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절 특용작물

 농업의 일반적 환경으로 지형, 기후, 토양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군은 경상북도의 동해안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쪽은 울진과 영양, 서남쪽은 청송과 포항에 접하고, 동쪽은 53㎞의 해안에 접하고 있다.
  인근 시·군 경계에는 대소 산악과 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평야는 대부분 해안을 따라 형성되고 있어 토양은 사질토로 척박하다. 또한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타지방에 비하여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한 편이며 봄이 짧고 가을에는 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다. 이러한 기후 관계로 벼농사 등 여름작물 재배는 불리한 편이며 보리 등 월동작물 재배는 유리한 편이다.
  연평균 기온은 13℃ 이고 강우량은 1,070mm이나 7∼8월에 많은 강우를 내리며 첫 서리는 10월 하순경에 내리고 마지막 서리는 4월 하순까지 내린다. 따라서 이러한 기후조건과 토양에 의하여 일찍부터 잠업과 담배, 기타 특용작물의 재배가 성행하였다.

1. 잠 업

1) 광복 이전의 지역의 잠업

  우리나라 잠업은 마한시대부터 누에치기와 베짜기를 가르쳤다는 「삼국지위지동이전」의 기록으로 보아 약3,00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삼한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왕들이 누에치기와 베짜기를 장려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태종(1401∼1418)은 왕비친잠(王妃親蠶)의 예법을 정하여 궁중에서도 누에를 치게 하였으며, 세조는 종상법(種桑法)을 공포하는 한편, 「잠업주해(蠶業注解)」를 편찬하여 잠업의 보호와 육성에 힘썼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에 들어와서 사회가 혼란해지고, 서양에서 비단이 수입됨에 따라 일시적으로 잠업이 쇠퇴하기도 하였으나, 산업화가 시작된 서구 직조공장의 견직물의 대량생산을 위해서는 그 원료인 잠사(蠶絲)의 수요가 증대됨에 따라 오히려 잠업이 장려되었다.
  일제시대는 일본이 우리나라가 천혜의 잠업지대임을 착안 1919년에 각 도에 모범 잠실을 설치하여 잠업의 본격적인 육성시책을 펼쳤다. 일제는 1925년부터 적극적으로 일본에서 뽕나무 묘와 잠종을 수입하여 무상으로 분배하고, 뽕나무 식재에 대해 보조도 하고, 각 도에 잠업기술관을 배치하여 잠업기술을 보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책들은 강제성을 띠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수탈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한국민의 반발을 초래하였으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식량증산정책이 우선시 되었으므로 일제 후기에는 잠업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어 갔으며, 전쟁으로 인하여 미국으로부터 생사수출의 길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인조견의 개발로 천연견사의 수요가 줄어들면서 가격이 떨어져 일제 말기에는 잠사의 생산량도 점차 줄어들었다. 즉 1940년의 고치생산량 2만2천 M/T에서 1944년에는 1만4천 M/T으로 감소되었다가 1945년에는 2만 2700 M/T으로 복구되기도 하였다.
  표<5-14>는 일제시대 때 영덕군의 뽕나무밭 면적과 누에고치 생산량을 나타낸 것이다.

2) 현대 영덕의 잠업

  1913년 경상북도에 잠업취체소(蠶業取締所)를 설립하고, 1919년에는 조선잠업령(朝鮮蠶業令)을 제정, 공포하는 등 일제는 강압적 방법으로 잠업육성을 기도하여 한때는 세계4위의 잠업국으로 성장하기도 하였으나,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2년에는 조선잠사업통제령(朝鮮蠶絲業統制令)을 공포하여 누에고치의 수매제도를 일정한 양의 고치를 농가에 할당하여 강제로 판매케 하는 공출제도로 바꾸었다. 이는 전쟁물자의 확보를 위한 일제의 간악한 술책으로 할당된 공출량이 항상 과중하여 잠업농가에서는 크나큰 고통이 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양잠을 기피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영향이 광복 이후에까지 미쳐 광복 후에도 양잠을 기피하게 되어 많은 뽕나무밭이 황폐해져 갔다.
  그러나 정부 수립 후 잠사업이 농촌소득 증대와 수출산업으로 유망한 업종으로 전망하고는 집중 육성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산견(産繭) 3개년’계획을 세웠으나, 1950년의 6.25전쟁으로 무산되었으며, 이어서 다시 1952년부터 1956년까지 ‘5개년 잠견증산계획’을 세워서 누에고치 생산을 독려하였으나, 이도 여타 경제여건의 미성숙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어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새로운 ‘잠업증산 5개년’ 계획을 세웠으나, 이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가운데, 다시 잠사업 증산 10개년 계획을(1961∼1970) 세우고, 잠사업의 기본이 되는 잠업법을 제정, 공포하여 우리나라의 잠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결과 1969년에는 4만 1704 M/T을 생산하여 명실상부한 누에고치 생산국으로 명성을 높였으나, 제 1·2차 석유파동으로 해외수요, 특히 일본으로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누에고치 생산량의 재고가 누적되면서 우리나라 잠업은 침체국면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합섬섬유의 출현이 잠업의 쇠퇴를 부추기기도 하였다.
  근년에 들어와서는 누에를 이용한 건강식품을 만들거나 누에를 이용한 동충하초의 생산과 누에가루 생산 등으로 다시 잠업의 활로가 모색되고 있다.
  영덕군의 잠업실태는 1976년의 뽕밭 면적이 620㏊에서 1980년에는 271㏊로 줄어들었으며, 1997년 현재에는 25㏊로 거의 뽕밭이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또한 소잠(누에씨) 공급량도 1976년의 6,985상자에서 1980년에는 3,357상자로 줄어들었으며, 이후 1990년대까지 소잠의 공급량이 지속적으로 줄어들다가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씩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잠사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동충하초 등의 약용으로 쓰기 위하여 늘어난 것이다.

2. 담 배

  담배는 현재 북위 60˚에서 남위 40˚에 걸쳐 전세계에 재배되고 있는 기호식품이다. 우리나라에는 광해군 10년(1618년)에 일본으로부터 전파되었거나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으로 보이며, 1921년까지 자유경작을 하다가 이후에 전매제로 바뀌었다.
  1921년에 들어와서 조선전매령이 제정되면서 담배는 전매사업으로 발전하게 되어 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광복 이후에도 엽연초생산이 꾸준히 증가하여 1982년도에는 8만톤으로 최대 생산량을 이루면서 농가소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작금에 들어와서는 해외시장의 수입억제와 세계적인 금연운동의 확산에 따라 그 수요가 점차 줄어들고 있어 농가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1998년 현재 국내의 엽연초 생산량은 55,534 톤이며, 수매대금은 3,178억으로 아직까지도 담배는 농가의 주요한 소득작목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표<5-16>는 1981년 이후 영덕군의 잎담배(葉煙草) 생산실태를 나타낸 것이다.

3. 참깨, 땅콩, 약용작물

  특용작물은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는 농산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환금성(換金性)이 강하다. 우리 지역에서는 섬유작물인 닥나무와 유료작물(油料作物)인 참깨와 땅콩 등이 지역의 특용작물로 재배되었다.
  현재 한지생산을 위한 닥나무 재배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참깨는 산지가 많은 군의 내륙지역을 중심으로 자가소비용으로만 재배하고 있다. 땅콩은 해안 모래땅을 가진 일부 지역과 하천변의 사질토를 중심으로 주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참께와 땅콩의 재배는 많은 인력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판로에도 상당한 문제가 있어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자가소비용 이외는 그 재배면적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영덕군은 낙동정맥이 지나가는 중심부에 위치한 관계로 산세가 높은 지품 속곡, 창수면 등지에는 자연산 약초가 많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또한 산야에 자생하는 자연산 약초채취와 더불어 약용작물의 재배도 성하였다.
  이러한 약용작물의 재배는 달산, 지품, 창수면의 산간 지방의 일부 농가를 중심으로 구기자, 목단, 백작약, 산수유, 당귀, 청궁, 시호, 길경, 황기, 두충, 토천궁 등을 재배하여 왔으나, 1999년 현재는 재배면적이 줄어들어 생산량이 급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