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군정시대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이 되자 우리 민족은 당연히 우리들에 의한 자주독립국가를 경영하여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한민족의 기상을 만방에 펼치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물리치고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은 이러한 민족의 열망을 무시하고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미군을 통한 군정을 실시하였다. 경상북도의 경우에는 광복된 지 한달 보름 뒤인 1945년 10월 1일에 가서야 미군이 대구부(大邱府)에 진주하여 다음날 도청을 접수하고 10일에 미군 중령이 도지사로 취임하여 일본인 관리들의 파면, 도청내의 각부 책임자의 임명 등을 완료하고 11월 13일에 가서야 도내 전역으로 미군정을 확대 실시하게 되었다.
  당시 경상북도에 진주하여 군정을 담당한 미군정대(美軍政隊) 중에 영덕지역을 관할한 부대는 제71군정대(軍政隊)였다. 제71군정대는 영덕 뿐만 아니라 영일군·영천군·경주군·청도군·경산군·울릉도를 각각 관할하면서 군정을 펼쳤다.
  광복 후 미군정 시대에 들어와서도 전국의 지방제도는 일제시대의 부·군·읍·면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여 왔는데, 당시 경상북도에는 1부·22군·1도가 있었으며, 군의 하부기관으로는 읍·면이 있었다.
  미군정 시대의 군 행정조직과 군정 기간 동안의 영덕군수 명단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으며, 일제 패망시와 미군정 기간 동안의 영덕군의 행정직제는 표 <4-51>과 같다.

(미군정 기간의 영덕군수)

임흥재(任興宰) → 정기모(鄭基模) → 엄종섭(嚴宗燮) → 오규수(吳圭洙)
→ 황태연(黃苔淵)

2. 제1공화국시대

  1945년 11월 13일부터 도내 전역에 실시된 미군정은 1948년 7월 17일 제헌 헌법이 제정·공포되고, 뒤이어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국가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종언을 고하고 제1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제1공화국 시대의 영덕군의 행정기구를 살펴보면 미군정 시대의 기구가 그대로 존속되었는데, 크게 내무·산업·보건후생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1949년 10월에 보건후생과가 폐지되어 군의 행정조직은 내무·산업 양과의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이러한 양과 체제는 1961년 10월에 가서 재무과와 건설과, 그리고 교육과가 신설되면서 이러한 체제는 새로이 변경된다.

표 <4-52>는 1961년 10월의 직제개편이 있기 전의 영덕군의 직제를 나타내어 주는 것으로 내무과에는 5개의 계가 소속되어 있으며, 산업과에서는 6개의 계가 소속되어 지역 군민들을 위한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한편 제1공화국 시대의 군청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던 군청 공무원과 군청내의 기본조직이었던 내무과와 산업과의 업무분장 내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군정을 담당하였던 공무원은 군정의 책임자인 군수와 주사, 기사, 장학사, 산림주사, 서기, 기원(技員), 산림주사보 등이 근무하며, 군수 및 상급관청의 지시 혹은 협조를 받아 업무를 처리하였다.

(내무과)

공무원의 임면·상벌과 포상, 의식의 집행, 문서의 수발, 관인(官印)관리, 통계, 공보, 읍면 학교비, 기타 자치단체와 공공조합의 지도감독, 지방행정의 민주적 계도, 지방 공무원의 교양 및 후생, 참사회(參事會) 선거, 회계, 용도, 재산관리, 영선(營繕), 교육과 학예, 사회, 문화, 지방세, 기타 제수입, 보건, 후생, 근로, 부녀, 운수, 토목, 건축, 기부금품의 통제 및 타 과에 속하지 않은 사항.

(산업과)

농정, 농지분배, 농업, 상공업, 광업, 산림, 제지, 양정(糧政), 축산, 잠정(蠶政), 물가, 물자, 도량형 및 산업 경제단체의 지도감독.(1952년 4월에 귀속농지와 부대 재산관리를 포함하였음.)

3. 제2공화국시대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의 과도정부를 거쳐 민주당을 중심으로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으로 하여 1960년 12월 29일에 성립된 것이 제2공화국이다. 제2공화국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전복될 때까지 5개월여의 짧은 기간동안 존속한 정권이다.
  편의상 여기서는 5.16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를 지도자로 하는 군부(軍部)의 쿠데타 주

역들이 군정을 실시하다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기까지의 기간을 포함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자유당 정권의 폭압과 부정선거에 저항한 많은 국민들에 의하여 자유당 정권이 붕괴된 후, 이의 반사적인 이득으로 민주당이 수많은 국민들의 열망 속에 제2공화국을 수립하였다. 민주당 정권인 제2공화국은 정권을 획득하자 먼저 민주주의의 기본인 지방자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각 지방행정의 기초단위인 읍·면 의회를 먼저 구성하고자 하였다. 이어서 민선 읍·면장을 선출하여 완전한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의 이러한 시도가 미쳐 시행도 되기 전에 5.16쿠데타가 발생하여 제2공화국 자체가 무너지게 되었으므로 제2공화국 나름의 특색있는 지방자치와 지방행정은 펼쳐지지도 못하였다.
  제2공화국시대의 우리 군의 행정직제의 변화는 먼저 5.16 후 1961년 10월에는 내무부 통첩 894호인 「군직제준칙」에 따라 각 군에 재무과와 건설과가 신설되고 교육과가 새로이 설치되는 변화가 있었다. 따라서 군은 종래의 2개 과에서 5개 과로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1962년 3월에는 농촌진흥법이 공포됨에 따라 농촌지도소가 설치되었으며, 6월에는 공보실이, 9월에는 법률 제1160호에 의하여 보건소가 설치되는 등의 직제개편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제2공화국 시대의 영덕군의 직제표는 아래의 표 <4-53> 와 같다. 이 때의 군 행정조직 기구는 1실 5과로 군 행정 및 읍·면 행정을 영위하였다.

4. 제3공화국시대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에 따라 시작된 제3공화국은 군정기간 동안 취해진 행정기구의 개편의 연속선상에서 지방제도의 개편을 시도하였다. 1963년 12월의 「교육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의 제정에 의하여 1964년 2월 11일에는 각 군에 설치되어 있던 교육과가 폐지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덕군에 설치되었던 교육과도 폐지되었다. 따라서 군 행정조직은 종래의 1실 5개 과에서 1개 과가 줄어들게 되었다.
  1967년 5월에 들어와서는 수산행정의 전문화와 어민들의 어로활동에 편의를 제공하고자 경상북도의 북부 동해안의 3개 군에 수산과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 때 영덕군에도 수산과가 설치되어 바다를 생계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어민들에 대한 지원에 만전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5월에는 임야 면적이 5ha 이상인 군 지역에 산림과를 신설할 때 영덕군도 여기에 해당되어 산림과가 신설되었다. 또한 이 해 9월에는 공보실이 문화공보실로 개편되었으며, 이듬해인 1969년 1월에는 각 군에 감사실이 새로이 설치되었다.
  위와 같은 행정직제의 변천과정에 따라 1970년 1월 1일 현재 영덕군의 직제표를 살펴보면 표 <4-54> 와 같다.

5. 제4공화국시대

  제3공화국의 대통령이던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통하여 조국의 근대화를 앞당기고,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점차 가열되어 가는 남북간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명분으로 10월유신을 일으켰다.
  10월유신의 주요한 특징은 이제까지의 대통령의 선출방식이 국민들에 의한 직접선거에 의한 것이었으나, 10월유신에 의하여 새롭게 제정된 헌법은 통일주체대의원이란 면단위 대의원을 선출하여 이 대의원들이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선제로 선출방식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바뀐 소위 유신헌법에 의해서 박정희는 다시 대통령에 선출되어 1972년 12월 27일에 대통령직에 취임하였다. 따라서 유신헌법으로 새로이 박정희가 대통령에 취임한 1972년 12월 27일부터 제4공화국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제4공화국 시대의 지방제도의 변천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제4공화국이 시작되기 직전인 1972년 5월부터 일부 구조조정이 이루어져서 공무원 정원감축이란 명분으로 1969년에 설치된 각 군의 감사실이 폐지되었으며, 1973년 1월에 들어와서는 새마을운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종전에 새마을계로 신설된 것을 새마을과로 확

대 개편하였다. 이같이 과로 개편된 새마을과는 1974년 12월에 이르러 새마을사업을 보다 알차고,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하여 각 군에다 새마을 담당 부군수실을 신설하면서 새마을과를 폐지하고, 부군수로 하여금 새마을 업무를 전담하게 하였다.
  1975년 8월에 들어와서는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신속히 대응하기 위하여 새로이 민방위제도를 도입하여 이를 담당하는 민방위과를 신설하여, 잘살기 위한 새마을운동과 국가방위를 위한 전국민의 임전태세를 확립하였다. 이후 1979년 4월에는 점증하는 사회복지분야에 대한 요구에 수준 높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사회과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1979년에는 종래의 새마을운동을 한 차원 높여서 실질적인 잘살기 운동이 되게 하기 위하여 1974년 12월에 설치되었던 새마을담당 부군수실은 새마을 담당기능을 없애고 군수의 일반 행정업무를 보좌하는 부군수제로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제4공화국 시대의 군 행정조직의 구성을 1980년도를 기준으로 하여 살펴보면 앞의 표 <4-55>와 같다.

6. 제5공화국시대

  제5공화국의 지방행정은 제4공화국 시대의 지방행정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다만 몇 가지의 제도개편만을 실시하여 지방행정에 임하였다. 특히 제5공화국 시대의 두드러진 지방제도의 개편은 부군수제의 폐지를 들 수 있다.
  부군수제는 1974년 12월에 새마을 담당 부군수실로 설치되었던 제도로써 도입된 것을 1979년에 들어와서 새마을 담당기능을 없앤 일반 부군수제로 개편하였다가 제5공화국이 들어선 1981년 11월 17일에 이마저도 폐지하여 부군수제를 완전히 폐지하였다.
  당시의 부군수제의 폐지는 당해 연도에 해당하는 부군수의 임기는 보장해 주는 것으로 하였기 때문에 영덕군에서는 현직 부군수인 김학곤 부군수의 임기만료일인 1983년 3월 3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부군수제가 폐지되게 되었다.
  표 <4-56>은 1984년 현재의 영덕군 행정직제표이다. 이 때의 영덕군의 행정조직은 1실 9과 2소 38계로 구성되어 군내의 각 9개 읍면과 더불어 지방행정을 펼쳤다.
  제5공화국의 중반기인 1985년에는 군의 행정조직을 개편하여 새마을과에 국토미화계를 새로이 신설하여 1실 9과 2소 39계가 되었으며, 이어 12월에는 부군수제를 다시 부활시켜 군수의 행정업무를 보조하도록 하였다.
  1987년 1월 1일에는 다시 군수의 직할기관으로 위민실을 신설하였으며, 또 문화공보실

내에 관광문화재계를 신설하였으며, 사회과에 의료보장계와 환경위생계를 새로이 신설하여 변화하는 주민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산업과에 농어촌개발계를 신설하고 농촌지도소에 기술담당관제를 신설하여 발전하는 농촌사회의 선도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직제개편의 결과 1987년 현재 영덕군의 행정직제는 2실 9과 2소 42계가 되었다. 표 <4-57>은 1987년 현재의 영덕군의 행정직제표를 나타낸 것이다.

7. 제6공화국시대 이후 지방행정

  1988년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시작된 제6공화국 아래에서도 영덕군의 행정직제의 변화는 상당하였다. 이러한 행정직제 개편 중에 우선 1988년에 신설된 기획실을 들 수 있다.
  기획실은 종전의 내무과에 소속되어 있던 기획예산계를 기획계, 예산계로 분리한 후 서무통계계에서 분리하여 나온 통계계를 합쳐서 새로이 기획실을 신설한 것이다. 따라서 1989년도의 군 행정직제는 3실 9과 2소가 되었다.
  1989년에 들어와서는 군내의 위민실과 농촌지도소의 기술담당관제가 폐지되고 새로이 사회지도과와 기술보급과가 신설되어 군 행정직제는 2실 11과 2소 59계로 확대되게 되었다.
  1991년에 들어와서는 지역경제과와 환경보호과, 지적과, 가정복지과, 그리고 의회사무과가 새로이 신설되었으며, 1992년에는 도시과가 추가로 신설되어 1992년 현재에는 2실 17과 3소 67계(본청)로써 군 행정을 펼쳤다.
  노태우대통령의 제6공화국 후반인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외에 4인의 후보가 출마하여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결과 김영삼 후보가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따라서 김영삼 정권인 문민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문민정부 아래에서도 영덕군의 일부 행정직제의 변천이 있었다. 특히 1993년에는 종래에 중요시 되었던 새마을과가 폐지되고, 대신에 사회진흥과가 신설되어 군 행정조직은 2실 15과 3소 65계가 되었다.
  1995년에 들어와서는 가정복지과가 가정복지계로 축소되면서 과 자체가 폐지되어 사회과 소속으로 되면서 사회과가 사회복지과로 개편되었다. 한편 도시과도 이때 폐지되어 새로이 신설된 관광개발과가 도시과의 기능 중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문화공보실의 기능도 줄어들어 공보계로 축소되면서 기획실 소속이 되어 문화공보실 자체가 폐지되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에는 제1기 전국동시지방선거가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되어 명실상부한 지방화시대를 열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지방화시대를 맞이하여 지방정부의 행정 및 정책 개발능력을 배양하기 위하여 각 지방의 조직을 일부 개편하였는데,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정책개발실의 신설이다.
  이때의 신설된 정책개발실은 행정경험이 없는 기초자치단체장의 정책개발을 보좌하고 지방자치시대에 있어서 그 지역에 알맞는 정책을 개발하기 위하여 새로이 신설하였다. 이외에도 지방화시대의 대민 행정서비스의 강화를 위하여 민원봉사실이 추가로 신설되기도 하였다.
  이로써 영덕군의 행정직제는 3실 14과 2소 67계가 되어, 지방화시대의 군행정을 전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