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개 설

  인간은 연장을 만들고 연장을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한다. 이 연장을 만드는 것이 공업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 연원은 아득한 시기까지 올라갈 수 있으나, 남아 있는 사료가 없어 이의 전모를 파악하기 힘들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시작을 선사시대에까지 확대하여 볼 수 있으나, 지금 현재에는 그 상세한 것을 알 수는 없다.
  또한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관수용이나 민수용으로 많은 무기나 연장이 제조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이들 또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그 전모를 알아보는데 곤란한 점이 많다. 따라서 여기서는 조선시대의 공업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공업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공업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기의 공업은 대체로 수공업이 중심이었는데, 이들 수공업은 관영수공업과 민영수공업으로 나누어 질 수 있는데, 관영수공업은 왕실의 수요에 대응하여 공장적(工匠籍)에 등재한 장인들의 사역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중앙의 각 관청에 속해 있는 경공장(京工匠)과 지방의 도나 현에 속에 있는 외공장(外工匠)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민영수공업은 전업적 수공업과 농업 등을 주업으로 하는 부업적 수공업자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 전기 관영수공업은 명목에 불과하였으며, 민영수공업의 비중과 역할이 매우컸는데, 민영수공업자들의 활동은 주로 놋그릇, 농기구, 갓, 장도(粧刀) 제조분야에서 두드러졌다. 그러나 14세기 이래 장인들은 이른바 공상천예(工商賤隸)로서 사회의 최하급으로 대우받았으며, 이런 대우는 17세기 이후까지 계속되어 서구와 같이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공업발전의 전기(轉機)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되었는데, 양난을 겪으면서 무기류 등에 대한 수요의 급증과 황폐화된 농경지를 개간하기 위한 농기구류 등의 수공업제품의 수요가 급증하였으며, 이후 대동법의 실시로 실물 화폐제도가 발전되어 17세기 후기에는 이들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최하급 신분으로 처우받던 장인들은 그들의 직업에 긍지를 갖지 못하였고 문자를 해독한 사람도 드물어 이 당시 활동하였던 수공업자들 스스로가 제조방법이나 판매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 당시의 수공업을 이해하는데는 상당히 곤란한 점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조선시대의 수공업은 조선 말기에 이르러 자본의 축적에 의한 자생적 공업화가 조금씩 싹트기 시작할 무렵, 대규모 자본과 선진기술을 가진 일제의 경제적 침투로 결국은 우리나라 공업은 서구 제국과 같이 부국강병에 이르는 수단이 되지 못하고, 그 세력을 잃어가다가 일제에 의하여 한일병탄이 되자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일제의 공업화 정책으로 편입되는 기형적인 발달을 하게 되었으며, 종국에 가서는 태평양전쟁을 위한 군수품 생산기지로 전락하여, 국토 전체에 대한 기형적인 공업발전이 되어, 광복 이후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1. 일제하의 영덕의 공업

1) 일제하의 직업별 인구현황

  한일병탄 후 1920년까지는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하여 공업화의 상당한 기반을 굳혔고 이후 연평균 10%의 높은 성장을 보였으며, 1930년대에는 연평균 13.5%의 높은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전쟁 준비로 군수공업만 발전한 기형이었고 공업 시설이 북한지역에 편중되어 해방 이후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일제 강점하인 1936년도 발간의 「경북대감」에 의하여 영덕군의 직업별 인구실태를 살펴보면, 표〈5­57〉과 같은데, 표에 따르면 당시 공업부문에 종사한 인구는 영덕군 전체 인구의 1.8%에 불과한 1,419명(단 일본인, 중국인을 포함한 숫자임)으로 그 수준은 미미하였다.

2) 일제하의 지역의 한지 생산

  영덕한지는 조선시대 이래 관청의 소모품과 대중국 교역품으로 이름이 높아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영해와 영덕지역에서 한지생산을 위하여 많은 닦나무를 심어 한지생산을 장려하였다. 특히 물이 좋은 창수지역과 지품지역, 달산지역에는 이러한 한지공장이 발달하여 조선시대에 전국 한지공급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도 조선시대의 수공업 형태의 한지 생산방식이 그대로 전승되어 지역 각 농가의 주요한 공산품으로 지역경제의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경북대감」에 의하면 당시 군내의 닦나무수는 1,872,980주(株), 한지제조 공장수는 67개소, 생산가격은 49,286원에 이르렀다. 이는 당시 포항지역의 닥나무 수 2,075,500주, 생산가격 44,190원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이때에도 한지생산의 주산지는 지품으로 한지생산량의 47%를 생산하였다. 표〈5­58〉은 일제하의 군내 한지생산 현황을 나타낸 것이다. 표에 의하면 달산의 경우는 한지생산량이 적은 반면 가격이 많은 것으로 나오는 것은 종이질이 좋은 고급지가 주로 생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생산된 한지는 국내 뿐만 아니라 만주일대와 북지나까지 수출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대용지 또는 가옥 구조 등의 변화에 따라 수요량의 감소로 지품면 도계리 일부 농가만 생산하고 있을 뿐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3) 기 타

  영덕군은 농업과 어업을 생산수단으로 하여 발전하여 온 까닭에 산업화가 전국 단위로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대규모의 공장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도 특산물을 생산하는 특유의 공예기술을 소지하고 있는 분이 많이 있었다.
  그중 하나로 영덕 “옹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옹기제조는 옛부터 내려오면서 크게 성행한 것으로 옹기를 만드는 동리의 명칭을 독점, 혹은 독지골로 부르는데, 군내의 곳곳에 이러한 명칭이 붙은 동리가 많은 것도 모두 이와 무관하지 않다. 특히 지금의 지품면 삼화리는 옹기제조의 대표적인 곳이었다.
  독점이란 “옹기(독)”를 만드는 곳으로 여기서 생산되는 각종 도기류는 서울, 대구, 부산 등의 큰 도시로 물건들이 실려나가면서 지품 삼화의 옹기류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얻어지는 수익금은 지역경제에 상당한 보탬을 하였다.
  이외에 영덕지역에서 생산활동을 한 몇 개의 회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영덕주조(酒造) 주식회사

  이 회사는 1928년에 설립된 것으로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하여 1935년에는 1800석(石) 규모로 발전되었다. 담당지역은 영덕면 일원으로 하였다. 중역진의 대부분은 일인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강봉길(姜奉吉)이 취체역으로 있었다.

(2) 영덕국자(麴子,누룩) 주식회사

  이 회사는 1935년 5월 18일에 종전의 규모에서 주식회사로 변경하여 새로이 창설한 것으로 자본금이 7만원에 실불입금(實拂入金)이 3만5천원으로 시작하였다. 1년에 소맥(小麥) 2천 5백석을 사용하여 3십만개의 누룩을 만들어 영덕군 및 울릉도, 울진의 일부 지역에까지 공급하였다. 이 회사의 한국인 중역으로는 강봉길, 김두명(金斗明)이 있었으며, 감사에 도영진(都榮鎭), 김영한(金英漢)이 있었다.

(3) 강구주조 합자회사

  이 회사는 1929년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36년에는 하루에 막걸리 1천 5백석, 약주(일명 ‘문명’) 1백석, 소주(일명 ‘신선’) 7백석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각종 주류는 강원도 연안, 동해중부선 방면, 포항 역전에 지점을 설치하고 전문적으로 소주만 만드는 양조공장도 운영하였다. 회사의 운영은 문명기(文明琦)와 문왈수(文曰壽) 부자가 하였으며, 1933년 전국주류품평회에서 특선하는 등 술맛은 좋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