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하의 청년 사회단체 운동

  1894년의 갑오경장에 의하여 반상(班常)의 구별이 완전히 철폐된 이후에도 시민 청년단체 운동이 우리나라에서는 자리잡지를 못하였는데, 이는 수 천년간 내려온 전통적 신분관계 및 인습들이 하루 아침에 없어지지 못하고, 일반 민중들 삶에 그대로 존속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들의 의식수준이 갑오경장 등의 제도개혁의 수준에 따라 가지 못하고 고래(古來)의 근왕충군(勤王忠君)과 신분계급 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데에 그 일차적 원인이 있었으며, 나아가 이들의 경제적인 능력이 스스로 독립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구적인 청년단체가 결성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구의 문물이 전해지고, 갑오경장, 병신창의, 을사조약 등을 거치면서 백성들의 의식도 점차 바뀌어 일제에 의하여 한반도가 점령당하는 1900년대 이후에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여,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의거를 계기로 적극적으로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는 종래의 신분적인 질서에 의한 소수 특권층의 힘보다 민중의 결집된 힘이 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3.1독립만세의거를 통하여 새롭게 인식함과 더불어 항일 독립을 위해서는 이러한 민중의 힘을 보다 효과적으로 결집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 지역도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1920년대에 들어와서 영덕청년회를 비롯하여 많은 청년단체가 결성되는 등 청년단체들이 결성되어 식민지 백성들을 계몽시키는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야학운동을 하기도 하는 등의 많은 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새로운 청년문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러한 청년단체의 계몽운동과 달리 조선시대 후기까지 대접받지 못하던 백정들의 조직인 형평사(衡平社) 영덕분사(盈德分社)가 조직되어 신분상승 운동을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지역도 명문가 중심이 아닌 갑오경장 이전까지의 하층계급이었던 이들도 자기의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시기의 청년 사회단체 운동에 있어서 특기할 만 일이라 할 수 있다. 1925년 12월 30일의 시대일보에 영덕형평분사의 임시총회의 정황을 상세히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사회적으로 깊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군내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각자의 다양한 성격을 가진 여러 청년사회단체들이 기성세대들 보다 자유로운 사고를 가진 청년들에 의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없이 설립되어 애국계몽운동과 새로운 지식의 보급을 위한 교육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식민지 치하에서의 청년들의 좌표를 설정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는데, 이러한 운동이 우리 지역에까지 영향을 미쳐 우리 지역에서도 많은 청년단체들이 설립되어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강연회·토론회와 연극 등의 오락회를 통하여 일반대중을 계몽시켰다.
  이와 같이 일제치하에서 활동하였던 군내의 청년사회단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영덕청년회 : 1921년 8월에 창립함, 회장 정재홍(鄭才泓).
1923년 7월에 임원을 개선하여 회장 문명기(文明琦), 부회장 이상욱(李尙郁), 총무 윤영조(尹永祚), 서무부장 강기영(姜琪永), 사업부장 정계만(鄭桂滿), 심사부장 정예술(鄭禮述), 서무간사 노병곤(盧炳坤), 회계간사 신노술(申魯述), 지육부장 정원석(鄭元石), 덕육부장 강문치(姜文致), 체육부장 정기모(鄭基模), 실업간사 유원술(劉元述), 심사간사 강보근(姜甫根), 서기 유석기(劉石基), 이종환(李鍾煥) 외에 8인의 평의원으로 구성하였다.

강구청년회 : 강구청년회에 대해서는 임원 명단이 보이지 않으나, 1925년 3월에 회장을 한규열(韓圭烈)로 하였다고 한다.

남정청년회 : 남정청년회에 대하여도 청년회를 구성하였으며, 청년회 사무실을 남정면 소재지에 두었다.

삼사(동지)청년회 : 1925년 12월 20일 삼사동동지회를 삼사동청년회로 개칭. 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김경선 (金涇先), 유종민(柳鍾民), 김학순(金學順), 최순득(崔順得), 김순연(金淳演), 이복술(李福述), 김성달(金成達), 이종옥(李鍾玉) 등이 활동하였다.

영덕청년연맹 : 강구청년회의 발기로 1925년 12월 28일 창립됨. 임원으로 박도석(朴道石), 노현식(盧現植), 이봉구(李鳳逑), 김태범(金泰範), 김학순(金學淳), 이건우(李建雨), 유웅경(劉熊慶), 이걸소 (李傑笑) 등이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부청년회 : 대부청년회는 1926년 4월 25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총회를 개최하지 못하고 있다가 동년 6월 18일에 창립총회를 가졌다.
현재까지 청년회의 집행부 구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다소 아쉬운 점은 영덕읍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지역의 청년단체에 대하여는 간략하게나마 기록을 찾아서 실었지만, 영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지역의 청년단체에 대하여는 싣지 못한 점이다. 영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지역에도 활발한 청년운동이 있었으리라 생각되어지지만 신문을 비롯한 어느 곳에든지 자료를 찾지 못하여 기록하지 못하였다.
  한편 청년단체들의 애국계몽운동과 더불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으로 민족단일 조직을 형성하여 민중들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민족적 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한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월남 이상재를 회장으로 하여 1927년 2월 15일 창립된 「신간회」이다.
  신간회는 창립되자마자 전 민중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로 전국 200개의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의 수가 3만 4천여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창립 당시부터 민족진영과 사회주의진영간의 불화와 일본 군경들의 심한 감시와 탄압으로 결국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 지방에도 신간회 영덕지부가 1927년 8월에 결성되어 활약을 하다가 1931년 5월에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신간회영덕지회」는 1927년 8월에 3.18만세의거에 참여한 강우근을 지회장으로 선임하고, 부지회장에는 영덕청년회에 활동한 정예술을 선임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창설된 신간회영덕지회는 영덕엽연초조합 자리에 회관을 건립하고 동년 11월에는 동지회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다음과 같은 운동을 전개하며 민중들의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1, 보통학교 후원회를 조직, 무산아동의 수업료 면제
2, 학생들의 조선어 교육을 학교와 교섭
3, 한국인 착취기관의 철폐와 이민정책을 반대
4, 1919년 제정된 제령(制令) 2조 및 조선인에 대한 특수취체(取締) 법규의 철폐
5,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시, 제국주의 식민지 교육 반대

 그러나 이러한 운동도 일제 고등경찰의 극심한 감시와 방해공작, 그리고 지회 내부의 민족진영과 사회주의진영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활동이 여의치 못하였다. 이 때의 신간회 간부로는 강우근·정예술·김우일(金宇一)·허도(許道)·유웅경·강호근(姜浩根)·강대지(姜大智)·이기석(李基錫)·주병호(朱秉豪)·홍영표(洪永標)·정재홍·정계만·박문찬(朴文燦) 등이 있었으며, 또한 군내 각지에서 300여명의 회원이 가입되어 신간회의 강령에 따라 항일구국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8월에 결성된 신간회영덕지회가 4년여의 활동을 끝으로 1931년 5월 공식적으로 해산하자 신간회 지회는 회원 50여명이 다시 모여 신간회가 결성되기 전인 1926년 12월 28일 창립된 영덕청년연맹의 기관지였던 야봉을 매개체로 「야봉사(野烽社)」라는 단체를 구성하여 지역의 농어민을 계몽하는 한편 독립의식을 고취하여 나갔으나, 이 역시 내분으로 2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