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절 광복 이전의 임업
고대에 있어서 경제의 근간은 농업인데, 농업은 흙과 물을 이용하는 산업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농업의 필수요소인 흙과 물을 다루기 위해서는 산을 잘 다스려야 되었다. 산이 많고, 농업이 경제의 중심이 되었던 우리나라에서는 고대로부터 고려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치산치수(治山治水)를 국정(國政)의 근본으로 삼았다. 대개 신라와 고려·조선시대까지의 산은 국가의 소유였으나, 백성들은 산에서 땔감과 농용 자재 등을 비교적 자유로이 이용하였으며, 따라서 무주공산(無主空山)이란 사고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렇지만 가끔씩 국가에서 조림을 하여 산림을 보호하기도 하였는데, 신라시대인 서기 755년에 지금의 청주지방 4개 마을에 왕의 율령으로 조림한 기록이 있다. 즉 한 마을의 호구수는 약 10호인데 잣나무 42∼120본, 호두나무 48∼112본, 뽕나무 730본∼1,280본을 심고, 이들 나무의 수를 3년 마다 통계를 낸 것을 보면, 그 당시 이 나무들의 조림과 관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도 산은 국가소유였으나, 예외적으로 사찰이나 공신 등에게 일시적으로 산의 소유를 허락한 적이 있었으며, 왕권이 약해졌을 때는 권력자가 사유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려말까지는 나무의 부족은 별로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국가에서도 특별한 관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농민의 수익을 올리거나 공물 등으로 특산물을 거두기 위해 과일나무나 옻나무·뽕나무 등의 조림과 관리는 때때로 이루어 졌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산은 공용림의 성격이었으나, 차츰 산주 관리가 이루어졌다. 개국초인 태종 5년(1405)에는 공조에 산택사(山澤司)가 설치되어 금산(禁山)을 정하여 땔감채취, 개간과 화전을 금하고, 특히 소나무를 보호하였으며, 과실나무와 옻나무·닥나무 등의 특수용도에 사용되는 수종을 식재, 관리하였다. 특히 풍치보전과 보안적 목적으로 산기슭이나 물가에 나무를 심어 수림을 만들어 이를 임수(林藪)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전통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 말기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산림의 황폐는 임진·병자 두 외란을 겪으면서 그 정도가 심하여져 갔다. 전쟁으로 농촌이 피폐해짐과 동시에 산림의 보호도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주로 농터를 잃은 농민들과 산으로 피난한 피난민들에 의하여 화전을 일구는 경우가 많아 산림의 훼손이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폐단을 금지하기 위하여 효종 9년(1658)에는 화전을 금하는 교칙이 반포되기도 하였지만 그 효과는 미미하였다. 영조 19년(1734)에는 금산(禁山)에 상당하는 명칭으로 봉산(封山)이란 용어를 만들었는데 봉산은 소나무의 보호를 위한 입산금지의 산으로 『속대전(1746)』에 의하면 경상도에 7개 읍에 있었는데, 이 봉산에는 지방에 파견하는 임시직인 순산원을 파견하여 10년에 한 번 벌채하여, 재궁감(관곽재)을 고르기도 하였다. 조선의 임업정책이 이렇게 소나무에 치우친 것은 소나무가 병선(兵船)이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운반하는 세곡선의 건조, 궁궐이나 왕족과 고관의 저택이나 사찰의 중건을 위한 건축재나 관곽재로 널리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임업정책의 중심은 기존 나무의 불법 벌채여부에 따른 형벌 중심에 치우쳤고, 심고 가꾸는 일은 등한히 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선조의 묘를 잘 모신다는 것이 효의 근본임을 알고 관가의 능원묘의 해자림(垓字林)과 서민의 묘지림도 소중하게 취급되어 사유지나 묘원 주위에는 숲이 우거졌지만 전체적으로는 당시의 취사용을 비롯한 난방용의 연료가 임목이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산림의 대부분은 훼손되어 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시대 후기에는 국토의 많은 산야가 훼손되어서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산간 오지나 심산유곡에만 울창한 숲이 남아 있게 되었으며, 이 마져도 청일전쟁 이후 조선에 대한 열강의 경제적 침탈로 철도 부설권·광산 채굴권과 아울러 삼림 벌채권도 빼앗아 감에 따라 우리의 산림자원은 점차 소진되어 갔다. 일제시대에 들어와서는 일제는 식민수탈을 위하여 임업부문에서도 임야조사사업을 실시하여 막대한 국유림과 공유림 외에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산림을 거의 일본인과 총독부 소유로 넘겼다. 그 결과 전 산림의 50% 이상이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소유가 되었다. 일제는 통감부 시절인 1906년 10월에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삼림을 벌채하기 위하여 명맥만 유지하고 있던 대한제국을 협박하여 한·일간 삼림협약이 맺고는 그 실행을 위하여 통감부 영림창을 설치하는 한편, 함경북도 회령에다 제재공장을 설립하여 백두산 일대의 원시림을 남벌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 들어와서는 일제는 삼림법을 제정, 공포하여 본격적으로 한반도의 임산자원을 수탈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법은 한일병탄 후에 조선삼림령으로 이어졌다. 이 법의 주요골자는 기존 산지의 소유자가 정부에 소유사실을 신고하여야 소유권을 인정받는 계출에 의한 소유권 확립과 조림대부제도의 도입이었다. 그러나 전래의 무주공산이란 개념과 제도 자체를 알지 못하는 조선인들의 신고미필로 소유권 계출이 없는 임야는 모두 통감부 소유가 되었으며, 조림대부제도는 일본 자본가와 일본인의 산림 소유를 목적으로 한 조치였으므로 조선인들에게는 아무런 실익이 없었다. 이후 일제시대에는 한일병탄 후인 1921년에는 전국의 주요 산주들의 모임인 조선산림회가 결성되었으며, 1922년에 임업시험장이 설치되었으며, 1924년에 임야조사사업이 종료되었고, 1933년에 사방사업령을 공포하여 본격적인 사방사업이 실시되는 등 임야와 관련하여 일련의 정책들이 이루어졌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으로 목재수요가 늘자 1942년에 목재통제령을 공포하고 벌채 수속절차를 간소화하였으며, 조선재(造船材)의 공급을 위하여 풍치림·사찰림·수원림·방풍림 등의 나무도 벌채하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솔방울과 관솔의 수집을 하는 등 조선의 임야는 철저하게 훼손되었다. 이러한 일제에 의한 임야의 수탈은 전국적인 현상으로 영덕군에서도 상당한 정도의 일제의 수탈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일제 식민기의 중간인 1936년도에 발간된 「경북대감」에 의하면 일제시대의 임야면적은 총 60,708정보로 그 중 성림지 20,453정보, 치수지(稚樹地) 35,726정보, 무입목지(無立木地) 569정보, 황폐지 20.60정보, 요사방지 1,900정보로 성림지는 불과 34%인 것으로 나오는데, 일제가 본격적인 전쟁이 벌이기 전인 이 당시에도 성림지가 불과 34%에 지나지 않는데, 일제 말기에 있어서의 영덕군의 산림상태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조선시대 지역의 임수(林藪)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를 걸쳐 풍치보전과 풍해, 또는 조해(潮海)를 막거나 특정 사적의 보호와 종교적인 목적으로 임수들을 보호, 육성하여 왔다. 특히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108개의 임수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우리 지역에서도 이러한 정부의 임수의 보호, 육성책과 지역적인 여건에 의하여 군내 여러 곳에 임수를 설치하여 지역민들의 휴식처 혹은 풍해와 해풍을 막아주는 보안림으로 이용하였다. 「영영승람」을 통하여 조선시대의 군내 소재의 임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영 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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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천수(北川藪): 남천수(南川藪): |
현재의 영덕읍 화개리 운동장 일대(在縣北五里) 일명 숲지, 현 경찰서 부근에 조성된 숲으로 한말 의병장인 김하락 의병장이 이 남천숲을 근거지로 진위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在縣南三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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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 해 |
용당수(龍塘藪): |
현재 영해면 원구리의 용당 부근에 있었던 숲으로 현재는 없다. 용당숲의 용도는 당시 영해부의 부치(府治)와 넓은 들을 풍해(風害)로부터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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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수(沙川藪): |
현재 병곡면 사천리 일대에 있었던 숲으로 풍해로부터 영해, 병곡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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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수(紫浦藪): |
옛 인량리 14방(坊)의 하나였던 자포동(紫浦洞)에 있던 숲으로 인량리 전체를 보호해 주던 숲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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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송정·이송정수(奉松亭·李松亭藪): |
현재 병곡면 덕천리에 있었던 숲으로 고래불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막아 주어 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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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수(寶林藪): |
현재의 창수면 보림리의 동네 입구에 조성되었던 숲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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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곡수(美谷藪): |
현재의 창수면 미곡 1리의 미산(眉山)과 숲안 못 일대에 조성되어 있던 숲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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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두정수(林頭亭藪): |
현 영해면 원구리 앞의 방축을 따라 괴시리까지 이어져 영해평야를 보호해 주던 숲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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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구수(元邱藪): |
일명 동숲(洞藪)이라고 하며, 현 영해면 원구리의 중구봉 아래에 있던 숲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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