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미 군정시대

 1945년 8월 15일 미국을 상대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한반도는 미소(美蘇)에 의하여 38도선을 경계로 분단 점령되었다. 미소는 일제가 패망하면 그들의 무장 해제와 전후 처리를 위하여 한반도를 분할하여 점령한다는 그들의 협약에 따라 38도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분할 점령하였다. 따라서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 질곡에 벗어나자마자 또 다시 미소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는 비운(悲運)에 빠지는 새로운 정치 사회적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광복 이후 한반도에 먼저 상륙한 것은 소련이다. 소련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인 1945년 9월 이전에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의 관동군을 괴멸시키면서 만주와 북한의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8일에서야 38선 이남지역인 남한은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미 태평양지구사령부 예하의 제24군의 3개 사단이 하지 중장을 사령관으로 하여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에 입성하였다.
 남한에 진주한 미진주군(美進駐軍)은 이해 9월 11일 하지 중장의 미군시정방침의 발표와 아놀드 소장이 미군정청 장관에 취임하고 이어서 19일에는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이라는 통치기구를 발족시켰다. 이로써 한반도는 미·소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면서 일제가 패망하면 곧 한민족의 자주·독립국가가 성립될 것으로 믿었던 한민족의 기대와 희망은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미군정이 전국으로 시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는데, 경북지방의 경우에는 미군이 한국에 상륙한지 2개월여 만인 동년 10월 1일에 미군 기계화부대를 선두로 보병부대가 대구에 입성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미군정의 시책을 통하여 생소한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을 남한에 펼쳐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군정 당국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던 일제의 각종 악법을 미군정 법령 제11호에 의하여 폐기시키면서 광범위한 자유를 부여(賦與)하였다.
 한편으로 미군정 당국은 일제의 식민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행정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중에는 종전까지 볼 수 없었던 각종 위원회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적 결정이나 행정적 처분에 앞서 주민의 의사를 행정에 반영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일반 민중들의 민주적 참여의사를 고양시키는 한편 민주 시민의식의 앙양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군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와 군정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써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로 민정이양을 준비하기 위한 초기 단계로 미군정청에 한국인 대표로 구성되는 입법의원(立法議院)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946년 8월 24일 군정 법령 제118호에 의하여 정원을 90명으로 하는 입법의원이 구성되었는데, 이 입법의원 선출방식은 45명은 민선의원으로 45명은 군정장관이 임명하는 직접과 간접선출의 방식이 혼합된 것이었다.
 이렇게 선출된 입법의원의 중요한 임무는 미군정 기간동안 정치·행정·사법·경제·사회개혁의 기초가 될 법령 및 정책안(政策案)을 작성하여 군정장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입법의원은 법령이나 정책안의 작성을 위한 보조자였으며, 이러한 모든 업무의 최종 결정권과 시행은 군정장관에게 있었다.
 그래도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입법의원의 선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군정당국은 1946년 9월에 입법위원 선출을 위한 세칙을 확정, 발표하여 입법의원 출마후보자 및 일반 국민들의 협조를 구하였다.
 세칙에 의하면 경상북도는 도 전체를 6개의 선거구로 나누고 6명의 선거구 대표와 별도로 1명의 도 대표를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이들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으로는 먼저 각 부락의 동 대표를 2명 선출하고, 선출된 동 대표는 다시 읍·면 대표 2명을 선출하고, 선출된 읍·면 대표는 또 군 대표 2명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선거권은 23세 이상의 남녀에게만 주어졌으며, 후보출마의 자격은 25세 이상으로 하였으며, 일제시대의 친일관료 및 악질적 민족반역행위를 한 자 등은 그 자격을 제외하였다. 투표의 방법은 직접·보통·무기명·비밀 투표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반 민중이 정치에 참여한 사건이다.
 표 <4-1·2·3>은 이때의 도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영덕지방의 선거 결과이다.
 
 
  이 선거 결과에 의하여 선출된 부·군(府·郡) 대표들은 이 달 30일 도청 회의실에 모여 도 대표 1명과 각 구의 구 대표 6명을 선출하였다. 당시 영덕을 포함하는 제3구에서는 독립촉성국민회의의 김광현이 선출되었으며, 도 대표로는 한민당의 서상일이 선출되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직접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45인의 입법의원들과 미군정 당국에서 임명한 45명의 간선(間選) 입법의원들은 1945년 12월 12일 입법의원 개원식을 갖고, 미군정 당국의 남한 통치를 자문하였으며, 이후 미군정 당국에 의한 행정권의 민정화(民政化)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미군정청 입장에서는 미군정에 한국민이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형식체제를 갖추어질 수 있었다.
  입법의회의 개원식이 이루어진 1개월 뒤에는 도 및 지방의 주요관리와 지방의회 의원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기 위한 법령 126호를 공포하여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 여건의 미비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한반도에서 미군정이 실시된 기간은 1945년 9월 19일 미군정청이 발족되면서부터 시작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여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10·1 대구폭동 사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신탁통치의 찬반운동, 좌우익의 갈등과 투쟁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3년여의 짧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진 미군정이지만 고대의 전통사회와는 달리 서구식 문화와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등,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초를 닦는 등의 순기능적인 면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또 다시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했다는 민족적 자존심의 훼손을 가져다준 시기였다. 또한 미군정은 일제 36년의 친일·부일 인사들의 미온적인 처리와 토지개혁의 미완수(未完遂), 좌우익 갈등의 배태(胚胎) 등의 많은 문제를 내포한 민족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 시기로 볼 수도 있다.

제2절 제1공화국시대

  제1공화국은 미군정이 1948년 8월 15일 종료되기 직전인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제헌의원들에 의하여 각종 법령과 제도가 정비된 후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야기된 4·19혁명에 의하여 이승만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12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지배한 정체(政體)를 말한다.
  미군정 당국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군정을 종식시키면서 한국의 통치구조를 서구식 민주주의에 의한 것으로 결정하고 국가의 통치중심을 일제 식민통치전의 국왕 중심체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선출은 국회를 통한 간선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제헌의원을 선출하고 제헌의원으로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국회에서 선거에 당선된 제헌의원들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건국의 기초를 닦는 한편, 북한의 남침으로 야기된 6.25한국전쟁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훌륭하게 그 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의 집권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자유당을 창당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집권연장을 획책하여 권좌를 유지하여 오다가 1960년의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으로 결국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어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한편 우리 지역의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출선거에는 당시 영덕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덕군회장으로 있던 오택열(吳宅烈)후보가 선출되었다. 오택열 당선자는 제헌의원선거에 막강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배경을 업고 영덕군 선거구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이 되어 영덕군의 제1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렇게 선출된 오택열 제헌의원은 불행히도 1950년에 발발한 6.25한국전쟁 도중에 납북되어 그의 경륜을 펼쳐보일 수 없었다.
  제1공화국시대 12년 동안에는 여러 번의 선거가 있었다. 특히 건국의 기초를 닦을 초대 대통령 선거를 포함하여 4번의 대통령 선거와 1·2대를 포함한 5번의 부통령 선거가 있었으며, 제헌의원의 선출을 포함한 4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2번의 도의원 선거, 그리고 1번의 면장 선거가 있었다.
  이렇게 제1공화국시대에 실시된 각종 선거에서 우리 지역과 관련된 각종 선거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만 초대 대통령과 초대 부통령, 그리고 2대 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투표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므로 지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6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서로 큰 인물임을 내세웠으나 자유당 소속의 김원규후보가 당선되었다. 다시 4년 뒤인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8년 5월 2일 치루어졌으나 본 군에서는 자유당 후보인 김원규후보와 2대와 3대를 연이어 출마한 무소속의 김영수후보가 출마하여 접전을 벌이는 듯 하였으나 무소속의 김영수 후보가 선거관리 담당부서에 의하여 등록무효로 결정됨에 따라 자유당의 김원규후보가 자동으로 무투표 당선이 되어 제4대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제1공화국시대에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에 의하여 군사·경찰·교육·행정제도 등에서 서구, 특히 미국지향적인 민주주의적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그 운영과정에서는 민주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가미된 왕조시대의 통치에 버금갈 정도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특히 정부 수립후 미군정 기간동안에 이루어지지 못한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처벌의 미비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전근대적 사회구조의 개혁 실패, 특히 토지제도의 개혁실패와 익숙하지 못한 서구식 각종 제도의 도입 등으로 사회 전반에 많은 갈등과 혼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북한의 남침에 의하여 1950년에 발발한 6.25한국전쟁은 민족의 대재앙(大災殃)으로 오늘까지 그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고 있다.
  그러나 제1공화국시대는 건국의 초석을 다지는 한편, 혼란한 정국을 헤치며 민주정부의 기틀을 세운 그 공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1공화국시대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제외한 제2대·3대·4대의 대통령선거와 제3대·4대·5대의 부통령선거가 있었다. 이 당시 영덕지역의 대통령 선거결과는 표 <4-7·8·9> 와 같으며, 부통령 선거결과는 표 <4-10·11·12> 와 같다.
 

 
 
 
  제1공화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나라의 기틀을 가다듬은 후 지방자치제도를 확립하여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여 6.25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2년 4월 25일에 시·읍·면의원 선거를 실시하였으며, 민선 면장의 선출도 일부 이루어졌다.
 동년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모든 절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도의원 선거에는 자유당 소속의 김중한후보와 국민회 소속의 김용한후보가 도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표 <4-13>은 1952년 4월 25일에 실시된 초대 각 면의원 선거결과이다. 6.25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지역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지역인사들이 면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당선된 인사들은 지역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표 <4-14>은 초대 도의원 선거결과이다. 자유당의 김중한후보와 김용한후보가 출마하여 두 후보 모두 당선되어 전시(戰時) 도정(道政)의 발전과 지역구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표 <4-15> 은 초대 민선 면장의 명단이다.
 1956년에 들어와서 정부는 법률 제385호와 제388호로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였다. 개정된 자치법에 의거하여 동년 8월 8일에 시·읍·면장 및 시·읍·면의원을 선출하는 동시선거를 실시하였다. 표<4-16>은 이때 선출된 영덕지역의 제2대 면의원 명단이다. 이어서 8월 13일에는 개정된 자치법에 의거하여 도의회 의원선거도 실시되었는데, 영덕의 도의원 으로는 자유당 소속의 김중한후보와 무소속의 박구락후보가 선출되었다.
 
 
  표 <4-18>은 1956년 8월 8일의 시·읍·면장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제2대 각 면의 민선 면장의 명단이다. 1956년의 법률 제385호와 제388호를 개정할 때 종래의 지방의원과 시·읍·면장의 임기를 기득권 확보차원에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제2대 민선 면장의 임기시작 연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제3절 제2공화국시대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면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국민의 엄청난 저항이 시작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대구와 마산에서 봉기한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서울로 역확산되면서 마침내 자유당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제1공화국의 수반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4.19의거로 발전되어 우리나라 역사상 민권(民權)이 관권(官權)에 대항하여 승리한 최초의 쾌거인 4.19혁명을 가져왔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인 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시위가 계속되자 4월 27일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는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집권당인 자유당도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과 함께 같이 몰락하였다.
  국회에 제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의 의결에 따라 수리되어 제1공화국은 끝나고 제2공화국시대의 막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아닌 시위에 따른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정권의 교체와 지도자 1인의 교체에 따라 1개 당(黨)의 운명이 결정되는 정치현실은 다소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한국의 국가통치권의 행사와 정치가 제도와 정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져 온 역사를 만든 시초로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특정 정당의 수장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정권 자체가 명멸하는 것은 그 이후 한국정치사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 되었다.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4개월 여간의 기간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에 의하여 통치되다가 마침내 민주당이 주축이 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는데, 제2공화국은 1960년 6월 15일 국회에서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구성된 제4대 국회가 제2공화국의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정하고, 양원제를 채택하여 제2공화국의 기초를 닦은 후 자진해산하고, 동년 7월 29일에는 새로이 바뀐 법률에 의하여 제5대 민의원과 최초의 참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민주당의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총선에 압승한 민주당은 8월 13일에 민주당내의 신파(新派)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여 내각의 책임수반으로 하였으며,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제2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수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거전부터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 집권대결을 벌이며 정권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려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던 민주당내의 파벌경쟁은 제2공화국 탄생 이후의 험난한 정치여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결국 새롭게 탄생한 민주당의 제2공화국은 결국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는 내홍(內訌)을 겪으면서 1961년 2월 20일에는 급기야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구파(舊派)들이 별도의 신민당을 창당하는 지경에 이르러 그 갈등은 극에 이르렀다.
  결국 내각제 제도에 익숙지 못한 정치지도자들의 역량부족과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서 정권을 선점하려는 당내의 갈등 속에서 사회 전반적 분위기는 혼란과 무질서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대결과 불신에 따라 갈등을 증폭시켜 가던 민주당 정권은 사회 전체에 확산 되어가기 시작한 혼돈과 무질서를 지켜보던 군부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다.
  제2공화국의 몰락은 내각제 도입에 따른 지배구조의 양분과 통치권의 이원화 등과 집권 민주당내 신·구파의 갈등,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억눌렸던 사회적 욕구의 분출 등이 사회전반에 확산되면서 무질서와 혼란과 혼돈이 극에 달하여 국민들의 의식 속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권위있는 세력이 나서주길 기대하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를 받으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이 정권을 탈취하였다. 따라서 민주당 정권은 불과 8개월만에 그들의 경륜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1961년 5월 16일부터 쿠데타의 지도자인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7개월 여의 기간동안 군정을 실시하면서 지속적인 정권유지를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여 준비한 뒤 1963년 12월 27일 정권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였다.
  군정의 쿠데타 주도자들은 1962년 12월 17일에 국민투표에 의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1963년 10월 15일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이외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각축을 벌였다. 선거결과로 군정의 지도자이던 박정희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4.19혁명에서 제2공화국을 거쳐 군정기간에 이르는 제2공화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제3공화국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르렀다.
  제2공화국은 국회제도를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나누어 선거를 치루었는데, 참의원 선거는 시·도를 1개 선거구로 하는 대선거구제였으며, 참의원의 임기도 1·2부로 나누어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거제도에 의하여 경상북도 선거구에서는 1·2부 각각 4명씩 8명의 참의원을 선출하였으며, 이때 1부 의원의 임기는 6년이었으며, 2부 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하였다.
  이때 우리 지역과 연고가 있는 김장섭 후보가 당시 경상북도의 제2부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당시에 실시되었던 제5대 민의원선거에는 모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당시 영덕지역의 민의원 선거에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김영수 후보가 김병윤 후보와 신삼휴 후보를 24,467표로 물리치고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표 <4-19>는 제2공화국 때에 실시되었던 우리 지역의 제5대 민의원 선거결과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선된 5대 민의원들은 다음해 5.16 쿠데타에 의하여 국회 자체가 해산되게 되어 단명으로 끝났다.
 

 
 
 제2공화국에서도 지방자치의 실시를 위하여 도지사 및 시·읍·면장, 도의원·시·읍·면의원 등의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이후 1961년 5월 16일의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모든 것이 무산되고 본격적인 지방자치는 90년대 이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3대 면의원 선거는 4.19혁명에 의하여 자유당이 몰락한 후 정권을 인수하게 된 민주당 정권에 의하여 1960년 12월 12일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민권의 승리에 따른 완전한 민주주의가 꽃피기 전에 또 다시 한국형 권위주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제3대 면의원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인사들은 경륜도 펴보기 전에 군정당국에 의하여 중도에 해산당하여 미쳐 그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다. 표 <4- 20 >은 제3대 지역의 면의원 당선자 명단이다.

제4절 제3공화국시대

 1961년 5.16쿠데타로 제2공화국을 전복시킨 후 정권을 잡은 군부(軍部)의 지도자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非常)의 기구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며 민정이양을 공약하였다. 이에 따라 군부는 민정이양의 제1차 준비작업으로 1962년 12월 17일에 전문과 5장 121조, 그리고 부칙 9조로 된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78.78%의 찬성을 얻어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9월 5일 후보등록 마감일을 9월 15일로 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을 이해 10월 15일자에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등록마감 결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 이외의 5명의 후보가 등록하여 모두 7명의 대통령 후보가 선전하였다. 선거결과 근소한 표차인 156.026표 차이로 유효투표인의 46.6%의 지지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2위인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은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박정희 후보가 1963년 12월 17일에 대통령직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 27일 개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를 제3공화국시대라고 한다.
 군정기간 및 3공화국 기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농어촌 고리채정리·농촌부업의 장려 등을 통하여 피폐된 농어촌 경제를 재건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두면서, 점차 종합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적 자립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결과 6.25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각종의 산업시설과 훼손된 농경지 등의 복구가 상당부분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경제개발계획으로 산업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 P>

 
 
 
 
 
 
  제3공화국시대에는 국민투표가 2회 있었으며, 대통령 선거가 3회 있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가 3회 있었는데, 이 중에서 국민 전체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에 대한 결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민들이 참여한 선거결과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5·6·7대 대통령 선거결과는 표 <4-21·22·23>과 같다. 또 제6·7·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표 <4-24·25·26>과 같다.
  1963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중한 후보와 박종길 후보 이외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소속의 김중한 후보가 18,674표를 얻어
 
 
 
 
차점자인 자유민주당 소속의 박종길 후보를 2,546표차로 누르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소속의 문태준 후보와 민주당 소속의 박종길 후보 이외에 2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문태준 후보가 39,506표를 얻어 차점자인 박종길 후보를 11,451표차로 누르고 제7대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편 1971년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문태준 후보와 황병우 후보 이외에 2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소속의 문태준 후보가 46,375표를 얻어 차점자인 신민당의 황병우 후보를 25,559표차로 누르고 2선 의원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군정이 전국으로 시행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었는데, 경북지방의 경우에는 미군이 한국에 상륙한지 2개월여 만인 동년 10월 1일에 미군 기계화부대를 선두로 보병부대가 대구에 입성하면서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 당국은 미군정의 시책을 통하여 생소한 서구식 민주주의 이념을 남한에 펼쳐 나가기 시작하였는데, 군정 당국은 무엇보다 먼저 한국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던 일제의 각종 악법을 미군정 법령 제11호에 의하여 폐기시키면서 광범위한 자유를 부여(賦與)하였다.
 한편으로 미군정 당국은 일제의 식민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행정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 중에는 종전까지 볼 수 없었던 각종 위원회제도를 도입하여 행정적 결정이나 행정적 처분에 앞서 주민의 의사를 행정에 반영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 일반 민중들의 민주적 참여의사를 고양시키는 한편 민주 시민의식의 앙양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미군정 당국은 군정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와 군정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써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로 민정이양을 준비하기 위한 초기 단계로 미군정청에 한국인 대표로 구성되는 입법의원(立法議院)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1946년 8월 24일 군정 법령 제118호에 의하여 정원을 90명으로 하는 입법의원이 구성되었는데, 이 입법의원 선출방식은 45명은 민선의원으로 45명은 군정장관이 임명하는 직접과 간접선출의 방식이 혼합된 것이었다.
 이렇게 선출된 입법의원의 중요한 임무는 미군정 기간동안 정치·행정·사법·경제·사회개혁의 기초가 될 법령 및 정책안(政策案)을 작성하여 군정장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입법의원은 법령이나 정책안의 작성을 위한 보조자였으며, 이러한 모든 업무의 최종 결정권과 시행은 군정장관에게 있었다.
 그래도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입법의원의 선출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군정당국은 1946년 9월에 입법위원 선출을 위한 세칙을 확정, 발표하여 입법의원 출마후보자 및 일반 국민들의 협조를 구하였다.
 세칙에 의하면 경상북도는 도 전체를 6개의 선거구로 나누고 6명의 선거구 대표와 별도로 1명의 도 대표를 선출하도록 하였으며, 이들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으로는 먼저 각 부락의 동 대표를 2명 선출하고, 선출된 동 대표는 다시 읍·면 대표 2명을 선출하고, 선출된 읍·면 대표는 또 군 대표 2명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선거권은 23세 이상의 남녀에게만 주어졌으며, 후보출마의 자격은 25세 이상으로 하였으며, 일제시대의 친일관료 및 악질적 민족반역행위를 한 자 등은 그 자격을 제외하였다. 투표의 방법은 직접·보통·무기명·비밀 투표로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일반 민중이 정치에 참여한 사건이다.
 표 <4-1·2·3>은 이때의 도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영덕지방의 선거 결과이다.

 
 
  이 선거 결과에 의하여 선출된 부·군(府·郡) 대표들은 이 달 30일 도청 회의실에 모여 도 대표 1명과 각 구의 구 대표 6명을 선출하였다. 당시 영덕을 포함하는 제3구에서는 독립촉성국민회의의 김광현이 선출되었으며, 도 대표로는 한민당의 서상일이 선출되었다.
  이렇게 전국 각지에서 직접투표에 의하여 선출된 45인의 입법의원들과 미군정 당국에서 임명한 45명의 간선(間選) 입법의원들은 1945년 12월 12일 입법의원 개원식을 갖고, 미군정 당국의 남한 통치를 자문하였으며, 이후 미군정 당국에 의한 행정권의 민정화(民政化)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미군정청 입장에서는 미군정에 한국민이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형식체제를 갖추어질 수 있었다.
  입법의회의 개원식이 이루어진 1개월 뒤에는 도 및 지방의 주요관리와 지방의회 의원을 주민들이 직접 선출하기 위한 법령 126호를 공포하여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 여건의 미비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한반도에서 미군정이 실시된 기간은 1945년 9월 19일 미군정청이 발족되면서부터 시작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3년여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많은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대표적인 것들이 10·1 대구폭동 사건,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신탁통치의 찬반운동, 좌우익의 갈등과 투쟁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3년여의 짧은 기간동안에 이루어진 미군정이지만 고대의 전통사회와는 달리 서구식 문화와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등, 이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기초를 닦는 등의 순기능적인 면도 있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또 다시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 했다는 민족적 자존심의 훼손을 가져다준 시기였다. 또한 미군정은 일제 36년의 친일·부일 인사들의 미온적인 처리와 토지개혁의 미완수(未完遂), 좌우익 갈등의 배태(胚胎) 등의 많은 문제를 내포한 민족내부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 시기로 볼 수도 있다.

제2절 제1공화국시대

  제1공화국은 미군정이 1948년 8월 15일 종료되기 직전인 1948년 5월 10일 남한 단독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제헌의원들에 의하여 각종 법령과 제도가 정비된 후 1948년 8월 15일에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로 야기된 4·19혁명에 의하여 이승만 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12년여 동안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지배한 정체(政體)를 말한다.
  미군정 당국은 한반도에서 그들의 군정을 종식시키면서 한국의 통치구조를 서구식 민주주의에 의한 것으로 결정하고 국가의 통치중심을 일제 식민통치전의 국왕 중심체제에서 대통령 중심제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선출은 국회를 통한 간선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제헌의원을 선출하고 제헌의원으로 제헌의회를 구성하여 국회에서 선거에 당선된 제헌의원들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는데, 여기서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렇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건국의 기초를 닦는 한편, 북한의 남침으로 야기된 6.25한국전쟁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하면서 초대 대통령으로 훌륭하게 그 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기의 집권세력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자유당을 창당하는 등 여러가지 방법으로 집권연장을 획책하여 권좌를 유지하여 오다가 1960년의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 혁명으로 결국 권좌에서 쫓겨나게 되어 하와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한편 우리 지역의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출선거에는 당시 영덕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영덕군회장으로 있던 오택열(吳宅烈)후보가 선출되었다. 오택열 당선자는 제헌의원선거에 막강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배경을 업고 영덕군 선거구에서 단독으로 출마하여 무투표 당선이 되어 영덕군의 제1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렇게 선출된 오택열 제헌의원은 불행히도 1950년에 발발한 6.25한국전쟁 도중에 납북되어 그의 경륜을 펼쳐보일 수 없었다.
  제1공화국시대 12년 동안에는 여러 번의 선거가 있었다. 특히 건국의 기초를 닦을 초대 대통령 선거를 포함하여 4번의 대통령 선거와 1·2대를 포함한 5번의 부통령 선거가 있었으며, 제헌의원의 선출을 포함한 4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2번의 도의원 선거, 그리고 1번의 면장 선거가 있었다.
  이렇게 제1공화국시대에 실시된 각종 선거에서 우리 지역과 관련된 각종 선거결과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다만 초대 대통령과 초대 부통령, 그리고 2대 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투표에 의하여 선출되었으므로 지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다.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6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서로 큰 인물임을 내세웠으나 자유당 소속의 김원규후보가 당선되었다. 다시 4년 뒤인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1958년 5월 2일 치루어졌으나 본 군에서는 자유당 후보인 김원규후보와 2대와 3대를 연이어 출마한 무소속의 김영수후보가 출마하여 접전을 벌이는 듯 하였으나 무소속의 김영수 후보가 선거관리 담당부서에 의하여 등록무효로 결정됨에 따라 자유당의 김원규후보가 자동으로 무투표 당선이 되어 제4대 지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제1공화국시대에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에 의하여 군사·경찰·교육·행정제도 등에서 서구, 특히 미국지향적인 민주주의적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그 운영과정에서는 민주주의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가미된 왕조시대의 통치에 버금갈 정도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특히 정부 수립후 미군정 기간동안에 이루어지지 못한 친일파에 대한 엄격한 처벌의 미비와 새로운 시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전근대적 사회구조의 개혁 실패, 특히 토지제도의 개혁실패와 익숙하지 못한 서구식 각종 제도의 도입 등으로 사회 전반에 많은 갈등과 혼란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북한의 남침에 의하여 1950년에 발발한 6.25한국전쟁은 민족의 대재앙(大災殃)으로 오늘까지 그 영향을 지대하게 미치고 있다.
  그러나 제1공화국시대는 건국의 초석을 다지는 한편, 혼란한 정국을 헤치며 민주정부의 기틀을 세운 그 공로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1공화국시대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제외한 제2대·3대·4대의 대통령선거와 제3대·4대·5대의 부통령선거가 있었다. 이 당시 영덕지역의 대통령 선거결과는 표 <4-7·8·9> 와 같으며, 부통령 선거결과는 표 <4-10·11·12> 와 같다.
 
 
 
 
  제1공화국은 1948년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 후 정·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나라의 기틀을 가다듬은 후 지방자치제도를 확립하여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여 6.25한국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2년 4월 25일에 시·읍·면의원 선거를 실시하였으며, 민선 면장의 선출도 일부 이루어졌다.
 동년 5월 10일에는 도의원 선거를 실시하여 지방자치제 실시를 위한 모든 절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도의원 선거에는 자유당 소속의 김중한후보와 국민회 소속의 김용한후보가 도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표 <4-13>은 1952년 4월 25일에 실시된 초대 각 면의원 선거결과이다. 6.25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지만 지역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지역인사들이 면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당선된 인사들은 지역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표 <4-14>은 초대 도의원 선거결과이다. 자유당의 김중한후보와 김용한후보가 출마하여 두 후보 모두 당선되어 전시(戰時) 도정(道政)의 발전과 지역구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표 <4-15> 은 초대 민선 면장의 명단이다.
 1956년에 들어와서 정부는 법률 제385호와 제388호로 지방자치법을 개정하였다. 개정된 자치법에 의거하여 동년 8월 8일에 시·읍·면장 및 시·읍·면의원을 선출하는 동시선거를 실시하였다. 표<4-16>은 이때 선출된 영덕지역의 제2대 면의원 명단이다. 이어서 8월 13일에는 개정된 자치법에 의거하여 도의회 의원선거도 실시되었는데, 영덕의 도의원 으로는 자유당 소속의 김중한후보와 무소속의 박구락후보가 선출되었다.
 
 
  표 <4-18>은 1956년 8월 8일의 시·읍·면장의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제2대 각 면의 민선 면장의 명단이다. 1956년의 법률 제385호와 제388호를 개정할 때 종래의 지방의원과 시·읍·면장의 임기를 기득권 확보차원에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제2대 민선 면장의 임기시작 연도는 일정하지 않았다.
 
 
 
 
제3절 제2공화국시대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가 부정으로 얼룩지면서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전국민의 엄청난 저항이 시작되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대구와 마산에서 봉기한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서울로 역확산되면서 마침내 자유당정권은 몰락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는 제1공화국의 수반인 이승만 대통령을 하야시키는 4.19의거로 발전되어 우리나라 역사상 민권(民權)이 관권(官權)에 대항하여 승리한 최초의 쾌거인 4.19혁명을 가져왔다. 제1공화국의 대통령인 이승만은 3.15부정선거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시위가 계속되자 4월 27일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고는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으며, 집권당인 자유당도 이승만 대통령의 망명과 함께 같이 몰락하였다.
  국회에 제출된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직 사임서가 국회의 의결에 따라 수리되어 제1공화국은 끝나고 제2공화국시대의 막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정상적인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아닌 시위에 따른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한 정권의 교체와 지도자 1인의 교체에 따라 1개 당(黨)의 운명이 결정되는 정치현실은 다소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는 이후 한국의 국가통치권의 행사와 정치가 제도와 정당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져 온 역사를 만든 시초로 한국정치사에 있어서 비극이 여기에서 시작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이다. 특정 정당의 수장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뀜에 따라 정권 자체가 명멸하는 것은 그 이후 한국정치사에서 자주 보이는 현상이 되었다.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4개월 여간의 기간을 허정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에 의하여 통치되다가 마침내 민주당이 주축이 된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는데, 제2공화국은 1960년 6월 15일 국회에서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 구성된 제4대 국회가 제2공화국의 헌법을 내각책임제로 개정하고, 양원제를 채택하여 제2공화국의 기초를 닦은 후 자진해산하고, 동년 7월 29일에는 새로이 바뀐 법률에 의하여 제5대 민의원과 최초의 참의원을 선출하는 총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하면서 민주당의 제2공화국이 성립하였다.
  총선에 압승한 민주당은 8월 13일에 민주당내의 신파(新派)인 장면을 국무총리로 선출하여 내각의 책임수반으로 하였으며,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제2공화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수반으로 삼았다. 그러나 선거전부터 신파와 구파로 나누어 집권대결을 벌이며 정권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先占)하려고 이전투구(泥田鬪狗)하던 민주당내의 파벌경쟁은 제2공화국 탄생 이후의 험난한 정치여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결국 새롭게 탄생한 민주당의 제2공화국은 결국 신파와 구파로 갈라지는 내홍(內訌)을 겪으면서 1961년 2월 20일에는 급기야 윤보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구파(舊派)들이 별도의 신민당을 창당하는 지경에 이르러 그 갈등은 극에 이르렀다.
  결국 내각제 제도에 익숙지 못한 정치지도자들의 역량부족과 신파와 구파로 갈라져서 정권을 선점하려는 당내의 갈등 속에서 사회 전반적 분위기는 혼란과 무질서로 변질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대결과 불신에 따라 갈등을 증폭시켜 가던 민주당 정권은 사회 전체에 확산 되어가기 시작한 혼돈과 무질서를 지켜보던 군부에 의하여 무너지게 되었다.
  제2공화국의 몰락은 내각제 도입에 따른 지배구조의 양분과 통치권의 이원화 등과 집권 민주당내 신·구파의 갈등,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억눌렸던 사회적 욕구의 분출 등이 사회전반에 확산되면서 무질서와 혼란과 혼돈이 극에 달하여 국민들의 의식 속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권위있는 세력이 나서주길 기대하는 열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열망과 기대를 받으며,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로 대표되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새로이 정권을 탈취하였다. 따라서 민주당 정권은 불과 8개월만에 그들의 경륜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새로이 정권을 장악한 군부는 1961년 5월 16일부터 쿠데타의 지도자인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1963년 12월 17일까지 2년 7개월 여의 기간동안 군정을 실시하면서 지속적인 정권유지를 위한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여 준비한 뒤 1963년 12월 27일 정권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였다.
  군정의 쿠데타 주도자들은 1962년 12월 17일에 국민투표에 의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1963년 10월 15일에 대통령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고 이를 시행하였다. 이 선거에서 윤보선 후보와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 이외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각축을 벌였다. 선거결과로 군정의 지도자이던 박정희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4.19혁명에서 제2공화국을 거쳐 군정기간에 이르는 제2공화국시대는 막을 내리고 제3공화국시대가 개막되기에 이르렀다.
  제2공화국은 국회제도를 서구식 양원제를 도입하여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나누어 선거를 치루었는데, 참의원 선거는 시·도를 1개 선거구로 하는 대선거구제였으며, 참의원의 임기도 1·2부로 나누어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선거제도에 의하여 경상북도 선거구에서는 1·2부 각각 4명씩 8명의 참의원을 선출하였으며, 이때 1부 의원의 임기는 6년이었으며, 2부 의원의 임기는 3년으로 하였다.
  이때 우리 지역과 연고가 있는 김장섭 후보가 당시 경상북도의 제2부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제2공화국 당시에 실시되었던 제5대 민의원선거에는 모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였는데, 당시 영덕지역의 민의원 선거에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김영수 후보가 김병윤 후보와 신삼휴 후보를 24,467표로 물리치고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표 <4-19>는 제2공화국 때에 실시되었던 우리 지역의 제5대 민의원 선거결과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선된 5대 민의원들은 다음해 5.16 쿠데타에 의하여 국회 자체가 해산되게 되어 단명으로 끝났다. 

 
 
 제2공화국에서도 지방자치의 실시를 위하여 도지사 및 시·읍·면장, 도의원·시·읍·면의원 등의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이후 1961년 5월 16일의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모든 것이 무산되고 본격적인 지방자치는 90년대 이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제3대 면의원 선거는 4.19혁명에 의하여 자유당이 몰락한 후 정권을 인수하게 된 민주당 정권에 의하여 1960년 12월 12일에 실시되었다. 그러나 1961년 5월 16일에 일어난 5·16 쿠데타로 민주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민권의 승리에 따른 완전한 민주주의가 꽃피기 전에 또 다시 한국형 권위주의 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따라서 제3대 면의원 선거에 의하여 선출된 인사들은 경륜도 펴보기 전에 군정당국에 의하여 중도에 해산당하여 미쳐 그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다. 표 <4- 20 >은 제3대 지역의 면의원 당선자 명단이다.

제4절 제3공화국시대

 1961년 5.16쿠데타로 제2공화국을 전복시킨 후 정권을 잡은 군부(軍部)의 지도자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비상(非常)의 기구를 설치하여 군정을 실시하며 민정이양을 공약하였다. 이에 따라 군부는 민정이양의 제1차 준비작업으로 1962년 12월 17일에 전문과 5장 121조, 그리고 부칙 9조로 된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78.78%의 찬성을 얻어 새로운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따라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3년 9월 5일 후보등록 마감일을 9월 15일로 하고, 제5대 대통령 선거일을 이해 10월 15일자에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등록마감 결과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 이외의 5명의 후보가 등록하여 모두 7명의 대통령 후보가 선전하였다. 선거결과 근소한 표차인 156.026표 차이로 유효투표인의 46.6%의 지지를 얻은 박정희 후보가 2위인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은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된 박정희 후보가 1963년 12월 17일에 대통령직에 취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72년 12월 27일 개정된 유신헌법에 따라 박정희가 제8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까지를 제3공화국시대라고 한다.
 군정기간 및 3공화국 기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농어촌 고리채정리·농촌부업의 장려 등을 통하여 피폐된 농어촌 경제를 재건하는데 일차적 목표를 두면서, 점차 종합적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경제적 자립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결과 6.25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각종의 산업시설과 훼손된 농경지 등의 복구가 상당부분 이루어지게 되었으며, 이후 지속적인 경제개발계획으로 산업사회로 진입할 수 있는 기반을 닦게 되었다.

 
 
 
 
  제3공화국시대에는 국민투표가 2회 있었으며, 대통령 선거가 3회 있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선거가 3회 있었는데, 이 중에서 국민 전체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에 대한 결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민들이 참여한 선거결과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5·6·7대 대통령 선거결과는 표 <4-21·22·23>과 같다. 또 제6·7·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는 표 <4-24·25·26>과 같다.
  1963년 11월 26일에 실시된 제6대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김중한 후보와 박종길 후보 이외에 3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소속의 김중한 후보가 18,674표를 얻어
 
 
 
 
차점자인 자유민주당 소속의 박종길 후보를 2,546표차로 누르고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소속의 문태준 후보와 민주당 소속의 박종길 후보 이외에 2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문태준 후보가 39,506표를 얻어 차점자인 박종길 후보를 11,451표차로 누르고 제7대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편 1971년 5월 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문태준 후보와 황병우 후보 이외에 2명의 후보가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소속의 문태준 후보가 46,375표를 얻어 차점자인 신민당의 황병우 후보를 25,559표차로 누르고 2선 의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