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절 고시문(古詩文)의 향기

여기에서의 고시문이란 대개 한자를 빌려 개인의 정서와 생각을 나타내고 있는 문학형식을 말한다. 또한 고시문은 그 나타내고 있는 영역이 매우 다양하고, 그 역사도 길며, 달리 한문학이라 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덕의 고시문도 그 역사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지역과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인사들에 의하여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고시문을 「동문선(東文選)」을 통하여 살펴보면 사(辭)·부(賦)·고시(古詩)·율시(律詩)·절구(絶句)·배율(排律)·조칙(詔勅)·교서(敎書)·제고(制誥)·책문(冊文)·비답(批答)·표전문(表箋文)·계(啓)·장(狀)·노포(露布)·격문(檄文)·잠(箴)·명(銘)·송(頌)·찬(贊)·주의(奏議)·차자(箚子)·잡문(雜文)·서독(書牘)·기(記)·서(序)·설(說)·논(論)·전(傳)·발문(跋文)·치어(致語)·변(辨)·대(對)·지(志)·원(原)·첩(牒)·의(議)·잡저(雜著)·책제(策題)·상량문(上樑文)·제문(祭文)·축문(祝文)·소문(疏文)·도량문(道場文)·재사(齋詞)·청사(靑詞)·애사(哀詞)·뇌문(文)·행장(行狀)·비명(碑銘)·묘지(墓誌) 등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그 범위가 광범위하다.
  따라서 한자가 우리나라에 유입된 후에 우리 지역에서 이루어진 고시문도 대개 위와 같은 범주 내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 역사도 오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상고시대와 삼국시대, 고려시대를 통하여 다양한 범위에서 문학활동이 우리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시문의 제목이나 시문이 남겨진 것은 대개 고려말 이후부터이다.
   고려 때에는 김택(金澤)의 “무가정원운(無價亭原韻)”, 안축(安軸)의 “기제단양북루시(寄題丹陽北樓詩)”, 가정 이곡의 “무가정차운”, “영해부신작소학기”, 담암 백문보(淡庵 白文寶), 박효수(朴孝修), 박치안(朴致安)의 시구와 목은 이색의 관어대소부, 유사정기(流沙亭記) 외에 여러 편의 시,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시들이 있으며, 특히 불교문학의 백미(白眉)라고 하는 나옹선사의 게송 등이 있다. 따라서 이들을 통하여 고려말에 있어서 우리 지역의 문흥(文興)를 알 수 있다 하겠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적으로 이어저 권근, 변계랑, 안로생, 홍여방 등의 외지의 시인 묵객들과 우리 군 태생의 많은 문인들의 시문들이 조선 5백년 동안 각종 문집류 등에 등재되어 지역의 문풍을 날렸으며,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많은 문사들이 주옥같은 시문을 남겨 지역문화를 한차원 높여 승화시키는데 기여를 하였다.
   따라서 현재 남아 있는 고려와 조선시대, 그리고 근현대의 문적(文籍)과 우리 지역과 연고가 있는 분들 중에 지역의 지명을 통하여 지역의 정서를 드러낸 시문을 간택하여 지역 한문학의 일단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만 고려시대의 고시문은 특별한 구분없이 기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자 하며,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고시문은 산수(山水), 루정, 사찰, 그리고 기타 부(賦)와 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짧은 기일과 부족한 재주로 이 분들의 문의(文意)를 다 드러내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지면 관계상 모든 분들의 시문을 싣지 못함을 한(恨)하고자 하며, 다음 기회에 반드시 실어드릴 것을 약속드리고자 한다.

1. 고려시대의 고시문

가정 이곡의 「영해부신작소학기」에 의하면 영해에도 상당한 유생(儒生)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들이 남겨놓은 문적(文籍)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겨우 우거한 가정 이곡과 창수면 가산리 태생의 나옹선사, 영해면 괴시리 출생의 목은 이색 등의 시부와 이 지역을 스쳐간 이들의 시문을 통하여 당시의 편린을 살펴볼 수 밖에 없다.

1)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단양 북루에 제(題)하여 부치는 시(寄題 丹陽北樓詩) 병서(幷書)

   근재 안축(1287∼1348)은 고려말의 문신이며, 본관은 순흥으로 경기체가인 〈관동별곡〉과 〈죽계별곡〉을 지어 문명이 높았다. 위의 시는 그가 1330년 강원도 존무사로 임명받아 관동팔경을 유람할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기름진 음식을 포식한 후에는 아무리 먹어도 맛있는 음식은 없으며, 소(韶)와 같은 음악을 모두 들은 후에는 더 이상 귀에 가득 채울 소리는 없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보아 천하의 물류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마음이 즐기는 바와, 눈으로 감상하는 바가 모두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관동으로부터 유람이후 루대와 산수가 지극히 아름다웠지만, 스스로 마음을 헤아려 이제나 지난 것이나 무릇 사방에 기이한 명승지라 칭송되는 곳도 반드시 눈에 찼다고 할 수는 없다하겠다.
   내가 기성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단양(영해)의 북루가 아름답다고 칭송을 하였다. 나는 마음을 헤아려본 바 이것도 그것과 같을 것으로 생각하여 믿지는 않았다. 금년 여름 4월에 기성으로부터 동해고을로 돌아가는 길에 단양을 방문하여 소위 북루를 보았는데, 기이한 관경과 명승은 가히 보기에 탐낼 만한 것으로 관동과 더불어도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 지형과 지세를 보면 괴이한데, 단양이란 관동의 꼬리로 경계를 서로 접하고 있으며, 그 산수는 넘칠 정도로 아름답다. 관동이 남으로 달려 돌출하여 단양에 머물러 그치는 고로 그 기세가 이곳에서 웅장, 장대하게 뭉쳐있다고 해도 감히 지나치지 않다.
   이곳으로부터 남으로도 비록 흘러 빠진 것이 있지만 만족히 볼만한 것은 없다. 그 사람들이 관동을 유람하지 않았으면서도 이 루가 남쪽 땅에서 최고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지나치지 않다.
   남쪽에는 관어대가 있는데, 나는 일찍이 20년 전부터 유람한지 오래지만 이 누는 한가로이 찾아 오르지 못하였으며, 가보고자 하였지만 미적거리며 배회하다 참아 가지를 못하였다. 향내의 선비 중에 나에게 시를 남길 것을 권하기에, 이미 그 청을 받아들였지만, 생각과 생각을 해봐도 여가를 갖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하루도 이 루를 잊어본 적은 없다. 금년 6월에 또 다시 기성에 도착하여 재차 이 루에 오를 생각을 하였으나, 역시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제목을 정하고 장구의 4운의 시를 지어 부친다. 이 루는 단양의 태수 고 이공 조은이 세운 것이다.
 

얽혀 우뚝 솟은 만송(萬松), 푸른 그림자 띄우고
새로이 선 루, 아득히 나루터를 누르네
바위에 부딪치는 물결 천길 눈같이 희게 부서지고
주렴을 쓸어가는 맑은 바람은 가슴속 한 가을일세
세상 싫어 여행 길 따랐지만
안개 비 속의 가득 찬 낚시배 타길 바라는 건 공허한 것
내, 관어대 내려가는 길 알지만
낚시꾼들과 같이 흘러갈 날 언제일까?

 
2) 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시

   가정 이곡(1298∼1351)은 고려말의 학자이며, 정치가로 1317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으며, 당시 영해향교 대현이던 김택의 여식과 결혼하여 영해지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원나라의 과거에도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으며, 귀국하여 대소의 관직을 거친 후 정당문학도첨의찬성사 한산군으로 봉해졌으며,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하며, 영해 관련 많은 시문들이 있다. 시효는 문효(文孝)이다.

다음은 영해부의 객사의 원운에 대하여 차운한 시이다.

 

 

감히 주금당기를 구양수에게 부탁하듯 하면
설령 얻겠지만 또 다시 바쁘게 가야할 것이네
촉군의 한 현령이 노시(弩矢)를 짊어지고 앞장서 듯 하였지만
허리띠에 문장(紋章)차고 회계에서 길 닦음같이 웃음거리네
헌함의 북쪽에서 보는 하늘은 드넓고, 바다는 검은데
가을 깊은 서쪽 재에는 초목조차 누렇게 익어 가느니
이별하는 정자에서 눈물부터 먼저 뿌리지 말게나
때를 느끼고, 옛일을 회상하는 것은 이미 내 뱃속엔 있지 않으이

3) 나옹화상의 서한(書翰)

   나옹화상(1320∼1376)은 창수면 가산리 태생의 우리나라 불교계의 큰 인물이다. 일찍이 출가하여 구법수행을 위하여 산천을 주유하였으며, 득도 후에는 1347년에 원나라로 구법 유학을 하여 고려의 선지식을 널리 알렸으며, 1358년에는 귀국하여 공민왕의 왕사로 봉해진 고려말의 대선승으로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歌頌)」 1권의 저작을 남겼다.

 

 

매씨(妹氏)에게 답함

   나는 어려서 집을 나와 햇수도 달수도 기억하지 않고 친한 이도 먼 이도 생각하지 않으며, 오늘까지 도(道)만을 생각해 왔다. 인의(仁義)의 도에는 친하는 정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을 수 없지마는, 우리 불도에서는 그런 생각이 조금만 있어도 큰 잘못이다. 이런 뜻을 알아 부디 친히 만나겠다는 마음을 아주 끊어버려라.
   그리하여 하루 스물 네 시간 옷 입고 밥 먹고 말하고 문답하는 등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아미타불을 간절히 생각하여라. 끊이지 않고 생각하며 쉬지 않고 기억하여 생각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각나는 경지에 이르면, 나를 기다리는 마음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헛되이 6도(六道)에서 헤매는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간절히 부탁하며, 게송으로 말하겠다.

아미타불 어느 곳에 계시는가
마음이 다하여 생각 없는 곳에 이르면
여섯 문(六門)에서 언제나 자금광을 뿜으리.

 

4)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와 관어대부(觀魚臺賦)

   목은 이색(1328∼1396)은 고려말의 정치가이며, 대학자, 그리고 충신으로 가정 이곡의 아들이다. 1328년 영해면 괴시리에서 출생하였다. 1341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353년에는 원나라에서도 과거에 급제하여 문명을 날렸다.
이후 고국에 돌아와서 대사성, 예문관대제학, 성균관대사성, 한산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유학의 중시조로 추앙을 받고 있으며, 「목은유고」, 「목은시고」가 있다.

(1) 憶寧海

東海西涯一點山  太平煙火畵圖間
欲敎長句全篇好  未辦浮生半日閑
夢裡銀河連赤岸  病中華髮照蒼顔
恭桑敬梓眞無賴  空望遙天鳥自還

동해의 서쪽 해안에 한점의 산이 있으니
태평스레 밥 짓는 연기 속에 그림 같으이
좋은 칠언율시와 시문을 가르치고자 하였지만
떠도는 인생 반나절의 한가함도 나누어지지 않네
꿈속의 은하수는 붉은 해안에 이어져 있고
백발은 늙어 병들은 창백한 얼굴에 비추네
그 좋은 고향 생각에 수심이 게워
새조차 스스로 돌아오는 아득히 먼 하늘 바라본다네.

 
(2) 觀魚臺賦
 

  觀魚臺賦序 : 觀魚臺在寧海府臨東海石岩下游魚可數故以名之府吾外家也爲作 小賦庶幾傳之中原耳.

觀 魚 臺 賦 : 丹陽東岸日本西洪濤莫知其他.其動也如山之頹其靜也如鏡之磨風伯之所海若之所室家長鯨群戱而勢搖大空鳥孤飛而影接落霞有臺 俯焉目中無地上有一天下有一水茫茫其間千里萬里惟臺之下波伏不起俯見群魚有同有異洋洋各得其志任公之餌誇矣.非吾之所敢冀太公之釣直矣.非吾之所敢擬嗟 夫我人萬物之靈忘吾形以樂其樂樂其樂以沒吾寧物我一心古今一理孰口腹之營營而甘君子之所棄慨文王之旣沒想於而難企使夫子而乘亦必有樂乎.此惟魚躍之斷章乃中庸之大指庶沈潛以終身幸衣於子思子

 

관어대부의 서문 : 관어대(觀魚臺)는 영해부(寧海府)에 있으며, 동해에 접해 있다. 바위 아래에 노는 물고기를 셀 수 있는 곳이므로 관어대라고 이름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外家)이며, 소부(小賦)를 짓는 것은 혹시 중원(中原)에 전(傳)하기 위해서이다.

  관어대 부(賦) : 영해(丹陽)의 동쪽, 일본(日本)의 서쪽 사이에는 큰 물결이 아득히 펼쳐져 있는 곳으로 그 밖의 것은 알수 없는 곳이다. 그 큰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것 같고, 그 물결이 고요할 때에는 거울을 닦아 놓은 듯 하느니.
   풍백(風伯 : 바람을 말은 신)이 풀무로 쓰는 곳이요, 해약(海若 : 바다의 신)이 제 집으로 삼는 곳, 고래들이 길게 떼를 지어 희롱하는 그 기세는 창공(蒼空)을 흔들고, 외로이 나는 사나운 새 그림자가 떨어지는 노을에 이어지는 곳, 그곳에 대(臺)가 있구나.
굽어보느니 땅위에도 하나, 하늘 아래에도 하나, 오직 물뿐, 그 사이는 아득히 천리, 만리지만 오직 대(臺) 아래만 파도가 자는 듯 일지 않으니 굽어보니 같은 놈, 서로 다른 놈, 어릿어릿하는 놈, 천천히 꼬리를 치는 놈, 온 갓 고기들이 제각기 제뜻대로 노니누나.
   임공(任公)이 백마(白馬)를 미끼로 용을 낚았다는 과장(誇張)을 내가 감히 바라는 바가 아니며, 강태공(姜太公) 곧은 낚시도 내가 감히 흉내내고자 하는 것은 아닐진데, 아, 우리 사람은 만물의 영장(靈長)으로 나의 형체(形體)를 잊으며, 그 즐거움을 즐기며, 그 즐거움을 즐겨서 나의 편안함에 몰각(沒却)하나니, 물(物)과 내가 한 마음인 것은 고금(古今)이 같은 이치이니라.
   누가 구복(口腹)을 위하여 급급히 굴어, 군자(君子)이 버리는 바에 감심(甘心)하리요. 문왕(文王)은 이미 가고 없으니 오인어약(於魚躍)을 생각하여도 기도(企圖)하기 어려우니 개탄스러우며, 공부자(孔夫子)로 하여금 뗏목을 타게 하여 우리나라에 온다해도 이 역시 즐거워함이 있을 것인가?
   생각하건데 「물고기가 못에서 뛴다」고 한 글귀는 곧 중용(中庸)의 큰 뜻이다. 그 뜻에 잠기어 탐구하면서 일생을 마친다면 다행이 자사(子思 )에게 배울 수 있을 것이리라.

5) 담암 백문보(淡菴 白文寶)의 나옹집 서(懶翁集 序)

  담암 백문보(1303∼1374)는 충숙왕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 정당문학을 역임하였으며, 직산군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학문으로 이름이 높아 많은 시문을 남겼다. 특히 창수면 가산리 출생의 나옹선사의 문집인 「나옹집」의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다음은 나옹집의 서문이다.

 


서(序)

   행촌공(杏村 : 李. 고려말의 문신, 문하시중)이 나옹스님에 관한 기록을 내게 보이면서, 나옹스님은 연도(燕都)에 가서 유학하고 또 강남(江南)으로 들어가 지공(指空)스님과 평산(平山)스님을 찾아 뵙고 공부하고는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받는 등, 오랫동안 불법에 힘써 왔다고 하였다.
   원제(元帝)는 더욱 칭찬하고 격려하며 광제선사(廣濟禪寺)에 머물게 하고, 금란가사(金袈裟)와 불자를 내려 그의 법을 크게 드날렸으며, 또 평소에도 스님의 게송을 사람들에게 많이 보여 주었다고 한다.
   본국으로 돌아와서는 산수(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었는데, 왕이 스님의 이름을 듣고 사자를 보내 와주십사하여 만나보고는 공경하여 신광사(神光寺)에 머무시게 하였다. 나는 가서 뵈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차에, 하루는 스님의 문도가 스님의 어록을 가지고 와서 내게 서문을 청하였다.
   그때 나는 “도가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는 법이오. 나는 유학(儒學)하는 사람이라 불교를 모르는데 어찌 서문을 쓰겠소”라고 하였다. 또한 옛날 증자고(曾子固)는 “글로써 불교를 도우면 반드시 비방이 따른다”고 하였지만 아는 사이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스님의 어록을 보니 거기에 “부처란 한 줄기 풀이니, 풀이 바로 장육신(丈六身 : 佛身)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면 부처님 은혜를 갚기에 족하다.
   나도 스님에 대해 말한다.
   나기 전의 면목을 이미 보았다면 한결같이 향상(向上)해 갈 것이지 무엇 하려고 오늘날 사람들에게 글을 보이는가. 기어코 한 덩이 화기(和氣)를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나도 이로써 은혜 갚았다고 생각하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스님은 지난날 지공스님과 평산스님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지공스님과 평산스님도 각각 글을 써서 법을 보였다.
   소암 우공(邵庵虞公)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천지가 하나로 순수히 융합하니
한가한 몸이 온종일 한결같다
왔다갔다하다가 어디서 머물까
서른 여섯의 봄 궁전이다

 

  대개 이치에는 상(象)이 있고 상에는 수(數)가 있는데, 36은 바로 천지의 수다. 천지가 함하고 만물이 자라는 것이 다 봄바람의 화기에 있듯이, 이른바 하나의 근본이 만 가지로 달라진다는 것도 다 이 마음이 움직일 수 있고 그치게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나옹스님의 한마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부디 지공스님이나 평산스님의 전하지 않은 이치를 전해 받아 자기의 법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정(至正) 23년(1363) 가을 7월 어느날,
충겸찬화공신 중대광문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치사 진산담암 백문보 화보는 삼가 서한다.

6)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의 시

   운곡 원천석(1330∼?)은 고려말과 조선초에 생존한 은사(隱士)로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일생을 마쳤다. 다음의 시는 그가 전국을 유람하며, 영덕과 영해에 들를 때 지은 시중(詩中)의 1수이다.

 

     着 盈 德

雲淡風輕十里程 馬頭山好雨新晴
小溪淸淺城東路 一樹海花隔水明

옅은 구름, 가벼운 바람 십리 여정에
말머리 앞의 산, 비 개이니 더욱 청명하고
맑고 얕게 흐르는 개울물 성 동쪽 길 따라 흐르는데
한 그루 해당화만 맑은 물위에 밝게 비치네

 
7) 양촌 권근(陽村 權近)의 전류(傳類)

  양촌 권근(1352∼1409)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정치가이며, 학자이다. 고려말에 명나라에서 온 국서를 미리 뜯어 본 죄로 1389년에 영해와 흥해로 귀양을 왔다. 유배를 와서 영덕현의 객사기와 영해부의 서루기를 지었으며, 다음의 박강전(朴强傳)도 이때 지었다.

 

 

사재소감(司宰少監) 박강(朴强) 전(傳)

박강은 영해부(寧海府) 사람인데, 대대로 본부(本府)의 아전 노릇을 해왔다. 영해는 곧 옛적의 덕원도호부(德原都護府)인데, 동여진(東女眞)이 침략할 때 성이 함락되었으므로 낮추어 지관(知官)으로 만들고 관할하던 보성(甫城)은 복주(福州 : 안동)에 귀속시켰다.
   온 고을의 사람들은 이를 수치로 여기면서도 도로 찾으려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때 박강의 증조인 성절(成節)이 마침 상계리(上計吏)가 되어 서울에 가 드디어 도당(都堂)에 진정하였더니, 임금이 듣고서는 다시 예주목(禮州牧)으로 올리고 보성을 도로 복귀시킨 다음, 주목(州牧)의 인(印)을 주조하여 내렸는데, 지금 쓰고 있는 것이 곧 그 인이다. 그 고을의 인사로서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나 시골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성절에게 그 공로를 돌리고는, 면역(免役 신역을 면하는 것)을 허락하고자 하니, 성절은 말하기를,
  “나는 이제 늙었다. 내가 면역된다 하더라도 다시 양반은 되지 못할 것이니, 내 자손이나 면역시켜달라.”고 하므로, 여러 사람이 모두 “그렇게 하라” 하고는 증명서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학여(學如) 및 그의 손자 천부(天富)가 모두 향역(鄕役)을 하지 않았으니, 천부는 곧 강의 아버지이다.
   현릉(玄陵 : 공민왕) 이 즉위하기 전에 연도(燕都)에 있을 적에 천부가 모시고 있었는데, 힘이 세어서 한쪽 팔로 현릉을 번쩍 들고서 한 바퀴 돌며 고함을 치곤 했으므로, 현릉이 즐거워하며 그를 아꼈다.
   명릉(明陵 : 충목왕)이 훙(薨)하자 황제(원의 순제)가 현릉을 임금으로 세워라 명하였다. 현릉의 행차가 장차 본국으로 떠나려 하는데,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자(宦者) 용봉(龍鳳)이 황제에게 아뢰어 충정왕(忠定王)으로 갈아세우게 하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현릉을 따르던 자들이 모두 새 임금에게로 따라붙었으나, 천부만이 들어와 현릉을 뵈니, 현릉이 비통한 어조로 이르기를, “너만이 아직 있었구나. 나라고 어찌 본국으로 돌아갈 날이 없겠느냐! 너는 머물러 있다가 나와 함께 가자. 내가 돌아가게 되면 너의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 내가 지금 상도(上都)로 가려 하는데 나를 따라 가겠느냐?”하니, 천부가 꿇어앉아 아뢰기를, “신은 명령대로 따르겠습니다.”하고, 드디어 모시고 갔는데 때로는 등에 업고 가기까지 하였다.
   그 뒤 현릉이 미처 임금자리에 오르기 전에 연도(燕都)에서 바다를 건너 돌아오다가 배가 파선되어 천부는 죽었다.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년, 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경성(京城)을 함락하자 현릉이 안동(安東 )으로 파천하여, 군대를 보내 수복할 때에 강(强)이 처음으로 군에 응모하여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장군 진영에 배속되었다. 접전이 시작될 무렵에 적이 성중에서 목채(木寨)를 설치하여 항전하므로 제군(諸軍)이 전진할 수 없게 되매, 강은 곧 말에서 내려 어떤 집에 들어가 판자로 된 대문짝을 떼어 가지고 나아가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서 칼을 휘두르며, 크게 고함을 치니, 목책 위에 올라 있던 적들이 모두 질려서 땅에 떨어져 저희끼리 서로 짓밟았다. 강은 따라 내려와서 수십 명을 마구 베었다. 이로써 제군이 계속 전진하여 문을 열고 들어가 적의 괴수 사류(沙劉)를 베었다. 이로 말미암아 대첩(大捷)을 거두었으므로, 총병관은 이를 장렬히 여기어 상으로 자급(資級)을 특진시켜 중랑장(中郞將)에 의주(擬注)하여 문부(文簿)에 기록하였는데, 좀 뒤에 삼원수(三元帥)가 총병관을 죽였기 때문에 의주(擬注)했던대로 되지 못하고 마침내 산원(散員)에 제수되었다.
   계묘년(공민왕 12, 1363)에 원수 박춘(朴椿)을 따라 이성(泥城)에 가서 두 번이나 강을 건너가 탐정하였는데 이 공로로 별장(別將)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반신(叛臣) 최유(崔濡)가, 왕실의 서자로서 일찍이 중이 되었던 자를 임금으로 세우고 변경을 침입하여 수주(隨州)를 함락하므로 여러 장수가 항전하여 물리쳤는데, 강이 선봉이 되어 압록강(鴨綠江)까지 추격하였다가 돌아와서 또 낭장(郎將)에 승진되었다.
   을사년(공민왕 14, 1365)에 상이 강이 용력이 있다는 말을 듣고 또 그의 아비가 자기를 업고 다니던 공로를 생각하여 그를 불러 보고는, 힘이 센 시위군(侍衛軍)과 씨름을 시켰더니 시위군이 잇달아 넘어지매, 상은 크게 기뻐하여 늠미(米)를 내리고 바로 중랑장(中郞將)에 제수하여 숙위(宿衛)에 소속시켰다.
   정미년(공민왕 16, 1367)에 왜적이 강서(江西)를 침범하므로 나진(羅進) 등을 보내어 바다에 나아가 추격할 때에 강도 함께 가게 되었는데 상이 철갑(鐵甲)과 활과 칼을 하사하였으며, 왜적을 만나 여러 번 이겼다. 홍무(洪武) 신해년(공민왕 20, 1371) 겨울에 원수(元帥) 이희필(李希泌)을 도와 울라산(鬱羅山)을 공격할 때에도, 상이 또 말을 주어 보냈는데, 성을 공격할 때 먼저 올라가서 그 괴수를 잡았다. 그리고 돌아와서 또 사재소감(司宰少監)에 제수되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예의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다.
그 뒤에 시골에 은퇴하여 있다가 병인년(우왕 12, 1386)에 나라에서 원수 육여(陸麗)를 보내어 영해(寧海)를 진수하게 할 때에도 강이 또 종행하였는데, 계림(鷄林) 송라촌(松羅村)에서 왜적과 싸울 때에 칼을 휘둘러 5∼6명을 베니, 육공(陸公)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에 가자(加資)되고 서운정(書雲正)으로 제수 되었다.
   무진년(우왕 14, 1388) 10월에 축산도 병선도관령(丑山島 兵船都管領)이 되었는데, 왜적의 배가 갑자기 들이닥쳐 우리의 배를 포위하고 영해성(寧海城)을 침범하려고 하는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인심이 흉흉하였다. 강이 한 번 활을 쏘아 적이 괴수를 맞히고 잇달아 4∼5명을 쏘아 맞히니, 적은 포위를 풀고 달아나 다시 오지 않았다. 온 고을이 지금까지 편히 살 수 있었던 것은 강의 힘이었다.
   을사년(공양왕 1, 1389) 겨울에 내가 영해에 귀양갔다가 비로소 강을 알았는데, 날마다 찾아와 뵙되 예절바르고 말이 적으며, 글을 대강 알아 나의 강설(講說)을 재미있게 들으면서 갈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근후(謹厚)한 사람으로 중히 여겼을 뿐 그에게 특이한 재능이 있는 줄은 몰랐다. 전에 판사(判事)를 지낸 백공 진(白公 瑨)이 또한 이 고을에 살았는데, 젊어서 백당(栢堂 사헌부의 별칭)에 벼슬하여 일찍이 총병관(摠兵官)의 참좌(參佐)가 되어 문서를 맡아보면서 강과 함께 다녔는데 직접 판자 대문짝을 메고 목책을 점령하는 것을 본 분이라, 나에게 상세히 이 이야기를 해 주었으므로 비로소 박강이 용맹이 있고 또한 공로가 있으면서도 자랑하지 않았음을 알고 더욱 중히 여겼다. 이때 박 강의 나이가 이미 59세였는데 힘이 조금도 줄지 않았으며, 몸집이 기걸하며 수염이 길게 느려졌는데, 천성이 술을 마시지 못하였다. 고장 사람들이 농담으로 말하기를, “외모를 보아서는 두어 말이라도 마실 수 있을 듯한데, 한 방울도 마시지 못한다.”하였다. 대저 건장하고 힘이 센 사람은 술주정이 많은 법인데, 강은 술을 마시지 못하니 가상한 일이다.
   아! 신축년 난리에는 능히 먼저 올라가서 도성(都城)을 수복하였고, 계묘년 싸움에는 선봉이 되어 반역을 무찔렀으니, 그 공적이 얼마나 컸는가!
   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충의를 가진 용사가 위급함을 당하여 목숨을 바쳐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서서 소리치며 칼날을 무릅쓰고 강한 적의 선봉을 꺽고, 막아내어 특출한 공로를 세웠으나, 위에서 추천하여 발탁해 주는 사람이 없고 아래로는 그것을 기술해 주는 친구도 없어, 덧없이 흐르는 세월에 사적이 없어지고 전하지도 못한 채 마침내 시골에서 죽어 버려 초목과 함께 썩고 마는 사람이 얼마이랴! 이것은 가엾은 일이다. 그러므로 박 강에 대하여 전기를 쓴다.

 
 

2. 조선시대의 고시문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시문의 발달은 그 이전의 어느 시대 보다도 괄목한 성장을 하였다 할 수 있다. 양적으로 보아도 2만여 점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의 각종 전적이 남아있을 정도로 엄청나다.
   이러한 시대적인 조류에 따라 조선시대의 우리 지역의 고시문도 그 어느 시대 보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풍부해지고, 알차게 발달하여 지역의 문풍(文風)을 앙양시키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아쉬운 것은 이렇게 이루어진 우리 지역의 수많은 문적들이 임란 등의 병란을 거치면서 산일(散逸)된 점이다. 특히 임란 이전의 문적들은 우리 지역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임란 이후는 우리 지역의 문예번창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유학자들의 문집류 등이 발간되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어, 그 시대의 지역의 학문의 유흔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전적들 중에 좋은 문장을 간택하여 이번 군지에 모두 실어 후손들에게 길이 남겨주어야 함이 당연한데, 한정되어 있는 지면 관계상 그 많은 작품 전부를 실을 수 없고, 그 중 몇 분의 작품만을 실을 수밖에 없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다만 차후에 계기가 되면 실어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1) 산수편(山水篇)

(1) 죽재(竹齋) 윤긍(尹兢)의 축산도

   죽재 윤긍(1432∼1485)은 본관은 파평으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호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노후에 팔공산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海晏無虞地 將軍欲坐禪
竹搖山影到 波弄月光鮮
觀德消長日 負暄望所天
丈夫懷抱遠 隨事更求全

평안한 바다, 근심 없어진 땅
장군은 앉아서 선정에 들고
흔들리는 대나무, 산 그림자 드리우는데
일렁이는 파도엔 달빛 드무네
줄어듦과 늘어나는 덕을 보이는 해,
온기 안은 체, 하늘가 바라보니
장부의 소회, 아득히 먼 곳까지 미치는데
일 따라 본성 보전할 일 다시 구해야 하리

(2)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의 읍령(泣嶺)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조선중기의 성리학자로 본관은 여주이며, 호는 회재이다. 조선조 학문과 도학의 실천에 모범이 되는 우뚝한 봉우리로 1610년에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에 배향되고 있다.

 

다달음 다한 곳, 난간처럼 우뚝하고
이제 막 트인 땅, 걸음조차 평탄하구나
늘어선 산들은 구름사이로 은근히 드러나고
골짜기 돌아가는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네
바람과 햇살 막아주는 소나무, 회나무 늘어 서있고
지혜로운 신령은 위험조차 막아주는구나
사악한 기운조차 스스로 숨게 만드는 밝은 햇살 있는데
어디에 쓸려고 강한 이름의 비 만들었나

 
(3) 성헌(性軒) 백현용(白見龍)의 시

  성헌 백현룡(1543∼1622)은 본관은 대흥으로 일찍이 퇴계의 문인으로 학문을 닦아 시서 등에 이름이 있었다. 늦는 나이에 주위의 권유로 광해 1년(160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현재 「성헌선생문집」 1권이 전하고 있다. 다음은 람승정(攬勝亭) 10경(景) 중 그 1경인 북악청람(北嶽晴嵐)이다.

 

북풍을 진압하듯 꼬불꼬불 서려 있는 등운산
산허리의 가득 찬 남기(嵐氣) 푸릇푸릇 피나고
타들어 가는 농토, 근심하는 천리 농가에
잠깐 비(雨)는 삼농(三農)을 위로 해주네

 

(4) 송고 배진창(松皐 裵震昌)의 국사봉(國師峯)

  송고 배진창(1642∼1722)은 조선 중엽, 지품면 오천리에서 태어난 선비로 시서에 능하였으며, 특히 장인탄(丈人灘), 용마총(龍馬塚), 국사봉 등의 지역의 역사와 풍경을 읊은 시를 많이 남겼다. 다음의 시는 그 중의 하나인 “국사봉”을 읊은 시이다.

 

뭇 산들 사이로 우뚝 솟은 한 봉우리
그 사이로 국사가 지나갔네
남긴 자취는 천년 세월에 사라지고
철마 없어진 사당만 한가롭네

 

(5) 현령 이인기(李麟奇)의 오십천 용추(龍湫)

  오십천 용추는 지품면 신안리 491-9번지 일대의 오십천 상류의 계곡이다. 돌병풍이 고리처럼 둘러싼 듯 한데, 푸른 절벽 아래로 물이 흘러내려 폭포를 이루고 있어 장관이었다. 현령 이인기는 1611년에 와서 1612년에 교체되어 갈 때까지 영덕현령으로 재임하였다.

 

지품산중의 오십천 물
세차게 흘러내려 만든 이곳, 깊은 못
야성태수, 아름다운 글귀 생각 안나
공연히 은하(銀河)가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하네

 

(6) 존재 이휘일(存齋 李徽逸)의 장향내연지야성작(將向內延至野城作)

  존재 이휘일(1619∼1673)은 본관은 재령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로 천문, 지리, 역법,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예악에 밝았다. 저서로는 「존재집」 3권이 있다.

 

 

새벽 일찍 내연산을 향하여 영해를 떠나
잠시 머문 영덕의 관나루(官渡)에선 시를 읊었네
안개비에 반이나 잠겨 있는 화림산
강물은 오십천 따라 흘러 가누나
풀더미 속엔 오포 옛 성이 누워 있는데
해문(海門)의 외로이 노 젓는 소린, 저녁 노을가에 지누나
모래벌 갈매기 역시 나그네 마음 아는가
말머리 앞에서 또 다시 오르락 내리락 하는구나

 

(7) 추암 김하구(楸菴 金夏九)의 숙장사촌(宿長沙村)

  추암 김하구(1676∼1762)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수안이다. 숙종 28년(170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숙종 45년(1719)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전중어사, 병조낭관 겸 춘추관기사관, 해남현령을 역임하였으며, 추암집 6권 4책이 있다.

 


갯가의 주막에 들어 한잔 술 할 제
소금가마엔 푸른 연기일고 낙조는 붉네
철을 알리는 백조와 조류는 모두 북으로 향하고
기세따른 창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르네
잠 못드는 부상에서 삼경의 달은 밝은데
가슴속 갯내음 씻어 주는 만리 바람 부네
곧은 낚시로 금어를 잡기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계획이지만
압구옹이 평생토록 만든 일 방해하지 말게

(8) 청천(淸泉) 신유한(申維翰)의 임경대(臨鏡臺)

  청천 신유한(1681∼1752)은 본관은 평산으로 숙종 31년(170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숙종 39년(17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제술관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평해군수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해유록」,「청전집」 등이 있다.

     臨 鏡 臺
落落長松生遠浦 盈盈沙石在春洲
坐驚席上靑山出 行愛樽前白鳥浮
天地無家惟浪跡 風烟何處不寬愁
追思河朔諸賢飮 爭似狂歌鏡水頭

낙낙장송 늘어져 멀찌기 개(浦)를 만들고
봄섬의 모래는 알알이 반짝이는데
앉은자리 너머로 청산은 솟아오르고
술자리 앞에는 백조가 떠다니는구나
천지간에 머무를 곳 없는 떠도는 몸이라
어느 곳이던 좋은 경치 만나면 시름겨워 하지만
하삭에서 친구들과 마시던 술자리 생각하며
거울같은 물머리에서 가락 맞지 않은 노래를 불러본다.

 

(9) 우곡(羽谷) 백하운(白河運)의 팔각산(八角山)

  우곡 백하운(1764∼1829)은 본관이 대흥으로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을 닦으며,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유집으로 「우곡유고」가 있다.

기이한 봉우리들의 팔각산 기세 호탕하고
넓고 깊은 계곡, 가파르게 우뚝 솟은 것이 하늘 높이 이르렀네
신묘한 조화옹의 이치는 원래 헤아리기 어렵지만
여러 산들 웅장히 누르며 저 홀로 초월하듯 서있네

(10) 단영(丹瀛) 박영찬(朴英燦)의 병곡월야(柄谷月夜)

  단영 박영찬(1799~1868)은 본관이 무안으로 1700년 후반에 지역에서 활동한 문사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원근에 이름이 있었다. 다음은 그가 읊은 시이다.

萬里洪濤雄氣勢 一天明月倍精神
淸晨獨起憑虛立 浩浩乾坤自在身

만리에 뻗친 넓은 파도 그 기세 웅장하고
한 하늘의 밝은 달은 정신을 북돋우네
맑은 새벽 홀로 일어나 빙허(憑虛) 속에 서니
넓고 넓은 하늘, 땅이 내 몸 안에 있네

(11) 천산재 백중각(天山齋 白重珏)의 대둔산의 푸른 기운(遯山翠嵐)

  천산재 백중각(1867∼1936)은 본관이 대흥으로, 영덕읍 매정리에서 태어나 달산면 덕산리에 이거하였다. 일찍부터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서산 김흥락, 척암 김도화에게 사사하였다. 둔산취람은 천산재 팔경음(八景吟)인 둔산취람, 성암조욱(星巖朝旭),옥녀봉춘화(玉女峰春花), 평사전서기(平砂田瑞氣), 봉산동사(鳳山洞社), 당연완어(堂淵玩魚), 롱암숙연(籠巖宿烟), 봉산추월(鳳山秋月) 중의 하나이다.

푸르른 산 기운이 스며 배이는 높은 대둔산
춘하추동의 풍경도 동남에서 제일일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이곳, 내 여기서 학문을 닦느니
화창한 천년의 봄기운엔 상서로움 스며있네

(12) 유진성(柳晉成)의 모암(帽巖)

  모암은 영덕읍 삼계리 앞산의 한줄기인 모암산 기슭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 형상이 장수(將帥)가 갑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었다. 유진성(1826∼1894)은 본관은 문화이고, 호는 동계(東溪)이며, 조선조 말기의 유학자이다. 동계문집 4권 2책이 전하고 있다.

미물이라도 천년세월이면 신의 조화로
이끼 쌓인 석면이 마치 사람처럼 되어
동네 입구에 할 일없이 서 있지 않음을 아는가?
안으론 선경같은 마을 보호하고, 밖으론 잡신들 범접 막고 있다네

(13) 청금정(聽琴亭) 윤자철(尹滋哲)의 구연반석(臼淵盤石)

  청금정 윤자철(1812∼1882)은 지품면 속곡리에서 시서와 산수를 벗하며 유유자적한 유학자이다. 다음의 시는 청금정이 자작한 청금정 팔음(八吟)인 옥녀탄금(玉女彈琴), 포산작주(葡山酌酒), 용궁비원(龍宮秘苑), 구연반석, 세심조대(洗心釣臺), 송령신월(松嶺新月), 대전비폭(大田飛瀑), 사전암혈(柶田巖穴) 중의 1수이다.

 

누굴 위하여 옥녀는 옥 거문고를 타는가
도인의 맥은 이미 끊어졌지만, 산심(山心)은 푸르르네
빈 창가에서 의란궁 흠모하여 따라 잡고자 하지만
허허로운 계곡, 거문고소리, 글 읽는 소리만 기쁘게 들리느니

(14) 봉산(鳳山) 신봉래(申鳳來)의 옥계에서 잠들며(宿玉溪)

  봉산 신봉래(1878∼1947)는 영덕읍 화개리 출신이며,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사서삼경과 제자백가에 능통하였으며, 문장이 출중하여 원근 각처의 루대정사에 많은 글을 남겼다. 저작으로는 「봉산문집」 2권이 있다.

靈眞嘲我雪垂頭  六十年來慣此遊
滿池歸雲開別壑  動人長笛又高樓
酒餘醉夢多仙分  詩罷吟眉似道流
且向燈前驚歲爛  壁筮階葉語淸秋

신령은 눈 내리는 머리에서 날 희롱하지만
육십 평생 이곳에 노는 것은 익은 관례라
구름 가득한 땅, 별스런 골짜기
길게 흐르는 피리소린 사람마음 움직인 후, 높은 루에 감기네
술 끝난 후, 취중몽사 모두 선경인데
시 짓고, 읊조림 끝나니 미간으론 흡사 미묘한 기운 흐르는 듯하네
또, 등불 앞 향하니 세월의 현란함에 놀라는데
밤벌레 벽 틈에 울고 계단의 나뭇잎 가을 청량함을 이야기하네

2) 루대정사편(樓臺亭篇)

(1) 이원(李原)의 청심루(淸心樓) 제영(題詠)

 
  이원(1368∼1429)은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으로 1409년에 경상도관찰사 겸 상주목사를 겸직하였으며, 이후 예조판서, 병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아래의 시는 경상도관찰사 재직시 영덕현의 서문루인 청심루를 읊은 것이다.

하늘 남쪽의 나그네 되어,
바닷가 외로운 성에 오르니
구름 걷힌 저녁산은 푸르고,
비온 뒤의 가을날 더욱 맑구나
흐르는 물은 길게 남쪽 길 감아 흐르는데,
뜰에는 아름다운 나무들 있고
이제 왜구의 소란 그치니
곳곳에 글 읽는 소리, 거문고소리 들리네

(2) 윤호(尹壕)의 해안루(海晏樓) 시

  해안루는 영해부의 객관 동쪽에 있던 건물로 다음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94년에 우의정을 역임한 윤호(1424∼1496)의 시다.

故人千里話心頭 偏愛終宵月滿樓
携手觀魚臺下去 一場觴詠醉中遊

천리 고인의 말, 염두에 두고
밤새껏 누에 가득 찬 달을 사랑했네
손잡고 관어대 아래로 가서
한자리 시읊는 술자리 마련하여 취하여 놀아 볼까나

(3) 퇴계 이황의 람승정(攬勝亭) 시

 
  람승정은 퇴계 이황(1501∼1570)의 제자인 성헌 백현룡이 병곡면 원황리에 건축한 정자이다. 다음은 퇴계 이황의 람승정 시이다.

평평한 땅, 너른 강, 한 폭 그림에 담을 수 없는데
창 밖으론 선운(仙雲)이 보이고, 바다 물색은 더욱 맑구나
티끌 세상에 몇 사람이 여기에 왔을까
한가로운 마음, 푸른 파도, 흰 갈매기와 더불어 하네
빼어남을 붙잡은 높은 정자, 람승이라 이름할 만 하고
멀리 산봉우리가 만든 경치는 눈앞에서 솟아나네
긴 강은 바다에 이르러 광활함을 넘어 평탄해지고
아득히 모래 쌓인 구석진 섬, 다시 드러나네
금을 녹여 넓게 붙인 금박은 달까지 이어지고
몸에 지닌 옥같이 가로지른 연기는 띠를 만드네
세상사람들이 어찌 강호의 일 모두 알랴
도리어 내가 한말을 무정하다 우겨된다네

(4) 남서양(南舒陽)의 청류정 시

  청류정은 영모당(永慕堂) 이선도(李善道)가 창수면 위정리에 세운 것으로 다음은 남서양이 지은 청류정시이다.

尋源暇日向葦井 枕外寒流依舊時
霧捲雲收皆助景 春粧秋飾各輸奇
依山結屋仍爲主 種樹盤根漸達枝
瞻仰古人人不見 此心曠感有誰知

 

여가 있는 날, 뿌리를 찾아 위정리로 향하는데
바깥 날씨는 옛날같이 여전히 찬 기운 감도구나
걷히는 안개, 거두어 지는 구름, 절경(絶景)에 보태고
봄 단장, 가을 꾸밈도 기경(奇景)에 더해준다
산을 따라 정자 짓고, 주인되었으니
심은 나무, 뿌리 내려 점차 가지 뻗어나듯 하리
옛 사람 우러러봄을 다른 사람에게서 보지 못하였으니
이 느낌, 이 마음 누가 알 수 있으리

(5) 영은(瀛隱) 남공수(南公壽)의 족한당(足閑堂) 시

  족한당은 백인국(白仁國)이 축산면 대곡리(동로동)에 건립한 것으로 다음의 시는 영은 남공수가 읊은 시다.

人去地留馥 龍山舊日亭
寒雲來去影 流水古今情
路遠行歌曲 時危保性靈
莫言閒我足 無計保芹性

인걸이 지나간 자리 향기가 스며 있는 곳
용산 옛날의 정자일세
한기 품은 구름은 오가며 그림자 뿌리는데
흐르는 물은 고금의 정 그대롤세
먼길, 노래 읊조리며 가지만
위태로운 때, 성령을 보전하여야 하리
내가 만족하고 있다고 한가로이 말하지 말게나
근성(芹誠을 갚을 계책조차 없느니

(6) 부사 이정필(李正弼)의 상의당(尙義堂) 시

  상의당은 백충언(白忠彦)이 영해면 원구에 건립한 정자이며, 다음의 시는 고종 때 영해부사로 부임한 이정필( 재임 1871.3∼1877.7)이 지은 시이다.

 

 

충현의 거룩한 자취가 보고, 들음에 우뚝 솟고
야사당 현판, 본보기가 됨이 상상되네
일편 정성 여덟 해, 궁궐에까지 미쳐
임금의 교서, 이곳 동해까지 내렸네
여러 선비들 좋은 날 주선하였으며
양양한 부자에겐 영성(靈性)이 오르고 내리네
자손들에게 잘 이어 가도록 한 말 전하고자 하니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사람의 도리에 힘쓸진져

(7) 유재(由齋) 신재석(申在錫)의 영덕객사중수기문

  이 기문은 유재 신재석(1830~1910)이 쓴 것이다. 유재는 본관이 평산으로 순조대의 인물로 저서는 「유재집」이 있다.

 

 
  고을에 객사가 있게된 것은 대개 오랜 일로 한나라와 당나라사이에는 역관이라 불렀으며, 전사(傳舍)라고도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을 전(殿)이라도 한다. 정각의 앞에 걸연하고 장려하게 서있다. 그늘진 면에 밝음이 있음은 흡사 임금이 듣고 다스림의 위치에 있음과 같은 것이다.
 

  전각이란 2자를 쓴 것은 각을 높여 이를 갈무리하고자 하는 것이며, 높이 받드는 예에 이르러서는 태수가 부임해와서 이 장소에서 매 삭망에 옷을 갖추어 입고, 홀을 잡고, 분향하고 뜰에서 절을 하여, 강호에서 대궐을 연모하는 정성을 붙이니, 그것이 가볍지 않고, 무거움이 더해감이 아니랴
   금년 봄에 이르러 위에서는 계획을 세우고, 아래로는 돈과 재물을 주선하여 건물을 중수할 것을 의논하여 대들보와 서까래가 까맣게 썩고, 휘고, 부러진 것을 바꾸고, 고치고, 기둥이 썩고, 벽이 부서지고 결략되어 물이 스며드는 것을 모두 바르고 칠을 하여 새롭게 하는데, 수개월이 걸리지도 않고 완성을 하였다.
   이에 대중들을 초청하여 다과를 베풀며, 집의 낙성식을 하는데, 술잔을 들고 한 말씀하는 이가 있어 “ 우리 고을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도 풍습이 순하고, 민간의 습속이 소박하여, 다스리기 수월하다. 현재의 태수 정공 중우가 여기에 와서 3년째인데, 정치가 맑음이 쌓여, 관리들도 맑아져 백성들의 병이 되고, 백성들의 해가 되는 것들을 더불어 백성들이 그 업을 즐기는 바가 되도록 안정시켰다.
   무릇 관아의 있음은 오래지만, 지금에 이르러 폐지되어 가리고, 밝히는 것이 없었으나, 수선하여 완전하게 하니, 고을의 모습이 일신되었으며, 태수의 이름과 더불어 이 객관은 영원히 이어 갈 것이다.”고하니, 여럿이 말하길 “그와 같이 될 것이다”하였다. 이에 기(記)를 한다.

(8) 방산(舫山) 허훈(許薰)의 난고정(蘭皐亭) 시

난고정은 남경훈(南慶薰)이 영해면 원구리에 건립한 것으로 다음은 방산 허훈의 시이다.

일찌기는 홍의장군의 화왕진에 참여하였으며
돌아와서는 사적을 풍령(風)에 얹었네
비 지난 그윽한 길, 싹트는 난초 향내 나고
구름 개인 바다 위에 달은 떠오르네
벼슬하는 영화, 많은 자손들 길게 이어 주고
동과 남에서 주인과 손님, 서로 즐거이 맞아주네
성실과 근면으로 집 지어, 종내에까지 지키니
명당의 땅에 잘 이루어 지킴을 모두 축하하네

(9)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입천정(卄川亭) 시

  입천정은 남붕익(南鵬翼)이 영해면 괴시리에 건립한 것으로 다음의 시는 조선 말기의 학자이며, 의병장인 향산 이만도(1842∼1910)가 지은 것이다.

수칸의 영취산 선관의 집
동해를 비껴 누르듯 초연히 자리잡았네
벼슬길 버리고 이미 안분지족 하였으니
시세에 따라 어찌 다시 모나는데, 둥근데 영합할까
큰 땅, 달리 쫓아 성물로 바뀌듯
사람의 집엔 모름지기 현명한 자손 있으리니
백년의 제비가 아름다운 대들보에 앉아 하는 말
지금 내가 있는 마계가 옛 입천이라 하네

(10)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의 함벽대(涵碧臺)기문

  배용길(1556∼1609)은 자는 명서(明瑞), 호는 금역당(琴易堂) 또는 장육당(藏六堂)으로 본관은 흥해이다. 160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과 사헌부감찰을 지낸 뒤 충청도 도사를 지냈다. 천문, 지리, 율력, 병법 등의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역학에 밝았다.


 

 『내가 야성의 청심루가 동해의 누 중에 경치를 관상하기에는 최고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하룻밤 양식을 준비할 필요도 없는 짧은 거리인데도 지금까지 오십년에 이르도록 한 번도 가보지 못하였다.
   마침 고향의 벗인 권 수지가 어버이 봉양의 편의를 위하여 승문원의 천관랑(天官郞)으로부터 영덕읍의 태수로 부임하여 왔는데, 와서는 여러 재화를 시세에 따라 매매하여 이득을 취하는 한편, 떨어지고 부셔진 것들을 수선하여 새것으로 고쳐 만드니 정치를 잘한다는 소리가 자못 크게 들렸다.
   금년 여름에 나는 병석에서의 울적한 마음을 풀고자 혼자 영덕으로 유람을 가고자 하였더니, 주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반겨주었다. 청심루에서는 주석(酒席)을 베풀고, 호수에서는 배를 띄우는 등, 주옥(屋)같은 명승지를 먼저 이끌고 올라가서 바라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그 끌고 당기고 만류하는 후의(厚意)가 진준(陳遵)이 수레의 바퀴의 못을 빼어 죽림(竹林)에 던지고는 손님을 가지 못하게 붙잡는 것보다 심하였다.
   돌아올 때는 정백(鄭伯)처럼 몰래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이 역시도 여의치 못하고 주인에게 뒤따름을 당하여 7·8리 밖까지 환송을 받게 되었다. 결국 이별주에 시간이 늦어 아무런 준비 없이 들판에서 자게 되었으며, 이왕 들판에서 잘 바엔 앞이 시원하게 트인 곳이 좋을 것 같아 주위를 살피던 중, 마침내 하나의 높은 대(臺)를 찾아서는 그 위에다 잠자리를 정하였다.
   대(臺)는 삼기리(三杞里)의 북쪽과 구매촌(九梅村)의 남쪽 사이에 있는 것으로 깎아지른 듯한 천길 낭떠러지가 불쑥 솟아 푸른 시내에 임(臨)하고, 소나무들은 누각처럼 해를 가려주고 있는 곳으로 벌레나 개미조차도 개의치 않은 곳이다.
   대개 읍의 사람들이 와서 놀고 하던 곳이었겠지만, 청심루의 명성에 가리워 관인(官人)들에게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시내와 산의 형세가 아름다우니 이 역시 한 고을의 명승지가 될 만은 하다하겠다.
   주인은 굽어보고 우러러보면서 예전부터 이름 없이 버려져 있음을 한탄하며 반잔밖에 남지 않은 잔을 들고서는 “자네가 이름을 짓고 기문을 쓰길 원하네” 하였다. 나는 “어찌 이만한 명승지에 이제까지 부르던 이름이 없었겠는야?” 하며, “옛 사람들 중에 먼저 이름을 붙인 이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주인이 말하길 “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臺)가 이와 같은 궁산벽곡(窮山僻谷)에 있지 않았으면 벌써 관인들에게 알려진 바가 되어, 우리 두 사람보다 훤히 알고 있을 테지만 현재 보니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동리에서는 뭐라고 부르는 이름이 있을 테지만, 어찌 지금에 드러난 것으로 만족하여 이 이후에도 그대로 내려가도록 할 것인가? 우리들은 당연히 이전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 내고 새로이 이름을 붙여 일대(一代)의 풍류의 으뜸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하며 “ 자네에 의해 위와 같은 평생의 은혜가 있기를 바라네” 하였다.
   나는 몇 번이나 사양을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고 기어이 글을 짓게 되었다. “대(臺)를 둘러 싼 모두가 산이요. 그 아래 흐르는 물, 맑디맑아 못을 이루구나. 가깝게는 산빛을 적시고, 높이는 햇빛조차 희미하다. 푸르름은 검푸른 산색을 모은 듯하고 삼라만상이 갖추어 비추는구나.”하고는 이와 같은 곳이니 이름하여 함벽이라 함이 어떠한가 하니 주인이 “좋다”하면서, 마침내 대(臺) 위의 높이 솟은 나무를 희게 깎아 이를 쓰게 하였다.
   아! 시내와 산이 비록 명승지라도 이를 감상하려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땅에 숨겨지고 하늘에 감추어져서 비록 천만년이 지나더라도 그 날카롭고 빛나는 광채가 묻혀져 세상에 칭송되지 못한 것이 한 두 개가 아니며, 이 대(臺)도 그러한 것 중의 하나였으니, 주인 권 현령에 알려짐에 따라 산은 더욱 더 밝은 광채를 띠게 되었으며, 물은 더욱 더 맑음이 보태어 졌다. 쌓고 깎아 내리는 수고로움 없이 우뚝 그 명성을 높였으니 어찌 청심루보다 그 광채가 있지 않다 하리요.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이들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말하기를 “자네나 주인이나 모두 스쳐 지나가는 과객(過客)인데 하루아침에 자른 절벽의 잡목 덤불에서 황대(荒臺)를 얻어 과장하고 자랑함이 이와 같이 사치스러우니, 한마디 말도 가까이 얻어들을 것이 없는 무지(無知)한 자들이 아닌가? 어찌 취사전도(取捨顚倒)됨이이와 같은가?” 하였다.
   나는 “잠시 후면 여기를 떠나는 몸이지만 주인은 다함없는 덕을 오로지하여 삼리의 성곽을 지키며, 어진 은혜를 백성들의 골수에까지 미치도록 하니, 그 선정에 대한 칭송이 구중궁궐에까지 뚫고 들어가게 되었다. 청심루에서 노는 이는 널리 학문을 넓히고, 이 함벽대에서 감상하는 이는 스스로를 오로지 수양한다면 이 대(臺)는 다른 날 최고의 고개 마루가 될 것임은 아무런 의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지난 일들을 회고하면서 건너 산천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이가 청심루에서 있을 건가? 아니면 이 함벽대에 있을 건가? 읍인들은 이것의 가볍고 무거움의 판단을 이에 의하여 할 것이요” 하니 듣고 있던 이들은 사과를 하면서 “가르쳐 주어서 고맙습니다.”
   주인의 이름은 태일인데, 천성이 자상하고 얼굴과 기상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학문과 다스림에 대한 일들이 지금 세상에서 최고이지만 이 정도만 쓴다. 어찌 시내와 산의 아름다움과 대(臺)와 정자의 승경(勝景)이 저 혼자서 그렇게 된 것이리요.』

(11) 서파(西坡) 유필영(柳必永)의 매오정기 (梅塢亭記)

  매오정은 자가 원경(元卿), 호는 매오(梅塢)인 윤기영(尹基永)이 달산면 매일리에 건립한 정자로 서파 유필영이 기문을 지었다. 다음은 유필영의 기문이다.

 
 

  동산(亭子)을 세우고 이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비록 고상한 일에 속하지만 기이한 경치를 얻었다는 것으로만 쉽게 생각한다면 이는 경치만 얻은 것으로써의 역할만 할 것이고, 또한 잔치를 베풀고 노는대만 이를 이용한다면 이는 시장바닥의 명리를 좇는 무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며, 땅을 택하여 정자를 세워 덕화와 명성을 남기는 곳으로 삼고, 여기서 학문을 갈고 닦으며 한가히 인재를 기르는 즐거움이 있는 곳으로 하는 즉, 이는 곧 땅이 사람과 더불어 만나고, 사람에 의하여 땅이 드러남이라 할 수 있다.
   윤군 원경은 향중에서도 맑고 빼어나며 단아한 선비인데, 일찍이 시와 서에 힘써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나 ,감당키 어려운 환난을 겪은 후 은둔의 뜻을 세웠으며, 이 후에는 바닷물이 넘치고, 폭포수가 기운다하여도 조금도 변함이 없이 일관하였으며, 전력을 다하여 몸을 닦으며 세상일은 당하는 대로 그때그때 처리하여 나갔으며, 선조들을 공손히 받들고, 일가들에게는 절도로써 도탑게 하는 한편, 가계를 근실하게 일으켜 군색하고 빈궁한 이들을 구제하니 향리에서 칭송이 끊이지 않았으며, 아들 일곱은 모두가 능력이 뛰어나, 유학을 닦으며 자연을 벗삼으니 모두 맑은 복을 타고나 부귀하다.
   늘그막에 한가로이 살면서 병을 다스리며 책을 갈무리하는 곳이 있어야 하지만, 버들개지가 날리는 언덕에 루(樓)를 짓는 것이 평소에 늘 바라는 바도 아니었으며, 동류들과 왕래를 끊고 혼자 외로이 사는 것도 이 역시 마음에 없는 것 이였다.
   늘 말하기를 매화리는 나의 세거지이며, 돌비늘이 돋아 이끼가 무늬져 있는 어느 것 하나라도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으며, 우물이 있어, 또한 깊으니 동산을 열만하다고 하였다. 또한 가래나무와 잣나무가 짙은 그늘을 내려 뜨려 있고, 선조들의 묘소들이 있는 고향 땅에서 서당(家塾)을 열어 학동들을 가르치며 은둔의 즐거움으로 스스로 만족하였다.
   맏아들 석철 등이 삼가 부친의 뜻을 이어 집 두둑의 작은 언덕에 조그마한 정자를 건립하였으니, 옛부터 항상 산림을 찾아 소오(小塢)를 방문하는 이는 이 곳을 그윽하고 아늑한 곳으로 특별히 여겼으며, 더구나 이 언덕의 이름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매오(梅塢)라고 하니 주위의 경관과 주인의 마음이 조금도 과장됨이 없는 그대로 임을 알 수 있다.
   원경은 마침내 그 중의 하나를 수양과 생활의 터전으로 삼아 여러 학동들로 하여금 등불과 눈빛 그리고 달빛이 교대로 비춰주는 깊은 밤까지 독서를 하게 하였으니, 바뿐 가운데에도 이러한 한가함을 스스로 즐기는 기쁨이란 어찌 음악을 가까이 하는 풍류에 비교할 수 있으리요. 여기에다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으니, 선조들의 자취를 보호하는 것이 그 하나이요, 성정과 정신을 맑게 닦는 것이 그 둘이요, 본업을 힘써서 권장하고 끌어올리는 것이 그 셋이다.
   또한 일가친척들을 서로 모아 화목을 돈독히 하면서, 크게 번성하게 하는 한편, 인근 마을의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인재가 될 수 있도록 공부로써 격려하며 서로 따르도록 하였고, 손님과 친구들이 방문할 때면 흡사 공북해(孔融)의 풍류로 대하며, 고요한 곳에서 공명과는 거리가 먼 한가로운 생활을 하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이 아니랴
   석철 등이 멀리 와서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참으로 도를 즐기는 한 사람으로써 이에 정자를 지은 연유의 대략을 쓰고자 한다.
   이것으로 인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구나. 일어남과 사그러짐은 같은 한 이치이니, 지팡이 한 개에 의지하여 내 가서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불러보며 정자 위에 서서 좌우로 둘러보았을 때, 시냇물과 산, 그리고 구름과 달이 아름다워 비록 몸은 늙었고 거머쥔 붓은 닳았지만 한 두자 기이한 자를 짖지 않을 수 없다.
   돌아보건대 늙은 몸이라 명승경치를 모두 기록하지 못하였으니 다음에 이 정자에 와서 거닐고 노니는 자는 마땅히 이를 상세하게 기록하여야 할 것이다.

(12) 이정계(李廷桂)의 모고정(慕古亭) 설경(雪景)에서 눈속의 대나무를 읊음(吟雪中竹)

  이정계는 본관이 영천으로 부친은 천재(川齋) 이화춘(李華春)이다. 천성이 단정하고 정결하였으며, 학문이 정박하였다. 관이 통정대부 장례원 판결사에 이르렀다. 모고재는 달산면 용평리 70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문화재 제221호로 지정된 정자이다.

亭前竹樹多 使我不曾俗
肯向窮陰日 相隨慰我獨

모고정 앞뜰에 대나무 많이 심어
내 스스로 일찍이 속세에 물들지 않으려 했지만
날들은 찬 기운 도는 절후로 흘러가느니
서로 따르며, 우리의 외로움을 달래보아야겠네

3) 사찰, 소회(所懷), 기타 편

(1) 택옹 박신지(澤翁 朴身之)의 장육사(藏六(陸)寺)

  택옹 박신지(1629∼1705)는 창수면 인량리 출신의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현종 3년(1662)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숙종 1년(1675)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우연히 불문에 들르니
거연히 세속 인연 벗어 난 듯하고
얼음 밑으로 흐르는 시냇물소린 점점 작아지는데
비온 뒤의 산색은 더욱 선명하다.
이미 무생(無生)의 설을 벗어났으니
죽지 않은 신선을 어찌 구할 손가
상방(上方)에 등불 붙여 잘 때에
속세의 미몽(迷夢)은 일찍이 끌고 오지 말 것을....

(2) 칠우정 권대임(七友亭 權大臨)의 유금사차운(有金寺次韻)

  칠우정 권대임(1659∼?)은 본관은 안동으로 숙종 9년(1683)의 증광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숙종 13년(1687)에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현감을 역임하였다.

古寺會經過 重來路不遮
雲煙開特地 松檜擁恒沙
便合幽棲穩 休言世慮拏
論文仍小酌 佳興枉禪家

옛 절에서의 모임 끝난 후
다시 와 보는 길 가리는 것 없네
안개와 구름사이로 보이는 특별한 곳
소나무, 노송나무 수많은 세월을 잡고 있네
편한대로 그윽한 곳에 머물르려니
세상 걱정 당겨 말하지 마라
문장을 논하며, 작은 술자리 베풀어도
아름다운 흥취, 불문이라 다 펼치지 못하리니

(3) 추암 김하구의 “여러 노선배들과 옥천사에 머물며”(與諸老宿玉泉寺)

  추암 김하구(1676~1762)는 본관이 수안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과 현감을 지냈다. 이 시는 현 영덕읍 구미리에 있었던 옥천사에서 지은 것이다.

花林西腋玉泉淸 謝登樓秋意生
娛客峀雲閒弄態 解禪巖鳥靜收聲
十年浮世傷陳跡 一夜玄談慰病情
萬事祗今心不入 擬隨蓮社結同盟

화림산 서쪽 기슭, 청정한 옥천사 있어
사영운과 같은 심사로 루에 오르니 가을 기분 일어나네
즐거운 객, 산구름은 한가로이 모습을 희롱하고
그친 선정에 바위새 조차 소리 거두어 고요하구나
떠돈 세상 10년에 펼쳐진 흔적, 이즈려졌으니
하루 밤 심오한 이야기로 병든 마음 위로나 할까
단지 만가지 일로 마음 들이지 못하니
백련결사를 본 따 같이 맺어나 볼까

(4) 봉산 신봉래의 청련사 산령각기(山靈閣記)

  이 기문은 봉산 신봉래(1878~1947)가 달산면 봉산리에 있는 청련사의 산령각을 중수한 후에 지은 글로 유학자이면서 불학에 능한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절이 있으면, 산령각이 있는데, 이는 불교의 오래된 법이니, 주산의 산신령을 평안히 하고, 저승의 십왕(十王)지존을 호법함이 돌아보아 어찌 중하지 아니할 손가. 이 절의 산령각은 옛날부터 절의 한쪽 구석에 있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무너지고, 퇴락하여 비바람이 스며드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계유년 봄에 군(郡) 사람 김도수와 그 부인이 불천(佛天)에 감복하여 보시의 공덕을 하면서 유연히 감탄하여 말하길 “ 이 산령각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우리들의 허물이다.” 하면서 독단적으로 서로 성금을 출연하여 절의 뒷 땅으로 이건한 후, 경건하게 옛 진영을 모시는 한편, 단청을 입혀 빛나게 하니, 그 외관의 고침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으며, 절의 중수의 공덕을 같이 기울어 바로 마치게 되었다.
   아! 부부의 마음 씀이 근실하여 이 절의 중수함에 서약이 있는 것 같이 일을 일으켰다. 이들의 발원명복이 널리 여러 다른 중생들에게까지 감화를 입혀 십악의 대죄인들을 십선의 착한 사람으로 바꾸고, 오독을 오전으로 변화토록 하여 은덕이 가득하게 하지 않는가.
   복은 바다의 파도같아 받아들여 사용하여도 다하지 않은 것이리니, 산신령은 반드시 운거(雲車)타고 내려 와서 여러 마귀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이 산령각에 들어, 이 산령각에 정기를 들이고, 신령을 모으는 것이 예이니, 성취하기를 기대하는 이, 그 원하는 것을 바라는 이들은 당연히 이 사람, 부부의 공덕임을 알아야 한다.
   주지 전해경이 나에게 와서 그 사실을 심히 상세하게 말하기에 이로써 기를 쓴다.

(5) 신이상(申履常)의 영우선(詠羽扇)

다음은 신이상(1607∼1677)이 읊은 영우선이란 시이다.

어느 해에 늙은 학, 고향 산천 떠나
조용히 깃촉 세워, 표연히 인간세상 날아들었나
이젠 한가로운 늙은이 손에 머물며
때대로 맑은 바람 일으킬 땐, 유월에도 찬바람 머금는다네

 

(6) 농와(聾窩) 유철영(柳澈永)의 대우(待雨)

  농와 유철영(1862∼1929)은 영덕 삼계에서 출생하였으며, 평생토록 시서를 가까이 하고 후학을 가르쳤는데, 다음의 시는 그가 지은 많은 시편 중의 대우(待雨)란 한 수이다.

농가에 소중한 비, 언제 올까 바라지만
내려다보는 옥황상제조차 알지 못하네
말갛게 해만 하늘 돈 지는 이미 오래
골짜기조차 풀 말라 남은 가지 드물구나
논두렁 황새 춤을, 비 부를 상양새 춤인가 의심하며,
어느 때 비올까 묻고는, 기다리고 있다네

 

(7) 둔산(遯山) 방진구(房鎭球)의 회고음(懷古吟)

  둔산 방진구(1887∼1964)는 지품면 황장리 출신으로 일찍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시서에도 능하였다.

부평처럼 떠돌다 고향에 와 처음 만난 친구
세속 때묻지 않은 선비가 되었네
옛 풍속은 오직 서책과 골방 속에 있어도
내리는 비, 도랑과 나무를 어찌 새롭게 하지 않을 소냐
바라보는 산천은 옛 고향 그대로인데
지나 온 세상사에 이웃들은 모두 변하였네
떠났던 자리, 좋은 날 잡아 조금씩 채우기로 하니
푸르게 방초 우거진 수풀가에 꾀꼬리 소리 처랑하네

(8) 옥산(玉山) 김원숙(金元淑)의 오십천변회음(五十川邊會吟)

  옥산 김원숙(1915∼1983)은 달산면 용전리에서 출생한 한학자이다. 일찍부터 한학을 수업하였으며, 박람강기하여 문명(文名)이 있었다. 특히 운율에 능하여, 한국한시원 주관 전국한시백일장, 경주신라문화제, 합천유림주최 전국한시백일장 등의 전국각지에서 개최되는 한시백일장에 여러 번 장원하여 지역의 문장을 빛내었다. 현재 유작을 모은 유고집 「옥산시초(玉山詩抄)」가 있어, 옥산의 한시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다음은 옥산이 남긴 여러 시편 중의 ‘오십천회음(五十川會吟)'이란 시이다.

뜨거운 여름날 강변의 정자
시원함 돋아나는 섬돌은 푸르른 물과 이어져 있네
돌너덜 앉음에 삿자리보다 오히려 좋은데,
흐르는 물 무심히 보노라면, 바람 빌릴 부채 필요 없구나
한 시름은 사그러져 만리장성 밖으로 사라지고
층층 바위에 높이 누웠으니, 바로 절벽 앞일러니
물가의 난초를 따고자 이런저런 생각에
띠집 건너 여러 산봉우리만 유연히 드러나누나

 

(9) 춘곡(春谷) 신헌기(申憲基)의 옥계 침수정의 판상운(板上韻)을 차운한 시

  춘곡 신헌기(1914∼2000)은 본관은 평산으로 일찍이 봉산 신봉래의 문하에서 한학을 사사하여 문재(文才)가 있었다. 영덕향교의 전교와 도산서원의 도집례와 병산서원, 소수서원 등의 도내 여러 서원의 원장을 지냈으며, 경향각처의 한시백일장에 참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다음의 시는 옥계계곡에 우뚝 서있는 침수정의 판상운을 차운하여 지은 시이다.

한가한 날 침수정을 찾아 오르니,
옥같은 맑은 물소리 창에 들어 기둥에 서리는데
구룡담은 폭포를 이루어 땅을 울리고
하늘을 받치는 팔각산은 그림그린 병풍같이 서있네
한 낮엔 순한 사슴 푸른 시냇가 초가 근처에서 놀고
정오를 알리는 닭소리는 흰 구름 빗장위로 들리는데
한점 티끌먼지 일지 않은 선계를 넘은 곳이니
바람과 달은 꿈에 빠진 사람을 불러 깨우는 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