 지나가고 있으며, 이 유역을 따라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어서, 논농사와 과수원 농사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산지가 많은 관계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지품면의 특색이다.
  지계는 서쪽으로 청송군 진보면, 부동면과 접하며, 북쪽은 영양군 석보면과 남쪽은 달산면과 접하고 있다. 동북으로는 영해면과 축산면과 접하며, 동쪽은 영덕읍과 접하고 있다.

 면내의 산업으로는 과거에는 한지(韓紙), 옹기 등의 업종들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닥나무나 흙을 원료로 하여 활발한 생산활동을 벌여 국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았으며, 지역경제에서도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다. 그러나 현재는 이들의 수요가 급격히 감소하여 이들 공장도 거의 폐지되어 현재는 한 두 공장만 남아 겨우 명맥만 유지해 나가는 실정이다.
  면의 특성상 산지가 많은 관계로 주로 밭농사 위주의 농업이 발달하여 한 때는 고추, 마늘, 담배 농사가 성황을 이루었지만, 현재는 오십천 유역의 사질토를 따라 복숭아 및 포도, 사과 등의 과수 농업이 성행하여 지역농민의 중요한 수입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4) 역대 면장 현황

6. 축산면

1) 연 혁

  현재의 축산면은 본래 영해부에 소속되어 영해부사의 관할을 받던 곳으로 1896년까지는 영해부(寧海府)의 남면(南面)으로 1896년 이후로는 영해군의 남면이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축산육리, 축산진리(丑山津里), 양장리(羊腸里), 차유진경정육리(車鍮津景汀陸里), 경정진리(景汀津里), 고곡리, 상반포원포리, 하반포리, 부곡리, 칠성리, 복기암웅창리, 대동리, 백일동묘곡리, 원고리(元皐里), 오금리(梧琴里)의 15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1899년의 「경상북도영해군읍지」에 의하면 영해부의 남면은 축산(丑山), 양장(良(羊)庄(場,腸), 경정(景汀), 지경(地境), 차유(車踰), 고곡(古谷), 반포(反浦), 수일정(守一亭), 부곡(釜谷), 아삼(牙三), 복기암(洑基岩), 웅창(熊倉), 대곡(大谷), 화전(花田)의 14개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에 정신방(貞信訪), 와고동(瓦皐洞), 원포동(元浦洞), 동로동(東魯洞), 도동(道洞)과 묘곡면(畝谷面)의 대곡동(大谷洞), 니전동(泥田洞), 망전(網田), 조항산(鳥項山) 등이 합쳐져, 1914년 3월 1일 부군면 폐지로 인한 행정구역 변경 때에 도곡동(陶谷洞: 반포, 정신방), 기암동(奇巖洞: 기암, 아삼), 부곡동(釜谷洞: 부곡, 원포), 고곡동(古谷洞), 대곡동(大谷洞: 대곡, 동로), 상원동(上元洞: 와고, 수일정, 원포), 경정동(景汀洞: 경정, 차유, 지경), 조항동(鳥項洞), 축산동(丑山洞: 축산, 양장), 화천동(華川洞: 웅창, 도동), 칠성동(七星洞: 칠성, 니전, 화전, 망전)의 11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면명을 축산면이라 하였다. 이후 1963년 8월 23일에는 군조례 제43호에 의하여 축산면 출장소가 축산항에 설치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1993년 6월 29일에는 화천동을 영덕읍에 이속시켰다.

2) 면의 구성

  1998년 12월 31일 현재 축산면의 구성은 축산1·2·3리, 경정1·2·3리, 고곡1·2리, 도곡1·2리, 칠성1·2리, 기암1·2리 등으로 나누어 18개 행정리와 10개 법정리, 그리고 33개의 자연부락과 93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면 소재지는 도곡리 43-3번지이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의 면 소재지는 부곡동에 있었으나 1941년 4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축산면의 면적은 59.32㎢로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1,633세대이며, 인구는 4,540명으로 남자는 2,230명이고 여자는 2,310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면의 지세는 서쪽 지형이 높고 동쪽이 점차 낮아지는 형세이다. 주위에는 국사봉(國祠

峰), 화림산, 봉화산(烽火山), 용당산(龍塘山), 경산(鯨山) 등의 태백정맥에서 뻗어 나온 산봉우리가 연이어 있으며, 산세(山勢)가 해안에까지 밀려내려 오므로 해안선의 대부분은 단조롭다. 이러한 관계로 면내에는 평지가 적어 경작지가 부족한 편이다. 또한 바다의 수심도 산세가 바다에 바로 떨어지므로 해안에서부터 급격히 깊어진다.
  면내의 소하천으로는 국사봉, 화림산 등에서 발원하는 도곡천(陶谷川) 등이 있으며, 도곡천의 하류에는 동해안 굴지(屈指)의 어항인 축산항이 있다. 대체로 경지면적이 좁은 관계로 농업은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으며, 바다를 이용하는 어업종사 인구가 많아 어업소득은 상당히 높다.
  지계는 서쪽으로 지품면과 접하며, 북쪽은 영해면과 남쪽은 영덕읍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있다.
  교통은 7번 국도가 도곡을 지나가며 강구, 축산간의 강축도로인 지방도 918번이 남부해안을 따라 강구까지 연결되고 있으며, 북부해안을 따라서도 918번 노선이 축산·대진 ·영해를 이어 주고 있어 해안 관광 및 주민들의 왕래에 편리를 주고 있다.
  도곡과 영덕읍의 화천을 이어주는 군도 5호는 지역 주민들의 교통뿐만 아니라 7번 국도의 우회도로로써의 기능도 갖고 있어 휴가철의 복잡한 교통을 분산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4) 역대 면장 현황

7. 영해면

1) 연 혁

  영해는 고대 우시군국(于尸郡國)의 근거지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영해부가 설치되어 있던 곳으로 그 역사가 오래된 고장이다. 사서(史書: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우시군국이 유린(有隣)으로 바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 부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23년(940)에 유린군을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현종 9년(1018)에 방어사를 두었으며, 고종 46년(1259)에는 위사공신 박송비의 고향으로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충선왕 2년(1310)에는 영해부사영(寧海府使營)을 두었다. 또한 성종 때부터 영해는 단양(丹陽)이라 불렸으며, 오늘날도 단양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6년(1397)에 첨절제사를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 다시 도호부사를 두었으며, 이후 고종 32년(1895)에 이르러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영해부는 영해군으로 되었다. 한편 영해부의 소속이던 영양은 숙종 9년(1683)에 영양현으로 분리되어 갔으나 석보면은 계속 영해부에 소속되어 있다가, 1906년에 영양군으로 이속되어 갔다. 그리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호에 의하여 영해군이 영덕군에 합병되면서 영해면이 새로이 신설되었다.
  영해면은 본래 영해부 시절의 읍내면(邑內面)과 영해군 때의 묘곡면(畝谷面), 그리고 북초면(北初面)의 일부가 합쳐져서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789년의 「호구총수」에 의하면 읍내면의 구성은 마흘, 사진, 건달리, 대진리, 공수진, 어대, 괴시, 교동, 원동, 시문, 성내, 로하, 허문, 로상, 지동, 벌영의 17개 동이었는데. 1899년에는 마흘(을)진(磨屹(乙)津), 사진(津), 건달(乾達), 대진(大津), 원동(元洞), 시문(柴門), 성내(城內), 로상(路上), 로하(路下), 공수진(公須津), 어대(漁臺), 괴시(槐市), 교동(校洞), 허문(墟門), 벌영(閥榮), 용산(龍山), 지동(池洞), 송계(松溪), 건리진(件里津), 갈마물(葛麻勿), 운당(), 북천(北川), 서문(西門), 사미(思美), 제언(堤堰)의 20개의 동이 되었다.
  묘곡면은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23부제(府制)가 실시될 때 영해부가 영해군으로 개칭되면서 생긴 면이다. 1899년의 「경상북도영해군읍지」에 의하면 묘곡면은 칠성(七星), 조항산(鳥項山), 원구(元邱), 묘곡(畝谷), 백일(白日), 오금(梧琴), 대동(大洞)의 7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북초면도 이 당시에 신설된 면으로 「영영승람」에 의하면 이천, 각리, 월의(月宜), 항리, 사천, 신평, 용암, 대포, 송상, 송하, 휘리, 신기의 12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해면은 위의 읍내면과 묘곡면, 그리고 북초면의 일부가 합쳐서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에 새로이 생긴 면으로 괴시동(괴시, 교동, 운당, 북천, 어대), 성내동(지동, 로상, 서문, 시문, 송계, 성내, 사미, 로하, 제언, 허문), 원구동(원구, 오금), 벌영동(벌영, 갈마물), 묘곡동(묘곡, 백일), 대동(대동), 연평동(연평, 역리, 신기), 사진동(사진, 마을(흘)진, 건달), 대진동(대진, 건리진, 공수진)으로 9개 동이 되었다. 그리고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에 의해 동을 리로 개칭하였다.

2) 면의 구성

  1998년 12월 31일 현재 면의 구성은 성내1·2·3·4·5리, 괴시1·2·3리, 대진1·2·3리, 사진1·2·3리, 연평1·2리, 벌영1·2리, 원구1·2리, 묘곡1·2리, 대1·2리로 24개의 행정리와 9개의 법정리, 그리고 자연부락 32개와 117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 소재지는 성내리 671-5이다.
  북부 4개 면의 중심지인 영해면의 면적은 63.96㎢이며,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3,285세대이고 인구는 9,401명인데, 이 중에 남자는 4,497명이며, 여자는 4,904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면의 지세는 서북쪽으로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달리면서 등운산, 칠보산, 상대산, 형제봉, 대소산, 망월봉 등을 만들어 주어 이들 산들이 병풍처럼 영해평야를 감싸고 있는 지세이다. 또한 면내에 흐르는 소하천으로는 등운산과 울령에서 발원하는 서천과 맹동산에서 발원하는 남천이 원구앞에서 송천(松川)과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해안선은 상대산, 대소산, 망월봉 등의 산세가 해안까지 펼쳐져 바위가 많으며 경사가 급하다. 농경지의 대부분은 밭보다 논이 많은 형태이다. 이들 논은 대개 송천유역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으며, 예로부터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논농사가 발달하였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소하천을 중심으로 과수농사가 성행하고 있어 농민들의 주소득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외에도 서부산지와 동부해안을 따라 밭농사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으나 크게 성행하고 있지는 않다.
  지계는 북쪽으로 병곡면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창수면에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축산면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동해와 접하고 있다.
  교통으로는 7번 국도가 면 소재지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으며, 영해와 영양을 이어주는 지방도가 완전히 포장되어 있으며, 영해·대진·축산·강구를 이어 주는 해안도로가 개통되어 있어 대체로 교통은 편리하다.
  최근에 개장한 대진해수욕장은 전국 최고의 수질을 자랑하는 바닷물로 이름이 높으며, 대진해수욕장에서 병곡 고래불해수욕장에까지 이어지는 명사이십리의 백사장은 전국 각지에 유명하여 여름 휴양철에는 수많은 인파로 일대장관이 연출된다.
  면내에는 현재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예주문화예술회관이 조만간 준공될 예정에 있어, 이를 중심으로 괴시리의 전통마을과 3.1기념탑, 그리고 축산면 도곡리의 신돌석 의병장 출신지 성역화지역을 한데 묶는 북부 유교문화권의 개발이 완성되면, 전통문화와 충절을 배우는 산교육의 장(場) 뿐만 아니라 현대문화와 전통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문화의 고장으로 영해면은 새롭게 자리잡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4) 역대 면장 현황

8. 병곡면

1) 연 혁

  병곡면은 조선시대 영해부의 북면으로 1895년 5월 26일 영해부가 영해군으로 고쳐질 때 북초면(北初面)과 북이면(北二面)으로 되었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에 다시 병곡면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후기의 북면의 구성을 1789년 발간의 「호구총수」를 통하여 살펴보면 사천리, 항리, 이천리, 원황리, 연관리(連貫里), 하천리(霞川里), 송천상리(松川上里), 송천하리, 역리(驛里), 연평리, 휘리, 보곡리(保谷里), 거무역리, 아곡리, 영동리, 병곡육리(陸里), 병곡진백석육리(柄谷津白石陸里), 백석진리, 망곡리, 지경리의 20개로 구성되어 있었다. 1899년에 발간된 「경상북도영해군읍지(寧海郡邑誌)」에 의하면 휘리(揮里), 역리(驛里), 연평(蓮坪), 송천(松川:송하, 송상), 하천(霞川), 사천(沙川), 용암(龍巖), 항리(項里), 각리(角里), 연관(連貫), 이천(伊川), 원황(遠黃), 아곡(牙谷), 거무역(居無役, 默溪) 보곡(保谷), 영동(榮洞: 영상, 영하), 백석(白石: 백육(陸), 백진(津)), 망곡(網谷), 병곡(柄谷: 병육, 병진), 대포(大浦), 언곡(彦谷), 월의(月宜), 범흥(梵興), 종지방(鐘芝坊), 삼읍(三邑), 명곡(椧谷), 유금(有金), 지경(地境), 옹지곡(甕只谷), 금곡(金谷), 신답곡(新畓谷)의 31개의 리가 되었다.
  북면은 다시 북초면(北初面)과 북이면(北二面)으로 나누어지는데 북초면은 이천, 각리, 월의, 언곡, 항리, 사천, 용암, 신평, 원황, 대포, 송상, 송하, 휘리, 신기, 역리, 연평의 16개의 리로 되었으며, 북이면은 삼읍, 금곡, 유금, 지경, 백육, 백진, 병육(柄陸), 병진(柄津), 영상, 영하, 보곡, 거무역, 신답곡, 아곡, 옹지곡, 명곡, 범흥 등의 17개의 리로 되었다.
  이후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부군면 통폐합 때에 이 두면을 합치면서 북초면의 연평과 역리, 그리고 신기를 영해면으로 이속시키고, 북이면의 옹지곡은 평해로 이속시킨 후 14개 동으로 재편하여 병곡면이라 면명을 고쳤는데, 이때 새로이 생긴 동명(洞名)은 송천동(송상, 송하), 거무역동(거무역,묵계), 병곡동(병육, 병진), 원황동(원황, 대포), 사천동(항리, 사천, 용암), 이천동(이천), 삼읍동(삼읍, 명곡), 아곡동(신답곡, 아곡), 금곡동(금곡, 유금, 망곡, 종지방, 지경), 신평동(신평, 하천), 백석동(백육, 백진), 휘리동(휘리), 각리동(각리, 월의, 언곡), 영동(영동, 보곡, 범흥)이다. 1988년 5월 1일에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면의 구성

  1998년 12월 31일 현재 병곡면의 구성은 삼읍리, 금곡1·2·3리, 백석1·2리, 병곡1·2리, 영1·2·3·4리, 거무역리, 아곡리, 원황1·2리, 이천리, 각리1·2·3리, 사천리, 신평리, 송천1·2리와 1990년 1월 3일에 종전에 휘리를 덕천리로 고쳐 총 25개의 행정리와 14개의 법정리, 그리고 38개의 자연부락과 106개의 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면 소재지는 병곡리 125-3번지이다.
  병곡면은 군의 북쪽 관문으로 면적은 65.98㎢이며, 1998년 12월 31일 현재 세대수는 1,779세대로 인구는 4,801명이며, 이 중 남자는 2,318명, 여자는 2,483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면의 지세는 낙동정맥이 남으로 달리며 칠보산, 등운산이 산줄기를 동해바다에 던지며 넓게 산자락을 펼쳐주어 동해안에서는 드물게 넓은 평야를 만들어 주고 있다. 산세가 바다에까지 내려오므로 바다의 수심은 매우 깊은 편이다. 해안선은 단조로우나 군내의 다른 해안이 바위로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병곡면 해안은 명사이십리의 깨끗한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피서객과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고 있다.
  지계는 북쪽으로 울진군 평해읍과 접하고, 남쪽으로는 영해면, 서쪽으로는 창수면과 접하고 있으며, 동쪽은 동해와 접하고 있다.
  면의 주요한 생산기반은 넓은 평야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농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백석을 포함한 일부 해안마을에서는 멸치 등을 어획하여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면내의 교통은 면의 남북을 길게 가로질러 달리고 있는 7번 국도가 있으며, 해안을 따라 영해 대진과 병곡리를 연결해주는 해안 관광도로가 곧 개통을 앞두고 있어 교통은 매우 편리하다.

4) 역대 면장 현황
5) 병곡의 노래

  다음은 병곡출신의 교육자인 김진대가 작사하고, 이기주가 작곡한 병곡의 노래이다.

9. 창수면

1) 연 혁

  원래 영해가 영해부로 있을 때는 읍내면, 남면, 북면, 서면2도(西面二度, 오서(어)면 烏西(於)面), 석보면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하여 영해군으로 개칭될 때는 읍내면, 남면, 묘곡면, 서초면, 서이면, 북초면, 북이면, 석보면(石保面)의 8개 면으로 구성되었다. 이중의 석보면은 1906년에 영양군으로 이속되어 갔으며, 남은 7개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영해면, 축산면, 병곡면, 창수면으로 통폐합되어 4개 면이 되었다.
  이중에 창수면은 영해면의 서면과 서면2도가 통합되어 새로이 생긴 면이다. 영해군으로 개칭되기 전의 영해부의 서면과 서면2도의 구성을 1789년 발간의 「호구총수」를 통하여 살펴보면 서면은 인량리, 가산리, 신기리, 위정동리, 갈면리, 미곡리, 신리, 방개동리, 창수원동리(蒼水院洞里)의 9개의 리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면2도는 봉정리, 오촌리, 운계리, 삼계리, 탄동리(炭洞里), 인라리(仁羅里), 보림리의 7개의 리로 되어 있다.
  1899년에 편찬된 「경상북도영해군읍지」에 의하면 서면은 인량(仁良), 가산(佳山), 우앙현(雨仰峴), 신기(新基), 우정동(雨井洞), 일모소(日暮所), 갈면(葛面), 신리(新里), 방개동(方介洞), 창수원(蒼水院)으로 10개의 리이며, 오서면은 미곡(美谷), 오촌(梧村), 봉정(奉亭), 삼계(三溪), 보림(寶林), 인천(仁川), 수동(壽洞)의 7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서면과 오서면은 다시 1895년 5월 26일 영해부가 영해군으로 개칭될 때 다시 서초면(西初面)과 서이면(西二面)으로 고쳐지게 되었는데, 이때의 서초면의 구성은 비개(飛盖(蓋)), 가산, 구미(龜尾), 우현, 신기, 위정(韋井), 독재(篤才), 갈면, 일모, 방곡(芳谷), 벽수(碧水), 마현(馬峴), 율지(栗枝), 점구(店邱), 장구(場邱), 창수, 별항(鱉項)이며, 서이면의 구성은 미곡, 봉정, 광천(廣川), 오천, 운계(雲溪), 삼계, 굴곡(窟谷), 수동, 집희암(集喜庵), 자무기(者武基), 인아리(仁雅里), 대전(大田), 보림, 백청(柏(栢)靑)으로 구성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에 일제 총독부령(府令) 제111호에 의거하여 전국의 부군면이 통폐합될 때 서초면과 서이면은 인량동(비개), 가산동(가산, 구미, 우현), 미곡동(미곡, 광천), 오촌동(오촌, 봉정), 삼계동(삼계, 운계, 굴곡), 수동(수동, 집희암, 자무기), 인천동(대전, 인아리), 보림동(보림), 백청동(백청, 흘리, 망상곡), 창수동(창수, 율지, 점구, 장구, 별항, 방개동), 신기동(벽수, 방곡, 마현), 갈천동(갈면, 일모), 신기동(신기, 위정)으로 통폐합되어 13개 동으로 개편되면서, 면명을 창수면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1988년 5월 1일에는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면의 구성

  1998년 12월 31일 현재의 면의 구성은 인량1·2리, 가산1·2리, 신기1·2리, 갈천1·2리, 창수1·2리, 미곡1·2리, 오촌1·2리, 삼계1·2리, 수리, 인천1·2리, 보림리, 백청리로 23개의 행정리와 13개의 법정리, 그리고 44개의 자연부락과 76개의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 소재지는 신기리 56-4번지이다. 면 소재지는 가산1리와 인량2리에도 있었으며, 현 신기리로는 세번째 이전이다.
  군의 서북쪽에 위치한 창수면의 면적은 152.29㎢이며, 1998년 12월 31일 현재의 세대수는 1,075세대이고 인구는 2,823명으로 남자는 1,378명, 여자는 1,445명이다.

(1) 직원 현황(정원)
(2) 주요시설

3) 인문·자연환경

  지세는 낙동정맥이 남북으로 지나가는 가운데에 위치한 관계로 산세가 웅장하면서 험하다. 특히 울진 온정의 백암산(白岩山) 지맥과 등운산이 동북에 뻗어있어 해안으로부터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북쪽은 읍령(泣嶺), 맹동산(萌童山), 삼승령(三僧嶺), 독경산(讀經山) 등이 솟아 있어 명승절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남으로는 형제봉(兄弟峰)이 솟아 있어 면의 사방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형적인 산지형 지세이다. 따라서 산의 면적이 차지하는 비율은 군내에서 가장 높다. 그러나 산지가 많고 산림이 울창하여 경지면적은 비교적 적으나 임산자원은 풍부하다.
  소하천으로는 울령천(蔚嶺川)과 자계천(紫溪川)이 있다. 이들 두 하천은 두갈래로 흘러 내려오다 갈천1리의 옥천(玉川) 뇌택(雷澤)에서 합쳐져 미곡, 가산, 인량을 지나 송천에 합류하여 동해로 흘러 들어가며, 창수면의 대부분의 마을은 이 두 하천을 따라 형성되고 있다.
  지계로는 북쪽으로 울진군 온정면과 접하며, 서쪽으로는 영양군 수비면과 접하고, 동쪽은 병곡면과 영해면에 접하고 있으며, 동남쪽은 영해면과 접하고 있다.
  옛부터 창수는 영해와 영양, 그리고 안동, 서울을 이어주는 길목으로 조선시대의 영해의 선비들이 서울의 과거를 보러 갈 때 반드시 거쳐가는 곳이었으며, 서울에서 영해로 새로이 부임하여 오는 관리들의 통행길이었다. 또한 동해안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안동 등지의 내륙으로 운송해가던 통로였으며, 내륙지역의 문화를 해안지역으로 가져오고 해안지역의 문화를 내륙지역으로 전달하여 주던 중요한 통로였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러한 길이 지방도(地方道) 918번으로 승격되어 완전히 포장된 도로가 되어 여전히 영해와 영양을 이어주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지난 과거와는 달리 중요한 교통로(交通路)로써의 역할보다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관광도로로써 점차 그 명성을 얻어 가고 있다.

4) 역대 면장 현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