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석기시대(石器時代) |
오늘날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이래 그 역사발전 단계를 설명할 때는 보통 구석기(舊石器)시대·신석기(新石器)시대·청동기(靑銅器)시대·철기(鐵器)시대 순으로 나누는 것이 현대의 일반적인 흐름이다.
이러한 구분에 따라 한반도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시기를 대략 50∼60만년 전인 구석기시대 전기라고 보고 있는 것이 현대의 통설로 자리잡고 있다. 대개 이 시기는 지질학적으로 제4기 홍적세(洪績世)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인류문명의 초보적 단계인 이 시대의 생활 양상은 돌을 깨뜨리거나 돌조각을 떼어 내어서 만든 타제(打製)석기를 주요한 생활의 도구로 사용하며, 수렵과 채취생활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생활방식은 지금으로부터 거의 1만년 전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구석기시대도 당시에 사용한 도구 등의 발전정도에 따라 전기(前期)·중기(中期)·후기(後期)의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기와 중기의 시간적 구분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8만∼7만 5천년 전으로 보고 있으며, 후기는 4만∼3만 5천년 전으로 설정하고 있다. |
우리나라에도 구석기시대의 전기·중기·후기의 유무(有無)를 나타내어 주는 여러가지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이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인류가 거주한 것을 알려주는 것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뿌리는 아득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발견되고 있는 유적 중에 발달된 박편석기와 돌날석기들을 사용한 이동식 수렵채취 문화를 가진 후기 구석기인들의 유적과 유물들이 넓은 범위에 걸쳐 발견되고 있어 한반도 전역에서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구석기시대 중기의 유물들이 몇 군데서 발견되고 있는데, 그 중에 낙동강 상류지역인 칠곡군 석적면의 중동유적에서 1980년에 발견된 첨기(尖器)와 돌망치 등의 석기류 4점과 1986년 임하댐 수몰지역인 안동과 청송 일대의 지표조사 결과 수습된 타제석기 10여점 등은 그 대표적 유물이다. 이 외에도 청송군 진보면과 파천면을 따라 흐르는 반변천 유역과 임동면 등에서는 돌망치·석핵·긁개 등의 유물 등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를 보아 상당한 정도의 구석기인들이 오늘날의 경상북도 내륙지역에서 생활의 터전을 일구며 거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낙동강의 상류지역인 경북 내륙지역에서 뿐만 아니라 경북 동해안 지역에서도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는데, 우리 지역의 지품면 오천리와 신양리 부근에서 바로 구석기 중기시대의 유물이 채집되었다. 이들 지역은 오십천의 상류인 대서천과 소서천이 합류하여 오십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합류(合流) 지역으로 충적토가 넓게 쌓여 있어 오늘날에 있어서도 미곡 생산지로 이름난 곳이다. 이들 지역의 주변 지세와 지형을 살펴보면 수렵과 어로채취를 중요생활수단으로 삼았던 이 시대에 있어서 오십천이란 큰 강을 끼고 있으며, 강 주위에는 첩첩한 산이 둘러싸여 있어 이들이 강을 따라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있고, 산을 따라서는 나무 열매를 채취할 수 있어 생활의 터전으로 삼기에 용이한 곳이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이들 지역에서 채집된 유물로는 블록 1점·다각면원구 1점·긁개 1점·플린터와 같은 유리질 석재 1점 등 모두 4점의 유물들인데, 이들 유물들은 그 동안 구석기시대의 존재 유무에 대하여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경북 동해안 지역에도 이 시기의 문화가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여 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영덕지역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가 아득한 구석기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귀중한 자료로써 그 중요성이 크다. 그러나 이들 지역 외에 이 시기의 유물과 유적들이 이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동해안 제일의 강인 오십천(五十川) 하류지역과, 영해평야를 가로지르는 송천(松川) 유역의 자연적 여건으로 보아 틀림없이 구석기시대에 인류가 거주하였으리라 보여지며, 앞으로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지품면 오천리 부근에서 발견된 유물보다 더 많은 유물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년 전으로 보며, 우리나라는 서기전(西紀前) 5천년 경부터 서기전 1천년 경까지 약 4천년간 존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신석기시대는 인류의 문화발달 과정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轉機)를 맞이한 시대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요소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로 대표되는 토기의 사용과 마제(磨製)석기를 이용한 농경문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종래의 수렵채취의 이동식문화(移動式文化) 대신에 목축 및 농업을 통한 정착식문화(定着式文化)가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들의 주거지역도 농작물을 경작하기 좋은 강가와 해안의 내륙지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인류는 이제까지의 수렵채취를 통한 단순한 생활방식으로부터 서서히 탈피하여 한 곳에 오래 정착하여 생활하는 복잡한 형태의 생활방식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생활방식은 종래의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변화로써, 이후의 인류문명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기였다.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시대의 존재를 알려줄 유적과 유물의 발견은 압록강으로부터 낙동강에 이르기까지의 강과 하천을 따라 우리나라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특히 경북지역에서는 낙동강 지류를 따라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와 김천시 귀성군 송죽리 등의 내륙지역 여러 군데서 발견되고 있으며, 동해안 쪽으로는 울진군 후포면 후포리에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다만 영덕과 영해지역에서는 신석기시대 존재를 알려줄 유물과 유적들은 아직까지 발견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위의 후포리에서 이 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오십천이나 송천과 같은 강이 있어 자연여건이 좋은 영덕·영해 지역에도 신석기시대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될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하겠다. 나아가서 두만강 유역과 강원도 일부지역, 그리고 서기전 5000년 경으로 추정되는 양양의 오산리 하층(下層)과 부산의 동삼동 하층(下層) 등에서 이 시대의 유적·유물들이 대량 발견되고 있어, 동해안를 따라 두만강 하구와 부산 동삼동을 이어주는 이 지역에도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이 시대의 존재를 알려 줄 유적과 유물들을 대량으로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여지며 이를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다만 이 지역에서는 1977년에 창수면 인천리에서 수습된 마제석촉 5점과 마제석검 1점등의 유물이 이 시대의 유물로 추정은 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만약 위의 유물들이 이 시대의 것으로 확인이 된다면 이 지역에서 신석기시대가 존재한 사실이 명백하여질 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의 역사와 문화가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걸쳐 오랜 세월동안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 될 것이다. |
2. 청동기 시대
|
신석기시대 이후 본격적인 농업의 발달은 신석기시대의 인류들을 점차 조직적이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관계를 형성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들로 하여금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생산력의 증대를 위한 다양한 형태의 노력을 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들은 종전의 석기류 보다 훨씬 견고한 금속류를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인류에게 새로운 문명을 열어 준 청동기의 발견이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은 대략 서기전 4천년 경으로 보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대체로 서기전 1천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청동기가 발견되고 난 후에도 인류는 청동기와 석기류 등을 공용(共用)하여 왔는데, 이러한 것이 청동기 문화가 점차 발전하게 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청동기의 사용이 증대하여 가는 청동기 문화시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대개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를 단군의 통치시대로 알려진 고조선시대를 이 시기로 비정(比定)하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문화적 요소는 고인돌(支石墓)과 무늬없는 토기(無文土器)·토광묘(土壙墓), 그리고 청동제품의 무구류(武具類) 등을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곳곳에서 이러한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의 경우, 우선 형식으로는 크게 북방식(卓子式)과 남방식(바둑판식)의 두 형식으로 구분하여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도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복잡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특히 남방식의 경우에 지석(支石)이 없는 특별한 경우도 발견되고 있어 이의 구분이 절대적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인돌의 발전단계를 구분할 때는 고인돌의 내부에서 발견되고 있는 부장품(副葬品)과 이들의 형식구조상의 변천을 가지고 북방식에서 남방식으로 남방식에서 다시 무지석식(無支石式) 순서로 발전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통설이다. 한편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 대신에 무문토기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무문토기는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어 청동기시대에 벌써 한반도 전역에 사람이 거주한 것을 알려준다 하겠다. 특히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경주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이들 토기가 수습되고 있는데, 주로 고인돌이나 석관묘에서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마제석기류로는 마제석부와 편인석부, 마제석촉, 석검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청동기시대가 수렵채취의 단계를 넘어서 농업이 사회생활의 중심이 된 사회임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특히 경상북도의 동해안 지역에서도 자연지리환경이 뛰어난 영덕과 영해 지역의 강과 구릉지 주위에서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고인돌과 토기류, 그리고 석기류의 유물들이 다수 발견, 또는 출토되고 있어 이 지역은 구석기시대 이래로 역사가 깊은 고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우리 지역의 청동기시대 유물출토 지역은 군민들의 젖줄인 오십천 유역을 중심으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남정면 남정리의 마을 건너편 대나무 밭 일대에서도 돌도끼와 어구 등이 발견되고 있다. 영해지역은 창수에서 발원하여 영해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송천(松川)과 이 강의 지류(支流) 주변의 낮은 구릉지역을 중심으로 이 시대의 유물들이 주로 출토되고 있다. 영덕군내의 선사시대의 유물과 유적들에 대한 발굴 및 지표조사는 국립경주박물관과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 조사를 기초로 하여 경상북도에서 「안동·동해문화권 지표조사보고서(Ⅱ)」란 책자로 발간되어 나온 것이 있어, 이 지역에서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을 알아보는데 많은 편리를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