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제하의 영덕의 공업 1) 일제하의 직업별 인구현황 한일병탄 후 1920년까지는 일제는 식민지 수탈을 위하여 공업화의 상당한 기반을 굳혔고 이후 연평균 10%의 높은 성장을 보였으며, 1930년대에는 연평균 13.5%의 높은 성장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전쟁 준비로 군수공업만 발전한 기형이었고 공업 시설이 북한지역에 편중되어 해방 이후에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
2) 일제하의 지역의 한지 생산
영덕한지는 조선시대 이래 관청의 소모품과 대중국 교역품으로 이름이 높아 그 명성이 자자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영해와 영덕지역에서 한지생산을 위하여 많은 닦나무를 심어 한지생산을 장려하였다. 특히 물이 좋은 창수지역과 지품지역, 달산지역에는 이러한 한지공장이 발달하여 조선시대에 전국 한지공급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
이렇게 생산된 한지는 국내 뿐만 아니라 만주일대와 북지나까지 수출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대용지 또는 가옥 구조 등의 변화에 따라 수요량의 감소로 지품면 도계리 일부 농가만 생산하고 있을 뿐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3) 기 타 영덕군은 농업과 어업을 생산수단으로 하여 발전하여 온 까닭에 산업화가 전국 단위로 이루어진 오늘날에도 대규모의 공장을 갖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도 특산물을 생산하는 특유의 공예기술을 소지하고 있는 분이 많이 있었다. (1) 영덕주조(酒造) 주식회사 이 회사는 1928년에 설립된 것으로 자본금 3만원으로 시작하여 1935년에는 1800석(石) 규모로 발전되었다. 담당지역은 영덕면 일원으로 하였다. 중역진의 대부분은 일인이었으며, 한국인으로는 강봉길(姜奉吉)이 취체역으로 있었다. (2) 영덕국자(麴子,누룩) 주식회사 이 회사는 1935년 5월 18일에 종전의 규모에서 주식회사로 변경하여 새로이 창설한 것으로 자본금이 7만원에 실불입금(實拂入金)이 3만5천원으로 시작하였다. 1년에 소맥(小麥) 2천 5백석을 사용하여 3십만개의 누룩을 만들어 영덕군 및 울릉도, 울진의 일부 지역에까지 공급하였다. 이 회사의 한국인 중역으로는 강봉길, 김두명(金斗明)이 있었으며, 감사에 도영진(都榮鎭), 김영한(金英漢)이 있었다. (3) 강구주조 합자회사 이 회사는 1929년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36년에는 하루에 막걸리 1천 5백석, 약주(일명 ‘문명’) 1백석, 소주(일명 ‘신선’) 7백석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각종 주류는 강원도 연안, 동해중부선 방면, 포항 역전에 지점을 설치하고 전문적으로 소주만 만드는 양조공장도 운영하였다. 회사의 운영은 문명기(文明琦)와 문왈수(文曰壽) 부자가 하였으며, 1933년 전국주류품평회에서 특선하는 등 술맛은 좋았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